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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벨져] 젊은 왕과 집사, 그리고 연적
※ 겨울왕국 패러디 티엔루이벨져
생각하신 거랑 많이 다를 것 같아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ㅠㅠㅠㅠㅠ
흐으윽 부디 어여삐 봐주세요 ;ㅁ;)S2
올해로 젊은 왕을 모신지 이십년이 되는 티엔은 왕의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선 문지기들과 짧게 눈인사를 하고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할 땐 계란을 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고, 정중하게 세 번.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매일 그러하듯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티엔은 문을 열어 옆에서 세숫물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함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하얀 도자기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붓고, 티엔은 창문을 가린 두꺼운 암막 커튼을 젖혔다. 강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며 방 안을 밝히고, 상쾌한 아침 바람이 세 사람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침대의 얇은 천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라의 백성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젊은 왕은 꿈틀거리며 창문의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시녀가 갈아입을 옷을 내오는 사이 티엔은 침대로 다가갔다. 늘 보는 풍경이긴 하지만 왜 이 넓은 침대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는지. 티엔은 베개를 끌어안고 이불에 파묻혀있는 왕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전하. 일어나셔야 합니다. 홀든 경이 조회 전에 뵙자더군요."
"우으응…, 5분만……."
"그렇게 말씀하신지 5분 됐습니다. 일어나시죠."
티엔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는 왕의 어깨를 잡아 흔들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 역시 매일 아침 겪는 것이지만 빨리, 제대로 깨우려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일어나라."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않던 왕이 눈을 떴다. 채 눈을 다 뜨지 못할 정도로 잠에 취해서 저를 찾는 붉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워 티엔은 그의 눈꺼풀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작은 애정 표현에 루이스는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눈꽃이 피어나는 듯한 미소에 티엔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왕위에 오른 지가 벌써 육년인데, 아직도 어릴 때 버릇을 버리질 못한다. 티엔은 루이스의 잠버릇을 걱정하면서도 제게만 아침을 허락하는 그가 사랑스러워 이 짓을 그만두질 못하고 있었다. 왕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사람이 나쁜 버릇을 들이다니, 이래서야 집사 실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십여 년 넘게 그를 돌본 티엔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루이스의 미소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매번 다짐하지만 또 매번 그 미소에 지고 만다. 티엔 정은 대개 거의 대부분의 면에선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남자지만 이십여 년을 돌본 왕 앞에서 만큼은 저도 모르게 약해지곤 했다.
"티엔……."
제게 뻗는 손을 맞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재우고 면회 요청을 거절하고 싶지만 상대는 홀든이었다. 그것도 둘째. 티엔은 이불 째로 루이스의 몸을 끌어당겨 등을 토닥였다. 루이스는 티엔의 품에 얼굴을 묻고 부비며 어리광을 부렸지만 티엔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벨져 홀든이 신경질을 낼 거다. 일어나서 잠깐 얼굴이라도 비춰."
"벨져?"
루이스는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싫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홀든이 틀어쥐고 있는 막대한 부와 그를 기반으로 설립된 은행은 아무리 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푸대접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루이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시무룩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빠른 행동에 티엔은 루이스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루이스는 바로 슬리퍼를 신고 세수를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하루의 시작이라 티엔은 수건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서 수건을 받아들고 나가라 눈짓했다.
"오늘은 또 뭣 때문에 왔대?"
"아침에 긴히 할 말이 있다더군."
"군사 동맹 얘기는 안 꺼내면 좋으련만……."
티엔은 세수를 마친 루이스에게 수건을 건네고 옷을 가지러 돌아섰다. 얼음을 다루는 힘을 타고난 루이스는 그 능력 때문에 채 다섯 살도 되지 않아 외딴 탑에 유폐됐다. 말이 보호지, 감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루이스를 돌본 게 티엔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시중을 든 건 티엔이 아니라 티엔의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를 돕다 보니 어느 순간 루이스를 돌보고 있었다. 처음 루이스를 봤을 때 티엔은 제 눈을 의심했다. 말로 듣던 왕자님은 이야기에 나오는 야수처럼 흉악하게 생긴 괴물도 아니고, 괴팍하거나 까탈스럽지도 않았다. 떼를 쓰는 법도 거의 없는 착하고 순한 아이일 뿐이었다. 얼음을 다루는 능력만 아니면 그냥 동네에서 볼 법한 착하고 순한 아이에 불과했다. 탑에 사는 왕자님을 두고 무성한 소문 중에 맞는 거라곤 손에서 얼음을 만들어내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루이스."
"응?"
티엔은 저를 향하는 시선에 루이스에게 다가가 입술을 맞췄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옷의 단추를 푸르던 루이스는 갑작스런 키스에 놀랐지만 혀를 얽으며 입안을 희롱하는 연인을 따라 눈을 감았다. 허리를 당겨 배를 맞대고 점점 더 농염해지는 키스에 아침부터 머릿속이 비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으려는 입술이 떨어지고, 키스 대신 살짝 입술을 맞대고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끝을 맺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의 어깨를 잡고 다시 입을 맞추자 티엔은 루이스의 뺨을 양 손으로 감싸더니 이마와 코, 입술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니다."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놓았다. 그제야 루이스는 티엔이 왜 이러는지 눈치 채고 그의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였다.
