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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1 [홀든루이] Intro.
글
[벨져루이] 꽃놀이, 봄 나들이
2015/03/16
※ 프로게이머au, 꾸준히 미는 중.
이번엔 꽃놀이다아ㅇ0ㅇ
아침부터 홀든A의 숙소는 분주했다. 부엌에선 아이작이 계란과 베이컨을 굽느라 바쁘고, 씻고 나온 토마스는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않고 늘어져있는 이글을 깨우느라, 벨져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며 아침부터 옷장을 뒤엎고 있었다.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안 돼?”
“미쳤어?”
벨져는 스키니진에 흰 셔츠, 그 위에 남색 스웨터를 입은 루이스가 침대에 앉아 이번 봄에 나온 불독인형을 끌어안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넌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그만 심통내. 모처럼 꽃놀이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더 아무거나 입을 수 없는 거다.”
루이스는 인형에 턱을 올리고 뚱한 얼굴의 벨져를 빤히 쳐다봤다. 이거야 원, 여자친구랑 쇼핑간 것도 아니고 벌써 삼십분 넘게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걸 보고 있으니 점점 기다리는 게 지루해졌다.
“베엘져어.”
“보채지 마라.”
벨져는 벌써 상의만 다섯 벌째 집어던지다 겨우 마음에 드는 게 나왔는지 얇게 스프라이트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걸쳤다. 봄이라곤 해도 저러면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꺼냈다간 벨져의 준비시간이 더 늘 것 같아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안에 가디건 입고, 위에 잠바를 입은 다음 벨져가 나중에 춥다고 짜증을 내면 가디건이나 잠바를 벗어주면 그만이니까. 루이스는 손등을 살짝 덮는 스웨터의 소매를 당겼다.
“선배!”
“응, 오오. 토마스, 신경 좀 썼는데?”
왁스로 머리도 만지고 몸에 딱 맞는 새 옷을 차려입은 토마스는 센스가 좋아서인지 새내기 대학생 같았다. 그 뒤로 따라온 이글은 스냅백에 껄렁하다 해야할지 화려하다 해야할지 애매한 차림이었지만 저게 다 명품이란 걸 안 후로 루이스는 이글의 옷차림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누가 맨날 입어서 때가 타고 목이 늘어진 런닝이 브랜드 제품이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냐만은, 또 티비나 보면서 비스듬히 누워 감자칩이나 먹고 있는 걸 보면 진하게 풍기는 백수의 향기에 옷이 묻힐 수밖에 없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표범무늬 모피코트를 두르고도 모델 포스가 나는 거라던가, 가끔 광고 찍으러 갈 때 핏이 사는 걸 보면 옷걸이는 참 좋은데. 사진 찍는 걸 보면 진짜 모델을 해도 될 것 같은 애가 이러고 있으니 가끔은 그쪽으로 안나간 게 안타깝기도 했다.
“뭐야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작은 형!”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나가!”
이글의 껄렁한 말투에 벨져가 문가에 서있는 토마스와 이글에게 짜증을 냈다. 흔히 있는 일이라 이글은 귀를 파며 들어오고, 토마스는 벨져와 이글의 눈치를 살피다 루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보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고,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씨는 뭐해?”
“도시락 싸고 계세요. 아까 슬쩍 보니까 샌드위치랑 과일 싸고 계시던데.”
“오오오.”
“오늘도 안 간대?”
“가겠어? 우리 없다고 대청소한대.”
루이스는 팬이 선물해준 쉬레와 프로즌의 스노우볼을 높이 띄웠다 잡아채는 이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옆에서 루이스의 오늘 옷차림이 교회 오빠 스타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차분하고 평범한 게 좋을 뿐이지만,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귀여운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기껏 공들인 머리를 망치면 안 된다 생각에 손을 멈췄다.
“너, 너, 저리로.”
이번에야말로 끝났나 싶었더니 벨져는 토마스와 이글이 들어온 뒤로 옷을 또 갈아입었다. 루이스는 허허 헛웃음을 흘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벨져가 이글이 가지고 노는 스노우볼을 뺏고 방에서 쫓아내는 걸 지켜봤다. 이래서야 나갈 수는 있을까. 사람들 붐비기 전에 가서 자리 잡고 싶은데. 루이스는 벨져와 눈이 마주치자 인형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꽃놀이 가자~. 옷 그만 갈아입고~.”
“그게 뭐냐, 어린애도 아니고.”
“네가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렇지. 씻기도 제일 먼저 씻어놓고.”
“너희가 너무 무신경한 거다. 선크림은 발랐냐?”
루이스가 대답이 없자 벨져는 한숨을 쉬고 화장대에서 선크림을 집어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옆에 토마스가 있는 걸 깨닫고 손에 크림을 죽 짰다.
“눈 감아.”
“그거 네 대사 아니잖아.”
“입도 닫아.”
루이스는 벨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남자치고 매끄러운 손이 뺨과 이마, 코와 턱을 지나 목을 매만지다 떨어졌다. 토마스는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저를 향한 싸늘한 벨져의 눈빛에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쭈뼛거렸다.
“어, 음. 전 아이작씨 도시락싸는 것 좀 도와드리러 갈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심술 부리지 마.”
“흥, 심술은 무슨.”
벨져는 선크림 뚜껑을 닫고 루이스의 손등에 남은 크림을 문질러 닦았다. 루이스는 그냥 손등을 문지르며 벨져가 대충 늘어놓은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꽃보러 가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혼잣말같은 그 말에 벨져는 선크림을 내려놓고 거울 너머로 루이스를 흘긋 쳐다봤다. 청승맞기는. 벨져는 옷장에서 인디언핑크색 브이넥을 꺼내 입고 위에 감이 톡톡한 감색 재킷을 걸쳤다. 이 정도면 옆에 섰을 때 흉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오늘의 루이스의 패션에 맞춘 벨져는 향수를 꺼내 루이스 옆에 다가가며 뿌렸다.
“아, 좀 밖에서 뿌리라니까.
“내가 내 방에서 외출준비를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그게 내 방이기도 하니까 문제라는 거지.”
“흐응, 싫어?”
“나한텐 너무 화려해서 안 어울려.”
벨져는 루이스의 대답에 흡족해져 길게 콧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당겼다. 단둘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래도 봄나들이로 꽃구경이라니, 이번 기획이 누구 머리속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제법 칭찬해줄만했다.
“와, 진짜 얼마만이지. 도시락 들고 피크닉 가는 거.”
“전엔 누구랑 갔었는데?”
“고아원에서 다같이.”
루이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퉁명스레 묻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오는 바람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아픈 구석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눈치를 살피자 루이스가 씩 웃으며 일어났다.
“됐어, 나가자.”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지만, 말을 잘못했단 자각은 있기에 벨져는 토씨 하나 못 달고 루이스를 따라 나섰다.
차를 타고 삼십분, 꽃이 만개한 공원에 도착한 토마스와 이글은 루이스와 이글이 주차하는 사이 알아서 찍으라고 쥐어준 카메라를 들고 신나서 붕붕 뛰다니다 갑자기 인터뷰를 시작했다.
“홀든A의 막강한 서포터, 마에스트로! 오늘의 의상 컨셉은 뭡니까?”
“어, 오늘은 글쎄요? 봄이니까 상큼한 새내기?”
“이야아, 죽인다~. 모델 뺨치네 우리 토마스!”
이글은 카메라로 토마스의 발끝부터 머리까지를 훑으며 토마스 주변을 뱅뱅 돌았다.
“아, 형. 그만해요. 쪽팔려.”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상큼한 우리 토마슈~. 우쮸쮸쮸.”
“형 자꾸 이러면 방에 뭐가 널려있는지 앨리셔씨 트위터에다 제보할 거예요!”
“그건 안 되지.”
얼굴이 붉어진 토마스가 빽 소리를 지르자 이글은 바로 표정을 굳히며 카메라를 노란 개나리가 잔뜩 핀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형들을 향해 돌리고 혀를 찼다. 하여간 벨져 홀든 저거저거 아주 이게 데이트인 줄 아나. 척 봐도 루이스와 맞춰입은 티가 나는 옷차림에 이글은 제 작은형이 정말 어찌 할 수 없는 노답이라 생각했다. 아이돌 좋아한다고 뭐라 할 게 아니다. 저게 사생팬이지. 그것도 순 악질.
이글은 얼마 전 벨져가 루이스의 팬사이트에서 조공이랍시고 선물로 보낸 스니커의 가격을 떠올리고 고개를 도리저었다. 그걸 알면서도 봐주는 저 새끼도 정상은 아니지만.
“뭐 하냐?”
“쉬레와 프로즌의 팬들을 위한 서비스 타임.”
“뭔 소리야.”
“아냐, 우리 방송의 18퍼센트는 형들의 그 끈적한 사이가 책임지고 있다고.”
사뭇 진지한 이글의 목소리에 벨져는 또 헛소리겠거니 하고 무시하려했지만 둔하기 짝이 없는 루이스가 말을 거는 바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에 미묘한 수치에 억양이 거세진 건 분명 착각이 아니겠지만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그야 물론 귀엽고 멋진 이글이 비중이지~. 이글이글이 몰라? 하, 역시 유행에 뒤쳐지시네~, 안 되겠어~.”
“그게 유행이 된다면 난 그냥 죽겠다.”
“하, 하하. 벨져 형이 그런 말 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요....”
“당연하지. 농담이 아니니까.”
벨져가 정색하고 말하자 옆에서 걷던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철썩 치고는 슬쩍 토마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루이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좋지만, 뒤통수가 따끔하다 못해 뒤에서 검은 오오라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게 아무래도 위험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루이스에게 오늘 도시락 메뉴를 화제로 말을 걸었고, 루이스는 기대된다면서 토마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평일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공원은 그닥 붐비지 않았다.
“선배 너무 인기 많은 것 같아요.”
“응?”
“우리 팀은 다들 인기가 많잖아요. 이글형도 그렇고, 벨져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게 무슨 소리야.”
뒤에선 벨져와 이글이 또 버럭버럭 하며 투닥거리고 있지만 그러느라 계속 걷는 두 사람과 거리가 제법 거리가 벌어졌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에 토마스는 속에 품고 있던 얘기를 터놓았고, 루이스는 가볍게 받았다.
“서포터는 눈에 띠는 포지션도 아니니까요.”
“우리 전적 살펴보면 네가 제일 승률 좋을걸?”
“하지만 그거랑 그건 다르잖아요.”
“다르지. 그지만 네 덕에 우리는 착실히 이기고 있어. 나도 벨져도 널 믿으니까 앞으로 가는 거야. 공방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토마스는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루이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서포터란 포지션이 눈에 띠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몫은 진입을 하는 이니시에이터나 딜러가 가져가지 마련이라 5인궁이라도 넣지 않는 이상 토마스는 카메라나 해설진의 주목을 받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걸 인정해줄 사람은 결국 팀원들밖에 없는데, 점점 모두가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의 톱니바퀴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서운했던 차였다.
“토마스. 우리가 말은 안 해도, 언제나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벨져도요?”
“하하, 당연하지. 뭐, 그건 저 녀석 마음이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널 빼겠다고 하면 당장 미쳤냐고 할 걸?”
토마스는 결국 한 대 맞은 이글과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도 토마스를 보며 마주 웃고, 그 사이를 벨져가 치고 들어왔다.
“아, 형!”
“형 소린 꺼내지도 마.”
“꽃 보러 온 거야, 싸우러 온 거야?”
“아, 같이 가! 쫌! 어휴, 드러워서 정말.”
이글이 잔뜩 투덜거리며 다가와 카메라를 루이스에게 넘겼다. 카메라를 받아든 루이스는 토마스와 벨져, 이글을 차례로 비추다 꽃이 만발한 공원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조그만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뒤돌아서 세 사람을 담기도 하고, 양 손이 자유로워지자 목 뒤에 깎지를 끼고 걷는 이글에게 농담같은 인터뷰 질문도 던졌다.
“요새 BJ로 버는 수입이 엄청나다면서요?”
“제가 워낙 멋져야 말이죠, 방송 치면 바로 나옴.”
“그게 그랑플람의 미친 고딩때문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글은 대번에 입술을 내밀었다. 그게 퍽 귀여워 루이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물었다. 이글은 주로 토마스와 듀오를 돌거나, 하랑이와 듀오를 돌거나, 아니면 그 둘과 삼인을 뛰곤 했다. 하랑은 피지컬이 뛰어난 원딜러인데다 센스도 있는 편이라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딜러인 이글과 함께 있으면 시너지가 엄청났다. 엊그제도 벨져와 듀오를 돌리다 세사람을 만나 진 루이스는 일부러 예민한 구석을 찔렀다. 진 다음에 벨져가 이게 다 뽀뽀를 안 해서 그렇다며 멱살을 잡고 달려든 복수였다.
“그건 걔가 바른 생활 어린이라 그런거지! 그랑플람에선 열두시 되면 걔 컴 전원을 빼버린다드라.”
“네가 하다가 술자리 데리고 오니까 그렇지.”
“쉿!”
이글은 큰일난다며 손사레를 쳤다. 어차피 다 편집해서 나갈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적당히 정도를 지키긴 해야 했다. 루이스와 이글이 노는 사이 벨져와 토마스가 음료수를 사서 돌아왔다. 이글의 첼시 콜라, 토마스의 민트초코 프라푸치노, 벨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루이스의 체리코크가 담긴 사각 트레이에 삼단 찬합이 두 개. 이글과 토마스, 벨져는 각각 트위터, 카스,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루이스는 세 사람의 촬영을 위해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오오오.”
“역시 아이작씨, 굉장하네요!”
“대단한데?”
“흐응. 나쁘지 않군.”
각각 다른 감상과 함께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다들 작성을 마친 후에야 각자 손을 뻗어 샌드위치와 유부초밥을 입에 가져갔다. 카메라는 잘 내려두고 먹는 동안 바람이 홱 불며 벚꽃잎이 흩날렸다.
“좋다. 날씨도 좋고, 꽃도 예쁘고 밥도 맛있고.”
