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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1.
[ Prequel ]
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3년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1.
그 일로부터 열흘. 딱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어처구니 없는 기사도 돌았고, 커뮤니티엔 쉬레에 대한 옹호와 비판과 욕설이 마구 뒤섞인 채 그들끼리 치고 받기를 반복했다. 그동안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런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봤자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들이 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벨져 홀든의 관심은 프로즌이라는 세글자와 그 멀끔한 얼굴의 남자에게 쏠려있었다. 찾아서, 이 수모를 갚아야 한다.
검색을 해본 결과 프로즌은 실제하는 유저였다. 어느 게임, 서버에나 하나 쯤은 있을 법한 고루한 닉네임이지만 프로즌이라는 이름은 그의 그 서늘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꽤 닮아있었다. 프로즌이 그에게 어울리는건지 그가 프로즌에 어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계정이 그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프로즌. 공식전을 돌지 않는지 랭킹조차 뜨지 않는 언랭의 유저.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커뮤니티 창을 켰다. 여전히 회색으로 뜨는 그 세글자에 괜히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일방적으로 친구 추가를 하고, 언제 접속할까 어플까지 깔았건만 프로즌은 열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급수를 보면 그래도 꽤 오래한 것 같은데. 벨져는 회색 글씨를 보며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팀으로는 진 적이 있어도, '쉬레'에게는 이게 첫 패배였다. 벨져는 누가 뭐래도 1:1의 강자였다. 누구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근접전에서 만큼은 뛰어나다 자부했다. 그런 그에게 언랭의 일반인, 그것도 시니컬을 들고 아이스에게 졌다는 게 벨져에겐 충격이었다. 첫 패배와, 전국적 망신과 프로즌. 벨져는 제가 진 이유를 복기하기 위해 끊임 없이 연구했다. 그렇게 지고 한 사나흘은 보이는 족족 아이스만 잡아댔다.
하지만 수차례 1:1을 해도, 상위권의 아이스 유저들과 붙어도 아이스는 그때처럼 벨져를 위협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명백하게 쉬레가 프로즌에게 졌다는 뜻이었다. 시니컬로 아이스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프로즌의 아이스는 겨우 30대 레벨에, 앞선 한타로 체력이 반토막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1셔라곤 해도 풀피였던 제 시니컬을 이겼다. 벨져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명백한 실책이었고,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벨져는 그로부터 삼일은 잔소리꾼을 피해 핸드폰도 꺼놓았다. 이글 녀석은 그러게 한 번 큰 코 다칠 줄 알았다며 귓이며 우편으로 놀려대고 끝이었지만. 짜증은 나도 차라리 그 쪽이 나았다.
벨져는 애꿎은 세팅창의 아이템을 정리하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서늘한 눈빛과, 멀건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여름인데도 겨울을 떠오르게 하는 녀석이었다. 벨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양껏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가도 가슴에 맺힌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삐릭, 접속 알림 사운드에 벨져는 반사적으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벨져는 이글의 클랜 이동 알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 귓속말이 왔다. 녀석의 파티 초대 테러에 초대 거부 설정을 해놓은 이후로 늘상 있는 일이었다. 오라는 프로즌은 안 오고. 벨져는 이글을 만나기 전에 빠르게 큐를 눌렀다. 방학 중이고, 경기도 끝난 지라 사람이 꽤 있으니 이글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글 녀석은 클랜원들과 인사니 뭐니 하느라 못해도 오분은 늦게 들어올 것이다. 벨져는 빠르게 시니컬을 가져갔다. 그래봤자 상위 랭크의 매칭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그게 지루하다고 쓰레기같은 일반전에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문득문득 손이 F7로 가는 것은 거기서 프로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알바하느라 자주 못 들어온다곤 했지만 다른 아이디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마주치는 랭커들 사이에 숨어있는 건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 막연히 기다리는 것 뿐인데, 그것도 열흘이 넘어가니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이게 전부, 프로즌 때문이다. 벨져는 창밖의 야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 화면이 전환되며 흐르는 배경음악에 적팀 조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익숙한 닉네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메이헨(아이스) : 오! 뭐야, 평타에 발린 쉬레자나?]
