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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연합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일손이 부족한 서점에 하루라도 더 일손을 보태기로 한 건 딱히 사람이 많은 파티가 싫다거나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끌벅적한 연합 분위기야말로 파티라는 말이 잘 어울려서 좋아하고, 다른 때도 아닌데 이럴 때 좀 놀면 어떤가. 그럼에도 일곱시 땡 하자마자 퇴근해서 집으로 달려온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싸늘하고 어두워야 할 공간이 환하고 따뜻했다.
“벨져.”
“흠. 늦진 않았군. 앉아라.”
애인이 집에 와있는데 보일러나 장작을 아끼는 건 아니지만, 루이스는 목도리를 푸르며 크리스마스라고 받아온 갈레뜨 봉투를 벨져에게 건넸다. 벨져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선반 위에 올렸다. 내일 간식으로 먹으면 되겠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벨져에 기가 찬 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루이스였다.
“벨져.”
“뭐하나. 얼른 씻고 와라.”
“아니,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우리 어제 약속한 게 있을 텐데?”
약속. 약속이란 말에 힘주어 말하자 벨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좋은 날이고, 벨져 홀든 경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친히 왕림하시어 저녁을 준비하고 그것도 모자라 촛불까지 켜놓은 그 정성을 생각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분명 싸우겠지.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싸우고 싶지 않다. 결국 루이스가 먼저 한 발 물러났다.
“씻고 나올게.”
원한 대답에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넓지도 않은 집이라 욕실부터 주방까지 한 눈에 보이는데, 칠면조가 떡하니 쓰지도 않는 식탁 위에 올라와있었다. 루이스는 손을 씻으려다 새삼 감동했다. 나갔다 들어오면 춥다고 미리 물까지 데워놨다. 이 정도면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쫓아낼 수가 없다.
손만 씻으려던 루이스는 세수까지 하고 나왔다. 따뜻한 물에 있는 줄도 몰랐던 하루의 피로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라, 루이스는 벌써 앉아 기다리고 있는 벨져 앞에 앉았다. 이 집에 식탁보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벨져.”
“크리스마스 이브는 연인과 함께라는 말도 못 들었나? 알아서 한다.”
“…그래. 고마워.”
“들어라.”
피식 웃으며 포크를 들자 벨져의 눈이 따라붙었다. 이건 분명 사온 음식들 가운데 직접 만든 게 섞여있다는 뜻이다. 루이스는 죽 식탁 위를 훑었다. 칠면조야 이걸 구울 오븐이 없으니 백 퍼센트 아니고, 빵은 자주 가는 거기서 사온 것 같고, 샐러드는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면 가끔 하는 거니까 가능성이 높지만 그 옆에 있는 스튜같은 무언가도 냄비가 눈에 익을 걸 봐선 이쪽일 수도 있다.
정말로, 진심으로, 루이스는 이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밥먹으면 갈 테니까. 기껏 준비했는데 맛있게 먹어주지 않으면 실례다. 루이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스푼을 들었다. 벨져의 눈에 슬며시 기대가 스민다. 역시 이쪽인가. 맛있다. 한 술 넘긴 솔직한 감상이 그랬다.
“직접 한 거야? 맛있다.”
“흥. 소스랑 같이 먹는 거다.”
“뭔데.”
“타펠슈피츠.”
“너네 나라 음식?”
“그래.”
벨져는 앞접시에 각종 야채와 고기를 덜어 루이스에게 건넸다. 소스까지 알려주고, 거기에 감자도 곁들이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나서야 포크를 든다. 준비하려면 오래 걸렸을 텐데. 더 내보내기가 미안해졌다. 루이스는 군말없이 맛있게 받아먹었다.
“다행이군.”
“응? 머가?”
“먹고 말해라.”
자기가 계속 쉴 틈 없이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는 주제에. 벨져는 눈을 흘기며 타박했다. 누가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이 초라한 집에서조차 기품이 넘치신다. 어쩜 밥 먹는 것도 이렇게 예쁠까. 루이스는 입 안의 음식을 넘기고 벨져의 얼굴을 쳐다봤다.
