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도 박도 못하는 실책. ‘쉬레’ 벨져 홀든은 무력하게 아군의 HQ타워가 부서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고작 8강에서, 그것도 클린스코어로 패배란 홀든 attackers는 물론 벨져 홀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아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제 옆에 앉아있어야 할 그가 선수 부스 밖 관객석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팀원들의 얼굴과 함께 끝자리에 본 적도 없는 놈이 하나 앉아있는 게 보였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며 뒤돌아서는 게 보였다. 벨져는 해설들이 뭐라 떠들건 상관하지 않고 일어섰다. 뭔가 잘못됐다. 이겨야 하는 게임이었고, 그는 게임을 끝내고 무심한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함께 승리를 기뻐해야 했다. 루이스. 프로게이머 ‘프로즌’의 자리는 ‘쉬레’의 옆이었다. 벨져는 삼년이 넘는 시간동안 루이스와 호흡을 맞췄다. 그만큼 자신의 플레이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벨져는 다급하게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관객석과 선수를 가로막은 방음 부스의 벽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는 계속해서 멀어졌고 벨져가 루이스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는 찰나 아직 끼고 있던 헤드셋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벨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프로즌의 주캐, ‘Ice’의 패배 보이스였다.
‘Ice’가 두 사람에게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벨져에겐 첫 패배였고, 루이스에겐 프로게이머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Ice를 들고 져버렸다. 벨져는 이게 루이스 은퇴 후 첫 경기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있을 수 없다. 이젠 내가 뒤를 봐줄 수 없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며 쓰게 웃는 그에게, 너에게 기적을 선물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벨져였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루이스가 없는 첫 경기에서 ‘Ice’로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너무나 잘 알았다. 루이스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Ice’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루이스와 ‘Ice’를 연관 지어 전장의 영웅, 역전의 희망이라고 부르곤 했다. 루이스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쑥스러워했지만 벨져는 그 별명이 루이스와 ‘Ice’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Ice’를 들고 루이스가 보는 앞에서 져버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있을 수 없는 스코어에 헛웃음을 흘렸다. 견딜 수 없는 굴욕감과 분노에 방음부스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루이스를 잡으러 나가려했지만 부스엔 문이 없었다. 사방이 막힌 투명한 상자 안에 갇힌 벨져는 결국 루이스가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조금 전까지 있었던 팀원들과 스태프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루이스가 은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벨져는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한낱 꿈.
그걸 깨닫자 번쩍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천장,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 벨져는 바로 핸드폰을 찾아 홀드 버튼을 눌렀다. 오전 5시 15분. 마지막 게임을 하고 잠들기 전이 3시였으니 두 시간쯤 잔 셈이다. 답답하게 막혀있던 숨을 내뱉은 벨져는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로 훌쩍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곤히 잠든 룸메이트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루이스.”
잠기운에 잠긴 목은 깔끔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끝이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벨져는 상관하지 않고 루이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성인 남자 둘이 함께 눕기엔 좁은 침대였지만 루이스는 잠결에도 몸을 모로 뉘어 벨져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벨져는 냉큼 자리를 차지하곤 루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느껴지는 바디샴푸의 청결한 냄새와 따끈한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간절했던 그의 체취에 불안으로 날뛰던 가슴 속의 폭풍이 가라앉았다.
“루이스.”
한 번 더,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자 루이스가 잠투정을 부리듯 무어라 웅얼거렸다. 벨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콧잔등과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 맞추곤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지 않으면 쉬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취해서 고백하고 사귀게 된 지 고작 세달 밖에 안 된 연인이자 누구보다 믿음직한 파트너.
벨져는 루이스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건 전부 루이스가 은퇴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한계가 오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 말이 은퇴의 밑밥이란 걸 모를 정도로 벨져는 멍청하지 않았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은 필요 없다. 벨져는 자신의 팬들이 저를 위해 드는 치어풀을 떠올렸다. 사석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 꼭 맞는 말이었다. 벨져는 제게 팔을 둘러오는 루이스의 잠든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직 그를 그리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오전 은행 업무를 마무리지어놓고 바로 코어레너드의 행정청사로 향했다. 루이스는 아침이 힘들다며 점심때나 출근해 오후까지 일을 하다 다시 서점으로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오후에 오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처음 며칠은 그를 피해보려고 오전에 일을 하고 루이스가 출근하기 전에 은행으로 가버리곤 했지만 안 본다고 꽃을 토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안 보이니 더 그리워지고, 비어있는 그의 자리를 볼 때면 애달픈 마음에 얼음이 성겼다. 안 보고 괴로워할 바에야 보면서 괴로워하는 편이 낫다. 모처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기도 내심 아깝기도 했다. 루이스는 오전에 일을 하지 않는 대신 오후 늦게까지 일을 하는 편이었고, 그러다보니 루이스는 아침과 점심을 거르는 일이 많았다. 다이무스는 은행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대신 그와 먹을 생각으로 샌드위치를 두 개 사서 코어레너드로 향했다.
한창 점심 시간이었기에 아직 오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루이스가 퀭한 얼굴로 다이무스를 맞았다.
"아, 안녕하세요. 다이무스씨."
"일찍 왔군."
"어제 연합에 일이 좀 생겨서 공성 끝나고 바로 불려갔었거든요."
"눈이라도 좀 붙이지 그러나?"
"아뇨, 한 번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럼 들겠나?"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지친 얼굴과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샌드위치 봉투를 건네자 루이스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에 핏기가 가신 게 안쓰러웠지만 더 신경을 쓰기 뭐했다. 아무리 피곤한 상태라고 해도 상대는 결정의 루이스, 과한 호의를 내비쳤다간 그가 제 마음을 알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스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는 걸 확인한 다이무스는 제 몫을 가지고 책상에 앉았다.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무실엔 단 둘 뿐이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이 갔다. 루이스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눈을 꿈벅이다 샌드위치의 끄트머리를 물었다. 오물오물거리면서도 반쯤 눈꺼풀이 내려온 게 퍽이나 졸린 모양이었다. 맛을 느끼면서 먹긴 하는 건지,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길 반복하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다이무스는 제 몫의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눈에 힘이 들어갔지만 먹는 게 시원치 않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이무스는 걱정과 함께 입 안 가득 샌드위치를 욱여넣고 열심히 씹었다. 멀쩡하게 먹다가 토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잠시 얼음꽃이 올라오는 걸 상상한 다이무스는 인상을 구기고 머릿속에서 상상을 지워냈다.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다. 다이무스는 남은 샌드위치의 반쪽을 씹어 넘기곤 일어났다. 촉촉한 흰 빵에 싱싱한 양상추와 토마토, 올리브를 넣고 갓 구운 베이컨과 계란을 곁들여 특제 소스로 완성한 카페 리버포드의 샌드위치는 주변에서도 평판이 좋은 일품이었다. 물론 그 가격을 하긴 하지만, 간단히 식사를 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식사 중엔 물이나 차를 마시지 않는 다이무스는 샌드위치 봉투를 정리해 버리곤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흘긋 루이스 쪽으로 눈을 돌리자 아직도 한 조각을 다 못 먹고 조금씩 우물거리는 게 보였다. 저렇게 먹어서 체력 유지는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전자에 한 사람 분의 물을 더했다. 급탕실에 준비되어있는 차의 종류라고 해봐야 홍차 티백, 커피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홍차 캔은 텅 비어있었다. 레몬이나 오렌지 등의 과일차에 꿀을 듬뿍 넣어 마시면 피로회복에 좋지만 일에 찌든 남자들만 가득한 사무실에 거기까지 세심함이 미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다이무스는 아쉬운대로 머그컵 두 개를 꺼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잠시 장에 기대어 루이스를 보는데, 드디어 샌드위치의 한 조각을 다 먹은 루이스는 남은 한 조각을 드는 대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다이무스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피곤해서 입맛이 없다 해도 그렇지, 식사는 자기 관리는 말 할 것도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야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다이무스는 이번주에 예전되어있는 공성전 스케줄과 참가 인원 명단을 떠올렸다. 오늘과 내일은 루이스가 출전하지 않고, 서점도 안 나가는 날이니 이쪽 일만 끝나면 들어가 쉴 수 있을 터였다.
물이 끓는 소리에 등을 돌려 커피를 내리던 다이무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돌아봤다. 여전히 반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서류를 보고 펜을 놀리고 있는 게 안쓰러워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려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손을 멈췄다. 루이스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느샌가 제 책상에 달칵 컵을 내려놓는 건 루이스였고, 다이무스는 받아 마시는 쪽이던 탓이었다. 홍차라면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걸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지만 루이스가 커피를 마시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제 취향대로 진하게 내린 커피 향이 고소하게 퍼지고 있음에도 루이스는 이쪽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다 여전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루이스를 돌아봤다. 같은 공간에 단 둘이 있음에도 마주하지 않는 시선이, 꽃을 토할 정도로 좋아하면서 차를 마시는 취향 하나 모르고 있던 자신이 착잡했다. 그는 제 사소한 취향이나 습관을 알아채고 한 박자, 혹은 반 박자 앞서 배려해주곤 했다. 비록 차를 타준다거나 서류를 읽기 쉽게 정리해서 준다거나 설명이 필요한 일은 꼭 눈을 마주쳐가며 하는 사소한 친절에 불과하지만, 그런 친절도 다이무스에겐 크게만 느껴졌다.