“아이작씨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토끼랑 같이 보라고 갈 때 꽃가지 하나 꺾어가자.”
벨져는 이글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 동생을 쳐다봤지만 이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글의 말마따나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꺾어다주고 싶을 정도로 진풍경이라 혹했다.
“품위 없는 것들. 꽃가지 하나 보느니 차라리 휴일을 줘라. 쯧.”
토마스와 루이스는 관심도 없는 척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 벨져를 보고 둘이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뭐.”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치고 손에 묻지 않게 잘 싼 샌드위치를 집어든 벨져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루이스는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이글과 프라푸치노를 마시는 토마스를 차례로 훑어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파랗고 분홍색 꽃잎이 살랑인다.
“꽃놀이, 나오길 잘했네.”
루이스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하여간 가끔 늙은이같은 소리를 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긴장과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즐기는 루이스의 모습이 오랜만이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있는데 당연하지.”
“다음엔 아이작씨랑 다이무스씨도 같이 와요!”
벨져는 애먼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의 체리코크를 뺏어마셨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벨져는 체리코크를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다음주 수요일, 시간이 비니 다음 시즌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기분 전환삼아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아랑 아이작까지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지만. 벨져는 미리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날씨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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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White Day
2015/03/16
※ '어느 겨울'과 이어지는 듯 안 이어지는 듯 그냥 공식 목석남 티엔과 ts루이스로 기념일이 챙기고 싶었다.......
차디찬 바람이 한 풀 꺾인 3월의 봄날, 루이스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살폈다. 늘 아무렇게나 방치하던 머리카락도 곱게 빗어 올리고 편하다고 대충 입던 후드와 티셔츠, 청바지, 스니커즈 대신 흰 블라우스에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연분홍색 치마를 입으니 늘 보는 제 모습이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앞머리를 매만지다 긴장을 덜고자 숨을 길게 내뱉었지만 보면 볼수록 어딘가 부족해보였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그와 만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인들의 기념일에 데이트라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루이스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으로 찰싹 뺨을 감싸고 다시 한 번 숨을 내뱉었다. 어설프게나마 화장도 했는데 어떻게 보일지 몰라 자꾸만 두근거렸다. 약속시간까지 앞으로 삼십분. 그는 절대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으니 이제 더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떨리는 가슴 위에 차가운 손을 얹고 천천히 심호흡한 루이스는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티엔!”
“흠. 왔나.”
루이스는 만나기로 약속한 분수대 앞에 서있는 그를 보고 가볍게 뛰었다. 트리비아가 신는 것처럼 굽이 높은 것도 아닌 단화지만 평소에 신던 것보단 뛰기 힘들어 자연스레 걸음이 늦어졌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티엔은 팔을 풀고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양손이 빈 걸 본 루이스는 살짝 실망했지만 이제 막 만난 참이고 어련히 그가 알아서 다 계획을 세웠을 거라 생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화장이나 옷이 어색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티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죽 훑어보고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잘 지냈어요?”
“그래.”
제 생일을 티엔이 말도 없이 그냥 보내고 맞은 밸런타인에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이후로 제대로 시간을 내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한 달 만이었다. 티엔이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고, 루이스는 그의 팔을 잡고 한가로운 리버포드를 걸었다. 모처럼 먹구름이 끼지 않은 화창한 날씨에 데이트. 루이스는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봄바람이 한껏 들뜬 마음을 흔드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리버포드는 회사의 관할구역이지만 사람이 많은 데다 휴양지였던 덕에 세계 각국의 요릿집이 많았다. 그러니 포트레너드에서 데이트를 하기엔 리버포드만한 곳이 없었는데, 연인들의 기념일에 휴일이 겹쳐서 그런지 어디고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 사람이 많네요.”
“걱정마라. 예약해두었으니.”
그냥 한 말에 티엔은 루이스의 그의 팔을 잡은 손을 톡톡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슬그머니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흘긋 그녀의 안색을 살핀 티엔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순조로운 데이트는 완벽한 계획에서부터 시작한다. 티엔은 앞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앞에서 이래서 가기 싫었네, 어쩌네 하고 다투는 연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의 점심으론 제철인 숭어요리와 함께 언젠가 루이스가 맛있다고 했던 화이트 와인, 그 후엔 한창 흥행하는 영화를 보고 제법 괜찮은 차를 들여놓는 카페. 저녁은 중식집에서 먹고 그 다음은 봐서 제 집으로 가거나 루이스를 바래다줄 계획이었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티엔은 삼일 전에 예약을 마쳤고, 오늘따라 햇살도 좋고 루이스의 기분도 좋아 보였다.
좀처럼 꾸미는 법이 없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에 옅게 화장까지 하고 배시시 웃으니 안 그래도 청초한 사람이 막 피어나는 꽃처럼 고왔다. 덕분에 티엔의 가슴도 같이 떨렸지만 거리를 걷다보니 한 번씩 루이스를 돌아보는 다른 남자들 때문에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제 연인이 예쁜 것을 탓할 순 없지만,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불쾌할 따름이었다.
티엔은 곱게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린 덕에 드러난 루이스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늘 머리카락을 후드 안에 넣고 다니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이렇게 드러낼 바에야 차라리 다시 그 후드를 입히고 싶었다. 꽁꽁 숨겨두고 자신만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약해둔 식당에 도착한 티엔은 루이스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고개를 든 루이스의 화사한 미소에 미소로 답한 티엔은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아 계획한 대로 숭어요리와 화이트와인을 시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루이스는 종일 들떠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데이트 이후로 한 달 만이니 그렇게 자신을 만나는 게 좋았나 싶어 티엔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왜요?”
“그렇게 보고 있으니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루이스는 티엔의 솔직한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아치를 만들던 루이스는 티엔이 손을 내밀자 바로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 포개진 두 손의 온도가 같아질 쯤,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티엔은 숭어의 살을 발라 루이스의 접시에 덜어주었고, 루이스는 아무리 괜찮다 말해도 티엔이 말을 안 들을 걸 알기에 얌전히 생선살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맛나게도 먹는 게 보기 좋아 티엔은 제가 먹는 건 뒷전으로 하고 루이스를 먹였다.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옷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입으니 더 말라보여 잘 먹여야할 것 같았다. 맛있는 걸 먹이면 수줍고 간지러운 미소를 짓는데, 티엔은 루이스의 그 얼굴을 볼 때면 행복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카페로 향했다. 유난히 거리에 연인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티엔은 옆에 여자친구를 끼고도 루이스를 쳐다보는 남자들 때문에 점점 더 짜증이 났고, 내심 사탕을 기대하고 있던 루이스는 한 나절이 다 가도록 사탕은 줄 생각은 않는 티엔 때문에 점점 우울해졌다.
티엔 정이 기념일을 챙길 사람이냐, 하면 사실 루이스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다가 챙겨주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신경도 안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루이스는 내내 차가운 무표정으로 제게 말도 걸지 않는 티엔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속만 썩였다. 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이 저마다 손에 안고 있거나, 그녀들의 옆에 서있는 남자들이 들고있는 귀여운 포장의 상자를 보며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티엔, 저…. 혹시…….”
“무슨 일이냐.”
“으,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이스는 저녁을 먹고도 아무 조짐이 없는 티엔을 보며 자포자기해버렸다. 티엔은 루이스가 주저하는 것을 힘들어서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쉬었다 가자며 공원으로 들어갔다. 티엔이 벤치에 깔아준 손수건 위에 앉은 루이스는 티엔의 팔을 놓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혼자 멋대로 기대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이인데 이 정도 기념일정도는 챙겨줘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한 달 만에 만난 건데. 하지만 이런 걸로 속상해하는 게 유치하고 쪼잔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라 루이스는 티엔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실 거라도 사올 테니 잠시 쉬고 있어라.”
티엔은 제 눈을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그녀를 뒤로 했다. 티엔은 티엔 나름대로 낮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저기압이 된 루이스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분명 제 계획은 완벽했고, 루이스도 즐거워했는데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티엔은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되짚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리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생리 중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아직 루이스가 생리를 하려면 열흘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럼 대체 뭘까. 콜라 두 캔을 산 티엔은 미리 한 캔을 따서 들고 가며 제가 잘못 안 것인지 날짜를 다시 한 번 셌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도 이 쯤 만났던 것 같은데. 순간 티엔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티엔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설마. 혹시, 설마. 임신을 한 게 아닐까?
임신 초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티엔은 몸에 오르는 열기에 잠시 숨을 골랐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목이 타 미리 딴 콜라를 쭉 들이켰다. 루이스와 자신 사이의 아이를 상상하던 티엔은 그럼 연합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이는 누가 돌보고 제 집에 루이스를 들어앉힐 수 있는 것인지 현실적인 문제를 재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달려간 티엔은 벤치에 앉아있는 루이스 앞에 한 남자가 뭔가를 내미는 모습을 보고 발을 멈췄다.
“저, 그, 오늘 서점엔 안 나오셨더라구요. 저같은 게 루이스씨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아, 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날이 날이니까. 못 드리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머쓱한 듯 수줍게 웃으며 뒷머리를 만지는 남자와, 조심스레 그가 내민 상자를 받은 연인. 티엔은 차갑게 표정을 굳히고 다가갔다. 티엔을 발견한 루이스가 눈을 깜박인 순간, 티엔은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내 연인에게서 떨어져주지 않겠나?”
“아, 예, 예!”
“티엔!”
방금 전까지 꽃분홍빛으로 물들어있던 남자가 겁에 질려 달아나고, 루이스는 티엔을 말리려했으나 이미 남자는 혼비백산해 달아난 후였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내가 왜 내 여자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를 봐줘야하지?”
“나도 왜 이런 날 연인도 아닌 남자한테 선물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겠거든요?!”
티엔의 싸늘한 말과 눈빛에 여태껏 설움을 꾹꾹 참아왔던 루이스도 터져버리고 말았다. 분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른 루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면 또 다툴 것 같고, 티엔이 자신을 겨우 이런 거에 서운해 하는 속 좁은 여자라 생각할 것 같아 더 마주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문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티엔은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를 따라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루이스.”
“놔요.”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다오.”
“됐어요! 어차피 내가…!”
결국 눈물이 흘러넘치고 만 루이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기껏 예쁘게 꾸미고 나왔는데. 그래도 기념일이라고 내심 많이 기대했는데. 어쩜 완벽한 남자가 이럴 때만 무심한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이런 것 때문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성긴 얼음이 와그작 깨지는 것처럼 무너지는 자존심에 이를 악물고 티엔을 노려봤다.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했다.
“루이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냐.”
티엔은 천천히 루이스를 품에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연인을 안고 등을 토닥이자 루이스도 티엔의 등에 팔을 둘렀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글쎄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날카로운 결정검처럼 티엔을 가슴을 쿡쿡 눌렀다. 여자를, 그것도 연인을 울렸다는 양심의 가책에 티엔은 토를 다는 대신 루이스를 토닥였다. 남달리 사려 깊은 사람이니 아마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걸 제 무신경함이 건드린 모양이었다. 일이 아닌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티엔에게 연인이란 관계는 루이스가 처음이었고, 완벽하려 노력은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또 이렇게 그녀를 상처 입혔단 생각에 티엔은 죄인이 된 기분이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나를 만나러 온 날. 유난히 햇살이 좋고, 네가 햇살보다 더 예쁘게 웃어준 날.”
루이스는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티엔의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무뚝뚝하고 무신경한 남자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다 알면서, 그깟 사탕이 뭐라고. 밀려오는 후회와 자괴감에 루이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만가만 저를 달래려 등을 토닥이는 그 무거운 애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틀린가?”
티엔의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티엔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턱을 잡아올리려다 완강한 거부에 손을 놓았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지 않게 무릎 안쪽에 팔을 넣고, 허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은 그대로 루이스를 번쩍 안아올렸다.
“으앗!”
“이제야 겨우 얼굴을 보여주는구나.”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느냐.”
티엔은 제 목에 팔을 감은 루이스에게 씩 웃어보였다. 수줍게 붉어진 뺨이 붉은 노을을 받아 예쁜 다홍빛으로 물들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담았다.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티엔은 입술을 내밀었다. 살포시 눈을 감고 제게 다가오는 그녀와 가볍게 입술을 부비고, 루이스를 내려놓자 루이스가 발돋움을 해 다시 한 번 티엔에게 살짝 키스했다. 티엔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뺨을 엄지로 쓸다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연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럼 이제 가지.”
“어디로요?”
티엔은 대답대신 씩 웃으며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작고 고운 손은 티엔의 손 안에 충분히 들어오지만 언제나 이 손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잡아야할지는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거리를 걷다보니 가스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티엔의 집으로 가는 길, 문득 사탕가게가 눈에 띠었지만 루이스는 가게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을 뿐 더 이상 다른 여인들이 안고 가는 사탕상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제 손이 아플까 힘주어 잡지도 못하는 연인의 온기가 더 소중했다.
“……티엔?”
진열된 형형색색의 사탕에서 눈을 돌리는데 티엔이 사탕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런 거 없어도 되는데.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티엔은 사탕가게 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까지 루이스가 보던 사탕들의 값을 치르고 봉투를 루이스의 손에 들려주었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느냐.”
“네? 별로 사탕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닌데….”
루이스는 차마 말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사다준 게 기뻐 생긋 웃자 티엔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이트 데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한참 보고 있으니 먹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고 사다준 거라는 걸 알지만 루이스는 그게 더 기뻤다.
“고마워요.”
티엔은 다시 찾은 루이스의 미소에 겨우 시름을 덜었다. 이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루이스는 사탕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볼이 볼록 튀어나온 게 꼭 소녀같이 귀여웠다.
“다 먹을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루이스는 대답 대신 티엔을 올려다봤다. 오물오물 사탕을 굴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을 마주한 티엔은 반들거리는 루이스의 입술에 입 맞췄다. 달디 단 입술이 떨어지자 루이스는 입을 벌려 동그란 사탕을 내보였다 닫으며 사르륵 웃고, 티엔은 집 앞에서 주머니 안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길 모양이었다.
