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무너졌다. 평범한 일상을 지탱하던 커다란 시스템의 붕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은 너무나 빠르고 쉽게 무너지고 부서졌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죽은 자가 걸어 다니고, 한 때 가족, 친구, 혹은 그저 지나치는 행인에 불과했던 이들이 원초적인 위협을 가하는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 날 전까지는.
“다이무스. 일어났어요?”
“지금 막 가려던 참이다.”
“이글이 또 말썽이에요.”
상념을 정리하던 다이무스는 한숨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새벽 내내 불침번을 섰기 때문이지만 동생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보다 더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 나니 정신을 흐리고 무르게 만드는 약에 의존하고 마는 녀석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민폐를 끼치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세간의 상식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맏형의 책무는 세상의 붕괴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루이스.”
녀석이 몸을 지배하는 짜증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약을 찾듯, 다이무스는 앞서 걷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 자신을 마주하도록 돌려 세우고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루이스는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으나 이내 입을 벌리고 숨과 혀를 섞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격식을 차릴 것도, 체면을 차릴 것도 없으니 전부 내던지고 단 둘이 되고 싶었지만 루이스는 그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는 게 다이무스 한 사람일리 없으니 이미 여러 번 유혹을 받았을 텐데 여기 계속 있지 않은가.
루이스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그런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이무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책임을 다할 때까지는 그 누구의 손도 잡지 않으리라는 것도.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벨져가 짜증을 부리는 거라면 언제나 있는 일이니 신경 쓸 거 없다.”
“그냥 짜증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음. 좀처럼 타협을 모르는 녀석이니까.”
그 말이 그의 여린 마음을 찔렀는지, 루이스는 허리를 안고 뺨에 입 맞추던 다이무스를 밀어냈다.
“루이스. 나는....”
“알아요. 일단은 이글부터 보러 가죠.”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나머지 그만 말을 잘못 골랐다. 급박한 상황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흔한 일이라지만 세 형제가 모두 같은 사람에게 꽂히는 건 극히 희박한 확률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남성이라는 것까지 더해지면 여간 난처한 게 아니다.
루이스는 누군가를 선택할 상황이 아니라며 모두 거절했지만 생존자 캠프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나 형제 사이에 불협화음이 나는 것을 전부 그의 탓으로 생각했다. 원래부터 형제간의 우애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사실도 루이스에겐 전부 다 보이는 변명에 불과했다.
유력가의 자제로 태어나 부족함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사람 하나를 얻지 못해 이렇게 궁색해질 줄 몰랐기에 더더욱 홀든의 세 형제는 루이스에게 매달렸다. 무언가에 열중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세상 탓이기도 했다.
“이게 다 무슨....”
“아, 왔어? 둘이 같이 올 줄은 몰랐네.”
“이글.”
“안 터트릴 테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응?”
방 안에 폭약을 잔뜩 쌓아두고 회로와 라이터를 들고 있던 이글이 회로를 내려놓고 루이스에게 안겨들었다. 이글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루이스에게 뺨을 비비며 다이무스를 향해 혀를 내밀었고, 안 그래도 힘이 잔뜩 들어간 다이무스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 똑같은 짓을 해댔음에도 불쾌했다.
“내가 처리하지.”
“루이스. 응? 한 번만. 한 번만 하자. 그럼 얌전히 있을게. 응?”
이게 한 두 번이 아니었는지, 이글은 집요하게 루이스의 허리와 엉덩이를 더듬으며 매달렸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치를 보며 이글을 밀어내려 했으나 완력의 차이는 그리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이스. 난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영악한 녀석 같으니. 다이무스는 이글의 수완에 혀를 내두르며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으로 능구렁이처럼 온갖 문제를 다 피해가고, 보급품도 은근슬쩍 더 챙기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눈앞에서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읏, 이글!”
각자의 방식에 끼어들지 않기로 맺은 약속만 아니었다면 매달리는 녀석을 바로 떼어냈을 텐데. 다이무스는 겨우 이글을 떼어낸 반동으로 휘청거리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이거 당장 해체해서 레이튼 씨한테 돌려드려. 네 입으로 어떻게 된 건지 해명하고, 앤지한테도 네가 직접 말해.”
“같이 안 가줄 거야?”
“먼저 약속을 어기고 제멋대로 군 건 너야. 그런 표정해도 안 봐줄 거니까 알아서 해.”
한껏 가여운 척 울상을 짓던 이글이 루이스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루이스는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폭탄으로 가득 찬 방을 나가버렸다. 형으로서, 경쟁자로서 한 마디 할 차례였다.
“이글.”
“알아, 알아. 도화선 설치도 안했다고.”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형이랑 작은형이 무슨 생각인지는 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지? 우리 영웅님은 나랑 더 끈끈한 사이거든. 아까 못 봤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어제 새벽에 형이랑 작은형이 싸운 건? 자기들도 할 말 없으면서.”
이글은 코웃음을 치며 켜켜이 쌓아둔 폭약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젯밤이라는 얘기에 잠시 펴져있던 다이무스의 미간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아니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지 몰라도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우리 다이무스 홀든 경께서 더러운 편법까지 동원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어. 나도 아니고, 형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니 나도 좀 놀랐지 뭐야?”
“이글.”
“작은형이 화낼 만 했던데? 하필이면 형이랑 루이스가 같이 정찰을 가는 날 다른 조원들이랑 연락이 끊기고, 루이스가 다쳐서 급하게 피했는데 거기에 물자며 약이며 방공호까지 있어. 너무 우연이 과하지 않아? 둘이 그렇게 사라져버리지 않은 게 얼마나 놀라운지 말 안 해도 알겠지?”