“닳는다. 그만 봐.”
“물 가져올게.”
“가만 있어라.”
잠깐 까먹은 거였는지 벨져가 와인잔 두 개와 함께 와인 병을 들고 왔다. 코르크를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루이스는 피시식 웃으며 벨져를 바라봤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 분명 와인도 비싼 거겠지. 정말 과분한 애인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상투적인 말이지만 딱히 건배에 어울리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잔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났다. 한 모금 마시자 훅 올라오는 향과 맛에 또 한 번 감탄한 루이스는 한 모금 넘기며 벨져를 바라봤다. 슬쩍 올라간 벨져의 입꼬리만 봐도 뭐 이런 걸 가지고 감탄하냐는 지극히 그다운 생각이 보였다.
“좋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애장품이다.”
“그런 걸 마셔도 되는 거야?”
“못 마실 이유라도 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까워서. 하지만 아깝다는 말을 했다간 벨져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며 아까울 게 뭐가 있냐고 타박할 게 뻔했다. 루이스는 샐러드를 뒤적거리다 토마토와 양상추를 입에 넣었다. 벨져는 홀든의 검사 답게 식사에 충실한 편이었고, 루이스는 맛을 따지기보다 허기를 채우는 편이라 둘이 밥을 먹을 때면 루이스가 벨져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거나 이렇게 느긋하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속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벨져는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와인으로 입을 축이는데 벨져가 칠면조의 다리를 잡아 우아한 나이프 솜씨로 살을 발라 루이스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됐어. 내가 애도 아니고.”
“네가 알아서 먹으면 내가 손을 보탤 이유도 없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래. 미안합니다.”
“알면 먹기나 해라.”
“다 맛있어서 뭐부터 먹어야할지 몰라서 그래.”
그냥 그렇다고, 가볍게 한 말이었는데 벨져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딱히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루이스는 벨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분주히 포크를 움직였다. 입 안 가득 칠면조 고기를 씹으며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요리를 벨져가 가르쳐준 대로 채소와 함께 곁들여 숟가락 위에 올렸다. 오늘 딱 세 번 참는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루이스가 입 안의 음식을 넘기고 입을 열었다.
“그러려고 한 말 아니니까 밥 먹자. 응?”
“……”
“내가 잘못했어.”
“…안다니 다행이군. ”
전에 한 번, 밥 먹는 거 가지고 대차게 싸운 뒤 이 주 동안 얼굴 한 번 안 보고 전화 한 통 안 한 후로 건드리지 않기로 한 주제였다. 벨져가 다시 식기를 드는 걸 보고 나서야 루이스도 빵을 뜯었다. 천천히 오래 씹으며 벨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끼 식사 정도는 건너 뛰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두 사람이 먹기엔 많은 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가 않는다.
“벨져.”
부르자마자 고개를 드는 벨져의 잔에 와인을 채우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밥 먹고 갈 거야?”
“…….”
와인병을 내려놓는데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기분이 상한 것도 아니고, 말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루이스는 제가 말을 잘못했나 되짚다가, 다른 의미로 들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네가 원한다면 같이 있어줄 수 있다.”
드디어 식사를 마쳤는지 냅킨으로 입을 닦은 벨져가 물잔을 쥐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벨져는 완전히 의기양양해져선 여유로운 미소까지 흘리고 있다.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웃는 걸 보아 백프로다. 어쩌지. 지금 여기서 집에 가라고 하면 또 한 동안은 안 본다고 토라질 게 뻔했다. 벨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돌려보낼 방법. 제 꾀에 꼬인 꼴이 된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지도, 부인하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벨져.”
“뭐, 아직까지 산타를 믿는 건 아니니 선물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벨져.”
“정 주고 싶으면 다른 쪽으로 줘도 되고.”