"티엔.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 그래."
루이스는 슬며시 웃고는 돌아서서 잠옷을 벗었다. 아침햇살 아래 드러난 매끈하고 흰 살결. 그 피부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알기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다시 침대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탑에서 십여 년을 보낸 루이스지만 왕의 재목으론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왕자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떨어지는 면도 없었다. 물론 어릴 땐 더러 가끔씩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방을 꽁꽁 얼려버리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결국 능력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육년 전 전쟁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탑을 나오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 적은 강력했고, 채 세 달도 되지 않아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왕궁 앞까지 도달했을 때, 왕자들과 귀족들은 제일 먼저 달아났다. 수성전이 진행되는 도중 티엔은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루이스를 데리고 달아나려 했다. 일방적인 침략 전쟁은 얼굴도 모르는 형들과, 자식을 버린 왕이 받는 벌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방을 서성이던 루이스의 손을 잡고 티엔은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단 둘이 의지하며 몸까지 섞은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왕의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연인을 해치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놓았다. 놓고,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을 기회라며 전란의 중심으로 가버렸다. 티엔은 그제야 제가 모시던 사람이 진짜 왕이라는 걸 깨달았다.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자. 그 등을 보며 티엔은 가슴 속에 울컥 북받치는 감정을 삼키며 맹세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끝까지 따르며 보필하겠노라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버릇처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그의 편이 되어야 했다. 지금 그를 잡는 건 제 욕심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홀로 나아가 손을 푸른 결정으로 물들이고 얼음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기이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에 침입자들은 혼비백산해 물러났고, 루이스는 끝까지 맞서 싸우던 병사들과 국민들을 모아 그들을 몰아냈다. 상황을 역전시키고 바다마저 얼려 그들을 포로로 잡은 루이스는 배상금 문제는 물론 전후사고 처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심은 나라를 버린 왕자며 귀족이 아닌 '영웅'에게 쏠렸다.
얼음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더 이상 배척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뭄이 심한 지역의 우물에 저수지를 만들고, 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피서지를 만드는 고마운 능력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나 연합국의 수장으로부터 친필 편지와 선물이 도착했다. 더 늦기 전에 변경에서 적을 막은 덕에 피해를 줄였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받은 황금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피해보상금으로 분배했다. 물론 피해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도 루이스의 뜻이었다. 이쯤 되니 성도 받지 못한 왕자가 왕이 되는 것에 반기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탑을 나와 왕위에 올라서도 티엔은 변함없이 그 곁을 지켰다. 다만 루이스의 능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다 보니 시시때때로 동맹을 맺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보려는 나라들이 손을 뻗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제 힘이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거절하고 있지만, 그게 계속되니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루이스가 괴로워할 때마다 그 옆을 지키고 위로하는 것 역시 티엔의 몫이었다.
"그나저나 벨져라…, 다른 형제들은?"
"다이무스 홀든은 헬리오스에 있고 이글 홀든은 아직 뻗어있다."
티엔은 루이스의 옷을 입혀주며 대답했다. 단 둘이 있을 때도 보좌관 티엔 정과 연인이자 오랜 친우 티엔 정을 구분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태반이라 말을 조심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말을 낮췄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진 루이스는 티엔을 돌아봤다. 같이 지낸 세월만 이십년이 넘다 보니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속내가 읽히곤 했다.
"괜찮다니까."
"……. 하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럼?"
"…그 남자가 널 나와 같은 눈으로 보고 있어서."
루이스는 대답 대신 말도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 사람들 일엔 한없이 예민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선 눈치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그런 면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이럴 때 만큼은 자기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지 모르는 무방비한 연인이 원망스러워지곤 했다. 루이스는 피식 웃고는 티엔을 끌어안았다. 기껏 차려입은 옷이 구겨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이자 티엔이 루이스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티엔은 빙그레 웃는 루이스와 눈을 마주하고, 피식 웃으며 입을 맞췄다. 이젠 정말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 남자가 제 연인을 집어삼키려 들더라도 가야 했다. 오늘따라 접견실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늦는군. 차를 마시는 손동작만으로도 우아함과 기품이 절로 묻어나는 은발의 사내, 벨져 홀든은 오지 않는 젊은 왕을 기다리며 붉게 우러난 차의 향을 음미했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산에서만 나는 찻잎은 이 나라의 특산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벨져가 지금 마시는 것은 특상품이라 더욱 그 향이 은은하고 짙었다. 처음 마실 땐 그냥 물이나 다름없지만 입 안에서 머금고 넘길 때야 비로소 그 향이 은은하게 퍼지다 눈이 녹듯 사라지는 게 특색이었다. 꼭 누구처럼 말이지. 벨져는 쿠션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꼬았다.