빈 머그잔 하나를 다시 찬장에 올려놓은 다이무스는 제 몫의 커피를 들고 자리로 향했다. 얼음꽃을 토할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가슴 한 켠이 콱 막힌 것마냥 답답했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뜨거운 물이 상처에 닿아 쓰라렸다. 이도 저도 되는 일이 없다. 다이무스는 자조했다.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는 딱 제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큼 썼다.
애초에 바라면 안 되는 걸 바라고 있으면서 달디 단 디 상황에 취해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꽃이 나오지 않는 것은 지금 제가 느끼는 것이 그에 대한 애달픈 사랑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이무스는 다시 한 모금 커피를 머금었다. 본분을 잊어선 안 된다. 제가 여기 와있는 건 루이스와 사내연애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코어레너드의 행정사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다이무스는 서류철의 위에 붙은 루이스의 메모를 떼어냈다.
서류를 보고 있으니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와 인사를 건넸다. 다이무스는 그들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 괜한 생각은 일에 빠져있으면 잠시나마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검토를 마친 서류를 내려놓고 뻐근해진 눈을 감았다 뜨니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이며 졸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도 아니고 한 손엔 펜을 들고 고개를 수그린 채 그러고 있는 게 퍽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은 각자 제 할 일 하느라 바빠서 루이스가 졸고 있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라 다이무스는 주변을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내려둔 커피는 커피포트에 담겨있던 덕에 아직 따뜻했다. 찬장에 올려두었던 머그를 꺼내 커피를 따르기 전 뜨거운 물을 부어 컵을 데운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다 설탕을 두 스푼 넣고 적당히 휘저었다. 딱히 그의 차 취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카페인으로 잠을 깨고 머리에 당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탄 커피라고 합리화한 결과였다. 머그를 들고 루이스의 책상으로 가는 몇 걸음, 다이무스는 긴장에 마른 침을 삼켰다.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자 루이스가 화들짝 놀라 퍼드득 튀었다. 그 바람에 무릎으로 책상을 쳐서 커피를 쏟을 뻔 했지만 아직 다이무스가 손잡이를 쥐고 있던 덕에 기껏 해놓은 서류 위로 커피가 얼룩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피다 다이무스를 보곤 눈을 깜박였다.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그의 손잡이를 놓았다.
"아, 하하. 감사합니다."
잠시 들었다 놓는 바람에 테이블에 작은 소리가 나고, 뜨끈한 김이 오르는 커피를 본 루이스가 민망한 듯 웃었다. 슬쩍 눈을 휘며 짓는 눈웃음에 다이무스는 숨을 멈췄다. 차오르는 감정이 목구멍과 가슴을 두드리는 불길한 예감에 주먹을 쥔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서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제 자리에 놓아둔 서류철을 집어들고,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 꾸역꾸역 나오려는 걸 삼켰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자기주장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이무스는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트리위저드 시합 덕에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연회가 열렸건만, 찾는 사람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잘나신 호그와트의 챔피언님은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고, 망나니 동생녀석은 제 기숙사 녀석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벨져가 파트너로 데려왔던 여자애는 덤스트랭의 멍청이들에게 춤신청을 받아 홀에서 춤을 추는 중이었지만 벨져는 더이상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보여주기 위해 데려온 파트너였고, 두 곡이나 췄으면 충분히 가문의 영광이 될 터였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뒤로 묶고, 무도회 의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벨져 홀든은 열 넷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넘쳐흘렀다. 순수혈통 가운데서도 홀든이라 함은 귀족 중에 귀족이었고, 형제들 가운데서도 벨져는 귀족이란 어때야하는가를 몸소 보여주는 쪽이었다. 우아하고, 고상하고, 품격이 넘치는 귀족. 전쟁을 겪은 후론 머글태생이나 혼혈이라고 하는 잡종들이 많이 섞여들었지만 다른 순수혈통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벨져는 그들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벨져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격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편이었고,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잡종들과 순수혈통은 현격하게 구분되기 마련이었다. 불안을 느끼는 건 그들이 혈통만 믿고 나대는 나약하고 저급한 멍청이들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다. 물론 개중에도 조금은 봐 줄만한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벨져는 계단을 올라 연회장 안을 다시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기껏 옷까지 신경써서 챙겨줬건만 일찌감치 달아난 모양이었다. 벨져는 팔장을 끼고 계단을 내려가다 낄낄거리고 있는 동생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으악! 뭐하는 짓이야, 작은형!"
"루이스는."
"루이스? 우리 영웅님은 안 온댔어. 지금쯤 기숙사에 있거나, 아니면 도서관에 틀어박혀있겠지. 하여간 재미가 없다니까~."
예상대로의 대답에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썼지만 이글은 개의치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뺨도 붉고, 평소보다 더 들뜬 모양새가 한 잔 한 게 분명했다. 고작 열 세살짜리한테 누가 술을 준 건지, 다이무스가 바빠서 신경쓸 틈이 없으니 바로 꾀를 부리는 막내동생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자 갈기는 벌꿀색~."
"흥. 사고 치지 말아라."
"에이, 작은 형도 참. 됐으니까 가 봐."
"거기 너, 이리로."
루이스를 찾는다며 놀리는 대신 순순히 기숙사 문의 암호를 말해주는 게 아무래도 이미 살짝 맛이 간 모양이라 벨져는 주변을 둘러보다 옆 테이블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녀석을 불렀다. 턱을 치켜들고 손가락을 까딱이는 게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벨져는 상급생에게도 하대를 하는 사람이었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기자에게 둘러싸여 이글이 무슨 짓을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뻔했고, 루이스라면 또 모를까 그리핀도르의 다른 멍청이들은 같이 사고를 치면 쳤지 말릴 종자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빌어먹을 자식이 여기 있었으면 이럴 필요도 없지만, 하여간 만악의 근원같으니. 벨져는 한숨을 쉬는 대신 혀를 찼다. 그래도 녀석들과 자주 어울려다니던 후플푸프의 꼬맹이를 붙여두면 집안 망신은 피하겠지 싶었다. 벨져는 벙쪄서 달려온 녀석에게 이글을 잘 지켜보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연회장을 뒤로했다.
그리핀도르 남자기숙사의 뚱뚱보 여인은 예복을 차려입은 벨져를 호들갑으로 맞았다. 그걸 상대하느라 골을 썩이다 겨우 안으로 발을 들이자 캄캄한 어둠이 벨져를 맞았다. 밝은 조명에 익숙해진 눈이 적응을 못 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벽을 짚고 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이 어른거리고, 푸르스름한 달빛을 맞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먼 곳을 향하는 눈동자가, 갸름한 턱선과 목이 벨져의 눈을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스웨터에 면바지 차림이건만 요정 벨라의 피를 이었다는 보바통의 챔피언같은 건 순식간에 지워져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창틀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창밖의 눈을 보는 루이스는 어둠 속에 홀로 빛나고 있었고, 벨져는 그를 보며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제게 향하는 눈동자에 숨을 집어삼켰다.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야, 벌써 돌아왔..., 벨져?"
"하,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시길래 나오지도 않나 했더니. 파트너를 못 구해서 틀어박힌 거냐?"
"그러는 넌?"
별로 달갑지 않은 루이스의 반응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아무래도 그리핀도르의 녀석들이 기숙사 안에 무슨 향이라도 피워놓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녀석을 보고 두근거릴 리가 없거니와, 아름답다고 생각할 리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께서 친히 납셔주셨는데 반가워하지는 못할 망정 떨떠름한 얼굴을 한 루이스가 흘러내린 스웨터의 소매를 올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등을 덮고 있던 스웨터의 소매가 올라가며 드러난 손목에 침을 삼키다 여기까지 온 목적을 떠올리고 눈에 힘을 줬다.
"사람의 호의를 무시한 정의로운 그리핀도르의 영웅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겨우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겨우라니, 네 녀셕! 그게 얼마짜린데!"
벨져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며 빈정거리자 루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순간 열이 뻗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이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두어번 깜박였다. 벽난로의 불빛이 닿는 것도 아니고, 보름인 것도 아닌데 속눈썹이 떨리는 것까지 선명했다.
"오다 주웠다며."
"윽...!"
