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하다. 그것도 매우. 다이무스는 검을 바투 쥐며 몰려오는 오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센티넬의 신체능력과 발달된 오감은 전투에 유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다이무스는 낮게 신음했다. 공성중에 능력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날뛰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지척에서 들리듯 들리는 발소리와 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숨소리, 멀리서 느껴지는 열기와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매캐한 탄약 냄새같은 것이 다이무스를 괴롭혔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예민해진 감각에 혈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껴지고,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이 구역질이 났지만 그 감각을 차단할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붉은 위험신호를 울리는 걸 알면서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움직일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푸른 얼음결정. 분명 이 각도라면 그의 얼음에 갇히게 되리라.
다이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등을 돌려 피하기엔 늦었다. 피한다 해도 지금은 가다가 등을 보이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오기 전에 친다. 다이무스는 검을 뽑았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쓰러질 수야 없는 노릇. 오히려 한 번 리스폰한다면 이 날카로운 오감도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부, 얼어버려!]
순간 덮치는 냉기와 함께 몸을 지배하던 감각이 사라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채 제게 직격하는 얼음 산탄총을 맞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후방에 코인을 양보하느라 장비를 많이 장착하지 않았는지, 모든 스킬을 쏟아 부었음에도 다이무스에게 걸린 빙결 효과가 가셔도 체력이 남았다. 다이무스는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검을 들었다. 낭패라는 걸 알면서도 손에 결정검을 만들어내는 사내에게서 풍기는 냉기에 당장이라도 터질것만 같던 머리도, 떨리던 손끝도 안정을 찾았다. 스물 아홉 해를 살면서 센티넬로 각성한 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다이무스는 검을 휘두르며 제 검을 맞받아치는 루이스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벌떼처럼 제 몸을 싸고 돌던 감각이 가라앉았음에도 묘하게 들뜨는 가슴의 고동과, 차갑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마치 한 곡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의 검에 루이스의 결정검이 부서지고, 다이무스는 질풍처럼 파고들었다.
[크흑.]
쓰러진 루이스가 낮은 신음을 냈고, 최상의 컨디션을 되찾은 다이무스는 헬리오스의 에이스답게 그의 목을 겨눴다. 몸을 감싸고 도는 열기와, 단숨에 몸을 움직이며 시작된 심장의 두근거림이 다이무스의 검을 멈췄다. 질끈 눈을 감았던 루이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마에스트로를 본 다이무스는 검을 꽂고 돌아섰다. 타라의 재촉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를 베고 싶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비이성적인 선택이었으나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벨 수 없었다. 잘 설명하긴 힘들지만 된다, 안 된다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낀 그 감각. 센티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본진 안으로 들어온 다이무스는 가장 유력하고 확실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제야 떠올린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다이무스 홀든에게는 가이드가 없다.
가문에서 붙여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센티넬에게 가이드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센티넬은 종종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이퍼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센티넬에게 맞는 가이드만 있다면 오히려 사이퍼보다 더 가치가 높았다. 가이드는 자신이 가이드인 줄도 모르고, 불안정한 센티넬을 통제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센티넬을 손에 넣고 주무르기 위해선 가이드를 목줄로 잡는 편이 쉬우니까. 다이무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가문에서 센티넬을 잃은 가이드를 붙여주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어태껏 그 누구도 주지 못한 안정을 찾아낸 다이무스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다. 차라리 6년 전, 벨져가 그렇게 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연합의 영웅이고, 자신은 홀든의 사람이자 헬리오스의 에이스다.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다이무스는 자조했다. 가이드는 센티넬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다.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자각이 없다.
기어이 찾기는 찾았으나 그말인즉슨 곧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고, 한 번 가이드가 주는 평화와 안식을 맛본 이상 그 무엇도 만족스럽지 않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 다이무스는 저를 마주하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를 가지려면, 가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협력관계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날, 막연히 꿈꿔온 운명을 만난 가슴이 두근거렸다.
