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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ㅂ밖+모바일이라 엔터 대신 줄간격~
2014년 1월에 냈던 다이루이 단편집 수록 원고
Uno.
오후 10시 28분. 모두가 퇴근하고 빈 사무실은 전기절약 캠페인에 따라 어둑했다. 한 군데만 전등이 켜져 있었는데, 그 백열등 아래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남자가 있었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진 지 오래였지만 업무를 마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다이무스 홀든에게 야근이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바이어에게 보낼 서류를 처리하던 다이무스는 자료 파일을 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상품개발팀 드렉슬러의 손을 거친 자료는 말 그대로 중구난방에 엉망진창이었다. 개발팀에서 뺄 수 없는 꼭 필요한 인재이고,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신제품들은 분명 전자기기의 혁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천재이긴 하지만, 그의 서류는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제발 제대로 된 개발서를 올리라고 타라가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이 없었고, 천성이 괴팍한 아웃사이더라 주변에서 대신 서류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요령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천재 개발자의 서류는 돌고 돌아 다이무스의 손에 돌아오곤 했다. 드렉슬러의 서류는 다이무스 정도나 되는 끈기와 책임감을 가지 않고서야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그나마 요새 글씨는 알아보게 써주더니, 타라가 회장님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갔다고 금세 이 모양이다. 암호해독가가 필요할 정도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서류를 앞에 두고 다이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올려 회색 천장과 백열등을 보며 눈을 감다가 목에서 뿌득, 하고 소리가 났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라도 마실까 싶어 일어나는데 탕비실에 원두도 그 흔한 믹스커피도 보이질 않았다.
피곤해서인지 단 게 먹고 싶었다. 비척비척 자리로 가 제일 아래 서랍의 잠금을 여는데 늘 챙겨두던 초콜릿도 보이질 않았다. 포기하고 빨리 마치려고 노트북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데 지렁이가 기어가는 글씨에 도무지 일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문서작업을 그 좋아하는 노트북이나 스마트 폰으로 할 것이지. 이런 중요한 서류에 드렉슬러는 꼭 손으로 써서 스캔을 해서 보냈다. 타이핑 하기도 귀찮다는 걸까.
매일 아침 마시는 카페모카가 마시고 싶었다. 진한 시럽과 거품이 풍부한 스팀밀크, 거기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고 휘핑크림을 잔뜩 얹어 자바칩을 뿌리고 모카 드리즐까지 뿌린 카페모카. 회사 아래 있는 대형 체인점 말고,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에서.
높은 사무실 빌딩만 죽 늘어선 거리엔 당연히 큰 대형 체인 카페들도 많았지만 다이무스는 그 카페가 좋았다. 다른 곳과 다르게 직접 커피를 볶아서 향도 좋고,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이나 분위기, 뉴에이지 풍의 음악까지. 공간이 다른 카페에 비해 협소하다는 것만 빼면 뭐 하나 빠지지 않았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는 카페를 떠올린 다이무스는 벗어둔 재킷을 입고 멋스러운 버버리 코트를 걸쳤다. 목도리에 장갑까지 끼고 잠시 노트북을 바라보던 그는 전원을 끄고 가방 안에 정리해 넣었다.
이대로 카페에 들렀다가 퇴근할 생각이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제 자리에 켜진 전등을 끈 다이무스는 일의 능률을 위해서라며 퇴근 카드를 찍고 회사를 나섰다.
Due.
오후 10시 12분. 퇴근하는 회사원들마저 거진 다 빠져나간 카페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 높은 회사 사무실 건물뿐이라 이쯤 되면 손님이 없는 게 당연했다. 더러 야근하는 회사원들이 지친 얼굴로 비척거리며 들어와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걸 빼면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월요일부터 명절이니 그 전 주 금요일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찍 가버리는 게 당연했다. 혼자 가게를 보던 루이스는 잠깐 창밖을 내다보며 불이 꺼진 사무실 건물들을 바라보다 슬슬 매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꺼내다가 어차피 오늘 문 닫으면 한동안 안 나오겠지 싶어서 락스칠도 하려고 전용세재를 꺼냈다.
오후 아홉시에 출근해 아침 여덟시까지, 카페를 지키는 루이스 덕에 조그만 카페는 24시간 내내 문을 열고 밤샘 작업을 하거나 야근하는 회사원들을 맞았다. 더러는 이런 조그만 카페에서 뭐 하러 24시간 영업을 하냐고 했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니까.
그래도 손님이 적은 건 사실이라 새벽 시간에는 다른 알바도 없이 루이스 혼자 카페를 봤다. 그 날 쓸 원두를 볶고, 부족한 건 없는지 확인하고 모자란 게 있으면 주문하고 청소하고 나면 새벽 두시 쯤.
카페를 한 번 죽 둘러보고 할 일이 없으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가끔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선곡 리스트를 수정하고 그래도 할 일이 없으면 노트북을 켜놓고 웹서핑을 하거나 드라마와 예능 프로를 봤다.
그러다 졸리면 알람을 새벽 5시 반에 맞춰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누가 보면 정말 늘어지게 가게 본다고 해도 루이스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여섯시부터 출근하는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쿠키 반죽을 만든다. 분명 멀쩡한 반죽인데, 왜 오븐에 넣기만 하면 이상해지는 걸까. 루이스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제가 만들면 이상해진다는 건 알기에 그냥 쿠키가루에 우유를 부어 치대서 냉장고에 넣어서 반죽을 만들어두는 것까지만 했다.