다이무스는 이글이 손을 꼽는 것을 지켜보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
“이제는 부인도 안 하는 거야? 너무하네. 내가 이십 사년간 알고 있던 다이무스 홀든이 아닌 것 같아.”
“사회의 상식과 규율에 묶여있던 것뿐이다.”
“이제 그 사회가 붕괴했으니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 여기엔 또 이곳만의 규율이 있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아무리 스노우 퀸이 자애롭더라도 이 정도 양의 폭약을 빼돌렸다는 게 알려지면 총살을 면하기 힘들 테니.”
“괜찮아. 난 루이스가 살려줄 거거든.”
“그럼 그 전에 누군가가 널 처리할지도 모르지.”
다이무스의 싸늘한 말에 선을 분리하던 이글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의 다이무스 홀든이라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랑에 눈이 멀고 질투에 타오르는 게 아니라 미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사실, 미치지 않는 게 더 어렵긴 했다.
“형. 그거 알아?”
“사실 우리 중에 형이 제일 못된 거. 바보같이 규칙에 얽매여 있는 척, 온갖 고상하고 고결한 척은 다 하지만 속은 제일 시커멓잖아. 아무리 나라도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지는 않거든.”
“...동료의 범위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지.”
이글은 방을 나서는 다이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동안 가문이며 회사며, 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았던 벨져나 자신과 달리 억눌린 게 많았다는 건 알지만 평생을 망나니인 척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던 이글의 눈에도 다이무스의 행동은 너무 과격했다.
그를 구성하고 있던 체제와 규칙, 시스템이 무너지니 함께 무너지기라도 한 걸까. 이래서야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나 다를 게 없다. 미친 듯이 달리다 그 자신도 다른 열차도 들이받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겠지. 문제는 그 다른 열차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성격에 저렇게 된 게 자기 때문이라고 하면 절대 끊어내지 못하겠지. 이글은 벽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 푹 숨을 내쉬었다. 루이스를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루이스가 다이무스를 선택한다 해도 절대 저런 상태의 다이무스에게는 넘겨줄 수 없었다.
더 어그러지기 전에 수를 쓰지 않으면. 이글은 입술을 매만졌다. 경쟁자들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고, 그를 거머쥐려면 단순한 생각을 뛰어넘어 치밀한 계략이 필요했다. 지난 밤 잠든 루이스가 그도 모르는 사이 중얼거린 이름을 떠올린 이글은 뜻 모를 웃음을 짓고 다시 하던 일에 착수했다.
사람을 찾아 옥상을 오른 루이스는 진한 주홍색으로 물든 하늘을 등지고 검을 휘두르는 남자를 발견했다. 사실 임시 거처로 쓰는 쇼핑몰이 아무리 넓어도 그가 있을 곳은 여기밖에 없기도 했다.
“여기 있었네.”
“잔소리라면 사양하지.”
“그런 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그럼.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하러 오셨나? 그 외엔 딱히 듣고 싶지 않군.”
시니컬한 말투가 왠지 기뻐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루이스는 그에게 다가갔다.
“난 괜찮아. 큰 부상도 아니었고. 멀쩡히 돌아왔잖아.”
“넌...!”
계속 무시하다 뒤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음에도 아름다웠다. 루이스는 난간에 걸터앉아 눈부신 석양을 등지고 벨져를 바라봤다. 머리까지 올려 묶고 격양된 감정을 풀어내던 벨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 마음을 뒤흔든다. 벨져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역광이 지는 바람에 그런 것도 있지만 기분이 언짢기도 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봐선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구름이 드리우며 루이스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뭐가 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전부.”
“그것도 나 때문이야?”
“쓸데없는 소리만 할 거라면 가겠다.”
“알잖아.”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등을 돌려 걷던 벨져는 걸음을 멈췄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살아만 있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마음을 할퀴고 있는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했다.
언제나 명확한 것들뿐이었던 벨져의 세계에, 루이스는 유일하게 혼란을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만 자신을 잃고 발을 헛디디고 만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잖아.”
“...그래.”
루이스는 그 말을 내뱉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이 수척했다. 아스라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에 벨져는 입술을 물었다가 루이스의 옆에 섰다.
단둘이 있음에도 말을 고르고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낼 수 있는, 루이스가 감추고 있는 비밀. 벨져는 알면서 입을 다물었다. 함께 가자는 말을 거듭해 거절하는 이유도, 초라하고 나약한 이들을 지키려는 마음도 전부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벨져는 루이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옆에 두고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겠지.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남자 때문이었다.
“내가 화가 난 건 형아가 널 독점하려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럼?”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나는 여기서 죽어도 된다는 생각.”
루이스는 엷게 웃었다. 그 희미한 웃음은 정답이라는 뜻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벨져는 더 화가 났다. 걱정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다. 애초에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이 꼴이 났다지만 벨져 홀든과 벨져가 가진 정보를 원하는 곳은 많았고, 벨져는 그 후보들 중 마음에 내키는 곳을 고를 수 있었다. 가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루이스가 떠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나?”
그 아련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아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건 그의 탓이 아니다. 그저 막지 못했을 뿐. 아무리 특수요원이라 한들 화학병기와 싸울 수는 없다. 한 발 늦은 건 벨져 역시 마찬가지였고, 세상에는 아직도 그보다 더 악질적인 이들이 그들만을 위해 만든 벙커에 숨어 호의호식하고 있다.
루이스 역시 그 거대한 음모에 대해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떨쳐내지 못할 뿐. 그래서 안전을 확보한 뒤에도 정찰대를 꾸려 생존자를 찾아 나서고, 위험을 감수하고, 매일같이 죽음 속에 자신을 던지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루이스의 무모한 행동을 두고 영웅이라 칭했지만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미안.”