뜨거운 물에 몸에 찌든 피곤이 노곤하게 녹아내린다. 가뜩이나 바쁜 월말을 보내고 나니 내일 있을 출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루이스는 우울한 내일을 생각하는 대신 어깨까지 푹 몸을 담궜다. 오늘은 꼭 겨울 옷을 내놓아야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옷을 꺼내야지 하는 것도 오늘내일하다보니 한 달이 다 갔다.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곤 하지만 반팔에 후드티로 버티긴 힘든 날씨였다. 씻고 나가서 옷부터 꺼내야지. 겨울옷을 어디에 정리해두었는지 생각하던 루이스는 토마스가 빌려준 목도리를 깜박 잊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돌려줘야지 해놓고는 할로윈이다 뭐다 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새로 사서 돌려줘야하나 아니면 그냥 다른 걸로 주는 게 나으려나. 똑같은 걸 찾으면 다행이지만, 괜히 엉뚱한 걸 사갔다가 토마스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곤란하다. 중요한 물건이었을 지도 모르고. 토마스라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사레를 치겠지만 어쨌거나 잃어버린 건 제 잘못이었다. 대체 정신을 어디다 놓고 사는 거지.
루이스는 바쁜 일상에 지친 제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걸려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문질러 털고 거울 앞에 섰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고 마주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잠을 좀 자야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어젯밤도 놓아주지 않고 기어이 침대에서 잠들지 못한 탓이 컸다.
정말이지, 그걸 끝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린 자신에 대한 자조가 몰려왔다. 아무리 단호하게 말을 해야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도 막상 그 앞에만 서면 무심코 예스맨이 되고 만다. 이제 적은 나이도 아닌데 좀 적당히 하면 안 되는 걸까.
루이스는 미간을 문지르며 시큰거리는 눈을 꿈벅였다. 끈질긴 요구와 협박과 투정 속에 이뤄진 동거 생활도 이제 한 달. 루이스는 물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털며 나란히 놓인 칫솔 두 개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문제라니까. 루이스는 머리를 털다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짧은 시간에 한숨을 몇 번 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그게 마냥 싫지는 않은 게 그도 자신도 사랑에 빠져 눈이 먼 게 분명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 제가 연인이 되고 동거마저 하게 되리라고. 같은 비누를 쓰고, 같은 샴푸를 쓰고, 같은 치약을 쓰고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드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은 루이스는 이미 집을 나간 그를 떠올렸다. 옷정리를 하고, 연합에 들러 토마스에게 사과한 뒤 목도리를 사러 나갈 생각을 하니 손끝이 간질거렸다.
똑같은 목도리 두 개를 내밀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벤트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같은 것을 공유하고 그렇게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에 서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은 행복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루이스는 욕실을 나와 방으로 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먹을 수 있게 만들어놓은 샌드위치와 유리잔에 따라놓은 오렌지 주스. 귀찮아서 식사를 거르고 나갈 걸 알았는지, 아니면 밤의 사과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몰라도 아침부터 준비하고 나갔을 그를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이스는 옆에 놓인 쪽지를 집어들었다.
[아침 거르지 말 것.]
아침식사라고 하기엔 민망한 시간이지만. 루이스는 머리를 말리는 대신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와삭 씹히는 양상추와 상큼한 토마토, 거기에 얇게 썬 햄에 계란과 감자도 으깨 넣은 샌드위치는 별 세 개짜리 식당에서 먹은 밥보다 맛있었다. 단숨에 한 조각을 먹어치우고, 다음 조각도 입에 넣은 것도 모자라 마지막 조각을 한 손에 든 루이스는 목도리는 어떤 색이 좋을까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집 안이라지만 맨 몸으로 오래 있기엔 날이 추웠다.
발밑이 훅 꺼져버리는 감각에 놀라 퍼득거린 것도 잠시, 벨져 홀든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악몽을 꾼 것처럼 개운하지가 않았다.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며칠째 벨져 홀든을 괴롭히는 꿈은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아보아도 이미 깬 꿈은 검게 물든 장면에 멈춘 채 흐르지 않고,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안타리우스를 추적하고 인식의 문을 찾아내 파괴하는 데 위험이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멍청이랑 자꾸 마주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기사단에서 보낸 정보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보다 신경을 거스르는 건 그들의 존재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그들은 좋은 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고 남자는 그걸 알면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로 바라보면 한 번쯤 돌아봐줄 법도 하건만 그녀는 매정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쪽에선 제법 유명인이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문이 제법 됐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났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안타리우스의 포인트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작 그들은 저를 못 알아본 데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연인이 뭔가를 발견한다 해도 이미 벨져가 다녀간 후라 상관없지만 그래도 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좋을 리 없었다.