한껏 기분이 올라간 벨져의 말은 물이 흘러가듯 빠르고 경쾌했다.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져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있는 날인데, 가족이랑 보내야지.”
“……”
“어제 약속했잖아. 그래서 나도 스케줄을 뺏고.”
대번에 굳는 얼굴을 마주하는 게 싫고, 집에 보내기도 서운하지만 그래도 지켜야하는 게 있는 법이다. 당장 광장에서 일하는 것만 해도 바로 옆에 다이무스 홀든이 있는데 언제까지 모른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 가는 걸 안 좋아하는 건 아는데, 계속 너를 숨기는 나도 괴로워. 너는 다른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사람인데, 내가 독차지 하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단 말이야. 루이스는 요 며칠 내내 다이무스를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간단한 안부 인사에도 제 집에 있는 그의 동생을 떠올리고만다. 바쁜 연말에 일부러 없는 시간을 쪼개 이브 전날 휴가를 낸 것도, 침대로 몰아붙이던 그에게 약속을 받아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하루 쯤은 집에, 가족들에게 얼굴을 비추라고.
“쓸데 없는 걱정을.”
짜증을 내거나, 말을 돌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벨져의 반응이 싱거웠다. 한심하다는 듯 한 손으로 턱을 괸 벨져가 혀를 찼다.
“내가 그것 하나 처리 못할 줄 알았나?”
“다녀왔어? 언제?”
벨져가 눈을 감고 피식 오만한 웃음을 흘렸다. 루이스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순간 넘어갈 뻔 했던 루이스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럼 안 보내도 된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슬그머니 기대가 차올랐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그리고 새해에는 본가에 갈 거다.”
“…카드?”
“형아라면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지. 아, 이글 녀석에겐 용돈도 넣어줬으니 입을 다물 거다.”
“…하, 하하….”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다. 루이스는 새삼 다이무스가 가여워졌다. 누가 알았으랴, 하나 모자랄 것 없는 완벽한 남자가 연민의 대상이 될 줄. 루이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도취된 벨져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진지한 얼굴을 하는지. 이번에야말로 헛소리를 하면 아직까지 쥐고 있는 물컵을 빼앗아 끼얹어줄 다짐을 하는데 벨져가 손을 잡았다.
“내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넌.”
“…응?”
“쫓아낼 생각마라. 내가 정말 갔으면 저녁도 안 먹고 내일도 대충 갈레뜨에 차나 마시며 때웠겠지. 틀린가?”
잠시 눈을 깜박이다, 얼굴에 확 오르는 열에 자유로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벨져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수 없어 시선을 돌리자 그럴 줄 알았단 듯 웃음을 흘린 벨져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을 꽉 잡았다.
“걱정 마라. 내일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어줄테니.”
“자, 잠깐…!”
“잡아먹으려면 살을 잘 찌워야지. 어젠 출근한다고 봐줬지만 오늘은 그런 거 없다.”
“야!”
“시끄럽다. 데이트도 데이트 나름이지! 언제까지 내가…!”
“고마워! 고마운데!”
루이스는 벌개진 얼굴로 소리치다 푹 고개를 숙였다. 침착해야 한다. 루이스. 침착해야 한다! 손등을 덮은 벨져의 손이 데일 듯 뜨겁다. 화끈거리는 뺨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왜 또 이렇게 휘둘리는 걸까. 생각해봐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낮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부루퉁하니 이미 기분이 상한 벨져의 얼굴이 들어온다.
“…고마워.”
“…알면 됐다.”
“정말로.”
“흥. 이제와서.”
벨져는 삐진 듯 툴툴거렸지만 이미 귀가 달아올라있다. 자신도, 이 남자도 솔직하지를 못해서. 입으로는 항상 툭툭 시비를 걸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지만 하는 행동만큼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 있었다. 가령 왁자지껄한 파티 후에 혼자 쓸쓸히 외로워할 연인을 위해 외로워할 틈도 없게 만들어준다던가. 추울까봐 씻는 물을 데우고, 시간을 들여 만든 음식을 끝까지 먹어준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하고 애정어린 행동들.
