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재록본 수록용으로 썼던 벨져루이다무 디스토피아물
이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팔을 베어도, 다리를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어기적거리며 다가온다. 벨져는 오래 전에 들은 네크로멘서와 죽은 시체들의 얘기를 떠올렸다. 끝나지 않는 시체들의 밤. 그런 허무맹랑한 전설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랬다. 이대로라면, 당한다. 머리를 베어야 겨우 멈추는데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벨져는 한 발 물러섰다.
깨어나보니 폐허뿐인 낯선 도시, 거기에 베어도 베어도 달라붙는 적, 이미 한 차례 길을 헤맨 뒤라 퇴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한다. 벨져는 흉측하게 뼈를 드러내고도 달려드는 그것의 머리를 베었다. 단번에 베지 않으면. 벨져는 양손에 든 검으로 시체가 썩는 악취를 내는 그들을 죽였다. 죽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겐 차라리 죽음이야말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인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벨져는 혀를 찼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가. 검이, 박혀 빠지지 않았다. 얼마를 이렇게 쫓겼는지, 신체강화능력을 사용해도 역부족이었다. 벨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무식하게 높은 건물과, 거무죽죽한 하늘.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조건. 이게 혹시 질 나쁜 꿈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위에서 창문이 깨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당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귀가 멍멍한 총성이 울리더니 달려들던 흉악한 얼굴이 발치에 나뒹굴었다. 단 한 발의 총성. 구원과도 같은 소리에 벨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이어를 타고 내려오면서 터지는 총성에 맞춰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하나씩 쓰러졌다. 침착하고, 신중한 명중률이다. 검은색 일색으로 무장한 저격수는 벨져 앞에 착지했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벨져는 힘주어 검을 뽑았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벅지에 찬 총이 두 정, 허리춤에 하나, 군용 나이프에 기관총까지 갖추고 중무장을 한 채 큰 가방을 메고 있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멋쩍어져 한 마디했다.
“…사례하지.”
“이봐, 뛸 줄 알아?”
작게 인사를 말하자 흘긋, 뒤를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쳤다. 꼭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눈동자. 무례한 언사였으나 그 눈빛에 시선이 사로잡힌 벨져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면 뛰어!”
발을 움직이게 만드는 목소리에 따질 겨를도 없이 뛰었다. 귓가를 스치는 총성에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 목소리도, 눈빛도 어딘가 익숙했다. 불쾌하고 찝찝한 그 감각.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던 그 눈동자.
“아까운 총알을 낭비하게 하지 마, 토마스. 이봐, 이쪽.”
남자는 빠르게 골목을 돌며 뒤로 돌아 기관총을 쏘아댔다. 벨져는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을 달리며 흘긋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기관총 대신 안정적인 자세로 몇 발 더 발포하면서 오른쪽으로 돌라고 눈짓했다. 따라오는 발소리에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격자로 된 철창이 열렸다. 바로 팔만 뻗으면 다가올 정도로 앞까지 다가온 그것을, 총을 바꿔든 그가 쏘아 죽였다. 바로 앞에서 터지는 썩은 피. 벨져는 마침내 열린 문에서 저를 잡아끄는 손에 끌려가고, 그가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저기, 괜찮아요? 어디 물린 곳은?”
“물려…? 아니, 없다.”
“운이 좋았네요. 마침 총기점에 식료품을 전달해주고 오는 길이었거든요.”
마에스트로. 서류에 있는 사진으로 몇 번 본 게 고작인 청년의 얼굴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석을 동경해 한 달을 걸려 영국으로 건너와 지하연합에 들어갔다는 다른 얼음쟁이. 그가 살갑게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벨져는 뒤를 돌아봤다. 헬멧과 고글을 벗고 머리를 터는 그는 분명 제가 아는 그가 맞았다.
“…루이스…?”
“어, 루이스 씨를 아세요?”
“알다마다.”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지. 벨져는 이를 악물며 눈썹에 힘을 줬으나 루이스는 벨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문을 이중으로 닫고도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있었다.
“참,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전 토마스라고 해요. 토마스 스티븐슨.”
“벨져 홀든이다.”
“엑, 홀든?”
“그래.”
젊은 결정사가 난처한 듯 루이스를 바라봤다. 명백한 구원요청이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벽에 걸려있는 패드에 무언가를 입력하느라 바빴다.
“저기, 루이스씨….”
