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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에 해당되는 글 8건
- 2018.04.13 [릭루이/이글루이] Agent 1
- 2018.01.07 [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 2017.11.14 [릭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 2017.09.26 [릭루이]
- 2017.06.21 [릭루이] Bittersweet 2
- 2016.07.10 [릭루이] 햇살과 나그네
- 2015.10.17 [릭루이] 오후, 커피 한 잔.
- 2015.04.11 [릭루이] 벚꽃 샤워
글
[릭루이/이글루이] Agent
요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짬이 안나고 그러는 바람에 옛날에 쓰다 만 거라도 올려놓고 갑니다ㅠ
연재물 업데이트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ㅠㅠㅠ
그를 만난 건 처음으로 참석한 파티에서 였다. 연미복에 보타이를 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파티장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고, 전에 없던 유망주를 맞는 상류층 사람은 너무나 낯설었다.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해선 안 되는 중요 인물이라 말을 걸어오면 걸어오는 대로 응대를 하다 보니 혀가 말을 하는지 손에 든 샴페인은 어떤 맛인지 하나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찌어찌 쏟아지는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리려, 기왕이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길 바라며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간 테라스에 그가 있었다.
언뜻, 눈물이 어린 걸 본 것 같았으나 그는 빠르게 자신을 추슬렀다. 그 역시 이런 상류층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등을 돌려 나가는 대신 손수건을 건넸다. 목을 묶은 타이도 없이, 와이셔츠 단추를 푼
처연하고 가련한, 갓 대학에 들어간 것 같은 청년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아. 릭. 릭 톰슨이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다가가자 입술을 물었던 그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우는 남자가 예뻐 보일 수도 있다니.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이런 청년을 울리다니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냥, 그런 거죠. 뻔한 이야기에요.”
눈물이 고인 눈을 얇게 휘며 웃는 순간 릭은 숨을 집어삼켰다.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갔을 뿐인데
“참. 전 루이스에요. 그냥 루이스. 미리 말씀드리자면 어느 대단한 집안 아들이라서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성이라고 부를 게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 그렇군.”
선이 곱고 청초한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첫 번째, 그가 손을 내밀었다는 걸 깨달은 게 그 다음.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처음엔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어서 몰랐는데 예쁜 얼굴만큼이나 손도 작았다.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건 좋았다. 주책없이 심장이 뛸 정도로.
“손수건은 어쩌죠.”
“아, 괜찮소.”
“그럴 줄 알았어요. 보통 이런 파티에 오는 분들은 손수건 따위엔 연연하지 않거든요.”
손수건이 제아무리 비싼들 이 남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그게 얼마든 아깝지 않았다. 대신 여기 오는 분들. 이라는 말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 가여운 청년이다. 그런 사람의 아픈 과거를 캐묻는 게 신사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입을 뗐다.
“많이 만나봤소?”
“이런 곳에 있으면 싫어도 만나게 되죠.”
“그럼 여긴 왜....”
“...데려와준 사람이 있어요. 보통 이런 곳은.... 혼자 못 오거든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미안하오.”
순진한 청년을 꼬셔서, 저 좋을 대로 가지고 놀다가 가차 없이 버리다니. 아픈 상처를 되새기듯 드문드문 말을 잇던 루이스는 자조하듯 웃었다.
“당신이 미안할 건 아니죠. 끝났다는 건 알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와본 거예요.”
“그런 나쁜...!”
그 쓴웃음이 더 애처롭고 가련해 속으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헐뜯던 릭의 입에서 결국 한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루이스는 움찔 몸을 굳히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바라봤다. 그 눈에 어린 눈물과, 상처 받은 눈빛에 화를 내려던 릭은 입을 다물었다.
나쁜 사람에게 놀아나다 버려졌지만, 그래도 마음이 남은 모양이다.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 끝내 상처밖에 남지 않은 청년을 보고 있자니 만난 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은 릭의 마음이 아려왔다. 한 박자 늦게 주제넘은 말이었다는 걸 깨달은 릭은 황급히 말을 고치려 했으나 루이스가 다 포기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너무 순진했나 봐요.”
“루이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소.”
“...감사합니다.”
눈물을 머금은 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아련하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소?”
“...글쎄요.”
“여기. 내 명함이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아, 그, 그런 뜻은 아니니까 오해 말고! 순수한 호의니 거절하지 마시오.”
“.......”
루이스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릭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순박하고 귀엽다.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보니 오래 전 가슴을 설레게 한 첫사랑이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맑은 청초함이 보석보다 눈부시다. 루이스의 미소는 심장을 세게 뛰게 하는 한편 마음을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경계하느라 굳어진 마음과 얼굴 근육이 슬슬 풀어진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갈게요.”
“그러시오.”
“진부하지만 이만한 핑계도 없네요.”
“하하하. 기다리고 있겠소.”
릭은 손을 흔들어 테라스를 나서는 루이스를 배웅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때? 그 과장님, 넘어온 것 같아?”
“거의.”
“거의?”
소파에 길게 누워 다리를 까딱이던 이글은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동료의 서늘한 무표정을 보며 킬킬 웃었다. 루이스의 재킷이 머리 위로 날아와 얼굴을 덮쳤으나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거의는 무슨. 보니까 완전 홀딱 반했던데. 캬. 나도 깜빡 속을 뻔했지 뭐야. 안 그래, 영웅님?”
“테라스 훔쳐볼 시간도 남고 좋았겠네.”
“그럼.”
몸을 일으킨 이글은 재킷에 이어 셔츠도 벗기 위해 손목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등 뒤에 섰다. 허리와 배를 감싸듯 안고 향수조차 뿌리지 않은 목덜미에 코를 묻자 어느 눈 나린 새벽의 냄새가 나리는 것 같았다. 아득하고, 아찔한 기억 속 풍경을 떠올리고 손을 미끄러트리며 입을 벌리자 루이스가 이글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아직 임무도 다 안 끝났어.”
“싸늘해.”
“누구랑 달리 충동적이지 않으니까.”
깔끔하고 단호한 말과 달리 루이스는 얇게 눈을 휘며 웃음을 흘렸다. 아까 그랬듯 순진한 미소도, 전부를 걸고서라도 안고 싶어지는 요염한 미소도 아니었지만 뻐근해진 이글의 아랫도리를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충동이라니. 너무하네. 뭐, 사실이긴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편이라고 해줄래?”
“그러니까 그 본능 좀 어떻게 해봐. 비벼볼 게 따로 있지.”
우뚝 선 물건으로 엉덩이를 문지르던 이글은 셔츠 앞섶의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타이트한 요원복과 하네스가 더 금욕적으로 보이고, 그게 더 꼴린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난 지지리 말 안 듣는 애라서, 말을 잘 듣게 하려면 상이 필요한데.”
“사탕이라도 물려주면 되겠어?”
“사탕 말고.”
“...너 하는 거 봐서.”
이글은 입꼬리를 올렸다.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입술이 맞닿고, 그 다음은 전투와도 흡사한 섹스가 이어졌다.
언제 봐도 잘 빠진 등이다. 이글은 행위를 마치자마자 침대를 빠져나간 동료 겸 파트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작게 숨을 토했다. 달달한 말이나, 간지러운 애교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할 것만 마치고 가는 건 역시 조금 쓸쓸하다.
오랜만에 만난 엉덩이는 해후의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까만 슬랙스와 바지 안으로 사라지고, 루이스는 이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차갑기가 아주 얼음 저리 가라다. 남극도 이것보단 덜 추울 거다. 하물며 펭귄도 온기를 나누는데.
원망 반, 아쉬움 반으로 루이스를 바라보던 이글의 머릿속에 문득 루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멀리서 입술을 읽은 것뿐이지만,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기엔 신경이 쓰였다. 애초에 신경이 안 쓰였다면 그런 말 한 마디가 다시 떠오를 리도 없었다.
“아까 그 나쁜 사람.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 미세하나마 등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픈 구석을 찌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고개를 돌린 루이스의 서늘한 눈빛에 이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잘못 건드렸다. 이건 좀 위험할 지도.
“홀든.”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관 둬. 홀든이 뭐야, 소름끼치게.”
“누가 먼저 소름 끼치는 얘길 꺼냈는데. 적당히 해. 다음엔 잡혀도 안 빼줄 거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이 남자는 결국 구하러 올 것이다. 연합의 영웅, 루이스는 그의 이명이 날리는 냉기와 달리 그리 모진 사람이 못 되니까. 루이스를 보며 누워있던 이글은 피식 웃으며 턱을 괬다.
“걱정 마. 영웅님은 바쁘니까 안 와도 이해할게.”
“안 간다니깐.”
“그럼 큰 형 불러야지 뭐.”
“누군 좋겠네. 양 쪽에 발을 다 걸쳐둬서.”
“그래도 가운뎃다리는 너한테만.... 억...! 잠깐, 잠깐!”
“아예 못 쓰게 만들어줘?”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조준이다. 이래서 특수요원은 무섭다니까. 그만큼 스릴도 넘치는 건 좋지만. 이글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섹스도 질펀하게 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최후네. 그래도 마지막에 보는 게 네 얼굴이고.”
질색하는 표정이 가관이다. 소리내어 한바탕 웃고 싶은 걸 꾹 참고 양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루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탄창, 비었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네가 대상도 아닌 사람한테 총을 겨눌 리가 없잖아?”
깊은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총을 내렸다. 반은 감이었지만, 정말 쏠 마음이 없었는지 빈 탄창을 빼낸 루이스가 총알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수류탄이니 자동소총이나 하는 것들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지만 총기를 손질하는 루이스를 보는 건 좋았다. 칼을 갈고 닦는 무인과도 같은 자세로 침착하게,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하면서 비통함을 곱씹는 그 처연한 얼굴이 좋았다. 보고 있으면 질릴 틈이 없다.
그 얼굴이 보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정말 와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더더욱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글은 다시 고개를 드는 탐욕과 갈증에 입술을 핥으며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매끈한 등과, 희고 가는 목덜미. 정말이지, 엎어놓고 박고 싶어지는 뒷태다. 저 목에 이를 박아 자국을 새기고, 울긋불긋한 멍을 남기고 싶어 몇날 며칠을 애태우며 공을 들였던가.
이글이 눈으로 다시 한 번 행위를 되새기는 동안 탄창을 채우고 무기의 상태를 확인한 루이스가 그 생각의 흐름을 끊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봐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어디까지 봐주나 간보지 말고 물러나. 다신 안 도와줄 거니까. 지금 하는 짓도 그만 두고.”
“하하. 기억해볼게.”
하여간,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다니깐. 이글은 루이스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입을 비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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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호그와트AU
릭 7학년/루이스 3학년
기숙사에 남은 인원을 체크하고, 첫 호그스미드 방문에 들뜬 3학년을 배웅한 후플푸프 기숙사의 반장 릭 톰슨은 손을 내리고 양팔을 감쌌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서리고, 방한 마법을 건 망토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데도 춥다.
처음 호그스미드를 방문할 쯤이면 눈이 펑펑 내리긴 하지만 올해는 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서, 벽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아야지. 숨겨놓은 도넛과 코코아를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하는데 얼어붙은 분수대에서 까딱이는 발이 보였다.
“음? 루이스?”
“아, 릭. 안녕하세요.”
“왜 여기 혼자 있는..... 아.”
코며 뺨이 빨개졌는데도 시무룩한 얼굴로 발만 구르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본 릭은 이런 날 혼자 눈을 맞고 있는 이유를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아 출신에, 성도 없는 아이는 호그스미드 방문 허가증에 보호자 사인을 받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여기 계속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저는 괜찮아요. 가보세요.”
“음....”
완고한 대답에 릭은 잠시 난처해하다가 분수대에 쌓인 눈을 치워 자리를 만들고 루이스 옆에 앉았다. 말을 걸 때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내내 발아래 쌓인 눈만 보고 있던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올려다봤다.
빨개진 뺨은 또래 아이들보다 홀쭉하지만 그래도 어린 티가 나고, 땡그랗게 뜬 빨간 눈은 꼭 유순한 토끼 같다. 마법사와 토끼는 그리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릭은 3학년이 됐는데도 아직 제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루이스를 향해 씩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럼 옆에 있는 건 괜찮지?”
“...감기 걸릴 텐데요.”
“하지만 너는 여기 계속 있고 싶고, 나는 널 혼자 둘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루이스는 릭의 말에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이며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뺨과 마찬가지로 빨개진 손끝을 본 릭은 장갑을 벗어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괜찮긴. 이렇게 차가운데. 이러다 동상이라도 걸리면 병동에서 꼬박 일주일은 누워있어야 할 걸?”
“.......”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을 꼭 잡고 문지르다 호 입김을 불자 어떻게든 손을 빼려던 루이스가 얌전해졌다.
“요즘은 좀 어때?”
