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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Maker
※ 핵전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일어난 근미래, 센티넬버스, 티엔(29), TS루이스(17)
탱이 원딜을 물었다. 하랑은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해 다가오는 적에게 스킬을 쏟아부었다. 4단계, 이번 한타만 이기면 이긴다. 팽팽한 접전 끝에 마지막 한타라 하랑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막 지원을 온 같은 팀 팀원들이 뒤로 돌아오는 걸 본 하랑의 검지가 바빠졌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위험하다. 하랑은 마우스와 키보드 위에 올린 손을 바삐 놀렸다. 집에 오자마자 시작한 게임은 지금까지 네 판을 모조리 졌다. 이번 판이라도 이겨야 속이 풀릴 것 같은데, 아군이 제법 하는 대신 적도 만만치 않았다. 그 전까지 트롤러들을 만난 하랑은 1인분을 하기 위해 집중했다.
"하랑."
"아, 왜!! 나 지금 바빠!!"
하랑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짜증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저를 향해 달려오는 적을 제 때 피했을 터였다. 이제 오분이면 되는데 고작 그걸 못 기다려서 방까지 올라오고. 하랑은 제 보호자가 무슨 소리를 하던 헤드셋도 빼지 않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좀, 한 판만 이기면 안 되냐고. 하랑은 반피가 된 제 캐릭터가 빨리 일어나길 바라며 남은 스킬을 맞춰 반격할지, 아니면 도망을 가야할지 고민했다. 믿음직한 아군 탱커는 적 원딜들을 쫓느라 바쁘고, 다들 제게 와줄만한 여유가 없어보였다. 어떻게든 지금 이 난관을 빠져나가야 한다.
하랑은 캐릭터가 일어나자마자 제 앞의 근딜러를 눕혔다. 바로 궁극기를 쓰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화면이 멈췄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열심히 누르던 하랑이 무슨 일인지 몰라 잠시 벙쪄있는 사이, 게임 화면에 서버에 접속할 수 없다는 문구가 떴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제 사부가 랜선을 들고 서있었다. 울컥 차오르는 화에 하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씨발 뭐하는데!"
"루이스가 늦으니 가서 데려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다음엔 랜선을 뽑겠다고도 했지."
"아오, 씨발!! 존나 다 이긴 판이었다고!!"
"듣지 않은 건 너다. 이미 전에도 몇 번 경고하지 않았나."
"3분이면 됐다고!"
하랑은 티엔의 변하지 않는 무표정에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짜증은 나는데, 덤벼봤자 진다는 걸 아니 뭐라고도 못 하겠고, 승질이 난 하랑은 애꿎은 의자를 발로 찼다. 바퀴 달린 의자는 주르륵 밀려가 벽에 부딪히고, 하랑은 행거에 대충 걸어뒀던 바람막이를 집어들었다.
"에이씨, 걔가 어디 그냥 기집애야? 걜 건드리는 사람이 더 위험할걸? 오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한 시간 전에 센터를 나왔는 연락이 왔다."
"뭐?"
한 시간이면 이미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짜증을 내던 하랑은 갑자기 드는 걱정에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핸드폰의 잠금을 열어 봐도 딱히 연락이 온 건 없다. 센터에 다녀와야 한다길래 혼자 보내긴 했지만, 언제든 틈만 나면 나가 놀려는 저와 달리 그녀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라 어디 다른 곳으로 샐 리도 없었다.
"전화는?"
"안 받는다."
"에이씨...."
하랑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바로 코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다. 티엔은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버리고, 하랑은 오늘 티엔이 모처럼 고기 요리를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주방을 기웃거리다 한입 주워먹는 것보다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사람이 먼저라 하랑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꽤 날이 쌀쌀하다. 몸을 스치는 한기에 부르르 떤 하랑은 제 양팔을 쓰다듬으며 걸었다. 저보다 옷도 얇게 입고 다니는 녀석이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고 사람을 걱정시키는지. 하랑은 이긴 거나 다름없던 마지막 판을 떠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아가면 승리 대신 깎인 알피와 중단 전적이 저를 반길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랜선을 뽑을 수가 있지. 하랑은 저를 방해한 사부의 그 철면피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언젠가 톡톡히 그 값을 치르게 하리라.