일반 채팅으로 도발하는 동생 녀석에 벨져는 왼쪽 중앙 3립으로 향했다. 도발에도 수준이 있지, 저따위 싸구려에 넘어갈 리 없었다. 아직 한참 멀은 동생을 친히 가르쳐주기 위해 벨져는 골목 안개지역에 숨어 애용하는 디티 인사이드를 깔았다. 아니나 다를까, 쭐레쭐레 슬라이드를 깔고 3립을 먹기 위해 이글의 아이스가 나타났다. 아이스 하나 잡는데는 궁극기도 필요 없다. 벨져는 가볍게 원콤보로 이글을 전광판으로 보내버렸다.
[메이헨(아이스) : 아 형! 귀여운 동생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쉬레(시니컬) :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메이헨(아이스) : 내가 없는 소리한 것도 아닌데 왜그랰ㅋㅋㅋㅋ]
벨져는 이글을 차단하고 타워를 치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한타가 벌어졌으나 벨져는 초반에 이글 녀석을 처리했으므로 노마크 상태에서 레벨링을 하기 위해 합류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앙 타워를 끼고 4:4를 하면 그게 그거였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 이상 비등비등하게 타워를 긁다 서로 레벨링을 하기 위해 옆 타워로 이동할 터였다. 벨져는 이글의 리스폰이 끝나는 걸 보고 혼자서 반피를 만든 타워를 두고 뒤로 빠졌다. 아이스의 빠른 기동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쯤이 딱 시니컬의 궁극기로 한타를 걸어보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적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알고 있는 것과 그걸 막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중앙타워와 사이드 타워 옆 통로의 안개지역. 벨져는 거기에 숨어 디티를 꽂았다. 닌자 페어 중 하나인 시니컬은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데미지, 그리고 화려한 스킬만큼이나 방어력과 체력이 약했다. 제 팀의 디티가 아닌 디티 꽂히는 소리에 벨져는 바로 우클릭으로 디티를 꽂던 적팀 근딜을 잘라냈다. 그 뒤에 있던 원딜까지 전광판으로 보내고, 뒤늦게 달려오는 탱커와 아이스의 슬라이드에 바로 스페이스로 구멍을 타고 낙하한 벨져는 팀원들의 굿 소리를 들으며 중앙 타워에 핑을 찍었다.
근딜과 근딜의 싸움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벨져는 중앙타워의 팀원들과 합류에 중앙타워를 긁는 대신 아까 남겨둔 타워를 독차지했다. 최근 상향을 받은 스트리머 덕에 남은 타워 하나마저 금세 파괴하고 나니 딱 3분이었다. 벨져는 안쪽의 립까지 먹고 나서야 라인을 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스노우볼링 전개였지만 적팀엔 언제라도 역전을 노릴 수 있는 스타라이트와 미스틱이 있었다. 거기에 검증이 된 건 아니지만 영웅 플레이의 대표캐인 아이스까지. 그 셋의 궁극기를 한번에 맞으면 아무리 레벨차가 나도 위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트루퍼가 뜨기 전까지 통로 립을 먹는데 스트리머가 아이스에게 잘렸다. 순식간이었다. 아마 물방울쿠션이 꺼지자마자 샤드에 당한 것이리라. 얕은 잔재주에 벨져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봤자 이글의 아이스는 영웅병 걸린 아이스일 뿐이었다. 공방의 다른 아이스 랭커와 붙어도 프로즌 정도의 아이스는 없었다. 그러니 이글 녀석의 아이스가 위협이 될 리가. 마침 트루퍼가 딱 좋은 위치에 떴다. 벨져는 바로 트루퍼를 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1단계지만 그래도 코인 벌이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이미 3장2모를 찍은 후라 트루퍼는 팀원들이 오기도 전에 벨져의 손에 끝이 났다. 탱커나 서포터가 잡고 있던 거라면 또 모를까, 딜러가 막타를 먹는 게 당연했다. 거기에 스트리머는 이제야 겨우 전광판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공방이 버프에 벨져는 옆에서 터지듯 밀리는 아군 철거반을 보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철거반이 날아가는 정도를 봐선 아이스다. 벨져는 이동속도 킷을 사용하고 4번타워 앞 통로에 디티를 꽂았다. 바로 가까이서 들리는 휠업소리에 E키를 누르자 이글 대신 아이스와 함께 옆에 있던 히포크라시와 어트랙티브가 같이 갈렸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극공 힐러는 바로 궁극기에 죽고, 방서폿이었던 어트랙티브는 쐐기와 패닝으로 처리하고 나니 스타라이트가 다가왔다. 벨져는 아껴둔 왈츠로 통로를 타고 빠져나왔다. 둘을 끊은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통로 나오자마자 옆에서 미스틱과 아이스의 궁극기 소리와 함께 아군 상태창에 셋이 전광판 신세가 됐다. 암살을 하는 사이 옆으로 이동해 라인을 밀던 팀원들을 노린 거였다. 이글 녀석은 아마 저를 노린 거였겠지만.