그러다 여덟시 쯤 오전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집에 가서 퍼질러 자고, 가끔 누가 부르면 나가서 놀다 출근하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에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막상 본인은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바닥을 쓸고 닦고 왁스칠까지 했더니 반짝거리는 게 흐뭇한 나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루이스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금요일이라 아마 다들 퇴근했을 테고, 혹시 남은 사람이 있어도 이 시간이면 집으로 가지 카페에 들르진 않을 거란 생각에 카운터 안쪽의 간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Tre.
"큼, 큼."
다이무스는 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카운터 너머엔 아직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건만 앳된 청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빨리 커피 한 잔을 들고 집에 가고픈 다이무스는 평소보다 인내심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잠에 깊이 빠졌는지 청년은 다이무스의 헛기침 소리를 듣지 못하고 위태롭게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크게 고개가 꺾이더니 퍼뜩 눈이 마주쳤다.
“어, 어어? 아, 죄송합니다.”
“...카페 모카. 휘핑 올리고 자바칩 추가에 모카드리즐.”
다이무스가 내미는 쿠폰과 카드를 받아들고 영수증과 카드, 전동벨을 함께 건넨 청년은 바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았다. 간 원두를 템퍼로 눌러 머신에 놓고 버튼을 누른 그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가져다 스테인리스 컵에 따르고 스팀기를 켰다.
졸린지 눈을 꿈벅이면서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부드럽게 거품을 내는 게 제법 오래 일한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아침에 들러 커피를 사가거나, 혹은 누가 사오는 걸 마시는 타입이었기에 이미 쿠폰을 몇 개씩 썼으면서도 이 시간에 여길 온 적은 없었다.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에 홀더를 끼우고 생초콜릿을 두 번 펌핑한 그는 방금 전에 데운 우유를 붓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휘핑기를 두어 번 흔들더니 우유 거품 위에 휘핑크림이 멋지게 또아리를 틀었다.
비닐장갑을 끼고 자바칩을 우르르 올리고 모카드리즐을 휘휘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게 아침에 보는 아르바이트생보다 훨씬 능숙했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가져온 그는 무심코 덮으려다 다이무스에게 물었다.
“뚜껑 씌워드릴까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아니, 됐습니다.”
컵 위에 담뿍 쌓인 모양새가 흡족해 눌러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 빨대를 꽂고 한모금 마시면 뜨끈하고 풍부한 단 맛에 피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돌아갈 생각으로 발을 옮기는데 바닥을 디뎌야 할 발이 미끄러운 바닥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몸이 기우뚱했다. 한 손에 뜨거운 음료를, 다른 한 손으론 지갑을 쥔 채라 그대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읏!”
“어어...! 풉!”
그리고 아파할 틈도 없이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다이무스는 창피함과 함께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빨리 일어나려는데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다시 허우적거리고 만 다이무스는 일 년치 구길 체면을 다 구긴 것 같은 쪽팔림에 차마 화 낼 생각도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려는 찰나 좀 전까지 웃던 청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다가왔다. 조금 전과 달리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친 덴 없으세요?”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컵이 흔들리는 바람에 커피가 흐르긴 했지만 위에 잔뜩 얹은 크림 덕에 아예 쏟아지진 않았다. 다행이 위쪽은 차가운 크림 덕에 그리 뜨겁지 않았지만 청년은 그걸 보고 주방에 들어가 걸려있던 행주를 집었다. 다이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려는 찰나 청년은 찬장을 열어 새 것으로 보이는 흰 행주에 물을 적시고 얼음을 꺼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몸을 일으킨 다이무스는 옆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고 손을 가볍게 털었다. 손에 묻은 휘핑크림에 미간을 좁히고 아직도 아픈 꼬리뼈를 매만졌다. 쪽팔림이 가시고 짜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떻게 컴플레인을 걸까 생각하는 사이 행주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온 청년은 대뜸 손을 잡더니 물수건으로 다이무스의 손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나대지마라.”
“아, 죄송합니다. 많이 안 다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바닥에 왁스칠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자기 때문에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놓고, 정신을 차렸는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청년을 보며 다이무스는 차가운 행주로 손을 마저 닦았다. 한 겨울에 얼음을 대고 있는 것도 우습고, 화상을 입은 것도 아니라 대충 손만 닦고 있으려니 청년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영수증 쪼가리에 빠르게 뭔가를 적어 건넸다.
“저기, 이거 제 전화번혼데 옷 세탁하시고 연락해주세요.”
그 말에 고개를 숙여 코트를 살피니 휘핑크림과 드리즐이며 커피 얼룩이 남아있어 다이무스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왁스칠을 해놓고 주의하라는 표지 하나 없이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졸던 탓에 생긴 일이 아닌가.
안 그래도 지친 탓에 빨리 가서 쉬고 싶던 다이무스였다. 평소 같았음 그저 이런 카페의 야간 알바를 측은히 여기고 됐다 했을 테지만 아까 넘어지는 걸 보고 웃은 것 때문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잠깐 앉아계시면 다시 해드릴게요.”
그나마 눈치는 있는지 테이블의 의자를 빼주고 급히 안쪽으로 들어간 청년은 톨 사이즈 컵에 다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워낙에도 듬뿍 얹어주던 휘핑과 자바칩이지만, 조금 전보다 더 잔뜩 얹어진 모습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번엔 직접 홀더를 끼우고 테이블까지 가져오는 청년의 발밑을 보던 다이무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명찰에 적힌 청년의 이름을 살폈다. Louis. 덜도 더도 없이 딱 다섯 글자만 쓰인 금빛 명찰에 혹시나 카페에서 쓰는 예명인가 싶어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뭔가.”
