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다이루이] Scarface. 00.
00.
코를 찌르는 알싸한 냄새. 소독용 알콜과 세제 특유의 냄새가 나는 복도를 한 남자가 걸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긴 검은 병문안을 의심하게 했지만 어쨌거나 목적은 병문안이 맞았다. 검을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다이무스는 연합 쪽에서 전해 받은 정보를 다시 한 번 곱씹고 흰 문 앞에 섰다. 정중하고 간결하게 노크한 뒤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자 차분한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반겼다.
“예상대로군요. 당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연합의 영웅은 창가에 서있었다. 겨울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그는 당연히도 얇은 환자복 차림이었다. 다이무스는 문을 닫았다. 갈 곳을 잃고 가라앉은 바람에 펄럭이던 커튼이 멈췄다.
“아이스.”
다이무스는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다이무스를 향해 쓰게 웃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들이쳐, 역광이 졌다.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겨울 도나우 강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는 지쳐보였고, 그 기색을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트리비아 카리나가 떠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 함께 있었던 유일한 남자는 홀로 돌아왔다. 자연히 새 공간과 정보에 혈안이 되어있던 이들의 관심은 그에게 쏠렸다. 자백제라도 투여해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지천에 널렸다.
연합에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곤 하지만 그는 연합의 영웅이었다. 새 공간, 그로부터 파생될 막대한 힘. 그 유일한 목격자. 세계는 안타리우스의 재림과 더불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능력자단체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고, 새로운 공간과 힘을 연합이 독점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언제 이 경쟁에서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결국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회사에서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결정의 루이스는 24시간, 회사 측 인물과 동행할 것. 연합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정보의 우위를 점한 건 그들이나 물자를 가진 건 회사다. 그것은 2차 능력자 전쟁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루이스가 안타리우스로 추정되는 괴인들에게 습격 받아 혼수상태에 빠진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연합에선 루이스가 정보를 털어놓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회사에서도 그가 순순히 협조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보호라는 명목 아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을 뿐이었다.
연합에서는 그 괴한들 역시 회사의 소행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회사는 전면 부인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소식, 그러니까 기어이 안타리우스의 의식이 성공했다는 정보가 이글을 통해 들어오면서 일주일간 이어진 탁상공론이 끝을 맺었다.
동생들의 소식을 적대세력을 통해 전해 듣는 기분이란. 다이무스는 통탄했다. 기어이 녀석들은 제멋대로 뛰쳐나가 일을 벌였다. 안전이라곤 보장되지 않는 곳에 몸을 던지고 불나방이라도 되려는 것인지. 거기에 아메리카 대륙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소식까지 더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합도 회사도 더는 무의미한 소모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빠른 동맹을 맺고, 회사와 연합은 협력을 약속했다. 회사가 부랴부랴 내놓은 타협안에 연합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아무렴 연합에 경호인원 하나 없겠냐는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회의 끝에 그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건 다이무스였다.
안타리우스의 습격에 대응할 수 있고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며 배신하지 않는 믿을만한 사람. 거기에 그가 숨기고 있는 것들을 알아내고 감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게 윗선의 결정이었다. 이런 일에 내보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있었고 타라는 빈말로도 그와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녀가 이성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아무렴 동성이라도 화장실이나 욕실까지 들여다보는 건 아니지만 성별이 다르면 여러모로 제약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다이무스는 병실 한편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루이스의 병실엔 꽃이며 간식거리며 과일 같은 선물이 가득했다. 베개 옆에는 사랑스러운 곰인형까지 있다. 연합에서 그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이 병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결정의 루이스는 명실공히 연합의 영웅이다.
그래도 예전엔 한 마디씩 말을 붙였던 것 같은데.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자리에 앉아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서류와 안경을 꺼냈다. 임무는 내일부터지만 은행일까지 쉴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가 이글 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루이스는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너무나 당연해서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처음 건넨 말이 이 상황에 대해 느끼는 전부라는 듯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바깥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불편해하면 나가면 그만이고 말을 걸면 그에 맞는 답을 하면 그뿐이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상태를 보러 온 것 뿐이니.
