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설립된지 17년. 윌라드 크루그먼은 명왕 헨리 밀러의 사택으로 가는 차 안에서 넥타이를 고쳐맸다. 검은 정장은 갓 스물이 된 청년에게 딱 맞아떨어졌다. 검은색 일색의 정장은 상복으로 맞춘 것이었다.
바로 어제 명왕 헨리 밀러 3세의 아내가 죽었다. 윌라드는 죽은 사모님을 떠올렸다. 원래는 결혼도 하지 않으려던 명왕이었으나 봄같은 사랑엔 장사가 없었다. 저와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그녀는 햇살 같은 여자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명왕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단박에 알 수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린 아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죽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세 번의 유산 끝에 어렵사리 얻은 아들은 이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였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아이가 어머니를 똑닮았다고들 했다. 명왕 헨리 밀러의 유일한 아들, 헬리오스의 적법한 후계자. 그런 아이를 굳이 제게 맡기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슬픔에 겨워 이성을 놓는 인물이 절대 아니다. 명왕은 아직도 제게 자질을 시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윌라드는 간부들이 능력의 개발을 위해 시도한 고난과 시련의 영향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짚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운전수가 차를 세웠다.
과연, 헨리 밀러의 사택은 그 경비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윌라드는 마중 나온 집사와 인사를 나누고 그의 뒤를 따랐다. 사모님과 포대기에 싸인 아기는 본 적 있지만, 이런 식으로 단 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윌라드는 집사가 안내해준 아이의 방 앞에 섰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자 어린아이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움찔, 침대 위에서 움츠러드는 작은 등과 푸른 머리카락이 단연 시선을 끌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낯설다. 윌라드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윌라드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였더라. 생각하며 침대에 앉자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동그란 이마와 붉은 눈동자, 아이답지 않게 오똑한 코며 예쁜 입술이 말 그대로 제 어머니를 똑닮은 아이였다.
낯을 많이 가린다고 한 것을 떠올린 윌라드는 경계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다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장갑을 낀 손이 문제였던 걸까. 윌라드는 장갑을 벗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입을 앙 다문 채 경계할 뿐이었다. 윌라드는 잠시 눈을 맞추다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쓰다듬자 아이는 울음을 참는 듯 울상을 지었다.
이게 맞는 걸까. 윌라드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머뭇거리다 작은 몸을 이불 채로 안아 쓰다듬고 토닥이자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이의 몸에서 나는 분냄새가 윌라드를 난처하게 했다. 윌라드는 그제서야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루이스 밀러. 그것이 바로 아이의 이름이었다.
* * *
다이무스는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다. 포트레너드로 가는 마지막 기차의 1등칸에 올라 모자를 벗은 뒤 지친 몸을 쿠션에 기댔다. 거래를 마치고 쉬지도 못한 지라 심신이 고단했다. 이 시간 포트레너드행 기차엔 사람이 없다는 게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됐다. 오늘만큼은 귀찮은 동행자 없이 홀로 한 칸을 차지하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른세수를 하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다이무스의 1등칸 문이 열렸다. 편하게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나. 역시 조금 더 들이더라도 한 칸을 전부 빌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다이무스는 폐가 되는 커플이나, 여성,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고개를 들었다.
“좋은 밤입니다.”
문을 연 사람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평범한 것도 같으면서 다시 돌아보게 되는 앳된 얼굴과, 학생 같으면서도 차분한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 곱상한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는 수더분했지만, 멀끔한 청년이란 건 변함이 없었다. 그는 옷을 정리하며 역방향 의자에 앉아 작은 가방을 내려놓고 다이무스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았다. 다이무스는 그의 긴 속눈썹이 불빛 아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걸 보다 눈을 돌렸다. 실례가 되는 행동을 해서야 신사라 할 수 없다.
아직 수염도 나지 않았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다이무스는 적막 속에 괜히 한 번 시계를 꺼내보았다. 이 시간에 능력자들의 도시로 가는 청년이라. 그렇다는 것은 그 역시 사이퍼일 가능성이 높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그리고 신경을 끄는 남자 때문에 다이무스는 눈을 떴다. 다이무스의 검은 벨벳으로 마감된 의자에 기대여 있었다.
다이무스는 다리를 꼬았다. 긴 다리가 둘 사이에 펼쳐졌다 접혔다.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외모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는 회사의 어린 물능력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호락호락하게 당할 다이무스가 아니지만, 남자가 들어오는 순간 다이무스의 휴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이무스는 어쩔 수 없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피곤해보이시는데 조금 쉬시는 건은 어떤지요, 미스터.”