결국 루이스가 먼저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삐진 척 눈을 흘기던 벨져에게 눈웃음을 치자 마지못해 기분을 푸는 척 잡은 손에 손가락을 얽어온다. 그래. 혼자 있기 싫었고, 파티 후에 진하게 몰려오는 외로움이 싫었다. 그래서 안 해도 되는 일을 자처해 이제나 저제나 시계만 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가라고 가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네가 있기를 바라면서.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잡아 제 뺨 위에 올렸다.
“그래서, 몸으로 때우라고?”
“너 하는 거 봐서.”
엄지로 뺨을 어루만지며 하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루이스는 손을 내려 와인잔을 들었다.
“벨져 홀든 경이 빚을 탕감해주시길.”
“흥.”
코웃음을 치면서도 잔을 들어 챙 하고 건배를 해준다. 비록 이 뒤에 예정된 것이 하나 가득 쌓인 설거지와 욕망에 충실한 연하의 체력 괴물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행복했다.
“아, 벨져.”
“또 뭐냐.”
“침대에 장미꽃 뿌리고 촛불 켜둔 건 아니지?”
“……”
“…하지 말라니깐….”
그거 치우는 건 결국 다 난데. 와인을 쭉 마시며 중얼거리자 방금 전까지 기분이 좋았던 벨져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정말이지….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마라….”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그도 배려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 피차일반이다. 이렇게 말 해놓고 결국 치우는 건 하나도 안 도와줄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져주기로 했다. 어째 매일 져주는 것 같지만.
“알았어. 말 안 할게.”
벨져가 정색을 하고 쳐다본다. 루이스는 잔을 내려놓았다. 역시, 삐진 애인을 풀어주려면 그 방법밖엔 없을 것 같아 제 무덤을 팠다.
“있다가 같이 씻을래?”
“…그래.”
움찔하는 입가가, 반쯤 풀어졌단 뜻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감이 좋은 편이었고, 내일은 하루 종일 침대 밖을 못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아무래도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좋아해.”
“뭐?”
“너 좋다고.”
“…….”
좋으면서 아닌 척 하기는. 루이스는 먼저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다 못먹을 줄 알았는데 열심히 먹었더니 그래도 샐러드와 냄비가 바닥을 드러냈다. 앞치마를 입을까 하다가 괜히 벨져의 이상한 취향을 건드릴지도 모른단 생각에 포기했다. 그래도 앞치마를 두른 벨져는 조금 보고싶을 지도.
벨져가 그릇을 가져오는 척 은근히 뒤에 달라붙었다.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벨져는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이걸 어쩔까, 받아줄까 말까 고민하면서 루이스는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결국 받아주게 되어있다는 점에서 루이스도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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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to you. 00.
생일 챙겨주려다가 운명을 발견햇습니다 빰
다음편은 벨져 생일에...
“형들, 대회 일정 나왔다!”
“응. 지금 보고 있어.”
이글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어나자마자 꼭 붙어앉아 아이패드를 보고 있던 덩어리 중 하나가 대답했다. 하여간 자리도 넓은데 왜 저러고 있담. 이글은 입을 비죽 내밀며 벨져에게 안기다시피 기대있는 루이스의 옆에 앉았다. 루이스를 끌어안고 패드를 만지던 벨져가 화면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네 생일에 결승을 하겠군.”
“그 전에 네 생일에 4강을 하겠지.”
“그거야 당연히 이길 테니까.”
루이스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옆에서 이글이 질색을 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루이스는 이글의 다리를 두드리며 이해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 잠깐도 뺏기기 싫은지 바로 벨져가 목에 감고 있던 팔을 당겼다. 목이 졸리는 대신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올려다보자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대진표를 확인한다. 루이스는 벨져의 아이패드를 꺼버렸다.
“뭐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거 없어?”
“그냥 늬들은 서로를 줘라. 줘. 노예권.”