벨져는 이글을 추격하는 대신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스타라이트의 기어3가 남아있고, 중앙타워가 살아있는 이상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글 녀석의 귓속말만 아니었다면, 벨져는 그대로 타워를 포기했을 터였다.
[메이헨: 형, 프로즌 보고싶지 않아? 가르쳐줄수 있는데ㅋㅋ]
[메이헨: 내기할래? 이기면 알려주지~]
이글의 귓속말은 벨져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글이 하는 말이니 그냥 하는 도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위여부를 살피고 재기에 벨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몸이 달아있는 상태였다. 벨져는 잠시 한숨을 깊게 내쉬고, 234번 소모킷을 전부 사용했다. 지루하게 벽돌을 쌓을 뿐인 게임은 순식간에 결승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벨져를 흥분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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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0.
[ Prequel ]
프리퀄(Prequel)은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본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전편이 흥행해서 후편을 만들고자 할 때 만들어 지기도 한다.
본편의 3년 전 이야기.
루이스(24), 벨져(23), 이글(21)
00.
날은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었고, 종강을 만끽하며 늘어지게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졸업까지 앞으로 반 년. 취직 걱정이 앞섰지만 당장 사는 게 바빠 남들 다 따는 자격증이나 뭐니 하는 것들은 거들떠볼 수도 없었다. 그런 걱정을 하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가끔 동기나 후배들이랑 한 판씩 하던 게임에서 어떻게 연이 닿아 소위 꿀알바라고 하는 자리를 얻고, 창고로 쓰던 쪽방이라도 괜찮으면 옮겨와 살라는 사장님의 배려에 지갑에 여유가 생긴 덕이었다. 방 하나짜리 고시원보다 넓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편했다.
루이스는 터덜터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설핏 깬 잠을 다시 자기 위해 차가운 장판 쪽으로 돌아누웠다.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잠들어 휴일을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화는 한 번 끊겼다가 다시 걸려왔다. 스팸 전화는 아니라는 소리다. 두 번이나 걸 정도면 학교의 급한 일, 아니면 알바 대타일 가능성이 컸다. 루이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팔을 뻗어 핸드폰을 찾으려 장판을 더듬거렸다. 손끝에 닿은 핸드폰을 끌어당겨 전화를 연결해 귀에 갖다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나! 뭐해?”
“……. 이글…. 나 오늘 이 주 만에 쉬는 날이거든…?”
“하하! 그거 잘 됐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물이라도 한 잔 해야 할까. 루이스는 핸드폰 액정에 뜨는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받아버린 것을 후회하며 빈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단잠을 자던 차에 하필이면 이글 홀든의 전화라니. 지금이라도 그냥 끊어버릴까. 그럼 당장은 편하겠지만, 그랬다간 또 한동안 이글이 이걸 가지고 야박하네 어쩌네 하며 징징댈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 조금 시달리고 마는 게 낫지. 루이스는 애써 긍정했다. 자다 일어난 참이라 그걸 확인할 정신이 없기도 했다.
“어어, 끊지 마! 놀자는 거 아냐!”