'영웅' 루이스라길래,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이미지의 마법사를 떠올렸는데 막상 나온 게 거리를 지나다보면 흔히 있을 것 같은 수수한 청년이라 꽤 의외였더랬다. 왕이 되기보다는 어디 도서관의 사서나 하면 딱 어울릴 법한 얼굴이라 벨져는 그를 얕보고 말았다. 그 수수하고 곱상한 얼굴 뒤에 싸늘한 얼음 칼날을 숨기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리 쉽게 체관을 내주지 않았을 텐데. 제 오만이 불러온 실수 때문에 홀든 은행은 루이스에게 없다시피 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딱 원금 상환 그게 전부다. 그 없느니만 못한 이자 덕에 이렇게 가끔 찾아와 닦달하러 올 수 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저를 두고 시작된 뒷말과 막내동생의 놀림을 피할 수 없었다.
언젠가 벨져 홀든이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는 날이 오리라. 세간에서 그렇게 떠드는 바와 달리 벨져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끈질기게 찾아오는 건 사소한 복수나 앙갚음 때문이 아니라, 조금 더 심오한 흥미 때문이었다. 이주 만인가. 벨져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곧 내륙엔 쨍한 여름이 다가오는 지라 얼음 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고, 내륙의 화폐를 이쪽의 화폐로 바꿀 정도의 현금을 보유한 건 홀든 은행밖에 없었다. 벨져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는 루이스를 비롯한 대신들과 치열하게 환전 비율을 가지고 얘기를 하다 루이스가 쐐기를 박기 전에 회의를 끝내고 나왔다. 이번에도 져준다면 다이무스는 물론 아버지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한 걸 내준다면 또 모를까, 아무리 루이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번 만큼은 쉽게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했군요."
"그러게. 많이 늦었군. 내 시간은 일 분 일초가 돈인데 말이야."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뭐, 이런 작은 나라에선 아무래도 최상품을 구하긴 힘들겠지."
"이해해주셔서 고맙군요."
명백한 도발에도 루이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며 벨져의 앞자리에 앉았다. 늘 데리고 다니는 검은 머리의 집사가 차를 내오자 고개를 돌려 눈웃음을 치는 게 영 신경에 거슬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벨져는 턱을 살짝 올리고 팔짱을 꼈다.
"너, 이리로. 기다리느라 차가 식었다."
차를 마시던 루이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제게 향했다. 당장이라도 그 능력을 사용해 저를 꽁꽁 얼려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눈이었다. 역시, 얼빠지게 순한 얼굴보단 이쪽이 낫다. 벨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집사는 흠 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동작으로 벨져의 잔에 차를 따르고 허리를 숙인 후 물러났다. 루이스의 최측근이라고 해도 제가 우위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벨져는 잠시 싸늘한 눈빛으로 저를 경계하고 있는 그와 눈을 맞춘 후 다시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 적개심을 감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얼음 호수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이른 아침부터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그냥, 보고 싶어서."
"…전 농담은 재미있는 게 좋습니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벨져는 확 일그러지는 루이스의 얼굴에 흥이 났다. 질색하는 루이스의 뒤에 선 집사의 얼굴이 같이 굳는 게 영 마뜩찮았지만 그보단 눈앞의 남자가 더 중요했다. 벨져는 쿠션에 등을 기대며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벨져는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눈을 감고 피식 웃었다.
역시, 가지고 싶다. 이글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질색했지만 벨져는 이글의 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벨져는 이 굳건한 얼음벽 같은 사내의 목에 목줄을 채워 제 발 아래 두고 싶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강하고 아름다운 짐승이다.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열에 달뜬 숨 사이에 제 이름을 부르는 달콤하고도 짜릿한 상상에 벨져는 눈을 떴다.
"사실,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서밖에 안 나는 거라……. 그걸 주면 그깟 돈 몇 푼은 문제도 아니지."
"…말씀하시죠."
벨져는 선심 쓰듯 먼저 속내를 털어놨다. 그래, 그걸 가질 수 있다면 그깟 돈 몇 푼쯤 대수롭지 않지. 루이스의 얼굴은 여전히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들어올 때 잠시 띠웠던 가식적인 미소 대신, 잔뜩 날을 세워 저를 위협하고 경계하는 이 붉은 눈과 차가운 표정이 벨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너."
"농담이 과하십니다, 홀든 경."
"하, 개는 개답게 주인 아래 엎드려 있어야지. 식탁에 올라오려 하면 쓰나."
놀란 나머지 말도 못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루이스 대신 그의 집사가 끼어들었다. 그 포커페이스가 깨지고 동요하는 걸 더 감상하려던 벨져는 흥을 깬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가차 없이 깎아내리는 말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도 없는 사이라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주고받는 눈짓도, 자잘한 습관 하나까지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보살피는 것도, 이따금 애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속닥이는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이 남자는, 루이스를 돌봐야할 어린 동생이자 왕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연인으로 보고 있다. 과거가 어찌 됐든 벨져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먹어치우고 나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벨져는 짐승의 눈을 한 티엔 정을 피하지 않았다. 치열한 눈싸움은 한 사람을 둔 사내들의 갈등 그 자체였다.
"그쯤 하시죠, 홀든 경."
"예의를 가르친 거다, 왕."
"그게 조건이라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벨져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티엔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루이스는 벨져만을 응시했다. 잠시, 그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쉽게 내주겠다고 하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홀든 경이 남색인 것도 모자라 한 나라의 왕을 상대로 몸을 요구했다는 게 알려지면, 그것도 꽤 볼만 하겠군요."