“니들이라니. 이글.”
“에휴, 난 줄 거 없다! 형들 알아서 해!”
선물 얘기가 나오자마자 냉큼 달아나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이글을 보다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루이스와 벨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 기대도 안 했지만....”
“저 새끼는 평생 저럴 거다.”
“그래서, 너는 뭐 생각해놓은 거 있어?”
“딱히 없다만.”
루이스는 벨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벨져의 눈길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노예권 줄까?”
“미쳤냐.”
“아니면 뽀뽀쿠폰같은 거?”
“......이글이 옮았군.”
“걔가 무슨 병균이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벨져가 혀를 차며 목에 둘렀던 팔을 내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준다고 해도 과연 벨져 홀든의 눈에 찰까 싶지만 그래도 생일이니만큼 뭔가 해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떠올렸다. 같이 산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벨져는 어려웠다. 비싼 고급 크리스탈 잔 같은 녀석이라 무디기 짝이 없는 센스의 루이스에게 벨져 홀든의 생일선물은 난제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축에 속했다.
“글쎄, 물질적인 건 별로.”
“그래.”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는 세상이 비슷할 때나 통하는 얘기다. 벨져가 수실로 옷장에 채워넣는 옷만 해도 그렇다. 루이스가 생각하는 옷값에 0을 몇 개를 더 붙여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돈으로 구할 수도 없는 한정판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방 안에 즐비했다.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숙소 생활을 시작한 몇 주동안은 벨져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을 구분하다 못해 가격부터 생각하던 루이스였다.
“경기 끝나고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회식 하고 바로 연습하겠지.”
“그러게....”
벨져가 시선을 내렸다. 영 좋지 않은 표정에 뭐 문제라도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푹 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글 녀석의 멍청함이 옮았나.”
“.......”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예뻐서, 흰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런 척 해도 엄청 좋아한다니깐. 피식 웃으며 아예 벨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아이패드를 내려놓은 벨져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넌. 뭐 갖고 싶은 거.”
“없는데.”
쯧. 또 혀를 찬다. 루이스는 예상한 반응에 가늘게 웃으며 벨져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사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다이무스의 자리를 대신해 새로 영입한 탱커와 조합을 맞추고 본선 경기를 연습해야 하는데 꼼짝도 하기 싫었다. 벨져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넣자 벨져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지 말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눈을 감아버렸다.
“방금 일어나놓고 또 자냐.”
“안 자.”
“결승 끝나면 휴가니까 어디라도 가던지.”
“둘이?”
“주렁주렁 다 달고 가면 제대로 쉬겠냐.”
난 좋은데. 네가 둘이 가고 싶은 거겠지.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여행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휴가라고 하면 그냥 집에서 늘어지게 쉬는 게 훨씬 좋지만 벨져는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드라이브를 하면서 바람을 쐬야하고, 밥도 그냥 한 끼 때우는 게 아니라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우선은 결승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벨져와 제 생일 사이엔 딱 15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결승은 일요일, 본선은 토요일에 하는 경기 일정 상 8강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벨져의 생일에 4강전을 하는 거야 정해진 수순이었다. 더구나 이번 상대는 유독 홀든A에게 약한 서포터 위주의 신생팀이었고, 사실상 홀든 A는 결승까지 수월하게 가지 않겠는냐는 게 대세적인 여론이었다.
“이대로 올라가면 또 그랑플람이랑 만나겠네.”
“콩라인으로 굳혀줘야지.”
“너만 잘 하면 돼....”
“내가 못한다는 소린가?”
“아.”
루이스는 잘못 속내를 말해버린 것처럼 입을 가렸다. 가슴을 아프지 않게 치는 벨져가 입술을 비죽인다. 삐진 게 귀여워서 이렇게 장난을 치고 마는 걸 알까. 알면 이럴 리가 없지. 키득거리며 미안하다고 말하자 깍지 낀 손을 놓고 내려놓았던 아이패드를 든다. 너 그거 떨어뜨리면 나 오늘 연습 못해. 벨져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 때 다른 약속 잡지 마. 이번에도 파토내면 앞으로 네 얼굴 안본다.”