* 이틀이나 늦었지만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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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2015/03/12
“그만 하고 와서 앉아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티엔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티엔은 루이스가 부르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돌아가기 위해선 이 사람이 필요하다. 바위 위에 앉은 루이스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장작더미를 뒤적였다. 또르르 굴러 나온 새까맣고 투박한 감자 네 개. 껍질은 새까맣게 탔지만 나뭇가지로 이리 저리 굴리니 껍질이 타서 떨어진 곳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걸 보니 또 식욕이 돌아 티엔은 루이스가 앉은 것처럼 적당한 돌덩이 위에 앉았다.
“아직 뜨거우니까 손대지 말아요.”
한번 허기가 지니 나무가 타는 냄새마저 식욕을 돋웠다. 지금 만졌다간 입에 넣기도 전에 손을 델 것을 알지만 눈앞에 먹을 걸 두고도 먹지 못하는 건 꽤나 인내가 필요했다. 티엔이 감자를 빤히 보며 침을 꼴깍 넘기는 사이 일어난 루이스는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밟았다. 놀란 티엔이 쳐다보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불을 끄는데, 티엔은 기껏 피운 불을 꺼트리는 까닭을 몰라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해가 지면 더 추워질 텐데?”
“해가 지면 불빛도 더 잘 보이죠.”
티엔은 모든 주도권을 뺏긴 채 휘둘리는 게 묘하게 불쾌해 시선을 돌렸다. 듣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루이스는 마지막 불씨까지 꺼트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감자를 이리저리 옮기다 까맣게 탄 껍질을 반 벗겨내 티엔에게 건넸다. 기분이 상했던 티엔은 잠시 감자와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곤 감자를 받아들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당장은 포슬포슬한 감자를 주린 배에 넣는 게 더 중요했다.
티엔은 제 몫의 감자 두 개를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고 물을 마셨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감자는 소금도 치지 않고 구웠을 뿐인데도 맛있었다. 그리고 먹을 게 들어갔는데도 허기가 달래지기는커녕 더 배가 고파지고 말았다. 어릴 적 정관정요를 다 외우지 못해 스승님이 벌로 다 외울 때까지 식사를 금지했을 때도 이렇게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티엔이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루이스가 제 몫을 하나 양보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티엔은 염치가 없어 선뜻 받지 못했다. 아직 하나도 채 먹지 않은 루이스는 입을 오물거리며 감자를 집어 내밀었고, 티엔은 못 이긴 척 받았다. 티엔은 마지막 감자를 루이스가 하는 것처럼 천천히 먹었다. 물론 그 하나를 먹는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허기가 달래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감자를 먹는 사이 하늘엔 검은 장막이 드리웠다. 둥근 달과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장식하고, 루이스는 챙겨온 모포 한 장을 티엔에게 건넸다. 황궁을 떠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침상도 없이 냉기가 올라오는 땅에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자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티엔이 모포를 들고 가만히 있자 루이스가 다가와 모포를 삼단으로 접어 불을 피웠던 자리 옆에 펼치곤 두꺼운 쪽은 깔고 나머지 한쪽과 외투를 덮고 자야한다고 일러주었다. 티엔은 방금 먹었으니 바로 누울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내일도 길을 가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했고, 어차피 불을 피울 수 없다면 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성 싶었다.
티엔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양손으로 팔을 쓸며 온기를 더하는 사이, 루이스가 물통을 담았던 주머니에서 통을 꺼냈다. 빈 주머니에 불을 지필 때 감자와 함께 넣었던 둥근 돌은 아직도 뜨거워 장갑을 낀 손으로도 못 집고 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담아야 했다. 주머니 안에 뜨거운 돌을 넣은 루이스는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던 티엔에게 건넸다.
“안고 자는 게 없는 것 보단 나을 거예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무엇이냐 묻는 대신 저를 빤히 쳐다보는 티엔에게 루이스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엔 그저 고집 센 귀족 도련님이겠거니 했는데, 힘든 길도 힘들다 소리 한 번 않고 따라오는 게 장하기도 하고 평생 배고프고 추운 걸 몰랐을 사람이 불평 한 번 않는 게 놀랍다 못해 신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아무리 말단 관직에 서출이라 해도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으스대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 귀한 집 자제분은 명령도 강요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하다 뿐이지 정갈한 말투와 행동거지가 옛 성현들이 그리는 선비의 모습 그대로라 루이스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굳센 입술이며 침착하지만 강한 눈매, 짙은 눈썹.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루이스는 이 년 전 헤어진 친구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험한 산을 타며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몇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며 떠돌았다. 자신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익힌 것들은 루이스가 이런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산을 헤매던 그때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 그때도 둘이 감자를 캐 나눠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금도 물도 없이 참 잘도 먹었단 생각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더러 가끔씩 외로워질 때면 그냥 그녀를 따라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늙은 주인어른을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남기로 한 걸 후회하진 않지만 가끔 그 아가씨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긴 했다. 귀한 가문의 따님이니 아마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루이스는 추억이 된 기억을 회상하며 외투의 끈을 풀었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나았다. 지금은 적이 나타나도 어느 정도까진 대처할 수 있고, 식량도 있는 데다 야영 경험도 있고 추적이 붙은 것도 아니니 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루이스가 외투를 이불 대신 덮고 누우려는데, 티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안개가 걷힌 밤하늘엔 크고 둥근 달이 은은하게 빛나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뜨거운 돌이 든 주머니의 온기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뱉었다. 뿌연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밤하늘의 광경에 넋을 잃고, 경치에 취한다. 티엔은 먼 산골로 유배 간 이들이 자연을 노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을 벗 삼아 술 한 잔에 시를 읊는 것이야말로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닌가.
티엔은 그런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적어도 티엔에겐 허락되지 않은 삶이었다. 훌훌 털고 떠나버리기엔 제 어깨에 짊어져야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 모두를 떨쳐버리기란 쉽지도 않을 뿐더러 티엔은 제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가며 얻은 자유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쾌해진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스가 깔아둔 모포에 누웠다.
딱딱하고 냉기가 올라오는 잠자리가 불편해 이리저리 뒤척이던 티엔은 몸을 모로 뉘었다가 다시 바로 누웠다. 주머니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전부 막아주진 못했고, 군데군데 돌이 박힌 돌 때문에 어떻게 누워도 등이며 다리가 욱신거렸다. 티엔이 자리를 못 잡고 몇 번 쯤 자세를 바꾸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티엔이 고개를 들자 루이스는 덮고 있던 외투를 티엔에게 건넸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민 두꺼운 외투를 받자 루이스는 다시 모포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티엔이 외투를 돌려주려 했지만 루이스는 티엔에게 등을 돌리며 난 익숙하니 괜찮다고 말하곤 길게 하품했다.
“흐아암. 그냥 아래 한 겹이라도 더 깔아요. 돌이 식으면 더 추울 거예요. 해가 뜨면 또 쉴 새 없이 걸어야 하니까 뒤척이지 말고 자둬요.”
티엔은 한사코 돌려주려고 외투를 넓게 펼쳐 루이스의 모포 위에 덮으려 했다. 루이스의 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단호함에 손을 거뒀다. 티엔은 루이스에게 외투를 돌려주는 대신 덮고 있던 제 외투를 아래 깔고 발끝부터 배를 덮는 게 고작인 루이스의 외투를 몸 위에 덮었다.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루이스의 외투와 달리 티엔의 외투는 늑대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값은 물론 보온성도 비교할 수 없었지만 열을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과 하나를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루이스의 친절을 바닥에 깔 수 없었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우니 아까보단 한결 나았다. 루이스의 외투 위에 모포를 한 겹 덮긴 했지만, 그래도 어깨며 가슴이 휑해 외투를 끌어올리자 이번엔 발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키차이가 있다 보니 몸을 다 덮기엔 외투가 짧았다. 발과 가슴 사이에서 고민하던 티엔은 그대로 외투의 모자 부분으로 목을 감쌌다. 외투를 덮지 않아도 모포로 덮으면 바람은 피할 테고, 두꺼운 가죽신발에 안에는 부드러운 털을 덧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고 가만히 숨을 쉬고 있으면 작은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 바람에 나무의 잔가지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작은 숨소리. 티엔은 그 소리를 듣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하루종일 걷다보니 지치기도 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하늘 가득 펼쳐진 별이 저마다 반짝이는 그 절경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황궁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찬란하고도 순수한, 때묻지 않은 별빛. 궁에선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 없었는데. 티엔은 그 별빛에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르지 않은 흙의 축축한 냄새, 나무와 풀이 내는 성긴 겨울의 냄새. 숨을 뱉을 때마다 뿌옇게 흐려지는 하얀 입김. 티엔은 변하지 않는 하늘을 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티엔의 호흡이 겹쳐지고, 천천히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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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2015/03/06
티엔이 멀건 죽으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루이스는 바삐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거친 외투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짐을 꾸리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티엔은 루이스가 한쪽 벽에 걸어놓은 제 외투와 갑옷, 검을 확인하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져 계곡을 떠내려온 것치고 티엔의 몸은 멀끔했다. 어딜 크게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긁힌 상처 하나도 없는데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몸이 개운하고 상쾌했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낡았지만 깨끗한 면옷을 집어들었다. 짐을 꾸리던 루이스가 지나가며 입고 있던 비단옷은 아직 덜 말랐으니 귀한 옷이면 들고 가라고 말했지만 티엔은 고개를 저었다. 옷 한 벌에 연연할 것도 아니거니와 티엔은 애초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린 것은 평민의 옷이라서가 아니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데다 날렵한 루이스의 몸에 이런 옷이 맞을 리 없으니 분명 루이스를 거둔 이의 것일 텐데,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의 옷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일단 성의를 생각해 입었지만 그래도 소매가 짧았다. 어쩔 수 없는 지라 훤히 드러난 손목을 매만지던 티엔은 조용히 혼자 갑옷을 입었다. 출병할 때보다 더 결연한 의지로 매듭을 묶고, 외투를 걸치고 검까지 차고 방을 나오니 다 짊어질 수 있을지 의뭉스러울 정도의 짐이 나와있었다. 군장을 비롯한 모든 짐싸기는 간결하고 정말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기본이거늘. 티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길을 떠나기 전부터 괜히 동행의 심기를 어그러뜨릴 필요도 없거니와, 지금 티엔은 머리를 숙여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종이로 싼 뭉치들이 서너개, 두꺼운 모포가 둘, 그리고 낡은 천으로 둘둘만 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모자가 달린 긴 외투를 덧입은 루이스는 바닥에 꿇어앉아 능숙하게 늘어놓은 짐들을 한 데 모았다. 두꺼운 모포를 착착 접는 것부터 시작한 짐싸기는 금새 하나의 뭉치가 되어 등에 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요령좋게 어깨끈까지 만든 루이스가 짐을 지고 힘을 주며 일어났다. 그런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티엔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짓에 의미를 모르고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게 없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작은 집을 나서니 바깥은 온통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해 햇빛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내리쬈다. 아직 입춘이 되지 않은 데다 북쪽 땅인데도 싹을 틔운 것이 신기해 나무들을 둘러보며 걸었다. 비가 왔는지 땅이 축축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 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람이 다닌 티가 나는 좁은 길은 루이스가 다니며 만든 길이리라. 나무와 하늘을 둘러보던 티엔은 곧 흥미를 잃고 루이스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이 다 가리도록 진 짐의 가장 위, 천으로 감쌌지만 감출 수 없는 형태의 물건에 티엔은 한 손으로 나무를 짚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가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뱉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 같이 멈춰서니 루이스가 멀쩡한 길을 두고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고, 티엔은 그저 인적이 드문 길로 가겠거니 하며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 지나자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었다. 분명 남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일 텐데 오르막이 계속되고 길도 없는 나무 사이를 헤쳐가려니 힘은 힘대로 드는데, 점점 숲도 우거지는 게 수상해 티엔은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거지?”
“청 주둔지로 가야죠. 그나마 14군이 제일 믿음직하니 거기로 갈 거예요.”
루이스는 앞서 걸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청의 주둔지, 거기에 14군이라는 소릴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냥 막역하게 청의 영역까지가 아니라 딱 짚어 말하는 게 미심쩍었다.
“왜 하필 14군이지? 황자들, 아니 황자님들이 계신 곳도 있지 않나?”
티엔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이스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타박 대신 설명을 했다.
“아무리 청의 사람이라도 그렇게 좋은 검과 갑옷은 구하기 힘들죠. 그렇다면 꽤 명망높은 귀족이란 뜻인데, 황자들은 자신의 세력에 따라 당신을 박대할 수도 있고 몰래 제거할 수도 있죠.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도와줄 사람은 곰 장군밖에 없어요.”
간단하지만 타당한 논리에 티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제 옷차림만 가지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이런 곳에서 썩히긴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루이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등을 가릴 정도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루이스와 짐이라곤 봇짐 하나도 들지 않은 티엔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매일 무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다, 어마마마나 황제폐하, 황후마마께 문안을 여쭙느라 꽤 걷는 편인데도 쉬지도 않고 험한 산길을 가다보니 절로 숨이 찼다.
“서둘러요, 해가 지면 더 갈 수 없으니까.”
결국 티엔은 조금씩 뒤쳐졌고, 앞서 걷던 루이스가 뒤쳐진 티엔을 기다리느라 멈춰서고 다시 길을 가는 게 반복됐다. 가끔 루이스는 갔던 길을 되돌아와 같이 걸으며 아직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으니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했지만 티엔은 오히려 그 말에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힘들 일 하나 없는 황궁에서보다, 오늘 깨어났을 때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더더욱. 남자로서 저보다 어리고 왜소한 이에게 체력으로 밀린다는 건 퍽 자존심 상하는 거라 티엔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떨어지기 전에야 나온 평지에 티엔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오르막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이 붉게 물들자 바삐 걷던 루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왔고 지금 제가 어디쯤 왔는지 모르는 티엔은 루이스가 더 걸을 생각을 않자 안심하는 한편,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골랐다.