"……."
이 새끼가. 벨져는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밖으로 알리겠다고 협박하다니. 남색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게 알려지면 이미 자신과 루이스에 관해 떠도는 소문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라 추문이 된다. 루이스야 백성을 위해 몸을 바친 왕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를 따르는 동맹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이들이 단체도 돈을 빼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벨져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이를 악물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이스는 평온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벨져의 싸늘하게 식은 눈이 따라붙었지만 루이스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세 걸음도 채 못 가서 벨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더 하실 말씀이라도?"
"흥, 영악하긴. 언젠가 네가 스스로 내 발치에 무릎 꿇게 될 거다."
벨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단단히 봉한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루이스는 티엔에게 눈짓하고는 고개를 돌려 벨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기대하죠. 그럼 이만."
루이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웠다.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찬 접견실을 나오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듯 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걸음 뒤에 따라오는 티엔에게 손을 내밀자 바로 벨져가 내놓은 두루마리가 손에 올라왔다. 홀든의 인장이 납인된 것으로 보아 홀든의 당주가 보낸 게 분명했다.
이미 다 정해져있는 걸 가지고 어제부터 그 짓거리를 하다니. 루이스는 놀아났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불안해하는 티엔도 덩달아 루이스의 무거운 마음에 무게 추를 더했다.
"티엔."
"예, 전하."
"돌아가는 배에 선물로 애완동물 좀 보내. 기왕이면 작고 털 많고 애교 많은 애들로."
"알겠습니다."
루이스는 이글이 고급정보라며 말한 벨져의 약점을 떠올렸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거나 애완동물은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다는 점에서 받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난감한 선물이었다. 어디, 돌아가는 삼일 내내 실컷 즐겨보시지. 루이스는 뜯지 않은 두루마리를 다시 티엔에게 넘겼다. 이른 아침부터 헛소리를 듣느라 기분도 더럽고 배도 고팠다.
"오늘 아침은 뭐야?"
"연어 샐러드를 넣은 샌드위치를 준비했습니다."
"하아, 오늘 들은 얘기 중에 제일 반가운 소리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티엔을 돌아봤다.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불안과 심란해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다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그를 이십년 동안 본 루이스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티엔."
"……."
연인의 이름을 읊조린 루이스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손을 마주 잡아오는 그가 안쓰럽고 또 미안해 루이스는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사랑해.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눈으로 말하자 티엔이 애틋한 눈을 하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두어 번 더 손등을 토닥인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놓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연인을 위로하느라 쉬이 잠들기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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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호감과 흥미 사이 To.닭님
제 사랑 닭님께 드립니다 ><
뭔가 많이 부족하지만 제 사랑으로 받아주세요...!! (전나
재단과 연합의 친선전, 루이스는 무너진 HQ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슬아슬했다아... 긴장이 풀렸는지, 토마스가 털썩 주저앉아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는 피식 웃고는 토마스와 엘리에게 다가갔다. 고생한 후배에게 손을 뻗자 토마스가 저를 올려다봤다.
"둘 다 잘했어. 돌아가면 맛있는 거 먹자."
칭찬 한 마디에 토마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존재하지도 않는 꼬리를 마구 흔드는 착각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신나서 말문을 튼 토마스와 덩달아 신이 난 엘리가 재잘거리기 시작하고, 리스폰 기어의 피터와 이글도 무전기로 떠들어대는 바람에 연합의 통신망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애 둘을 데리고 나오면 항상 이렇게 된다니깐. 그래도 왁자지껄한 게 싫지만은 않아 루이스는 릭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토마스와 엘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보고 있는데 뒤통수에 묵직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랑이라면 투덜거리고 있으니 아니고, 브루스씨는 조금 전에 리스폰 기어로 갔고. 그럼 남는 건 티엔 정 뿐이다. 아니니다를까, 토마스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손을 입가에 대고 속삭였다.
"선배, 티엔 정이 아까부터 선배를 보고 있는데요...."
"응. 알고있어."
"모야? 엘리두 비밀얘기 들을래~!"
엘리가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더 지체했다간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루이스는 토마스에게 잠시 갔다 오겠다며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과연, 등을 돌리자마자 마주치는 검은 눈동자에 루이스는 침을 삼켰다. 굳건한 돌과 같은 그가 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일까. 루이스는 이번 공성을 되짚었다. 듬직한 동료들이 잠시 다른 임무를 하러 가는 바람에 전방에 설 사람이 마땅치 않다보니 뒤에 엘리와 피터, 토마스를 두고 갈 수가 없어 정면으로 파고드는 티엔과 계속해서 마주치긴 했다. 그를 막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절로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이번엔 잘 얼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고르는 사이 거리는 전점 가까워졌고, 루이스는 티엔 앞에 멈춰서 손을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스터."
"...수고했다."
딱히 감정이 상한 건 아니었는지 티엔은 먼저 손을 내민 의중을 파악하려 하면서도 악수를 거절하진 않았다. 하지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시선만큼은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루이스는 태연히 신경 쓰지 않는 척 가볍게 맞잡은 손을 흔들고 놓았으나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의미지.