“총알 서른발짜리 전리품 치곤 꽤 짭짤하네. 뭐, 그것도 통신이 먹통이 아닐 때나 소용있는 일이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랑 똑같아. 이봐, 괜찮으면 들어.”
“너…!”
척척 다가온 루이스가 그때까지 매고 있던 가방을 턱 던졌다. 상당히 무거운 무게에 벨져는 가방의 끈을 잡으면서도 일부러 배를 노리고 던진 그를 쏘아봤다. 정작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옆에 있는 꼬맹이 자식이 안절부절 못하며 안색을 살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리곤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
“그새 총같은 거나 두르고, 이거 영웅 꼴이 말이 아니군. 이젠 이 몸까지 모른 척이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잘난 능력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이러고 있는 거지.”
“…하아. 토마스, 무시하고 데려가. 아무래도 약이라도 한 모양이다.”
“네, 네!”
얘기를 듣기는 커녕 사람 얼굴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더니 약쟁이 취급이라니. 벨져는 제게 다가오는 마에스트로를 밀어내고 루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대답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설명해. 밖에 득실거리는 저것들은 또 뭐고, 너는 또 왜…!”
소리치는 중에 팔이 잡히고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순식간에 벨져를 엎어매친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 주변을 털었다.
“일단 올라가서. 조금 진정하라고.”
벨져가 내던진 가방을 다시 짊어지고 둔중한 철문 앞에 선 루이스는 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그 신호에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이중 삼중으로 엄중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게 안타리우스의 본거지를 방불케 했다. 불만도 의문도 가득했지만 일단은 그의 말대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마에스트로가 다가와 속닥였다.
“루이스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예요?”
“뭐? 무슨 소리지?”
영웅을 동경한다는 주제에 2차 능력자 전쟁과 그를 영웅으로 만든 저를 모른다니. 연합엔 바보밖에 없는 건가.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 루이스씨는 얼마 전까지 용병이셨다고 하니까, 음. 아무래도 저같은 일반인은 잘 모르거든요. 이번 일도 그렇고….”
일반인?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결정 능력으로 영웅이 된 사내는 능력 대신 총을 든 용병이라 하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은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벨져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검이라니, 신기하네요.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확실히 총이나 포가 발달하긴 했지만, 홀든이니까.”
“하하, 그래도 확실히 이런 데서 일본도는 보기 드물죠.”
“토마스, 그만 떠들고 와서 이것 좀 밀어봐.”
“아, 네!”
토마스는 루이스와 함께 셔터를 밀어올렸다. 딱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만 열어 허리를 숙여 들어가는데, 더 올리면 될 것을 굳이 몸을 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밖보다도 어두컴컴한데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넓은 홀. 벨져는 주변을 둘러봤다. 루이스는 다시 셔터를 닫고 가지고 있던 라이트로 주변을 슥 훑었다. 적막한 공간에 세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한 번 둘러본 루이스는 라이트도 꺼버렸다. 어떻게든 공간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 했으나 잠시 스쳐간 불빛의 잔상에 눈이 적응하질 못했다.
“그쪽이 아니라 여기.”
다른 쪽 통로를 봐두려 했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헤맨다고 생각했는지 루이스가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 되도 않는 친절에 코웃음을 쳤으나 루이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바리케이드가 겹겹이 쳐진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루이스가 문을 열었다. 계단의 비상등에 의지해 걷던 벨져는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토마스, 모두에게 소개 부탁해. 난 가져다 놓고 씻으러 다녀올 테니까.”
“아, 네! 다녀오세요!”
루이스는 손을 흔들어보이곤 어둠 속으로 걸어 사라졌다. 토마스 스티븐슨과 단 둘이 된 벨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발소리만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저, 저기….”
“뭐냐.”
“따라오세요. 다들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면 기뻐할 거예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운이 좋았어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지? 저것들은 또 뭐고.”
사람 좋게 웃던 토마스 스티븐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보더니 갑자기 팔을 잡았다.
“저기, 잠시만요.”
“무슨 짓이냐!”
“잠시면 돼요.”
기어이 팔을 잡고 소매를 걷은 녀석은 팔꿈치 안쪽을 보고 나서야 팔을 놓았다. 그리곤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으로 보는데, 벨져로서는 도무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약…하는 거 아니죠?”
“아까부터 자꾸 약쟁이 취급을 하는데, 전혀 손대본 적 없다.”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토마스가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났다던가…?”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빤히 쳐다봤다. 토마스는 금방 백기를 들었다.