허를 찔린 벨져가 그대로 움찔했다. 영웅이네, 뭐네 해도 루이스는 성조차 없는 고아였고, 당연히 이런 연회에 입을 좋은 예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안 그래도 트리위저드 시합때문에 바빴고, 이글은 종일 같이 다닌다 해도 그런 데 신경쓸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레번클로의 반장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녀가 챙겨줬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녀 성격에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전남친에게 예복같은 걸 챙겨줄 리 없었다.
더구나 루이스는 무도회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다들 무도회 파트너를 구하느라 바쁠 때도, 여학생들이 각자 드레스를 준비하느라 분주할 때도 다이무스랑 도서관을 향하는 게 고작이었다. 트리위저드 시합이 시작된 이후로 다이무스 홀든이 친동생들보다 그를 더 가까이 두고 자문을 구한다는 건 호그와트 학생은 물론 보바통과 덤스트랭의 학생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후줄근한 꼴로 연회장에 나타난다면 다이무스는 물론 홀든과 호그와트의 위신에까지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제 형은 물론 교수들에 본인까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길 한 번 이겼던 녀석인데, 얼굴도 멀쩡한 녀석이 후줄근한 꼴로 다니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결국 벨져는 자신을 위해서,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 내키진 않지만 따로 주문을 넣었다. 그게 벌써 이주 전의 일이었고, 지난 주엔 벨져 앞으로 도착한 옷상자를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루이스에게 던져주었다. 죽어도 널 위해 준비했으니까 곱게 입고 나오라는 말은 할 순 없었기에 별 걸 다 생각하다 뱉은 말이 오다 주웠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믿다니. 이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멍청한 수준이 아닌가.
말문이 막힌 벨져가 초조해진 나머지 입술을 핥았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꺼내 보지도 않았나?"
"오다 주웠다며."
그걸 믿냐, 이 멍청아!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어떻게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지? 차라리 이글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다못해 이글 녀석이 이런 소리를 하면 한 대 칠 수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상급생이고, 그리핀도르고, 루이스였다. 어느 기숙사가 안 그러겠냐만은 슬리데린이 그리핀도르를 건드려봤자 오랜 앙금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벨져는 가문의 위신과 형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참았다. 참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잡종새끼같으니."
"시비를 걸러 여기까지 온 거라면 돌아가."
"하..., 사람이 기껏 준비해줬으면 고맙단 말은 못 해도 입어는 보는 게 예의 아닌가!"
벨져는 어느새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자식을 상대하고 있으면 느는 건 짜증과 두통밖에 없다. 루이스는 창틀에 앉은 그대로 미간을 찌푸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괘씸하기 짝이 없어 더 성질이 뻗쳤다.
"알았어. 입어보면 될 거 아니야."
"완전 엎드려 절받기가 따로 없군."
"절을 받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빈정 상하게 비비 꼬지 말고."
루이스는 가볍게 창틀에서 뛰어내려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아래에서 일주일 전 건네준 상자를 꺼낸 루이스는 무표정으로 뚜껑을 열었다. 벨져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재질의 예복은 얼마 전 퀴디치 선수복을 새로 맞출 때 잰 사이즈를 어렵사리 얻어내 맞춘 것이었다. 벨져의 안목은 높은 편이었고, 미적 감각도 뛰어났다. 분명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며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상자에서 조심스레 옷을 꺼내든 루이스가 벨져를 흘긋 쳐다봤다.
"문제 있나?"
"...한 둘이 아니어서 어디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흥."
벨져는 자신만만하게 코웃음쳤다. 껄끄러워하는 루이스의 표정에 조금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곤 포기한 듯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었다. 스웨터 안에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까지 벗자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에 등부터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살을 보일 일도, 볼 일도 거의 없는 벨져는 마구 벗어제끼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무미건조하게 옷을 벗는 루이스의 표정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삐쩍 말랐을 줄만 알았는데, 팔뚝이나 옆구리 선이 제법 탄탄하면서도 얄쌍했다.
드레스셔츠를 집어들고 팔을 넣은 뒤 단추도 채우지 않고 소매부터 만지는 루이스의 얼굴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냥 옷을 입는 것 뿐인데, 살짝 내리깐 눈이 묘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벨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아노 건반을 치듯 팔뚝을 토도독 두드리며 누구의 것인지 건너편 침대에 걸터앉자 루이스가 단추를 여미고 바지를 벗었다.
평범한 검은색 브리프에 감싸인 엉덩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벨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셔츠 위로 도드라진 견갑골이, 바지를 입느라 등을 숙이는 바람에 드러난 허리가, 바지를 올려도 여전히 탱탱한 엉덩이가 벨져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은 물론, 아랫배 그 아래에도 피가 쏠리는 바람에 벨져는 다리를 꼬았다. 아무래도 그리핀도르 녀석들이 다른 기숙사 학생들을 골려주려 이상한 향을 피우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벨져가 입가를 매만지는 사이 루이스는 벨트를 채우고 베스트를 걸쳤다. 거기에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테일코트까지.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신은 루이스의 뒷모습은 가히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봐줄만 했다. 제 작품에 흡족해진 벨져가 크게 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넥타이를 매며 뒤돌아섰다. 평소에 짓는 얼빵한 표정 대신 서늘한 무표정이 검은 예복에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불편해. 연회장에 나갈 것도 아니고. 이정도면 성의 표시는 한 거잖아. 아니면 뭐가 더 필요해?"
"멍청한 새끼...."
벨져가 낮게 목소리를 끌자 루이스가 인상을 썼다. 벨져는 그를 마주 노려봤고,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루이스 주제에 자길 내려다보는 것도 영 탐탁지 않았다. 기껏 예쁘게 꾸며줬더니 바로 벗으려 하지 않나,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해도 이건 도리가 아니었다. 벨져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자 루이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싸우고 싶진 않다."
"누가 싸우자고 했나?"
"지금 네가 시비 걸고 있잖아."
"흥, 격이 떨어지는 상대와 싸울 가치도 없다."
"하아.... 그래, 다 봤으면 돌아가."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빈정이 상한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평소같았으면 이쯤에서 제 신경을 박박 긁었을 텐데, 순순히 제 말을 따르는 것도 모자라 피하려 드는 게 영 마음에 걸렸지만 계속 상대하다간 저만 우스워지는 꼴이었다.
"옷은 고마워.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뒤돌아서 나가려 걸음을 옮기는 벨져의 뒤로 루이스의 목소리가 닿았다. 벨져는 멈칫했을 뿐 뒤돌아보지 않았고, 루이스는 더 잡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벨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복도의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자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내려온 지령서를 읽고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그 지령서를 가져온 타라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다이무스는 보고 있던 서류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어, 홀든. 그렇다고 내가 갈 순 없잖아?"
"지금 하고 있는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고 생각한다만."
"그거라면 걱정마. 어제 용기사 둘이 복귀했으니까."
타라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싱긋 웃었고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명왕조차 이기지 못하는 그녀를 다이무스가 이길 수 있을 리 없거니와,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다이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라는 만족한 듯 다이무스가 책상 위에 쌓아뒀던 서류철들을 들었다.
"이건 정의로운 쪽에 가져다줄테니까, 나머지는 되는 대로 괴짜한테 가져다줘."
"알겠다."
짧게 대답한 다이무스는 타라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울컥 치미는 욕지기에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런다고 막아질 리가 없었다. 책상을 짚고 등을 수그리자 바로 입에서 쏟아지는 얼음꽃이 사무실 바닥에 부딪혀 깨졌지만 다이무스는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날카로운 꽃잎들이 입 안의 살을 찢고 베어도 당장 숨을 쉬는 게 먼저였다. 다이무스는 가슴을 치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코로 마시는 걸론 부족해 입을 벌려 공기를 마시고 뱉기를 반복하며 눈을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구토때문에 따라붙는 생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다이무스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눈을 떴다.
입에 느껴지는 피맛에 물로 입을 헹구려 일어나려다 휘청이는 바람에 급히 책상을 짚었다.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이런데, 한동안 같이 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늘어난 인구때문에 전부터 코어레너드 관리 부서에서 인원 보충을 요구하긴 했지만 하필 그게 자신과 그가 될 줄이야.
코어레너드는 연합과 회사의 공동 관리 구역이기 때문에 아무리 적대세력이라 해도 일단은 협렵을 해야 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경쟁과 분란이 없겠냐만,은 같이 부대끼며 일하는 사람들인지라 지내다보면 정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코어레너드로 보냈던 이들 중 몇몇은 소속을 바꾸기도 하고, 종종 커플이 생기기도 했다. 위에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저를 고르고, 연합에선 그를 내보낸 것이겠지만 문제는 다이무스 홀든이 엽합의 영웅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애절하고 애틋하게.
