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추후에 책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8.
마침내 대학생활이 끝났다. 루이스는 후련한 마음 반, 어딘가 섭섭한 마음 반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숨을 푹 내쉬었다. 졸업식만 가면 이제 정말 끝이다. 루이스는 노트북을 덮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붙어 지내다시피 하다가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니 부쩍 그 생각이 났다. 루이스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을 듣는 동안, 묘하게 두근거리고 설레기도 해 루이스는 노트북을 톡톡 건드렸다.
“여보세요.”
“응, 벨져.”
“잘 끝났나?”
“응. 덕분에.”
공사장에 있기라도 한 건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아니, 그냥.”
그냥. 보고싶어서. 보고싶다는 말은 목에 걸린 것 처럼 간질거리며 나오질 않았다. 루이스는 목에 걸린 것을 털어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벨져의 목소리에 짙게 배인 피곤이 신경쓰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지내는지도 한 번 묻지 않은 게 떠올랐다. 시험기간이라 바쁘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무심했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바빠?”
“아니, 안 바쁘다.”
“그럼 만날래?”
“그래. 그 카페에서 보도록 하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알았어.”
벨져는 걱정과 달리 별로 기분이 상하거나 서운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어질러진 방을 슥 둘러봤다. 오랜만에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냉장고도 좀 채워놔야지. 전같았으면 바로 시작했을 수순의 앞에 자연스럽게 벨져가 떠올랐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벨져가 말한 세 달도 끝난다. 루이스는 할 일을 적어놓은 캘린더를 펼쳤다. 알바며 과제, 팀플이며 시험으로 빼곡한 봄학기와 달리 가을학기 이후에는 과제 기한이 적혀있는 게 전부였다.
루이스는 캘린더를 덮고 일어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샤워도 하고, 오랜만에 사람 꼴로 나가기 위해 아껴둔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딱 분침이 절반 지나 있었다. 루이스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고 잠바를 걸쳤다. 벨져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집에서 가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키홀더와 지갑, 핸드폰을 챙긴 루이스는 집을 나섰다. 가지만 남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바람이 매서웠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티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어차피 요 앞이니까 이 정도야 어떠랴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험기간이라 꽉 찼던 카페들도 방학을 맞아 한산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들어선 루이스는 매장을 슥 둘러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은 루이스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 여기서 만날 때만 해도 해가 쨍하니 내리쬐던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바뀌고, 아메리카노 한 잔도 얼음이 담긴 유리잔 대신 따뜻하게 데운 하얀 머그로 바뀌었다. 루이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따뜻한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세 달. 벨져가 얘기한 세 달은 루이스의 학기와 함께 시작해 끝나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지난 시간을 천천히 되돌아봤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감상 속에 어느 순간 제가 섞여있었다. 그 해의 겨울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이었다. 결코 닿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고, 다른 세계를 동경할 새도 없이 주어진 것에 아등바등하느라 꿈을 꿔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욕심이 났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손을 내미는 그가 너무 눈부셔서, 닿고 싶었다.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시지프스가 되는 건 아닐까 했다. 신들의 아량으로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뻐기다가, 결국은 끊임없이 무거운 돌을 산 꼭대기까지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인간.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되도 않는 헛된 꿈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한 것도 벌써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은, 벨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사람은, 버려지는 것에 대해 어떠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는 저를 꾀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첫만남이 너무 극적이어서, 그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를 감싸쥐었다.
까만 수면에 자신이 비쳤다. 하고 싶은 것은 확실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계절의 끝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루이스.”
“왔어?”
“기다렸나?”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부쩍 수척해진 얼굴의 벨져가 장갑을 벗으며 다가와 앞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었다. 눈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이 안쓰러웠다. 벨져는 손을 뻗어 머그를 잡고 있던 루이스의 손등을 감쌌다. 따스한 온기에 루이스는 그를 향해 슬쩍 웃어보였다. 벨져는 대번에 혀를 찼다.
“손이 이게 뭐냐.”
“요 앞인데 뭘.”
“미련하긴.”
“너는. 잘 지냈어? 피곤해 보이는데.”
“못 지낼 것도 없지.”