“그, 외 떠들썩했던 바이러스 있잖아요. 그게 퍼졌어요. 여긴 몇 안 되는 안전거점 중 하나구요. 다른 데랑 달리 번화가의 쇼핑몰이라 주변이 위험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생필품이 모자라진 않아요. 전기도 돌아가고.”
“바이러스?”
“네, 그 좀비 바이러스 있잖아요. 어딘가에서 연구진들이 백신을 개발중이라곤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아, 혹시 형제가 있지 않나요?”
“…있다.”
토마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게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알겠네요. 얼른 가요! ”
뭐가 그리 기쁜지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혹시 여기에 다이무스나 이글이 있는 건가. 연합의 인물이니 이글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디 갖다 던져놔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소식을 들으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능력은 어떻게 된 거지?”
“네?”
“자랑하는 얼음 감옥 말이다.”
“얼음이요? 식료품을 최대한 한군데 몰아넣느라 얼음은 없어요.”
마치 능력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듯한 말투에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둘러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가 동경하는 영웅이 저를 한 번 이겼다 해도 그 아래 있는 녀석까지 무시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검을 빼들지 않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는 위화감, 믿을 거라곤 그 잘난 결정능력밖에 없는 주제에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 불길한 예감이 벨져의 발목을 휘감고 올라왔다.
“아, 혹시 아까 루이스씨가 쏜 총에 맞기라도 했어요?”
“…아니다. 그보단 안내를 부탁하지.”
“네, 바로 여기예요.”
쇼핑몰이라고 하는 건 백화점 같은 것인지 구역별로 물건이 늘어서있었다. 잔뜩 어질러진 데다 군데 군데 비어있는 게 한차례 소동에 털린 것 같긴 하지만. 조금 더 걸어가니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왔어요!”
“토마스!”
“토마스가 왔어!”
“토마스 오빠!”
“뭐야, 누구야?”
“누구랑 같이 왔는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금방 시끄러워졌다. 수가 적긴 했지만 대충 보기에 연합의 능력자들 몇과, 기타 세력의 능력자 몇, 그리고 회사 쪽의 인물도 몇 섞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동생 녀석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악에 물들어 한 달음에 달려오는 녀석의 표정이 꼭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다가와 성난 표정으로 주먹을 날리며 무슨 소린지 모를 욕설을 지껄이기 전까지, 벨져는 제게 펼쳐진 지옥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장비를 벗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 덕에 몸을 움직이느라 몸은 땀범벅인 데다 녀석들의 썩은 피냄새가 배인 옷을 입고 있자니 찝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물은 곧 자원. 최대한 물을 아껴가며 샤워를 마친 루이스는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고 피에 젖은 장비엔 미리 만들어둔 소독제를 뿌렸다. 가급적 물을 쓸 일이 있다면 한 번에 신속하게 하는 편이 좋다. 근 십 년간 몸에 익힌 생존지식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데 퍽 유용했다.
뒷처리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루이스는 이 층에 유일하게 샤워룸이 갖춰진 직원실을 나왔다. 이 역시 전투인원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였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그래도 임무를 완수한 데다, 생존자를 한 명 더 데려왔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였다. 관리실 앞에서 걸음은 멈춘 루이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붙어있는 철문에 대고 정중하게 노크했다.
대답 대신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왔나.”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로군.”
“교환 임무는 완료했습니다. 거기에 생존자를 한 명 구출했고요. 내역은 리스트와 대조해보시면 됩니다.”
“수고했다. 가서 쉬도록.”
“다이무스.”
루이스는 딱딱하게 대답하는 그를 불러세웠다. 아직 작동하는 CCTV와 그 통제실에 있는 그라면 들어올 때부터 알았을 것이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차림으로 등을 돌리고 선 그, 그리고 그 옆에 기대어 둔 기다란 검. 루이스는 한 걸음 다가갔다.
“읏…!”
돌아선 그는 루이스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더운 숨이 샜다. 혀를 얽고, 몸을 더듬거리다 보니 벽에 부딪쳤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루이스.”
“후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다이무스는 애틋한 눈으로 팔 안의 남자를 바라봤다.
“녀석 때문이냐.”
“…다이무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전,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네 책임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군.”
루이스는 다시금 떠오르는 나쁜 기억에 쓰게 웃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팔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눈을 맞추려 했으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리석은 남자였다. 버림받고도 주인을 찾아가려는 미련함이 야속했다.