다이무스는 이마를 짚고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들고 화장실로 향한 다이무스는 물로 입을 헹궜다. 물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렸지만 그보단 가슴이 더 따금거렸다. 세면대에 뱉어낸 물이 붉게 물들어 수채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전에 생긴 상처가 아물어도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입가를 매만지다 약통을 열었다. 상처를 낫게 하는 연고가 쌉쌀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아홉시 정각에 딱 맞춰 출근한 다이무스는 잔뜩 어질러진 책상들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야 필요한 서류를 제때 찾기도 힘들 게 뻔했다. 그와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라 다이무스는 혀를 내둘렀다.
"홀든?"
"아이스."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저도 그게 더 익숙하니까요."
루이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 한 반자 늦게 손을 맞잡았다. 불쾌할 법도 한데 루이스는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손을 놓았다. 차가울 거란 인상이 있던 손은 보통 사람들처럼 따스했다. 걱정과 달리 얼굴을 마주하고 손까지 잡았음에도 아직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전 손을 잡았을 때, 조금 더 붙잡고 있을 걸 하고 후회했지마 이미 늦은 후였다.
"잘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제 미리 들러서 만나봤는데 다들 일만 하면 그만이라더군요."
"코어레너드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 세력의 지역이라면 모를까, 공동 관리 구역에선 연합이고 회사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자칫 잘못했다간 잘못과 책임을 뒤집어쓰는 데다 적에게 자치권을 뺏길 수도 있는데 그 위험을 무릎쓸 필요가 없었다. 마침 들어오는 직원과 눈인사를 나눈 루이스가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은 저걸 쓰시면 됩니다. 바쁘다면서 저한테 안내를 해달라고 하던데 그래도 회사쪽 사람이 편하면 조금 더 기다리시죠."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귀찮게 할 거 없지."
서면상으로라곤 해도 이미 할 일도 숙지하고 있고, 코어레너드의 행정관 구조도 알고 있지만 다이무스는 순순히 루이스의 뒤를 따랐다. 루이스는 넓은 건물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문마다 걸린 팻말을 살피며 가끔 발을 멈추고 눈을 맞추며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다이무스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귀에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제게 향하는 붉은 눈동자에 심장의 박동이 거세졌다.
기분 좋은 설렘에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걷던 다이무스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표정을 굳혔다. 잠잠한가 싶더니 순간 격통과 함께 찾아온 역한 구토감에 다이무스는 입을 틀어 막았다. 다른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당사자 앞에서 누군를 향한 마음인지 빤히 보이는 꽃을 토할 순 없었다.
"홀든?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여기까지 하지."
다이무스는 올라오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참아내며 뒤돌아섰다. 입을 막고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다이무스는 변기를 잡고 참았던 얼음꽃을 토해냈다. 얇은 칸막이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려 고개를 쳐들자 피식 웃음이 샜다. 그의 친절은 제게 독이었다. 타는 목마름에 너무 달아서 마실 수밖에 없는 바닷물. 마셔봤자 달고 시원한 것도 잠시일 뿐,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걸 알지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는 제 어리석은 마음에 실소했다.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표정을 굳힌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입이 썼다.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역한 구토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이 감각엔 익숙해질 수 없었다. 감출 수도 없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꽃은 감정의 산물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감정이, 나오지 못하고 꽃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는 건 듣기엔 제법 로맨틱하지만 겪는 당사자에겐 고역일 뿐이었다. 토하는 게 아무리 꽃이라 해도 입 밖으로 나오기까진 이물질에 불과한 데다, 목구멍을 역류해 넘어오는 감각은 그냥 토악질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큽, 컥...! 으욱...."
더구나 뱉어내는 꽃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꽃이 되고, 그 안에 담긴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형태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설득력있는 설이라곤 하지만 그걸 안다고 나아지는 건 없었다.
"커헉, 후.... 하...."
가슴이 울렁이고 목에 뭔가가 걸린 것 같은 감각에 헛구역질을 반복하다 마침내 남은 것마저 토해낸 다이무스는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며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졌다. 현기증과 함께 입안에 비린한 철의 맛에 고인 침을 가까스로 넘겼다. 이미 입 안은 상처투성이가 된 지 오래고, 낫는 것보다 빠르게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입 안이 제일 회복이 빠르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꽃을 토하다보면 멀쩡할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흘긋 제 입에서 나온 꽃을 바라봤다. 차라리 평범한 꽃이라면 나았을까, 다이무스는 심호흡하며 제가 뱉은 얼음꽃이 서서히 녹는 것을 지켜봤다. 보드랍고 향기로운 꽃잎 대신 투명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얼음꽃잎의 끄트머리엔 붉은 피가 맺혀있었다. 견고하고 아름답게 핀 결정꽃을 제 색으로 물들이지도 못하고, 이물질이 되어 붙어있을 뿐인 한 방울.
다이무스는 미간을 좁혔다. 혀를 움직여 입 안을 헤집은 상처들을 훑었다. 약을 발라 씁슬한 맛이 퍼졌지만 새로 생긴 상처를 찾는 게 먼저였다. 입맛을 다시자 비릿한 냄새와 함께 혀에 닿는 혈액에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 치솟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 토해내는 얼음꽃이 가리키는 건 너무 명백했다. 열음, 결정. 하지만 그는 연합의 영웅이고, 다이무스 홀든은 헬리오스 소속의 능력자였다. 감히 가까워져서도 안 되거니와 같은 남자인 그에게 이런 감정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래서 제 감정의 꽃은 마냥 예쁘고 향기로운 대신 이리도 아프고 아름다운지.
약으로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는 병은 담아 누르는 감정을 밖으로 꺼내 사랑이 이루어지면 낫는다고 하지만 다이무스는 차마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돌아올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거절뿐이었다. 난색을 표하며 거절하더라도, 제가 말을 꺼낸 순간 루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와 불쾌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에야 아예 꺼내지 않는 게 낫다. 그렇게 애써 부정하고 외면했던 다이무스였지만 매일같이 토해내는 얼음꽃 앞에선 나약한 남자일 뿐이었다.
꽃을 피우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향한 애정과 감정이기에 하루하루 그를 그리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 수록 힘이 들었다. 얼음꽃을 토할 때면 어김없이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꽃을 토하는 횟수도, 한 번에 토하게 되는 꽃의 수도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꽃을 토하는 건 이미 제 마음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났기 때문이요,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는 탓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가슴이 뛰고,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지만 그 모든 순간이 단 한 사람의 존재로 물드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아서 다가올 아픔마저 기꺼이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제게 슬쩍 지어보이던 그 미소를 기억했다. 그의 눈인사를 받기 위해 일부러 광장 한 바퀴를 돌아 늦게 출근하는 척을 했고 사흘에 한 번 읽지도 않을 책을 샀다. 그 붉은 눈동자도, 얼음이 성겨 생채기가 가득한 손도,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도 전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다이무스는 주저앉은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기억은 눈을 감자 더욱 또렷해졌다. 다이무스는 고통에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토하고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입 안이며 가슴이 찢기고 베여 만신창이가 되어도 원망조차 할 수 없는 먹먹하고 애틋한 감정의 이름은 분명, 사랑이었다.
연합의 오후, 나이오비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엘리를 돌보며 휴게실을 지키던 토마스는 그만 난로 앞에서 깜박 졸고 말았다. 그 사이 그림을 그리며 놀던 엘리가 토마스의 얼굴에 낙서를 해놓고 까르륵 웃으며 우다다 뛰어가고, 토마스는 엘리를 잡으러 복도로 뛰어나갔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냅다 뛰어가는 엘리 앞에 문이 열리며 문과 아이의 머리가 부딪치기 일보직전, 토마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엘리!”
“히히, 엘리 몰라!”
“앗, 선배?”
“안녕, 토마스.”
“고생이 많군요, 스티븐슨군.”
열리던 문이 멈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는 다시 까르륵 웃으며 빙글 돌았다. 겨우 따라잡은 토마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엘리를 안아 올리자 다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순간 움찔한 토마스는 루이스 옆에서 미소를 머금은 요기 라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점에서 일하는 옷차림의 루이스에겐 어설프게 웃었다.
“루이스 언니 예쁜 옷! 엘리 마니마니 보구시펐어!”
“고마워, 엘리.”
엘리가 토마스의 품에서 루이스에게 양팔을 뻗었다. 엘리를 안아든 루이스는 제게 뺨을 부벼오는 애교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사람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훈훈한 광경에 요기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엘리가 루이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요기는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눈짓을 교환하고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버렸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토마스는 셋이 되고 나서도 편하게 입을 열지 못했다. 루이스가 병실에 있는 동안 한참 바빴기에 얼마 찾아가지도 못했던지라 오랜만에 보는 선배가 반가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무거운 감정들이 앞섰다.
“선배, 좀 어떠세요?”
“그럭저럭 괜찮아.”