서류를 보려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이무스는 활자에서 시선을 올렸다.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사르륵 그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예쁜 눈이다. 다이무스는 조악한 빛 아래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로.”
“집으로 가려고요.”
남자는 빙긋 웃었다. 소탈하면서도 온화한 그 분위기에 다이무스는 그가 중상류층의 젠트리겠거니 했다. 세워둔 검에 대해 언급은커녕 호기심이나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 상대는 드물다. 은발에 얼굴에 난 십자흉터와 검.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제 정체를 알 법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그러한 분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남자는 그 역시 잠을 자지 않기로 했는지 가방에서 얇은 포켓북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봐도 전장에 설 만한 사람이 아니다. 기껏해야 책이나 만지다 그림을 걸기 위해 망치를 드는 것이 전부인 평범한 사람. 아무리 잘 감춘다 해도 그 살벌한 경험을 한 이에게서는 티가 나기 마련인데, 눈앞의 남자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꼭 지금처럼, 책을 읽는 게 천직인 듯한 얼굴이었다. 귀족들이 가지는 오만이나 거드름같은 것 역시 보이질 않는다. 남자는 좋은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란 청년인 듯 했다. 책을 든 손가락도 남자가 험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증명하듯 희고 가늘었다.
다이무스는 남자의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쳐다보는 것은 실례다. 피곤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남자가 제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목 안쪽으로 낭패가 섞인 한숨을 삼켰다.
잠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던 다이무스는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에 깨 번쩍 눈을 떴다. 오른발이 얼얼했다. 남자는 어느새 잠들어있었고, 그가 읽고 있던 책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선잠을 깨운 것은 손에서 떨어진 책인듯 했다.
키츠의 시집. 다이무스는 책을 집어들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토끼풀꽃을 말려 만든 책갈피라니. 앙증맞은 풀꽃을 다시 끼워놓고 고개를 들자 책주인의 자는 얼굴이 들어왔다.
처음 볼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몇 번을 봐도 미려한 용모다. 남자의 자는 얼굴엔 미소가 걷혀 언뜻 서늘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감상이 다이무스의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남자를 꽃에 비유해 무엇하랴마는, 눈앞의 남자는 그가 책 속에 끼워놓은 풀꽃을 무척 닮아있었다.
작고 여린, 하얀 풀꽃. 그래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손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건드리면 녹아 사라질 것만 같은 눈송이가 손에 닿기 전의 두근거림. 손끝이 그의 푸르스름한 머리카락에 닿으려는 순간, 달리던 열차가 멈췄다. 울리는 경적소리에 다이무스는 헛기침을 하며 남자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천천히 열리는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남자는 눈을 부비며 하품을 했다.
“여기.”
“아, 감사합니다.”
남자는 책을 받아들곤 곧장 가방에 넣었다. 얼마를 잤는지, 눈이 반쯤 감겨 있다가 객실을 나오며 비틀거렸다. 다이무스는 그가 넘어지기 전에 팔을 잡았다. 남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세게 잡은 것 같아 손을 놓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였다.
또렷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다이무스의 눈을 사로잡았으나 그는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새벽의 역 안에는 당연하게도 사람이 없었다. 싸늘한 밤공기에 다이무스는 코트 깃을 여몄다. 남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마중와줄 이를 찾는 것인지. 다이무스는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목이 유독 희었다. 여즉 학생 같아 보이는 외모 때문에, 맏형의 책임감이 인 것인지 아니면 순진한 호의가 마음에 남아서인지는 모르나 다이무스는 그에게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밤의 포트레너드는 위험한 곳이라 더더욱. 그렇게 그를 따라 역을 나서는데 남자가 멈춰서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다이무스의 걸음도 따라 멈췄다.
“윌라드!”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련님.”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향하는 곳엔 다이무스가 익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윌라드 크루그먼. 헬리오스의 무역이사인 그가 어째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다이무스는 그가 남자를 도련님이라 부른 것을 떠올렸다. 도련님. 과연 이 세상에 윌라드 크루그먼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이무스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지 말라니까요. 오랜만인데 이러기에요?”
장난기가 섞인 그 목소리에 윌라드가 미소를 머금더니 남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 마구 헝클어뜨렸다. 남자는 웃으며 하지 말라고 피하고, 다시 눈을 부비더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이 시간에 따로 차도 없을 텐데 동승하시겠습니까, 홀든 경.”
“......기꺼이.”
다이무스는 검을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그는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가 보인 엷은 미소와 여유의 근원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완전히 놀아난 꼴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요. 루이스. 루이스 밀러입니다.”