“루이스. 다시 생각해 봐라.”
“노력해보겠습니다.”
“두 번째가 없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뼈아픈 충고였다. 루이스는 제 팔을 아프도록 잡은 그의 팔을 잡았다. 이것이 남자의 질투인지, 아니면 진심어린 충고인지는 모르나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괴로웠다. 루이스는 제 목줄을 잡았던 남자를 떠올리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황폐화된 도시와 파멸한 인류. 그 속에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해봐야 지옥 속의 시한부 인생에 불과했다. 루이스는 저를 바라보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질 수가 있을까요.”
“곧 비가 내릴 거다.”
“그리고 눈이 내리겠죠. 저들이 썩어 없어지는 것과 우리가 저들에게 먹히는 것, 어느 게 먼저일까요.”
“루이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엄한 목소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팔을 잡아 떼자 다이무스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휑하게 드러난 목언저리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루이스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마주 안으려 손을 뻗다가 멈췄다. 역시, 아직은 이 남자를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그 녀석은 널 버릴 거다.”
“…그럴 지도 모르죠.”
따스한 온기를 밀어내고 차가운 철문에 손바닥을 댄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를 버린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제가 얼마나 바보같은지도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게 저를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루이스는 무겁고 차가운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으로 걸어가며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여전히,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루이] 선물 (0) | 2015.11.01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0) | 2015.10.28 |
[다이루이] 그 해 겨울 (0) | 2015.10.25 |
[벨져루이] I'm Fine (0) | 2015.10.24 |
[벨져루이토마] 어느 짝사랑. (0) | 2015.10.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그 해 겨울
2013년도 1월 앤솔에 냈던 원고인데 다시 보니 꽤 마음에 들어서 일부만 공개해봅니다 :3
모티브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시리즈.
어? 잠깐.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한창 원고지를 써내려가는 중에 트릭에 허점이 보인 것 같아 손을 멈추었다. 앞부분을 다시 보려는데 옆에 둔 원고지뭉치가 없었다. 어어, 분명 여기 뒀는데? 하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옆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한 번 집중하면 옆에 누가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옆에 앉은 사람 때문에 루이스는 하마터면 강의 중이라는 것도 잊고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루이스는 옆에 앉은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
루이스가 알고 있는 그는, 완벽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수석으로 입학해 과탑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좋은 머리에, 잘 나가는 집안, 잘 생긴 외모. 사람들로 하여금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는 주사위를 여섯 번 굴려도 여섯 번 모두 6을 나오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주름 하나 없는 연한 하늘색의 와이셔츠, 단정한 감색 재킷. 해질녘의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시계. 그 모두가 오로지 그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완벽했다.
루이스는 언젠가 이글이 제 형은 숨 막힐 정도의 완벽주의자라고 한 것을 떠올렸다. 집 안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다던 말을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제 글을 읽고 있다. 그것도 자기 바로 앞에서.
초조함에 책상을 두드리다가, 손톱을 입에 물었다가 이내 자신의 행동이 불안해하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깍지를 끼고 얌전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엔 다리를 떨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해도 뼈마디가 굵은 그의 손에서 제 원고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저절로 눈이 다이무스의 손을 향했다. 흘긋거리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제 담당 편집자인 고혹적인 미녀를 떠올렸다. 수많은 신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앞에서도 루이스는 이렇게 떨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는 소설에 쓰이는 스토리와 트릭을 두고 말다툼을 벌이긴 하지만, 4살 연상의 그녀는 언제나 좋은 파트너였다.
애초에 루이스를 등단시킨 것은 오랜 친구인 앤지의 도움이 컸다. 고등학교 동창이던 그녀는 알고 보니 대기업 수장의 딸로, 앤지는 아버지의 계열사중 하나인 출판사에 제 소설을 가지고 갔다.
당시 매출이 저조했던 지라 모험삼아 낸 루이스의 소설은 예상 외로 히트를 쳤고, 루이스는 도서출판 ㈜연합의 영웅이라 불릴 정도가 되어버렸다. 앤지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루이스는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루이스가 쓸데없이 과거회상을 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때, 강의실이 웅성거려 고개를 드니 교수님과 학생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때마침 다이무스의 손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겨우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네?”
다이무스의 회색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정면으로 시선을 받고 있자니 와, 정말 잘생겼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어어...그게...”
“아직인가.”