“그럼 그랑플람으로 옮겨야겠네.”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다. 이러다 진짜 토라질 기세라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목을 뒤로 빼며 한 번 튕기다가 결국은 뺨을 내준다. 늘 관리를 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질였다.
“농담이야.”
루이스는 벨져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엄지로 뺨을 찬찬히 매만졌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벨져의 눈에 힘이 풀린다. 그 모습이 좋아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벨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당연히 입술을 맞추겠거니 싶어 눈을 감았는데도 반응이 없다. 슬며시 눈을 떠볼까 하는데 코를 잡혔다.
“아아아, 미안!”
루이스는 코를 비트는 고통에 벌떡 일어났다. 코를 잡고 눈을 흘기니 벨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흥. 덤빌 구석을 보고 덤벼야지.”
“...너 내가 너보다 형이란 건 아예 안중에도 없지?”
“고작 한 살 가지고.”
“아, 몰라몰라. 넌 생일 선물 취소야.”
벨져를 내버려두고 소파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뭐 그런 게 있냐는 둥 어이 없어하는 벨져를 두고 식탁 의자에 대충 걸어놨던 잠바를 집어들었다. 족히 두 사이즈는 큰 잠바는 원래 다이무스의 것이지만 다이무스가 은퇴하면서 자연스레 루이스의 소유가 됐다. 딱히 탐이 났던 게 아니라, 자기 옷과 헷갈려서 자주 입고 다닌 것 뿐이지만 어쨌거나 다른 건 다 사무실에 돌려놓은 다이무스가 오더의 역할과 함께 루이스에게 준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야!”
“나 먼저 간다!”
물론 벨져는 그런 거에 의미를 붙이는 게 오글거리지도 않냐며 질색을 했지만. 루이스는 벨져의 외침을 무시하고 이글과 토마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충 슬리퍼를 신고 문을 열면 결국 벨져가 몸을 일으킨다. 비척비척 토마스의 손에 이끌려 나온 이글도 춥다면서도 슬리퍼를 꿰찼다.
“아이작씨는?”
“아까 먼저 나가셨어요.”
“으아, 춥다. 으으으.”
“아, 형!”
“오늘은~ 우리 토마스가~ 몇 쓰레기나 당할까요~?”
“이글 형! 형이나 잘, 으악!”
이글은 능글맞게 웃으며 토마스의 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 토마스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고, 애를 놀리던 이글이 결국 벨져에게 등짝을 맞았다. 한 걸을 떨어져 걷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글의 호들갑에 웃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벨져의 생일까지 앞으로 한 달 남짓, 고민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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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짙은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트리비아.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끝내 돌아보지 않는다. 부르지 않았으니까. 부르지 못했으니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손을 뻗었지만 뒤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손이 저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죽음의 구덩이로 끌어당기는 시체들의 썩은내가 진동을 하고, 그들은 저마다 분노와 원망을 내뱉는다. 그리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지극히도 무심한 눈동자들.
동료라고 믿었던 이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는다.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것처럼 가까워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절망은 더욱 깊어지고, 마침내 죽음의 늪에 갇히는 순간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말한다. 이것이 아무도 믿지 못한 자의 말로라고.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브랜다의 목소리.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더니,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됐네? 가여운 루이스. 이제 넌 혼자야. 영원히.’
“헉...! 윽.... 아, 하아....”
얼음 속에 갇힌 듯한 오한에 번쩍 눈을 뜨자 쨍한 두통에 질끈 눈을 감았다.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세차게 뛴다.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걸 몽땅 게울 것 같은 토기와 타는 듯한 갈증이 동시에 찾아와 루이스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찬찬히 숨을 고르면 조금씩 두통이 가시고 날뛰던 심박수와 귀를 울리는 심장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서야 낯선 방에 있다는 걸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낯선 방, 그것도 꽤나 넓고 좋은 방인데다 침대까지 푹신하다. 며칠간 떠돌며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본 적도 없는데, 이런 방은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사치였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누굴 만났던 것도 같은데, 너무 취했는지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기억이 흐릿했다.