그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마냥 따스할 것만 같던 손이 서늘했다.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그의 미소에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흔히들 앨리셔에게서 후광을 보는 것처럼, 그의 등 뒤에서도 은은한 달빛이 빛을 내고 있었다.
홀든가 저택 앞에 멈춘 차의 창문 너머로, 루이스가 손을 흔들었다. 다이무스는 그와 윌라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러고도 그 손의 감촉이 잊혀지질 않아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 말간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눈을 뜨면 잠든 그가 제 앞에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이무스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출근했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더해졌으나 의식하지 않으려했다. 은행원의 덕목은 정확, 신속, 그리고 냉철함이다. 다이무스는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나 숨겨놓은 아들이란 말답게 루이스의 모습은 회사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명왕의 적장자임에도 회사를 물려받기는커녕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된 그였다. 세간에서는 그가 병신이라 그렇다느니, 포악한 괴물이라 그렇다느니 떠들어댔지만 다이무스가 만난 그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마냥 기다리기를 일주일, 다이무스는 이 모두가 제 부질없는 상상에 불과하단 걸 깨닫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음을 놓은 그때, 기회는 마음을 놓은 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윌라드의 호출에 다이무스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간 다이무스는 뜻밖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윌라드의 등에선 그 무엇도 읽을 수 없다. 대체 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희열과 열기에 들뜨는 마음과 달리 냉철한 이성은 그 이유를 찾았다.
“어째서 제게.”
“그 아이가 그러고 싶다고 하더군요.”
윌라드는 자상한 미소로 돌아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윌라드 크루그먼은 그 누구보다 야망 있는 남자고, 호시탐탐 회사를 집어삼키려는 이인자다. 그런 그가 왜? 적장자를 내세워 명분을 얻으려 한다기엔 이상한 게 너무나 많았다.
가령, 지금 윌라드의 표정이라던가, '루이스'를 발음할 때면 부드러워지는 목소리와 눈매. 그런 것들이 다이무스의 위화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더구나 아이라니. 명왕의 아내가 사고를 당한 게 불과 22년 전. 그때 그가 다섯살도 안 된 아이였으니 적어도 올해 스물일곱이다. 물론 앳된 얼굴이라곤 하지만 아직까지 아이라 불릴 나이는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로군요, 다이무스경.”
윌라드는 피식 웃고는 커피를 따랐다. 진한 커피향이 사무실 가득 퍼지고, 찻잔이 다이무스 앞에 놓였다.
“제가 루이스의 후견인이 된지도 22년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그리로 가는 법이지요.”
다이무스는 진중한 윌라드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표정의 윌라드를 본 적이 있던가. 한치의 꾸밈도 없는 얼굴이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말을 고르는 중이라는 걸 명백히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다이무스는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다이무스는 그 미소와, 접힌 눈꼬리를 떠올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이 가는 법이라고 말하던 윌라드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그 미소를 두고, 자그마치 22년. 굳이 그 세월을 캐묻지 않아도 아끼지 않을 수 없으리란 건 자명했다.
그럼에도 다이무스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의문은 풀리지 않고 손톱 끝의 거스러미처럼 신경을 거슬렀다.
“명왕께서도 아십니까.”
“루이스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제게 일임했습니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더 기분이 나빴다. 그토록 경계하는 상대에게 하나뿐인 친아들을 맡기는 저의가 무엇인가. 배신을 막는다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회사도, 아들도 버리려는 것인가. 다이무스는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이무스경께선 전력을 다해 그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면 됩니다. 곤란하게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당부하는 말과 표정은 완전히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것이라, 다이무스는 더더욱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잠시 생각하던 다이무스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 임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거절할 수 없다. 다이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리지 않은 의문과 씁쓸한 심정으로 그의 사무실을 나오는데 문 앞에 서성이던 앨리셔가 다이무스를 발견하곤 다가와 말을 붙였다.
“저, 다이무스씨. 그... 저희 오빠의 경호를 맡으신다고...”
잔뜩 긴장한 얼굴의 소녀에게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셔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다행이네요! 다이무스씨라면 안심이에요.”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고 방긋 웃는 앨리셔는 정말 기뻐보였다. 그러고보면 멀리 갈 것도 없이 그의 가족이 여기 있지 않은가. 모든 형제와 가족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앨리셔라면 이 석연치 않은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일까, 양녀인 앨리셔와 루이스는 친남매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았다. 따지고 보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데 어째서 이들은 이토록 그를 염려하고 아끼는 것일까.