기어이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나서야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면 어느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다이무스는 안경을 벗으며 말을 꺼냈다.
“내일이 퇴원이라 들었다만.”
“우연이군요. 저도 내일부터라고 들었는데. 바로 갈 겁니다. 챙길 짐도 별로 없고.”
좋게 봐줘도 우호적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말투에 눈에 힘을 줘도 루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이 흐르도록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내일 뵙죠.”
완곡하지만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다이무스는 서류를 챙기고 배웅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내의 등에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살펴 가십시오.”
다이무스는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돌아섰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한동안 같이 살게 될 텐데, 그동안 부딪히지 않으려면 이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가 서로에게 훨씬 유익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
[다이루이] Scarface. 01. (0) | 2015.12.01 |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8 |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0) | 2015.11.25 |
[다이루이] 가이드 (0) | 2015.11.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Exorcismus
벨져루이라기 보다는 벨져+루이에 가까움
신부 루이스와 헌터 벨져au
※ 라이샌더에게 악령 씌임 주의 ※
명문 홀든.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가문은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은행을 설립, 현대에 이르러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가문 안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가문의 비밀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 시대가 바뀌고, 세계는 이성과 지성, 과학과 기술에 지배되었지만 빛이 밝는다고 어둠이 사라지지는 않는 법.
예로부터 퇴마를 행하며 그 대가로 막대한 부와 명예, 그리고 때때로 세상을 움직일 정보를 거머쥔 이들이 바로 홀든의 부를 만든 기반이었다. 타고난 신체능력과 항마력. 가문은 엄격한 훈련과 시험을 통해 헌터를 선발했고, 최고의 헌터가 가문을 이었다. 적통과 서얼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선발되는 헌터들은 홀든의 자랑이요, 가문을 짊어지는 기둥이었으니 그 명맥은 과학의 빛이 밝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끊기지 않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그 대를 잇는 이가 하나.
“뭐야, 작은형. 일?”
“그래.”
“흐응. 잘 다녀와. 올때 기념품이랑 쭉빵한 미녀 잊지 말고.”
“하아, 할일 없이 빈둥거릴 거면 너도 따라나서는 게 어떠냐, 이글.”
“응? 아아 귀찮아. 작은형이나 다녀오라구.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
“미국으로 간다. 꽤 성가신 녀석이라는 것 같더군.”
“뭐, 그냥 사령정도면 작은형이 가지도 않겠지.”
소파에 드러누워 발끝을 까딱이던 이글이 고개를 돌렸다. 은으로 만든 탄환과, 일반인은 들 수도 없는 검을 챙기는 형의 등을 보며 고양이처럼 샐쭉하게 웃으며 물었다.
“도와줄까?”
“네 도움 따위 필요 없다.”
이글은 기어코 자존심을 우선하는 작은형의 등을 보며 키득거렸다. 벨져가 받은 임무, 이글도 안 본 건 아니다.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또 얼마나 힘든지도 안다. 그럼에도 손을 빌려주지 않는 건 그만큼 벨져의 실력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도와준대도 도움을 받을 사람도 아니고, 팽팽 부려먹기만 하겠지. 이글은 한 짐을 챙겨 나가는 벨져에게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재빠르게 귀찮고 성가신 일에서 발을 뺐다.
비행기로 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넓은 아메리카 대륙. 거기서 또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그걸로 모자라 차로 몇 시간을 걸려 달려온 스산한 마을. 벨져는 렌트한 벤츠를 몰며 마을로 들어섰다. 들어설 때부터 버려져 황폐화된 마을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에 벨져는 혀를 찼다. 제대로 된 식사와 잠자리를 위해선 또 몇 시간씩 달려 옆 마을로 가야한다는 게 귀찮고 성가셨다. 이래서 미국은.