아뇨. 당신 때문에 생각해둔 게 지금 전부 날아갔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루이스는 애써 참았다. 아직 강의실 안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다이무스 홀든을 향하고 있었다.
하긴, 얼굴도 잘 생겼겠다. 집안도 좋겠다, 유능한 인재라 졸업 시즌에 앞서 스카우터들이 모셔가려 한다는 소문도 달고 다니는 그다. 굳이 여자가 아니라도 그의 옆에 붙어 뭐라도 해볼 생각으로 달라붙는 사람이 많았다지만, 정작 다이무스는 그런 시선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게 타고난 카리스마와 여유라는 걸까. 이런 사람이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구나, 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간 있나.”
“네?”
“아까부터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루이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강의인 범죄심리학은 목요일 마지막 강의였다. 마감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고, 오늘은 늘 저를 따라다니는 토마스도 대타 알바가 들어왔다며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아갔기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 강의인데...”
“그렇군. 저녁은 먹었나?”
“아뇨.”
“그럼 내가 사지. 짐 챙겨라.”
멍하니 있다가 다이무스가 건네는 원고지 뭉치를 받아들고 퍼뜩 빈 원고지들과 만년필을 정리해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먼저 성큼성큼 강의실을 나서는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저기, 다이무스 홀든씨?”
“뭐지.”
“저 아세요?”
분명 같은 강의를 듣긴 하지만 분명 그와 루이스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당연하게 루이스에게 반말을 했다. 아무리 루이스가 나이 21를 먹고도 아직도 술을 사러 가면 신분증 검사를 당하는 동안의 소유자라도, 보통이라면 존대를 했을 것이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과 동기인 이글이 집에서 제 얘기를 하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과 얼굴을 매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이글은 새벽 2~3시까지 클럽을 쏘다니거나 술 먹으러 가고 다음날 오후 강의에나 간신히 얼굴을 내미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알 일은 없을 텐데.
“.....”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알 만큼은 알고 있다. 동생 둘이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벨져도 홀든이었지. 문득 그를 떠올렸다. 1학년 때, 멋모르고 앤지의 손에 이끌려 토론대회에 나섰다가 마주친 오만한 남자. 단순히 경력을 쌓기 위해 참가한 벨져는 당연히 우승을 예상했지만, 결승전에서 루이스와 논쟁을 벌이고 결국 패배했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벨져는 루이스만 보면 이를 갈고 있었다.
전파를 타고 방송까지 됐으니, 동생을 보려고 TV를 봤다면 충분히 제 얼굴을 알만했다. 한 번 본 사람을 기억할 정도라면 그의 기억력이 좋거나, 아니면 주위의 누구-아마도 벨져-가 계속 떠오르게 했겠지.
그렇게 납득하고 나니 괜한 말을 꺼냈단 생각에 멋쩍어져 어깨에 맨 크로스백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애초에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기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는데. 공연히 맥이 빠져버렸다.
자신을 잘 따르는 토마스는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로 루이스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곤 했지만, 루이스의 성적은 겨우 중위권을 유지하는 정도고 딱히 학과 활동이나 다른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루이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로서도 아직 부족하고.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생각을 하는 사이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 뛰었다. 그 바람에 후드가 벗겨지고 시월의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로 옆도, 뒤도 아닌 애매한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 걸었다.
어색함만 감도는 침묵 속에서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입술을 핥았다. 튼 곳이 있었는지 따끔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단편집 마감을 하고 나서 급하게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마치느라 제대로 침대에 들어가 잔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으니, 입술이 이렇게 되는 거야 당연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어...딱히 가리는 건 없는데요.”
“그렇군.”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어왔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니 수긍하는 것으로 대화가 끊겼다. 그런데 담백하고 간결한 그의 화법은 이상하게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일까.
그런데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마감과 과제에 치여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체육대회 때문에 거리에 형형색색의 학과 잠바를 입은 학생들이 가득했다. 새삼 이런 날 강의를 풀로 하고 과제를 걷어간 스타이거 교수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불같은 금요일 저녁. 학교 언덕을 내려가 봐야 클럽과 술집뿐이니 그냥 간단하게 먹자는 제안에 다이무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강의실을 나온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거리에 화려한 조명이 켜질 무렵에야 겨우 분식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직장을 은퇴한 선배님이 차린 분식집은 값싸고 양 많고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직접 운영하는 곳의 가게 이름이 왜 엄마 손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한 번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는 말도 돌았다.