“아, 있지이. 엘리가 빨리 나으라구 맨날맨날 기도했어!”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엘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칭찬을 받은 엘리는 제가 생각해도 뿌듯했는지 루이스의 품에 안겨 부비거리며 웃었다. 엘리의 천진난만한 말에 혼자 가슴을 졸이던 토마스는 루이스의 씁쓸한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제 동경의 대상이자, 언젠가 뛰어넘겠다고 생각한 목표가 무너졌다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는 루이스를 보는 게 더 마음 아팠다.
“선배…….”
“오늘 이 말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토마스는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그렇게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지만 지금 한 말은 믿기 힘들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거짓으로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믿음직하게 보였던 팔과 등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서, 언제나 동경의 눈길로 바라본 후드 차림이 아니라서. 나란히 걷는 걸음이, 전과 같지 않아서. 토마스는 느릿하게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고작 한 사람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너무했다.
“루이스!”
“핫, 언니!”
“안녕, 잉게.”
복도 끝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토마스와 루이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 나이오비는 루이스의 품에서 엘리를 빼앗아 내려놓고는 토마스를 다그쳤다.
“넌 생각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그만, 잉게. 토마스가 안 된다는 걸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야.”
“너도 그래! 얘가 아직도 갓난앤 줄 알아? 퇴원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나이오비의 불같은 성격은 토마스에게서 바로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배려하지 못한 제 불찰에 토마스가 얼굴을 붉히고 엘리가 울상을 지었다. 나이오비가 이러는 것도 다 자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루이스는 얌전히 그녀의 잔소리를 들었다. 나이오비를 말린 건 함께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레베카와 도일이었다.
그마저도 잠시 들른 것뿐이지만, 복도에서 이러지 말자며 휴게실로 돌아온 그들은 이내 소란스럽게 루이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질문에 다 대답할 수 없어 곤란해 하던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이 반갑기도 하고 드디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루이스 앞에 떳떳하지 못한 토마스는 휴게실을 오가던 사람들이 루이스를 알아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인사를 건네는 걸 멀찍이 떨어져 지켜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앤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배는 전설이 되고, 저는 영웅이 될 거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깨질 것 같지 않던 얼음성같은 그녀에게서, 연합에게서 영웅을 빼앗아간 그가 미웠다. 능력이 사라진다니, 그런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제 막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허무하게 망쳐버린 자신이 미웠다. 토마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날, 제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과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도 전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무엇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미안함에 눈물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거라는 걸 아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미숙함과 함께 그에 대한 원망이 끓어올랐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루이스가 그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겠지만 루이스는 아니었다.
점점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토마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제게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영웅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토마스는 제가 책임을 지고 연합에 도움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시간이라.”
“피터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또 올게.”
나이오비의 아쉬움 섞인 말에 토마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이스는 코트도 없이 일어났고, 밖에는 버린 물이 얼 정도로 추웠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이 나서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가, 같이 가요. 선배!”
“응?”
“그…, 저도 그쪽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원래대로라면 아직 더 늑장부려도 될 시간이지만 성치 않은 발목으로 빙판이 진 길을 가려면 전보다 서둘러야 했다. 매년 겨울, 눈이 내리고 빙판이 지면 마음 놓고 결정 슬라이드를 타도 되니 편하겠다고 하던 우스갯소리도 이제는 전부 과거의 추억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에스코트를 자청하는 토마스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워낙에도 세심한 성격이긴 하지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시종일관 주눅이 들어있는 그가 가여운 동시에 미안했다. 아무리 잊으라 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것도, 그 짐은 그리 쉬이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도 루이스 역시 잘 알았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토마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오랜만에 둘이 나갈까? 잘 부탁해, 후배님.”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토마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생긋 웃었다. 토마스는 팔짱이 어색한지 쭈뼛거리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고, 루이스는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토마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걸 슬쩍 바라보곤 넘어지는 척 그의 팔을 꼭 잡았다.
“미안.”
“아, 괜찮아요!”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가 팔짱을 낄 수 있게 팔을 내주었다. 팔짱을 끼며 자연스레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조금씩 차이가 나던 걸음이 같아졌다. 어색하던 기류 대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별 거 아닌 농담에 마침내 토마스가 웃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따라 미소지으며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며 걸었다.
별 거 아니지만, 루이스는 이렇게라도 토마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완전히 잊거나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을지라도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건 자신 하나로 족했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자신이었다. 애써 밝은 척, 제 앞에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토마스를 보고 있으니 자신의 오만이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카페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으며 속으로 쓴 속내를 삼켰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은 루이스가 마지막까지 능력자로서 가졌던 마음이자 다짐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이 모두를 구할 순 없다고 말해도 루이스는 그 첫 마음만은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비극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게 싫었다.
그러니 능력을 대가로 두 사람을 살렸으면 그리 밑지는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 루이스는 제게 소리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불쑥불쑥 튀어오르는 그 날, 병실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길게 숨을 토하곤 제 팔을 지지해주는 토마스의 온기에 조금 더 몸을 기대어 걸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후로 벨져는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가지 않았다. 병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이글에게 루이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제가 얼마나 얼간이같은 행동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후였다. 이글이 가끔 흘리듯 내놓는 소식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미 그걸로 끝난 일이라면 더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고, 거부한 것은 그 멍청한 여자다.
그걸 다 아는데도 신경이 쓰이는 건, 분명 답지않게 처연한 표정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해버린 그 공허한 눈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벨져의 양심을 자꾸만 괴롭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날 그 병실, 희고 슬프게 빛나던 그녀가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으로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하긴 했지만 분노와 굴욕에 잠 못이루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안 좋았다. 왜 제 오만의 대가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짊어져야하는가. 왜 그 빚을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결국 멤돌던 상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은 벨져는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루이스의 목소리가, 표정이, 그 날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벨져는 분에 못이겨 젖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곤 검을 검집에 넣었다. 셔츠를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향한 벨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다짜고짜 찬 물을 틀었다.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것같은 냉기에 벨져는 몸을 떨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자기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주면 그만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 *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정중했다.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얼마 없기에 루이스는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등을 세워 고쳐앉았다. 병실에 하릴없이 가만 앉아있는 것도 고역인지라, 손님의 방문이 반가웠다.
“들어오세요.”
“실례하지. 잘 지냈나.”
“어제랑 똑같아요.”
은행 업무를 보다 퇴근한 듯한 다이무스는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권했고, 다이무스 역시 사양않고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가 깨어난 지도 벌써 이주. 그동안 다이무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루이스를 찾아왔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을 매번 내치기도 미안하거니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퍽 지루해 그의 방문을 허락한 게 열흘째였다.
“흠. 식사는 했나?”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네요.”
“제대로 안 먹었단 소리로 들리는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루이스는 저를 타박하듯 보는 다이무스의 눈빛에 대답 대신 슬쩍 웃어보였다. 어제도 했던 대화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원밥은 정말 맛이 없으니까요.”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군.”
제가 했던 소릴 그대로 돌려주는 무뚝뚝한 말투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동생이 둘인 맏형답게 사람을 챙기는 데 세심했지만 또 그만큼 단호했다. 루이스는 그의 두 동생들만큼 그에게 익숙하지 못했고, 투정을 부릴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식욕도 없고, 환자식은 정말 맛이 없었지만 결국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고 항복 선언을 했다.
“저녁은 꼭 다 먹을게요.”
“나머지 식사도 거르지 말도록.”
루이스는 빙그레 웃으며 이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작은 형때문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해주는 대로 내버려둬. 안 그럼 더 귀찮아질걸? 혹시 몰라, 사과도 토끼 모양으로 깎아줄지.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속 편한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요 며칠 다이무스 홀든을 겪어본 바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다이무스 홀든이 제 명의로 메이드와 하인이 하나씩 딸린 집 한 채를 해주겠다며 서류를 들고 왔을 때도 그렇지만, 루이스는 그의 이런 행동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몸이 먼저 움직인 것 뿐이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저를 찾아왔던 그를 떠올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양말고 말해라.”
“아뇨. 괜찮아요. 거기까지 신경쓰지 말아요.”
다이무스는 틈만 생기면 뭔가를 해주려했지만 루이스는 그 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능력과 맞바꿀만한 게 있을 리 없다. 더구나 루이스는 그에게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주는 모든 것은 갚아야 할 빚이 된다. 안 그래도 안타리우스가 다시 일어나고, 회사와 연합 안에서도 분쟁이 생기는 마당에 괜한 의혹을 사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걸 모를 다이무스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다는 건 분명 그 역시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그쪽은 좀 어떤가요.”
“...글쎄.”
두루뭉술한 질문과 답. 다이무스는 답하기를 회피했고, 루이스는 더 묻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큼.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쉬어라.”
“조심히 가세요.”