“괜찮아요. 작은 홀든이 좀 귀찮게 굴긴 하지만.”
“하하. 그 애한텐 꽤 충격이었을 테니까.”
조금 미지근해진 손을 잡고 웃음을 터트린 릭은 루이스의 망토에 달린 후드에 손을 뻗었다. 후드에 묻은 눈을 털고, 눈만 보일 정도로 뒤집어씌우자 루이스가 몸을 움츠린 채 시선만 올려 릭을 쳐다봤다. 눈치를 보면서도 밀어내려고 하지 않는 게 정말 작은 동물같아서 귀엽다. 맘 같아선 꽉 끌어안고 싶은 걸 꾹 참고, 릭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그게.... 사실 도넛이랑 코코아를 준비해놨는데 그 생각이 나서.”
“그럼 얼른 가보세요.”
“혼자 먹기는 많고....”
어떻게 권해야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따라올까. 릭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릭을 빤히 올려다보던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습니다.”
“아니, 뭐.... 그냥 내가 신경 쓰여서 그런 거니까.”
릭이 손사래를 치자 루이스가 언제 울적했냐는 듯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분수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루이스 같은 학생을 위해 학교에서 나눠준 망토는 졸업생에게 기증 받은 걸 해마다 쓰는 것이다 보니 낡고 해진데다 루이스한테 두 사이즈는 컸지만, 뱅글 돌 때마다 소매며 자락이 펄럭거리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저 나이 대에는 금방 자라기 마련이고, 덕분에 상급생들은 저학년 학생들이 몸보다 더 큰 망토를 입고 다니는 걸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일상이다. 릭도 별로 다를 바 없는 상급생이었고, 루이스는 그 학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였다. 그러니 시선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 갈까.”
릭의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에 언 몸을 일으키며 작게 신음한 릭은 엉덩이를 털고 앞서 걷는 루이스의 뒤를 따랐다. 보폭의 차이가 있으니 따라잡으려면 금방 따라잡겠지만 뒤에서 눈밭을 총총 걸어가는 모습이 귀여워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꽁꽁 언 몸으로 급히 움직이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이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왓, 루이스!?!”
냉큼 다가가자 씩씩하게 몸을 일으킨 루이스가 입을 앙 다문 채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마저도 소매가 너무 길어 손등이 아니라 소매가 다 문지르는 모양새였지만, 잠깐 마음을 놓은 사이 벌어진 일에 릭은 안절부절 못 하고 허공에 손만 내저었다.
“벼, 병동에...!”
“괜찮아요.”
“그래도....”
넘어진 게 아파서인지, 아니면 추위에 얼어서인지 빨갛게 언 뺨이며 눈가가 안쓰러워진 릭은 혼자 일어나 망토에 묻은 눈을 터는 루이스를 바라보다 떠오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읏. 저 정말 괜찮아요, 혼자....”
“가끔은 그냥 받기도 해야지. 어차피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고.”
루이스를 안아든 릭은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양팔로 안아든 루이스의 몸은 눈으로 보고 가늠한 것보다 더 가볍고 작아서,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만했던 것 같은데. 2년 전, 어느 날인가 제 몸만한 책을 안고 넓은 복도를 헤매던 신입생을 떠올린 릭은 얌전히 안겨있는 루이스를 고쳐 안았다.
“전에.”
“응?”
“처음 만났을 때도 도와주셨죠. 이렇게는 아니었지만.”
무슨 얘긴가 했더니, 루이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기억해준 게 기쁘면서도 쑥스러워진 릭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루이스는 머뭇거리다 눈을 내리깔고는 양손으로 후드를 꼭 잡아 내려 얼굴을 가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에 릭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쓰며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루이스를 안은 채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큰일이고, 이제 겨우 마음을 조금씩 열어주는 아이에게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응? 아니. 뭐, 별로 힘들지도 않고.”
“아뇨. 그.... 그날.... 도와주신 거요.”
“하하. 그건 더 인사 받을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릭의 사람 좋은 미소에 루이스는 작게 숨을 토했다. 나름 용기를 낸 거였는데 상대가 너무 아무렇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망설이는 사이 눈이 쌓인 교정을 지나 복도에 다다르고, 실내로 들어가자 공기의 온도가 바뀌었다. 평소 같으면 왁자지껄할 홀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호그스미드에 간 학생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계속 이렇겠지. 혼자 있는 것도, 조용한 것도 나쁘지 않지만 다들 즐겁게 노는 동안 소외되는 건 역시 외롭다. 울적해진 루이스는 릭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몸에 주고 있던 힘을 뺐다. 빠른 걸음도 걸음이지만 낯선 높이와 그보다 더 낯선 온기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후플푸프 기숙사 휴게실이 있는 부엌 근처 오른쪽 복도에 도착한 릭은 앓는 소리와 함께 루이스를 고쳐 안았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통을 두드리려면 아무래도 손이 필요하기 마련이었고, 그러려면 루이스를 한 팔로 안아야 했다.
“저, 이젠 제 발로 서도 되는데요.”
“아, 그럼 잠시만....”
릭은 루이스가 바닥에 발을 대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손을 거뒀다. 릭이 너무 조심스러운 나머지 덩달아 긴장한 루이스는 후플푸프 기숙사로 통하는 통들 사이에서 쭈뼛거리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릭 톰슨이 후플푸프 중에서도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라지만 같은 기숙사 학생도 아닌 루이스를 이렇게 챙기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고, 다른 기숙사 학생이 휴게실까지 들어가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괜찮아. 너라면 다들 반겨줄 테고, 나도 있으니까.”
“하지만....”
루이스가 망설이는 사이 리듬에 맞춰 통을 두드린 릭은 다시 루이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소중하게 안아드는 게 아니라 어깨 위에 감자포대처럼 들었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건 여전했다.
“으왓! 릭!”
“하하! 래번클로의 영웅을 납치해왔다!”
“릭?!”
호탕하게 웃으며 휴게실에 들이닥친 릭 덕에 조용한 후플푸프 휴게실이 소란해지고, 당황한 루이스가 뒤를 돌아보며 릭을 찾았으나 야속한 뒤통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울상을 지으며 릭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웅크리자 릭이 웃으며 루이스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오, 뭐야 뭐야.”
“반장이 영웅님을 납치해왔대!”
“뭐? 어디어디?”
릭은 곤란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이스를 어깨에서 내려주는 척 품에 꼭 끌어안았다.
“저, 저기요?”
“하하하.”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루이스를 망토로 꽁꽁 감싼 릭은 불이 지펴진 벽난로 앞으로 가 두사람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쉬고 있던 다른 학생들도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어느새 간식 파티가 벌어졌다. 매일 나오는 식사도 훌륭한 정찬이지만 본 적도 없는 신기한 과자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버터 맥주가 나오고, 루이스는 다소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후드를 꼭 뒤집어 쓴 채 릭이 건넨 버터 맥주를 홀짝거렸다.
기숙사마다 성향이 다른 것도 있겠지만, 후플푸프 기숙사는 건물의 장식부터 어딘가 조금 더 따스한 느낌이다. 온화하고 평화로운데다 다들 친절하다. 마음이 편해진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올려 릭을 찾았다.
“이 정도면 호그스미드 방문 못지않은 후플푸프 방문이었지?”
“네. 감사해요. 그런데....”
“응?”
릭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 망설이는 루이스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몸을 낮추며 자연스럽게 손을 루이스의 허리에 두르자 꿈지럭거리던 루이스가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들어 릭을 올려다봤다.
“제가 여기 온 것 때문에 릭 씨가 곤란해지진 않을까요?”
웬만한 미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며 귀여운 말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두근거린 릭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약간의 불안과 걱정이 섞인 표정이 가련해서 당장이라고 꼭 끌어안고 싶은데, 그랬다간 당장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루이스를 끌어안는 대신 릭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모른 척 하며 대답했다.
“아, 하하. 그거라면 걱정 마. 네가 나쁜 장난을 치러 온 것도 아니고 내 초대를 받아서 온 거니까. 다들 그런 걸 문제 삼지는 않을걸. 래번클로가 널 너무 소홀히 한다는 걸 문제 삼는다면 모를까.”
“그건 그냥 제가 혼자....”
“알아. 우리는 후플푸프니까, 고작 그런 걸로 널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럼 슬슬 갈까. 이제 다들 돌아올 시간이기도 하고.”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스의 망토를 단단히 여민 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완전히 어린 애 취급이지만 나름 익숙해진 루이스는 다시 훌쩍 높아진 높이에 릭의 목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과보호 받는 것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고, 소중히 대해주는 것도 좋지만 역시 조금 부끄럽다. 쑥스럽고,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기분에 주먹을 꼭 쥐자 릭이 피식 웃으며 후드 위로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뭐가요?”
“뭐든.”
따스한 봄 햇살을 머금은 듯한 릭의 미소에 루이스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꼭 햇살 같은 사람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 사람 주변은 언제나 봄처럼 따뜻할 것 같고, 그래서 자꾸 기대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멍하니 눈만 깜박이자 릭이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다 엷은 미소를 지었다.
“릭 씨는....”
“응?”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심코 입을 열었던 루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릭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아빠까지는 아니더라도, 형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릭이 더 마음을 쓸 게 분명했으므로 루이스는 얼버무리며 릭의 목을 더 꼭 끌어안으며 뺨을 부볐다.
그 자그마한 행동이 릭의 가슴을 더 뿌듯하게 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꼭 안은 채 한적한 복도를 걸어 래번클로 탑으로 향했다.
* * *
“루이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네.”
“...안녕하세요. 릭.”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릭은 추운 복도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작긴 해도 안 자라는 건 아닌지, 짧은 바지 밑단 아래로 하얀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목도리에 귀마개까지 꽁꽁 싸매고 다니는 계절에 짧은 바지가 좋을 리 없지만. 릭은 차가운 맨살을 덥혀주고 싶은 걸 참고 루이스의 옆에 앉았다.
생각이 많은 아이라 이번엔 또 무슨 고민일까 짐작이 가질 않았다. 래번클로의 고민이라고 하면 이상하고 해괴한 소리거나, 보통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게 보통이지만 시무룩하니 풀이 죽은 얼굴을 보면 그런 학구적인 고민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지레짐작이라 릭은 무슨 일이냐 묻는 대신 루이스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때로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탤 요량으로 루이스 옆에 조금 더 붙어 앉은 릭은 내리는 눈을 가만히 지켜봤다. 함박눈이 내리는 호그와트의 교정은 조용하고, 스노우볼 안에 있는 자그마한 세상처럼 아름답다.
내리는 눈송이를 잡으려 손을 내밀자 영영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쯤은 웅얼거리는, 자그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이라도 놓쳤다간 이 신중한 영웅님이 내보인 마음을 다시 꽁꽁 감춰버릴 것 같았다.
“저는 래번클로랑 안 맞나 봐요. 차라리 후플푸프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정말 그랬으면 지금쯤 래번클로 학생들은 죄다 문 밖에 나앉은 신세겠군.”
“저는 진지하다구요.”
릭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생각에 잠긴 루이스를 보다 작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얌전히 머리를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당황해서 그런 거지, 싫은 건 아닌 것 같다. 그 모습이 정말 작은 동물을 보는 것 같아서, 릭은 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꾹 누르고 조심스럽게 루이스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여느 때처럼 부드럽지만 오늘은 철없는 어린애를 어르는 것 같다. 괜히 심통이 난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쌜쭉하게 내밀었다. 하지만 원망스러운 것과 별개로 머리를 만져주는 건 좋다. 크고 따뜻한 손이 머리를 어루만지면 꼭 사랑받는 것 같았다.
잔뜩 풀이 죽어서 얌전해진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릭은 둥근 뒷머리까지 어루만지며 토닥이다 무심코 루이스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려다 멈칫했다. 아무리 귀여워도 친동생이 아닌 이상 이건 과한 스킨십이다. 릭이 손을 멈추자 루이스가 왜 멈추느냐는 듯 고개를 들어 릭을 바라봤다. 크고 동그란 눈은 토끼를 연상시키고, 살짝 붉어진 뺨과 눈가가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바람에 릭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꽤 유명한 모자걸이였지.”
“몇 분이었나, 족히 오 분은 걸렸던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모자가 꽤 정성을 들여 고른 거야. 물론 네가 원했으면 후플푸프에 배정해줬겠지만... 모자가 그렇게 고민 끝에 한 결정이라면 래번클로로 가는 게 너한테 더 좋은 거겠지.”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죠.”
말을 하는 사이 진정한 릭이 웃으며 루이스를 바라봤다. 작은 동물이 의심을 거두고 마주하는 것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하는 사이 뾰로통하게 대답한 루이스가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래. 네가 후플푸프였다면 지금처럼 유명해지진 않았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정직하고 올바른 길을 추구하지만, 다른 기숙사처럼 특출나게 눈에 띄지 않잖아?”