티엔이 손을 놓지 않는 바람에 꼼짝 없이 잡힌 루이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공성 중에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말이라도 했나. 루이스는 티엔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공성 내내 맞붙으며 호승심을 자극하기라도 한 건가. 후자면 조금 곤란하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서 쉬고 싶기도 하거니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압도적으로 이기거나 져야 하는데, 티엔 정과 전력을 다해 싸웠을 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루이스로서도 예측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걱정을 삼켰다. 다행히도 티엔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고, 루이스는 안도하며 돌아섰다. 일에 관해선 철두철미하지만 은근히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 가급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잘 풀린 거면 좋겠는데. 악수를 하고 돌아서도 후드를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시선은 끈질기게 루이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옵저버로 연합의 공성을 보러 올 때도, 가끔 길을 가다가도 우연히 마주치면 한동안은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영웅이란 이름을 달고 나서부터 웬만한 관심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적당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한게 제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건 티엔 정이 서점에 출석도장을 찍기 시작한지 꼭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참을 만큼 참았고, 이쯤되면 확실히 입장을 정리해 못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다음엔 꼭, 말해야지. 루이스는 그랑플람과 공동작업이 예정된 디시카 순찰 업무를 하겠다고 나섰다. 디시카의 수액 채집구역에서는 뭐가 나올지 모르는 데다 워낙 치안이 좋지 않아 제 몸 하나 정돈 지킬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연합의 주요 자원 지역이니 만큼 그랑플람의 의사를 대표할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니 그랑플람에선 티엔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연합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 말해두면 그도 알아서 포기할 것이다. 아무리 요즘 능력자들의 소속 이적이 잦다고 해도 명색이 '연합의 영웅'이다. 동료들을 저버릴 수도 없거니와 지금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합의 조직들을 앤지에게 그냥 떠넘기고 갈 수도 없었다. 연합 내에는 아직도 앤지를 탐탁지 않아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들을 아우르는 건 전적으로 토니와 흑염 하이드 때부터 연합에 충성을 다한 이들 덕분이었다. 다들 연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이적은 루이스에게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티엔 정이 대체 왜 자신을 노리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 말로 잘 풀면 알아서 포기할 터였다. 루이스는 스케줄을 정리하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제 이름을 적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건 늘상 하는 일이라 왜 나가냐 묻는 사람도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음."
예상한 대로 나타난 티엔은 루이스의 인사에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손을 내밀자 굳센 손으로 악수를 받은 티엔은 전과 달리 금세 손을 놓았으나 그 시선만큼은 그대로였다. 신경 쓰이는 건 매한가지지만 우선은 일이 먼저다. 루이스는 챙겨온 지도를 펼쳐 보여주며 오늘 돌아볼 지점을 짚었다. 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를 간단히 묻고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확실히, 유능한 사람이라 그런지 일은 별 무리 없이 수월하게 풀려나갔다. 일이라고 해도 그냥 디시카의 세계수 근처를 순찰하는 것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디시카의 거주지역을 반쯤 돌고 수액 체취 구역으로 들어서는데 잠시 세계수에 눈을 판 사이 돌부리에 발이 턱 걸렸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라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성대하게 넘어질 거라 생각하고 땅을 구르는 것만은 피하려 손을 뻗었으나 강한 충격을 마주하는 대신 허공을 휘저었다. 루이스는 제 허리를 붙잡은 단단한 팔의 감촉에 눈을 떴다. 가깝다. 티엔 정의 그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괜찮나?"
"아, 예.... 감사합니다."
"주위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밑도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래도 안개가 끼고 나무가 무성한데 모자까지 쓰니 시야가 가리기 마련이지."
하랑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런가, 후드를 살짝 걷으며 하는 선생같은 말투에 슬쩍 민망함이 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두 살 차인데. 후드를 걷은 티엔의 손이 내려오며 귀를 스쳤다. 루이스는 민망한 나머지 후드를 정리하는 척 티엔의 손이 스친 귀를 매만지며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니, 고개를 숙이라는 게 아니다."
불쑥 다가온 손이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 강하게 올린 것도 아니건만, 자연스레 그 손을 따라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잠시 말 없이 그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티엔의 눈이 흔들렸다. 살짝 귀가 붉어진 것 같은데 어디 안 좋기라도 한 건가 싶어 루이스는 진지해졌다. 정제되지 않은 나무 수액때문인가. 능력을 강화하는 안개를 빨아들여 생긴 나무 수액은 장비에 쓰이는 것처럼 정제되지 않아 안개의 농도가 높았다. 능력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위험하다.
루이스는 손을 들어 티엔의 이마를 짚었다. 티엔이 눈에 띠게 움찔하며 손목을 잡자 그제야 자신이 무례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무 수액의 영향으로 몸이 안 좋은 거라면 여기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니, 괜찮다."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신중하게 생각해보시죠."