“아, 루이스입니다. 문자나 전화 주세요.”
“그러지.”
다이무스는 핸드폰에 전화번호와 이름을 저장하고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뒤 컵을 손에 들었다. 아예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손에 든 카페모카를 홀짝거렸다. 뜨끈하게 퍼지는 단 맛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스팀 밀크의 부드러움이며 진한 커피 향이 다른 카페들보다 나았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몰라도 아침 출근 시간대에 바쁜 나머지 급하게 내린 것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카페의 커피보다 맛있는, 그것도 완벽히 제 취향의 커피를 다른 곳에서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집에 비싼 커피머신을 들여다 놓기도 했지만 뭐가 문제인지 제가 내리는 커피는 맛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골목 앞에 세워둔 벤츠에 오르기 전에 아직 쌓여있는 눈에 신발을 좀 닦고 차에 올랐다. 목을 타고 넘어가 뱃속을 뜨끈하게 데우는 느낌에 만족스러운 나머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모차르트를 틀고, 난방을 튼 차에서 시트에 몸을 기대니 따스히 퍼지는 충족감이 기분 좋았다.
더 늘어지면 이대로 졸 것 같아 창문을 약간 연 뒤 커피를 홀더에 놓고 핸들을 잡았다. 밤공기는 차고, 방금 전까지 커피를 손에 들고 있던 손은 따뜻했다.
Quattro.
루이스는 손님을 보내고 비척비척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아까 빨아서 걸어둔 걸레를 들고 와 바닥에 엎질러진 커피를 닦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왁스칠 한 데다 뜨거운 물 부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과 왜 하필 이럴 때 졸아버려서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대충 크림과 커피를 다 닦고 마른 걸레를 가져다 한 번 더 닦은 뒤, 주의 표지판을 가져다 세웠다.
“하아....”
이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 갖다 놓는 게 뭐 그리 귀찮다고. 잠시 쉰다는 게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존 데다 제 실수로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버리다니 제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다.
마저 가게 안을 정리하고 그라인더를 살폈다. 얼마 남지 않은 원두를 마저 갈아 에스프레소를 내린 루이스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느긋하게 마시며 로스팅기에 예열버튼을 누르고 미리 따로 포장해둔 원두를 꺼냈다.
매일같이 그 날 쓸 원두를 로스팅하는 건 물론 귀찮은 일이지만, 루이스는 그래야 커피 맛이 제대로 난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일 좋은 건 핸드드립이지만 일일이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뭐. 이렇게 좁은 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손님이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는 것은 다 이런 수고로움에서 온다는 게 루이스의 신념이었다.
아무도 맛없는 커피를 들고 가게를 나가게 하지 않겠다는 그 다짐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젊은 사장 루이스가 처음 가게를 열면서 마음먹고 6년째 지켜오는 한 가지였다. 이젠 제법 단골도 생기고 입소문도 퍼져서 오전 오후 저녁 파트를 나눠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출도 안정되고, 모아둔 걸로 확장을 해도 될 정도였지만 루이스는 딱 이정도가 좋았다.
모든 자리 구석구석에 제 눈이 닿고, 자기가 하나하나 손을 볼 수 있는 작은 카페. 물론 요새 들어선 돈이 생기니 욕심이 나서 빈 벽에 책장도 놓고 책이며 이것저것 인테리어 소품을 들여놓고 싶기도 했다.
루이스는 걸레를 빨아 널어두고 예열이 완료된 로스팅기에 원두를 넣었다. 도로록 도로록 커피콩이 볶아지며 내는 고소한 향이 이윽고 카페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루이스는 허리에 맨 검은 앞치마의 매듭을 다시 여몄다.
날이 바뀌기도 전에 사고를 한 번 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어 졸음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황금연휴의 시작이라곤 하지만 밤샘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휴일을 반납하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루이스의 기다림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뭘 할까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는 노트북을 켜고 테이블에 앉았다. 인테리어 소품이라도 바꿔볼까 쇼핑몰에 들어간 루이스의 눈이 메인에 뜬 남성브랜드 런칭 이벤트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떡하니 걸린 디자인이 조금 전 실례를 저지르고 만 손님의 코트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흘긋 보고 로그인을 하려는데 그 아래 뜬 런칭 기념 세일 가격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헉소리를 냈다. 아니 물론 대기업들 본사가 주르륵 늘어선 곳이긴 하지만, 임원진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명품에 월급을 붓나? 아니면 집이 갑부라도 되는 건가?
떨리는 손으로 클릭해서 죽 스크롤바를 내렸다. 주머니의 장식단추며, 소매의 버클, 안감과 허리띠까지 보고 나니 그냥 비슷한 코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드라이 세탁이었고, 다시 봐도 충격적인 가격에 루이스는 마른 세수를 하며 과연 세탁비로 얼마가 깨질까 고민했다. 모카 드리즐에 휘핑크림, 거기에 뜨거운 라떼까지 하면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새해를 맞아 데스크탑을 장만하려던 계획은 접어야 할 성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핸드폰 기기 할부도 안 끝났는데. 루이스는 암담한 숫자계산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비싼 옷에 커피를 쏟은 데에 별 말도 안 한데다, 톨사이즈에 휘핑크림을 잔뜩 얹자 슬쩍 미간의 주름이 가시던 걸 떠올린 루이스는 그가 아예 옷값을 물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는데다 무슨 일만 생기면 자다가도 전화를 받고 불려나오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는 루이스였다. 주로 그런 상황에 루이스가 하는 건 진상 고객 처리인데, 사실 얼굴만 봐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싸늘해 보이긴 하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한숨을 쉬다가 문득 그가 제게 반말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분위기에 압도되는 바람에 반말을 하는 줄도 몰랐다. 당황스럽고 죄송한 나머지 눈치도 못 챈 거겠지.