“릭 씨는 순간이동으로 엄청 유명하잖아요.”
루이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 말에 쑥스러워진 릭은 귓가를 긁었다. 이래서야 위로를 해주려다 되레 칭찬만 받는 것 같고, 상급생이자 반장 체면이 말이 아닌 것도 같다. 애초에 반장 체면 같은 걸 생각하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멋진 선배이고 싶은 마음에 릭은 손을 내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음. 그건 나도 몰랐던 재능이고.... 다른 기숙사에서 지냈다면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을걸. 난 그리핀도르처럼 대담하거나 용감무쌍하지도 않고, 슬리데린처럼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처럼 똑똑하지도 않아. 언제나 뒤에 한 발 물러서있는 편이지. 그래서 사실은 네가 부러워. 어린 나이에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긴 쉽지 않지.”
“...아무리 그래도 다른 기숙사 애들이 릭 씨처럼 말해주진 않을 거예요.”
“하하하. 그건 그렇지. 하지만 다들 널 격려해주고 싶을 거야. 오히려 나는 좀 멋이 없는 편이지.”
“그래도 전 릭 씨가 해주는 게 좋아요.”
“응?”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이스를 바라봤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은 루이스는 릭을 마주보는 대신 그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따뜻하고.... 멋있진 않아도, 진심이 느껴지니까요.”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쳐다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게 귀엽다. 릭은 루이스가 제 입과 광대가 꿈틀거리는 걸 못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얘는 왜 이렇게 귀엽지? 끌어안아도 되나? 역시 안 되겠지? 루이스가 후플푸프 학생이었으면 모른 척 한 번은 끌어안아 봤을 텐데. 릭은 뿌듯하게 차오르는 쑥스러움과 기쁨,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꾹 누르다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이런 건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나도 쑥스러운걸.”
“...진심이에요.”
“고마워.”
“저도요.”
“그래. 그럼 이제 갈까?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곧 크리스마스인데 컨디션을 망쳐서 병동에만 누워있으면 안 되잖아?”
릭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래번클로의 작은 영웅님과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즐겁지만 눈발도 거세지고, 이렇게 추운 복도에 더 있었다간 정말 병동 신세를 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야 방한 마법이 걸린 목도리며 장갑, 스웨터로 중무장을 했다지만 루이스의 차림새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런 날에 적합하지 않았다.
곧 시험도 있고, 안 그래도 작은 아이가 아파서 누워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릭은 제 몸보다 큰 책을 안고 강의실을 찾아 복도를 헤매던 신입생 시절의 루이스를 떠올리고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는 부드럽고 자상한 미소로 손을 내민 릭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릭의 예상대로 루이스의 손은 맨손으로 눈싸움을 한 것처럼 차가워서, 릭은 루이스의 손을 지긋이 문지르며 작은 손을 데웠다.
“릭 씨한테는 아직도 제가 1학년으로 보이나 봐요.”
“하하. 나는 이제 졸업반인걸.”
“제가 시간을 뺏은 건....”
“그럴 리가.”
신중하고 침착한 건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이겠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눈치를 보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안쓰럽다. 릭은 루이스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발을 옮겼다. 졸업도, 학교를 떠나는 것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제 이렇게 손을 잡고 걸을 기회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이 시간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호그와트에서 보낸 지난 6년은 분명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릭은 그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을 입 밖에 꺼내는 대신 루이스의 손을 꼭 잡고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늦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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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모티브가 된 곡입니다! 같이 들어주시면 기쁠 거예요! >//<
“루이스.”
“톰슨 씨.”
“그.... 나랑 별 보러 가지 않겠소?”
그것은 다소,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공성전을 마친 직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다가온 릭 톰슨의 말에 루이스는 콜라 캔을 든 채 눈을 깜빡였다. 공성 내내 그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은 터라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피차 수고했다는 상투적인 말을 주고받고, 그러고 나면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뿐이라 당황스러웠다.
연합의 참모인 토니와 릭은 예의 그 작전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은 모양이지만 루이스는 그와 이렇다 할 친분이 없었다. 공성이라던가, 토니를 만나러 연합에 들른 그와 오며가며 마주친 적은 있지만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별을 보러 가지 않겠냐니.
루이스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다소 느닷없는 별구경 얘기를 꺼낸 장본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뜬금없지. 나도 아오.”
스스로도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멋쩍은 눈치였으나 다른 꿍꿍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십대 소년의 첫 데이트 신청을 같은 모습이라 괜히 미안해진 루이스는 이미 정해진 답을 망설였다. 웬만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거절당할 게 뻔한데도 용기를 내 말을 건 그의 마음이 신경 쓰여 안 되겠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정말 끝내주는 곳을 찾아서, 꼭 함께 가고 싶소.”
그가 덧붙인 이유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 말을 하는 릭은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어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곤란해 하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무른 면이 맞물려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루이스는 기대에 찬 눈빛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소. 그냥 기분 전환 삼아. 응?”
겨우 뗀 한 마디마저도 거절이라기엔 영 애매한 말이었지만 릭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더 물러설 수 없게 된 루이스는 이 일의 당위성을 찾기 시작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릭 톰슨과 그의 능력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면 호감을 쌓아두는 게 여러모로 이롭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흔쾌히 따라 가기엔 미심쩍은 데다 하루 종일 이어진 격무에 지친 몸과 처리하지 못한 내일의 업무가 마음에 걸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분도 있지 않습니까?”
“음. 그게.... 퇴근하고 밤거리를 걷다 시계를 보는데 마침 이 곳 시간이지 않겠소. 그러다 고개를 올렸는데 밤하늘이 오늘따라 더 반짝이고, 그러다 보니 문득, 당신 생각이 나서.”
릭은 뜻 모를 이유를 쑥스럽다는 듯, 하지만 소중한 기억을 꺼내 보여주듯 천천히 읊조렸다. 다른 변명거리를 찾던 루이스는 그 따스한 목소리와 미소에 더 할 말이 없어졌고, 릭은 빙긋이 눈을 휘며 손을 내밀었다.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같이 가주지 않겠소?”
마주한 눈이 머금은 온기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내밀다 일순 멈춰서자 일말의 망설임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덥썩 손이 잡혔다.
“자, 그럼 가볼까!”
맞잡은 손에서 번지는 홧홧한 열기에 한 번, 차가운 제 손을 단단히 잡은 악력에 또 한 번 놀란 사이 릭이 게이트를 열었다. 발밑에 생긴 푸른 빛이 별보다 더 반짝이지 않을까 생각하던 루이스는 불현듯 든 불안감에 고개를 들어 릭을 올려다 봤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비장의 장소요. 기대해도 좋소.”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릭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놓지 않겠다는 듯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느슨하게 잡은 손이 주는 묘한 기류에 루이스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꽉 잡혀 끌려가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간질거리지는 않으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막상 손을 놓았지만 크고 따뜻한 손이 꼭 잡고 있는 감각과 미적지근한 온도가 남은 손이 왠지 모르게 허전해진 루이스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후드를 깊이 눌러 쓰며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빼놓고 순순히 놓아주는 손이 아쉽다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루이스. 고개를 들어 보시오.”
발밑에 푸른빛이 사라지고, 이공간을 이동하는 기묘한 부유감 대신 제 발로 땅을 딛은 안정감에 그 말을 따라 고개를 들자 드넓게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별과, 그 별무리를 품은 짙은 밤하늘. 망설이고 주저한 게 어리석게 느껴지는 장관에 루이스는 말을 잃었다. 단어 몇 개, 문장 몇 줄을 더해도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을 바라보다, 손을 어루만지는 온기에 겨우 정신이 돌아와 긴 숨을 내쉬었다. 어깨며 목에 잔뜩 들어갔던 힘과 긴장이 풀어지고, 내쉰 숨을 들이마시자 조금 쌀쌀하고 신선한 공기에 저 밑 어딘가에 막혀있던 숨통이 탁 트였다.
광활한 하늘과, 반짝이는 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이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옥죄고 있던 압박과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해진 루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별을 수놓은 밤구경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감사해야 하는 건 난색을 해도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권해준 마음씨였다.
“멋지네요. 별자리 이름 같은 거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다행이군.”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릭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쉬었으면 했던 것뿐인데, 딱딱하게 굳은 무표징이 풀어진 것만으로도 내심 뿌듯했던 릭은 눈송이처럼 사르르 번졌다 사라지는 미소에 눈을 깜빡이다 그를 따라 웃었다.
뺨이며 손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바람에 내색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루이스를 방해하지 않으려, 주책 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입을 다문 릭은 발을 내딛었다.
“가만히 서있으면 감기 걸릴 거요. 바람도 차고.”
“그럼 좀 걸을까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 평소에 보는 늠름한 영웅의 얼굴과는 사뭇 다른 청초함을 풍겨, 릭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은 걸음을 옮길수록 더 깊고 아련해졌고, 갸름한 턱과 애수에 젖은 눈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릭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지금 이 사람은, 말 한 마디에도 깨져버릴 것 같다. 너무 위태롭고 연약해서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내키지 않는 제안을 따라 여기까지 와준 사람이다. 괜히 그를 더 침울하게 만드는 것만 같아 릭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니까.... 가끔은 이렇게 기분 전환도 하고.”
“....... 누가 제 기분 전환 시켜주라던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지쳐보여서.”
“톰슨 씨에게도 그렇게 보일 정도라니, 제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닌가 보군요.”
릭의 말에 멈춰 선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발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이 알아챌 정도로 상태가 나빠 보인다니. 회사는 물론이고 저를 노리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뻐할 소리에 자조하는 사이 릭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오! 무리해서 괜찮은 척 하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 일개 회사원에 불과한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냥 그대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드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루이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가끔 이렇게 기분 전환이 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부르시오. 부끄럽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저만 믿으라는 듯 말하던 릭이 겸연쩍어하며 말을 마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라곤 티끌만큼도 섞여있지 않은 진심에 먹먹해진 루이스는 차마 릭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생각과 달리 저는 너무나 초라한 사람이라 이런 마음을 받는 게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마음만 받고 또 무리하면 나는 뭐가 되오.”
“하하. 그도 그러네요.”
루이스는 투정부리듯 말하는 릭에게 꾸밈없이 웃으며 답했다. 연상에, 버젓한 직업이 있는 어른이 부리는 투정이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릭의 말이 이어졌다.
“신세 진다고 생각 마시오. 당신이야말로 남을 도울 때 받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으면서.”
“듣다 보니 어째 혼나는 것 같네요.”
엄한 척하려고 애쓰는 초짜 선생님 같은 말투에 루이스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솔직히 입에 담았다.
“루이스...!”
“농담입니다.”
예상대로 바로 발끈한 릭이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때맞춰 털어놓은 진실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꼭 풀 죽은 강아지 같아 루이스는 웃음을 참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거 조금 웃는다고 릭이 저를 여기 버려두고 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켜야할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그대도 농담을 하는 줄 몰랐소.”
“음. 영국인의 유머 센스가 좀 그렇긴 하죠.”
“그래도 지금이 훨씬 보기 좋군.”
루이스는 릭의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방금 전까지 저를 놀리며 참던 웃음과 달리 보는 사람이 더 아픈 쓴웃음이라 머뭇거리는 사이 루이스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를 냈다.
“엣취!”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버리는 재채기 소리에 민망해진 루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코를 훌쩍였다.
“조금 쌀쌀하네요.”
“옷이 얇은 걸 깜빡했군. 잠깐 이거라도 덮고 계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춥지....”
말릴 새도 없이 외투를 벗은 릭이 루이스의 어깨에 방금 벗은 외투를 얹고는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야말로 얇은 반팔 티셔츠 한 벌이라 받을 수 없다고 하려는데,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얇게 휘는 눈매가 그리는 눈웃음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루이스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사이 릭은 루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게이트를 만들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금방 오겠소.”
“아, 저기...!”
막무가내인 것도, 정신없이 몰아치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눈 깜짝할 새 릭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루이스는 잔상만 남은 게이트를 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갑자기 다가오는 것 치고 불편하지 않다. 천성이 선하고 자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겠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남겨진 루이스는 멍하니 서있는 대신 그 자리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그와 함께 걸을 땐 몰랐는데, 광활한 밤하늘과 허허벌판 사이에 홀로 남겨지고 나니 그렇게 처량하고 쓸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코도 훌쩍이고, 엉덩이를 꿈지럭거리며 다시 자리를 잡다 어깨와 등을 감싼 코트가 툭 떨어졌다.
