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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이글루이] Agent
요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짬이 안나고 그러는 바람에 옛날에 쓰다 만 거라도 올려놓고 갑니다ㅠ
연재물 업데이트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ㅠㅠㅠ
그를 만난 건 처음으로 참석한 파티에서 였다. 연미복에 보타이를 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파티장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고, 전에 없던 유망주를 맞는 상류층 사람은 너무나 낯설었다.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해선 안 되는 중요 인물이라 말을 걸어오면 걸어오는 대로 응대를 하다 보니 혀가 말을 하는지 손에 든 샴페인은 어떤 맛인지 하나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찌어찌 쏟아지는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리려, 기왕이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길 바라며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간 테라스에 그가 있었다.
언뜻, 눈물이 어린 걸 본 것 같았으나 그는 빠르게 자신을 추슬렀다. 그 역시 이런 상류층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등을 돌려 나가는 대신 손수건을 건넸다. 목을 묶은 타이도 없이, 와이셔츠 단추를 푼
처연하고 가련한, 갓 대학에 들어간 것 같은 청년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아. 릭. 릭 톰슨이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다가가자 입술을 물었던 그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우는 남자가 예뻐 보일 수도 있다니.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이런 청년을 울리다니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냥, 그런 거죠. 뻔한 이야기에요.”
눈물이 고인 눈을 얇게 휘며 웃는 순간 릭은 숨을 집어삼켰다.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갔을 뿐인데
“참. 전 루이스에요. 그냥 루이스. 미리 말씀드리자면 어느 대단한 집안 아들이라서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성이라고 부를 게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 그렇군.”
선이 곱고 청초한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첫 번째, 그가 손을 내밀었다는 걸 깨달은 게 그 다음.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처음엔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어서 몰랐는데 예쁜 얼굴만큼이나 손도 작았다.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건 좋았다. 주책없이 심장이 뛸 정도로.
“손수건은 어쩌죠.”
“아, 괜찮소.”
“그럴 줄 알았어요. 보통 이런 파티에 오는 분들은 손수건 따위엔 연연하지 않거든요.”
손수건이 제아무리 비싼들 이 남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그게 얼마든 아깝지 않았다. 대신 여기 오는 분들. 이라는 말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 가여운 청년이다. 그런 사람의 아픈 과거를 캐묻는 게 신사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입을 뗐다.
“많이 만나봤소?”
“이런 곳에 있으면 싫어도 만나게 되죠.”
“그럼 여긴 왜....”
“...데려와준 사람이 있어요. 보통 이런 곳은.... 혼자 못 오거든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미안하오.”
순진한 청년을 꼬셔서, 저 좋을 대로 가지고 놀다가 가차 없이 버리다니. 아픈 상처를 되새기듯 드문드문 말을 잇던 루이스는 자조하듯 웃었다.
“당신이 미안할 건 아니죠. 끝났다는 건 알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와본 거예요.”
“그런 나쁜...!”
그 쓴웃음이 더 애처롭고 가련해 속으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헐뜯던 릭의 입에서 결국 한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루이스는 움찔 몸을 굳히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바라봤다. 그 눈에 어린 눈물과, 상처 받은 눈빛에 화를 내려던 릭은 입을 다물었다.
나쁜 사람에게 놀아나다 버려졌지만, 그래도 마음이 남은 모양이다.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 끝내 상처밖에 남지 않은 청년을 보고 있자니 만난 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은 릭의 마음이 아려왔다. 한 박자 늦게 주제넘은 말이었다는 걸 깨달은 릭은 황급히 말을 고치려 했으나 루이스가 다 포기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너무 순진했나 봐요.”
“루이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소.”
“...감사합니다.”
눈물을 머금은 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아련하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소?”
“...글쎄요.”
“여기. 내 명함이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아, 그, 그런 뜻은 아니니까 오해 말고! 순수한 호의니 거절하지 마시오.”
“.......”
루이스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릭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순박하고 귀엽다.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보니 오래 전 가슴을 설레게 한 첫사랑이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맑은 청초함이 보석보다 눈부시다. 루이스의 미소는 심장을 세게 뛰게 하는 한편 마음을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경계하느라 굳어진 마음과 얼굴 근육이 슬슬 풀어진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갈게요.”
“그러시오.”
“진부하지만 이만한 핑계도 없네요.”
“하하하. 기다리고 있겠소.”
릭은 손을 흔들어 테라스를 나서는 루이스를 배웅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때? 그 과장님, 넘어온 것 같아?”
“거의.”
“거의?”
소파에 길게 누워 다리를 까딱이던 이글은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동료의 서늘한 무표정을 보며 킬킬 웃었다. 루이스의 재킷이 머리 위로 날아와 얼굴을 덮쳤으나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거의는 무슨. 보니까 완전 홀딱 반했던데. 캬. 나도 깜빡 속을 뻔했지 뭐야. 안 그래, 영웅님?”
“테라스 훔쳐볼 시간도 남고 좋았겠네.”
“그럼.”