게다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비싼 코트에, 그런 인상이며 태도를 봐선 엘리트 회사원이겠지 싶었다. 분명 일처리도 칼같이 해서 고속승진을 해왔을 거다. 그럼 돈도 많이 벌 텐데 이 정도 쯤은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던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잘못한 건 사실이니 옷값을 청구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멍청한 나, 바보같은 자식.
Sei.
컵을 들고 차에서 내린 다이무스는 바로 잠금 버튼을 누르고 지하 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 층을 눌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다이무스는 빈 컵과 차 키를 식탁 위에 놓고 넥타이를 풀었다. 옷을 벗다가 코트에 진 얼룩에 살짝 한숨을 쉬었다.
뭐, 세탁소에 맡기면 알아서 처리해주겠거니 했다. 어머니께서 계절마다 옷장을 채워주시기에 그 코트가 얼마나 하는지는 커녕 제 손으로 옷을 사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다이무스로선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일단은 마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집까지 일을 가져오지 않으려 했건만, 연말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의 서류를 떠올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었다. 차라리 샤워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었던 그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볍게 샤워를 하려 물을 틀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자니 아까 그 아르바이트 청년이 떠올랐다. 남자치곤 선이 가는 얼굴에 수더분하니 척 봐도 참한 학생같아 보였더랬다.
아까야 피곤하고 만사가 짜증나는 상태였던 데다 허우적거리며 넘어진 꼴을 보여서 그렇지, 정말로 세탁비를 청구할 심산은 아니었다. 애가 실수를 한 것 같지고 진지하게 화내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데다, 그 처음 잠깐 웃은 것만 빼면 아주 죄송해서 울상을 짓는 게 훤히 보인지라 더 뭐라 하기도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의 안목이니 고작 카페 알바 봉급 가지곤 세탁비만 해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이 제법 귀엽기도 했다. 제 동생이었다면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실컷 웃은 뒤 미안해하기는커녕 실컷 두고두고 놀려먹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르바이트라도 한다는 가정 하에.
“형! 치킨 사 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글이 문 너머로 외쳤다. 집에 왔을 땐 사람이 왔는 지 개가 왔는 지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이 꼭 이럴 때만 찾는다. 아주 지가 상전이지, 상전이야. 다이무스는 못 들은 척 무시하기로 하고 샴푸를 펌핑했다. 그것도 감정을 담아 꾹, 꾹.
나가면 또 치킨 시켜달라며 찡찡 생떼를 쓸 게 분명했다. 나이는 스물넷이나 먹어가지고, 아직도 하는 행동은 열일곱 질풍노도의 시기다. 다이무스가 회사에 취직하면서 출퇴근 시간이 왕복 세 시간이 넘자 아버지는 독립을 허락하셨다.
대학을 다니던 이글은 제대로 출석도 안 하고 늘 날을 넘겨서 돌아오던 주제에 학교랑 집이 가까워지면 나아질 거라며 냉큼 따라 들어와 방 하나를 차지했다. 막을 새도 없었다. 다이무스 생의 첫 독립의 자유는 그렇게 동생의 뒤치다꺼리가 됐다.
이글은 여전히 출석을 하지 않았고, 술에 취해 날이 지나 기어들어왔으며,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다음 학기에도 F를 받으면 쫓아내겠다는 말에 이글은 휴학계를 냈다. 정말이지, 그래놓고 빨래며 청소, 요리 하다못해 설거지 한 번도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헹궜다. 짜증으로 잠이 깨긴 했지만 그래도 찬물을 틀었다. 오싹하니 개운하게 드는 한기에 몸을 떨고 걸어둔 가운을 걸쳤다.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보며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젖은 머리를 털며 화장실을 나섰다. 샤워 한 번에 피로가 한결 가시는 기분이다.
머리를 털며 새 옷을 꺼내 침대 위에 던져놓고 젖은 머리를 마저 말렸다. 미리 꺼내둔 옷을 챙겨 입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물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끄러운 동생을 피해 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일 다시 출근하지 않기 위해,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연휴에는 좀 쉴 수 있게 일을 빨리 마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검은 뿔테 안경을 꺼내 쓰고 노트북의 전원을 넣었다. 긴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망했다. 다이무스는 떠오는 아침 해와 밝아오는 제 방을 보고 절망했다. 중간에 이글이 치킨을 사달라며 문을 두드리다 못해 부술 지경이 되는 바람에 한 마디 하려고 문을 열었던 게 화근이었다.
언제 코트 주머니에서 흐른 건지, 영수증에 적힌 전화번호를 가지고 이글이 누구한테 번호를 받은 거냐며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다이무스는 일을 잠시 놓아두고 차분히 이글에게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글은 도통 들어먹지를 않아서, ‘형은 인기 많아서 좋겠네!’라는 식으로 자꾸 시비를 걸며 당치도 않는 질문을 해댔다. 쉴 새 없이 나불거리던 그 입은 결국 다이무스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치킨을 시켜주고 나서야 닫혔다. 사실 그보단 치킨을 먹느라 바빴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지만.