주워든 코트는 무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미지근했다. 옷을 도로 어깨에 덮는 대신 무릎 위에 올린 루이스는 코트에 밴 옅은 커피 냄새에 괜히 쑥스러워져 잠시 머뭇거리다 도로 어깨 위에 덮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있으면 되는데,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코트의 무게며 온기, 거기에 밴 향 같은 게 죄다 신경 쓰여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결국 루이스는 옷을 끌어당겨 여미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다 열이 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부끄럼을 타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우스운 꼴이라 더 생각을 하는 대신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를 바라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별을 보며 릭을 기다리길 얼마, 땅 위에 남은 표식 위에 그가 나타났다. 한 손엔 두꺼운 담요, 한 손엔 보온병과 컵을 가져온 그는 아직도 얇은 티셔츠 한 장 차림이라 루이스는 냉큼 외투를 건넸다. 등과 어깨를 덮던 코트가 사라져 한기가 든 것도 잠깐, 빙긋 웃은 릭이 루이스의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그 짧은 시간동안 담요를 난로에 데워오기라도 했는지 무거운 코트와는 비교도 안 되게 따뜻했다. 릭은 데운 담요를 목까지 꼼꼼히 둘러주고 나서야 그의 코트를 걸치고 루이스의 옆에 앉아 컵을 내밀었다.
“자, 여기. 따뜻한 코코아요.”
“감사합니다.”
“아. 혹시 단 걸 안 좋아한다거나...?”
“아뇨.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영국인이거든요.”
“하하. 음식은 그래도 차는 까다롭잖소. 우유에 차냐, 차에 우유냐 같은 걸로 하루 종일 입씨름하고.”
“그건 중요한 문제니까요.”
“나는 커피 파니까 봐주시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아의 온기에 차가워진 몸과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에 언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자상하고, 따뜻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좋은 사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선 축복받은 능력이다. 따뜻한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쥔 루이스는 김이 오르는 코코아를 홀짝이다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입을 열었다.
“별구경에 코코아라.... 이런 건 좋아하는 분이랑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지금도 그러고 있소.”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자아낸 말에 장난으로 말을 걸었던 루이스의 눈이 커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한 릭은 옆눈질로 루이스를 보곤 눈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근사한 미소에 루이스는 마주 웃는 대신 숨을 집어삼켰고, 릭은 너무 솔직한 반응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것도 이 정도면 영웅 급이다.
“설렜소?”
“작업 멘트로는 최고네요. 연륜은 못 당하겠군요.”
“음.... 지금 늙었다는 말을....”
“뭐....”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친 농에 넘어간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루이스가 부정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는 그의 은근한 성질에 릭은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기분이 나쁘긴 커녕 그마저도 귀여워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릭이 웃자 루이스도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다 소리 내어 웃었다.
“큼. 흠.”
한바탕 웃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루이스가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긴장을 풀고 한가롭게 별이나 구경하는 것도 좀처럼 없던 일이다. 아무리 별이 예뻐도, 전장의 한복판에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여유가 없다.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뿐이지, 다시금 부는 전란의 폭풍에 세계 각지에선 지금도 소리 없는 첩보 작전과 수뇌부의 머리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치열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피 튀기는 싸움에서 ‘영웅’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사람들이 ‘영웅’에게 품는 막연한 기대는 더 커져서 그 모두를 짊어지려니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감상에 사로잡혀 빈 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릭이 푹 긴 한숨을 토했다. 이런 싸움에 평생 손을 대지 않았을 사람이, 의도치 않게 전란에 휩싸여 작전에 투입되고 죄책감에 휩싸여 액자를 찾아다니느라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쉽사리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제가 있었더라도 토니는 릭을 작전에 투입했겠지만, 그래도 만약 그 때 제가 떠나지 않고 있었더라면.
루이스는 그런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죄책감을 끌어안고 이어지는 침묵에 이따금 바람 소리와 섞여들다 릭의 목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다들 궁금해 하던데. 그대는 물어보지 않소? 모처럼 단 둘이고. 방해받을 일도 없는 기횐데.”
“...톰슨 씨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 고맙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때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엔 짙은 피로와 회한이 섞여 있어 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닌데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액자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떠돌이의 삶을 택한 사람이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그런 사람이 시간과 수고를 들여 마음을 써주는데 그걸 이용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늘 일도, 저만 알고 있는 게 좋겠죠.”
“알아주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그대만 알아주면 되오.”
고심하며 꺼낸 말에 돌아온 답이, 그와 함께 제게 보내는 미소가 주는 울림에 루이스는 후드 속에 얼굴을 숨기고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며 말을 골랐다.
“음. 뭔가 로맨틱하네요.”
“하하. 그렇소?”
“네. 자칫 잘못하단 착각하겠어요.”
침착하고 차분하려 애썼지만 정작 튀어나온 말은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라,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착각할 것 같으면 알려주시오.”
그렇게 말하며 손을 덥석 잡는 바람에 놀랐지만 릭은 그가 더 놀랐다는 듯 흠칫 몸을 떨었다. 모든 결정 능력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루이스는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편이었고, 몸에서 냉기가 흐르는 트리비아와 달리 보통 사람들에겐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어느새 손이 이렇게.... 이만 가는 게 좋겠소.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리겠군.”
“괜찮습니다. 원래 이러니까요.”
“자꾸 그렇게 두니까 몸이 상하는 거 아니오.”
함께 별을 보러 가자고 잡을 때보다 더 강하게 잡는 바람에 손을 빼지도 못하는 사이 얼굴 가득 걱정을 띠운 릭이 루이스의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큰 손이 손가락 마디며 손바닥을 문지르는 게 쑥스러우면서 야릇한 기분이라 손을 빼려 해도 릭은 루이스를 놓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꼭 잡고 비비며 호호 입김을 부는데, 그 정성과 걱정이 쑥스러우면서도 고마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힘이 빠진 걸 느낀 릭은 살며시 내리깐 루이스의 눈과 그 위로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온전히 제게 손을 맡긴 루이스의 손을 잡고 있으니 그 착각은 착각이 아니라고,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제가 생각해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부끄러워하는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감정에 릭은 말없이 손을 데우는 데 집중했다.
잡은 손을 데우고,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러고 나면 씻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정리해야지. 그와 함께 별을 보러 갔다는 기억만으로도 지친 하루가 멋진 하루가 되고, 또 다른 날의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입김을 불던 손가락 끝에 입술이 스쳤다.
“아, 그, 미안하오.”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스친 것뿐인데 저만큼이나 당황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선을 피했다. 쑥스럽고, 간지럽고, 두근거리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 손끝을 타고 번져 물들어 간다. 먼저 손을 뺀 루이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감추고, 머쓱해진 릭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 팔뚝에 찬 시계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내가 너무 시간을 뺏었군. 데려다주겠소.”
“부탁드립니다.”
먼저 일어난 릭이 루이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루이스는 그 손을 잡는 대신 혼자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 완곡한 거절에 릭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없이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를 통한 공간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서, 편리한 능력이 오늘은 몹시도 서글펐다.
“저, 톰슨 씨?”
“릭.”
“네?”
“릭이라고 불러 주시오.”
뜬금없는 말에 동그래진 눈이 토끼를 연상시켰다.
“다른 건 아니고. 톰슨 씨는 너무 딱딱하지 않소. 그리고....”
제 말만 기다리고 있는 루이스에게 마땅한 변명거리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릭은 작게 한숨을 쉬며 시간을 끌다 마지못해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톰슨 씨라고 하면 꼭 회사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오....”
스스로 생각해도 변변치 못한 이유지만, 때로는 꽤 훌륭하게 먹히는 게 바로 일 핑계였다. 아니나 다를까, 깨달음을 얻은 양 작게 입을 벌린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론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음. 부탁하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런 일에는 조금.... 둔감하니까요.”
성과 이름을 분리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듯 지은 미소에 릭은 당황해 입을 벌렸다. 이래서야 누가 누구더라 둔감하다고 할 처지가 못 된다. 실수를 바로잡기도 전에 반대편 게이트에 도착해버리는 바람에 더 다급해진 릭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팔을 움켜잡았다.
“미안하오! 그런 뜻이 아니었소. 나는 그냥, 그,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되는 대로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 위로 드리운 주황색 가스등과 그의 후드가 만든 그림자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입술을 물고 있는 것만은 또렷이 보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별 일도 아닌걸요. 그러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 뭘 했고 뭐에 서운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예쁜 미소에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보던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릭.”
그럼 좋은 밤 되라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루이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발밑에 얼음 결정을 깔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아까보다 더 멍하게 보던 릭은 수줍게 제 이름을 부르던 그를 떠올리고 주먹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려는 광대를 억지로 눌러보려 해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고, 감출 수 없는 흥분에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다 마음껏 소리치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다.
그날 밤, 게이트를 열고 돌아와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도 가시지 않는 흥분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잠든 릭은 짧은 꿈을 꿨다. 그 꿈엔 혼자 걷던 밤하늘을 저와 함께 걷는 루이스가 있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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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그, 이게 무슨....”
토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도착한 장소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였다. 황무지라고 할까, 사막에 가까운 살풍경 속에 철제 의자 두 개와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허허벌판에 의자와 테이블이 어울리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 사람에 당황한 릭은 엉거주춤 서서 주위를 살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벨져 홀든과 수도원에 잠입하는 거나 헌터 둘 사이에 끼는 것보다도 더 불편하다.
“저... 차라도 한 잔...? 커피도 있습니다.”
“그럼 커피로 부탁하오.”
삭막한 풍경 속에 그림처럼 앉아있던 남자는 릭에게 자리를 권했다. 짙은 잿빛 후드, 얼어붙은 결정 조각 같은 것들로 추론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유명한 남자는 연합의 영웅이었다. 릭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빈 의자에 앉았다.
연합의 영웅이 직접 따라준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고, 멋쩍게 주변을 둘러봤으나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포트레너드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군. 그... 용건이 뭐요.”
“이야기를 해보라더군요.”
“나와?”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이 그가 다루는 얼음 결정처럼 날카롭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깨질 것 같이 위태로운 분위기라 어쩐지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단둘이 만나기는 처음이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저를 이리로 불러내 원치 않은 자리를 만든 토니를 원망하며, 릭은 다시 말을 붙였다.
“하하.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위에선 톰슨 씨가 가진 정보에 대해 물으라고 절 보냈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니까요.”
루이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말끝을 늘이는 사이에 다시 침착한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이 일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릭은 내심 가지고 있던 영웅에 대한 인상을 수정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전쟁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익히 알고 있을뿐더러,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의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그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들 주변 사람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별개가 아닌가.
릭은 최근에 만났던 남자를 떠올리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컵을 한 손에 쥐었다.
“음. 그래서 뭐가 궁금하오.”
“...여러가지가 있지만,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떠나셔도 되고요.”
“마치 내가 떠나길 바라는 것 같군.”
내내 다른 곳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는 건 처음이라, 릭은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이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나. 깜빡이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찰나였지만 고개를 숙이며 휘는 입술을 본 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 가볍게 손을 내젓는 루이스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라 제가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 하하. 그렇군.”
후드의 그늘에 가려진 얼굴에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간다. 릭은 루이스 쪽으로 몸을 숙였다. 루이스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웃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감사합니다. 이건 별 거 아니지만... 좋아하신다고 들어서요.”
“이런. 이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루이스는 그의 의자 아래 놓여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릭에게 건넸다. 봉투에 찍혀있는 로고를 확인한 릭은 도넛 가게에 들러 도넛을 사는 루이스를 상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드셔도 됩니다.”
“고맙소. 요즘 이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을 도통 못 만나서 말이지. 다들 하나같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 바쁘더군.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도 않고....”
“상식을 기대하기 힘든 곳이니까요.”
“그러게나 말이오.”
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루이스가 후드 재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도 주머니가 있나 싶어 그의 손에 시선을 옮기자 루이스가 릭을 바라보며 작은 기계를 꺼냈다.
언제부터 녹음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 시작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녹음기를 꺼내 보여주는 건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녹음기를 보고도 민감한 질문에 답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일까. 릭은 답을 찾아 루이스를 바라봤으나 루이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인식의 문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없소. 그저 목격했을 뿐이지. 애초에 나는 그걸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액자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도 액자와 옥사나를 쫓고 있으니까요.”
“나보다는 벨져 홀든에게 묻는 게 나을 거요. 연합에는 그의 형제도 있지 않소.”
“형제도 있고, 그 날 지원하러 간 동료도 있습니다만.... 늦은 탓인지 인식의 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라서요.”
“그래서 날 부른 거요?”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모두 알려진 얘기만 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꼭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 같았다.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고, 최소한의 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머릿속에 정에 약한 천재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그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의문과 흥미만 생겨날 뿐이다.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일 텐데, 계속해서 먼저 입을 열게 되는 것도 이상했다.
“미안하게 됐군. 당신이 이렇게 나오기까지 했는데.”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하.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루이스는 그 뒤로도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그의 질문에 릭은 모른다, 혹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애매모호하게 답을 했고, 루이스는 그럴 때마다 더 캐묻는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게 맞긴 하지만 이래서야 답을 기다리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루이스를 걱정하며 녹음기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여쭤보고 싶은 건 이게 끝입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인사를 받기도 민망하군.”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고문을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조금 조심하시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부른다고 나오시면 그 때는 정말 고문실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지 않았잖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을 잡자 루이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살짝 찌푸린 눈살에 릭은 무심코 잡았던 손을 놓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능력만 믿다간 정말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기엔 특히나요.”