두리번거리던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루이스를 따라 들어간 티엔은 루이스가 너른 돌 아래 짐을 내려놓는 걸 보곤 팔짱을 꼈다. 온종일 산을 타다 겨우 평지를 만난데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야영을 준비하는 게 영 못마땅했다.
“얼마나 온 거지? 어제가 보름이었으니 달빛을 따라 더 가도 되지 않나?”
“달이 밝아서 안 돼요.”
루이스의 단호한 말에 티엔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한밤중에 험한 길을 가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티엔은 마음이 급했다. 안전하게 가는 게 엿새, 루이스가 말한 게 사나흘, 밤낮없이 걸으면 하루 하고 한나절. 대체 어떤 길로 어떻게 가기에 해가 지면 꼼짝도 않고 사나흘이라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한나절을 걷는 동안 말 한 마디 않고 따라왔지만 정말 믿어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가 가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길안내를 하게 할 수도 없었다. 자칫 제게 앙심을 품고 안격의 소굴로 가서 팔아넘긴다거나, 혼자 헤매게 두고 갈 수도 있다. 티엔은 지금 제 처지를 알기에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정말 그렇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티엔은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재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저울질했다.
루이스는 티엔이 가만히 서있는 데도 개의치 않고 주위에서 나뭇가지며 마른 나뭇잎을 모아다 불을 붙였다. 나무가 타는 냄새에 티엔은 복잡한 심경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붉은 눈동자에 맞서 불쾌함을 표하자 루이스는 짐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다짜고짜 티엔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날아드는 물체에 놀란 티엔은 냉큼 그것을 잡아챘다.
묵직한 주머니를 흔들자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물이나 술인 것 같은데, 이걸 주는 의미를 몰라 루이스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이미 불이 오른 장작더미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티엔은 주머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다 주머니의 매듭을 풀고 안에 든 나무통의 마개를 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게 술은 아닌 것 같은데 물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망설이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냥 물이에요.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실 테니 주세요.”
“…….”
생각을 읽혀 민망해진 티엔은 물을 들이켰다. 깨어나 먹은 죽 이후로 처음 입에 대는 물은 유독 시원하고 상쾌해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갈증을 해결한 티엔은 물통에서 입을 떼고 입가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마개를 닫아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자 티엔을 보고 있지도 않던 루이스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고, 바람소리와 마른 장작이 타며 틱틱 불티가 튀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티엔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온 길을 보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며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그 아래 드리운 겨울산의 풍경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문득 황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그리던 그녀를 떠올린 티엔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제가 행방불명된 지 꼬박 이틀. 내일이면 사흘이 되니 황도에 연락이 갈 것이다. 말은 안 해도 제가 아버지처럼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리진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명절이면 다른 황숙들이 황제께 문안을 여쭙고 복진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때도 티엔의 어머니, 1황자 적복진은 홀로 그 모진 풍파를 견뎠다.
그렇기에 티엔은 어머니를 위해서 더 완벽한 아들이 되고자 했고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해 침묵했다. 어릴 적 왜 제겐 아버지가 안 계시느냐 여쭈었을 때 어머니의 그 슬픈 미소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티엔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패륵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하나뿐인 아들로서 어머니께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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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화면 뒤에 비치는 풍경
2015/03/02
“뭐해?”
“그냥.”
승리의 여운이 강하게 휩쓸고 지나간 홀든A의 대기실엔 평화로운 침묵이 감돌았다. 경기 후 이어진 아이돌 공연을 보겠다며 나갔던 루이스와 토마스, 이글은 무대 앞에서 적팀이었던 하랑과 제삼과 함께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야광봉까지 들고 놀다 카메라에 잡히기까지 했으니 그정도면 말을 다 한 셈이었다. 평소같았으면 다이무스가 바로 잡아왔겠지만 결승 경기도 끝났겠다, 그 뒤론 다른 게임의 결승이 이어지기에 사이퍼즈 결승에 참여했던 팀은 그대로 비는 시간이라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제레온과 함께 인터뷰를 하러 갔고, 제일 먼저 개인 인터뷰를 한 벨져 홀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루이스를 맞았다. 루이스는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경기 직전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동안의 긴장이 풀릴 대로 풀린 나머지 대기실에 오자마자 문자 그대로 뻗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벨져.”
“왜.”
“시상식까지 얼마나 남았지?”
루이스는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를 하며 물었고, 잡지를 뒤적이던 벨져는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쳐다봤다.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 눈 밑이 거뭇했다. 벨져는 혀를 차고는 옆에 앉은 루이스에게 한 마디했다.
“못 해도 한 시간. 잠깐 눈이라도 붙이던가.”
“카메라라도 들어오면 어떡해.”
“언제는 네가 카메라 신경 쓰기는 했냐?”
루이스는 시니컬한 벨져의 대답에 피식 웃곤 그대로 옆으로 몸을 누였다. 벨져의 허벅지를 베자 벨져가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기실 안의 텔레비전을 끈 뒤 루이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천천히 쓰다듬었다. 대기실 안은 온풍기를 틀어놓은 탓에 겉옷을 벗고 있어도 될 정도로 따뜻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은 시니컬한 말투와 달리 상냥해 절로 눈이 감겼다. 벨져는 자라는 듯 말도 걸지 않았고, 긴장의 끈을 놓은 루이스의 의식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빨려들었다.
벨져가 대충 훑고 있던 잡지를 전부 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질려갈 무렵,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벨져가 고개를 돌린 순간 피할 새도 없이 카메라와 마주했다. 익숙한 카메라는 대기실 상황을 찍는 회사 카메라라 벨져는 긴장을 놓았다. 분위기를 띄우거나 실없는 소리로 팬들을 관리하는 건 이글과 토마스의 역할이었고, 자신과 루이스, 다이무스는 대개 그들과 어울리는 정도였다. 다이무스는 워낙에 과묵한 편이라 따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루이스는 게임할 때와 생활하는 모습이 전혀 다른 점이 팬들에게 호평을 받는 편이었다. 벨져 홀든, 쉬레는 게임 스타일과 행동이 판박이라는 말을 들었고 벨져는 그것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게임 스타일은 그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이무스는 견고하고 탄탄한 플레이를 좋아했고 그만큼 냉철하고 신중한 사람인 동시에 보수적이었다. 역전의 한방의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아낼 배짱은 있으나 그만큼 유연한 사고를 기대하긴 어렵다. 벨져는 그 부분을 루이스가 보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이스는 근거리 캐릭터의 정석을 밟아가는 다이무스와 달리 유동적인 플레이를 했다. 프로즌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위기에 몰린 순간에 발휘하는 침착함을 무기로 빈틈을 파고드는 플레이에 강한 선수였다.
대중은 이글이 그저 제멋대로 날뛰길 좋아하는 딜러라 평했지만 이글이 무모해보일 정도의 진입을 하는 건 두 사람이 그만큼 앞을 보고, 마에스트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서포터가 커버를 해준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근거리 딜러의 역할을 맡고 있는 벨져는 제 팀이 시즌을 지배하는 것이 그 견고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프로즌'과 '쉬레'의 연계지만.
벨져는 카메라를 보며 검지로 루이스를 가리켰다. 아마 이걸 쓴다면 화면 아래엔 우승 후에 맛보는 꿀잠 같은 자막이 실릴 것이다. 벨져는 더 말하는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미리 공지된 밸런스 패치는 선수들은 물론 유저들 전체가 술렁일 정도로 과격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근거리 딜러로 쓸만한 캐릭터들이 하향당했는데 해금 레벨이 낮은 원거리 딜러 캐릭터들이 상향을 받으니 근딜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벨져는 상향을 받은 원거리 캐릭터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솔로로 공방을 도는 것과 5명이 하는 게임은 다르다. 그것이 정설이었지만 홀든A의 딜링은 이글보다 벨져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정확한 건 또 부딪혀봐야 알겠지만 이래서야 근딜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건 명확했다. 더구나 다이무스의 은퇴 얘기가 슬슬 나오고 있으니 다음 시즌의 홀든A는 지금과 다른 모습일 것이다. 벨져는 이렇게 되면 오늘 경기가 홀든A의 마지막 우승이 될지도 모른다는 글을 읽고 페이지를 종료했다. 홀든A는 쉬레가 캐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뭣도 모르는 소리.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그 글을 쓴 사람이 경기는 물론 사람도 볼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벨져는 자신이 우위를 점하는 싸움을 좋아했다. 언제나 승리는 제 것이었으며 근접에서 붙었을 때 나올 수밖에 없는 실력의 차이를 즐겼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다.'라고 하는 치어풀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캐릭터가 하향을 당하네, 상향을 받았네 하는 것은 공고한 쉬레의 실력을 깎아내릴 수 없다. 그저 앞으로 공방에서 근접전을 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벨져의 생각과 달리 카메라는 벨져가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물러가지 않았다. 어차피 몇시간씩 찍어도 나가는 건 고작 몇 분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에 벨져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오면 방송분량은 나오겠지만 벨져는 루이스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 분 후, 이글이 앨리셔랑 악수하고 사진도 찍었다고 소란을 떨며 대기실에 들어왔다. 그 소리에 루이스가 눈을 뜨자 이글이 날아든 잡지를 맞으며 괴상한 소리를 내고, 벨져가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짜증을 냈다.
“아, 작은형! 쫌!!”
“닥치랬지.”
“됐어, 나 깼어. 몇 시야?”
루이스가 일어나자 벨져가 이글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글은 샐쭉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고, 루이스는 벨져 다리가 저릴까 그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아니나 다를까 벨져는 루이스의 손이 닿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깨우지.”
“흥, 네 머리 하나가 얼마나 무겁다고. 놔, 그냥 둬.”
루이스는 아직 잠에 취해 고개를 끄덕이며 벨져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얹고 있을 땐 몰라도 막상 떼면 그동안 눌렸던 다리에서 전기가 찌르르 오르기 마련이라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고 몸을 비틀었다.
“너, 익...!”
“우리 벨져 빨리 나아라~.”
태연하게 다리를 주무르며 배싯 눈웃음을 치는 루이스를 보며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고, 앞에선 이글이 루이스를 응원하며 되도 않는 노래를 불렀다. 벨져는 팔을 뻗어 루이스의 목을 걸었다. 다소 과격한 헤드락에 루이스는 벨져의 허벅지를 때리며 항복을 외쳤지만 심통이 난 벨져는 루이스를 놓아주지 않았고, 루이스는 벨져의 허리에 팔을 둘러 메달려 벨져의 배에 얼굴을 부볐다.
“또 그럴 거야?”
“당연하지.”
루이스를 제압한 채 벨져가 잠시 시간을 주고 묻자 장난을 치다 미끄러져 거의 소파에서 내려간 루이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가 그대로 손을 놓자 루이스는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글은 이제 루이스에게 붙어 자기 핸드폰을 들이밀며 자랑을 해댔고, 벨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스는 이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시 소파에 앉았고, 벨져는 냉장고에서 음료수 두 캔을 꺼냈다. 꺼내자마자 이온음료 캔을 따 마시며 소파에 다가가자 루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마시던 걸 준 벨져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탄산음료의 캔을 땄다. 반쯤 마시고 루이스에게 주자 루이스가 캔을 휘휘 흔들다 들이켰다. 벨져는 쉬지도 않고 쭉쭉 들이키는 루이스를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자 한숨을 쉬곤 등을 두드려주었다. 탄산음료를 마실 때면 늘 사레가 걸리면서 왜 꼭 탄산을 고집하는지.
벨져는 루이스의 등을 쓸어주다 시상식하러 가자는 소리에 일어났다. 루이스는 눈가가 빨개져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벨져는 늦게 일어난 루이스를 기다려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맞잡는 루이스의 손은 서늘해 온기에 흐물흐물해진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다음에도 이기자.”
“그래.”
루이스는 언제나 경기를 이기고 나면 다음을 기약했다. 벨져는 다음이란 막역한 기약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루이스의 말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다음 제 손을 꼭 잡아오는 그 뿌듯함이 좋아 벨져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모두 가질 것이니, 선택은 없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승자로서 단상에 서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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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2015/02/28
第 二 章. 高山流水
티엔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 말을 달렸다. 점점 더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땅이 단단해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채찍질했다. 길이 있다면 찾으면 그만. 하나라도 생포해 신출귀몰하는 경로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곳곳에 숨은 안격을 소탕할 수 있을 터였다. 따라오던 병사와 장수는 티엔의 말을 쫓지 못해 뒤쳐졌지만 티엔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추격을 포기하지 않자 앞서가던 다섯 중 둘이 고삐를 돌려 방향을 틀었다. 티엔은 그들을 쫓는 대신 세 사람을 쫓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협곡으로 들어갈 테고, 그럼 피차 길을 모르니 승산이 있었다. 달리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끝. 티엔은 거의 잡았단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쫓았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말을 멈춰 세운 이들은 물러날 곳이 없는 절벽에 다다라 티엔을 마주했다.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죽겠다.”
눈치를 보기 바쁜 셋은 그래도 쪽수로 어찌 해보려는 듯 했지만 티엔의 당당한 태도에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척 봐도 귀공자스러운 데다, 여유롭기까지 하니 셋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인지 아니면 그저 허세를 부릴 뿐인 애송이 도련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사이, 셋을 두고 다른 길로 빠졌던 두 사람이 티엔의 뒤에서 동료들에게 눈짓했다. 부싯돌과 폭약을 본 그들은 여유롭게 비죽이며 티엔에게 말을 걸었다.
“하, 귀한 도련님께선 검을 께나 배우신 모양인데. 그래도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까?”
“여긴 말이오, 굶주린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거든.”
“네놈들의 묘자리를 쓰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따라와라.”
폭약에 불이 붙은 걸 본 셋은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폭탄을 던지면, 바로 말을 달려 도망간다.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고, 물이 있다 해도 그 전에 어디라도 부딪혔다간 꼼짝없이 저승길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신호를 기다렸다.