“반성이 동반되지 않은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게.”
담담한 목소리에 더 울컥한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어깨에 떨어지고 루이스와 벨져의 얼굴 사이에 커튼처럼 드리웠다.
“넌 아무것도 몰라.”
침묵을 지키는 그의 눈에 어린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벨져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부르트고 거칠어진 입술임에도 끔찍이 좋았다. 그래서 더, 오래 맞대고 있기가 힘들었다.
“벨져.”
“닥쳐.”
“미안해.”
팔을 잡은 채 읊조리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벨져는 루이스를 품에 안았다. 숨이 막혀오는데도 놓을 수가 없다.
“그 때가 좋았지. ”
“그 때 널 완전히 밟아놨어야 했는데.”
벨져는 루이스의 웃음소리에 발끈하는 대신 그 날의 루이스를 떠올렸다. 스무 살의 자신과, 스물 한 살의 루이스. 참 질긴 악연이다. 그 때 널 만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네가 이렇게 괴롭지 않았겠지. 벨져는 말을 삼키고 루이스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애틋했다.
“내가 지금....”
“하지 마.”
“...그래.”
내가 지금 널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면 무슨 터무니없는 소망도 전부 들어주고자 할 것임을 알기에 벨져는 루이스의 말을 끊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잠시 이렇게 세상에 단 둘뿐인 것처럼 서로를 안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은 짧고, 부서지기 쉬우니까. 우리의 세계가 무너지고 부서져 온전치 못하더라도 지금 이 찰나에 우리가 완전했다는 것이면 충분하다.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모를 것들이지. 벨져는 말을 삼켰다.
“참. 이거.”
루이스는 주머니에서 뜯지 않은 담뱃갑을 꺼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쇼핑몰에 자리를 잡은 덕에 부족한 생필품은 거의 없었으나 언젠가는 소모되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호품은 더 귀한 사치품이 되어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꽤 괜찮은 방공호였나 보군.”
“클램차우더 스프 캔도 있더라.”
벨져는 비닐을 뜯고 입에 담배를 물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도 담배지만 자신을 생각해 가져온 마음이 기뻤다. 한 대 피우겠냐는 뜻으로 담뱃값을 내밀자 루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너한테 그 담배 냄새가 나는 게 좋더라.”
“...참고하지.”
불을 붙여준 루이스가 라이터를 넣고 벨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미안할 일을 잔뜩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사랑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벨져는 루이스에게 약했다. 제 눈치를 살피며 예쁘게 구는 루이스에게는 더더욱.
“다른 사람들이 찾을 거야.”
“...그래.”
“너무 오래 있지 마.”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예쁘게 굴며 기분을 풀어줬으니 이제 다른 사람을 찾아갈 차례라는 걸 알지만 꼴사납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기분 나쁘다고 총질하면 안 돼! 비 올 것 같으니까 맞지 말고 들어 오고!”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입에 대고 외치는 루이스를 향해 벨져는 손을 내저었다. 하여간 눈치는 아주 귀신같다. 그게 자기 자신한테 한없이 무뎌서 문제지. 벨져는 자신의 차례가 조금이라도 빨리 오길 바라며 날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석양에 섞여 흩어졌다. 세상이 무너졌음에도 해는 뜨고 진다. 타오르는 저녁노을도, 내리는 비도,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마음도 다를 바 없었다.
0:33. 딱 33초를 남기고 끝난 게임은 벨져 팀의 스트리머가 본진에서 빠져나가 몰테를 가는 것으로 끝났다. 이글의 아이스를 처리하고 리스폰기어에 올라가있던 벨져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스트리머를 제외한 넷이 전부 올라오는 바람에 HQ가 빠르게 깎이던 중이었는데, 간발의 차로 저쪽 HQ가 먼저 터졌다. 벨져는 게임창이 넘어가기 전에 v를 눌렀다.
그리고 바로 옆에 둔 핸드폰을 들어 이글에게 전화를 걸었다. 되도 않는 사기를 친 거라면 받지도 않겠지. 벨져는 반쯤 포기하고 태연해지려 애썼다. 하지만 벨져의 손은 초조를 감추지 못하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기계식 키보드의 자판이 다그락거리며 푸르게 빛났다. 그 소리는 이글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다 멈췄다.
“어, 형. 이야~. 아주 그냥 프로즌이라니까 득달같이 달려들대? 어휴 정말.”
“프로즌은.”
“와, 동생보다 프로즌이 더 좋냐? 누가 보면 아주 그냥 반한 줄 알겠어~.”
“그냥 해본 말이면 끊겠다.”
“급하긴.”
괜히 딴청을 부리는 바람에 애가 탔다. 줄 거면 빨리 주고, 아니면 말지 놀아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글 녀석이라면 지금 들어가있는 클랜도 최대규모고, 거기엔 각종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많은데다 이글 본인도 마당발이니 충분히 프로즌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 것 치고 열흘만에 얘기를 꺼내는 게 괘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실마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놓치기엔 제 마음이 풀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가 그냥 어줍잖은 아이스 나부랭이라는 걸 입증해 제가 그냥 진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시니컬로 아이스의 평타에 졌으니까.
역시, 그날 전화번호 정도는 따놨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초조하게 이글을 기다렸다.
“프로즌. 본명은 루이스. 아, 고아라 성은 없어. 나이는 스물넷. 이정도면 되겠어? 어때 무료봉사가 후하지?”
“이글.”
“와나, 진짜. 이것만 해도 어디야. 여기까지 알아내는 게 쉬운 줄 알어? 참내, 작은형이나 큰형이나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다니깐.”