경쾌한 이글의 목소리에 짜증이 앞섰다. 습하고 더운 여름의 날씨는 사람의 짜증 지수를 쉽게 올린다. 휴일에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있다면 나오라는 이글 홀든의 전화가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비단 쉬는 날이 아니라도 시도 때도 없이 놀자는 녀석이지만, 사람에겐 모름지기 쉴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었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럼 뭔데. 거짓말할 생각, 큼. 흠. 하지 말고.”
아무래도 물을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목을 가다듬자 이글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글의 주변이 꽤 소란스러웠다.
“어, 오늘 지스타 있는데 백 명 한정으로 쿠폰 뿌린대. 근데 1인 1매로 준다는 거야. 아 존나 빡빡하지 않냐? 사람도 존나 많.”
“용건만.”
“야박하긴, 와서 나 대신 좀 받아줘. 갑자기 아부지 호출이 와서 가야될 것 같은데 나 지금 서른 번째로 서있단 말이야. 기다린 거 아깝다구. 대신 수고비는 제대로 줄 테니까! 응? 다 전화 안 받는다구~.”
안 받을 만도 하다. 누가 이런 날 뙤약볕에서 몇 시간씩 대신 기다려주겠는가. 루이스는 고민했다. 수고비가 얼마인가에 따라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데.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어디로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
“어, 그건 톡으로 보내놨어. 네가 안 보니까 전화한 거라구~. 알았지? 부탁할게! 아, 추가상품은 알아서 해~.”
루이스는 이글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갑자기 생겨버린 일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글 대신 쿠폰을 받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루이스는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콜라 한 캔을 까 들이켰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청량감에 숨통이 좀 트였다. 부스에서 쿠폰을 챙기고 추첨권을 넣었는데, 그것도 챙겨가야 할까. 루이스는 고민하며 한 모금 콜라를 마시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콜록였다. 따끔따끔 거리는 게 거식해 목을 만지고 있으니 위에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다.
사이퍼즈 부스는 여전히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반 관람객에게도 쿠폰을 준다는 것 같은데 고작 그것 때문에 저 안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캐릭터 체험도 어차피 기다리면 풀릴 터였다.
루이스는 카탈로그를 펼쳐보다 함성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프로게이머를 이겨라! 라는 프로그램에 상품은 50만 테라. 토너먼트식도 아니고 단판으로 신행되는 소위 퍼주기 행사였다. 오늘의 초청 선수는 ‘쉬레’. 최근 가장 핫한 선수였다. 팬도 많은 만큼 안티도 많은 모양이지만, 그의 플레이를 동경하며 따라하는 사람들 때문에 프로게이머니 대회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도 알고 있는 선수였다.
그러고 보면 한 번도 그의 플레이를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추첨발표까진 시간이 남아있었고, 근처 카페엔 이미 사람들이 즐비했다. 루이스는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는 걸 보며 잠시 망설이다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캐스터 대신 BJ를 하는 유저가 옵저버를 하며 중계를 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스크린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쉬레의 기습에 셋이 ‘블레이드’의 궁극기에 끊기고, 바로 추격을 이어 쿼드라가 터졌다. 쿼드라가 제노사이드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루이스는 제가 방금 무엇을 본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관중은 같이 흥분해 쉬레를 연호했고, BJ도 그의 플레이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작한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전방 타워가 모조리 털렸다.
“나라면 쉬레한테 안 덤빌 것 같애…….”
옆에 서있던 여고생이 중얼거렸다. 그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팀이 불쌍하다고 소곤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쉬레는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수준에 맞춰주겠다는 듯이, 코인을 잔뜩 들고도 레벨도 올리지 않고 있었다. 블레이드의 필수품이라 여겨지는 하드스킨도 없거니와, 아이템 역시 온통 흰색 일색이었다. 명백하게, 가지고 놀고 있다. 개중에 용기를 낸 탱커 하나가 쉬레를 물었다. 하지만 쉬레는 팀원들의 백업이 오기도 전에 탱커를 녹이고, 그를 따라온 서포터까지 끊어냈다. 2장 1모 1신에 스킬링. 쉬레는 노셔츠로 상대팀을 농락하고 있었다. 역량 차이가 확연했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본 루이스는, ‘쉬레’가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상했다.