“...새겨듣도록 하지.”
토니에게 느끼는 위안과, 브루스에게 느끼는 존경심, 그리고 벨져에게 느끼는 막연한 기대감과 다른 감정에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았던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는 사이 루이스가 녹음기를 끄고 짐을 챙겼다. 생각에 잠겨있던 릭은 자리를 뜨려는 루이스의 등을 향해 물었다. 이 이상한 질의응답이 시작됐을 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왜 이런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이게 무슨 뜻일까. 나름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대답에 릭은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봤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릭을 향해 돌아섰다.
“상황에 떠밀려 괴로워한다는 걸 들은 바 있습니다. 전쟁과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지만.... 이미 한차례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굳이 보태는 설명을 듣고 있던 릭은 마침내 루이스가 무엇을 바랐는지 깨닫고 입을 벌렸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실험의 재료로 쓰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고맙소.”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수 있다고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도 그 사실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는 사람도 있고,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운데 모두가 외면한 일상과 권리에 대해 말하는 남자를 보며 릭은 말로 형언하기 벅찬 감정에 차올랐다. 루이스가 지키려 애쓴 것은 릭 그 자신마저 포기한 것이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 였으니까.
“할 수 있다고 그게 쉬운 건 아니지.”
짧은 문답이었으나 릭은 루이스라는 사람이 왜 '영웅'이라 불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지 이해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은 희망을 맡길 수밖에 없다. 힘이 없고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진 릭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신세를 졌군. 내가 필요해지면 부르시오.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건 회사만으로 족하지만.... 긴급 택시로 이만한 게 또 없거든.”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루이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릭의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악수 뒤에 떨어지는 손이 왠지 아쉬워 그를 향해 웃자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최근 너무 눈이 부신 사람들을 봐서 그렇지, 이쪽도 남자치곤 선이 가늘고 예쁜 얼굴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청초한 분위기가 감도는 게 이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무슨 부탁이든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톰슨 씨?”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등을 돌렸고, 릭은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멀쩡히 가는 사람을 이유도 없이 붙잡은 건 릭 자신도 놀랄 만큼 충동적인 행동이라 입을 열고도 저를 돌아보는 루이스의 눈에 돌려줄 말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 그게.... 나도 토니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오... 연합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같이 가지 않겠소?”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말은 꽤 그럴 듯 했으나 너무 허둥댄 나머지 영 신빙성이 없었다. 처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소년도 이렇게 떨지는 않을 것이다. 릭은 부끄러움과 긴장이 뒤섞여 미친 듯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붙잡은 손목을 놓았다.
하긴. 갑자기 이런 말을 해봤자 수상쩍게 보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말 한 마디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체념하려는 순간 피식 웃음이 새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이 얇게 휘었다.
“그럼 기꺼이 동행하죠.”
“...아, 그럼 게이트를 열겠소.”
잠시, 그의 미소에 눈을 빼앗겼던 릭은 바로 발 밑에 게이트를 열었다.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도 민망한데 좀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런 모습을 보고 웃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친절히 고개를 돌려주었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 그러면 나도 민망하오.....”
“크흠. 죄송합니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웃지 말란 뜻은 아니었는데, 말해놓고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아쉬워진 릭은 그를 가까이 끌어 당겼다.
“이러는 편이 능력을 쓰기 편해서 말이오.”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릭은 능력 핑계를 댔다. 발 아래 반짝이는 게이트를 본 루이스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섰고, 줄어든 거리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릭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릭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가까워서야,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다. 문제는 거리를 벌려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루이스 역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저기....”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얼굴이 귀엽다. 남자한테 귀엽다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 보는 게 귀엽다는 말이 딱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건 알지만.... 모두에게 이러는 건 아니오.”
“...다행이군요.”
릭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살짝 눈을 내리깐 루이스의 속눈썹에 하려던 말을 잊었다.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을 때우는 가볍고 상투적인 말에 불과했지만 릭의 게이트는 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을 연합에 옮겨놓았다.
“그럼 저는 이만.”
“저, 루이스.”
루이스는 연합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말을 붙이기 어려웠지만 릭은 저를 위해준 사람을 위해 용기를 냈다. 그가 써준 마음에 비하면 아주 약간의 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릭은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소?”
“릭!”
말없이 릭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입술을 뗀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더 반갑게 맞는 연합의 참모 덕에 애타게 기다리던 답을 못 듣게된 릭은 토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루이스는 릭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돌아섰고, 릭은 풀이 죽은 나머지 돌아선 루이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남겨져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쓴 거랑 ctrl+c/v한 것 같지만 새로 나온 보이스 드라마를 듣고 나니 생각나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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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Bittersweet
*
하루 종일 매달린 보고서를 열다섯 번 째 고치고, '처음이 낫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란. 릭은 부질없이 넘어가는 초침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달고 살고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작성한 보고서와 시계를 다시 한 번 번갈아 본 릭은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고 기다리길 얼마, 신호음 대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트와일라잇 서점입니다.”
“루이스. 나요.”
'아, 릭. 아직 회사인가요?'
“그게.... 야근해야 할 것 같소....”
'고생이 많네요.'
“그대는?”
'잠깐 연합에 들렀다가 들어갈 겁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녁 챙겨 드시고요.'
“알겠소. 그대도 챙겨 드시오. 참, 괜히 기다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끊겠소.”
'네. 이따 봐요.'
릭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누군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은 고된 하루에 위안이 된다. 그와의 시차는 다섯 시간 남짓. 시간을 어림잡아본 릭은 루이스가 잠들 시간이 다 되도록 서점에 있으며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가를 쓸었다.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릭의 책상 위에 김이 오르는 커피 잔 하나가 놓였다. 머그잔을 들고 있는 하얀 손과 붉은 손톱을 본 릭은 깜짝 놀라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놀라요? 뭐 잘못하다 걸린 사람처럼?”
“인기척을 못 느꼈소. 퇴근한다지 않았소?”
“막 가려던 참이에요. 열다섯 번 퇴짜 맞고 원점으로 돌아간 가여운 과장님께 커피 한 잔만 주고 말이죠.”
굽이치는 금발이 매혹적인 그녀가 시원하게 웃으며 릭의 책상에 살짝 몸을 기댔다. 무슨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것처럼 오묘한 미소를 짓는데, 왠지 모를 초조함에 릭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협상의 달인이자 노련한 로비스트다.
그녀 앞에서 비밀이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다. 애초에 감추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릭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그녀라고 알 리 없다는 생각은 그 다음이었다.
“흠. 숨겨둔 애인이라도 돼요?”
“애인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가 남자라는 사실은 둘째치고서라도, 연합의 영웅이 애인이라니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추측이다. 아무리 명석한 그녀라도 이번만큼은 너무 넘겨짚었다. 릭은 아직도 소년 같은 모습이 남아있는 청년을 떠올리며 얇게 웃었다. 그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동거인일 뿐이다. 딱히 틀린 표현도 아니라 그렇게 설명하려는데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할 것 없다는 제스처에 안심하면서도, 붉게 칠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에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렇군요. 표정이나 말투가 꼭 애인한테 말하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나이 차가 조금 나니까. 나도 모르게 동생 대하듯 했나 보군.”
“뭘요,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셨는걸요. 그래서 애인인가보다 했죠.”
“하하, 그야 퇴근하면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퇴근만한 게 없죠.”
“그럼. 기획안을 내던지는 상사보다야 왔냐고 맞아주는 사람이 백 배 낫지.”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그녀의 책상에서 가방을 챙겼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무거운 서류 가방 대신 가벼운 핸드백과 공들인 화장이 그녀의 자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바람에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신세가 더 처량해진 것은 덤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고맙소. 커피 잘 마시겠소.”
앉은 자리에서 그녀를 배웅한 릭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허리에 나쁜 자세라는 것은 알지만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했다. 어쩌면 오늘 내내 일진이 안 좋은 것도 그 영향인지 모른다.
릭이 의외의 인물과 예기치 않은 동거를 시작하게 된 건 지난주부터다. 액자와 시바 포를 찾아다니다 벽에 막힐 때면 릭은 지하연합의 토니 리켓을 찾았다. 그의 뛰어난 지략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가볍게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릭의 이야기를 들은 토니는 생각 끝에 후보지 몇을 골라주었고, 릭은 담소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토니, 이번 분기 생산품 보급 리스트.... 아. 안녕하세요.”
“아, 여기 두게.”
침착하고 의연한 결정사답게 루이스는 놀라는 기색 없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참,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요즘 어디서 지내고 있나. 여전히 여관을 전전하는 중인가?”
“뭐, 여기저기서 해결합니다.”
“그럼 우리 영웅님과 함께 지내는 건 어떤가. 이 친구, 보기보다 외로움을 타서 말이야.”
“토니. 유언비어 유포는 그쯤 하세요.”
“나쁜 제안도 아니지 않나. 자네야 늘 집을 비우기 일쑤고, 두 사람의 생활시간이 겹칠 일도 드물 테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릭은 당황했다. 루이스는 토니에게 쓸데없는 짓 말라는 투로 말하긴 했지만 언제나와 같은 포커페이스라 기분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음. 나는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좋소.”
릭은 사양하는 대신 용기를 냈다. 모처럼 하는 자기주장이라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지만, 놓치면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토니의 꾐에도 끄떡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토니는 잠시 릭을 보다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자네라도 그 집은 좀 크지 않나. 안 그래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다른 사람 눈도 있고. 금전적인 문제라면 내 사비로 보태주지.”
“누구가 들으면 엄청 서운해 하겠네요.”
“그야 있는 집을 두고 떼를 쓰는 거니까. 그럼 승낙했으니 바로 들어가면 되겠군. 릭. 잘 부탁하네.”
릭이 '토니 리켓의 사비'라는 말에 잠시 망설이는 사이 토니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황급히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릭이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이자 토니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과 눈빛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시감과 위화감이 들었지만 릭의 신경은 온통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하여 릭 톰슨은 루이스와 함께 살게 되었다. 잠시 신세를 지는 것이지만 늘 멀찍이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던 사람과 산다는 기대감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연합에서 제공했다는 집은 토니의 말대로 혼자 살기엔 넓었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 가구며 집기는 손을 탄 흔적 없이 깨끗했다. 루이스는 주방과 화장실을 소개하고 빈 방을 내주었다. 그가 건네는 여벌 열쇠를 받아들 때의 설렘이란.
차가운 열쇠와 그보다는 조금 덜 차가운 손이 손바닥을 스쳤을 때, 릭은 첫사랑에게 고백을 할 때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릭은 루이스가 방문을 닫자마자 어린 애처럼 침대 위를 굴렀다. 쑥스러움과 기대감이 차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당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릭의 설렘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시차가 있다 보니 릭이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면 루이스는 이미 퇴근한 뒤라 집에 있어야 했는데, 좀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방에 들어가 쉬는 것도 아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루이스를 볼 수 없었다.
루이스는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부러 저를 피하는 게 아닐까, 사실은 불편했던 걸까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혼자선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쓸쓸한 적막만이 반겨주는 넓은 집에서 릭은 루이스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사흘째 되던 날 밤, 릭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숙연해졌다.
루이스의 방은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밖과 안이 다를 바가 없다. 여행자의 짐이래봐야 생필품 조금과 약간의 옷가지, 현금 정도가 끝인데 오히려 릭 자신의 방이 생활감이 넘칠 정도였다.
외롭고 쓸쓸한 방은 영웅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약하고 아픈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영웅이라지만 그 역시 인간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그 수많은 사람의 기대를 혼자 짊어지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마침내 릭은 토니의 말뜻과 표정을 모두 이해했다. 그 날 정 많은 천재의 표정에서 느낀 기시감과 위화감의 정체도, 체념한 것 같았던 루이스의 말도 전부. 릭은 그의 미소와 표정이 인형실 끊기 작전을 부탁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들떠있었으면 '잘 부탁한다'는 말에서 느낀 위화감마저 지나쳤을까. 스스로가 한심해진 릭은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시간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타깝고, 슬프고, 아파서 당장 그를 마주해도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혼자 들떴다가 실망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자신과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이 위태로운 남자를 잡아줘야 한다. 릭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토니는 자신이 이렇게 나올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곤란하고 미안한 일을 떠맡겨 미안해한 것이리라. 릭은 진심으로 루이스를 잡고 싶었다.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이 이것인 것만 같았다.
그 날부터 릭은 언제 올지 모르는 루이스를 기다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루이스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서 그를 기다리던 릭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동안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루이스는 릭이 함께 산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단 눈치였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릭은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투정 부릴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릭?'
