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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My Hero for.ChoruNim
고백했다. 해버렸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봄, 겨우 한 살 더 먹은 것가지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질러버린 건. 아직도 멎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고, 숨을 토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버린걸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비겁하게, 선배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억지를 부리고 말았다.
'당신과 나 사이엔 아무리 애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 있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거리는 줄어들지 않겠죠.'
손을 잡지도 못하고, 겨우 손가락 하나를 건 채 떨리는 숨과 함께 내뱉은 목소리에 당황하던 얼굴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전 포기가 빨라요. 그러니까 이 관계를 이어가려면, 모리사와 선배가 절 더 좋아해야 해요.'
꼴사납게 울먹이고 말았다. 고백이라기보단 협박에 가깝다고, 미도리는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기 싫다. 정말로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주르륵,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은 미도리는 긴 다리를 접어 끌어 안았다. 이래선 졸업식 날 선배를 배웅하러 갈 수도 없다.
대답을 듣지 않고 도망친 건 자신이지만, 끝내 당황 그 이상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당신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좋은 사람이니까 나 같은 건 어울리지 않겠지. 아마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 상냥함에, 그 온기에 기대어 투정을 부리고 있던 건 나니까.
외딴 섬에 홀로 표류한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도 그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지만 한 번 달리기 시작한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을 독차지할 수 없는 걸까. 용기가 없어서, 의욕이 없어서, 차라리 그런 이유였으면 좋겠다. 그럼 누군가를 탓하며 숨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모리사와 선배. 다시금 떠오르는 그 난처한 얼굴이 상처를 후볐다. 마음이 보인다면 제 마음은 아마 난도질이 되어 너덜너덜할 거라고 자조하며 머리를 숙였다.
숨기고 있던 비밀을,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걷잡을 수 없는 마음과, 아린 첫사랑과, 짝사랑과, 모리사와 선배. 그 모든 것의 끝에 있는 한 가지 소망. 그리고, 그의 그 상냥한 면이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자신.
아직 차가운 바람이 복도에 스산하게 불었다. 어쩌면, 어쩌면 잡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시끄럽기로 유명한 유성대의 그룹 라인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야 두 명이나 졸업하니까 당연하겠지만.
"죽고 싶다...."
말버릇이나 다름 없는 마음을 입에 담으며, 미도리는 차가운 복도에서 몸을 일으켰다. 답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온다 해도 어떻게 하면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하며 최대한 돌려말하는 거절이 전부다. 알고 있다. 아무리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한다 한들 마음을 거절하는 건 거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연의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다. 첫사랑은 더더욱. 이 마음은 얼마나 더 자신을 괴롭힐까. 마음에 담고 있는 것보다, 거절을 기다리는 게 더 괴롭다는 걸 통감하며 길을 걸었다.
차라리 지나가는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가고, 벚나무는 따스한 햇살을 받아 여린 분홍 꽃잎을 활짝 피워냈다.
한숨이 기침처럼 흘러나왔다. 죽고 싶었다.
왜 시간은 멈추지 않는 걸까. 기어이 졸업식 날이 되고야 말았다. 정말로, 정말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자다가 숨이 멈추길 그렇게 기도했는데 어김없이 해가 뜨고, 모닝콜에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씻는 내내, 옷을 입으면서, 현관 앞에 서서, 학교로 가면서, 교문에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만둘 수 있다고 수백번도 넘게 갈등했다.
피하면 그뿐인데, 그래도 보고 싶었다. 미련하고 한심하지만 마지막이니까. 이걸로 끝이니까.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색한 사이가 되더라도, 시간이 가며 잊혀져 선배는 그렇게 좋아하던 특촬물에 나오고 나는 비록 멀리서 지켜볼지라도 당신의 시간에 내가 존재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수도 없이 받은 고백 중에 하나일지라도, 실수나 장난으로 치부할지라도 타카미네 미도리라는 사람이 모리사와 치아키를 좋아했던 시간은, 그 마음은 진짜였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선배의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처음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어설픈 나의 마음이 못 미더울지라도 나는 진심이었고, 그건 선배가 학교를 떠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준비했던 고백은 하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심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다시 얼굴을 보면 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걸음은 착실히 그를 향해 갔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모리사와 선배.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이제 와선 알 수 없지만 할수만 있다면 떼를 쓰며 매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선배가 날 봐준다면 얼마든지.
왁자지껄한 교실 앞을 서성이다 문득, 제 손이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꽃다발을 사오면 늦을까.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들자 급우들과 장난을 치며 웃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아아, 당신은, 선배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이렇게나 아픈데, 고백한 그날부터 내내 잠을 설치고 당신 생각에 괴로워했는데 어째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라고, 그렇게 쉽게 마음의 짐 한 점 없이 지울 수 있는 모양이라고,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힘겨웠다.
말 한 마디. 하다못해 미안하다는 짧은 메세지 한 줄이라도 주었으면. 그랬으면 나는. 눈이, 코가 시큰거린다. 다시금 시야를 가리는 눈물에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뒤에서 당신의 등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나는, 비겁한 겁쟁이니까 태양같은 그가 돌아봐줄 리 없다.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바쁜 학부형과 기자들 사이에서 나와 한적한 복도를 걸었다. 시노부를 비롯한 유성대 멤버들에게서 전화며 라인이 빗발쳤지만 받지 않았다.
그렇게 선배는 웃는 얼굴로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학교를 떠났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어서, 용기를 낼 수가 없어서 안녕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안녕. 나의 히어로. 안녕, 나의 선배.
"역시, 여기 있었군. 타카미네. 그래도 대장인데, 인사도 안 하고 보낼 셈이었나?"
처음 그 사람이 나를 불러주었던 그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면 그가 운명처럼 서있고, 바람이 불어와 꽃잎이 휘날렸다. 꽃다발도, 재킷도 없이 당당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당신.
"고백에 답도 안 하고 떠나는 건 히어로답지 못하겠지. 그래서, 답을 하러 왔습니다."
고작 한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 숨을 들이마시며 더없이 진지해지는 얼굴, 한 박자 쉬고 흘러나오는 목소리. 마지막으로 슬며시 번지는 미소.
나는 그 답을 듣고, 조금 울었다.
B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