게임은 그대로 터져서 십 분을 조금 넘겨 끝나고 말았다. 쉬레와 함께한 유저 넷도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쉬레는 무표정으로 그들이 건네는 인사에 눈길만 잠시 주었을 뿐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최강의 근딜이라는 수식에 보탬이라곤 없었다.
BJ가 쉬레와 함께한 네 명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진 팀에겐 위로의 말과 함께 부스를 나온 그들을 도닥이고 쿠폰을 건넸다. 다음 경기의 참가 희망자를 묻는데, 쉬레 팀은 지원자가 넘치는 반면 도전자 팀은 지원하겠다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황한 BJ가 손에 든 쿠폰을 흔들어보였으나 관중은 웅성웅성할 뿐이었다. 이미 패배가 예정된 데다, 그 꼴을 보고도 무력한 패배라는 굴욕을 당하고 싶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여성 유저가 손을 들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가는 사이 루이스도 손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온 거지, 그런 압살을 당하고 목격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다.
그래, 루이스는 흔히들 말하는 ‘쉬레 플레이’가 싫었다. 루이스가 나오자 시간이라도 끌려는 건지 BJ가 처음 손을 든 여성유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여차저차 도전자 팀에도 다섯 명이 모이고, 루이스는 생전 처음 본 사람들과 방음 부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어색하고 경직된 공기 속,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클라이언트를 켜니 클랜 알림 창에 절친한 원딜러의 접속 알림이 떴다.
헤드폰을 끼기 전, 처음으로 나섰던 여성 유저가 말을 걸었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친숙했다.
“저기,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아, 프로즌입니다. 초대해주세요.”
“어? 정말요?”
“네. 다 대문자로.”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빙그레 웃으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날 아나? 공성에서 마주친 사람인지도 몰랐다. 타앙, 파티 초대의 둔중한 UI사운드에 화면을 보니 방금 접속한 원딜에게 초대가 와있어 루이스는 거절을 눌렀다.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팅창을 열려 엔터를 치는데 다시 한 번 초대가 왔다. 키보드에 양손을 올리고 있던 루이스가 다시 거절을 누르기 위해 마우스를 잡으려는데, 옆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받아요. 다 기다리고 있는데?”
“네?”
루이스가 말뜻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자 루이스 대신 마우스를 움직여 파티 초대 수락을 눌렀다. 다섯 명. 방금 그녀에게 초대를 위해 닉네임을 말했던 사람들로 채워진 파티에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설마.
“퀸?”
“안녕, 프로즌. 이런 우연이라니, 예감이 좋지 않아?”
루이스는 그제야 그녀가 제가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슬쩍 웃었다. 그녀의 말 그대로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저와 상성도 호흡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루이스는 다른 세 사람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스노우퀸, 앤지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그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앤지는 루이스에게 찡긋 윙크했다.
안내에 따라 친선전에 입장한 루이스는 조합을 맞출 것이냐 물었다. 앤지의 옆에 앉은 남자가 어차피 쉬레한테는 소용없을 거라며 잘하는 거 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으로는 이길 수 없다. 맞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고민하다 ‘아이스'를 골랐다. 팀원 하나가 벌써부터 게임을 놓는 거냐며 허탈하게 웃었지만 루이스는 게임을 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셀렉과 대기가 끝나고, 배경음악이 깔리며 화면이 전환됐다. 쉬레는 그의 주캐인 ‘시니컬’이었다. 부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스님 힘드시겠네요. 아이스로는 시니컬을 못 이기잖아요. 삑도 자주 나고.”
“……. 해봐야죠.”
루이스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마우스를 잡았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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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와트 au
* 다이무스 6학년(16), 루이스 4학년(14), 벨져 3학년(13), 이글 1학년(11)
만우절이랍시고 아침 식사부터 푸딩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고작 이런 장난이 뭐가 그리 즐겁다는 건지. 벨져는 켄타우로스 탈을 쓰고 지나가는 후플푸프 학생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한심하긴. 그러고 보니 제일 신나서 돌아다닐 이글 녀석이 아직까지 잠잠했다. 또 얼마나 큰 사고를 치려고,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나은데 소식이 없는 게 영 불안했다.