이 정도 방이면 모텔이나 여인숙은 절대 아닌데, 비용 청구를 연합으로 했다간 호되게 야단을 맞을 지도 모른다. 엄습하는 현실의 걱정에 한숨을 내쉬자 쨍한 두통이 다시 찾아와 눈을 감고 머리를 감쌌다. 숙취로 인한 두통이 가라앉길 기다리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일어났군.”
“...벨, 큼, 벨져 홀든?”
놀란 것도 잠시, 턱하고 목이 막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당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봤다. 경계해야 하는 상대다. 몸 상태가 완전히 맛이 가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흥. 꼴을 보아하니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군.”
“잠깐, 그럼 어제...!”
“그래. 창관에 넘어가려는 널 구해줬지.”
“뭐?!”
“꽤 비싸게 치렀다만.”
“아니아니, 잠깐. 잠깐만.”
루이스는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발언에 어제의 기억을 되짚었다. 전혀, 전혀 그런 기억은 없다. 바에서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겨 거리로 내쫓겼다거나 술집에서 흠씬 두들겨 맞을 뻔한 걸 도와줬을지언정 창관이라니. 우선 벨져 홀든이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것부터가 수상하다. 루이스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마주했다.
“허튼 소리 마. 안 속으니까.”
“그래? 유감이군.”
“목적이 뭐야.”
여유롭게 방의 창문을 연 벨져는 턱을 치켜들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목적? 글쎄, 뭐일 것 같나.”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설명하기 힘든데.”
“차여서 폐인이 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축축 쳐지는 몸상태에, 최악에 가까운 악몽, 거기에 일어나자마자 벨져 홀든까지 더해지니 맞받아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달리 멀쩡했고,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유로웠다.
“그래서 그 꼴이 되도록,”
“그 얘기는 안 했으면 하는데.”
내내 여유롭던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매서웠지만 루이스는 피하지 않았다. 이젠 그 때의 나약한 한낱 결정사 따위가 아니니까. 날카로운 적막을 깬 건 벨져의 웃음소리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무슨 의미지?”
벨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과거의 일일랑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을 대하는 것같은 태도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벨져 홀든은 분명 살기등등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루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이전에, 왜 여기서 벨져 홀든과 맞닥뜨리게 됐는가. 하필이면 지금.
“저런. 너무 어려웠나 보군. 감안하겠다.”
“홀든.”
“그래서, 새로운 공간은 어떻게 됐지?”
“내가 그걸 말해야해? 있으면 듣고 싶은데.”
“지금 자기 처지를 모르는 모양인데.”
벨져가 가소롭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침대로 다가왔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긴 하지만 절대 함부로 검을 휘두를 사람은 아니다. 이 방, 꽤 좋아보이니 검을 휘두르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완력으론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루이스는 벨져와 눈을 맞춘 채 주먹을 그러쥐며 손안에 얼음을 쥐었다. 차가운 얼음이 흉기가 될 준비를 마친 것과 동시에 벨져의 발이 멈췄다.
“지금 넌 내 인질이다.”
“인질? 농담이라면 완전 실패인데.”
“농담으로 들리나?”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목소리와 차가운 얼굴. 벨져 홀든은 쉽게 농을 입에 담을 사람도 아니었다. 왜 이런 곳에서 마주쳤는지, 왜 이곳까지 옮겨줬는지는 모르나 지금 그는 진심이었다.
“이 근방에서 연합을 적으로 돌리면 힘들 텐데.”
“언제는 적이 아닌 적 있었나?”
“...진짜 목적이 뭐야. 네 말대로 멍청해서 못 알아듣겠거든.”