그건 물론 사부가 제 방까지 찾아와 마중을 보내게 만든 녀석도 마찬가지다. 하랑은 동갑내기 여자애를 떠올리곤 애꿎은 돌맹이를 걷어 찼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렴, 걔가 어디 늦으려고 늦는 앤가. 그 무뚝뚝하고 목석같은 정티엔이 죽고 못 살 정도로 아끼는 애다. 그 녀석은 무슨 일이 생겼으면 생겼지 절대 어디 다른 곳에 새거나 할 위인이 아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하랑의 걸음이 빨라졌다. 버스가 서는 정류장 앞 벤치에 다다르기까지 고작 오 분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한 시간 전에 출발했다던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하랑은 초조하게 정류장을 서성이다 벤치에 앉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고,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게임을 켜던 하랑은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의 불빛에 고개를 들었다. 퇴근 시간대가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빽빽해 누가 내리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제가 못 찾는 건가 싶어 일어나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내리는 사람 중엔 그녀가 없었다. 하랑은 초조해진 나머지 게임창을 끄고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수신음만 가고 답이 없어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을 보일 즈음, 이거 어디 다른 길로 먼저 들어가서 엇갈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티엔에게서도 들어오라는 연락이 없어 하랑은 다리를 떨며 간간히 차가 지나가는 도로만 쳐다봤다.
그러기를 얼마, 반짝반짝한 까만 고급 승용차가 앞에 멈췄다. 버스 정류장에 무슨 차를 세운담. 하랑이 눈살을 찌푸리고 애꿎은 차를 노려보는데 차의 뒷문이 달칵 열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내렸다. 푸른 기가 섞인 잿빛의 긴 머리카락.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난 하랑은 운전석을 향해 연신 고개를 꾸벅이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루이스!"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랑은 아직도 인사 중인 그녀 옆에 섰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못 본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낯빛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땅거미가 진 거리가 어둡다 해도 그 정도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하랑은 대번에 루이스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볼살이 하랑의 손에 밀리는 바람에 퍽 귀여운 얼굴이 됐지만 그래도 지친 기색을 지울 순 없었다. 제 손을 잡아 떼내는 그 손에도 힘이 없어 하랑은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센터에서 조금 일이 생겨서, 데려다주셨어."
"쯧, 핸드폰은?"
"가방에. 아, 무음으로 바꿔놓은 거 깜박했다. 미팅때문에."
"가이드?"
하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루이스를 향해 혀를 차며 그녀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어깨에 대충 둘러매고 묻자 루이스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또 꽝이구만. 어쩐지 사부가 예민하더라니. 하랑은 더 묻지 않고 루이스와 발을 맞춰 걸었다. 루이스는 벌써 몇년째 정식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이었다. 그것도 유능한. 물론 다른 센티넬에 비해 능력의 조절과 제어가 탁월하다 해도 정식 가이드가 없다는 건 센티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자 오점이었다. 언제 자신의 능력에 휘말려들지 모른다.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과 같다던 티엔의 말이 떠올라 하랑은 흘긋 루이스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엔 얄미울 정도로 흔들림 하나 없는 주제에, 제가 알아챌 정도로 잔뜩 쳐져선 우울해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옆에 걷던 루이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는지라 하랑은 슬금슬금 루이스의 눈치를 봤다. 맞는 가이드가 없는 것도 하루이틀이 아닌데 오늘은 어째 더 우울해하는 것 같다. 뭐라고 기운을 복돋아줘야 하는 걸까. 위로 같은 데 소질이 없는 하랑은 괜히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때가 되면 어련히 나타나겠지."
"응."
속 편한 소리로 들릴 진 몰라도, 괜히 어줍잖은 위로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안 그래도 자존감이 밑바닥을 기는 애다. 하랑은 루이스가 어서 평소의 그 잔잔하고 광활한 호수같은 루이스로 돌아왔음 싶었다. 돌맹이 하나 던져봤자 잠시 파문이 일고 마는 호수. 하랑은 그런 그녀가 좋았다. 센티넬이고 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그랬다.
루이스는 누가 티엔 정이 손수 키운 센티넬 아니랄까봐 철두철미하고 똑부러지는 녀석이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무표정에 먼저 살갑게 다가가는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사소한 것 하나도 기억하고 챙겨주는 거며 사람을 살피고 돌보는 게 일상인 좋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루이스는 딱히 뭔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하랑이 이 제 1구역의 중앙도시에 온 첫 해, 누군가 축하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한 생일을 챙겨준 루이스였다. 심지어 제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운동화를 곱게 포장한 상자에 담아 선물했다. 사실 그런 것보다는 일상에서 스쳐지나가면서 자기도 잊고 있던 걸 기억하고 챙겨줄 때가 더 감동이지만.