'피곤한 줄은 알지만... 기다린 성의를 봐서 잠깐 얘기하지 않겠소?'
그리 길지 않은 대화 끝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라기엔 거의 일방적으로 릭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루이스는 순순히 릭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 그동안 무심하게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감인 것 같았지만 릭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제는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 한 걸 그가 깨워줘서 아슬아슬하게 출근했고, 오늘은 함께 아침을 먹고 나왔다. 릭은 저를 위해 까치집이 된 머리에 덜 깬 눈으로 커피를 내리던 루이스를 떠올리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 같았으면 그 머리를 한 번은 헝클어트려 봤을 텐데. 후드 속에 얌전히 숨어있기 마련인 머리카락과 동그란 뒤통수를 차례로 머릿속에 그려보던 릭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는 광대를 깨닫고 멋쩍어져 헛기침했다. 어차피 사무실엔 자신밖에 없지만 괜히 부끄러워져 주변을 둘러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온기에 문득 숨겨둔 애인이냐던 말이 떠올라 더 부끄러워진 건 덤이다. 릭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치고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돌아가 그에게 뭐라도 먹이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업무를 마치자마자 게이트를 탄 릭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눈을 깜빡였다. 잘 차린 한 상과 먹음직스러운 냄새,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볼을 꼬집었을 뻔 했다.
“루이스? 이게 다 뭐요...?”
“음. 야근하느라 저녁이 부실했을 것 같아서요. 제가 만든 건 아니고 사온 거니까 겁먹지 않으셔도....”
루이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하는 사이 릭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올라갔다. 기쁨과 쑥스러움에 작게 헛기침한 릭은 말끝을 늘리는 루이스를 향해 재빨리 손사래 쳤다.
“아니, 아니오! 그래서가 아니라, 그게. 예상치 못해서....”
“그동안 제가 그리 좋은 룸메이트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생각난 김에 사온 겁니다.”
“고맙소. 훌륭하군. 생일상이라도 받은 기분이오.”
진심을 담아 웃자 루이스가 마음을 놓은 듯 슬며시 웃었다. 엷은 미소가 근사해 살짝 시선을 피하자 루이스가 손을 씻고 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릭은 냉큼 방에 서류가방과 재킷을 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짝 뜨거워진 뺨에 찬 물을 끼얹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기쁜 티를 감추지 못하는 자신이 비쳤다. 정말 이렇게 티가 날 수도 없을 정도다.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마음에 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가자 먼저 앉아있던 루이스가 자리를 권했다. 따뜻한 수프에 빵, 거기에 미국식 챱스테이크와 샐러드 약간. 사온 음식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제게 맞춰 세심하게 고른 티가 났다.
“음.... 좀 어떠세요. 괜찮나요?”
“물론이오!”
격양된 나머지 나온 큰 목소리에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늘 지쳐보이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예쁘다고 생각한 순간, 애써 가라앉힌 뺨에 다시 열이 번졌다.
“다행이네요.”
“루이스. 당신은 정말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오.”
그러니까, 생각을 거치지 않고 이런 말이 나온 건 순전히 그 화사한 미소 탓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해버린 말에 한 번,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빛에 두 번 당황한 릭은 숨을 집어삼키며 쥐고 있던 포크를 움켜쥐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괜찮습니다. 그냥 좀 의외였을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오만....”
“제가 릭 씨보다 어린 것도 사실이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군 것도 사실이죠.”
“...지금 놀리는 거요?”
그 말을 웃으며 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밤잠을 못 이룰 뻔 했다. 릭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웃으며 빵을 잘라 건넸다. 진중하고 침착한 줄만 알았는데 또 은근히 여우같은 면이 있다. 조금 억울했지만 먼저 실수를 한 건 자신이었기에 릭은 루이스가 건넨 빵을 받아 입에 넣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원래 영국식 농담이 좀 그렇거든요.”
“앞으론 미국식으로 부탁하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놀리는 게 재밌는지, 루이스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 한 끼에 이렇게 기쁠 건가 싶으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미소가 조금이라도 덜 예쁘고 조금만 더 얄미웠다면 상대를 하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나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릭은 삐진 척 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고기와 빵을 입 안 가득 넣고 씹자 맞은편에서 루이스가 물을 따라 건넸다. 그래도 풀리지 않은 것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자 루이스가 포크를 내려놓고 그의 턱을 괬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해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건 식탁 하나가 고작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은 둘째 치고 연하의 남성이 저를 귀여워하면 불쾌한 게 당연하건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결국 릭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시선에 못이긴 척 고개를 까딱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어찌나 가슴이 세게 뛰는지, 릭은 루이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대신 다시 식사를 시작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릭은 심장을 삼키는 것 같은 심정으로 식사를 마치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직도 먹을 게 남았소?”
“밥은 아니고, 간식이요. 후식으론 좀 무거울 것 같지만.”
의자를 끄는 소리도 없이 일어난 루이스가 낮은 높이의 종이 박스를 내밀었다. 상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단내가 코를 간질이고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선물이오?”
“이 근방엔 미국식 도넛이 없어서. 이 정도로 봐주세요.”
릭은 가지런히 늘어선 머핀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쑥스러운지 머핀 상자를 도로 닫아 릭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잘 먹겠소.”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걱정 마오. 그래도 영국 티푸드는 정평이 나있지 않소.”
“머핀을 티푸드에 넣는다면요?”
“하하, 그럼 지금 한 번 먹어볼까.”
릭은 망설임 없이 제일 앞줄에 있는 머핀을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 설탕의 단 맛과 풍부한 버터 맛이 혀끝을 감돌고 블루베리가 씹혔다. 제 얼굴만 보고 있는 루이스를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스가 안심한 듯 웃었다.
“다행이네요.”
“음. 덩말 맛있소!”
“천천히 드세요. 커피는 많이 마셨을 것 같고... 차라도 드릴까요?”
“아니, 됐소. 정말 괜찮소. 내가 너무 부려먹는 것 같군.”
“하하. 그럴 리가요.”
루이스가 커피나 차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 차가운 물을 쭉 들이켜고 나자 그릇을 치우던 루이스가 검지로 그의 입술 옆을 톡톡 두드렸다. 얇게 뜬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그 눈빛이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릭. 여기. 묻었어요.”
순간 넋을 잃었던 릭은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손등을 긁고 입으로 들어온 설탕과자는 까슬했다. 엉기다 만 설탕 입자가 피부를 긁은 그 간지러운 감각이 아무리 입술을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달고, 끈적하고, 까슬한 감촉과 루이스.
릭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손으로 입을 덮었다. 왜 이러는지 정말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너무 기뻐서라고 하기엔 혼란스럽고, 당황해서라고 하기엔 반응이 너무 과하다. 릭은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한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 붙였다. 루이스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릭은 이런 거라도 해야지 안 쫓겨나지 않겠냐고 능청을 떨었다.
결국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그래도 성인 남성 둘이 서기엔 좁은 싱크대라 릭과 루이스는 서로의 팔이 맞닿도록 딱 붙어 서야 했다. 릭은 루이스가 다 닦은 그릇을 건네면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찬장에 넣었다. 키 차이 때문에 루이스가 그릇을 건넬 때면 릭을 올려다 봐야했는데, 그때마다 릭은 웃지 않기 위해 입 안을 물었다.
가지고 있던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모습 하나가 죄다 귀여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이 없는데,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길고 목이 희었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곁눈질하게 되는 얼굴이다. 속눈썹이 길다는 생각을 하는데 루이스가 고개를 들며 눈이 마주쳤다.
“자. 이게 끝이네요.”
“아, 그렇군. 시간 가는 줄도 몰랐소.”
“얼른 씻고 쉬시죠.”
“그대야말로. 시간이 늦었지 않소.”
“전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그럼 내가 데려다주겠소.”
“괜찮습니다. 이건 제 일이니까요.”
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선긋기가 아쉬우면서도 늦은 시간까지 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다면.
“조심히 돌아오시오.”
“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루이스는 늘 입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문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훈훈하게 데워진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아 릭은 홀로 거실에 남는 대신 방으로 들어왔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아홉 시 반을 조금 넘어가고 있지만 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열 두 시가 훌쩍 넘었다.
외롭고 쓸쓸해졌지만 그가 가고 나니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릭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가볍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답답하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는 걸 떠올리면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아무렴 그보다 힘들까. 릭은 바로 누워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사르르 눈이 녹는 것처럼 번지는 눈웃음과 웃음소리가 깜깜한 적막 속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싱크대에 기대어 입술을 두드리던 그. 그 모습을 떠올린 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갸름한 턱과 긴 속눈썹, 선이 고운 남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진 릭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내 땅 속에 잠들어있던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아해주시는 모든 분을 위해 써봤습니다 달콤쌉쌀한 어른들의 연애 조아요 같이 좋아해주세요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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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햇살과 나그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지요 암, 그렇고 말고.
한산한 금요일 저녁, 루이스는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책을 덮었다. 이 시간쯤 되면 모두들 집에 돌아가거나 펍으로 향하기 마련이라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하긴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누가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겠냐마는. 최근 연합의 일로 바빠서 서점에 신경을 못 썼던 터라 자청한 일이었지만 인적이 드문 거리에 이따금 지나가는 커플을 보자니 속이 쓰렸다.
공성이 아니면 만날 기회도 적은 연상의 연인이 떠오르자 한숨이 먼저 새어나왔다. 딱히 연상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귀기로 한 지 한 달, 일분일초도 떨어져있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에겐같이 있을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매번 먼저 찾아와주는 게 미안한데, 거기에 이번 주말엔 보기 힘들겠다고 말할 때의 그 기분이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루이스에겐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처럼 그 역시 질려버리는 건 아닐까.
루이스는 제게 뻗은 손의 온기와 그의 미소를 기억했다. 그녀 역시 그랬지만, 그 역시 제게는 너무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루이스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신난 강아지처럼 다가온 그의 얼굴에 실망이 번지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감추던 모습에 루이스도 마음이 아팠다.
사람에게 할 비유는 아니지만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키우는 애완견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덩치는 크지만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개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다며 빈 손을 보였을 때 풀이 죽어 귀와 꼬리를 늘어뜨리는 모습이 자꾸만 그와 겹쳐졌다. 차라리 짜증을 내거나 같이 있자며 투정을 부렸으면 이렇게까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따스하고 햇살같은 사람. 루이스는 토니의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와는 어울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햇살이 가득한 풍요의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그, 릭 톰슨은 밝고 친절했다. 유복하진 않을지언정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 그의 능력조차 하나의 선물로 여기고 그의 삶을 즐긴 사람. 전쟁과는 동떨어진 그 분위기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릭은 루이스가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가진 사람이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시기하거나, 동경하거나. 루이스는 그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경에 가깝겠지만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산더미라 그에 대한 감상은 차차 잊혀졌다.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릭이 귀를 붉히고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왔을 때도 그랬다. 그 때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트리비아의 일로 지쳐있어서 미안하다는 답밖에 돌려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릭은 기다려주었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에 전장에 끌여들여서도, 마음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뀐 건 그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엔가 밤의 여제가 손을 잡아 하늘 위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처럼 나타나 모든 걸 체념한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그는, 릭은 그런 사람이었다. 두렵지 않았냐고, 죽을 수도 있었다고 소리 치자 릭은 웃으며 답했다.
“두려웠소.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그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더 무서웠소. 오늘 이 시간에 그대를 구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후회했겠지. 루이스. 나는 후회하지 않소. 내 무모함이 그대를 살렸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오.”
맞잡은 손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이 어릴 적 런던의 뒷골목에서 상상한 맑은 햇살같았다. 일 년에 몇 번, 빛이 들까말까한 그늘진 빈민가와 추운 거리에서 어렴풋이 꿈꿔온 구원이 여기 있었다. 릭이 울지 말라며 손을 뻗기까지 루이스는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그 손길마저 따스해서, 루이스는 제 뺨을 덮은 그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 날 이후로 릭은 매일같이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왔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귄다고 특별히 하는 건 별로 없지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릭은 별다른 재주 없이 루이스를 웃게 했고, 한결같이 자상했다. 침대 위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자상한 면을 이용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쁘기라도 했으면 일에 치여 잠시나마 잊었을 텐데 텅 빈 거리와 서점은 루이스의 마음을 죄책감으로 무겁게 짓눌렀다. 책임을 다하려 한 것 뿐인데, 오히려 죄를 짓는 기분이다.
정리할 것도 없는 책장을 괜히 눈으로 훑는데 서점 위층에서 갑자기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훔쳐갈 거라곤 먼지 쌓인 책들밖에 없으니 도둑은 아니고, 그렇다면 자신을 노린 기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대체 어느 암살자가 이렇게 대놓고 침입을 알린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에 얼음 결정을 만들었다 털어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창고로 쓰는 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조심히 문을 열자 어둠 속에 익숙한 뒤통수가 들어왔다.