벨져는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보수와, 이 일을 의뢰한 사람만 아니었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정도로 추레한 곳이었다.
길게 숨을 내쉬고, 벨져는 차를 멈췄다. 그나마 바깥은 멀쩡해보이는 집에 들어서기 전 장갑을 끼고 허리춤에 은탄을 채운 권총을 찼다.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뿌옇게 먼지가 날아올랐다. 안에서 널빤지를 대어 못질을 해놓은 덕에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틈새로 새는 빛에 떠오른 먼지들이 떠다니고, 벨져는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충분히 경계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낡은 마루에 무언가가 끌리고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벨져는 허리에서 총을 꺼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먼지가 자욱한 바닥에서 벨져가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떠올랐다. 무언가 있다. 확신한 벨져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벽 너머로 돌아섰다.
창에서 새는 한 줄기 빛이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은 남자를 비췄다. 의자에 앉아 무릎 위 성경 위에 양손을 올리고 눈을 감은 채 햇빛을 받고있는 남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푸른빛이 섞인 잿빛 머리카락에 햇빛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스르르, 눈을 뜨는 그 모습이 슬로우비디오를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눈동자. 남자가 눈을 깜박였다. 로만칼라. 벨져는 뭐라도 훔쳐본 것 같은 기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신부가 있다면 제대로 온 게 맞다.
“벨져 홀든이다.”
“홀든? 아아.”
신부는 일어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놀라거나 반길 텐데 맹한 건지, 예의가 없는 건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는 신부에게, 벨져는 초면부터 빈정이 상했다. 멀끔하고 곱상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이스. 루이스 안젤로입니다.”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다 위화감을 느끼고 멈춰섰다.
“안젤로. 라고?”
움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루이스는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지 않는 답에 벨져는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렇지.
“안젤라 신부님?”
“...예. 형제님.”
“하느님의 종이 이름을 속여서야 되겠습니까?”
“아직 억양이 익숙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루이스 안젤라. 영국인인데도 후원자는 미국인이고, 종파는 성공회, 소속은 로마 가톨릭. 누가 고아 아니랄까봐 섞이기도 참 징하게 많이 섞였다. 벨져는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의자를 그늘로 끌어다 앉았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자 입이 심심해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여도 신부는 그의 몸만한 트렁크를 열어 그 안을 볼 뿐 말이 없었다.
“상태는?”
“안 좋습니다.”
“이쪽에선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빠르고, 쉽게.”
“당신이 생각하는 악령이나 생명체와는 다릅니다.”
“신부님이 여기 먼저 와있었던 걸로 아는데.”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둑한 곳에서 저를 향하는 붉은 눈동자가 얼음처럼 시렸다.
“궁금하면 네가 가서 봐.”
시니컬하게 툭, 내던지듯 한 반말에 벨져는 피식 웃었다.
“네가 무능한 게 아니고?”
“그럼 그 잘난 은탄으로 쏴죽이시던가. 아니면 그 잘난 검을 드시던가.”
“너...!”
건성으로 홀든을 들먹이는 것에 울컥해 그를 노려보자 루이스가 트렁크를 쾅 닫았다.
“지금까지 세 명의 헌터가 실패하고 다섯이 죽었습니다. 그 오만, 내려놓고 가시죠.”
벨져는 단호한 말에 미간을 찌푸릴 뿐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실패란 해본 적이 없는 벨져였다. 설령 저 안에 있는 게 진짜 악마래도 벨져 홀든에겐 실패가 있을 수 없었다. 최전방, 거친 싸움을 통해 익힌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견고한 자아. 그야말로 퇴마사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벨져였다. 가문 안에서도, 그 잘난 형이나 동생마저도 벨져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잘즈부르크 축제를 마치고 돌아오진 못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심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벨져는 코웃음쳤다.
“이래서 신부들이란.”