하랑은 어색해진 분위기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센티넬이 경쟁력이 되는 세계수 근처의 거점 도시들이야 센티넬 하나 하나에 목숨을 걸지만, 하랑이 자란 곳은 거점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 하루 하루가 전쟁같은 곳에서 하랑은 아버지와 함께 산 속 깊이 들어가 살았다.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 두 사람이 먹고 살기엔 부족하지 않다. 가끔 물건을 교환하러 마을에 내려가는 게 전부요, 가끔 점을 쳐주고 산에선 못 구하는 생필품을 교환하는 게 가끔 있는 낙이었다. 하랑은 티엔을 만나기 전까진 제가 센티넬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처음 말로만 듣던 거점 도시에 왔을 땐 공기조차 다르고 생활 자체가 달라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더랬다. 그런 하랑을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준 게 바로 루이스였다.
하랑은 센티넬이기 때문에 거둬진 루이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센터에서도 센티넬로 분류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에스퍼계 센티넬은 애매한 위치다. 아직 완전히 능력을 제어하지도 못하는 하랑은 센터에서 등급을 부여받는 의무 테스트 이후로 불려가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잡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하랑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절로 얼굴을 구기게 되는 티엔의 번호가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만큼이나 반가웠다.
"어! 지금 가는 중."
'그래. 얼마나 걸리나.'
"이제 세 블럭 남았수다."
하랑은 일부러 껄렁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까지는 이제 두 블럭. 무심히 걷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루이스가 작게 웃고, 하랑은 머쓱해진 나머지 걸음을 빨리 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루이스는 살짝 뛰어와 다시 하랑의 옆에 섰다. 더 뛸래야 집 앞이라 하랑은 이게 다 네가 늦어서라고 투덜거렸고, 루이스는 그런 하랑에게 미안하다며 등을 두드렸다.
티엔이 루이스에게만 무르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투덜거리는 하랑이지만 그녀에게 무르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쁜 여자애가 헤사하게 눈꼬리를 휘며 생긋 웃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제가 아는 기집애들이라곤 만날 드잡이질에, 사내애들보다 더 목청도 크고 괄괄했는데 루이스는 글에서나 보던 선녀같았다. 청순하고, 예쁘고, 상냥하고, 다가가면 꽃 향기가 날 것 같은 그런 여자애. 하랑은 결국 루이스의 미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늦었군. 씻고 내려와라."
하랑은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고 2층 계단으로 휙 올라가버렸다. 루이스는 신발을 벗어 하랑의 운동화까지 정리했다. 그새를 못 참고 현관까지 나온 티엔이 팔짱을 끼고 내려보자 힘 없이 웃는데, 한소리 하려고 벼르고 있던 게 전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루이스는 티엔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티엔은 쭈뼛쭈뼛 선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 돌아서 주방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죽어가던 그녀를 주운 그 날부터 지금까지 제가 키우다시피 한 아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얼굴 표정만 보면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건 하랑도 마찬가지지만, 하랑은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며 사람과 접촉을 피한 탓에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거리의 고아로 눈치밥을 먹으며 자라 나이에 맞지 않게 신중하고 침착한데다 생각과 감정을 숨기는 데도 능숙했다. 그녀를 데리고 왔을 땐 한동안 그것 때문에 애를 먹었던 티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데운 음식을 그릇에 담았다. 하랑이 노래를 부르던 갈비찜에 마파두부, 제 철인 사과를 갈아 만든 소스를 올린 샐러드에 고슬고슬한 밥까지 한 상을 차린 티엔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두 녀석을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하랑과 장난을 치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단정한 교복 대신 까만 나시티와 후드집업에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은 루이스의 허벅지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루이스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는 하랑을 보며 키득거리는 중이라 딱히 말을 꺼내기도 뭐해 티엔은 아이들이 앉기를 기다렸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예정보다 식사 시간이 늦어져 배가 많이 고팠던지, 하랑이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 예절에 대해 한 마디 하기도 전에 고기 덩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통에 티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는 그런 하랑이 재미있는지 피식 웃으며 앞접시에 고기를 한 점 덜어 티엔의 밥공기 앞에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르륵 눈웃음을 치는데, 오늘 낮에 점심을 먹고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윌라드 크루그먼과 웨슬리 슬로언, 거기에 티엔의 상관인 브루스까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딸이 최고라고 한 것이다. 그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둘을 보고 있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엔은 빈 앞접시를 가져간 루이스가 샐러드의 푸성귀를 가져다 먹는 걸 보며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고 기운을 내야 할 텐데. 하랑이 밥 한 보람이 있게 잘 먹는 것에 비해 루이스는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놨는데도 먹는 게 시원치 않았다. 아마 오늘도 가이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티엔은 안타까운 마음에 큰 살점을 덜어 루이스의 앞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루이스는 결정 능력이라는 비주류 능력을 가진 센티넬 치고 전투력이 높았다. 물론 거기엔 그녀의 타고난 성격과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년간의 스카우터 활동으로 다져진 티엔의 코치도 한 몫 했다. 그래서일까, 세간에서 루이스는 티엔 정의 미완성품이라 불리고 있었다.