루이스는 티엔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티엔은 여전히 진중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고, 루이스는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내민 손에 티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루이스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냐는 듯한 눈빛에도 루이스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길이 복잡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 생겨도 이러고 있으면 바로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불쾌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뭔가 했더니, 손을 잡으라는 거였나. 티엔은 방금 전까지 순진하게만 보이던 눈이 순식간에 단호한 빛을 띠는 걸 보고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이 사내는 제 컨디션이 안 좋은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티엔은 가볍게 숨을 토했다. 그냥 자세를 바로잡아주려 한 것 뿐이었다. 다만 루이스가 저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는 바람에 잠시, 놀랐을 뿐이다.
아무리 그가 곱상하니 선이 고운 미인이라 해도 엄연히 남자다. 그건 분명히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년 같은 눈을 하고 올려다보는 바람에 티엔은 순간 달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 하지만 곧이 곧대로 말하는 건 실례가 되는 일이기에 티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걸 말해서 괜히 그의 자존심과 명예에 흠을 내느니 오해를 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불가항력으로 다가온 떨림에 얼굴이 붉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럼 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마에 손을 얹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다가온 손에 다시 한 번 놀란 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의 냉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같은 남자에게 두근거리다니.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맞잡은 채 가라앉을 생각을 않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고민일 뿐, 맞잡은 손의 감촉에 두근거림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디시카의 나무를 돌아봤자 나무일 뿐, 딱히 주목할 점은 보이지 않다 보니 자꾸만 다른 게 티엔의 시선을 빼앗았다. 후드 아래 드러난 희고 가는 목덜미라던가, 단단하고 곧게 뻗은 손목과 팔이라던가. 티엔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꼭 쥐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렇게까지 제 흥미를 끌다니,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티엔은 지난번 친선전을 떠올렸다.
털썩 주저앉은 마에스트로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주는 젊은 영웅과, 살짝 머금은 그 미소가 문득 시야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비슷하다 보니 사정거리 안에 항상 그가 있었다. 그날 따라 어린 아이들을 대동해서인지 앞에 아론 휴톤이나 레베카 러쉬톤이 있을 때보다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잦았다. 평소엔 뒤로 돌아오거나 결정으로 만들 레일을 타고 빠르게 미끄러지며 저를 지나치는 바람에 알고도 못 막는 게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주제에, 그날 따라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브루스와 자신이 앞길을 터도, 그와 마에스트로의 굳건한 얼음벽을 넘을 수 없었다. 물론 하랑이 미숙함과 챌피의 늦은 서포트 역시 영향을 끼친 걸 빼놓을 순 없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영웅과 맞닥뜨렸을 때 낮게 타오르는 그 붉은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왜 차가운 드라이아이스에 화상을 입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머리로는 뒤로 넘어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 붉은 눈동자를 지나칠 수 없었다. 자꾸만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게 문제였다. 그 붉은 눈동자가 다른 이가 아닌 자신만을 향할 때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흥분됐다. 조금 더, 오래 붙어보고 싶다. 티엔은 그와 면대면으로 붙었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귀를 쨍하니 울리며 깨지는 산탄총, 그 푸른 결정이 깨지고 바스라지며 비로소 보이는 붉은 눈동자. 티엔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한 번 쯤은 꺾어봐야 할 사내다. 티엔은 광장에 돌아와서도 그를 주시했다. 마에스트로와 이야기하던 그가 무슨 일인지 티엔을 돌아봤고, 잠시 둘은 눈을 맞췄다. 티엔이 아무 말도 않자 루이스는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스터.'
'...수고했다.'
티엔은 얼음의 냉기가 남은 차가운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힘이 실리지 않은 서늘한 손, 변할 것 같지 않은 그 절대영도의 무표정에 잠시 서린 곤혹. 티엔은 그제야 제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손을 놓았더랬다. 손바닥에 닿았던 촉감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게 아쉬웠다.
잠시 그 날을 회상하던 티엔은 제 손을 잡아 끄는 루이스의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본 게 얼마만인가. 그것도 남자들끼리. 이래서야 그냥 산책을 나온 거나 다를 게 없었다. 자욱하게 낀 안개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아니면 영락없이 숲길을 걷는 피크닉이다. 티엔은 맞잡은 손의 온기에 이끌려 걸었다. 끝도 없이 걸을 것 같던 시간은 금세 끝나고, 루이스가 티엔의 손을 놓았다. 손에 남은 감촉이 괜히 아쉽고 서운해 티엔은 미지근해진 제 손바닥을 잠시 바라봤다.
"저..., 미스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차분하게 길잡이 역할을 하던 루이스가 결연한 눈을 하곤 티엔을 돌아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티엔이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숨을 집어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연합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뜬금없는 소리에 티엔은 드물게 되물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루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뭔가 혼란스러운 듯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 절 스카우트하려는 게 아닙니까?"
"오고 싶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루이스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말을 멈췄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이지? 루이스는 다른 가정을 내놓았다.
"아니면 결투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나쁘지 않지.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답을 들어도 이해가 가기는 커녕 더 깊은 미궁 속에 빠진 느낌이다. 루이스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는 티엔의 얼굴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그럼 대체 왜 저 그렇게 보시는 거죠...?"