제령과 구마, 엑소시즘이 전부인 신부다. 그들과 육탄전으로 싸울 일도 없고 신의 가호를 빌 뿐, 거친 일이라 해봐야 수도회에서 하는 노동뿐인 이들이니 결국은 벨져가 지켜줘야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벨져 역시 태어나면서 세례를 받고 악귀와 괴생명체들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문을 읊지만 그들의 방식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온건하다. 벨져는 몇 달, 몇 년이 걸리는 '치료'가 너무 안이하다 생각했다.
그동안 고통받는 구마자도,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엑소시즘을 행하는 신부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힘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가. 벨져는 제게 깃든 힘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단번에 악령을 베어 그들이 있어야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힘. 더러는 사람과 함께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냐며 질책하지만 죽음 뒤를 알 수 없는 인간에게 알 게 무엇인가. 한 사람으로 여럿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든 재난과 참사를 막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의가 아닌가.
벨져는 그들과 자신의 정의와 방법이 다를 뿐이라 여겼다.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지만, 딱히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빛나는 이성과 지성으로. 벨져가 담뱃불을 대충 바닥에 비벼 끄는데 이층에서 다른 사제 하나와 남자 간호사 하나가 내려왔다.
“신부님! 아, 저기....”
“벨져 홀든이다.”
“아, 루이스 신부님 부제로 온 토마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흐응.”
벨져는 싹싹한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계단을 오르는 루이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성호를 그으며 계단을 오르는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워, 벨져는 얼마나 심각한지 직접 보기 위해 그를 따랐다. 어두침침하고 폐가같은 일층과 달리, 이층은 꽤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둔중한 철문이었다. 누가 봐도 거기만 새로 만든 티가 나는 이질감에 벨져는 팔짱을 꼈다. 소금 포대와 십자가, 성모화가 의료기구들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루이스는 문고리를 잡고 다시 한 번 성호를 그은 뒤 벨져를 흘긋 돌아봤다.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썩은내에 벨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온통 새하얀 방에, 고정된 침대 위에 누워있던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벨져는 금을 그어놓은 소금 뒤에 섰다. 잡아야 하는 대상에게 동정심이나 연민을 품는 건 금물. 쓸 데 없이 휩쓸리는 건 사양이었다.
“신부님!”
“안녕, 라이샌더.”
“오늘도 와주셨군요! 정말 기뻐요!”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상한 미소를 머금은 루이스가 소년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성자같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소년은 얼굴 앞에 성호를 그으며 작게 읊조리는 루이스에게 맞춰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않았다면 아픈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신부님, 정말 좋아요. 신부님한테선 좋은 향기가 나요.”
루이스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소년이 그의 손을 잡아 제 뺨에 부볐다. 이 썩은내가 나는 방 안에서 대체 무슨 말인지. 벨져는 콜록거리며 소년이 하고싶은 대로 두는 루이스를 지켜봤다.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는 아까 본 차가운 사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구나. 몸은 좀 어떠니?”
“헤헤, 조금 힘들긴 한데 괜찮아요. 여전히 목소리가 들리지만....”
손에 뺨을 부비던 소년이 손을 놓고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곤 울상을 지으며 루이스를 올려다보는데, 정말 인형같이 사랑스러웠다.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연출. 마음을 가지고 놀며 인간을 희롱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주특기다. 벨져는 권총 위에 손을 올렸다.
“제가 또 신부님을 아프게 했나요? 죄송해요....”
“괜찮단다. 이렇게 다시 왔잖니.”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네? 신부님, 제발요.”
“나도, 주님도 너를 결코 버리지 않는단다.”
아이를 어르며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시종일관 미소로 아이를 대하는 게 아니꼬웠지만 끼어들 수는 없었다. 벨져는 손을 올려 팔짱을 끼고 등을 벽에 기댔다. 루이스는 일어나 벨져에게 문을 닫으라 눈짓했다. 방금 만난 주제에 제게 명령하는 게 아니꼬워 벨져는 발로 세게 문을 찼다.
“신부님. 가지 마세요. 신부님, 신부님!”