미완의 센티넬. 루이스가 보여주는 무긍무진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심사에서 3급밖에 받지 못한 데에는 가이드가 없다는 게 가장 컸다. 혼자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다 해도,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을 쓰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센터에 있는 가이드들 중엔 그 누구도 루이스와 동조율이 30%가 넘는 사람이 없었다. 개중에 그나마 제일 높은 게 자신인데, 그마저도 50%가 안 됐다. 덕분에 복잡한 절차를 거쳐 임시 가이드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었다. 티엔은 그녀에게 맞는 가이드가 나타나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아홉살, 죽어가던 그녀를 안아들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루이스는 저만 바라보는 아이였다. 제가 없으면 죽어버릴 것처럼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아이. 티엔은 웬 양아치 같은 놈팽이가 그녀의 가이드라고 나타나기라도 할까봐 루이스가 가이드 문제로 센터에 갈 때면 노심초사했다. 더러는 그래도 개중에 가장 동조율이 높으니 그녀와 귀속 관계를 맺는 게 어떠냐 제안하기도 했지만 티엔은 그럴 수 없었다. 첫째는 자신이 스카우터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티엔이 그녀를 무척 아끼기 때문이었다.
센티넬은 가이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간단하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를 아끼기 때문에 티엔은 루이스가 남은 평생을 제게 매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쁘고, 강하고, 제게 과분할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다.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듬뿍 사랑받으며 살 수 있는 아이였다. 티엔과 루이스의 나이차는 열 둘.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티엔은 양심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정식 센티넬이 되면 센티넬의 폭주로 이어지는 결핍증세를 막기 위해 신체 접촉이 필수인데, 채 50%도 안 되는 동조율로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선 단순히 손을 잡거나 안고 있는 걸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티엔이라고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후, 나아갈 길을 고르는 그 시간에 제 옆에 있었던 건, 어쩌면 제 스카우터 생에 가장 큰 역작이 될 지도 모르는 미완의
센티넬이었다. 어떻게 탐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유혹을 뿌리치기에 루이스는 너무나 달콤한 열매였다. 가이드가 없는 건, 그 중에서도 자신의 동조율이 가장 높은 건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손만 뻗으면 재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억누른 건 다름 아닌 그녀에 대한 애정이었다.
한 번 그렇게 옭아매면, 돌이킬 수 없다. 그때 루이스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저를 은인으로 알고 무엇이든 해서 그 값을 돌려주려는 아이다. 절대 거절할 리 없었다. 대개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는 센티넬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다. 귀속을 하지 않은 지금도 이런데, 그녀가 자신의 센티넬이 되면. 티엔은 두려웠다. 그녀를 '루이스'가 아닌 '센티넬'로 대하게 될까봐, 그녀를 도구로 쓰게 될까봐, 그녀가 더 자라서 알을 깨고 나올 즈음 제게 원망과 저주를 퍼부을까봐. 센티넬은 생존을 위해 가이드를 필요로 하고, 한 번 정식으로 귀속을 맺으면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다. 게다가 센티넬 쪽에선 가이드가 주는 심리적 안정과 스킨십을 사랑이라 여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비즈니스적인 관계, 혹은 친구의 선을 넘지 않는 게 센티넬의 수명이 오래 가는 비결이라 할 정도였다.