벨져는 되려 성을 내며 투덜거리는 동생의 목소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답 망나니 새끼. 그냥 욕을 한 바가지 해줄까 하다가 벨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럼 그렇지. 순순히 알려준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글 녀석이 조건도 없이 술술 부는 걸 봐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뱉고 있는 중이었다. 벨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왜 이런 녀석이 동생인 걸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을까, 말까. 벨져는 무심코 손을 뻗다 망설였다. 이걸 받으면 또 겨우 이런 거에 낚이냐며 비웃어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거부를 해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 뭔가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속는 셈 치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장난하지 마라.”
“아! 장난 아니야! 형이 조또 찌질하게 구니까 그렇지!”
“뭐?”
벨져는 대번에 인상을 굳히며 되물었다. 이글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럼 필요 없다는 거지? 끊는다~.”
“이글 홀든!”
마음이 급한데 자꾸 간을 보는 이글이 짜증나 벨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막내놈은 사람 속을 긁는데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덴 좀처럼 휘둘리지 않는 벨져도 이글에게만큼은 이렇게 휘둘리곤 했다. 동생만 아니었으면 확 그냥. 쓸데없이 이글의 페이스에 휩쓸리고 만 벨져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지금 아쉬운 건 제 쪽이었다. 망할 동생놈도 그걸 알고 이러는 거지만.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이글. 그리고 원하는 게 있으면 빨리 말해. 괜히 재지 말고.”
“흐응…, 형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주 잘 알겠는걸? 재미없긴. 흥이 식었어. 모처럼 아는 사람이라 도와주려 했더니 우리 작은형은 별로 아쉽지가 않은가봐.”
이 짜증나는 새끼. 아주 그냥 가지고 노는 구만. 벨져는 부득 이를 갈았다. 평생 남의 비위같은걸 맞춰본 적이 없는 벨져였다. 뜨거워진 핸드폰을 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벨져는 참았다. 적어도 자신은 이런 애새끼에게 놀아날 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것보다 나은 존재다. 벨져. 네가 상대하고 있는 건 나이만 쳐먹은 애새끼다. 벨져는 마음을 다스리며 에어컨을 켰다. 바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깊숙이 들이마시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건가?”
“안 미안한 목소린데?”
“……. 하아. 미안하구나, 이글. 진심으로.”
씹어뱉는 가식으로, 벨져는 굴욕을 감내했다. 겨우 프로즌 그 새끼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망설여졌지만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이글이 숨넘어가라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치와 굴욕에 죽고 싶어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프로즌 망할 새끼. 벨져는 아득 이를 물었다. 이글 녀석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에 짜증과 불쾌지수가 더해져 팬이 조공으로 보내준 부채를 들어 얼굴에 부치기 시작했다.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닌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야, 아… 대박. 눈물 났어. 천하의 작은 형이 사과라니, 큭. 큭큭. 이거 녹음했어야 하는 건데. 에이.”
“그랬으면 네가 오래 살아있지 못하겠지. 무덤에 새길 유언은 정했니, 동생아?”
“와, 지금 친동생을 죽이겠다는 거야? 너무하네. 어머니가 들으면 펑펑 울다 실려가시겠어.”
“그리고 아버지와 형은 축배를 들겠지.”
바라 마지않는 전개에 이글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이 녀석의 유전자는 어디서 나온 걸까. 같은 부모님 아래 자란 형제지만 벨져는 도무지 이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봐주는 거라면 또 모를까, 녀석이 우위에서 저를 농락하는 이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하하하, 그거 말 되네. 여튼, 형이 넘 안쓰러워서 그래. 그러다 스토킹으로 수사라도 받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알려주는 거니까 내 성의와 친절을 생각해서라도 직접 해결해. 돈이나 사람 쓰지 말고.”
“흥, 애초에 남의 손 따위 빌릴 생각도 없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그야 잘난 벨져 홀든이시지. 아이스 평타에 발린.”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하려는 찰나 띵 하고 우편이 왔다. 이글에게서 온 우편을 열자 열한자리 숫자와 주소가 있어 바로 프린트스크린 키를 눌렀다. 주소가 어째 좀 낯이 익은 것도 같지만, 이게 프로즌의 연락처와 주소고 이글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두어 번 더 캡쳐를 한 벨져는 문득 드는 의문에 입을 열었다.
“이글.”
“왜, 고마워? 고마워 죽겠지? 알아~. 넣어둬!”
“넌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는 거냐.”
질문에 답이 돌아오는 대신, 적막이 이어졌다. 곰곰히 생각할 것도 없다. 이글의 행동과 말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화감이 있었다. 첫째로, 이렇게 순순히 프로즌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을 리 없다. 둘째, 이글 홀든이 하다못해 물 한 잔을 가져오라 시켜도 보상을 요구하는 녀석이 아무것도 요구조건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이글은 어떻게 프로즌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아는가. 이글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께름칙한 기분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 다 아는 수가 있지이~. 어어 나 전화 온다. 끊을게. 뿅!”
긴 침묵 끝에 그걸 끝으로 전화는 끊겨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자 바로 수신이 거부됐다. 누가 봐도 서둘러 도망간 모양새였지만 원하는 걸 얻어낸 벨져는 더 아쉬울 게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는 여전히 의뭉스럽지만, 그거야 언제 한 번 녀석이 좋아하는 클럽에 데려가 술을 좀 먹이고 기분 좋을 때 물어보거나 아니면 술값을 내달라며 아쉬운 소리를 할 때 캐물으면 그만이었다.
* * *
오전부터 시작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근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맛없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어젯밤 알아낸 주소의 건물을 주시하는 벨져에게 전화가 왔다. 액정에 뜨는 발신인은 이글.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러나 의심부터 들었지만 딱히 못 받을 것도 아니었다. 벨져는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 전화를 연결했다. 막 일어난 동생 놈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흘러들었다.