불편해진 자리를 먼저 피한 건 다이무스였다. 루이스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게 당연했다. 온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 며칠간 이어진 일상이었다. 루이스는 그를 붙잡지 않았고, 다이무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합의 검과 회사의 검. 그걸로 충분하다. 루이스는 거기에 괜한 채무관계가 더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열리던 것처럼 조용하고 묵직하게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풀썩 누워버렸다. 등의 상처는 아직 욱신거렸지만 가만히 천장을 보며 숨을 마시고 내쉬는 동안 차츰 가라앉았다. 손을 들어 얼음 결정을 만들려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능력은 묵묵부답이었다. 루이스는 멀끔한 제 손을 슥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 * *
귓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루이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그랬냐며 따져묻는 그의 얼굴엔 특유의 시니컬함도 여유도 없었다. 속내를 감출 생각도 않고 또 다시 깨진 자존심에 분노하는 벨져 홀든. 이성을 잃은 채 던진, 순수해서 더 알 수 없는 의문에 루이스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거 산에서 길길이 날뛰던 때도, 영웅이라 불리는 동안에도 그 승리를 얻은 건 전부 자신과 엔지의 조언 덕이라고 생각했지 그에겐 별 감정이 없었다. 자신과 동료를 죽이려던 이에게 정당방위로, 어렵사리 살아나갈 길을 만든 것 뿐.
그런데 왜, 토마스가 아닌 벨져를 감쌌을까. 병실에 누워있는 내내 그 생각을 했지만 끝은 언제나 한숨을 내쉬는 걸로 끝났다. 그저 평소처럼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다른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그 순간의 판단때문에 너무 큰 것을 잃고 말았지만.
루이스는 처음 깨어나던 순간을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아팠고, 그 통증에 제 가슴을 관통하던 날카로운 칼날과 자욱하게 깔리던 연기가 떠올랐다. 그 다음은 다시 칠흙같은 암전. 진통제와 수면제에 의존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깨어나고 잠들길 반복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루이스를 반겼다. 붉어진 눈시울의 앤지가 내뱉던 떨리는 목소리. 몰라볼 정도로 강해진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휴톤이 참담한 표정으로 낮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이스는 그 사망선고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고, 시트를 그러쥐며 결정을 맺으려 했다. 얼어붙어야할 시트는 루이스의 손 안에서 구겨질 뿐, 손에선 한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루이스는 병실 안에 걸린 온도계를 발견하고 다시 웃었다. 급격히 밀려드는 오한에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끌어안고 숨을 삼켰다.
이제와서. 왜 지금에서야. 순간적으로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떠오르는 동료들의 얼굴,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고 했던 맹세. 루이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충격이 너무 크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더니 정말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다. 제게 향하던 기대와 시선에 뭐라 대답해야 할까. 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곧 능력자로서의 삶이, 영웅이라는 이름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영웅이라는 이름에 따르는 책임과 기대에 짓눌려 괴로웠고, 그들을 저버릴 수 없어 힘들어하며 짐이 줄기를 바랐지만 이런 식의 끝은 아니었다. 제가 거리의 고아로 자라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름의 사명감과 벅찬 뿌듯함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고, 루이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던 능력을 잃었다. 그 상실감은 다른 어떤 걸로도 채워질 수 없었지만 루이스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쓰게 웃으며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병실을 찾아오는 이들을 맞았다. 한창 행동을 조심해야할 앤지는 세 번이나 직접 찾아왔고, 보통 사람처럼 온기를 머금은 손을 꼭 잡으며 연합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으니 걱정말라며 비서직을 제안했다.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잔뜩 붉어진 눈과 코를 하고 들어온 토마스는 애써 눈물을 참다가, 결국 채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전부 자기 때문이라며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같이 온 잉게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레베카는 루이스를 복돋아주려고 더 밝은 척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때가 다 되어 찾아온 트리비아와 이글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지친 트리비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잘 얘기하라고 휙 나가버리고, 답지않게 쭈뼛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리고는 루이스의 침대 가에 앉았다.
“좀 어때.”
“별로.”
“그..., 작은형은 왔다 갔어?”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이글의 진지한 목소리가 낯설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뒤통수를 벅벅 긁적이던 이글은 온몸으로 자신이 덩달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루이스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꾹꾹 눌러삼키고 고개를 가로저은 뒤 말했다.
“별로 탓한다거나 원망하지 않아.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아이씨, 지금 누가 잘잘못 따지재?!”
“그럼 뭘 해야 하는데?”
루이스의 날카로운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글은 눈을 크게 뜨고는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벨져 홀든은 목숨을 잃거나,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할 지라도 능력을 잃었을 것이다. 벨져를 대신한 시점에서 홀든은 루이스에게 빚은 진 셈이었다. 이글은 한숨을 내쉬며 입가를 매만졌다. 적잖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루이스에게도 불편했다.
“내가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지. 연합의 영웅님은 이치를 따지는 덴 젬병이니까.”
이글이 연합에 투신한 이후로 죽 서로를 봐 온 두 사람이었다. 이글은 루이스가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었고, 루이스는 이글의 한량같은 모습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았다. 처음엔 호기심, 그 다음은 호의.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동료의 유대. 이글은 함께 지내온 세월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루이스를 잃는다는 것은 곧 등 뒤를 지켜줄 믿음직한 동료를 잃는다는 말이었다.
이글은 루이스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 언제나 미련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랐다. 언젠가 바스라지고 꺾여버릴 지라도 그 등을, 영웅의 상징과도 같아져버린 후드를 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 도사리는 불안과 초조한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그 순간의 뿌듯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글은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루이스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했다. 그 중에 으뜸이어야 하는 사람은 물론, 이 자리에 없는 제 작은 형이었다.
“소식은 전해줄게. 안 그런 척 엄청 불안해하고 있거든.”
이글은 슬쩍 미소를 머금곤 주먹을 내밀었다. 공성을 만족스럽게 치르고 나면 으레 그러하듯이.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링거 바늘이 꽂힌 손을 쥐어 이글의 주먹에 맞부딪쳤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이글은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 그가 찾아왔다.
“하아....”
루이스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쁜 짓이라기보단 애를 울린 쪽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신경이 쓰였다. 차마 동료들 앞에서 내보일 수 없던 억울함과 불안,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절망을 그에게 쏟아부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상처입는 게 빤히 보이는 벨져 홀든이라니, 전 같았으면 쓸 데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등을 돌려 문을 나가기 전, 벨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때 그는 자기가 더 억울하고 아프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보였다. 꾹꾹 울음을 집어삼키는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그녀 자신 조차 의뭉스럽지만, 그래도 만나야 제 안에 또아리 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이제 곧 퇴원이니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도 신중히 생각해야 했다. 다이무스는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그건 받을 수 없었고, 공성은 못하더라도 연합의 일을 하거나, 서점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이글은 연합의 마스코트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건 이미 예전부터 하고 있는 일에 불과했다. 이런 시기엔 일자리를 구할 수만 있어도 행운이었다.
루이스는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밀린 집세와 새로 들어왔을 책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서류는 잉게나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겠지만 이런 사적인 부분까지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울적해진 루이스는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스며드는 익숙한 한기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찬 바람이 루이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흔들었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얼음 결정은 맺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며 제 속에 가둔 공기를 내보낸 루이스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한 번 잃은 것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벨져는 걸음을 서둘렀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벨져는 정보를 부정했다. 제 앞을 가로막던 작은 몸과 시야를 붉게 물들이던 선혈과 그 뜨끈하고 비릿한 감각이 되살아나 입술을 깨물었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지던 다리와 힘없이 가늘게 흩어지던 머리카락이 지금도 느릿하게 흘렀다.
그 전부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몸을 던져 지킨 사람이 벨져 홀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원이 도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급로를 지키던 건 벨져와 연합의 다른 결정사 마에스트로였다.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토마스 스티븐슨은 실전이 처음인지 연신 불안해하더니 결국 뒤를 노리던 강화인간의 등장에 당황해 도움이 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라고 해도 이미 공포에 하얗게 질린 얼굴에 벨져는 검을 빼들었다. 사실 벨져에겐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네 명 째를 처리 했을 때였다. 급습을 각오한 것 치고 너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께름칙했다. 본디 기습은 두 번 통하지 않는 법. 벨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마에스트로에게 다가가려 발을 뗀 순간 쓰러진 강화인간들이 폭발하며 검붉은 안개가 퍼졌다.
재빨리 스카프를 풀어 코와 입을 막았지만 이미 몸의 반응이 둔해진 후였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서는 강화인간들은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뜯어고친 건지, 몸에서 태엽과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게 노인의 나무인형을 떠오르게 했다.
트루퍼가 해체되며 내뿜는 안개가 능력자를 강화시켜준다면, 이것들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한 번 더 복구되는 게 영 성가셨다. 핵을 완전히 부수지 않으면 동력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회복을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라 검 두 자루를 바투 쥐었다. 토마스가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에 제 가정이 맞음을 확신한 벨져는 확연히 둔해진 몸을 움직였다. 신체강화능력을 잃어도 홀든은 홀든. 겨우 기계 따위에 질 리가 없었다.