벨져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얼핏 봐선 피해망상과 편집증이 뒤섞인 걸로밖에 안 보이는 아이다. 이 썩은내만 아니었다면 그냥 정신과 의사에게 보이라고 하고 돌아나갔을 터였다. 루이스가 거울을 들고 성호를 그어도 벨져는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게, 홀든이 헌터인 이유는 그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혀, 저 신부가 거슬리는 것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벨져는 빨리 이 악취나는 방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말하라.”
“신부님. 왜 그러세요.”
“나는 주님의 종일지니, 더이상 기만하려 들지 마라.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아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처럼 울상을 짓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흐후후.”
오싹하게 올라오는 싸한 감각.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루이스도, 소년도 움직이지 않는다.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 속에 벨져는 마른 침을 삼켰다.
“키킥. 알고 싶어?”
바뀐 목소리. 소년은 기이한 웃음을 만면에 띠우고 루이스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의심할 것도 없다. 벨져는 총을 빼들었다.
“흐우. 하아. 한 번, 딱 한 번이면 돼. 한 번만 대줘. 그럼 여기서 나가줄게. 응? 이리와봐. 응? 오라고! 이 더러운 년! 악마에게 뒷구멍을 판 창녀!”
루이스는 아랑곳않고 소년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다만 늘상 보던 구마의식과 다른 점은, 구마자가 그를 쫓아내려는 신부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백이면 백 몸부림치고 거부하며 해치려드는데, 이번은 달랐다. 손도 발도 자유로운 소년은 황홀하다는 듯이 코를 벌름거리며 신부의 옷자락을 쥔다. 목을 조르지도, 그를 해치려들지도 않는다. 구마의식 중에 신부에게 매달리는 구마자.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벨져는 가만히 소금 선 안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주시했다. 그 사이 루이스의 기도가 이어지고, 그를 탐할 것처럼 굴던 소년이 루이스쪽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벨져를 감싸고 돌던 감각이 멎었다. 순간 다리가 풀릴 뻔 했던 벨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역겨운 냄새가 공기와 함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벨져는 아이의 몸을 눕히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주는 루이스를 지켜봤다. 아무렴 신부를 두고 헌터가 먼저 나갈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는 아이의 손발을 다 닦아주고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눈을 감고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는 그를 방해할 수는 없어서, 벨져는 잠자코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루이스가 기도를 마치고, 소년의 손을 배 위에 포개주었다. 함께 방을 나온 벨져는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확인했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군.”
“...벨 겁니까?”
한참만에 돌아온 목소리는 곧장 핵심에 꽂혔다. 동정과 자비는 그가 신에게 빌어야 할 것들이고 벨져의 일은 그들을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때문에 벨져가 돌려줄 답은 하나였고, 망설임따윈 없었다. 그런 감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난 의뢰를 받았어.”
“아직 성인도 안 된 아이입니다.”
“내가 알 반가? 신부?”
벨져는 일부러 그를 도발했다. 소년을 대할 때 풀어졌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그는 저를 책망하고 있었다.
“...... 당신의 일은 피를 부르죠.”
“너는 아닌가?”
“구마의식이 성공했을 때 구마자의 몸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끊은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턱을 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깔보는 거, 좀 적당히 하지 그래?”
“....하!”
마냥 순한, 전형적인 신부인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성격이 있다. 벨져는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신의 종이 이래도 되나?”
“못 할 건 또 뭔데.”
받아치는 게 보통이 아니다. 웬만해선 다른 헌터들도 아무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벨져다. 그런 제게 이 정도로 직설적인 반응은 신선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이번 일은 지루하진 않을 것 같다.
“씨발 좆같아서 진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웃어넘겼을 텐데. 벨져는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너...!”
“아, 잠깐 상태만 보고오신다더니. 괜찮으세요?”