벨져는 동생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엇다가 고개를 드는데,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제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벼보아도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여전히 벨져의 시야 안에 있었다. 교복 망토의 후드에 가려 이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긴 생머리였다. 거기에 노란 색과 붉은 색이 번갈ㅁ아 놓인 그리핀도르의 넥타이. 벨져는 절대 잊을 리 없는 얼굴을 떠올렸으나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학생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와 까만 양말. 벨져는 수업을 가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잠시 멈춰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이스...?"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이름에 벨져는 급히 쫓아가려했지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복도 가득 퍼졌다. 잠시 망설인 사이, 그 뒷모습은 벨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벨져는 강의실 문을 열면서도 복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그건 대체...."
"아, 안녕하세요. 그게... 내기에 졌거든요."
"...그렇군."
다이무스는 수업을 듣기 위해 들어오다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언제나 루이스와 제가 함께 앉는 자리에, 한쪽 다리를 꼬고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펜을 들고 있는 여학생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 여학생이 루이스라는 걸 깨닫고 자리에 앉긴 했지만, 그래도 놀란 게 사실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거나, 웬만큼 눈썰미가 있지 않고서야 여장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잠시였지만, 자신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루이스에게 여학생 교복은 퍽 잘 어울렸다. 어울리다 못해 너무 예뻐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이무스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고쳐앉았다. 워낙에 곱게 생기긴 했지만 긴 생머리가 더해져 청순한 매력이 물씬 풍겼다. 그 바람에 애꿎은 제 가슴이 떨렸다.
다이무스는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책을 펼치고 펜을 꺼냈다. 계속 쳐다보다간 그도 민망해하거나 불쾌해할 것이다. 하지만 다이무스의 신사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눈은 자꾸만 말려 올라간 치마 아래 드러난 흰 다리와 무릎으로 향했다.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까만 양말부터 치마 사이의 흰 살결이 부드러워 보였다. 결국 다이무스는 이대로 가다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루이스의 손을 잡아 그의 치마 위에 올렸다.
"주의하도록."
"아, 네."
다행히 루이스는 별 생각이 없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치마를 내렸다. 다이무스는 그 반응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핀도르의 장난은 다른 기숙사보다 심하고 빈도도 잦다 보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무슨 마법을 썼는지 가슴까지 닿는 머리카락도 가발이 아닌 그의 머리카락 같았다. 아직 교수님이 들어오지 않으셨기에 다이무스는 넌지시 물었다.
"머리는, 뭘 썼나."
"아, 이건 크리스티네가 도와줬습니다."
"그렇군."
불편하다는 이유로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그녀가 파티에 참석할 때면 머리를 길게 땋아올리는 걸 떠올린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핀도르로 가더니 이런 장난에도 끼게 되었나. 그녀에겐 좋은 일이라 다이무스는 다시 깃펜을 들었다. 수업 내내, 학생들의-주로 남학생들의-시선이 옆으로 향했으나 루이스는 얼음 마술이 특기인 마법사답게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업에 집중했다. 집중해서 신경을 못 쓰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지는 몰라도 루이스의 가장 큰 장점은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아직 4학년이긴 하지만, 그에겐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 다음 학기엔 반장 뱃지를 달게 될 테고, 졸업하면 오러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 자신은 아버지를 따라 마법부에서 일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마법부에 있으면 고아라 연고가 없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필기를 하던 다이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학생들이 루이스를 흘긋거리는 걸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있다는 것과도 같았다. 사실 다이무스도 그 남학생들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가 다리를 이리저리 꼬면서 드러난 맨다리가 옆자리에 앉은 다이무스의 눈을 자꾸 사로잡은 탓이었다.