“어, 형. 뭐야, 꼭두새벽부터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야, 형한테 스토커의 기질이 있는 줄은 몰랐네.”
“닥쳐라, 이글.”
“에헤이. 또 그런다 또. 이제 좀 은인으로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땡볕에서 하염없이 기다릴까봐 좀 도와주려했더니. 안되겠구만?”
다짜고짜 속을 벅벅 긁어대는 통에 벨져는 잠시 이걸 끊을까 말까 고민했다. 어차피 기다리면 만나게 될 텐데. 여기서 뭘 더 하겠다는 것인가. 탐탁지 않았지만 기다림에 지친 것은 사실이었기에 벨져는 전화를 끊는 대신 이글이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뭘 원하는데?”
“그 사거리에 보면 바이크 세워둔 호프집 있거든? 거기서 간장 파닭! 지금이 여덟시니까 여덟시 반에 봅시다. 오케이?”
“…하아.”
“그럼 이따 봐~. 아, 먼저 가있어.”
그럼 그렇지. 중요한 건 쏙 빼놓고 알려준 동생이 짜증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일부러 애를 태운 게다. 특별히 알려주긴 무슨. 벨져는 혀를 찼다. 그리로 오라는 건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먹던 샌드위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치우고 일어났다. 대체 프로즌 하나에 얼마의 시간과 신경을 쏟는 건지. 이쯤 되니 슬슬 이 짓거리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한여름의 대학가 호프집은 붐비는 시간답게 사람들이 가득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벨져는 탐탁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주인이 90년대 하드락, 혹은 바이크 덕후라도 되는 듯 안의 인테리어가 요란했다. 주황색 조명이 전부인 어두운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낄 필요는 없었지만 벨져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멋도 멋이거니와 유명한 선수인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벨져는 구석진 안쪽 자리로 향했다. 홀에 돌아다니는 종업원 두 명은 벨져를 보지 못했는지 메뉴판을 주러 오지도 않았다. 부르려 해도 서빙벨도 없고, 맥주를 나르랴 주문을 받으랴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다리기만 하는군. 그렇게 생각하니 퍽 자존심이 상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이글 녀석의 요구사항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행여라도 진한 기름 냄새가 옷에 밸까 한숨을 내쉬는데 주방 쪽에서 그를 향해 종업원이 다가왔다.
“주문은 이따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그 목소리. 그리고 어둑한 실내에서도 눈에 띄는 머리카락. 벨져는 돌아선 종업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시끄러운 음악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잡은 손목을 힘주어 당기자 그가 꼭 그때처럼 휘청이며 이끌려왔다. 저를 향해 돌아선 멀건 얼굴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다, 그 붉은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데자부같이 익숙한 감각이었다. 벨져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교도소 안의 죄수의 삶이란 지겹기 그지 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것 뿐이라 루이스는 여느 때와 같이 점심을 먹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그래봤자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다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곱상한 얼굴만 보고 린치를 하려 들거나, 다른 용도의 노리개로 삼으려는 놈들도 있었지만 카모라까지 규합한 지하연합, 그것도 그 수장의 오른팔이자 콘실리에리를 건드릴 만한 정신나간 놈은 없었다.
애초에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사람도 아닌지라, 루이스가 입소하던 날 네 명이 의무실로 실려갔고, 루이스는 짐을 푼 지 반나절도 안 되어 독방 신세를 졌다.
폐쇄된 교도소 소식이 어찌나 빠른지 독방 신세를 지고 나오니 반가운 얼굴이 루이스를 반겼다. 지하연합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벌인 2차 전쟁에서 함께한 터커가 잠시 쉴 겸 휴가를 받아 왔다는데, 그 마음에 고맙고 미안해 루이스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루이스가 이곳에 있을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는 사람이었고, 또 동료를 아끼는 의리있는 사내였다. 첫날 소동 후로 말이 퍼지면서 그 후로 덤벼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듬직한 동료가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됐다. 앤지가 많이 걱정하더라고 전한 그는 루이스가 다른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며 경호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만 하고 돌아가래도 듣는 법이 없기에 루이스는 일찌감치 그의 마음을 돌리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제일 먼저 루이스를 걱정했다. 하지만 주먹을 쓰는 거라면 또 모를까, 높으신 분들의 결정엔 그가 달리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괜찮겠냐?"
"나쁠 건 없지. 형량도 줄여준다는데."
터커가 억센 손으로 루이스의 등을 말없이 두드렸다. 터커의 형은 1년 6개월, 가만히 있으면 곧 출소할 터였고 루이스는 며칠 전 저를 찾아온 두 사람의 제안을 수락한 후였다. 터커보다 먼저 높은 회벽을 나가도 홀든이라는 다른 감옥에 갇히는 것 뿐이지만.
루이스는 기지개를 켜다 머리를 받치고 잔디밭에 누웠다. 하늘이 유독 푸르다. 좋은 날씨라 옷도 벗고 일관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만난 홀든은 그야말로 귀족 그 자체라 제가 그들에게 섞일 일은 없겠지만,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앤지가 변호사를 통해 보내온 자료를 받아보긴 했지만 사람은 어디까지나 겪어봐야 아는 일이다.
잠시 하늘을 보던 루이스는 손을 들어 강하게 내리쬐는 해를 가렸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괴로우니 눈을 감을 수 밖에. 어쨌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더 신경쓰지 말자.