문제는 소형화된 기계들이 다 제각기 다른 패턴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감각에 입술을 악물며 두 번째 기계의 팔다리를 베어냈을 때, 멀리서 절그럭거리던 기계가 포탄을 쐈다. 원상태였다면 장치를 베어내고 그것마저 피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포탄에 맞은 벨져는 그대로 주르륵 쓰러졌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나머지 내상에 울컥 피를 토했다.
루사나 수도원에서 봤던 강화인간마냥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장착한 채 다가오는 기계가 하나, 또 다시 포탄을 쏠 준비를 하는 기계가 또 하나. 벨져가 이를 악물며 검을 쥐었으나 팔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벨져의 움직임을 더뎌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은 동시에 전에도 겪었던 참혹한 패배가 떠올랐다. 빠른 도약과 함께 흩날리던 머리카락, 결연한 빛을 띤 붉은 눈동자.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기억이 하필이면 뼈저린 오점이라니. 허무하고 어이없어 코웃음쳤을 때였다.
‘샤드!’
순간, 그 때가 떠오른 건 비단 벨져의 회상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쨍그랑,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포를 쏘려던 기계가 와르르 부서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은 여전히 벨져에게 향해있었기에 무릎을 세우고 검을 들었으나 순간 어찔하게 찾아온 현기증에 눈을 찡그렸을 때,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벨져의 얼굴에 튀었다.
비틀거리던 루이스가 피를 토하고, 다시 한 번 쨍한 파열음이 귀를 두드렸다. 그녀의 몸을 관통한 칼날이 기계팔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수상쩍은 안개를 내뿜기 시작했다. 부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가고, 루이스의 등에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다리가 무릎부터 털썩 무너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찰나의 시간이, 벨져에겐 늘어진 필름마냥 느릿하게 흘렀다. 단 일 초도 놓치지 않고 새겨진 기억은 벨져 홀든의 오만의 대가였다. 이미 한 번 그녀를 통해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이면.
급한 대로 재킷을 벗어 상처부위를 눌러 지혈을 해보았지만 이미 전방에서 구르다 온 루이스는 정신을 잃은 후였다. 지원부대가 도착해 그녀를 데려가기 전까지 벨져는 저를 감싼 멍청함을 책망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감정은 벨져 홀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빚을 졌다. 이번엔 그냥 오만함의 대가를 치렀다는 말로 넘어갈 수 없었다. 벨져가 그녀에게 치러야 할 것은 제 목숨값이었다. 그걸 알기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큰형을 만났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소식을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온 동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벨져는 말을 꺼내길 주저하는 동생을 채근했다. 참담한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글의 멱살을 잡았다. 죽었다는 말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 그리 여겼건만, 벨져는 마침내 입은 연 동생의 말에 순간 아득해졌다.
숨을 밭으며 실소를 흘리자 대번에 인상을 쓰며 저를 노려보는 이글의 표정에 손을 놓았다. 그럴 순 없었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라는 말에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무시하면 그뿐이었다.
도착한 병실 앞. 문 옆에 쓰인 그녀의 이름에 벨져는 숨을 골랐다. 문고리를 돌려 열면 그만인데도 쉬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려오긴 했지만 마주하는 데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벨져는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창에서 빛이 쏟아져 눈을 찡그렸다 뜨자 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흔드는 머릿결이, 그녀의 뒤에 퍼지는 빛이 눈이 부셨다. 바람에 실려 온 약냄새에 벨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오만했음을 시인했다.
능력을 잃었음에도, 루이스는 그 삭막한 병실 안에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너…!”
그림같은 풍경에 잠시 멈춰 섰던 벨져는 태연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그게 무슨 태도냐고 따지려다 다시 입을 다문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루이스의 태도 때문이었다. 제가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벨져는 순간 제 막내동생이 또 질 나쁜 농담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벨져가 진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벨져는 말을 골랐다. 도대체 이 사람을 어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죄책감을 닮은 온갖 착잡하고 꿉꿉한 감정들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이 이어졌다.
단조롭고 삭막한 병실 안, 루이스만 홀로 색을 띠었다. 푸른빛이 도는 잿빛 머리카락도, 흰 피부도, 그리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 루이스의 그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에 벨져는 마른침을 삼켰다. 침묵 속에 감정을 내보인 게 저뿐이란 생각에 분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이제 루이스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이냐.”
“알고 온 거 아니야? 부인하고 싶은 거라면 대답해줄게. 사실이야.”
딱 잘라 선을 긋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루이스를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그 벨져 홀든의 얼굴은 잔뜩 경직되고, 오만하게 타인을 내려보던 눈동자 역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결정사 루이스는 이제 없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 씁슬하고 아픈 미소에 벨져는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돌아가.”
단호한 축객령에도 벨져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루이스가 언뜻 내비친 그 뼈저린 상실감은 저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벨져는 그녀가 잃은 것을 되찾아줄 수도 없다.
“왜 그랬지.”
그래서 벨져는 물었다. 이대로 고분고분 루이스가 하는 말에 따라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하는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벨져에게서 고개를 돌렸던 루이스는 크게 숨을 내뱉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그녀를 마주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가까이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벨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이스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가 저를 구한 이유를 구했으나 끝끝내 답을 얻지 못한 벨져였다.
“글쎄.”
“얼버무리지 마라.”
“…너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누군가를 지키는 건, 습관같은 거야. 그 날부터 쭉.”
그 날. 벨져는 루이스가 말하는 그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말도, 지킨다는 것도 다 연합의 동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벨져는 루이스가 지키는 울타리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벨져에게 루이스는 유일무이한 패배를 안긴 사람이었고 벨져는 한 때 그녀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이었다.
서로의 목을 노리는 사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스와 벨져 사이엔 유대감이라 부를 것도 무엇도 없었다. 덕분에 벨져는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지는 동시에 설욕의 기회를 잃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증오와 분노가 섞인 말을 내뱉으며 원망하는 편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루이스를 대하는 건 그녀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우리가 그런 사이였나?”
“네게 받은 이름, 돌려줬다고 생각해.”
그래서 벨져는 일부러 날을 세웠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이번에도 자신이 될 것 같아 비아냥거렸지만 루이스는 전보다 더 두터운 얼음벽을 두른 채 벨져를 밀어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무엇도 바라지 않을 뿐더러 되려 오래전 진 빚을 청산한 거라 말하는 루이스 앞에 벨져는 무력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 한단 말인가.
“하, 건방떨지 마라. 이렇게 내숭떤다고 네게 남는 게 뭐가 있지? 내가 괴로워하길 바라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홀든? 원하는 게 있어서 꾸민 일인 거 아닌가? 얼마든지 주지. 그러니까 말 해!”
“윽…!”
성큼 다가간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올리고 소리쳤다. 환자고, 여성이란 것도 잊고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벨져에겐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차가운 눈동자에 잔뜩 일그러진 벨져의 얼굴이 비쳤다.
“없어.”
벨져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환자복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우악스런 멱살잡이에 끌려왔던 루이스는 목 언저리를 만지며 콜록거렸고, 벨져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움찔 입가를 씰룩였다. 흐트러진 환자복 안으로 흘긋 보이는 붕대와 손목에 꽂힌 바늘, 피가 역류하는 튜브. 워낙에도 희긴 했지만 백지장처럼 핏기가 가신 얼굴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벨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콜록, 흐…….”
제가 한 짓이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선 벨져는 제 분에 못이겨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한 상대를 앞에 두고 길길이 날뛰었던 건 그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그 때는 상황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왜, 잘 된 거 아냐?”
침착함을 유지하던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 벨져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젠 ice도, 영웅도 죽었으니까!”
악을 쓰듯 내뱉는 말은 그녀의 결정검만큼이나 날카롭고 시렸다. 벨져를 구한 대가로 루이스가 치른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신경을 다친 채로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다시는 뛸 수 없다고도 했다. 사이퍼에게 능력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아주 잘 알았다.
힘을 바라며 모여드는 비능력자들, 그 욕망을 이용한 조직. 전쟁 이후로 꾸준히 그들을 쫓았던 벨져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전쟁 이후로 책임과 기대를 떠맡으며 영웅이 된 사람이었다. 영웅 루이스가 벨져 홀든을 구하고 능력을 잃었다. 사실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신문 1면에 실릴 헤드라인으로 이것보다 더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벨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이게 질 나쁜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깨고 말 하룻밤의 꿈이라면 그걸로 끝일 텐데. 하지만 입을 앙 다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은 이게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일깨웠다.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친 그녀 앞에서 벨져는 입이 두 개 라도 할 말이 없었다.