예상 외다. 만우절이니 분명 여기저기서 장난을 걸어올 거란 건 예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아마 루이스 본인도 자기가 못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자각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저 내기에 진 바람에 여장을 하게 된 것에 불과하니까. 다이무스는 누군지도 모를 치마 주인을 향해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이게 다 치마가 짧은 탓이다. 내기의 주동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필시 이글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다이무스는 제 막내 동생이 이 일에 끼어들었다는 것에 갈레온을 걸 수 있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잠잠하다 싶었더니, 이젠 직접적으로 오지는 않겠다는 건가. 아침에 벨져의 푸딩에서 개구리 모양 초콜릿이 나온 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분명 루이스와, 여장과, 만우절에는 관계가 있다. 다이무스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루이스의 펜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다이무스의 불안한 눈도 흔들렸다. 언제나 그렇듯 이글의 행동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집도 아니고, 학교에서 벌건 대낮에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심란한 마음에 한손으로 이마를 짚으려는 찰나, 부지런히 필기를 하던 루이스가 양피지 조각을 슬쩍 밀었다. '괜찮아요?' 교수님과 칠판, 책만 보는 줄 알았더니 집중을 흐트러트릴 정도였나.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내민 양피지 조각에 짧게 답했다. '괜찮다. 혹시 이글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나?' 여전히 시선은 칠판에 고정한 채, 루이스는 양피지조각을 가져갔다. '아니요. 그리핀도르는 열두시 종 치자마자 시작했거든요. 아마 슬리데린까지 갈 여유가 없을 겁니다.' 이번엔 아무렇게나 찢은 양피지 조각 대신 노트 한 페이지가 돌아왔다. 어쩐지 잠잠하더라니, 신고식을 치르고 되갚아줄 장난을 생각하느라 그런 거였나. 다이무스는 이글이 보이지 않는 이유에 납득하고 다음 질문을 하려 펜을 들었다. 무슨 내기를 했지? 라고 쓰기 위해 펜을 종이 위에 올린 순간, 너무 개인적인 걸 묻는가 싶어 펜을 뗐다. 그런 걸 서스럼 없이 물어도 될 사이인가. 하지만 그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어 망설이는 사이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이 저마다 책을 덮고 짐을 챙기느라 부산스러워진 강의실 안, 루이스가 책을 덮었다.
"그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지금 전쟁중이거든요. 하루짜리."
"...건투를 빌지."
"하하, 뭐 이제 사년이나 됐으니까요. 다들 학기초부터 이글한테 당한 게 많아서 일주일 전부터 머리 싸매고 회의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이글 홀든을 제대로 놀려줄 수 있을까, 하고."
"그리핀도르는 그런 데 일주일이나 시간을 쓰나?"
"벨져가 머리 만지는 시간보단 덜하죠."
"..."
"농담이에요."
다이무스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야 물론, 벨져가 거울을 보는 시간에 비하면 일주일 동안 어떻게 장난을 칠 것인가로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합리적이다. 더구나 그게 아무도 말릴 수가 없는 천방지축 막내라면 더더욱. 루이스가 후드를 덮어쓰는 사이 다이무스는 책을 덮고 짐을 챙겼다.
"잘 부탁하지."
"올해는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그랬으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유감이로군."
"네. 아무래도 당하는 입장이다 보니."
"그래도,"
한 뼘 아래서 책을 양손으로 감싸안고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홀린 듯 손을 들어 후드를 넘겼다. 루이스의 긴 머리카락이 손등을 스쳤다.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저를 기다리는 그를 향해 잘 어울린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법 나쁘지 않군."
"하하, 오늘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예쁘단 말이에요."
"...그래."
"도서관 가실 건가요? 오늘 수업은 끝났는데 지금 기숙사로 돌아가면 지옥이 펼쳐져있을 것 같아서."
"그것도 좋...."
"야!!!"
다이무스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대답하려는 찰나, 강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벨져가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벨져."
"형아는 빠져. 너 이 새끼...!"
"벨져!"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난 아니야. 지금까지 다이무스 선배랑 같이 있었어. 지금 막 수업이 끝난 참이고."
"이런다고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아? 이딴 걸로 장난치지 말...!"