다이무스는 앨리셔가 구김없이 자란 것과 그의 말간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태생적인 성격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가족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다이무스는 앨리셔와 루이스가 함께인 풍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제 형제들이 모이면 일어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따스하고 평화로운 봄날의 티타임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오빠도 사이퍼긴 하지만 아버님의 능력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강한 것도 아니라 불안했거든요.”
“어떤?”
“아, 오빠는 결정능력자에요. 그래도 3급 정도지만.”
별 볼일 없는 결정능력에, 3급 능력자. 다이무스는 서늘한 손의 감촉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앨리셔와 윌라드가 이토록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당장 샬럿과 마를렌만 해도 공성에 나가는 곳이 포트레너드다.
능력에 비해 가진 게 너무나 많은 후계자. 승냥이같은 이들이 노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앨리셔는 몇 번이고 고맙다며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가 궁금해진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잡았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서류를 검토하던 티엔은 카페 문의 풍경이 울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던 그녀가 저를 발견하고 걸어오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티엔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정장 차림의 루이스는 티엔의 앞자리에 앉아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일 없었어요.”
“별일 없는 얼굴이 아닌데.”
그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울상을 지었다. 퍽이나 섭섭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라 티엔은 서류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루이스는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는 입술을 죽 내밀었다. 절대 일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였다. 티엔은 속에서 천천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눌렀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구요.”
“또, 그인가.”
“...오늘은 상사님께 혼났거든요.”
“그만둬라.”
티엔이 진심으로 말하며 손을 잡자 루이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티엔정에게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준 여자에겐 이미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연인이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또 모를까, 그 여자는 어여쁘기만한 얼굴을 하고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고 있는 데다 제게 접근한 것도 그 업무의 일환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직속 상관이자 연인이 다이무스 홀든이라니. 이쯤 되면 아무리 그랑플람의 아시아 지부장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찾아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티엔이 할 수 있는, 루이스가 허락한 전부였다.
“뭐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니까요.”
루이스가 슬쩍 손을 뺐다. 서운해진 티엔은 두손을 포개놓았다.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에 엎드려버렸다. 마음이 상했는데도 작고 지친 그녀가 안쓰러워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자 루이스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밀어내지 않고 제 손길을 편안히 느끼고 있는 루이스에 다시 마음이 부풀었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남은 서운함마저 말끔히 지워냈다.
“그도 그렇군.”
“그런 거죠.”
고개를 들어 생긋, 눈을 휘며 짓는 웃음이 아침 이슬을 머금은 수국같아 티엔은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바보가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맞는 말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그녀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테고, 연락도 없는 그녀를 무턱대고 기다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는 건 이 미소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마시겠나?”
“그러게요. 주문하고 와야지.”
루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티엔은 어깨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커피잔을 들었다. 티엔이 마시던 커피는 이미 반쯤 식어있었고, 처음 마실 때보다 썼다. 그러나 티엔의 눈을 찌푸리게 한 건 커피가 써서가 아니라, 루이스의 걸음걸이때문이었다. 주문을 하면서 살짝 뒤꿈치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신발이 편치 않은 게 분명했다. 티엔은 작게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루이스는 꽤 높은 굽의 힐을 발끝에만 살짝 걸쳤다.
“왜요?”
“신발에 길이 안 든 것 같아서.”
“그럼 바꿔줄래요?”
꽤나 당돌한 말에 티엔은 눈만 움직여 그녀를 마주봤다. 루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티엔은 어쩔 수 없이 따라웃고 말았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루이스는 연애에 능숙했고, 때로는 그게 거슬리기도 하지만 좋을 때가 더 많았다.
“신발 한 켤레 못 사줄까.”
“농담이에요.”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고들 하지.”
“이미 신발장 가득 신발이에요.”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티엔은 그녀의 뺨을 슬쩍 꼬집었다 놓았다. 말랑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자꾸만 루이스쪽으로 향했다.
“진짜, 당신까지 이럴 거예요?”
뾰로통하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마저 귀여워보이니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다. 티엔은 말끔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실수는 인정하지.”
“...됐어요. 하아.”
무언가 또, 제 말이 그녀의 안좋은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티엔은 종업원이 가져온 딸기 파르페와 루이스를 번갈아보고는 대신 숟가락을 들어 아이스크림을 떴다.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하면서도 입을 벌려 받아먹는 루이스의 입술과 살짝 보인 혀끝에 티엔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입술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운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맛있나?”
“스트레스 받을 땐 단 게 최고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었지?”
“글쎄, 아니 자기가 잘못해놓고 미안하단 소리도 안 하는 거 있죠?”
“그랬나?”