“비웃으려면 지금 해. 어차피 앞으로 계속 들을 테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뒤돌아섰다. 도망치듯 병실을 나와 어떻게 쉬었는지 모를 숨을 토해냈다. 최악.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었다.
여덟시 반, 루이스는 책상에 앉아 아직도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은 조합체제로 돌아가다보니 수확철이 되면 각지에서 식료품과 장부가 도착하는데 그걸 형편에 맞게 분배하는 건 전부 본부의 일이었다. 덕분에 앤지는 물론이고 공성에 투입되는 사이퍼들까지 가을만 되면 정산에, 예산 분배, 그리고 각지에서 밀려드는 요청까지 받아주느라 정신이 없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바쁜데도 일처리에 도움이 안 된다거나, 정보의 유출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정산과 사무처리에 투입되는 인원은 적었다. 새사람을 투입하는 것도 아니라서 결국 하는 사람만 하는 일에 벌써 육년째 끌려다닌 루이스는 이제 이 서류지옥에서 빠져나가길 반쯤 포기한 후였다. 처음엔 의욕에 넘쳐서 연합을 재건하는 일이란 생각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더랬다. 지금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반, 이렇게 된 걸 어쩌겠냐 하는 체념이 반이지만.
게다가 오늘은 리버포드에서 크게 불꽃놀이를 한다며 대대적으로 광고한 날이었다. 리버포드가 회사 영역이라곤 해도 축제는 축제인 법. 더구나 먹고 살기 힘든 와중에 이런 식으로 거리에 활기가 도는 건 오랜만이라 해가 지기도 전에 자리를 잡으러 간 연합원들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계속되는 업무에 지친 사람들이 낮부터 하나 둘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나도 불꽃놀이....'같은 말을 중얼거리거나, 서류 끄트머리에 나가고싶다는 말을 끄적였다. 그리고 언제 작당을 한 건지 저녁 시간이 가까워오자 하나 둘 저녁 먹으러 간다는 말과 함께 슬금슬금 사무실을 빠져나가버리고, 결국 남은 건 루이스와 잉게 나이오비뿐이었다.
루이스는 제게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후배의 괘씸함과 자길 쏙 빼놓고 가버린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에 더 우울해졌고, 잉게는 며칠 전부터 같이 불꽃놀이가 보고싶다고 한 엘리때문에 멀쩡한 펜을 두 개나 망가뜨리고 말았다. 와드득, 연필이 부서지는 소리에 루이스는 슬쩍 엘리한테 가보겠냐고 운을 띄웠다. 이대로 제대로 업무를 할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그냥 두면 기껏 며칠동안 고생해서 만든 지출계획과 회계장부가 잿더미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운을 띄우자마자 피곤과 근심이 드리웠던 잉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루이스는 얼른 코트를 집어들며 혼자 괜찮겠냐 묻는 잉게에게 말없이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게 벌써 한 시간 전, 루이스는 장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아홉시에 시작이라고 했으니 아직 삼십분쯤 시간이 남은 셈이지만 이쯤이면 다들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어둠이 내린 창밖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피식 웃었다.
평소에도 이 시간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라 지금도 사무실에 있을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는 전화기를 들고 머리보다 손이 먼저 기억하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대기중 연결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 홀든입니다. ]
"역시, 아직 사무실이군요."
[ 흠.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다. ]
"당신이요? 불꽃놀이라도 보러 가는 건가요."
[ 그러는 너는? ]
"하아, 사무실이에요."
보통은 다이무스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루이스가 서점에서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뒤바뀐 처지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루이스는 수화기를 든 채로 눈가를 쓸었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은 언제나 말을 뱉은 후에나 드는 법이었다.
[ 사무실이라, 혼자인가보군. 나와라. ]
"네?"
[ 틀린가? ]
무뚝뚝한 억양과 고압적인 태도때문에 명령처럼 들리는 말에 루이스가 놀라 물었음에도 다이무스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읽힌 느낌이라 멋쩍어진 나머지 귓가를 긁적였다. 사실 나가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지금 데이트하자는 건가요."
[ 삼십분 뒤, 노던브릿지 중간에서 보지. ]
"다이무스?"
다이무스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바람에 루이스는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전자음을 들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시계를 봤지만 그런다고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도 아니라서,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곤 의자에 걸쳐뒀던 후드를 집어들었다. 삼십분 안에 리버포드까지 가려면 서둘러야했다.
쫓기고 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도 멈춰서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뛰었다. 살기위해선 뛰어야 한다. 흰색 방호복의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은 움직임이 둔하고 느리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과 골목을 달리던 소년은 발 아래 자욱하게 깔린 흰 안개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소독약이라고 불리는 가스가 소독약이 아닌 것쯤은 다운타운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른아이 할 거 없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소년은 급히 뒤를 살폈다. 방호복을 입은 청소부들은 다가오고,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코와 입을 가리고 가스가 퍼지고 있는 쪽으로 달렸다. 청소부들이 붙은 이상 추격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가스를 향해 돌진할 거라곤 생각을 못 할 테니 잠시 그들의 눈을 피해있다가 도망치면 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게 깔린 흰 가스는 작은 몸 하나 쯤은 충분히 가려줄 터였다.
가스의 밀도가 가장 높은 쪽으로 달리던 소년은 따가운 눈을 깜박이다 결국 눈을 감았다. 벽에 손을 대고 뛰다 보니 숨이 가빠왔지만 피할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눈을 떴지만 하얀 가스밖에 보이질 않고, 너무 달린 탓에 입에선 단내가 났다.
그래도 맞아죽는 것보단 나을지 몰라. 소년은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입과 코를 가렸지만 가스의 농도가 높은 곳으로 뛰어든 탓인지 벌써 어지러웠다. 하다못해 고백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제게 말을 걸어주곤 했던 여자애를 떠올리며 후회해보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에 아찔한 현기증이 소년을 덮치고, 다리가 무너지면서 작은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밖보다 깨끗한 공기에 숨이 트였다. 공기를 들이마시느라 무방비하게 널부러진 소년 앞으로 사람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도움의 손길인지, 죽음의 사자인지 모를 발소리는 코앞까지 다가와 소년의 배를 찼다.
“큭, 흐억…!”
강한 충격에 구르는 사이 문이 탁 닫히고,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당장 문 하나를 경계로 앞이 분간이 될 정도로 가스의 농도가 옅다. 다운타운엔 이정도까지 가스를 막을 수 있는 기술도 자제도 없다. 소년은 제가 찾아온 곳이 제 무덤이 될 것을 직감했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가스를 들이마신 몸은 뜻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하, 쥐새끼 한 마리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군.”
머리채가 쥐어잡히고, 두피가 당겨지는 고통에 손을 뻗었지만 바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른 소년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흰 방호복을 입은 그의 눈이 새파랬다.
“흐응. 뭐냐 그 눈빛은. 치워라.” “…사람이네.”
소년은 눈을 깜박였다. 방호복을 입은 청소부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였다. 오싹한 레이저가 몸을 훑고, 오염 정도에 따라 제거하거나 소독한다. 어느날 예고도 없이 닥쳐온 재앙은 으레 하는 얘기처럼 전쟁도, 외계인도, 자연재해도 아니었다.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세균은 빠르게 번졌고, 인간은 무력했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그 나름의 생존법을 강구했지만 그것은 전부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소위 청정지역이라 불리는 방호시설을 만들고 거기에 틀어박혔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혹시나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 하나로 연구시설과 청정지역 근처에 판자촌을 구성했다. 청정지역, 연구시설, 판자촌, 그리고 그 변방.
재앙이 닥치고 두 세대가 지난 지금은 사는 지역이 곧 계급이자 신분이었고, 소년이 사는 곳은 변방의 다운타운이었다. 끔찍하다고 일컬어지는 변방, 밑바닥 중의 밑바닥인 다운타운의 거리에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들은 해충이라 불렸다. 해충을 처리하는 데 사람의 손을 쓰는 것조차 아깝다고 선포한 대통령이 청소부를 보내기 시작한 게 삼 년 전. 그 이후로 소년은 방호복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무례하군.” “눈, 되게 예쁘다.”
솔직한 감상에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움찔하더니 팔짱을 꼈다. 두꺼운 옷 때문에 그마저도 힘들어보였지만 어쨌거나.
“흐응. 눈이 있으면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지.”
키나 목소리를 보아하니 제 또래인 것 같아 슬쩍 경계심이 풀어졌다. 잘만 구슬리면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청소부들은 주민등록이 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니 방패로 삼아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기분이 좋아진 건 그가 가늘게 코웃음 치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서 너, 이름은?” “…….”
소년이 대답하려 입을 연 순간 갑자기 짚고 있던 마루가 진동하더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의 바닥이 꺼졌다. 그 짧은 찰나에 눈이 마주치고, 둘은 동시에 손을 뻗었다. 내뻗은 손을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힘주어 잡자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두 사람이 그대로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