바로 붙잡아 따지려했는데, 방금 전까지 꼿꼿하게 서있던 사람이 머리를 짚으며 휘청였다. 부제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벨져는 그 둘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일만 하면 그만. 신경 쓸 게 아니다. 그저 잠깐의 변덕으로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다. 벨져는 사제들을 뒤로 했다. 일단은 자료가 더 필요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Scarface. 01. (0) | 2015.12.01 |
---|---|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0) | 2015.11.25 |
[다이루이] 가이드 (0) | 2015.11.23 |
[티엔루이] 선물 (0) | 2015.11.0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명왕아들 루이스au
Good evening, sir.에서 이어집니당
루이스 밀러의 경호 첫 날. 다이무스는 일찌감치 은행일을 마치고 명왕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를 다시 만난다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묘한 열기가 손끝을 감싸고돌았다. 그리고 그 긴장은 루이스의 방 앞까지 이어져,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는 단순한 행동조차 망설였다.
“어...?”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기억 속의 그 날 처럼 말간 얼굴의 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본다.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기 위해 올렸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가 놀란 토끼를 연상시켰다.
“오늘부터 경호를 맡은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아, 오늘부터였구나. 잘 부탁드려요.”
루이스는 문을 열고 나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다이무스는 목을 매만졌다. 은연중에 봄철에 새순을 틔운 나뭇가지같이 곧고 하얘서 잘 만든 도자기 인형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굳은데다 차가웠다. 차가운 건 그 능력 때문이겠지만 손끝에서 간질거리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뭇 레이디들의 손을 잡으면서도 무덤덤했던 다이무스에겐 낯선 경험이었으나 다이무스는 그마저도 목 안쪽으로 삼켜버렸다.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바쁜 분의 시간을 뺏는 거 아닌가 싶네요.”
“괜찮습니다.”
윌라드는 루이스가 콕 집어 자신을 지목했다고 했다.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한다 해서 누군가 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루이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윌라드 크루그먼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진심이라 없는 말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런데 왜 모른 척 하는가. 다이무스는 들어오라는 권유에 루이스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명왕의 집다운 인테리어지만 그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바깥보다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다이무스가 잘 관리된 방을 둘러보며 습관처럼 사각을 찾는 사이 루이스가 창문을 열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을 겁니다. 대외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앨리셔를 마중가거나 가끔 산책하는 갓 뿐이니까.”
“그래도 제 일입니다.”
“그럼 좀 쉬어간다 생각하세요.”
루이스는 창을 등지고 미소 지었다. 햇살이 물에 닿아 부서지며 오색 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듯이.
다이무스는 집어삼켰던 숨을 몰래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자리를 권하며 침대에 앉았다. 그의 집이고, 방이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다이무스는 침대에 있는 루이스가 신경 쓰였다. 이글이나 벨져가 그랬다면 눈길을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텐데. 창문을 열었음에도 방안이 더웠다. 방주인은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초면이나 다름없는 타인의 방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가 신문을 펼쳐들었다. 다이무스는 집에서 보려고 챙겨온 서류를 꺼냈다.
코끝에 도는 향기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잠시 존재를 잊었던 루이스가 양 손에 잔을 들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보기 시작한 서류였건만, 보다 보니 그만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집중해버렸다. 다이무스는 펼쳐놓은 서류를 한 데 모았다.
“차랑 커피 어느 쪽이 좋을지 몰라서.”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방해될 것 같아서요. 차? 커피?”
“그럼 커피를.”
루이스는 다이무스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남은 잔에 담긴 홍차는 곧장 그의 입으로 향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기왕 쉬는 김에 체스 하실래요?”
별로 어려운 요구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빛내며 둥근 탁자 위에 체스 판을 가져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별로 표정이 변한 것도 아니지만 신이 난 게 빤히 보이는 그가 소년같이 귀여웠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커피를 마시며 판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건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졸업했지만, 고작 두 살 어린 사내는 제 혈육들보다 훨씬 더 귀여운 동생 같았다.