“그렇다니까요! 정말, 그래서 제가 고생해가면서 해놨더니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냐고 다그치고!”
“누가 누구를 탓하는 건지 모르겠군.”
티엔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에게 적당히 맞장구쳤다. 루이스는 간간히 티엔이 떠먹여주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이무스 홀든이 제게 얼마나 무섭게 혼을 냈는지 털어놓았다. 그야 물론,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굳이 위험한 선택지를 골라가며 임무를 성공시키는 부하라면 혼을 낼 법도 하다.
하지만 그 속풀이를 들으면 들을 수록 티엔은 속이 뒤틀렸다. 다이무스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부하로 루이스를 대한 것이 아니었다. 제 여자를 잃기라도 할까봐 겁이 났던 게지. 티엔은 루이스에게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다이무스 홀든에게 공감했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시키고 싶을 리 없다.
티엔은 루이스가 제 연인이었다면 당장 일을 그만두게 하고 집에 곱게 모셔두고 싶었다. 꽃을 돌보고,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저를 맞아주는 아내. 그렇게 예뻐하기만 해도 시간이 아까울 것 같은데. 티엔은 다이무스 홀든을 잠시 떠올리고는 작게 혀를 찼다.
“진짜, 걱정하는 건 알지만 서운하다니까요.”
“그럴 법도 하지.”
“하아.... 나라고 자기 걱정이 안 되는 줄 아나.”
“그리고 그건, 내 앞에서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축 쳐져서 애꿎은 파르페를 휘젓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티엔은 남은 커피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걱정하는 걸 듣고 있으면 속이 뒤틀리니까.”
“......”
루이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꽤나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붉은 눈은 여전히 변덕스럽게 티엔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티엔은 다리를 꼬고, 찻잔을 비웠다.
“다치지 마라. 몸도, 마음도.”
슬쩍, 그녀의 손을 덮었다.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빛나는 반지. 그걸 가려도 루이스는 손을 빼내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여지를 남겨주는 것때문에 자꾸만 더 위험한 상상을 하게 된다는 걸 알까. 티엔은 남은 손마저 잡아 모았다. 양손으로 그녀의 작은 두 손을 잡고, 기도하듯 모아 슬쩍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가 손을 뒤로 뺐다. 놓아주지 않고 눈만 위로 치켜뜨니 당혹인지 무엇인지, 루이스의 얼굴이 붉었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실수는 인정하지.”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놓는 척, 그녀의 손바닥에 살짝 입술을 맞추고 놓아주었다. 다이무스 홀든의 험담과 넋두리를 늘어놓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 루이스는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너무 몰아붙이면 도망가고 말 사람이다. 그쯤은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은 전혀 다른 문제라서, 잠시 충동에 흔들렸던 티엔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실은 실수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그녀를 제 옆에 두기 위해서, 적어도 제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선 참아야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을.”
루이스가 손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놓고 꼼지락거렸다. 루이스는 제게 미안해하고 있다. 그게 연정이 될지 동정이 될지는 모르는 노릇이나, 티엔은 이럴 때마다 그녀의 여린 부분을 파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음까지 전부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
“녹기 전에 어서 먹는게 좋겠군.”
“당신, 정말 뻔뻔하다니까요.”
“...그런가?”
되묻자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티엔이 내민 숟가락을 건네받은 루이스는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하다니, 모를 소리라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 약점이나 잡고.”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게 약점이 되나?”
“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흠.”
티엔은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열심히 아이스크림과 그 아래 층층이 쌓인 단 과자와 딸기를 떠먹는 루이스는 꼭 그 달디단 디저트 만큼이나 사랑스러웠고, 단 것은 입과 혀를 즐겁게 하는 만큼 몸에 해로웠다. 그녀 역시 제게 달디 단 독이 되는 것일까. 티엔은 물기에 젖어 빛나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역시, 해로운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기뻐해야겠군.”
“뭘요?”
“어쨌거나 내가 네 일부가 되었다는 거 아닌가.”
입술에 묻은 크림을 엄지로 훔치며, 티엔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돌아서고 말 임무 대상에서, 그녀의 마음에 발을 들인 상대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다. 티엔은 진심이었다. 루이스는 포기한 듯 포옥 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똑같아요.”
“뭐가?”
“나 힘들게 하는 거요.”
루이스는 숟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왼손으로 턱을 괬다. 지친 표정에 잠시 미안해지긴 했지만 티엔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 빛나는 그의 흔적을 노려보고, 루이스가 다 녹은 파르페를 흘리기 전에 서류를 정리했다. 언젠가 저 손가락에 다른 반지를 끼워주리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