치킨만 시켜주고 들어가서 마저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만 고소한 튀김 냄새에 끌려 같이 치킨을 먹었다. 이글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두 병을 꺼내왔고, 다이무스는 먹은 걸 정리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어젯밤에 한 거라곤 드렉슬러의 서류를 다시 만든 것 뿐이다. 암담했다. 이래서야 퇴근하고 집에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장 일요일까지 타라에게 직접 전해줘야 하는 일인데, 시차를 생각하면 이제 24시간도 안 남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세수부터 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는 대충 왁스로 넘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었던 코트를 걸치려던 다이무스는 코트에 얼룩이 졌다는 걸 깨닫고 다른 코트를 꺼내 입었다. 목도리를 대충 목에 감고, 식탁 위 테이크아웃 컵과 함께 놓아둔 차키를 가지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에 있으면 이글이 또 저랑 놀아 달라 보챌 테고, 밥도 해 먹여야 하니 그냥 회사에서 일 하는 편이 능률적으로, 심적으로 나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시계를 보니 7시 48분이다. 지금 출발하면 딱 8시 반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회사로 향했다.
Sette.
[ 정말 죄송해요...콜록, 콜록...! ]
"아냐, 괜찮아. 푹 쉬어."
[ 으으, 어제 애들이랑 놀아주다 그만... 콜록, 내일은 나을 거예요. ]
“난 괜찮으니까, 나을 때까지 쉬어. 어차피 오늘까지 하고 내일은 나도 가게 닫을 거니까. 목 많이 쓰지 말고, 몸 따뜻하게 하고 있어. 끊는다.”
안타까울 정도로 상한 토마스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착하고 싹싹한 토마스는 같이 일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딱히 같이 일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애였다.
어차피 아침에 나오는 나이오비는 주말에 안 나오고, 연휴가 코앞이니 조금 일찍 닫는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 사장은 루이스 자신이었으니 당장 문 닫고 집에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이다.
간밤을 돈걱정으로 꼬박 샌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계를 보니 8시 반이 넘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안 찾아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찍 접어도 될 것 같다가도, 어제 한 짓을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싶었다. 어차피 전기세고 뭐고 하면 그게 그거일 것 같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른 걸레를 가져다 바닥을 닦았다. 혹시 몰라서 신발도 닦았다. 혹시 그래도 미끄러울까봐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바닥을 뽀득뽀득 닦아보는데 문의 풍경이 또로록 울렸다.
“엑...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렸더니 어제 그 손님이다. 루이스는 당혹스러웠다. 어제 마지막 손님이 오늘 아침 첫 손님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왜 하필 이러고 있을 때 들이닥친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님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 같은 걸로 드릴까요?”
애써 웃으며 말을 걸자 매서운 인상의 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오늘은 한층 더 무섭다. 어제 자길 쏘아보던 것보다 더하다. 루이스는 냉큼 안쪽으로 가려다 아직 자기가 걸레를 들고 있단 걸 깨닫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걸레를 빨아서 널어두고, 항균 비누로 꼼꼼히 손을 닦고 나와 달디 단 카페모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같이 내놓으면 좋을 텐데, 쿠키는 오늘 토마스도 안 나오게 된 바람에 새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베이글과 식빵, 치즈와 햄이 냉장고에 들어있어 루이스는 자기 아침을 챙길 겸 크로크무슈를 만들 준비를 했다. 전기 팬에 햄과 빵을 올려두고, 계란을 달달달 풀어 파슬리 가루와 소금을 살짝 쳤다. 샌드위치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듣곤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없었다. 나쁘지 않다는 거지 맛있다는 건 아니니까.
앉아서 노트북 충전기를 연결한 손님을 흘긋 본 루이스는 미리 데워둔 머그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휘핑크림과 자바칩, 드리즐을 뿌리는 것으로 카페모카를 완성했다. 소반에 티슈를 깔고, 시나몬칩을 두 개 얹어서 자리로 가져가면서 루이스는 살짝 긴장했다.
“주문하신 카페모카 나왔습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의 눈은 노트북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바쁜가보다, 하고 돌아서서 안쪽 주방에 들어온 루이스는 팬의 전원을 켰다. 햄이 구워지는 냄새며 계란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무심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지금 카페에 음악을 안 틀어놨다는 걸 깨닫고 갑자기 확 부끄러워진 나머지 뒤집개를 들고 한숨을 쉬다가 크로크무슈를 태울 뻔 했다. 다행이 제 때 뒤집어 노릇노릇 먹음직한 크로크무슈 두 개를 대각선으로 잘랐다.
접시를 꺼내 반으로 자른 크로크무슈 두 개를 올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티슈로 감싸 그 옆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원래 메뉴가 아니라 별 다른 장식은 하지 않으려다 그래도 구색이나 갖추자 싶어 방울토마토 두 개와 양상추를 뜯어 한쪽에 놓았다.
더 고민하다간 크로크무슈가 식을까봐 여기까지 하고 한 손으로 접시 아래를 받쳐 손님의 자리로 갔다. 여전히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앞에서 루이스는 영업용 스마일을 띠우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아직 아침 안 드셨으면 드실래요?”
그제야 그의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그 회색 눈에 루이스가 잠시 움찔한 사이 살짝 한숨을 내쉰 남자가 안경을 벗고 노트북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루이스는 냉큼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와 함께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왠지 모를 열기에 뺨이 다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카페 안 난방이 너무 센가보다. 아니면 잠을 못 자서 내가 이상해졌거나.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제 몫의 크로크무슈를 집었다.
손이 기름에 묻는 게 뭐 대수이랴. 한쪽 귀퉁이를 베어물고 우물거리는데 괜찮았다. 그래, 이 정도면 뭐라 한 소리 듣지는 않겠지. 소금을 설탕으로 착각하지도 않았고 하나로 뭉치지 않게 계란물도 잘 풀었다.