그렇지만, 다이무스 홀든과 분식집이라니.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좁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시키는 걸 보고 있자니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즐거워 보이는군.”
“아...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사과라면 오히려 내가 해야겠지.”
뭐에 사과한다는 걸까, 하는 순간 불연 듯 다시 고개를 드는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고 나니 다이무스의 시선이 곧장 루이스에게 꽂혔다. 피할 수도 없어 따라 둔 물만 들이켰다.
“흥미롭더군.”
“...감사합니다.”
루이스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팬래터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체크하곤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트리비아의 회유와 협박에도 나서기 싫다며 일관했던 루이스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지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다.”
잠깐, 앞뒤를 다 잘라먹는 직설적인 화법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뭐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다이무스는 아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수학과 조교인가?”
아, 들켰다. 망연해지는 기분에 어색하게 웃었다. 루이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다이무스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스토커는 독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가짜 범인일 테지. 스토커라면 일부러 가면을 놓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그녀를 납치한 것까지는 스토커의 짓인가?”
“계속 하세요.”
눈앞의 남자는 정확히 내용을 짚었고,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계속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어디까지 답을 낸 걸까하는 생각에 조금 두근거렸다. 아니, 엄청 두근거렸다.
“여자는 독신에 술집 종업원이었다. 교수인 연인을 제외하면 딱히 친한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그 연인에게 연정을 품은 조교가 있다. 더 볼 것도 없는 치정극이더군.”
범인과 동기. 추리소설의 3요소 중 두 가지를 풀어냈으니 마지막으로 트릭이 남았다. 모름지기 추리소설엔 이 셋이 고루 섞여야 한다는 것이 루이스의 지론이었다. 하나라도 빠지면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
거침없이 말을 잇던 다이무스가 입을 닫았다.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행동이 그가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트릭에 대한 답을 내지 않았다. 애초에 트릭에 허점을 느끼고 펜을 멈춘 루이스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완벽한 사람의 표본인 다이무스 홀든이라도, 단번에 간파당하면 작가의 이름이 울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천천히 턱을 괬다. 조금 전까지의 긴장이 다 거짓말이라는 듯 여유를 가장하고, 슬쩍 미소까지 띠웠다.
“그리고?”
다이무스는 돌변한 루이스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 여유를 가장하고 경계하며 떠보고 있다. 루이스에겐 가장 강력하고 비밀스러운 패가 하나 남아있었고, 다이무스는 아직 그 패를 뒤집을 수를 찾지 못한 듯 했다.
“...그 밀실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읽는 사람이 풀어야죠.”
다이무스의 손가락이 나무 재질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지만 그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나는 소리만 또렷이 들렸다. 다이무스가 손가락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당돌한 면이 있군.”
“절 잘 모르시나 보네요.”
다이무스의 눈매가 순간 부드러워졌다. 아,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저도 모르게 손은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기분이 묘했다. 홈즈를 만난 모리아티의 기분이 이런 거 아닐까. 호적수를 갖는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무슨 문제를 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푼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누가 말했던가, 범죄자와 탐정 사이는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묘한 유대감과 긴장이 둘을 아주 가까운 거리의 평행선이 되어 달리게 한다.
오싹할 정도의 흥분이 루이스의 몸 안에서 휘몰아쳤다.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기분 좋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도 그렇군. 그럼,”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넉살좋게 웃으며 양 손에 음식을 들고 온 주인 아저씨가 음식을 상 위에 척척 차리면서 다이무스의 말이 끊겼다. 맥이 탁 풀리는 동시에 그냥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수저통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건넸다.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선입관에 사로잡혀버렸던 건지.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좋았다. 무뚝뚝한 건 사실이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이 말하는 것처럼 꽉 막힌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지만, 그와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앤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을 때랑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 더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막상 김이 하얗게 오르는 음식을 눈앞에 두니 식욕이 돌아 짧게 잘 먹겠다고 말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확 깨져버린 분위기에, 따듯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도 영 아니다싶어 조용히 먹기만 했다. 다이무스역시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다 먹고 일어서서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계산하는 다이무스를 두고 먼저 가게 문을 밀고 나서는데 바깥 날씨가 제법 추워 후드를 뒤집어썼다. 거리의 나무들이 떨군 잎들이 바싹 말라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걸 보니 새삼 올해 가을이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처연해져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엔 유독 보름달이 크고 밝았다.
“달이 밝군.”