루이스는 흔히들 망나니라 부르는 막내 홀든을 떠올렸다. 그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과 일화, 겉으로 보이는 그는 말 그대로 망나니지만 루이스는 세간의 평가와 숨겨진 그가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목표가 있다.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경향은 있지만 어디에 얽매여 있지 않기에 오히려 그의 형들보다 더 예측하기 힘들뿐더러 영리하다. 영리하다기 보단 영악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호기심은 그렇게 굴러 굴러 몸집을 불리다 따뜻한 햇살에 먼 의식 너머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사복 차림의 죄수 한 사람만을 태운 이송버스가 갑자기 멈추고, 그 옆에 새빨간 페라리 한 대가 거칠게 멈춰섰다. 얌전히 창 밖을 보고 있던 죄수 루이스는 페라리에서 내린 긴 은발을 보고 바로 앉았다. 소문만 무성한 망나니 막내 홀든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이송버스의 앞문이 열리고 선글라스에 딱 달라붙는 가죽바지, 거기에 호피무늬 라이더재킷을 걸친 다소 해괴한 조합인데도 지나치다기보다 화려하다는 인상을 주는 게 꼭 패션 잡지의 모델같았다.
"여어, 영웅 형씨. 안녕?"
"그쪽은 꽤 즐거워 보이는걸."
"흐응, 듣던 대로 보통내기가 아닌데? 난 또 재미없는 샌님인 줄 알았지 뭐야."
껄렁하게 말하는 게 생각하는 그대로를 내뱉는 티가 역력했다.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앞에 만난 형제들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고 있자니 꼭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동물원에 보러 온 것 같았다. 누가 우리 안의 짐승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루이스가 웃자 이글도 씩 웃더니 재킷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고 운전석 칸막이를 탕탕 쳤다. 철컥. 철창 문이 열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글이 열쇠고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왔다. 반응을 않자 손목을 턱 잡는데 악력이 상당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고개를 들자 드디어 그의 눈이 보였다. 짙은 색 유리에 가려져있지만, 어쩌면 이 사내는 망나니라는 허상으로 사냥꾼의 본능과 야성을 가리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 갑자기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는데, 입술에서 쪽 하고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놀라 눈이 커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이글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하하하하! 뭐야, 그 얼빠진 반응은. 픕, 푸훕. 아아, 진짜 웃겨 죽겠네."
이글 홀든은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얼빠진 얼굴이었을 거란 생각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뺨이 화끈거렸다. 소심한 반항일 뿐이지만 루이스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너무 잘 어울려서 잊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반말을 하는 것도 짜증났다.
"하하, 이 오빠가 이것보다 더 좋은 것도 줄 수 있는데, 너무 차갑게 굴지 마. 응?"
"내가 너네 둘째 형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아냐?"
"어, 그래? 싫음 말구. 어이! 아저씨! 다시 모셔다 드려! 영 같이 일하기 싫으신갑다."
이글은 순식간에 등을 돌리더니 철창을 탕탕쳤다. 껄렁한 그의 말이 더이상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뀌는 분위기에 루이스가 그를 잡으려 입술을 떼자 이글의 검지가 입술 위에 올라왔다.
"쫄지 말어. 농담이니까. 너무 순진하게 넘어오지 말라고, 천재 설계자씨."
생글생글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팍에 꽂은 이글은 쭈그려 앉아 루이스의 발목에 걸려있던 족쇄를 풀었다. 그리곤 품에서 작은 박스를 꺼내 장난스레 흔들어 보여주다가, 청혼이라도 하는 것처럼 상자를 열어 보여주었다. 얇은 은색 금속. 언뜻 보면 팔찌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고리의 크기가 컸다.
"쨔잔. 이러니까 꼭 청혼하는 것 같네."
"그럼 차였을 걸."
"하하, 선물이니까 받아두라고. 이래봬도 형씨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거니까."
"그런 친절 별로 달갑지 않은데."
"난들 어쩌겠어. 시키니까 하는 거지."
말을 주고 받는 사이 발목에 차가운 금속이 감겼다. 찰칵, 맞물리는 소리가 자유의 몸이 아님을 일깨우며 발목에 걸렸다. 손목의 수갑까지 풀어낸 이글은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수갑이 풀린 손목을 매만지고 있으니 이글이 차 밖으로 나가 루이스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따스한 바깥 공기, 높은 담이 없는 풍경이 오랜만이었지만 왼쪽 발목에 감긴 얇은 금속의 감촉은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자, 그럼 가볼까?"
이글 홀든은 오랜 친구를 대하듯 루이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구는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니 찡긋 윙크하는데, 기가 차 헛웃음이 나왔다. 루이스는 아무래도 이 일이 순탄치 않을 것을 직감했다.
흉흉한 기운이 감도는 육중한 회색 건물 앞, 건물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은색의 고급 세단이 멈췄다.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반짝이는 차체, 그리고 거기서 내린 남자의 머리칼 역시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벨져 홀든. 명문 귀족 출신에 금융업과 경검을 아우르는 엘리트 가문인 홀든. 그리고 그 홀든의 차남.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어가며 자라 명문 사립학교 진학에, 일류대를 조기졸업하고 검사 뱃지를 단 그는 무엇 하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특유의 오만한 태도와 남을 깔보는 성격을 기분 나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능력, 그리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배경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능력이 확실하고 철두철미한 일처리는 그가 낙하산같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충분했다. 벨져 홀근은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따를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사내였고, 실패란 것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 사건까진.
제게 굽신거리느라 바쁜 교도소장을 떼어놓은 벨져는 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서 넥타이의 매듭을 만지며 숨을 들이마셨다. 과거의 실수를 마주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면회라는 방법 대신 직접 찾아온 것은 하루, 혹은 몇시간이라도 제 형제들 귀에 자신의 행적이 들어가는 걸 늦추기 위해서였다. 벨져는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넣어온 정보를 되새기고 한숨을 쉬었다.