실수한 거 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카운터 안쪽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남자 쪽을 바라보는데, 간단한 요깃거리 하나에도 나이프와 포크를 쓰는 게 꼭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는 폼이었다. 그래 저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눈이 그리로 향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마냥 불편했다. 답답한 나머지 빈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루이스는 손에 든 걸 그냥 입 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살짝 치켜뜬 무심한 회색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시려다가, 속이 답답해 그냥 찬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저쪽을 모른다. 마냥 기다리며 언제 세탁비를 청구할지 불안에 떠는 것 보다 연락을 할 수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게 걸렸던 거 아닐까!
루이스는 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바람에 무릎을 서랍에 찧어 악소리도 못 내고 몸을 수그린 채 무릎을 잡고 몸부림치다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 남자가 서있었다.
쪽팔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한심하지만 차마 내색은 안하려는 그 표정에 루이스는 우선 허리를 폈다. 그러자 남자는 접시를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피식 웃었다. 순간 부드러워진 눈매며 미미한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 루이스는 잠시 숨을 쉬는 걸 잊었다.
“저, 저기요! 이름이 뭐예요?”
그리곤 막힌 날숨을 내쉬는 동시에 말을 던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정신없이, 찰나의 정적에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다이무스. 다이무스 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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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The movie.
현대물
언제 또 이을지 모름.
시놉시스, 대본. 벨져는 파일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낮게 신음했다. 오디션도 보고, 수많은 포트폴리오를 봤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져는 박스 채로 쓰레기나 다름없는 포트폴리오 박스를 전부 내다버리고 싶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몽땅 던져버리면 좀 후련해질까. 낮게 한숨을 내쉬고, 기분을 전환할 겸 TV 전원을 켰다. 제레온의 영화를 볼 생각이었는데, 리모컨을 놓치면서 엉뚱한 채널이 나왔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리모컨을 줍는데, 화면으로 그만 눈이 돌아갔다.
그래, 운명과 같이.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벽을 채운 화면을 응시했다. 입에 문 담배를 떨어트렸다는 것도 음악이 끝나고, 뮤직비디오가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 뮤직비디오였구나. 서정적인 곡조 뒤를 채운 시끄러운 기타 소리에 벨져는 가차 없이 TV를 꺼버렸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이 소년처럼 울며 웃고 있었다.
벨져는 잠시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약간의 주저와 망설임 끝에,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벨져의 마음도 초조해졌다.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신호음이 멎었다.
[ 별일이네. 벨져 홀든이 먼저 연락을 다 하고. ]
“너, 어디냐.”
[ 나? 글쎄, 어디일 것 같아? ]
“장난 말고. 너 일 하나 해라.”
[ ...일? 배우가 그렇게 없어? ]
“닥치고 와. 대본 보낼 테니까 보고.”
일방적인 선언에 잘만 대답하던 루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무겁다. 벨져는 입가를 쓸었다. 아무렇지 않다.
[ 벨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지난 일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
“상관없다. 장담하지.”
[ ...알았어. 읽어보고 연락할게. 이 번호로 하면 되지? ]
통화는 그간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끝났다. 지난 일. 결코 감정이 개입되는 일은 없다. 이건 작품이고, 일이고, 역에 어울리는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다. 벨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지난 일. 육개월 동안 미친 사람처럼 연애하다가, 갈라선 그 시답잖은 과거. 벨져는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내렸다.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었다.
결코 끝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도 이미 오 년이 지났다. 언제나 꿈은 깨기 마련. 세상이 환희로 가득 찬 그 시간은, 지금에 와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아직도 그 때 그 번호를 유지하고 있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를 떠나서 멀어져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지워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고 충동적인 만남이었다. 아직 벨져가 작품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그는 벨져 대신 트로피를 가져갔다. 신인상 정도에 별 미련은 없지만, 연초에 데뷔해 이름을 올리던 벨져 대신 시상식 두 달 전 개봉한 영화로 상을 채갈 정도로 그의 실력은 뛰어났다. 뛰어나다. 벨져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루이스를 지금의 자리로 올려놓은 첫 작품. 그는 주연 축에도 끼지 못하는 배역을 맡았다. 포스터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을 팔아넘긴 스파이를 사랑한 남자 연기는 아직도 루이스라는 배우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차갑고 서늘한, 하지만 동시에 자상한 면을 갖춘 평범한 남자. 옆집에서, 거리에서 마주칠 것처럼 친근하게 다가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관객을 압도하고 몰아붙이는 그. 벨져는 당초 계획대로 제레온의 영화를 트는 대신 루이스의 첫 작품을 틀었다. 그 해 가장 잘 팔린 영화답게 블루레이 한정판 박스까지 나온 작품이었다.
세간에서 루이스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벨져 홀든이 배우를 그만뒀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정작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야 별 것도 아닌 녀석에게 트로피를 빼앗겼단 생각에 조금 과잉된 반응을 하긴 했지만 그 분함과 억울함은 '어디 네까짓 게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며 튼 영화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스크린 속에서 온전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어떤 경지. 손끝의 떨림부터 눈길 하나, 대사 하나까지. 흠을 잡자면 수도 없이 잡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화면 안에서 진실로 그녀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했다. 이런 방식도 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 캐릭터는 그냥, 이런 사람이라고. 이것을 재능이 아니면 뭐라 표현해야 할까.