딸그랑- 풍경 소리와 함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후드 짚업의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도 않고 뒤돌아서니 다이무스가 다가와 덮어쓴 후드를 벗겨냈다.
“이게 훨씬 보기 좋다.”
찬바람이 드러난 목덜미를 스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후드를 썼다. 루이스가 집을 나설 때만해도 해가 짱짱한 가을 날씨였기에 후드 짚업 안은 반팔 티 한 장 뿐이었다.
“전 이게 편해요.”
물론 후드를 쓰고 있으면 따뜻하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후드를 쓰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언제부터 후드를 쓰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언제든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동굴과도 같았다. 혹시 언짢아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안색을 살피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너무 포커페이스라 읽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잘 먹었습니다.”
“그래.”
딱히 더 생각나는 말이 없어 으레 하는 감사 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이무스는 다시 앞장 서 걷기 시작했고, 어차피 역으로 가는 방향이었기에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여전히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애매했다.
그의 뒤도, 옆도 아닌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다이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걸음걸이에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꼿꼿하니 바른 자세로 걸었다.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것만큼 당당하지만 그보다 진중하고, 결코 뽐내지는 않는다. 그의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여유가 잘 생긴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문득 다음 작품엔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도 이야기 거리로 어떻게 만들어 볼 수 없을까를 고민하는 게 글을 쓰는 이에겐 습관이나 다름없는 법.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있자니 괜히 손이 근질거렸다.
잘 생긴 얼굴에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고, 두뇌명석하기까지 한 좋은 집안의 장남. 만능형 캐릭터는 식상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걷는데도 이상하게 다이무스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학교 골목거리에서 대로로 나오니 사람들이 즐비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따금 인파에 치일 때면 뒤를 흘긋 보며 걸음을 늦춰주었다. 딱히 더 할 말도 없다면 그냥 밥 먹고 간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훌쩍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을, 그의 작은 배려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까지 5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그렇게 걸었다. 이상하게 그 5분은 긴 것 같기도 했고 짧은 것 같기도 했다.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것 없이 미묘하고 애매한 데, 간질거리는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잘 들어가라.”
“어, 다이무스씨는요?”
“차 가지고 왔다.”
잠깐, 지금 뭐라는 거야? 차 가지고 왔다고? 근데 왜 여기 있어요? 지금 나 데려다 준 거예요? 라고 묻고 싶었는데 입에선 이미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만 나왔다.
“네?”
“그럼 이만 가보지. 늦었으니 조심해서 들어가라.”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본 다이무스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의 등을 눈으로 쫓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역시 사람이 많았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아까 하던 구상을 잇기 시작했다. 무겁고 날카로운 검 같은 남자. 배경은 현대보단 근대로, 자식이 없는 고령의 괴짜 노인이 지인 몇을 저택에 초대해 신비의 액자를 걸고 추리 대결을 시작한다.
초대받은 사람은 총 다섯. 아름다운 여배우, 세도가 집안의 장녀, 노인의 주치의, 참석하지 못한 기업가의 대신으로 온 여비서, 마지막으로 주인공과 그의 친구.
머릿속으로 대강의 배경을 잡고,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1% 남았다는 경고창이 떠서 손가락을 멈췄을 땐 이미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세 정거장이나 지나친 후였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0) | 2015.10.28 |
---|---|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0) | 2015.10.25 |
[벨져루이] I'm Fine (0) | 2015.10.24 |
[벨져루이토마] 어느 짝사랑. (0) | 2015.10.23 |
[다이루이] (0) | 2015.10.14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I'm Fine
노래 듣다가 셀프전력 60분 해보앗슴니다
※ 루이스 사망 소재 주의 ※
너를 만났다. 정말 오랜만인데. 나는 술에 취해있었고 너는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말갛게 웃으며 서있었다. 나는 네게 다가가 네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너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왜 이러고 있어.”
“나쁜 새끼. ”
나는 네게서 나는 비누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술에 취해서 제대로 말한 건지 아니면 생각을 한 건지 알수없었지만 너를 놓치기 싫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다정했다.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이 행복했던 그 시간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날 거면 사랑하지 말지. 사랑이란 독과도 같았다. 나는 네가 없는 현실을 살아야했고, 너는 나를 떠나 모두의 영웅이 되었다. 나는 널 내 옆에 붙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가끔은 그림자속에서 그녀가 튀어나와 내게 안타까운 미소를 짓는 것 같았고, 널 갈갈이 찣어놓았던 그녀 역시 나를 비웃었다. 너는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손을 뻗어보아도 닿지 않을 허상을 사랑한 것이라 속삭였다.