못 물어볼 건 또 뭔가. 루이스는 솔직하게 자신을 따라붙는 시선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팔짱을 낀 티엔은 그마저도 못 알아들은 눈치라 루이스는 답답해졌다. 이쯤되면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 남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자각 자체가 없는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아파오는 머리에 이마를 짚었다. 이걸 어찌한다. 스카우트도, 결투도 아니라 해도 그의 집요한 시선이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루이스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아닙니다. 제가 착각했군요."
"내가 널 어떻게 본다는 거지?"
제가 던진 질문보다 가감없이 돌아오는 질문에 루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지금 저를 보는 이 눈빛.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맹수의 눈빛. 거기에 적의가 섞이지 않은 게 마치....
"혹시, 제게 호감을 갖고 계십니까?"
침대에 이르기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묘한 텐션, 그 눈빛이 아닌가. 루이스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순식간에 둘 사이를 메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티엔 정이 한 걸음 다가왔다.
"호감이라.... 잘 모르겠군."
"...그럼,"
"하지만, 흥미는 있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드물게 열기가 섞인 목소리가 낯설었다. 다가오는 손에 흠칫 움츠리자 티엔의 손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뺨을 쓸고, 목을 스치며 내려갔다. 후드를 벗겨낸 티엔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눈을 감았다. 그의 손끝이 닿은 자리가, 덴 듯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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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밑도 끝도 없이 양궁au
그냥 갑자기 뜬금없이 떠오른 양궁au
양궁은 다른 스포츠와 달리 오로지 홀로 고고한 스포츠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이고, 아무리 단체전이라 해도 활을 들고 선 순간만큼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도, 그렇다고 너무 빨리 쏘아서도 안 된다. 철저하게 계산된 조준, 망설임을 남겨선 안 되는 슈팅. 그렇기에 벨져에게 양궁은 최적의 스포츠였다.
날씨 좋다. 벨져는 잘 정리된 화살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사격장에 들어섰다. 방금 전까지 바람 한 점 없더니, 파이널이 시작되자 갑자기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건 좋은 징조다. 벨져는 승리의 여신이 오늘도 제 손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규모도 상금도 작은 대회지만 어쨌거나 이번 대회는 벨져의 고교 데뷔전이었다. 초등학생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벨져는 그동안 꾸준히 ‘홀든’의 명예에 걸맞게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컵과 금메달을 거머쥐며 유망주로 입지를 굳힌 선수였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바뀌는 건 없다. 이제 겨우 격에 맞는 상대들을 만나게 된 것 뿐이었다. 승리는 언제나 제 것으로 정해져있었고, 오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타고난 신체조건과 탁월한 집중력, 그리고 무엇보다 망설이지 않는 빠른 슈팅. 벨져는 화살이 제 손끝을 떠나 과녁에 꽂히는 그 사이의 공백을 즐겼다. 원하는 대로 꽂히는 화살과 정상에 선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벨져는 빨리 쏘는 만큼 힘도 좋았기에 바람이나 날씨의 영향에도 강한 편이었다. 날씨가 궂을 때면 벨져와 다른 선수 사이의 점수 격차가 더 벌어지곤 했고, 그런 점에서 이번 경기도 니케가 제게 날개를 펴주는 셈이었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수가 사석에 들어오는 것을 흘끗 바라봤다. 특이한 색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끈 탓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쳐다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여간 영국 놈 아니랄까봐 칙칙하긴. 벨져는 짧은 감상을 끝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곧 마이크로 제 이름이 호명됐고, 벨져는 일어나 활을 들었다. 성인급도 잘 안 쓰는 무거운 활. 그 무게를 한 팔로 들고 벨져는 사석에 섰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벨져는 자기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말하는 문구를 떠올렸다. 그 말 그대로 벨져는 화살을 오래 들고 있는 법이 없었다. 숨을 고르고, 시위를 당겨 스트링이 입술과 턱에 닿도록 당기고 잠시 숨을 멈춘다. 하나, 둘, 셋. 조준을 마친 벨져는 팔꿈치를 올리고 화살을 쐈다. 화살은 바람을 찢고 날아가 노란 원 안에 꽂혔다. 9. 시작으로 나쁘지 않다. 가볍게 활을 돌리며 벨져는 다음을 준비했다. 살짝 돌아간 암가드를 절히나느데 옆 사석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순간 불어오는 강한 돌풍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하다하다 바람까지 제 손을 들어준다. 쏘고 울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자 정확히 노란 원 안에 꽂힌 화살이 보였다. 10. 오조준을 한 게 바람을 탔나. 자기 차례를 알리는 신호음에 벨져는 활을 들었다. 경기라고 해봤자 매일 하는 연습이나 다를 게 없다. 발사 신호음이 울리고, 벨져는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화살을 떠나보냈다. 9. 이번에도 화살은 9에 꽂혔다. 10에 가깝긴 했지만 그래도 9는 9였다. 강한 바람에 경로가 살짝 휜 탓이었다. 어긋난 계산에 벨져는 혀를 찼다.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지만 제 계산이 틀렸다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조금 더 힘을 들였어야 했나. 벨져는 과녁을 보며 팔짱을 꼈다. 옆에선 다시 신호음이 울렸다. 그냥 빨리 끝내지. 벨져는 바람을 맞으며 조금 시간을 들이라는 제레온의 충고를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정도의 판단은 모두 제 몫이다. 섬광같은 화살은 벨져 홀든의 특기이자 자랑이었다. 활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9. 이번에 잡지 못하면 꼴이 우스워질 판이었다.