“글쎄. 영웅씩이나 되는 녀석을 부리고 다니는 기분은 어떨까 해서 말이지.”
진지한가 했더니 다시 웃음을 머금는다. 우위를 점령한 것처럼 구는 그는 즐거워보였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글보다 더 대하기 힘들다. 루이스는 작게 숨을 토했다.
“이런 신경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동감이다.”
너무 쉬운 대답에 김이 빠졌다. 머리를 잡고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얼음을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뺐다. 얼음을 굳히느라 언 손이 화끈거리고, 손이 젖어들었다.
“트리비아가 떠난 공간에 대해서라면 미리 말해두지만 전혀 몰라. 누가 머릿속을 뒤질지도 모르니까 아예 보지 않았어. 유감이야.”
“그 쪽엔 관심 없다.”
먼저 선을 그었음에도 벨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에 불과한 신경전에 슬슬 짜증이 차올라 그를 노려보자 벨져가 팔짱을 꼈다. 먼저 물어봐놓고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러고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루이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숙취와 피로로 몸상태가 개판이었다.
“그러는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홀든?”
“말해줄 의무도 없다.”
“그럼 이만 가도 되지? 길에서 뻗지 않게 해준 건 고마워. 비용은 연합으로 청구해.”
“그만. 어딜 가려는 거지?”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루이스를 붙잡았다. 쉽게 보내주리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 도망가는 거랑, 너를 상대하는 거. 어느 게 더 효율적일까. 난 전자라고 생각하는데.”
“저런. 전자의 성공률이 높지 않은 것 같다만.”
“하아....”
이쯤 되면 답답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스는 세수도 못한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막 일어나서 머리도 엉망일 텐데 저 답답하고 성가신 도련님은 이 아침에도 기품이 차고 넘쳐흐르신다. 루이스는 이게 나쁜 꿈이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그대로였고, 물러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도망친다 해도 사방이 막힌 곳에서는 무리다.
“뭐, 일단은 일종의 변덕이라고 해두지. 안타리우스를 쫓고 있다. 협조하도록.”
“내가 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악연이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지. 네가 남은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벨져의 말에 루이스의 표정이 얼었다.
“사랑놀음에 세상 돌아가는 상황까지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뭐, 그런 짐은 필요 없기도 하고.”
“그럼,”
“안타리우스의 의식이 성공했다. 거기에 웬 헌터가 어둠 속에 숨은 일을 끄집어내서 여기저기 소란이지.”
“.......”
연합에 있지 않다고 정보조차 모르는 건 아니다. 매일 앤지와는 연락을 주고 받았고, 연합은 가장 큰 사이퍼 조직답게 조직원과 지부가 각지에 퍼져있다. 트리비아와 마지막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시국은 위기를 넘어서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 이번에는 능력자 세계를 넘어서 전 세계에 전쟁의 불길이 번질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엔 연합과 회사가 손을 잡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성이 높았다.
전쟁 후에 남는 건 승자도, 패자도 아닌 추악한 비극 뿐이다. 전쟁의 훈장으로 주어진 영웅이란 이름도 결국은 허상에 불과하니까. 루이스는 주먹을 쥐었다.
“내 목적은.”
청명한 목소리가 상념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맑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
“안타리우스의 힘의 근원, 인식의 문을 파괴하는 거다.”
“......그래서?”
“동행해라.”
“왜?”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악연이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라고. 혹시 모르지. 이것도 운명일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했을 법한 말이었지만, 벨져의 그 오만한 미소엔 숨길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잠시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시작된 그 날이 눈꺼풀 아래로 스쳐지나가고, 그 때와 다르지 않은,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여유롭고 당당한 남자가 눈앞에 서있다. 또다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고, 앞에 펼쳐진 게 가시밭길이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끝내는 제 앞에 돌아올.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벨져의 눈이 커졌다. 그도 예상치 못한 것 같은 반응이었지만 루이스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조하겠어.”
벨져가 눈을 깜빡였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벨져가 진심이었듯 루이스도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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