못 지낼 것도 없다면서, 그 또렷한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제 손등을 감싸고 온기를 나눠주는 게 간질간질해 루이스는 숨을 죽였다. 이 모든 것이 깨면 사라질 꿈이 아니기를 바라. 잠시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 손의 온기와 감촉에 낮게 일던 파도가 가라앉았다.
“벨져.”
벨져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그 시선에 잠시 생각을 골랐다.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에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그 날 공성이나, 무슨 일이 있었다, 내일은 뭘 하고 밥은 뭘 먹을까. 정말 일상적인 얘기밖에 안 했구나. 그런 생각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등을 감쌌다.
“너는, 잘 지냈나?”
“응. 이제 다 마쳤지.”
“학사모 쓸 일만 남았군.”
“너는?”
“나?”
이런 질문이 의외라는 듯 벨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피식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기졸업했다. 별로 흥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하겠더군.”
“너 답네.”
“당연하지.”
수긍하자 벨져는 더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받아 차를 주문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에 루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벨져는 테이블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벌써 겨울이네.”
“오늘은 눈이 온다더군.”
“그래? 벌써 첫눈이 내릴 때가 됐구나.”
루이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했더니, 벌써 비 대신 눈이 올 날씨가 되었나보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금방 벨져의 차가 나왔다. 벨져가 시킨 진한 홍차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건 뭐야? 냄새 좋네.”
“얼그레이.”
벨져는 마셔보라는 듯 찻잔의 손잡이를 루이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금테가 둘러진 잔을 조심스레 잡고 입술을 댄 루이스는 가까이서 올라오는 향기에 차를 마시는 건지 향기를 마시는 건지 모를 기분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벨져 쪽으로 손잡이를 돌려놓은 루이스는 다시 머그를 잡았다.
“그냥 그렇네.”
“다음에 제대로 우려주지. 홍차는 전문점이 아닌 이상 제대로 맛을 못 내더군. 그래도 이 정도면 쓰레기는 아니지만.”
루이스는 바로 홍차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예 양팔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벨져가 한참 베르가못이니, 찻잎의 원산지니 하는 얘기를 하다가 말을 멈췄다. 너무 가까이 갔나 싶어 벨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당겨 의자 쿠션에 몸을 기댔다.
“밥은?”
“어…, 먹었을 걸?”
일어나서 메일 확인하고, 하던 일을 마치기까지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노트북의 글씨만 보고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라고 하는 게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벨져를 만나러 나오며 쐰 햇빛이 사나흘 만이었다. 비타민D를 위해 광합성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는데 벨져가 혀를 차더니 반도 마시지 않은 차를 두고 일어섰다.
“가자. 밥부터 먹고 차를 마셔야지. 빈 속에 그 쓴 걸 집어넣어?”
“어어, 너는? 점심 먹고 온 거 아니야?”
“이 멍청아,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나와.”
“넌 몇시에 먹었는데.”
“하아, 나도 안 먹었으니까 밥부터 먹자고.”
신경질이 섞인 벨져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벨져는 제 손목을 덥석 잡아 끌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에 끌려 가면서도, 피식 웃음이 샜다. 이 짜증과 신경질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반가웠다. 고작 몇 주 못 본 것 뿐인데 한 일 년은 못 본 것처럼 그리웠고, 또 반가웠다. 그간의 공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끌어당겨주는 게 고마웠다.
“뭐, 먹고 싶은 건?”
“별로 없는데.”
“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쯧, 그새 잘 먹여놨더니 이 꼴이 뭐냐.”
“너도 그새 말랐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계산대 앞에서 장지갑을 꺼내들었다. 루이스도 지갑을 꺼냈으나 벨져는 이미 카드를 내민 후였다. 뭐 그런 걸 꺼내냐는 듯 벨져는 그 잘생긴 얼굴의 미간을 찌푸렸다.
“넣어둬.”
“어떻게 커피 한 번을 못 사게 하냐?”
“그 돈을 누가 주는데. 밥이나 제대로 사 먹어. 굶고 다니지 말고.”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말이건만 벨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그런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제 지갑에 들어있는 건 벨져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기도 하고, 벨져에게 이 정도 커피값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은 그냥 기분이라도 내게 해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한 잔 할래?”
“…나쁘지 않지.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고. 그 다음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계산을 하는 사이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벨져의 시선에 루이스는 그를 마주봤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싶어 제 옷차림을 슥 보는데 벨져가 들고 내려온 목도리를 두르고 매듭을 지어주었다.