따라온 교도관이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벨져는 좁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물빠진 잿빛 머리카락과 곱상한 얼굴. 창문 하나 없는 교도소의 독방에서도 그는 얼음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날 이후로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새파란 죄수복에 그 날의 그를 겹쳐본 벨져는 표정을 굳혔다가 빈정거렸다.
"체스라, 한가하군. 누군 네 데스크만 털면 해결일 문제들을 가지고 아주 사방팔방 뛰어다니느라 바쁜데 말이야."
"…덕분에 아주 편안합니다."
여전히 재수 없는 자식. 벨져는 혀를 찼다. 이렇게 면대면으로 대하는 것도 껄끄럽지만 이미 위에서 다 결정이 된 사항이라 어깃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빠르고 간단하게. 벨져는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웠다.
"뭐, 네 놈의 목에 목줄을 채울 생각을 하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군."
"그러다 물리면 이번엔 쪽팔린 걸로는 안 끝날 텐데."
"뭐 이 새끼야?"
"검사님이 입에 걸레를 물어서 쓰나.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께서."
제 기분을 슬슬 긁는 소리에 벨져는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올렸다. 상성이 맞지 않는다기 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바람에 잠시 말린 것 뿐이다. 완벽에 가까운 미소를 머금고, 벨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웃었다. 고작 한 번. 제 실책이 크긴 했지만 고작 한 번 이긴 걸 가지고 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더 무서울 게 없나보군."
"나 무서운 거 많은데. 지금 내 앞에서 날 잡아먹으려는 검사님이라던가."
"흥, 말은 잘 하는군. 쓸모없어지면 바로 스위트룸으로 돌아오게 될 거다. 알아서 아늑하게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문제 없겠군."
"글쎄. 그 전에 내가 달아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어디 한 번 해보시던지. 다시 잡아 쳐넣어줄 테니까."
벨져의 푸른 눈과 루이스의 붉은 눈이 마주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서로를 탐색하는 맹수들처럼, 폭풍 전이 지극히 고요한 것처럼 둘은 말이 없었다. 그 신경전을 먼저 깬 건 루이스였다. 순하게 생긴 눈을 슬쩍 내리깔며 작게 숨을 내쉰 그는 무릎 위에 모아뒀던 손을 들어 체스판의 검은 폰을 움직이며 여전히 거만하게 서있는 벨져를 바로 보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벨져는 그를 내려다 보다 체스판 앞으로 다가가 흰 나이트를 움직였다. 처음 폰이 두 칸 앞서더라도, 끝내는 잡히게 되어 있었다.
"얼마든지."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고, 벨져 역시 미소로 답했다. 게임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철두철미한 남자다. 그것은 일에 있어서도, 자신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다져진 몸 위에 매끄럽게 떨어지는 검은 수트와 적갈색 넥타이, 그보다 더 그를 완벽하게 만드는 건 한 자루의 검같은 얼굴이었다. 다이무스는 자신을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무겁고 음습한 공기가 감도는 회색 건물로 들어갔다. 간간히 철창 안의 죄수들이 그의 모습을 보러 기웃거렸지만 이내 그의 칼날같은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복도를 두드리는 구두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고, 곧 철창이 열리며 건물 깊은 곳의 문이 열렸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군."
기다렸다는 듯 태연하게 자신을 맞는 남자는 세월이 빗겨가기라도 한 듯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다이무스는 책상 앞 의자를 빼 앉아 카라를 정돈했고, 그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다이무스는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가볍게 숨을 내쉬고 서류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건넸다. 루이스. 지하연합의 수장 앤지헌트의 오른팔이자 천재 설계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영리하게 행동하던 그가 제 발로 들어온 게 벌써 오 년 전 일이었다. 그는 잠시 다이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파일을 받았다.
사전에 협의가 된 내용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건 파일을 건네다니. 루이스는 천천히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방화와 실종, 생존자들은 증언을 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상태. 고아원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루이스는 심란하게 파일을 덮었다.
"보기에 어떤가."
"추출할 생각일랑 관두는게 좋을 겁니다.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거랑 똑같으니까."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군."
"어린애들이니까요."
다이무스는 파일을 되받아 서류가방에 넣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단언한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이무스는 가만히 루이스를 바라봤다.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드러난 붉은 눈동자엔 어느새 날카로운 통찰이 깃들어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상할 정도로 없습니다. 원장이 돈을 빼돌리고 아이들을 학대하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 아이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불을 질렀다기엔 너무 능숙하고 깔끔하죠."
"그럼 방화를 사주한 게 누구라고 보나?"
"시킨다고 이렇게 치밀할 수는 없죠. 단순한 원한은 아닙니다."
다이무스는 입을 다물었다. 과연 천재 설계자는 이렇게 증거가 부족한 파일에서 무엇을 보고, 무슨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건 일종의 테스트였다. 이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팀에 넣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던 둘째를 떠올린 다이무스는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는 아예 일어나 좁은 감방 안을 서성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고아원. 혹시 중년의 여선생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가 있다면 이 아이들의 또래일 법한."
"있다. 선량한 사람이라더군. 사건 시간엔 퇴근 후 집에 있었다."
"...그럼 그녀겠군요."
다이무스는 단호하게 말하는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그 붉은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서늘한 냉기를 풍기는 것 같았다.
"어째서?"
"첫째로는, 그녀가 선량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신만 아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원장을 죽일 생각은 보통 하지 않죠."
"이해가 가지 않는군."
"고아원에서 일한지 삼년. 그동안 원장이 무슨 짓을 하는지 충분히 알았을텐데 왜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아마 그녀는 원장에게 뭔가 약점이 잡혀있었던 거겠죠."