수상쩍은 행동을 눈치 챈 티엔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불이 붙은 폭약이 날아들고, 벼랑 끝에서 눈치를 보던 안격들이 티엔을 지나쳐갔다. 그들이 갑자기 달려들자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울고, 티엔은 손 쓸 수도 없이 굉음을 내며 터지는 폭탄에게서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터진 열기와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감각에 눈을 번쩍 뜨자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말과 무너져 내지는 바위, 그리고 푸른 하늘가 들어와 티엔은 고삐를 단단히 쥐고 안장에서 발을 뺐다. 점점 추락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티엔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곡물의 겉이 얼어있지 않기만을 빌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잃지 말자고 속으로 빠르게 되뇌었으나 몸을 덮치는 강한 충격에 티엔의 정신은 아득한 어둠 저 편으로 멀어졌다.
멀어져가는 빛무리.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짙은 어둠 속에선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숨이 막히고, 이내 발버둥조차 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빠지자 할 수 있는 거라곤 저 멀리 아득하게 빛나는 빛무리에 손을 뻗는 것 뿐이었다.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이는 빛은 얼핏 푸른 용의 형상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일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빛무리가 사라지자 남은 건 칠흑같은 어둠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 홀로, 얼마인지 모를 시간동안 티엔은 모든 것을 잊은 채 평안한 고요에 잠겨 있었다. 차갑지만 부드럽게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의식을 깨우고 티엔은 그제야 제 의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온몸이 물 먹은 솜마냥 무거웠지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낯설고 투박한 흙벽이 보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티엔은 숨을 죽였다. 제게 손이 뻗어오는 게 느껴지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손목을 잡아챈 티엔은 그를 끌어당기는 반동을 이용해 일어났다. 순식간에 역전된 위치. 양손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올라탄 후에야 티엔은 제가 제압한 사람을 바로 봤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깜박. 그 모습이 어릴 때 후원에서 잡은 토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찰나, 허리를 때리는 둔탁한 통증에 티엔은 눈살을 찌푸리며 움켜쥔 손목을 더 세게 잡았다.
“악! 이거 놔요!”
발버둥 치며 몸을 비틀더니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티엔은 한 덩어리가 되어 침상에서 떨어졌다. 떨어지며 부딪힌 충격에 손을 놓친 사이 다시 위치가 역전되고, 티엔은 목덜미를 콱 잡아오는 손에 쿨럭였다. 토끼같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먹잇감을 물어뜯을 것 같은 맹수의 눈이 되어 티엔을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 움찔한 티엔은 반격하려 손을 뻗었지만 어깨에서 찌르르 퍼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티엔은 뭐가 잡히는 게 없을까 하고 바닥을 더듬거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저항을 멈췄다. 안격에게 잡혀 포로가 된 것이라면 이렇게 저를 지키는 감시인 따위와 몸싸움을 하며 힘을 뺄 필요가 없다. 티엔이 저항하지 않자 제 위에 올라탄 이 역시 손을 거뒀다.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단단히 목을 틀어쥐던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한숨을 쉬며 일어나 손을 뻗는데, 티엔은 그 의미를 몰라 멀뚱거리다 침상을 짚고 일어났다.
“하아…. 정말이지…….”
“여긴 어디지?”
“다짜고짜 사람을 공격해놓고 하는 말이 겨우 그겁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티엔은 제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는 낯선 이를 향해 물었다. 뚱한 얼굴에 팔짱을 끼고 티엔의 무표정을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차분히 티엔을 훑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에 티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에 작은 한숨소리가 더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뜬 낯선 이는 다시 티엔을 바라봤다.
“당신, 계곡에 쓰러져있었어요. 여긴 내 집이고, 청의 주둔지까진 한참이죠. 이 정도면 대답이 됐습니까?”
티엔은 그 소리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 건 둘째치고,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거니와 음흉한 숙부들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우위를 점령했단 생각에 방심하고 만 제 안일함과 경솔함이었다. 장차 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이란 자가 이리 쉽게 함정에 휘말려서야 황제 폐하는 물론 백성들을 볼 낯이 없다.
티엔은 인상을 쓰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회와 반성은 모든 일이 해결 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당장은 다소의 굴욕을 당하더라도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 티엔은 조금 전에 들은 말을 곱씹었다. 계곡에서 발견됐고 주둔지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면 계곡물을 타고 흘러온 것일 텐데, 그렇다면 이곳은 협곡의 안이라는 소리였다.
전부터 협곡을 타고 내려가 급습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던 티엔은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잘 빠져나가면 협곡의 길을 아는 게 전화위복이 될 지도 모른다. 티엔은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다 퍼뜩 머릿속을 스친 위화감에 눈을 떠 낯선 이를 쏘아봤다.
“넌 협곡 안에 혼자서 뭘 하는 거지? 분명 마을은 안격에 의해 몰살당했을 텐데.”
티엔의 싸늘한 말에 화롯가에 쭈그려 앉아 불을 지피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계곡에서 사람을 건져 데려왔다고 무조건 은인이라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런 험한 곳에 혼자 사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티엔은 정보를 곱씹는 것보다 눈앞의 사람이 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게 우선이었음을 되새기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집주인은 무기로 쓸 만한 게 뭐가 있을지 훑으며 퇴로를 살피는 티엔이 무색할 정도로 무심했다.
우드득 소리가 나도록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화로를 뒤적이다,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양손을 들어 보이는 것은 해칠 의사가 없다는 뜻이지만 티엔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 빼지 않아도 돼요. 마을이 그렇게 되기 전부터 나는 고아였고, 죽 여기에 살았으니까. 청의 귀족이시니 각 변경에 왕실의 기록보관소가 있다는 건 아시겠죠. 여긴 그 관리인 처솝니다. 전 관리인이었던 윌리암 헌트 대인이 세상을 뜬 뒤론 아무도 찾지 않지만.”
담담하지만 회한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티엔은 이게 거짓이 아닌 진실임을 눈치 챘다. 권모술수와 암투가 판을 치는 황도에선 이렇게 진심을 숨기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말하는 게 드물거니와, 제게는 차갑기만 하던 눈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부드럽게 휘며 이곳에 없는 누군가의 모습을 그렸다. 티엔은 그제야 조금 경계를 풀고 아직 은인과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름은?”
“빨리도 묻는군요.”
대답 대신 미소를 띠운 그는 여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선이 고운데다, 젖살이 빠지지도 않은 앳된 얼굴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저 머리를 자르거나 틀어 올려 상투를 틀지 않았으니 열일곱은 안 됐겠거니 지레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엔은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은인은 티엔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불이 피어오르는 걸 가만 지켜보기만 했다. 순하게 생겨선, 아무래도 처음 공격한 일을 마음에 담아뒀거나 고집이 센 성격인 모양이라 티엔은 한 수 접기로 했다.
“내 기억해두겠다. 돌아가면 확실히 보은하지. 하지만 그러려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뭐, 그도 그렇네요.”
티엔은 고귀한 황손이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부리면 부렸지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그것도 고아에 불과한 평민의 비위를 맞추려니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온 말은 티엔이 생각한 것보다 무뚝뚝하고 시큰둥했다. 티엔으로선 어렵게 한 말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시큰둥하고 쌀쌀맞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티엔이 눈치를 살피자 은인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었다. 고개를 들어 티엔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토끼의 것이 아니라 맹수의 것에 가까웠지만 티엔은 피하지 않았다.
“루이스. 성은 없습니다.”
“……티엔. 티엔 정이다.”
루이스라는 이름은 그에게 퍽 잘 어울렸다. 한겨울의 눈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어감이 혀끝에 맴도는 게, 박하사탕을 머금은 것 같기도 했다. 이름을 말하곤 제 내면을 꿰뚫어보듯 바라보는 눈빛에 티엔은 그만 신분을 숨겨야한다는 것도 잊고 본명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열다섯에 패륵의 지위를 하사받은 뒤로는 친어머니조차 불러주지 않게 된 이름이었다. 어째 자꾸 실수만 연발하는 것 같아 목이 탔다. 어차피 정씨가 하나인 것도 아니고 이런 변경의 사람이 황족에 대해 뭘 알겠냐마는, 티엔은 말해놓고 혹시라도 루이스가 제 정체를 알아챌까 긴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 당신의 갑옷과 검은 저기 걸어뒀으니 몸이 낫거든 가세요. 청의 주둔지까진 걸어서 엿새면 될 겁니다.”
“잠깐.”
방을 나서려던 루이스가 티엔의 말에 돌아봤다. 엿새라니, 티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협곡이 험난하다고 길다 해도 육일씩이나 걸릴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흘씩이나 걸린다니, 대체 얼마나 떠내려 왔단 말인가. 티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곤 말했다.
“물론 협곡을 따라 밤낮을 쉼 없이 걸으면 하루하고 한나절이면 갈 수 있죠. 하지만 그건 여기가 안전할 때의 얘기고, 지금 이곳은 안격이 둥지를 튼 후예요. 당신과 그들, 누가 더 유리할지는 손바닥을 뒤집듯 뻔하죠. 안전한 길을 일러줄 테니 동이 트거든 걷기 시작해서 해가 지면 숨어요.”
티엔은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하나로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루이스는 대번에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티엔은 그럴수록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결국 인상을 쓰며 루이스가 티엔을 바라보자 티엔은 용건을 말했다.
“네가 필요하다.”
갑작스런 말에 놀란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엔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절실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그 눈빛에 루이스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티엔을 노려봤다.
“난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줄 수 있는 돈도 명예도 다 내겐 부질없으니 길잡이로 고용하려는 생각일랑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너 역시 청의 백성이 아닌가?”
“나라는 내게 베푼 게 없는데, 내가 져야 할 의무가 있나요? 만약 있다 해도 당신은 내게 명령할 수 없어요.”
냉소적인 말에 티엔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데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할 수 없거니와 루이스의 말엔 감정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티엔은 일순 드러낸 감정을 언제 그랬냐는 듯 감추고 태연을 가장하는 루이스를 보곤 손목을 놓았다. 루이스는 차갑게 식은 무표정으로 손목을 매만졌고, 티엔은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패륵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은 전부 저희가 지게 됩니다. 그것만 기억해주세요.’ 떠나기 전, 브루스의 심복인 마틴 챌피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저 하나를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책임을 덮어쓸 걸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 티엔에겐 회복을 기다릴 시간도 숲을 헤맬 시간도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정패륵을 찾기 위해 협곡을 헤매고, 또 누군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말싸움을 하고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게 분명했다. 티엔은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하루라도, 한 시라도 더 빨리 돌아가 그들의 근심을 더는 것. 그것이 가장 급했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책임은 전부 애꿎은 사람이 지게 돼. 무고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을 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해야해. 그러니…, 부탁한다.”
티엔은 손마디가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움켜쥐며 루이스의 등에 대고 말했다. 더 상대하지 않으려는 듯 방을 나서던 루이스는 티엔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그러고 있기를 얼마. 루이스가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손목을 매만지던 루이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방 안을 느릿하게 걸어 다니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일말의 망설임을 품고 티엔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 했다. 티엔은 제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속임수도 없었기에 떳떳하게 루이스를 마주했다. 침묵이 이어지고 루이스의 공허한 걸음이 늘었지만 티엔은 인내심을 갖고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요. 완전히 계곡을 따라 최단경로로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걸으면 사나흘 정도 걸릴 거예요.”
티엔은 루이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하루를 꼬박 잤으니 배가 고플 거라며 죽을 가져오겠다고 방을 나갔다. 과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티엔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하늘이 돕기를 바라며 하루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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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0.
2015/02/25
* 청조를 기반으로 한 동양 판타지 주의.
맑게 갠 하늘 아래, 훤칠한 금발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미남 하나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관도 아닌 그가 용이 잠들어있다는 협곡, 서북의 변경에 장군 하나만 믿고 따라온 지도 어언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아….”
“마틴,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맑게 갠 하늘 아래, 우중충한 먹구름이 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금발의 미남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다가와 축 쳐진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은 14주둔지의 장군 브루스 보이틀러는 일어나려는 그를 앉히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겨우내 부쩍 자란 청년은 이제 한 달 후면 열일곱이 되지만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진 못했고, 감정을 숨기거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워낙 어릴 때부터 봐와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브루스는 다른 수행원들이나 부하들보다 마틴을 아꼈다. 한미한 집안 출신에, 믿을 구석이라곤 제 능력과 브루스밖에 없는 마틴은 이내 다른 장수들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놀림 받기 일쑤였기에 브루스는 또 그런 일을 당했겠거니 했다.
아무 말 없이 마틴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을 못 맞추고 땅만 보던 마틴은 잔뜩 풀이 죽어 투덜거렸다.
“이번엔 황손 마마님이 오신다면서요. 능력도 인품도 뭣도 없는 2황자도 저렇게 뻐기는데 거기에 하나 더라니, 이번엔….”
“마틴!”
브루스는 당장이라도 황족모욕죄로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마틴의 말을 멈췄다. 그제야 마틴은 아차 싶었던지 브루스의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마틴 혼자의 책임이 아니라, 브루스까지도 사단이 날 터였다. 브루스도 주위를 잠시 살피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마틴의 양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마틴. 그분들을 모시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다. 내 앞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절대 그런 불경한 말을 해선 안 돼. 알겠느냐?”
마틴은 대답 대신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브루스가 물러서지 않고 마틴을 바라보자,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장 어제만 해도 엘리어트가 대낮부터 술에 취한 2황자의 말도 안 되는 시비에 꼬박 반나절을 추운 날씨에 무릎 꿇고 있던 걸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는 데다, 브루스의 공을 가로채는 건 물론 다른 장군들과의 회의에 자꾸만 신분을 들먹이며 어깃장을 놓는 것까지 생각하면 또 다른 황족이 오는 게 반갑지가 않았다.
서북의 변경, 청의 14 주둔지. 숭고한 그랑플람의 의지를 받드는 브루스 보이틀러의 주둔지를 사람들은 곰의 아성이라고 불렀다. 살갗이 살짝 긁히기만 해도 호들갑을 떠는 귀하디귀한 황족님네들이 다른 곳도 아닌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곧 죽기는 싫지만 공은 세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순 가로채기로. 마틴은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않고 허허 웃고 마는 브루스가 답답했지만 마틴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무력하고 한심해 어깨를 늘어뜨리자 브루스는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처럼 마틴의 등을 두드렸다.