평론에 짠 평론가 누구는 그냥 배역을 잘 받은 신인이라 평하기도 했지만 벨져는 알 수 있었다. 한 번 발을 들여 본 사람이기에 알 수 있다. 이 역이 아니어도 그는 소화해낼 것이다. 그의 연기와 감정은 눈사태와도 같다. 올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서서히 다가오지만, 이내 그 감정과 눈빛으로 사람을 옭아매고 압도해버린다.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어서, 눈을 돌리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그저 사로잡힌 채 그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
루이스는 영화의 시작에 나오지 않는다. 원래는 배역의 이름도 없어서, 그 캐릭터는 그대로 배우의 이름을 받아 루이스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벨져는 와인을 꺼냈다. 미학 없이 싸우고 터지는 영화에 와인은 어울리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를 보는 것이라면 와인이 빠질 수 없었다.
주인공 뒤에서, 루이스가 여자를 보며 미소 짓는다. 제길. 벨져는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았다. 저를 보며 저렇게 웃던 시절이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간지러워지는 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고, 조금 차가운 손을 뻗는다. 벨져는 TV를 꺼버렸다.
좋은 머리는 잊고 싶은 기억까지 고스란히 남기고 되감는다. 그의 포커스는 제게 향해 있지 않다. 한 때는 영원할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영화를 찍고, 너는 내 카메라의 중심에 있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호흡하며 같은 그림을 완성해가는 관계. 지금 앉아있는 소파에서 어설프고 풋풋한 낯간지러운 말들을 속삭이고, 키스하고, 몸을 섞었다.
벨져는 공들여 가꾼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게 과연 잘 한 짓일까. 그와의 관계는 흔히들 말하는 '프랑스 영화'같았다. 십 분 동안 사랑을 속삭이고, 십 분 동안 섹스하다가, 그 뒤로 줄창 싸우다 헤어지는. 벨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내보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다.
원하는 화면을 얻기 위해 그가 필요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없고, 그와의 관계는 이미 파국을 맞이했다. 벨져는 시나리오 작가인 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연 남자 배우 역에 루이스. 그도 들으면 바로 동의할 것이다. 애초에 릭은 사람 보는 눈이 너무 낮다. 사람이 너무 좋은 것도 있겠지만, 벨져는 자신의 화면 안에 아무나 들일 수 없었다. 벨져 홀든의 자존심은 소품 하나, 캐스팅 하나에도 빠짐없이 적용된다. 벨져의 까탈스러움은 단역 하나까지 직접 뽑기로 유명했다.
벨져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해버리고 욕실로 향했다. 루이스와 헤어지고, 벨져는 노선을 바꿨다. 원래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 되고 싶었다. 연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으로, 제레온 프리츠같은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언론의 입을 막아주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이번 제작 투자도 어찌나 말이 많았는지. 벨져는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기 앞에 섰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이미 벌어진 사이를 메꾸는 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다시 시작하는 데는 더 많은 용기와 감정이 필요하고, 그러기엔 지나온 시간과 벌어진 틈이 존재했다. 그러니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벨져는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이제 '루이스'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려 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한 그 순간부터 코끼리가 떠오른다고 하던가. 그도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누구인지도 모를 가수의 뮤직비디오에서 이별의 슬픔을 앓던 그를 떠올렸다. 화면 속 루이스는 제 옆에 있을 때처럼 품이 조금 남는 니트를 입고 있었다. 소파에 무릎을 모아 앉아 손등까지 내려온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우리가 헤어졌을 때, 그 때도 너는 울었을까. 이제와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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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Scarface. 01.
01
다이무스는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는다. 미리 받은 주소로 짐을 부쳐놓은 뒤라 늘 들고다니는 가방 외에 딱히 챙길 게 없었다. 오늘부터 연합 쪽에서 제공한 집에서 그와 단 둘이 생활해야 한다. 보안상의 문제로 잡역부도 들일 수 없으니 말 그대로 단 둘이. 딱히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집처럼 편할 순 없다.
리버포드에 위치한 이층집 앞에 차를 세웠다. 생각한 것보다 외관이 준수했다. 이탈리아풍의 이층집. 누구의 소유인지 감이 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찰칵,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다이무스를 맞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꽤 고급스러운 가구가 즐비했다. 연합은 마피아에 모태를 두고 있으니,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소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이무스는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제 짐을 확인하고 집 안을 둘러봤다. 일층에 넓은 거실, 서재, 작은 부엌과 식당, 이층에 있는 침실까지. 다른 곳은 원래 비워둔 건지 급히 치운 건지 가구 하나 없이 휑했다.
다이무스는 집을 둘러보고 텅 빈 벽난로에 장작을 던졌다. 바로 오겠다던 사람은 아직 소식이 없다. 먼저 불이나 피워둘 생각으로 난로 앞에 섰는데, 불씨를 던져 넣어도 불이 쉽게 오르지 않았다. 다이무스가 한참 마른 장작과 씨름하며 회사에 있는 그녀를 떠올릴 무렵, 문이 열렸다.
“...... 뭐……. 하십니까?”
“....... 불 피우는 중이었다만.”
“아.”
여전히 추워 보이는 차림의 그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옆으로 매는 가방을 소파에 대충 던진 그가 난로 앞에 다가와 안을 기웃거렸다.
“불 있으십니까?”
다이무스는 라이터를 내밀었다. 수십 번을 시도해도 붙지 않던 불이, 그가 왔다고 붙을 리가 없었다. 다이무스에게 이런 추위는 그리 견디기 힘든 것도 아니었지만 루이스는 방금 막 퇴원한 환자였다. 이대로라면 하루를 보내기도 전에 동사할 지도 모른다. 난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을 꺼내려는데 루이스가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루이스는 장작을 다시 쌓더니 대충 만 신문지에 불을 붙여 장작 속에 던졌다.