벨져는 화살을 끼웠다. 평소 하는 것처럼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고, 가늠자를 통해 과녁의 정중앙을 응시했다. 숨을 고르고, 때를 기다려 쏜다. 화살을 정중앙을 비껴나 두 번째 원의 끄트머리에 꽂혔다. 화살이 꽂힌 걸 본 벨져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총합은 27, 재수가 없으면 26. 이렇게 되면 이번 세트를 내줘야 할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내가, 왜? 왜 초조해하는 거지? 나는 벨져 홀든이다. 한 세트쯤 내주더라도 결국 이기는 건 나다. 벨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제 상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들었는데, 대충 흘려듣다보니 영국인이라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벨져는 사석에 서서 화살 두 개가 중앙에 가깝게 꽂힌 과녁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영국놈을 바라봤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옆선이 곱상하니 가늘다. 잠시 그 옆얼굴을 보는 동안, 화살이 활을 떠나며 그의 손 안에서 활이 미끄러지듯 돌았다. 얄궂게도 그의 화살은 벨져의 화살이 그랬던 것처럼 8과 9 사이의 선에 꽂혔다. 남은 건 심판의 몫이지만, 그래봤자 운이 좋아야 비기는 거였다. 기록지를 든 심판들이 과녁 앞을 오가더니 스코어가 스크린에 떴다. 제 3라인, 벨져 홀든, 9, 9, 8. 졌다. 벨져는 제게서 2점을 따간 영국놈의 이름을 확인했다. 제 4라인, 루이스, 10, 9, 9. 망할.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구겨졌다.
“하...! 제길....”
욕보다는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정색한 벨져는 다시 활을 들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딴 새끼한테 지다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벨져는 다시 사석에 섰다. 성도 없는 고아같은 게 발을 디딜 판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줘야 했다. 괜히 덤볐다 허송세월 하느니 뭣 모르는 녀석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납작 엎드리게 해주지. 벨져는 활을 들었다. 화살촉엔 오만이 서렸다. 결과는 6:0. 참패였다.
***
벨져는 대기실을 뒤엎었다. 진 건 진 거다. 명백하게 졌다. 그 사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코어가, 과녁에 정확히 꽂힌 화살이 입증했다. 우승을 확신한 경기에서, 겨우 16강에 떨어졌다. 토너먼트식 경기에선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 벨져는 분을 삭이며 제게 쓰디 쓴 패배를 맛보게 한 빌어먹을 개새끼의 이름을 목 안쪽으로 곱씹었다. 제게 집중됐어야 할 언론의 플래시는 제레온이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모두 그에게 쏠렸다. 결과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준결승에서 스트링이 끊어지며 손을 다친 바람에 일종의 패널티가 있었음에도 결승을 속행해 퍼펙트 골드로 한 세트를 따낸 무명의 신인 선수. 심지어 이미 승패가 결정된 마지막 세트에서 루이스는 마지막 화살로 과녁의 정중앙에 설치된 카메라를 깨버렸다.
무명의 신인이 영웅처럼 나타나 벨져 홀든을 꺾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올라온 기사의 타이틀이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벨져 역시 그에 대한 정보를 기사로 볼 수밖에 없었다. 벨져는 차 안에서 태블릿을 켰다. 온통 벨져를 꺾고, 라는 말로 도배되다시피 한 기사들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던 벨져는 마침내 쓸만한 인터뷰 기사를 찾아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시작했다는 인터뷰를 시작으로 벨져는 루이스에 대한 정보란 정보는 다 끌어 모았다. 그는 예상대로 고아였고, 저를 누른 그 경기 전에는 대회에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양궁을 시작한지 채 일 년도 안 되어 준우승을 한 ‘영웅 루이스’.
이글이 집착도 그 정도면 병이라고 질색하며 놀려도 개의치 않았다. 벨져는 필사적으로 제가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부모가 천재라던가, 아니면 수없이 연습을 했다던가. 하지만 루이스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아마 그 본인조차 모를 만한 자료들 안에선 루이스가 양궁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전부였다.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코치도 없이 고작 친구랑 일 년 한 걸로 필드에서 그렇게 계산을 해서 쏜다고? 벨져는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내팽개치길 반복했다. 그리고 언론이 루이스 영웅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선수단을 나왔다.
선수단을 나온 벨져는 홀로 연습에 매진했다. 때마침 제레온이 도핑사건에 연루됐고, 사람들은 벨져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고 수근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머릿속에 벨져 홀든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새겨주지 않으면, 편히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떠드는 것과 달리 벨져는 진 것 자체는 금방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이긴 횟수가 더 많고, 앞으로도 이길 날이 많다. 제가 너무 여유롭게 생각해서, 기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오만하기 그지없어서 방심한 대가를 치른 것 뿐이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해도 가시지 않는 게 있었다.
벨져는 이걸로 딱 오백발 째의 화살을 떠나보내며 다시 그 말간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들이 묻기 전까지 벨져 홀든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 게 제일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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