“나 추위 별로 안 타는데.”
“흥, 그래놓고 감기나 걸리지 마라.”
벨져는 영수증 대신 카드만 받아 지갑에 넣고는 돌아섰다. 루이스는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 훈기가 내려오는 카페의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목을 감싸면 체온 유지가 잘 된다던데, 벨져가 하고 다니는 거라 그런지 맨살에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벨져는 차를 빼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버렸다. 같이 가재도 그는 듣는 법이 없었다. 따라나가려 하면 또 짜증을 낼 게 분명했고,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해진 채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루이스는 한 발 양보했다. 사실 늘 양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 홀든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지금도 흔들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감상에 젖어 카페 문 앞에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코 끝에 차가운 게 닿아 녹아내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치고 있으니 아직 덜 얼은 진눈깨비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순위를 메긴다면 단연 상위권에 오를 사람이 제 집 소파에 앉아 저를 부르고 있었다. 당장 돌아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전화로 하면 될 걸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꽤 일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번 시즌도 넘길 테냐? 너라면 충분히 헬리오스에도 들어올 수 있을 거다. 내가 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형아.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가면 되겠네.”
벨져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이글 놈이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도 알려주지 않으리라. 문을 열기 전까지 기분좋게 돌아온 벨져였다. 오늘은 드디어 루이스가 조커1을 찍은 날이었고, 벨져는 그와 함께 5연승 기록을 세우고 피씨방을 나섰다. 곧 기말고사다 졸업 논문 심사다 뭐다 하는 일로 한동안은 얼굴을 보기 힘들 터였다. 그 전에 조커1을 찍은 게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 혼자 차를 세워두고 근처 바에서 한 잔 하고 오는 길이었다. 애당초 세웠던 계획도 차근차근 잘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최근 벨져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아니 '프로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맵을 읽는 센스, 냉철한 판단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 무엇보다 위기 상황에서 더 그를 빛나게 만드는 침착한 태도. 벨져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자신의 감과 판단을 믿었다. '쉬레'의 플레이도 그랬다. 지금까지 있었던 팀에서 벨져는 종종 오더를 무시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는 곧 자신이 맞다는 증명이었고, 팀원과 오더는 아연실색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벨져는 혼자서 게임을 이끌어나가는데 능숙했다. 최종 목표가 승리라면 탱커나 서포터 한 둘 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서포터와 탱커가 잘 해도, 딜러가 없으면 말짱 헛고생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프로즌'은 저와 정반대라 해도 좋을만한 플레이를 했다. 결과적으로 하는 행동은 똑같지만, 그는 팀을 이끌줄 알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다독이고 끌어들여 유대를 형성하는 면에서. 본인은 아니라고 하고 자각도 없는 것 같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 지켜보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아마 처음 그 날 졌던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할 정도로, 루이스는 팀원을 믿었다.
AOS에서, 그것도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게임에서 믿음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이던가. 벨져는 그런 신뢰와 믿음은 5인 공성을 돌릴 때나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신뢰와 유대는 강력한 무기지만, 때로는 그 마음이 발목을 잡기도 하는 법이었다. 지지난 시즌의 32강, 힐러가 잡혔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는 불나방 플레이를 선보인 멍청이 덕에 신인 Darkness는 결국 본선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일반전에서나 볼 법한 플레이였고, 벨져로선 드물게 그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팀의 빈자리에 영입하려거든 반대할 생각으로 기억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벨져. 그 때 일이 걸려서 이러는 거라면 이번 시즌은 쉬어도 좋다.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해.”
“말을 끊지 마라.”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큰형과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저를 아래에 두고 어르고 훈수하려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릴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성인이 된 지도 꽤 됐다. 벨져는 거리를 가득 메운 불빛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듣기 싫으니 어서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제레온 감독이 승부조작 혐의를 받고 있다. 아직 기사는 안 났다만.”
“뭐?”
“후임 로리아노가 애쓰고 있지만, 가망이 없어 보이더군. 검제로 돌아가긴 힘들 거다. 다음 시즌에 데뷔하는 것도 힘들 테고.”
“…그걸 나한테 굳이 얘기해주는 의도는 뭐야?”