벨져는 마른세수를 하며 어제 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벤치에 앉아 궁상을 떠는 남자의 얼굴은 전보다 더 수척해보였고, 한심하고 바보같았다. 멀쩡한 얼굴을 들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적의 요새 근처에서 빈틈을 보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쓰러뜨린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진 주제에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나부랭이에게 당하는 것 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기에 벨져는 어젯밤도 그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게 벌써 몇 주 째인지. 이렇게 꿈자리가 사나워진 것도 분명 그게 거슬려서인 게 분명했다. 차라리 빨리 이공간을 찾아서 사라져줬으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쉬울 리 없었다. 벨져는 거기까지 흘러간 생각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기사단과 정보통에게 도착한 편지들을 대충 읽고 정보들을 정리한 벨져는 편지들을 갈무리해 객실 금고에 던져놓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곧 하우스키핑 시간이니 나가줘야 청결이 유지되는 데다 호텔 방 안에만 있기엔 갑갑했다. 거울에 비친 벨져 홀든은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제 모습에 만족한 벨져는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바람도 선선히 부는 게 딱 좋은 날씨라 잠시 들른 카페의 이층 야외 테라스에 앉아 본 노을은 아름다웠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차와 샌드위치는 제법 먹어줄만 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고 한 잔 할 기분이었기에 적당히 펍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왁자지껄하게 노는 무리에 낄 생각도 없고, 벨져가 즐겨 마시는 좋은 술이 있을 리도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잠시 한 잔 하고 사라지면 그뿐. 벨져는 오늘 한 기사가 편지의 끄트머리에 오만한 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한 걸 떠올렸다. 마티니 한 잔을 주문하고 낡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벨져는 실소를 흘렸다. 오만하기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격에 맞는 이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 역시 격이 떨어지는 쪽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원형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기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착취당하며 속고 있는지도 모르고 술에 취하는 이들이었다. 더러는 그런 생각을 하는 벨져를 일컬어 사정도 모르는 귀한 귀족집 도련님이라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다르다.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특권을 누리는 게 바로 귀족이고, 술에 취해 시시덕거리는 일개 필부와 자신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검의 형제 기사단에 들어올 정도의 기사라는 자가 하는 간언의 수준이 그 꼴이라니,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텐더가 마티니를 내려놓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리던 벨져는 얼핏 스친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손등으로 이마를 지탱한 채 맥주를 들이키는 옆모습이 낯이 익었다. 바의 끝과 끝이라지만 그리 큰 펍도 아니었기에 그와 벨져 사이의 거리는 채 5미터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 입고 다니는 후드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올리는 바람에 주홍빛 조명 아래서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술을 넘기면서 목울대가 움직이고, 맥주병을 문 입술에서 흐른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둑한 펍 안에서도 얼굴이 제법 붉은 걸로 보아 꽤 마신 것 같았다. 더운지 후드를 넘기고 티셔츠를 펄럭이는데 게슴츠레 뜬 눈가가 빛에 반짝였다. 슬쩍 벌어진 입술 새로 새는 더운 숨결이 여기까지 닿는 것 같아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시켜놓은 마티니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칵테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겨우 루이스 따위를 넋을 잃고 바라본 게 자존심이 상했다. 한 모금 넘기자 싸하게 넘어가는 알콜에 정신이 들었다. 분명 제가 시킨 건 온더락이 아니었는데, 얼음이 녹아 진에 섞이는 게 영 껄끄러워 짜증이 났다. 바로 미간을 찌푸리자 바텐더가 다가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이봐, 혹시 그쪽?”
“치워라.”
대답할 가치도 없었지만 바텐더가 음흉한 눈으로 가리킨 건 분명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어느 멍청이였기에 벨져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바텐더는 움찔하더니 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 한 걸음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진엔 성긴 얼음이 조각나 물이 섞이고 있었고, 벨져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웨이터에게 손짓했다.
“너, 너. 이리로.”
“예, 말씀하시죠….”
빳빳한 지폐를 마티니 옆에 올리자마자 방금 전의 능글거림은 어디로 갔는지, 바로 굽신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벨져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펍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은 이미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 녀석, 얼마나 마신 거지.”
“여섯시였나, 일곱시였나 그쯤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마셨죠. 아무리 포터라지만 앉아서 마신 것만 해도 혼자서 열댓 병은 마셨을 겁니다.”