“릭?”
“아, 그, 루이스. 그, 이건.... 그러니까.... 으악!”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 묻자 릭이 말끝을 흐리며 돌아봤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불을 밝히려는데 릭의 비명에 양철통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이어졌다. 등을 밝히자 청소 도구들 사이에 널브러진 릭이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광경에 헛웃음을 흘린 루이스는 등불을 올려놓고 문을 가로막은 빗자루와 대걸레를 한 데 모아 치우고 릭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머리에 붙은 먼지를 털고 있으니 릭이 꼭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멋쩍게 웃었다.
“집에 먼저 들렀는데 없길래 놀래켜주려 했소만....”
“그러다 엇갈리면 어쩌려고요.”
“아, 그 생각은 못 했소. 이제 슬슬 퇴근할 시간이지 않소?”
“그렇긴 한데 누구씨가 일을 벌려주셔서요.”
짓궂게 말하자 당황한 릭이 그가 어지른 창고를 둘러봤다. 양동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걸 보고 울상을 짓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데 그 변화무쌍한 반응이 꽤 귀여웠다.
“하아. 미안하오. 그러려던 건 아닌데.... 끄응. 내가 어질렀으니 여긴 내게 맡기시오.”
“하하, 농담이에요. 어차피 내일 또 쓸텐데. 당신이야말로 일은 어쩌고.”
“루이스.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소.”
“...릭”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왠지 모르게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이 입 안이 간질거린다. 잠시 토라진 척 입을 비죽이던 릭이 해맑게 웃었다. 서른이 넘어서 저렇게 소년같이 웃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루이스는 릭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성큼 다가오던 릭의 발에 양동이가 채였다. 그 사소한 해프닝마저 웃음이 나, 루이스는 오늘 여러 번 그를 괴롭히는 양동이를 한 쪽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머리를 긁으며 창고를 나온 릭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맞췄다.
실로 그답게 상냥하고 간지러운 키스는 곧 어른의 키스로 바뀌어 눈을 감은 채 키스에 집중하던 루이스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 역시 피곤할 텐데 이렇게 달려와 준 게 고마워, 루이스는 릭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뗐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까....”
“같이...!”
“얼마 안 걸려요.”
가볍게 뽀뽀하고 내려온 루이스는 밖에 내놓은 가판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갔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내려온 릭이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기다리는 바람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서점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빼먹은 게 없나 둘러본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전등을 껐다. 등 뒤에서 껴안고 얼굴을 부비는 그가 사랑스러워 몸을 돌리자 릭이 입술을 내밀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릭.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소.”
“공간을 열어줄래요?”
“물론이지.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집으로 가요.”
발밑에 게이트가 열리고, 루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릭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나 그렇지만 참 유용한 능력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루이스는 릭과 함께 그의 집에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 안에는 저녁 노을이 넘실거리고, 루이스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제게는 잘 시간이지만 릭에겐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릭. 저녁은요?”
“그대는 먹었소?”
“...아니요.”
“루이스.”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답하자 릭이 짐짓 엄하게 타이르듯 얼굴을 찡그렸다. 불규칙한 식습관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럴 때면 꼭 꾸지람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일단 빵이나 시리얼이라도....”
“릭. 그것보단 그냥 같이 눕지 않을래요?”
부엌을 향하던 릭이 걸음을 멈추고 루이스를 돌아봤다. 침대에 앉아 나름 잘 먹히는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릭의 갈등이 한층 깊어지는 게 보였다.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릭의 다리 옆으로 큼지막한 리트리버가 꼬리를 흔들며 루이스를 덮쳤다.
“으왓. 안녕 새라. 읏, 간지러워. 핥지마.”
“새라!”
“하하, 이러다 릭씨가 누울 침대가 없겠는데요. 아 따뜻하다.”
격하게 반기는 리트리버를 쓰다듬으며 드러눕자 릭이 억울해 죽겠단 얼굴로 다가왔다. 그를 놀려먹는 게 재미있다고 하면 화를 낼까. 루이스는 웃음을 꾹 참고 개를 끌어안았다. 꼭 그 주인처럼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는 유독 루이스를 좋아했다.
“루이스으. 정말 이럴 거요?”
“뭘요?”
“.....”
말문이 막힌 릭의 얼굴이 붉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 루이스는 장난을 그만 두고 상체를 일으켜 낙담한 채 울상을 짓고 있는 연인에게 키스했다.
“섹스할래요?”
“.......”
대답 대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귀여웠다. 루이스는 웃으며 일어나 릭의 손을 잡아 끌었다. 놀아달라고 조르는 개를 떼어놓고 욕실에 들어가자 밖에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람이 고프긴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를 벗고, 화장실 문에 릭을 밀치며 입술을 맞추자 그의 손이 루이스의 허리를 짚고 티셔츠를 말아올렸다.
“루이스. 사랑하오.”
“윽......”
키스 뒤에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하는 고백에 루이스의 얼굴에 열기가 번졌다. 쑥쓰러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릭이 목에 입을 맞추며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그대도 그렇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소.”
얼굴을 가리고 숨고 싶을 정도로, 릭은 애정 표현에 솔직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자 고개를 숙여 아래서 올려다보며 눈을 빛내는데, 그의 그 애처로운 얼굴에 루이스는 오늘도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사랑해요.”
“응. 고맙소. 덕분에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오.”
“릭....”
루이스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연인과 눈을 맞췄다. 넘치는 사랑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당신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또 사랑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걸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릭이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몇 번을 되새겨 생각해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축복인지. 루이스는 입 안에서 얽히는 진한 키스에 그를 마주안았다. 이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에 숨이 차올랐다. 이 사람의 온기가, 맞닿은 피부의 감촉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좋았다.
사랑스러운, 따스한 햇살에 꽁꽁 싸맨 외투를 벗는 나그네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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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오후, 커피 한 잔.
유입 키워드가 꾸준히 갱신되길래...
새연성 ㅇㅅㅠ...
“많이 기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엇, 아, 아니오.”
토니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지는 그를 기다리며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깜빡 졸았던 릭은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릭의 앞자리에 앉은 그는 지하연합의 영웅, 루이스였다. 공성 중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사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신입사원의 자세로 돌아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꼿꼿이 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싸한 기백이 느껴져 존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릭은 어두운 무표정의 영웅을 앞에 두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후드 때문에 진 그늘 때문인지 공성에서 볼 때보다도 더 분위기가 무거웠다. 루이스는 테이블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켰다. 영국인이라 틀림없이 홍차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유리창을 통과하는 강렬한 햇빛이 그를 비췄다. 햇빛 때문인가, 흰 피부며 새빨간 눈동자, 선이 고운 턱선이 어우러진 옆얼굴이 그림 같았다. 꼭 도나우 강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온갖 색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순수하게 감탄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크.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방금 그 노골적인 시선은 실례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릭을 마주했다. 무표정인건 여전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그늘이 걷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침묵이 무겁다. 릭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미건조한,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다. 친구 소개로 여자를 만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바지 위에 적당히 닦으면서도 릭은 루이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토니가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겨서 대신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딱히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한 공기가 불편하다. 릭은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상대를 잠시 떠올렸다가 지워버렸다. 아무리 간부라고 하지만 영웅씩이나 되는 사람을 대신 보내다니. 릭은 토니가 제게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깨닫는 동시에 졸지에 대신 체면치례를 하러 나온 그에게 미안해졌다. 며칠 야근을 하다 온 자신도 자신이지만, 애써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는 상대가 신경 쓰였다.
“그…….”
말을 꺼내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제게 향하는 또렷하고 맑은 눈에 릭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 다른 게 아니고, 괜찮소?”
“예?”
망했다. 릭은 어색하게 웃는 그대로 굳었다. 다른 괜찮은 말도 있을 텐데 고작 괜찮냐니, 적어도 그가 소화하는 업무의 양과 스케줄이 평범한 회사원인 자신보다야 많을 텐데! 뻔히 알면서 이도 저도 아닌 긁어 부스럼으로 자폭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았다.
“크흠. 괜찮습니다. 덕분에.”
스위치를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릭은 멍하니 뒷머리를 긁던 손을 내렸다. 웃었다. 잠시였지만, 분명 웃었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니, 애초에 사람이기는 했구나. 살짝, 눈꼬리가 휘는 게 예뻤다. 순간이었지만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것도 예뻤다. 남자에게 비교할 말은 아니지만 꼭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릭은 어디에선가 아침 카페 창가에서 봤던 물망초를 떠올렸다가 꿀꺽 침을 삼키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지만 그래도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한결 풀어진 건 분명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종업원이 커피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릭은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포옥 숨을 몰아쉬었다. 강한 햇볕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데 여긴 왜……. 아, 아니지.”
“피곤하시면 들어가 쉬셔도 됩니다.”
“하하, 그건 아니라오.”
커피를 젓던 그가 고개를 들어 릭을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운데 마냥 싫지는 않다. 릭은 검지로 무릎을 톡톡톡 두드렸다.
“토니가 당신을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얘기를 해보라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숨을 쉰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머리를 받쳤다. 근심에 휩싸인 얼굴을 내려 보고 있으니 왠지 손을 뻗고 싶어진다.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싶었다.
“조언자가 필요하단 뜻이 아니겠소. 아니면 가볍게 사귈 친구라거나.”
릭은 충동을 억누르며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사회인에게 학습된 본능과도 같은 처세술은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릭을 잠시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앉았다. 김이 오르는 커피를 바라만 보고 있는 그에게, 릭은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밀어주었다.
피곤할 땐 단 게 좋다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완곡한 거절에 릭은 조금 서운해졌다. 하지만 강요를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릭은 바구니를 다시 제자리로 당겼다.
“다는 그렇고, 반만…….”
씁쓸하게 거절당한 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시 무르기 전에 초코칩쿠키를 반 잘라 내밀자 입에도 안 댈 것 같던 그가 쿠키를 받아 입에 넣었다.
“여긴 쿠키도 제법이지만 스콘이 제일이라오. 커스터드 크림도 일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잘 먹는 게 뿌듯해 릭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그를 바라봤다. 열심히 쿠키를 먹던 루이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다네요.”
“하하, 그야 물론 초코칩쿠키니까.”
“그러게요.”
릭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잘 먹는 걸 보니 기쁘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묘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토니가 마음을 달래려고 한 거라면 더이상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스터, 저는…….”
“아, 부스러기 묻었소.”
릭은 손을 뻗었다. 뒤로 물러나는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놀라 커진 눈이 귀엽다. 영웅이 아닌, 루이스의 얼굴이 이런 걸까. 릭은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이거 실례를. 거기가 아니라 이쪽이오.”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지르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자신의 입술 왼쪽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쿠키 부스러기를 뗀 루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라오.”
루이스는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커피를 마셨다. 커피잔을 쥐는 손가락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붉게 튼 곳이며 분홍색 새 살 위로 다시 새 상처가 생긴 게 그가 짊어진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에서 책을 들고 있을 때와 공성을 할 때의 그는 정말 다르고,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평화로운 쪽이 좋았다.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평범한 서점 직원이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랬으면 희고 모양 좋은 손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평소엔 괜찮습니다.”
“아니, 미안하오. 그런 게 아니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괜찮다며 커피를 마시는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잠시 어렸다 사라졌다. 혹시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 릭은 필사적으로 무마할 말을 찾았다.
“정말로, 그래서 본 게 아니오. 그게……. 예쁜 손이라 생각해서.”
“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이걸로 오늘만 두 번째다. 이미지는 완전히 망했다. 이게 소개팅이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남자한테 이런 작업멘트를 해서 무얼 한단 말인가.
“톰슨씨.”
“예, 아, 아니. 음.”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누그러진 표정이 어째 저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아 릭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연하의 남자에게 위로를 받는 직장인이라니. 릭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본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는 건 처음이라오.”
“그렇군요. 저한텐 꽤 익숙해서, 죄송합니다.”
“익숙하다니……. 아.”
릭은 잠시 광장에서 게이트를 여닫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능력자들을 이동시키느라 바빠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서점에 서있는 그에겐 제 모습이 보였을 터였다.
“자주 뵙기도 하고요.”
“그야 그렇소만.”
“전 톰슨 씨의 상사도 아닙니다.”
“하하하, 그대를 상사로 두면 내 일이 절반은 줄어들 것 같소만.”
“글쎄요.”
어디 그게 쉬울 것 같으냐는 듯 짓는 짓궂은 미소에 릭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할 줄이야. 릭은 진심으로 대신 그를 보내준 토니에게 감사했다. 덕분에 일주일의 스트레스가 따스한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릭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생각한 것만큼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매번 미안해하는 토니보다 대하기 편했다.
“토니가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딱히 그와 많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오.”
“그럼…….”