“……공백기가 너무 늘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새로 생겼다 사라지는 팀도 무수히 많지.”
벨져는 무뚝뚝하게 말하는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레온에 대한 진위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오랜 연을 맺어온 프리츠를 버린다는 소리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벨져는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벨져는 검의 형제를 위해 몸 바치다시피 한 제레온을 떠올렸다. 잘 부탁한다며 사무실을 나가던 날까지도 그는 제게 맞는 팀원을 구해주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사람이었다. 입 안이 써 담배가 고팠다.
루이스랑 있는 동안 담배 한 대를 못 태웠던 게 떠올라 벨져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확 추워진 날씨에 여전히 가을이라도 되는 양 옷이 얇았다. 그렇게 다니니 감기를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게 보일러도 좀 틀고 옷도 좀 사고 하라니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 자연스럽게 루이스 생각을 하던 벨져는 불을 붙이고, 니코틴을 들이마셨다. 다이무스는 실내에서 무슨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긴 자신의 집이고, 그는 무단 침입한 불청객이니까. 벨져는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뱉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형아.”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다.”
“하! 그 걱정은 이글 녀석에게나 해주지 그래? 좋아라 할 텐데. 그 자식 이번에 중간고사도 자느라 안 본 거 알아?”
“…하아. 이만 가보겠다.”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
벨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다이무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대로 돌아서 나가던 다이무스가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돌더군.”
“무슨 소문.”
“네가 듀오를 돈다는 것 말이다.”
“…….”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잘 하리라 믿겠다. 그럼 잘 자거라.”
젠장. 벨져는 둔탁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도어락의 잠금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미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어 양손을 허리에 놓고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자나. 벨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응? 벨져? 왜?”
“…….”
“왜, 무슨 일 있어?”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벨져는 헝클었던 머리를 다시 쓸어올렸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소파에 풀썩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데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은 먹었냐.”
“응? 아, 먹었어.”
“거짓말 말고 먹어. 먹고 자.”
“그거 얘기하려고 전화 한 거야?”
“…아니.”
“취했어? 술 마셨어?”
벨져는 피식 웃었다.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슬쩍 눈을 감았다. 그래, 이렇게 착잡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운 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빠르게 마셔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안 취했다.”
“얼른 자.”
“그래. 너도 자라.”
“알았어. 끊는다.”
“…그래.”
벨져는 잠시 잡을까 하다가 대답했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있는 건 아마 졸업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울까 하다가 루이스가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지나가듯 걱정하던 게 떠올라 담배 각을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곧 연락이 올 것이다. 벨져는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제가 구상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상을 현실에 옮기려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나 다른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신경 쓸 일 투성이였지만 루이스가 시험공부를 하고 졸업논문을 쓰는 사이 마냥 그만 기다리기도 뭐했다. 벨져는 잠시 소파에 앉아있다 일어났다. 서재 겸 작업실로 쓰는 방 안 책상 위엔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아무도 알아줄 리 없는 고충에 벨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슬슬 신생팀과 기존 팀은 윈터를 준비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쉬레는 이번 시즌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헬리오스를 비롯한 다른 팀에서도 쉬레를 부르고 있었지만 벨져는 이제 다시 다른 팀에 속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시작. 벨져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새우고 찾아올 계절이야말로 벨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빨리 보여주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했다. 벨져는 나가기 전까지 쓰던 기획서를 펼쳤다. 새 팀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루이스였다. 지금 한창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그. 프로즌은 스스로 자신이 쉬레에게 합당한 상대였음을 증명해야 했다. 커뮤니티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과 손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벨져는 프로즌의 전적을 검색했다. 승률은 63%. 아이스의 랭킹에도 진입한 게 뿌듯해 미소가 지어졌다. 루이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차분한 목소리와 제게 향하는 그 눈빛이 그리워졌다. 벨져는 지난 시간을 더듬어 처음 그를 만난 행사장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창. 해가 쨍쨍하니 내리쬐던 더위도 이제는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의류매장에는 코트와 니트가 걸리고, 거리를 물들인 낙엽도 한 차례 내린 비에 쓸려나갔다.
겨울이 오는 동안 준비할 게 산더미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못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새 사무실과 대신 일을 해줄 사람들, 리그 진출과 영업. 벨져는 키보드를 다그락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