나는 그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너와 싸운 걸 후회했다. 마주치지 말 걸 그랬다.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했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 비참해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살 수밖에 없다. 네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네가 희생해서 일구어낸 평화니까. 난 그걸 지킬수밖에. 그러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를 잊어버리고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 그저 다시 한 번 그 말간 미소를 볼 수 있길 기도했다.
그리하여 내 삶이 다하는 그날 네가 문을 열고 다가와 나를 이끌어주기를. 고결한 희생 끝에 영웅으로 잠든 네 곁에 가기위해 내가 해야할 일이 많았다. 네 후배는 자랑스러워할만한 녀석이 됐다. 안심해. 연합의 시끄러운 꼬맹이들도 이제는 꽤 자라서, 그때의 철부지 같지가 않아.
“그렇구나.”
루이스는 꿈에 그리던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 내가 이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영원히 모를 거야.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대답이 돌아왔다. 남의 생각은 훤히 들여다보면서 자기 속내는 하나도 내놓지 않는 건 어딜 봐도 불공평하다. 끝까지 비겁하고 치사한 자식 같으니.
“넌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으니까. 이해해줘. 너도 그렇고, 사람들은 언제나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법이거든.”
“넌 정말 둘도 없는 나쁜 자식이지.”
“그래. 그래서 원망해?”
“그래.”
“그렇구나.”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지마. 그래봤자 다시 사라질 허상주제에.”
“잠시 내려와서 인사를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해줘. 여기까지 와서 싸우기 싫다.”
“...정말, 너는....”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눈을 감고 팔에 안은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기억 속의 감촉 그대로라 더 원망스러웠다. 내 기억 속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네가 미치도록 보고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놓치기 싫었다. 술에 취해 빚어낸 허상이든, 정말로 그녀석이 내려와 인사를 하는 거든. 벨져는 이 순간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사랑해.”
이 한마디에 차가운 환상이 녹아내릴 걸 알면서도 벨져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응. 나도.”
“널 사랑해.”
하지만 말해도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고 한 마디 말로 잡기엔 네가 짊어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냥 지나쳤겠지.”
“우리가 만나지 못할 거라고?”
“그래.”
“너, 그말 잘 기억해둬라.”
“왜?”
“내가 찾아낼거니까. 내가. 이 벨져 홀든이.”
그 말에 잘만 떠들어대던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숨을 집어삼키고 잠시 말을 고르는 그 버릇까지 너는 여전했다. 모두가 변하는 이 시간속에 오로지 너만이 그대로였다. 작게, 피식 웃는 소리에 벨져는 입술을 물었다. 트리거를 당긴 이상 이 나약하고 아름다운 환상은 곧 손 안의 눈송이처럼 아린 통증만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끝까지 제게 가혹한 녀석이었다.
“...여전히 너답구나. 멋져.”
“그러니까 대답해. 내가 찾아내면 넌 나를 사랑하는거야. 알겠어?”
“그래. 그럴게. 어떻게 그러지 않겠어.”
“그리고 내 옆을 떠나지마. 먼저 갈 생각따위 하지도 마.”
“알겠어. 약속할게.”
“지켜라.”
나는 일부러 끝까지 너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웃고 있으리란 걸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다. 그 미련도 후회도 없는 개운한 미소를 보면, 이게 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까봐. 네가 마지막에 남긴 노트 그대로. 내게 남긴 유언 그대로 너를 잊고 앞만 보며 행복하게 살다가 혹시라도 너를 잊게 될까봐.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그건 약속이었다. 행복하기로. 앞만 보기로. 나는 너와 약속했으니까. 비록 죽기보다 싫은 약속이지만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가끔 네 생각에 무너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날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너라는 사실에 다시 안도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극인가 싶지만.
“루이스.”
“다음 꿈에 만나자.”
“...그래.”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거리가 보였다. 네가 없는 거리. 네가 없는 황혼의 도시. 그래도 나는 네가 없는 오늘을 살아내고 있어.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0) | 2015.10.25 |
---|---|
[다이루이] 그 해 겨울 (0) | 2015.10.25 |
[벨져루이토마] 어느 짝사랑. (0) | 2015.10.23 |
[다이루이] (0) | 2015.10.14 |
[다이ts루이티엔] Another. (0) | 2015.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