"예를 들면?"
"글쎄요, 전과? 아마 지금 쓰는 이름은 가명일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약을 하느라 급료도 제대로 원장 밑에서 일할 리가 없죠."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응시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일전에 다른 사람이 했던 추리와 흡사했다. 다이무스가 가만 듣고 있자 루이스가 입가를 매만지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원장이 약을 어디서 구했냐, 그게 궁금해지는군요. 헤시시?"
"왜 그렇게 생각하나."
다이무스의 질문에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서류 가방을 흘긋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에,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거기까지 유추해내다니. 내색은 않았지만 훌륭했다.
"그렇군. 그래서, 동기는?"
"...더이상 약을 살 돈이 없었던 거겠죠. 처음엔 그냥도 주지만, 점점 가격을 올리는 게 전형적인 수법이니까. 돈이 필요해진 원장은 그녀를 협박하며 돈을 요구했을 겁니다. 이미 전에도 꽤 줬겠지만."
"또?"
"신변의 위협을 가했을 수도 있죠."
루이스는 담담하게 말했고, 다이무스는 꼰 다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생각보다 더 뛰어났고, 예상 외로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말을 하면 아마 길길이 날뛰겠지만. 다이무스는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리러 오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특별히 원하는 거라도 있나?"
"그래봤자 24시간 감시 아닙니까?"
철문을 나서기 전 잠시 발을 멈춘 다이무스의 질문에 루이스는 질문으로 답했다. 사건에 협력할 때마다 형량이 줄어든다. 그러나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을 나오기 위해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홀든 형제들의 감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게 대전제였다. 타협할 수 없는 요구에 다이무스는 문을 열며 방을 나서다 멈춰섰다.
"...고려해보겠다."
고개를 돌리기 전, 그가 피식 웃는 걸 본 것도 같았지만 다이무스는 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가 어떤 가능성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오후 아홉시 반. 잔뜩 쌓인 업무로부터 퇴근한 다이무스 홀든은 자택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고급주택답게 육중한 쇠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다이무스는 불이 켜진 거실에 노닥거리는 형제들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제 와인 셀러에 손을 댔는지,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리며 향을 음미하던 벨져와 눈이 마주친 다이무스는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왔구나.”
“불러놓고, 늦었네. 형아.”
“그러는 작은형도 좀 전에 왔으면서~.”
이글은 장난스레 벨져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쳤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다이무스, 당장 어느 파티에 참석해도 될 법한 차림의 벨져와 달리 이글은 청바지에 점퍼차림이었다. 각각 경감, 검사직을 하나씩 꿰찬 형들과 달리 책상머리 업무는 싫다며 멋대로 군 자유로운 영혼다웠다. 다이무스는 이글과 벨져를 한 번씩 쳐다보곤 가방에서 서류철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이건 또 뭐야.”
“귀찮은 일이면 안 해.”
벨져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고 이글은 소파에 길게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 서류철에 손도 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안타리우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핵심만 짚어서, 간단하고 짧게. 다이무스의 말에 이글과 벨져가 눈을 치켜떴다. 안타리우스라고 하는 조직은 어느 쪽으로든 손을 뻗고 있었기에 이쪽에 몸 담은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접근하려고. 꼬리는?”
“걔네가 잡혀는 준대?”
“우리만으로는 부족하지.”
다이무스는 깔끔하게 시인했다. 경찰조직을 전부 동원해도 그들의 꼬리만 쫓을 뿐 정작 그들의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각종 범죄부터 정치, 경제, 종교에까지 숨어든 그들은 일반인에 섞여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울 뿐더러, 잡아도 꼬리를 자르고 도마뱀처럼 빠져나가는 게 안타리우스였다.
“더 깊이, 들어가야한다.”
“어떻게?”
방금 전까지 심드렁하던 이글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있었고, 벨져는 와인잔을 흔들던 손을 멈췄다. 이글의 질문과 벨져의 눈빛에 다이무스는 대답 대신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빤 그는 막 불을 붙인 장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지 않은 신호에 벨져와 이글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이무스가 아무 말 없이 입가를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기대자 벨져는 이글에게 눈짓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펼친 뒤 바로 인상을 구기고 파일을 내던지긴 했지만.
“뭔데 그래?”
흔치않은 벨져의 반응에 흥미가 동했는지 이글도 파일을 집어들었다. 바로 첫 장에 나오는 신상명세에 이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바로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 하하. 작은형이 질색할 만 하네.”
“닥쳐라, 이글.”
“지금 상황에 그보다 적임자는 없다.”
“그래서 그 더러운 범죄자새끼를 끌어다 쓰겠다고? 그렇게 사람이 없나?”
벨져는 여과없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타고난 능력과 배경으로 주구장창 탄탄대로를 달리던 검사 벨져 홀든의 이력에 단 한 번 굴욕을 남긴 그를 벨져가 좋아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다이무스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엔 서류를 거들떠도 안 보던 이글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서류를 읽어내렸다.
“재밌네. 난 찬성.”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형아?”
“더 큰 목적을 위해 가치있는 일이다.”
벨져가 어깃장을 놓는 건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기에 다이무스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와인병을 들었다. 그리 달가운 선택지는 아니지만 최악보단 차악이 낫다. 이이제이, 오랑캐는 오랑캐로 막는다. 다이무스는 창가에 서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병째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위에서 허가는 내려왔지만 이번 일은 다이무스 홀든에게도 쉽지 않았기에 적어도 함께 할 두 동생에게 미리 알릴 필요는 있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벨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이 하는지 입술을 매만지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두사람을 번갈아 보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