이런 동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을 텐데. 무심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유년기를 상상하던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걱정하던 앨리셔를 떠올렸다. 둘은 피가 이어져있지 않아도 좋은 남매임에 틀림없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한 때 잠이 들기 전 눈을 감고 바라던 '귀여운 동생'에 대한 환상과 이상을 전부 모아놓은 사람 같았다.
다이무스는 기꺼이 루이스가 양보한 흰 말을 잡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처음에 봐준답시고 악수를 둔 게 아까워질 정도로 어렵다. 많이 고민하고 두는 것도 아닌데 루이스의 수는 거침이 없었다. 이기긴 힘들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수를 되짚으며 엷은 미소가 걷힌 루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예리한 눈매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눈을 사로잡는다. 예쁘게 웃는 얼굴보다, 오히려 이 쪽이 진짜가 아닐까.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던 다이무스는 비숍을 움직였다. 아니, 실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악수를 둔 다이무스는 낮게 신음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무 봐주시는데요.”
“그만.”
“벌써요?”
다이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봐줬다 해도 진 건 진 거다. 루이스가 슬쩍 웃고는 말을 돌렸다. 이겼는데도 썩 즐거워보이지 않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뭔가 굉장히 실망시킨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이무스는 제가 불편해한다고 오해를 하나 싶어 탁자 쪽으로 몸을 숙였다.
“한 판 더 두겠나?”
“봐주기 없이?”
“그래.”
“좋아요.”
또 얼마쯤 말을 움직이며 수를 주고받았을까, 마침내 루이스의 흑색 킹을 잡은 다이무스는 가볍게 체크메이트 선언을 했다. 순순히 항복한 루이스는 오히려 아까보다 후련해보였다. 훨씬 나아진 얼굴에 덩달아 기분이 나아진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말을 정리하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얇게 눈을 휘며 웃었다. 오후의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순간 숨을 멈췄던 다이무스는 한 박자 늦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습만큼이나 위험한 미소다. 다이무스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를 바로 볼 수가 없다. 잠시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다이무스의 눈은 장식장 위 시계에 멈췄다. 고작 두 판을 두었을 뿐인데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걷었던 소매를 내려 소매 단추를 잠갔다. 그 사이 체스 판을 다 정리한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다이무스는 슬쩍 몸을 돌렸다. 갈고닦은 몸이 부끄럽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그를 흘긋 돌아보며 눈치를 주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아, 시간이. 슬슬 나가볼까요.”
외출인가.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둘이라 그다지 준비할 것도 없다는 게 그나마 기꺼웠다. 재킷을 집어 들고 모자를 쓰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루이스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따라 뒷자리에 앉아야 할지, 기사 옆 조수석에 앉아야할지 망설였다.
“뭐해요?”
“아닙니다.”
문을 열고 옆자리를 비운 채 기다리는 루이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문을 닫았다. 바로 출발하는 차는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리고, 루이스는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밖을 바라봤다. 멍하니 정면을 보던 다이무스는 작은 콧소리에 옆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매끈한 턱선과 옆얼굴이 지난 밤 기차에서 본 것과는 또 달랐다.
루이스의 옆얼굴을 보던 다이무스는 너무 빤히 쳐다보는 건 신사로서 할 행동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다이무스는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말이 많은 것도, 사교성이 좋은 것도 아니다. 다이무스 홀든은 오히려 너무 말이 없어서 답답하단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겐 말을 붙이고 싶다. 침묵이 어색한 것도, 그가 불편하게 구는 것도 아니지만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대화가 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한참 망설이다 백미러로 루이스를 보곤 운을 뗐다.
“어디로 가십니까.”
루이스가 차에 탄 뒤 처음으로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돌렸다. 다이무스에게 향한 붉은 눈동자가 잠시 그대로 멈춰 있다가 슬며시 풀렸다.
“앨리셔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라서요.”
“경호원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왜 굳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셔는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공성전에 투입되는 사이퍼다. 그녀보다 열 살이나 많은 루이스보다 강한 게 당연하다. 불한당을 만났을 때 오히려 불한당의 신변을 걱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할까봐 나름 돌려 말한다고 한 건데, 루이스는 단번에 뜻을 파악했다. 머리가 너무 좋아도 탈이다. 혹시 열등감을 자극한 걸까.