갑자기 쳐들어온 벨져가 루이스를 향해 손을 뻗고, 다이무스가 둘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벨져가 손을 뻗는 게 조금 더 빨라서, 다이무스의 겨드랑이 사이를 빠져나간 벨져의 손은 루이스의 멱살 대신 다른 곳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읏...!"
"......"
벨져는 제 손에 닿는 감촉에 당황했다. 작지만 부드럽고, 둥근, 말랑말랑한 무언가. 아마도, 있을리 없는 그 감촉. 벨져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손에 쥔 것을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되도 않는 장난을 걸어서, 따지러 왔더니 이게 대체 무슨...!
"실컷 만졌으면 이제 그만하지 않을래, 홀든?'
"너...!"
다이무스가 한 발짝 물러나고, 제 손이 어딜 쥐고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벨져의 얼굴에 확 열이 쏠렸다. 루이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손을 뗐으나 이미 강의실 문에 모여든 학생들은 눈앞의 광경에 저마다 입가에 손을 대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너, 너...!?"
여자였어? 여자였나? 지금까지 그럼 난 여자를 상대로 그렇게 사사건건 부딪히고, 싸움질을 했다는 건가? 벨져는 혼란스러웠다. 열셋이 되도록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제 아무리 이글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벨져를 패닉에 빠지게 한 적은 없었다. 벨져의 얼굴이 희게 질리는 걸 본 루이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오늘 하루 뿐이거든? 화장실 가는 거 빼고 아무 문제 없으니까 평소대로 돌아와줄래, 벨져?"
"...사과 하고 끝내라, 벨져."
"......"
벨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굴려 루이스가 이러고 있는 게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전까지 공황상태에 빠졌던 게 허무하고 어이가 없는 데다, 안심이 됐다. 그 바람에 그만,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저, 저기. 벨져?"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하고 다니던가!"
벨져는 안도감에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가오다니. 괘씸하고 짜증이 나 그를 노려보자 루이스는 큰소리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때만 약한 척, 피해자인 척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혹의 주술 같은 거나 걸고 다니고! 그러고도 네가 남자냐?!"
"...뭐?!"
"뭐야? 뭐야, 뭐야? 작은형 루이스랑 싸워?"
루이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는가 싶더니 문쪽에서 이글의 목소리가 들렸다. 빼곡하게 서있는 학생들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기어온 이글이 한 상급생의 다리 아래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오오, 아니면 고백하는 거야? 벨져랑 루이스랑 사귄다고?"
"야!!!"
"이글. 그런 게 아니다."
눈가에 눈물 방울을 단 벨져는 동생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다이무스는 두 동생때문에 골치가 아파와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만우절이다. 웬만한 건 다 장난이고 거짓말이라는 말로 넘길 수 있다. 침착해야 한다, 다이무스 홀든.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루이스의 말버릇을 속으로 외쳤다. 부모님이 안 계신 이상 두 동생을 돌보는 것은 오롯이 제 책임이다. 다이무스는 벨져를 약올리다 달아나는 이글과 그를 쫓아가는 벨져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인 루이스는 그의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잡아...올까요?"
"...부탁하지. 기왕이면 슬리데린 기숙사로."
"넵."
루이스는 다이무스를 뒤로 하고 강의실을 나갔다. 얼음 레일을 깔고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에 이어 복도에서 이글 녀석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래야 만우절이지. 다이무스는 마음을 다잡고 루이스가 두고 간 책과 가방을 대신 챙겼다. 잠시 이글이 사고를 안 치고, 평화가 이어진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이 바보였다. 다이무스는 문 앞에 서있던 그리핀도르 반장에게 다가갔다.
"이글 녀석이랑 전쟁을 하고 있다고."
"아, 뭐, 뭐...."
"협력하지."
당황해 눈을 피하는 그의 어깨를 탁 잡은 다이무스는 더없이 진지하게, 순도 100%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리핀도르의 반장은 처음에 무슨 소리를 들었나 하는 벙찐 얼굴로 다이무스를 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구경을 하러 왔던 학생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해 곧 박수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앙숙 슬리데린과 그리핀도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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