“그가 미안해할 뿐이지.”
“…….휘말려든 쪽이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평범한 일상을 누릴 땐 그게 귀한 줄 모르죠.”
덤덤하게 말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삶, 갑작스러운 사건. 송두리째 바뀌는 삶. 릭은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남자를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 애틋한 눈빛으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듯이, 그 먼 곳을 그리는 눈에 릭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가슴 위에 올라온 돌은 조금씩 무게를 더할 겁니다. 결국에는 짓눌려버릴지도 모르죠. 그땐 이미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죠.”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루이스는 경고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릭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릭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까 싶을 정도로, 그는 릭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은 매력적이니까요. 누구든, 붙잡으면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있소?”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릭이 아는 루이스란 사람은 스카우터도 아니거니와 이런 걸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릭에게 루이스는 어디까지나 연합의 리더이자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어째서 연합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지우려 하는가. 예전의 평범하고 로맨틱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고, 또 전쟁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전쟁이 가져다줄 명예도, 부도,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릭 톰슨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글쎄요.”
릭이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쓰게 웃는 그의 눈은 후드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있을 곳을 정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겁니다. 경험자의 충고라고 해두죠.”
“......”
“그럼 저는 이만. 다음에는 토니가 나올 겁니다.”
루이스는 단숨에 잔을 비우곤 테이블 위에 두 사람 분의 커피값을 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그대로 릭을 지나쳐갔다. 싸한 냉기가 릭을 덮쳐왔다. 이대로 보내기엔 석연치 않다.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지만, 릭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루이스!”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말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릭은 깜빡이는 루이스의 눈을 보며 마침내 입술을 뗐다.
“후회하오?”
“…….”
루이스는 시선을 피했다. 또, 그 눈이다. 릭은 숨을 죽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있던 루이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릭은 카페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등을 지켜봤다. 끝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릭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두 사람분의 커피값을 테이블 위에 놓고 루이스가 두고 간 지폐는 지갑 안쪽에 넣었다.
날씨가 좋다. 릭은 바로 게이트를 여는 대신 조금 걷기로 했다. 빼먹은 게 있나 싶어 돌아본 창가 자리엔 쿠키 반쪽과 다 식어버린 커피만이 남았다.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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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벚꽃 샤워
2015/04/10
이것이 새로운 사약의 맛인가요....?
대기실에 들어온 릭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후드를 쓰지 않아 동그란 머리가 움직이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루이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아직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다른 이명만큼이나 어깨에 많은 것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 나이에 조직의 중추에 선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힘든 상태라는 건 분명했다.
그에게 다가간 릭은 얼굴을 빤히 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 색만큼이나 차가울 줄 알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가늘고, 그닥 매끄럽지는 않은 머리카락. 그 끝을 엄지와 검지로 매만지다 아예 손바닥으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릭은 그 감촉에 빠져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으음..., 릭?”
“아, 미안하오. 나 때문에 깼소?”
“아뇨, 그건 아닙니다. 혹시 지금 시간이....”
“아직 공성 시간까진 이십분 정도 남았다오.”
다행히 루이스는 제가 머리를 만진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 게 이상할 법도 한데 그걸 뭐라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릭은 최근 자신이 게이트를 열었던 횟수와 그를 만났던 횟수를 세고는 짧게 혀를 찼다. 연합에서 그를 공성에만 내보내는 게 아니니 요 며칠간 제대로 쉰 적이 없는게 분명했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오. 서른이 넘어가면 싫어도 하루하루 느껴진다오.”
“충고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루이스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늘 보는 사이인데 이렇게 거리를 벌리는게 조금 섭섭했다. 조금은 마음을 열어줘도 좋을 텐데. 토니 리켓이 제게 미안해하는 건 그렇다 쳐도 연합의 영웅이 자신을 멀리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또 모를까. 릭은 혹시 제가 밉보일 짓을 하기라도 했나 기억을 더듬었으나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릭은 소파에서 일어나 팔을 돌리며 어깨를 푸는 루이스의 등을 빤히 쳐다봤다. 전에는 그래도 인사는 잘 받아줬는데.
릭은 아직 머리카락의 감촉이 선명하게 남은 손을 그러쥐며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연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돌아온 영웅은 전보다 어두워져있었다. 그의 연인인 트리비아 카리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루이스는 그녀에 대해 입을 다물었으므로 주위에서 지레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릭은 물을 마시는 루이스의 손목과 물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루이스.”
“푸하, 네?”
“아, 아니오. 아무리 목이 타도 그렇게 마시면 안 좋다오. 물 마시다 사레라도 들리면 약도 없으니까. 하하....”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하잘 것 없는 말이라 릭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웃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괜히 찔려 입가가 씰룩거렸지만 릭은 그래도 웃었다. 그 동그랗고 빨간 눈이 깜박이다 곧 사르륵 접혔다. 루이스가 바로 입가을 다리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지만 순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와 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은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릭을 마주했다. 눈이 예쁜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릭도 잔뜩 힘을 풀고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한 마디에 오늘 업무로 쌓인 피곤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스한 뿌듯함이 가득 들어찼다. 멋쩍어 뺨을 긁적이니 루이스가 입꼬리를 당겨 씩 웃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때마침 도착한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릭은 순식간에 제 앞에서 보인 피곤과 약한 모습을 지우고 늠름한 영웅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루이스를 보며 왠지 모를 씁슬함에 입을 다셨다.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에 그런가, 분명 대단한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자꾸만 루이스가 어리게만 보였다. 엘리나 피터, 혹은 샬럿이나 마를렌, 카를로스, 빅터 같은 어린 아이들이 이런 전쟁터에 나오는 걸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고 그래선 안 되는 거지만 릭은 루이스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을 보일 때면 신경이 쓰였다. 그가 짊어진 무게는 너무 무거운 것이라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고, 가끔은 당장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이 불안했다. 마음이 쉴 곳 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점점 더 안으로 곪아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 번 시선이 가면 그 다음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손이 갔다. 그는 제가 내민 손을 늘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었지만, 글쎄.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언젠가는 한계가 오기 마련이었고 릭은 그가 그 한계에 부딪혀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좋아하고 호감을 갖지만 자신이 그에게 갖는 감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연민도, 동정도, 동경도 아닌 어떤 애틋한 감정. 그 감정에 뭐라 이름 붙여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릭이 진심으로 그를 아낀다는 것은 확실했다. 준비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게이트를 열었다.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여실히 드러나는 공성이었다. 릭은 몇 번이고 그가 리스폰 되는 걸 지켜봤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평소의 침착함은 날이 선 긴장에 가려지고 점점 쌓이기만 하는 피로와 부담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상태로 뒤쪽의 마에스트로와 캘러미티를 지켜내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가까스로 역전승을 하긴 했으나 그것도 그저 버티고 있는 것 뿐, 이미 그의 몸과 정신은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제 삼자가 봐도 그 정도니 그의 동료들이 걱정하고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하는 말에 변명도 반론도 없이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는 루이스는 폭풍의 눈 같았다. 모두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 보다 눈을 감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칼렛과 수다를 떠느라 늦은 회사의 꼬마 숙녀를 마지막으로 제 할 일을 마친 릭은 루이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 가끔은 적절한 휴식이 필요한 법이오.”
“릭, 신경써주시는 건 고맙지만.”
릭은 제게 향하는 싸늘한 눈동자를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사람을 말려야 했다.
“기분전환이라던가.”
“...하아. 딱히 생각나는 건 없군요. 그럼 전 이만.”
루이스는 틈만 남면 제게 쉴 것을 종용하는 사람이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와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제게 신경을 써주는지는 몰라도 지나친 호의는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걷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히며 강한 힘에 끌려 몸이 휘청였다.
“윽, 릭!”
“지금 자네가 해야할 일은 잔업이 아니라 휴식이오! 이번주만 몇 번이나 내가 당신을 옮겼는지 아시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확히 일곱번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릭씨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이제 이거 놔주시겠습니까?”
릭은 단호한 루이스의 거절에 얼굴을 찌푸렸다. 연합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일주일에 일곱번이나 공성에 나가는 게 문제라는 건데, 그렇다고 남는 시간에 쉬는 것도 아니면서 루이스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일에 매달리는 게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그냥 둘 수 있을 리 없었다. 릭은 토니가 제게 진 빚을 떠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있었고, 릭은 이걸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소. 그 전에 잠깐만.”
루이스는 싸늘한 무표정으로 릭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어진 것은 말이 아니라 보라색 빛무리였다. 그제야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루이스가 팔을 뿌리치려고 헀을 땐 이미 풍경이 바뀐 뒤였다.
“하아....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말하지 않았소.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연합이나 회사에서 알면 당신이 곤란해질 텐데요.”
“자, 자. 그러지 말고, 뒤를 돌아보시오.”
사람 좋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릭에게 못 이긴 루이스는 한 발을 내딛으며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춰섰다.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 핀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며 꽃잎이 눈송이처럼 내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살랑이는 꽃잎이 손바닥에 내려앉고, 길 양 옆으로 죽 늘어선 꽃나무의 가지들이 흔들렸다. 넋을 놓고 보게 되는 광경에 루이스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아름답지 않소?”
“...네. 확실히.”
“거 보시오. 잠깐이면 되지 않소.”
루이스는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릭을 보다 피식 웃었다. 확실히 여유가 없긴 했지만 동료도 뭣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신경을 써줄 정도였다니. 제가 생각해도 한심해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윽!”
“꽃구경을 하면서 그렇게 한숨 쉬는 거 아니오!”
“...아프잖습니까.”
등을 팡팡 치며 기운을 복돋아주려는 건 고마운데, 평범한 회사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팠기에 루이스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마저도 싱긋 웃어버리는 바람에 더 투덜거리지도 못하게 된 루이스는 할 수 없이 입술을 움직여 슬쩍 웃었다.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은 릭은 꽃잎의 비가 내리는 길로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꽃을 감상했다.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비밀이라오.”
“.......”
루이스는 상쾌한 대답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물어본다 해서 다시 찾아올 것도 아니고, 공간 이동 능력자인 릭 톰슨에겐 못 가는 곳이 없으니 지구 어딘가에 있는 거겠지 싶었다. 루이스가 더 묻지 않자 릭은 조금 보폭을 줄였다. 아주 잠시,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막상 이렇게 데리고 나오니 훨씬 마음이 편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꽃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잠시 나무에 매어놓은 그네를 발견하곤 멈춰섰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보고, 릭은 그네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그를 바라봤다. 한결 풀어진 표정이라던가 힘이 빠진 어깨가 보기 좋았다.
“여긴 완전히 봄 날씨네요.”
“하하, 영국은 날씨로 계절을 느끼기 힘들지. 앉겠소?”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루이스는 그런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네요.”
“다행이군. 종종 필요하면 말하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흩날리는 꽃잎 비 속에서 고운 얼굴로 하는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어 릭은 씁슬하게 웃었다. 그러자 루이스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제가 컨디션 관리를 못 한다고 릭 씨를 귀찮게 할 수는 없죠.”
“나는 이 동행이 꽤 즐겁소만.”
“.......”
어떻게 정중하게 거절해야할까 머리를 쓰는 게 보여 릭은 피식 웃었다. 이런 면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리라. 릭은 그 마음 씀씀이를 알기에 루이스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럼 내가 동행해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소? 가끔 찾아가리다.”
“그건....”
“아니면 내가 불편하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난처하는 게 보였지만 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라 사람의 호의를 쳐내는 것에 무르다. 그걸 알기에 릭은 일부러 상심한 척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 심성을 이용하는 것에 조금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런 게 바로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던져둔 함정에 걸려든 루이스를 향해 릭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매주 금요일 일곱시에 서점으로 찾아가겠소.”
“아니, 잠깐. 왜 얘기가 그렇게....”
“그 때 끝나지 않소?”
“아무래도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음. 저녁은 내가 사겠소.”
“저한테 선택권이 있긴 한 겁니까?”
루이스의 질문에 릭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거부하면 당장 여기서 포트레너드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은 기세라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도 없어 보였다.
“루이스.”
“...네.”
“포기하면 편하다오.”
싱긋, 상쾌하게 웃으며 하는 소리가 아주 굉장했다. 거의 반 협박이나 다름 없는 말에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마른 세수를 하며 한 바퀴 돌았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앞으로 더 곤란해질 게 뻔했다. 오늘은 다들 돌아간 후에 갑자기 끌려왔지만 다음에도 그런 배려를 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일찍 퇴근합니다.”
“그렇군. 광장에 안 가다 보니 몰랐소.”
“그리고 매주는 곤란합니다.”
“격주로 가지.”
“서점에서 사라지는 게 더 수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럼 집으로 데리러 가겠소.”
제 발로 무덤을 판 루이스는 어째 거하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 후였다. 릭은 그네에서 일어나 루이스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푸른 잿빛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이, 퍽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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