“마틴. 정패륵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2황자님과는 분명 같은 황족이시지만, 너도 그분께 배울 게 많을 게다.”
자상한 브루스의 말에 마틴은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브루스는 황제를 오랜 시간 가까이서 모신 신하 중 하나였고, 마틴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를 위해 일한 노장이자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황제도 선뜻 변방의 중심을 맡기고 아들과 손자를 보내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마틴은 납득할 수 없었다.
브루스는 황실의 일은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황제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니 맡은 바 임무를 다하라고만 했지만 마틴은 이제 더이상 브루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소년이 아니었다.
1황자는 황후 소생이지만 서북을 돌아본다는 말과 함께 방랑을 떠나 황도로 돌아오지 않은지 벌써 십년이 넘었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2황자가 태자가 될 법 하건만 황제는 아직까지 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일찌감치 친왕으로 봉해 다른 지역을 통치하게 한 다른 황자들이나 너무 어려 유모 치마폭에 싸여 있는 황자들과 달리 곁에 두고 있는 황자들은 황제의 의중을 살피며 어떻게 하나라도 공을 세워볼까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이었다. 서북 땅에 안격이라는 무리가 국경을 넘보며 대치하기를 수십 년, 그들이 빼앗아간 땅을 되찾으면 그것이 곧 황위를 넘볼 기회가 되니 너나할 거 없이 오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용맹하게 전방에 서기라도 하면 모를까, 고작 곰의 등 뒤에 숨어 뭐라도 떨어지는 게 없을까 전전긍긍하는 용의 후손들이라니. 마틴은 대놓고 브루스에게 공을 세워야 하니 어서 출전 준비를 하라 다그치던 2황자와 그의 동생인 6황자를 떠올리고는 인상을 썼다. 이래서야 황족에게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타고난 것이라곤 혈통밖에 없는 2황자나 간신배의 전형인 6황자도 황실의 자손이라는 것 하나로 얼마나 뻐기는데, 이제 올 정패륵은 또 어떨 런지. 정패륵은 아직 열아홉밖에 안 됐지만 1황자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태어나기 전부터 용의 기상을 타고나 성군이 되리라는 예언까지 받아 문무를 겸비한 자라던데, 과연 소문과 다를 런지 어떨 런지.
마틴은 브루스를 찾아온 병사가 패륵께서 오고 계시다는 말을 전하자 브루스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보이는 행렬과 함께 푸른 용이 그려진 깃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띠었고, 마틴은 브루스를 따라 걸음을 빨리했다
마틴은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곤 브루스의 뒤에 섰다. 말이 달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그 다음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의 청년이 눈에 띠었다. 그를 본 브루스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자 대열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찬바람에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와 말발굽소리가 병영을 감돌고, 이내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온 청년이 주위를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모두 일어나라.”
“신, 브루스 보이틀러. 정패륵을 뵈옵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일단 내 병사들에게 막사를 칠 곳부터 일러줬으면 좋겠군. 꼬박 열흘을 달려왔으니 피곤할 게요.”
간단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낮은 목소리. 정패륵은 마틴이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이게 진짜 황족이구나 싶을 정도로, 황족 특유의 검은 머리칼을 빼면 특별한 것도 없는 2황자와 달리 걸음걸이나 말투, 태도에서 정갈한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것도 모자라 도착하자마자 아랫사람을 챙기는 모습에 마틴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마틴은 미리 브루스가 비워둔 자리를 일러주곤 냉큼 브루스의 막사로 따라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상황과 세력분포를 묻고는 브루스의 말을 경청하는 정패륵의 모습에 마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성군이 될 자질을 타고났다더니, 소문은 틀린 게 없었다. 오히려 소문보다 믿음직한 실물이 앞에 있으니 못난 황자들에게 시달리던 마틴은 감회가 남달라 조용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패륵은 한 손을 턱에 대고 브루스의 말을 듣느라 마틴이 온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브루스의 얘기를 무시하는 것보단 나았다.
“큼, 큼.”
“아, 일어나라. 지도를 볼 수 있겠소, 장군?”
“물론입니다. 마틴.”
브루스가 적당히 말을 끊어준 덕에 마틴은 겨우 일어나 인사말을 덧붙이고 말아두었던 지도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책상을 가득 메운 지도는 청의 영토는 물론이고 끊임없는 접전지역과 안격의 땅, 그리고 남북으로 곧게 뻗은 협곡까지 자세히 그린 마틴의 역작이었다. 수십개의 지도를 참고해 오차를 줄인 것 뿐이지만 브루스는 가장 정확하진 않아도 가장 적합한 지도라며 마틴의 지도를 썼다. 마틴은 내심 기대하며 지도의 요지를 짚어가며 지형과 상황을 설명했다.
“이 협곡은?”
“협곡은 저희도 안격도 들어가지 않는 영역입니다. 이곳에 오래 살던 주민이 말하길, 용의 협곡은 너무 험하고 절벽이 많은데다 땅이 척박해서 도적도 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희도 정찰병을 몇 보냈었는데 협곡을 거슬러 오른 용의 새끼만이 용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대로였습니다.”
“최정예의 병사를 이동시킬 수 있다면, 적의 중심부까지 잠입할 수 있겠군.”
정패륵은 길게 뻗은 숲과 절벽 그림을 긴 손가락으로 짚고 죽 올렸다. 잘생긴 그의 무표정 속에서 마틴은 용의 협곡을 통과하려는 생각을 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큽니다. 협곡을 타고 올라올 것을 염려한 안격놈들이 일대의 백성들을 몰살시켜서 길잡이조차 없습니다. 그곳에 들어갔다가 다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패륵께서 다시 생각하셔야.”
“그렇습니다. 아무리 빠르다할 지라도 너무 위험합니다. 패륵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저는 물론이요, 14군 전체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브루스의 만류에 패륵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한 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매만지며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마틴은 고개를 숙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황자나 6황자였다면 명령에 불복종한다며 노발대발하고 억지를 부렸을 텐데. 아니, 그들은 위험을 직접 무릅쓰려하지도 않는다. 여러모로 보나 정패륵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사내였고, 패륵이라는 지위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흐음….”
“이제 막 오셨을 뿐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신을 비롯한 모두가 도울 것이옵니다. 그러니 우선은 피로를 푸시지요. 평소 드시던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식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정패륵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브루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가 막사를 안내해드리겠다며 함께 나가고, 마틴은 펼쳐둔 지도를 다시 말았다. 마지막까지 그의 시선이 머문 용의 협곡. 마틴도 조금 전 정패륵이 그랬던 것처럼 협곡이란 글자를 보며 그 가파른 절벽과 바위 틈을 오르는 상상을 하다가 지도를 말아버렸다. 어차피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하아….”
마틴은 한숨을 내쉬며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패륵이 와서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 생각했건만, 누가 잘나신 황족님 아니랄까봐 브루스의 만류에도 협곡을 가야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마틴과 브루스만 매번 같은 얘기를 하느라 혀에 가시가 돋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정패륵 앞에서만 그래도 황숙이라고 갖은 위엄과 잘난 척을 일삼는 2황자와 6황자였다. 브루스가 그토록 2황자와 6황자의 귀에 정패륵이 협곡으로 출병하고 싶어 한다는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애썼지만 어찌 알았는지 그들은 웃는 얼굴로 친조카를 사지로 밀어 넣으려 했다.
협곡 근처를 돌아다니던 정찰병이 폐허가 된 마을에 안격의 무리가 돌아다닌다는 정보를 가져오자 2황자는 냉큼 정패륵에게 선봉에 설 것을 권했다. 마틴은 무릎까지 꿇고 만류했지만 6황자에게 어딜 감히 끼어드냐며 쫓겨나고, 브루스의 막사 앞을 서성였다. 정패륵은 학식도 높고 무예도 뛰어나서 어디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게 재수없는 데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짜증나 죽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사람이 헛되이 개죽음당하는 건 마틴으로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가 말하는 대로 성공하면야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 아니면 도였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
더구나 그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어도 살 수 있는 게 귀하디귀한 황족님네가 아닌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위협이 되고 한량에 양아치일수록 안전한 황족. 황도에서 문무를 갈고 닦기만 해도 황제는 이미 그를 어여뻐할 텐데, 잃을 거 하나 없는 정패륵이 왜 이런 곳까지 와서 목숨을 거는 지 마틴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황량한 벌판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워 양팔로 몸을 감싸고 목을 움츠리니 말을 끌고 오던 엘리어트가 달려와 마틴에게 외투를 둘러주었다.
“어떻게 됐어?”
“나도 몰라. 쫓겨났어.”
“나, 참……. 이거 어떻게 될는지, 원….”
마틴은 앨리어트와 함께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나오는 2황자와 6황자의 얼굴이 밝았다. 저들끼리 웃으며 돌아가는 걸 본 마틴은 불길한 예감에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이마에 댄 브루스의 수심이 어린 얼굴과 지도를 보다 돌아가겠다며 걸음을 옮겨 저를 지나치는 정패륵. 마틴은 정패륵이 막사를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브루스를 바라봤다.
“장군…!”
“늦었다. 마틴. 패륵께서 선봉에 서기로 했다. 우린 더 나설 수 없을 것 같구나….”
마틴은 브루스의 낮은 목소리에 아연실색했다. 정패륵이 성공하면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2황자의 공이요, 정패륵이 죽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 책임은 전부 그를 말리지 못한 브루스가 짊어져야한다는 소리였다. 마틴은 주먹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패륵을 말릴 수도, 그렇다고 출병을 막을 힘도 없었다. 결국 마틴은 브루스와 함께 그를 보내야 했다.
정패륵 근처에 정예병 중에서도 무예가 뛰어난 자를 배치하고,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겼음에도 불안해 몇 번이나 확인하고 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전장에 직접 나가지 않기에 더 걱정이 되는 건 물론이요, 더구나 정패륵은 이번이 첫 실전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곧게 편 등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제 목이 먼저 달아날 판이라 마틴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말에 오르면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
“패륵. 부디 무리하지 마시고, 몸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패륵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은 전부 저희가 지게 됩니다. 그것만 기억해주세요.”
조심하라는 말은 몇 번이나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감히 하지 못한 말이었다. 황족에게 협박에 가까운 말투는 불손하다 못해 경을 칠 만한 것이었지만 티엔은 눈썹을 꿈틀하며 마틴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마틴은 제 역할을 다 한 셈이었기에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이내 병사들이 말에 오르고, 그들의 떠나며 흙먼지가 뿌옇게 흐려졌다.
마틴은 그저 정패륵이 부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지만, 그 바람은 해가 진 뒤 돌아온 병사가 전한 소식에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정패륵이 안격의 잔당을 쫓다가, 협곡에 들어갔는데 그만 절벽이 갈라지며 다른 병사들과 함께 떨어져버렸다는 말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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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My Hero
2015/01/27
Happy Birthday, My Hero
150127, 00:00:00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팟하고 눈이 뜨이고 침대에서 미적거리는 것도 없이 일어나면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하고 머리도 맑은 그런 날. 느지막한 1월의 끝, 루이스는 커텐을 젖히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의 아침공기에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묻고 다시 잠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오늘은 차가운 아침 공기도 상쾌했다.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고 서점에 출근하기 위해 갈색 구두를 신었다.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아침햇살이 반가워 조금 걸음을 늦춰 걸었다. 중간에 빵집에서 갓 나온 빵을 사고,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며 걷다 보니 서점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아홉시도 되지 않은 시간. 맞은편 클랜사무소엔 드렉슬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홉시에 출근한 루이스가 밖에 가판대를 내놓고, 책들을 진열하고 있으면 그제야 비적비적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타나는 게 그였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게, 마음속에 낀 구름과 안개도 같이 걷힌 것 같았다. 이대로 오후가 되면 거리에 쌓인 얼음이 녹을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어제 나이오비가 엘리가 빙판에서 미끄러져 무릎이 까졌다며 걱정이 잔뜩 섞인 투로 말하던 걸 떠올렸다.
“아이스.”
“우왓.”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 같군.”
혼자 하늘을 보는 중에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검은 코트 차림의 다이무스 홀든이 서있었다.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이지만, 그를 대하는 제 표정도 별 다를 바 없을 터였다.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 홀든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따로 찾아올 정도면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으리란 생각에 잠시 개점 준비를 미루고 그를 바로 마주봤다.
“무슨 일이라도…?”
“받아라.”
다이무스는 말 대신 갈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루이스는 손에 올라온 봉투의 무게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다이무스의 표정에 그의 의중을 읽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런 루이스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다이무스가 말을 덧붙였다.
“받아도 무탈한 물건이다. 그래도 이유가 필요하다면 글쎄.... 빚을 갚는 거라고 해두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홀든?”
루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이무스는 등을 돌렸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뭔지도 모를 물건을 준다고 덥석 받을 순 없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물건을 받을 수 없어 그를 잡으려했지만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에 발이 멈췄다. 아무리 드렉슬러가 괴짜 용기사라지만 회사 사람에게 다이무스와 자신이 만나는 걸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드렉슬러를 보다 다이무스를 올려보자 다이무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오지 말라는 명백한 눈빛에 루이스는 별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침부터 한숨이냐.”
“아…. 좋은 아침입니다, 드렉슬러경.”
“뭐야, 벌써 시작이냐.”
“네?”
드렉슬러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되물었지만 드렉슬러는 혀를 찰 뿐 대답하지 않았다. 워낙 별난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고 돌아선 루이스는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책을 꺼내놓고, 도착한 책 소포를 받아 정리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정리 도중에 전에 부탁받은 책이 들어온 걸 보고 따로 메모지를 꽂아 표시를 하는데,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마틴 챌피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루이스씨.”