하얀 손과, 더 파리해진 것 같은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결정능력자라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고 해도 옷차림이 너무 얇다. 다이무스는 코트를 벗어 신문지를 던져 넣는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 것 치고 안색이 좋지 않군.”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벽난로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은 루이스가 다이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달라는 뜻인 줄 알고 그의 손을 잡아당기자 무슨 짓이냐는 듯 올려다본다. 다이무스는 그제야 제 손에 부지깽이를 말하는 것을 깨닫고 잡은 손을 놓았다. 부지깽이를 내밀자 루이스는 장작을 몇 번 들쑤시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좀 쌀쌀하네요. 보일러부터 틀고 오겠습니다.”
“침실은 이층이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짐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섰다. 침실은 하나뿐이다. 방금 확인하지 않았던가. 다이무스는 이게 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원망하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심지어 한 방에 투베드도 아니고, 성인 남성 둘이 굴러다녀도 될 정도로 큰 침대가 떡하니 놓여있을 뿐이다. 다이무스는 짐가방의 옷부터 정리했다. 세탁이나 다림질이야 세탁소에 맡긴다 해도, 청소며 요리를 비롯한 가사는 직접 해야 한다. 다이무스는 새삼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고 한탄했다. 아직 방의 공기가 데워지지 않아 다른 코트를 걸치고 넓은 침대에 얄궂게 자리한 베개 두 개를 노려봤다.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뭐라도 있습니까?”
“아니다.”
가방을 들고 온 루이스가 방 안을 휙 둘러보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먼저 옷장을 쓴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는 열려있는 옷장을 보고, 옆에 있는 서랍을 열어 옷가지를 정리해 넣었다. 생각한 대로 루이스는 같이 살기에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짐을 정리한 루이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이무스는 묵묵히 짐을 정리했다. 먼저 와서 정리를 시작했음에도 짐의 양 자체가 차이나다 보니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방 안은 많이 따뜻해져서 숨을 내쉬어도 하얀 김이 서리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내상이 심했다고 들었다만.”
“밖으로 안 보이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지친 기색이 농후했다. 다이무스는 조금 더 자라고 하려다가 쓸데없는 참견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컨디션 조절 정도는 알아서 할 것이다. 그보다 두 사람의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 먼저였다.
“연합에서 일은.”
“알아서 할 겁니다. 같이 다녀야하는 만큼 둘을 쓰는 임무를 주겠죠. 저보단 다이무스씨의 일정을 조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전 중으로 은행 업무를 볼 거다. 오후는 비워놓았고, 5시 이후엔 다시 은행 업무를 보고 7시 전으론 퇴근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그럼 그동안 서점에 있도록 하죠.”
셔츠를 개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봤다. 그는 눈을 맞추긴 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스물 네 시간, 동행하라는 말은 못 들었나?”
“그럼 장식장이라도 할까요.”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긴 싫단 소리다.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영웅에게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까. 그렇게 따지면 멀쩡한 집을 놔두고 업무도 제대로 못 하고 묶여있는 저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이무스는 한 번 참기로 했다. 첫단추부터 잘못 꿰고 싶지 않았다. 그 냉랭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열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았고, 다이무스는 그보다 더 심한 동생을 둘이나 가지고 있었다. 둘째 녀석에 비하면 이 정도야 까칠한 축에도 못 든다.
“나쁘지 않군.”
“당신에게, 나쁘지 않은 거겠죠.”
“내가 네 상황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제게 당신의 상황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이스.”
“미리 말씀드리죠. 뭔가 알아내려 하는 거라면, 공연히 힘 빼지 마십시오.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백제를 투여해도 답은 같을 거예요. 믿지 않겠지만.”
루이스는 자조했다. 다이무스는 잠시 제 안에 가라앉아있던 연민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본 적이 있던가. 다이무스가 아는 연합의 영웅은 이렇게 약한 남자가 아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남자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든 여자를 떠올렸다.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워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루이스는 낯설고, 또 대하기 어렵다. 다이무스는 한 발 물러났다.
“임무일 뿐이다.”
“……. 그러겠죠. 당신도…….”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제게 머물렀던 그의 붉은 눈이 달아나버렸다.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 다이무스 씨가 이렇게 묶여있는 것도 금방 끝날 겁니다.”
“무언가 알고 있나?”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곧 쓸모없다는 걸 깨닫게 되겠죠. 당신도, 그들도.”
루이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상처와 비밀. 어느 쪽에서 기인한 태도인지는 모르나 다이무스는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파헤친다고 속내를 터놓을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회사의 에이스가 아닌 다이무스 홀든은 루이스 개인을 존중했다. 그가 쌓아올린 공적과 짊어지고 있는 것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의 병실을 가득 채운 선물이 증명하듯 그는 사랑하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곳에 있는 건 헬리오스의 에이스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별개다. 다이무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침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 시야 안에 있어라.”
“.......”
루이스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향했다. 그걸 느끼면서도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잔뜩 겁먹은 토끼처럼 다시 도망갈 것 같아 마지막 남은 바지를 옷걸이에 걸어 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은행과 서점은 가까우니 사무실을 잠시 그리로 옮긴다고 생각하지.”
“.......”
“싫다면 계속 이 집 안에 있어야 한다만.”
“……. 좋습니다.”
“그래. 그럼 점심부터 먹도록 하지.”
빈 짐가방을 닫아 방 한 쪽에 세워놓고,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눈을 맞췄다. 도망가지 않고 저를 마주하는 붉은 눈에 잠시 빛을 잃었던 총기가 돌아왔다.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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