“능력이 보잘 것 없어도, 오빠는 여동생이 걱정되는 법이거든요.”
차분한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해서, 열등감이나 질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나마 마음을 졸인 게 민망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침묵을 가르는 목소리에 눈을 맞추자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말 놓으셔도 돼요. 아까처럼.”
말을 놓은 적이 있었나. 다이무스는 기억을 뒤졌다. 오늘이 정식으로 경호를 맡은 첫날이고, 전투가 아니라지만 이 역시 엄연히 임무다. 하물며 경호 대상에게 하대를 하다니. 다이무스의 머리가 빠르게 기억을 되짚는 사이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작게 웃었다.
“왜, 체스할 때요.”
“.......”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만 낭패의 한숨을 지었다.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 편이 편하고.”
루이스가 말을 덧붙이며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차가 멈추고, 다이무스에게 싱긋 웃은 루이스가 차에서 내렸다.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예상 외로 루이스 밀러 경호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임무는 임무. 그것도 굉장한 중책이다. 다이무스는 차에서 내려 루이스의 뒤에 섰다. 앨리셔가 다니는 하교 정문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다.
“루이스라고 불러도 돼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앨리셔의 모습을 찾으며 하는 말엔 두 번이 없다. 다이무스는 정답을 말하고도 석연치 않아 루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불만을 가득 안고 침묵했다. 이글의 변덕이 옮기라도 한 걸까. 거절한 건 자신인데도, 기분이 상했다.
“아, 오빠!”
“안녕, 앨리셔. 잘 지냈어?”
“아침에 인사하고 얼마나 지났다구요. 아, 다이무스씨도 안녕하셨나요.”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한 남매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잠시 멈춰있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움직여 인사했다. 앨리셔는 두말할 것도 없고,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앨리셔의 가방을 대신 든 루이스는 누가 봐도 한 번쯤 돌아볼만한 남자라 지나가던 학생들의 발길이 멈췄다. 그냥 같이 서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는 남매라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다. 다이무스는 더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차문을 열었다.
“타시죠.”
“자, 아가씨 먼저.”
“감사합니다.”
뒷자리에 두 사람이 타고, 문을 닫은 다이무스는 자연스레 남은 조수석에 탔다. 선택지가 없었던 것 뿐이지만 왠지 섭섭했다. 두 사람은 정답게 떠들고, 다이무스는 잠자코 앞을 보며 두 사람의 둘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학교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내놓는 앨리셔와, 그녀에게 맞장구치며 귀기울여주는 루이스는 그야말로 자상한 오빠였다.
“우왓!”
“오빠!”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명왕의 자녀들이 탄 차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 일. 다이무스는 두 사람이 무사한 걸 먼저 확인하고 검을 쥔 채 내렸다. 꾸물거리는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였습니다.”
“오빠, 괜찮아요?”
“응. 너무 그렇게 보호해주지 않아도 돼.”
“아, 죄송해요.”
루이스는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앨리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갈등이 격화된 능력자전쟁을 고스란히 겪은 세대니 무리도 아니었다. 지난 몇 년도 대학에 갔다고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피신해있었다는 게 명왕의 친아들에 대해 범람하는 소문 중 가장 유력한 설이었다.
딱히 소문을 믿는 건 아니지만, 다이무스 궁금했다. 이 데운 우유같이 말간 남자의 과거가, 베일에 싸인 그를 알고 싶다는 욕구가 차올랐다. 더, 알고 싶다. 다이무스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그러쥐었다. 아침에 혼자 차를 타고 올 때 느꼈던 묘한 열기가 여전히 손끝에 맴돌고 있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8 |
[다이루이] 가이드 (0) | 2015.11.23 |
[티엔루이] 선물 (0) | 2015.11.01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0) | 2015.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