“네, 날씨가 정말 좋네요. 아직까지 해가 보이는 게.”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며칠만 더 이렇게 해가 나오면 거리의 얼음들도 녹을 텐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마틴은 잠시 루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분명 날씨가 좋은 것보다, 해가 나와서 거리의 얼음이 녹는 게 더 기쁜 것이리라. 마틴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주머니 안의 주화를 매만졌다. 드렉슬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로 보아하니 아직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찌 한담. 잠시 고민하던 마틴은 진열된 책들 중 가장 두꺼운 책을 골라들었다.
“얼마죠?”
“음, 챌피. 그건 파는 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매일 당신이 들고 있는 거잖아요. 꽤 무겁네요. 자.”
마틴은 능청스럽게 답하며 루이스에게 트와일라잇의 역사를 건네주었다. 루이스가 이 자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흐르다니. 마틴은 광장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역시, 이 책은 당신이 제일 잘 어울리네요. 오래 있어줘요. 새 얘기가 생기면 저도 들으러 올 테니까.”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틴의 미소에 루이스도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마틴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떠난 뒤 루이스는 잠시 멈췄던 책 정리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저, 저기….”
“윽…!”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영웅씨? 이쪽도 그쪽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거든.”
쌓아둔 책을 옮기려고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아있는데, 뒤에서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조그만 아가씨 뒤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 불마녀가 보여 그만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 마디 맞받아쳐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세탁소는 어쩌고 찾아왔는지 모를 여자아이 쪽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루이스는 타라를 한번 노려보곤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쭈그려 앉은 채론 고개를 푹 수그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 한쪽 무릎을 꿇고, 타라와 자신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기 바쁜 아이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샬럿.”
“아, 저, 그게…. 그, 생일 축하드려요!”
양손을 등 뒤로 한 채 우물쭈물하던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큰 소리로 말하며 양손으로 선물을 내밀었다. 귀엽게도, 직접 포장했는지 꾸러미를 싼 포장지가 삐뚤빼뚤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루이스는 속으로 날짜를 세며 눈을 질끈 감은 아이의 손에서 작은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오늘 소포가 들어왔으니 얼추 날짜가 맞았다.
“저, 그리고…. 전엔 감사했어요….”
“전?”
어지간히 용가기 필요했는지, 얼굴이 빨개진 샬럿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수선이 엉망이라며 날뛰는 손님을 대신 설득시켜준 것이 퍽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때야 정말 우연이었지만 일부러 생일이랍시고 선물을 준비한 그 마음 씀씀이가 퍽 예쁘고 고마웠다. 루이스는 샬럿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쩍 웃었다. 그제야 안심했는지 샬럿도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자, 그럼 돌아가자. 샬럿.”
“네! 타라 언니, 고마워요!”
훈훈하게 샬럿을 배웅하려 일어나 손을 흔들던 루이스는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드렉슬러는 루이스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타라의 눈치를 살폈고, 샬럿의 손을 잡고 뒤돌아서던 타라는 입가를 실룩이며 루이스를 뒤돌아봤다. 샬럿은 뭐가 잘못된 건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루이스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나이에 그만한 딸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여자가, 언니라. 타라도 알긴 아는지 더 이상 말하면 불태워 죽일 것처럼 살기등등하게 루이스를 노려봤다. 중간에 낀 드렉슬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샬럿을 데리고 피해야하나, 아니면 누굴 불러와야 하나 고민하며 루이스와 타라의 눈치를 살폈다.
“저, 언니…?”
“흥, 생일 선물이라고 쳐둬. 묘비에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같으면 그것도 웃기긴 하겠지만.”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샬럿이 타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매달렸다.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퉁기며 공간발화를 쓸 것처럼 손을 올리던 타라는 그대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하고는 샬럿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둘이 광장의 코너를 돌자 드렉슬러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곤 루이스에게 투덜거렸다.
“너도 참 징하다. 우리 불마녀 성격 어떤지 잘 알면서.”
“질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녀에게 만큼은.”
루이스의 대답에 드렉슬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공성이 있거나 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싫으나 좋으나 하루 반나절을 얼굴을 마주하는 상대다 보니 그래도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렉슬러는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석이 살려준 목숨이라 그런가, 완고하고 터무니없이 무모해서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면이 후배 녀석 하나를 꼭 닮았다.
“몸 좀 사리고 살아라….”
“네?”
“아무 말도 안했다, 멍청아.”
연구실에서 하던 것처럼 실수로 나온 혼잣말에 드렉슬러는 다시 팔짱을 끼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사 양반과 술김에 한 내기에 져버린 게 화근이었다. 할 일도 거의 없는 게 클랜 업무인데 하루에도 수십 수백씩 생기고 사라지는 클랜을 관리할 수 있는 건 드렉슬러 경 당신뿐입니다! 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자신도 멍청이지만.
드렉슬러는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추위가 한 풀 꺾였다 해도 아직 1월. 이 겨울에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걸친 꾀죄죄한 꼬마애 둘이 같이 버려진 신문지며 쓰레기나 다름없는 나무조각을 들고 광장을 힘겹게 걸어가는 게 보였다. 드렉슬러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감했다. 천재인 자신의 촉은 꽤 뛰어난 편이지만, 이 전개는 너무 뻔하게 반복된 일이라 예측이랄 것도 없었다.
잠시 아이들의 모습을 어딘가 먼 과거를 그리는 것 같은 눈으로 보던 루이스가 아이들을 불러세우곤, 서점 안으로 들어가 갈색 종이봉투를 들고 나와 아이들에게 건넸다. 무릎을 낮추고, 시선을 맞추며 건네는 가슴 아릿한 미소. 드렉슬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원.
“야!”
자리로 돌아온 루이스는 갑자기 절 부르는 소리에 책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얼굴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가까스로 잡아채자 드렉슬러가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듯 심통스런 얼굴을 하곤 팔짱을 꼈다.
“비실비실해가지고. 맨날 나눠주기만 하니까 그 꼴인 거 아냐. 네 여친은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알긴 하냐.”
양팔로 팔짱을 끼고 입을 비죽이는 드렉슬러의 말은 분명 기분 나쁠 법한 것이었으나 루이스는 종이봉투를 열어 샌드위치를 꺼내곤 피식 웃었다.
“잘 알죠.”
“있을 때 잘해. 이 나이까지 혼자면 서럽다.”
“명심하겠습니다.”
드렉슬러의 충고는 자기가 혼자라 서럽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트리비아. 루이스는 잠시 제 연인을 떠올리곤 입가에 띠웠던 미소를 지웠다. 오늘 만날 수 있긴 할는지. 오늘은 퇴근하면 연합에서 밀린 서류와 함께 생산품 분배에 관한 계획안을 짜야했다.
이글이나 토마스, 레베카와 휴톤 도일은 떠들썩한 걸 좋아하니 생일이랍시고 또 이런저런 걸 준비했을 지도 모른다. 파티같은 걸 좋아하지 않지만, 동료들이 다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노는 걸 보는 건 좋았다. 그 따스한 분위기며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행복과 즐거움이 제게도 스며드는 것 같아 좋았다. 제 옆에서 그걸 같이 봐줄 그녀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루이스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다. 더 이어가면 결국 수렁에 빠질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1월 27일. 괜히 침울해져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쉬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 * *
아니나 다를까, 일을 마치고 연합으로 가니 올해도 저 몰래 깜짝 파티라도 해주려는지 다들 평소와 다르게 저를 대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왜 작년엔 이걸 몰랐는지. 루이스는 한사코 저를 휴게실에 들이지 않으려 애쓰는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토니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토니는 재킷의 포켓에서 새 만년필 몇 자루를 주문했는데 임원들에게 돌리고 남았다며 만년필 하나를 건네며 윙크했다.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하자 토니는 아까 루이스가 토마스에게 했던 것처럼 어깨를 두드렸다. 그 묘한 뿌듯함에 멋쩍어진 루이스는 후드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생일이라고 태도에 더하고 뺄 게 없는 그니 분명 오늘이 아니라도 챙겨주었을 테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회의실에 먼저 도착해 서류를 잔뜩 쌓아놓고 골머리를 앓던 앤지는 토니와 루이스를 보고 업무로 지친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녀에게 안쓰러움 반, 기특함이 반 섞인 미소로 인사한 루이스는 앤지의 옆, 빈자리에 앉아 담당의 간단한 브리핑을 듣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쌓여있던 서류들이 이 손에서 저 손을 거치고, 테이블에 커피잔과 찻잔이 쌓이길 두 시간.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적막을 깼다.
“조기…. 루이스 오빠 업쪄?”
“엘리?”
의자 대신 책상에 걸터앉아 카모라 쪽에서 보낸 서류와 생산량 보고서를 한참 들여다보던 루이스는 저를 찾는 엘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 불리곤 잔뜩 토라진 얼굴로 무작정 달려와 매달리는 통에 쌓아둔 서류탑이 무너졌지만 서류에 찌들어가던 이들의 얼굴엔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미안. 먼저 가볼게.”
엘리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싶어 루이스는 엘리를 안아올리고 앤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앤지는 얼른 가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루이스는 황급히 엘리를 데리고 나왔다.
“엘리, 무슨 일이야. 왜 너 혼자 있어. 다른 사람들은?”
“같이 루이스오빠 기다렸는데, 움…. 엘리가 오빠 데려오기루 해써!”
시무룩한 아이의 얼굴이 걸려서 걱정스레 묻자 엘리가 열심히 대답하다 말을 멈췄다. 말도 재롱도 많은 순진한 아이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고, 루이스는 이내 엘리가 한 말을 알아듣고는 피식 웃었다. 다 같이 기다렸다는 말은 아까부터 동분서주하던 생일파티를 말하는 걸 테고, 엘리가 데려오기로 했다는 건 기다리다 못해 엘리를 전령사로 보냈단 뜻이었다.
급하게 데리고 나오느라 안은 채로 복도를 걷는데, 문득 나이오비가 애 버릇 나빠진다며 혼자 걷게 하라고 잔소리했던 게 떠올랐다. 피터가 은근히 부러워한다는 것도 알기에 안아주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부쩍 무거워진 것 같았다.
“착하네, 엘리.”
“웅! 오빠도 착해!”
방긋 웃는 엘리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는 휴게실 앞에 다다라서야 엘리를 내려주었다. 엘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난 표정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잔뜩 들떠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엘리는 루이스가 문을 열길 꾹 참고 기다리는데, 그게 몹시 귀여웠다.
숨을 들이마시며 철문의 문고리를 양손으로 잡고 힘주어 열자 안에서 폭죽이 터졌다.
“““Happy Birthdady!!!”””
제각각의 목소리가 겹쳐져 나는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루이스는 움찔하고는 피식 웃었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색종이며 폭죽의 잔해에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털자 이글이 기분나쁘게 웃으며 다가와 옷 속에 색종이가루를 집어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주인공 주제에 늦게 온 벌이지!”
“오오, 이글! 말 한 번 잘했다! 자자, 벌주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고~.”
“있지, 있지! 엘리랑 피터 오빠랑 열심히 색종이 자르고 장식해써!”
“자, 벌주데이~. 시원~하게 한 잔 하그라!”
“저, 선배! 별건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자꾸만 옷 안에 색종이를 넣으려는 이글을 막으랴, 엘리와 피터 칭찬하랴, 벌주라며 맥주컵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내미는 도일과 휴톤에게 사양하랴, 토마스가 내미는 선물도 받으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작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 년이 지나면서 그만 까먹은 모양이었다. 이럴 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루이스는 이글이 받아 제 입에 들이붓는 술을 흘리고 마시며 잠시 방심한 것을 후회했다.
“자자, 잠깐잠깐! 그 전에!! 이것들아 다 조용히 좀 해!!!”
루이스의 도착으로 소란스러워진 휴게실은 사람들을 주목시키려던 나이오비가 결국 고함을 지르면서 조용해졌다. 루이스의 영구동토라도 맞은 듯 일동이 모두 꼼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제야 부끄러워졌는지 헛기침을 한 나이오비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든 좋으니까 자기 생일케이크의 촛불 정도는 끄게 해주라고. 이러다 촛농 떨어지겠다.”
양손으로 이글의 팔을 잡고 있던 루이스는 그녀의 배려가 고마워 표정을 풀었다. 이글도 나이오비의 말에 순순히 루이스를 놓아주고, 루이스는 한 걸음 나아가 ‘Happy Birthday’가 삐뚤빼뚤하게 쓰인 케이크 위에 꽂힌 초에 힘껏 바람을 불었다.
“루이스 오빠, 생일 추카해!”
“생일 축하해요.”
“고마워. 피터, 엘리. 직접 만들어줬구나.”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자 엘리는 방긋 웃으며 까르륵 웃었고, 피터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이어지는 축하인사에 루이스는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쑥스럽게 웃으며 고맙단 말을 돌려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없어선 안 될 동료이자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1년 365일 열두 달,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하루를 축하하기 위해 기꺼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벅차올라 속이 시릴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키는 것으로 감정을 눌렀다.
케이크를 나눠먹고 엘리와 피터가 돌아가자 휴게실은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러운 술자리로 변했다. 한 시간쯤 됐을까, 적당히 어울려주던 루이스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슬쩍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니 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이글이 먹인 술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토마스가 달려와 무릎에 손을 짚고는 숨을 골랐다.
“왜, 따로 할 말이라도 있어?”
“어…, 그게. 선배!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어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하던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우렁차게 말한 토마스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포옥 내뱉었다. 루이스가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슬그머니 눈을 뜬 그는 아차 싶었는지 뺨을 긁으며 시선을 피하다 겸연쩍은 듯 웃었다.
“아, 하하. 그게, 어…. 처음엔 영웅 루이스를 동경해서 연합에 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영웅 루이스, 라는 말에 가슴이 따끔했다. 루이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토마스를 마주했다. 지금 토마스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용기를 냈고, 그가 하는 말은 이렇게 따로 독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진심이었다. 루이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쥐었다.
“지금은, 믿을 수 있는 선배고, 리더고, 그리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로 신뢰 받고, 인정 받고 있다는 건 솔직히 부러울 정도에요. 그러니까, 선배가 선배여서 다행이에요!”