몸을 일으킨 이글은 재킷에 이어 셔츠도 벗기 위해 손목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등 뒤에 섰다. 허리와 배를 감싸듯 안고 향수조차 뿌리지 않은 목덜미에 코를 묻자 어느 눈 나린 새벽의 냄새가 나리는 것 같았다. 아득하고, 아찔한 기억 속 풍경을 떠올리고 손을 미끄러트리며 입을 벌리자 루이스가 이글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아직 임무도 다 안 끝났어.”
“싸늘해.”
“누구랑 달리 충동적이지 않으니까.”
깔끔하고 단호한 말과 달리 루이스는 얇게 눈을 휘며 웃음을 흘렸다. 아까 그랬듯 순진한 미소도, 전부를 걸고서라도 안고 싶어지는 요염한 미소도 아니었지만 뻐근해진 이글의 아랫도리를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충동이라니. 너무하네. 뭐, 사실이긴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편이라고 해줄래?”
“그러니까 그 본능 좀 어떻게 해봐. 비벼볼 게 따로 있지.”
우뚝 선 물건으로 엉덩이를 문지르던 이글은 셔츠 앞섶의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타이트한 요원복과 하네스가 더 금욕적으로 보이고, 그게 더 꼴린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난 지지리 말 안 듣는 애라서, 말을 잘 듣게 하려면 상이 필요한데.”
“사탕이라도 물려주면 되겠어?”
“사탕 말고.”
“...너 하는 거 봐서.”
이글은 입꼬리를 올렸다.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입술이 맞닿고, 그 다음은 전투와도 흡사한 섹스가 이어졌다.
언제 봐도 잘 빠진 등이다. 이글은 행위를 마치자마자 침대를 빠져나간 동료 겸 파트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작게 숨을 토했다. 달달한 말이나, 간지러운 애교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할 것만 마치고 가는 건 역시 조금 쓸쓸하다.
오랜만에 만난 엉덩이는 해후의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까만 슬랙스와 바지 안으로 사라지고, 루이스는 이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차갑기가 아주 얼음 저리 가라다. 남극도 이것보단 덜 추울 거다. 하물며 펭귄도 온기를 나누는데.
원망 반, 아쉬움 반으로 루이스를 바라보던 이글의 머릿속에 문득 루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멀리서 입술을 읽은 것뿐이지만,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기엔 신경이 쓰였다. 애초에 신경이 안 쓰였다면 그런 말 한 마디가 다시 떠오를 리도 없었다.
“아까 그 나쁜 사람.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 미세하나마 등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픈 구석을 찌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고개를 돌린 루이스의 서늘한 눈빛에 이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잘못 건드렸다. 이건 좀 위험할 지도.
“홀든.”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관 둬. 홀든이 뭐야, 소름끼치게.”
“누가 먼저 소름 끼치는 얘길 꺼냈는데. 적당히 해. 다음엔 잡혀도 안 빼줄 거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이 남자는 결국 구하러 올 것이다. 연합의 영웅, 루이스는 그의 이명이 날리는 냉기와 달리 그리 모진 사람이 못 되니까. 루이스를 보며 누워있던 이글은 피식 웃으며 턱을 괬다.
“걱정 마. 영웅님은 바쁘니까 안 와도 이해할게.”
“안 간다니깐.”
“그럼 큰 형 불러야지 뭐.”
“누군 좋겠네. 양 쪽에 발을 다 걸쳐둬서.”
“그래도 가운뎃다리는 너한테만.... 억...! 잠깐, 잠깐!”
“아예 못 쓰게 만들어줘?”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조준이다. 이래서 특수요원은 무섭다니까. 그만큼 스릴도 넘치는 건 좋지만. 이글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섹스도 질펀하게 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최후네. 그래도 마지막에 보는 게 네 얼굴이고.”
질색하는 표정이 가관이다. 소리내어 한바탕 웃고 싶은 걸 꾹 참고 양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루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탄창, 비었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네가 대상도 아닌 사람한테 총을 겨눌 리가 없잖아?”
깊은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총을 내렸다. 반은 감이었지만, 정말 쏠 마음이 없었는지 빈 탄창을 빼낸 루이스가 총알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수류탄이니 자동소총이나 하는 것들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지만 총기를 손질하는 루이스를 보는 건 좋았다. 칼을 갈고 닦는 무인과도 같은 자세로 침착하게,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하면서 비통함을 곱씹는 그 처연한 얼굴이 좋았다. 보고 있으면 질릴 틈이 없다.
그 얼굴이 보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정말 와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더더욱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글은 다시 고개를 드는 탐욕과 갈증에 입술을 핥으며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매끈한 등과, 희고 가는 목덜미. 정말이지, 엎어놓고 박고 싶어지는 뒷태다. 저 목에 이를 박아 자국을 새기고, 울긋불긋한 멍을 남기고 싶어 몇날 며칠을 애태우며 공을 들였던가.
이글이 눈으로 다시 한 번 행위를 되새기는 동안 탄창을 채우고 무기의 상태를 확인한 루이스가 그 생각의 흐름을 끊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봐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어디까지 봐주나 간보지 말고 물러나. 다신 안 도와줄 거니까. 지금 하는 짓도 그만 두고.”
“하하. 기억해볼게.”
하여간,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다니깐. 이글은 루이스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입을 비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