벨져는 바텐더의 대답에 인상을 썼다. 아무리 낮은 도수의 맥주라 해도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셨으면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시간상으론 저녁도 안 먹고 마셨을 게 뻔했다. 보기보다 술일 센 건지 아니면 홧김에 마시고 있는 건진 몰라도 지금의 루이스는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더 물이 섞이기 전에 마티니를 한 모금 넘긴 벨져는 흘긋 그를 살폈다. 턱을 괴고 상념에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것도, 뺨이 붉게 물든 것도 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시며 궁상을 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벨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저 자식 것까지. 이거면 충분하겠지.”
“헛, 물론입죠!”
“흥.”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 순간의 흥 때문에 싸구려 술로 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잡친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도 대신 내줬겠다, 그냥 그대로 나가서 가버리면 그만인데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해서 어쭙잖은 놈팽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든, 찬바람을 맞고 거리에서 얼어 죽든 객사하든 알 바 아니다.
바를 뒤로하고 나가려던 벨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신경이 쓰여서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뒤돌아선 벨져는 나올 때와 달리 척척 걸어가 축 쳐진 어깨를 잡아챘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미련하긴.”
“……벨져?”
“다 마셨으면 그만 하고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되묻는 루이스의 표정이 어딘차 서글퍼 벨져는 더 짜증이 났다.
“네 그 잘난 애인한테 가야할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벨져는 바로 애수에 차 깊어지는 루이스의 눈을 보고 아차 싶었다. 루이스란 사람이 애인을 몇 시간 동안이나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실 사람인가 답은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여긴 안타리우스의 요새 근처. 아무리 싸웠다 해도 두세 시간을 여자 혼자 보내게 둘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벨져가 표정을 굳히자 루이스는 미소인지 울상인지 모르게 입가를 씰룩였다. 아픔을 견디려 술을 마시는 그의 옆얼굴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손깍지를 긴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옆을 떠날 수 없는 건 이대로 두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루이스는 위험하다. 그동안 그를 지탱하던 한 기둥이 빠져나간 상실감이 냉정과 침착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적진에서 이렇게 취하게 만들었다. 멍청한 자식. 차였으면 얌전히 그 잘난 연합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단 말인가. 벨져는 아직 반절이 남은 병에 손을 뻗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만.”
“신경 꺼. 벨져 홀든. 어차피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멍청한 자식.”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고, 루이스는 실소를 흘렸다. 멍청하다는 말에 웃는 걸 보면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목이 한 손에 잡힐 정도로 마른데다 눈 밑이 검은 게 그동안 어지간히도 무리를 한 게 뻔했다.
“놔.”
“흥,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 주제에.”
루이스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먼 곳을 그리며 청승을 떠느니 적의를 품고 저를 향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벨져는 그를 도발하기 위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코웃음쳤다. 취한 루이스는 평소의 냉철함을 잃은 후였고, 내지른 주먹은 맨정신의 벨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윽…!”
“하, 미련하다!”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주먹을 한 손으로 잡고 뒤로 꺾자 루이스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펍 안은 시끄러웠고 바텐더는 벨져의 눈짓에 끼어들려하지 않았다. 루이스의 등 뒤에서 손목과 팔을 잡아 제압한 벨져는 루이스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눈앞에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잠시 머뭇거렸다. 저항할 생각도 않고 저를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는 다시 깊은 슬픔에 흐려져 벨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벨져는 루이스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취했다.”
“알아….”
“하, 정말이지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군.”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벨져는 미련한 남자를 놓아주었다. 가볍게 내치듯 놓았을 뿐인데 이미 술에 절어있던 루이스는 휘청이다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지 루이스는 의자를 잡고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낮게 신음했다. 그 볼썽사나운 모습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쯧, 한 번 차인 것 가지고 찔찔 대기는. 따라와라. 발목을 잡으면 바로 버릴거다.”
벨져의 퉁명스러운 말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슬리고 방해된다는 이유로 동행을 만들지 않던 벨져로선 제법 후한 제안이었음에도 루이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축 쳐진 채 이끄는 대로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맑아져있었지만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벨져의 푸른 눈과 루이스의 붉은 눈이 마주했다.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던 벨져는 한숨을 내쉬곤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말없이 벨져를 올려다보다 눈을 깜박였다. 펍 안은 어두웠으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건 선명했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벨져를 올려다보며 손을 맞잡았다. 벨져는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당기고, 그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