무서울 정도로 솔직한 말에 루이스는 천천히 멈췄던 숨을 내뱉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차가운 술도, 저만치서부터 올라오는 뿌듯함을 후드도 없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감추지도 못한 감정을 속으로 삭였다. 꾹꾹 눌러온 감정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후배 앞에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루이스는 애써 차오르는 덩어리를 누른 채 미소지었다.
“고마워.”
“아…. 죄송해요! 그, 어…. 지금의 선배가 선배라서 좋지만, 힘들 땐 혼자서 참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차…!”
당황한 토마스가 횡설수설하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은 후였고,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는데 그게 후배라는 사람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니, 이래서야 선배의 체면이라고 할 것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맞는 말이야. 조금 더 우릴 믿으라고 영웅님.”
“니 혼자 짐을 지우게 할 만큼 연합은 약하지 않다 아이가!”
“뭐, 나는 그런 형씨가 마음에 들지만.”
“이글!”
“아, 거 이렇게 감상적인 거 나하곤 안 어울린다고~. 어려울 거 뭐 있어,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지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
더해지는 동료의 목소리, 따스한 격려에 루이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슬렁슬렁 나타난 이글이 어깃장을 놓았지만, 루이스를 지나치며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그의 눈에서 루이스는 이글 홀든이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 진심을 보았다. 어떤 선택을 해도, 어떤 길을 골라도 그걸 믿고 따르겠다는 신뢰, 그 감각을 잊지 말라는 그 나름의 격려. 루이스는 사람 키보다 더 큰 검을 어깨에 지고 설렁설렁 걸어가는 이글의 등을 보다 피식 웃었다. 좁은 복도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저를 달래려 이런 말 저런 말을 덧붙이는 것부터 해결해야 할 성 싶었다.
* * *
오늘 받은 선물을 양손 가득 들고 돌아온 루이스는 선물을 방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지친 목과 어깨를 풀었다. 이대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면 하루가 갈 것이다. 오늘 하루는 이걸로 끝.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그녀는 원래 이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고,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괜한 기대는 접고 내일을 준비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서, 혼자가 된 루이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침대에 앉아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게 지내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떠들썩한 곳에서 놀다가, 평생 듣기 힘들 정도로 좋은 말들을 들었는데. 혼자가 되니 밀려드는 상념에 더욱 외로워졌다.
씻고 자자. 루이스는 자꾸만 떠오르는 이런 저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옷장에서 새 속옷과 잠옷을 꺼내들었다. 씻고 자리에 누우면 잠이 들 것이다. 잠이 들어 일어나면 아침일 것이고, 그럼 또 하루를 시작한다. 그 반복일 뿐이다. 루이스는 샤워기 앞에서 물을 틀었다.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물이 제 감정과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함께 씻어주길 바랐다.
커튼을 치지 않은 방,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엔 큰 달이 떴다. 구름이 끼지 않은 하늘엔 달이 평소보다 밝게 빛났고,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창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손에 활짝 열렸다. 손가락 끝부터 우아하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자가 형태를 갖추고,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창문을 타고 넘어온 여인은 침대에 곤히 잠든 루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어온 바람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훤한 달빛은 수려한 용모를 비췄다. 잠든 그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던 그녀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침묵했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더니 천천히 루이스가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곳을 바라본 그는 그녀를 보곤 배시시 웃었다. 그 아이같이 순수한 미소에 여제, 트리비아 카리나는 자신의 연인에게 미소로 답해주었고, 제게 손을 뻗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그정도는 봐줘도 좋을 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카리나….”
잠결에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웃으며 반기는 걸로 보아 잠이 덜 깼거나,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트리비아는 새침하게 웃었다. 이렇게 귀엽게 구는 연인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몸을 움직여 모로 누운 루이스는 제 옆자리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옆에 누우라는 그의 흔치 않은 어리광에 잠시 고민하던 트리비아는 자신이 아직 풀메이크업 상태이며, 잠들기엔 불편한 옷차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미 맨얼굴을 보여준 남자친구지만,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런 트리비아의 고민을 읽기라도 한 양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손목을 잡아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빠져나가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트리비아는 못 이긴 척, 받아주기로 했다.
내일 일어나면 분명 그동안 자길 두고 어딜 갔었던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또 싸우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늘 하루의 마지막을 오롯이 차지하는 값으로 치르기로 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리 밑지는 것도 아니란 생각에 트리비아는 다시 눈을 감고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내 영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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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외출, 삼십분.
2015/01/21
포트레너드에 위치한 홀든 은행, 오후 두 시 반. 다이무스 홀든은 서류에 사인하고 안경을 벗었다. 흰 종이에 빽빽하게 쓰인 검은 글씨를 오래 보고 있자니 눈이 피곤했다. 남은 서류와 시계를 번갈아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짬을 내도 기껏해야 삼십분 정도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면 좀 살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코트를 집어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서두르면 오며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오며가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 생각이 향하는 곳에 발이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다이무스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출근할 때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따스한 게 딱 밖에서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라 그와 함께 공원이라도 거닐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놀랍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헛기침을 하며 클랜사무소의 기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드렉슬러를 지나 서점의 문을 열었다. 난로에 주전자를 올리던 루이스는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잠시, 피식 웃으며 다이무스를 맞았다.
“나도 한 잔 주겠나.”
“어쩐지 오늘은 물을 많이 넣고 싶더라니.”
루이스는 물을 더 붓는 대신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권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미소에 잔뜩 굳었던 얼굴의 근육을 슬쩍 풀며 소파에 앉았고, 루이스는 책장에 기대어 서선 물끄러미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점심은 먹었나?”
“네. 요 앞 카페에서 샌드위치 사다 먹었죠. 당신은요, 일 하다 거르진 않았나요?”
“바쁘긴 하지만 그정도는 아니다. 요전에 애인한테 한소리 듣기도 했고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뜨며 애인이라고 돌려 말하는 다이무스의 말에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숨을 집어삼키듯 웃고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한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마주한 시선에 눈이 감기고, 입술이 닿는다. 다가왔던 것처럼 천천히 입술을 떼고. 눈을 뜬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짙은 회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냥 그것만으로 좋아서 미소를 머금자 다이무스가 한 번 더 입술을 마주쳤다. 짧게 여러번, 새가 모이를 쪼듯 입술을 맞추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물이 끓으며 내는 소리에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잠시만요, 단 둘 뿐임에도 작게 속삭이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다이무스는 멈칫했다. 그 목소리는 잠자리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것과 매우 닮아있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묵묵히 차를 타는 루이스의 등을 보며 다이무스는 제 애인의 몸을 훑었다. 머리부터 흰 목덜미, 곧게 뻗은 등줄기를 따라 매끈한 허리와 탄탄한 엉덩이, 그리고 자신밖에 모르는 은밀한 곳과 바지 안에 감춰진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다이무스는 그의 피부를 만지며 단정한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겨내는 상상을 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왔던 길을 되짚어가자 때마침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마른 것 같군.”
“그런가요.”
루이스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일에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했다. 다이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은 루이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그쪽이 아니다.”
다이무스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봤다. 다이무스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고, 루이스는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귀가 붉어지는 걸 본 다이무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제 손을 움직였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루이스가 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보여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보탰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할 정도로 급하진 않다.”
“윽….”
정곡을 찔렸는지, 루이스가 움찔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하니 안 놀릴래야 안 놀릴 수가 없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 루이스는 얼굴을 붉힌 채 쭈뼛거리며 다가와 다이무스의 무릎에 앉았고, 다이무스는 만족스럽게 애인의 몸을 끌어안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점 특유의 종이와 잉크냄새와 섞여 나는 비누냄새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가 그렇게 루이스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자 꼬물거리다 포기하곤 몸에 힘을 뺐다. 애초에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건만, 루이스는 늘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했다. 루이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을 쓰다듬으며 도드라진 견갑골을 매만지던 다이무스는 제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쯧, 역시 말랐군. 잘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냥 바빴을 뿐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꼭 제 때 챙겨먹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지?”
“다이무스.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군. 데리러 오겠다.”
다이무스의 막무가내에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무릎에 앉힌 덕에 본래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가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턱을 치켜들어 그에게 키스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루이스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면 나오는 버릇에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들어줄 시간은 앞으로 오 분 정도지만.”
“그…. 어차피 안을 거라면, 음…. 보통 그렇잖아요.”
아무리 머리가 좋은 다이무스라도 루이스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정말이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다 하는 말이 겨우 이런 거라니.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그 마음이 귀여워 낮게 웃었다. 루이스는 제가 한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깨닫고는 당장 달아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다이무스에게 허리를 잡힌 채론 어딜 갈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진정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는 루이스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우니 견딜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지. 그리고 나는….”
다이무스는 천천히 허리를 쓰다듬다 대화를 거부하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움찔, 몸을 떨며 무슨 짓이냐는 듯 저를 쏘아보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을 때 살이 만져지는 쪽이 좋다.”
루이스의 얼어붙은 얼굴에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은 다이무스는 그의 이마에 입 맞추고, 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차는 이렇게 마시는 게 아니지만, 차를 마시러온 게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이무스는 포켓에 넣어둔 금장 회중시계를 꺼냈다. 두시 오십분. 떠나야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하아. 결국 당신도 홀든이네요.”
“무슨 뜻이지.”
루이스가 말하는 홀든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기에 다이무스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비교를 당해서가 아니라, 루이스가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는 데서 나오는 유치한 질투였다. 계속 다이무스에게 휘둘리던 루이스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빼곤 빙그레 웃었다.
“여기 서있으면 당신 목소리 들리는 거 알아요?”
“루이스.”
“전 오늘 일곱 시에 퇴근할 겁니다. 앞으로 네 시간 조금 남았네요.”
명백한 말 돌리기와 축객령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엷은 미소에 조금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일곱시까지 퇴근해 루이스를 데리러 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자세한 건 이따 듣도록 하지.”
“조심히 가세요.”
문까지 마중을 나온 루이스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쉬이 알려줄 것 같지 않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도발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묻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이무스는 코웃음 치며 은행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서 같은 베개를 베면 못 할 말이 없다고, 오랜만에 같이 해가 뜨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그 한탄과 닮은 말이 무슨 뜻인지 자연스레 듣게 되리라. 오후 세 시. 초침이 막 5를 지나가는 걸 확인한 다이무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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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루이] Intro.
2015/01/21
*무언가의 번데기au
오후 아홉시 반. 잔뜩 쌓인 업무로부터 퇴근한 다이무스 홀든은 자택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고급주택답게 육중한 쇠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다이무스는 불이 켜진 거실에 노닥거리는 형제들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제 와인 셀러에 손을 댔는지,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리며 향을 음미하던 벨져와 눈이 마주친 다이무스는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왔구나.”
“불러놓고, 늦었네. 형아.”
“그러는 작은형도 좀 전에 왔으면서~.”
이글은 장난스레 벨져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쳤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다이무스, 당장 어느 파티에 참석해도 될 법한 차림의 벨져와 달리 이글은 청바지에 점퍼차림이었다. 각각 경감, 검사직을 하나씩 꿰찬 형들과 달리 책상머리 업무는 싫다며 멋대로 군 자유로운 영혼다웠다. 다이무스는 이글과 벨져를 한 번씩 쳐다보곤 가방에서 서류철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이건 또 뭐야.”
“귀찮은 일이면 안 해.”
벨져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고 이글은 소파에 길게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 서류철에 손도 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안타리우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핵심만 짚어서, 간단하고 짧게. 다이무스의 말에 이글과 벨져가 눈을 치켜떴다. 안타리우스라고 하는 조직은 어느 쪽으로든 손을 뻗고 있었기에 이쪽에 몸 담은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접근하려고. 꼬리는?”
“걔네가 잡혀는 준대?”
“우리만으로는 부족하지.”
다이무스는 깔끔하게 시인했다. 경찰조직을 전부 동원해도 그들의 꼬리만 쫓을 뿐 정작 그들의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각종 범죄부터 정치, 경제, 종교에까지 숨어든 그들은 일반인에 섞여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울 뿐더러, 잡아도 꼬리를 자르고 도마뱀처럼 빠져나가는 게 안타리우스였다.
“더 깊이, 들어가야한다.”
“어떻게?”
방금 전까지 심드렁하던 이글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있었고, 벨져는 와인잔을 흔들던 손을 멈췄다. 이글의 질문과 벨져의 눈빛에 다이무스는 대답 대신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빤 그는 막 불을 붙인 장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지 않은 신호에 벨져와 이글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이무스가 아무 말 없이 입가를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기대자 벨져는 이글에게 눈짓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펼친 뒤 바로 인상을 구기고 파일을 내던지긴 했지만.
“뭔데 그래?”
흔치않은 벨져의 반응에 흥미가 동했는지 이글도 파일을 집어들었다. 바로 첫 장에 나오는 신상명세에 이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바로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 하하. 작은형이 질색할 만 하네.”
“닥쳐라, 이글.”
“지금 상황에 그보다 적임자는 없다.”
“그래서 그 더러운 범죄자새끼를 끌어다 쓰겠다고? 그렇게 사람이 없나?”
벨져는 여과없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타고난 능력과 배경으로 주구장창 탄탄대로를 달리던 검사 벨져 홀든의 이력에 단 한 번 굴욕을 남긴 그를 벨져가 좋아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다이무스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엔 서류를 거들떠도 안 보던 이글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서류를 읽어내렸다.
“재밌네. 난 찬성.”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형아?”
“더 큰 목적을 위해 가치있는 일이다.”
벨져가 어깃장을 놓는 건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기에 다이무스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와인병을 들었다. 그리 달가운 선택지는 아니지만 최악보단 차악이 낫다. 이이제이, 오랑캐는 오랑캐로 막는다. 다이무스는 창가에 서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병째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위에서 허가는 내려왔지만 이번 일은 다이무스 홀든에게도 쉽지 않았기에 적어도 함께 할 두 동생에게 미리 알릴 필요는 있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벨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이 하는지 입술을 매만지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두사람을 번갈아 보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벨져, 이글. 우린 지금 설계자가 필요하다.”
사전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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