센티넬은 다른 사람보다 예민하고 특별한 존재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루이스에 티엔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완벽에 가까운 남자라 일컬어지는 그 스스로도 루이스를 아직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티엔은 다른 센티넬과의 계약 대신 센티넬 급으로 강한 체술과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터가 된 사람이었다. 대개 스카우터는 센터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센티넬과의 전투도 불사해야 할 때가 있기에 보통의 센티넬보다 능력치가 현저히 높은 이를 뽑는 게 관례라는 걸 생각하면 센티넬이 아닌 스카우터 티엔 정이 어떤 존재인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을 먼저 올려보낸 티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따라놓은 물 한 컵을 그대로 들이켰다. 하랑은 밥을 두 공기나 더 먹었고 루이스는 밥을 반절이나 남겼다. 모처럼 한 요리를 담은 그릇은 싹 비워졌건만, 속이 쓰렸다.
시험기간이라 공부하다 의식의 흐름대로 보고싶은 것만 씀.
안그래도 바쁜데 루이스 모델링 변경때문에... 심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름ㅠ
이제 루이스한테 동안에 미인이라고도 못할거 아냐...ㅠㅠ
그 전에 개편 전 루이스로 연성을..많이...해야하는데...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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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ts루이] 어느 메이드의 하루 : 오전
시험기간이라 슈퍼 딴짓 타임이 도래함
* 전에 썼던 홀든가 메이드 ts루이스
찌르르르,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에 이불 속에서 하얀 손이 불쑥 나와 침대 옆 협탁을 더듬었다. 그래도 자명종이 잡히지 않자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은 다 뜨지도 못하고,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지고 부스스했지만 그것도 그녀의 미모를 해치진 못했다. 시간을 확인한 그녀, 루이스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의 물을 튼 루이스는 보일러가 물을 데우는 시간동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잠옷을 벗었다.
찬물 세수로 잠을 깬 루이스는 욕조 안에 들어가 샤워기 앞에 섰다. 머리부터 적시며 떨어지는 따뜻한 물줄기에 굳어있던 근육들도 깨어나는 것 같아 가볍게 어깨를 주무르며 목을 돌리자 뿌드득 소리가 났다. 어제 밤일을 좀 과하게 하긴 했지. 루이스는 어젯밤 겁도 없이 홀든가에 잠입한 쥐새끼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결정능력의 좋은 점은 시간이 지나면 무엇에 당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벨져와 이글이 안타리우스의 뒤를 캐고 다니면서 가끔 이렇게 침입을 시도하는 쥐들이 늘었다. 쥐약을 놓는 것도 한계가 있는 지라, 루이스는 가끔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광신도 집단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홀든에 그런 어중이 떠중이들을 보내는지. 어제는 조금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대개는 다 제 선에서 끝날 만한 일들이었다. 이걸 그 애들이 알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치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머리를 감던 루이스는 벨져에게 받은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우선은 다이무스가 출근하는 걸 배웅하고, 집안일을 마친 후에 편지를 써야지. 그 다음엔 이글을 깨워 점심을 먹여 출근시키고, 다이무스를 도우러 잠시 헬리오스에 갔다가 두 사람이 퇴근하기 전에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들른다. 그러고 보니 세탁소와 식료품점도 들러야 했다. 루이스는 오늘의 일정과 할 일을 정리하고 샤워기의 물을 껐다.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감싸고 욕실을 나온 루이스는 머리를 말리며 서랍장 앞에 섰다. 두번째 서랍 안에서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흰색 팬티와 브래지어, 슬립, 가터벨트를 꺼내고, 세번째 서랍에서 스타킹과 속바지를 꺼내 한꺼번에 침대 위에 던졌다.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세 형제가 앞다투어 속옷을 선물하는 통에 루이스의 서랍장엔 각양각색의 속옷들이 즐비했다.
옷 선물은 벗기기 위해 하는 거라던데.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리를 떠올린 루이스는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감싼 수건을 푸르고 물기를 털어낸 루이스는 머리를 빗어 넘기고 일어났다. 침대로 향하는 사이 가슴에 두르고 있던 바스타올의 매듭이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침대 위에 던져둔 팬티를 집어들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발을 끈 사이에 넣어 골반까지 올린 루이스는 브래지어와 가터벨트를 차고 슬립을 걸쳤다. 침대에 앉아 흰색 스타킹을 허벅지까지 올리고, 일어나 착 달라붙는 까만 속바지까지 입은 루이스는 스타킹을 가터벨트로 고정한 뒤 일어섰다.
옷장에서 짙은 남색 원피스와 속치마를 꺼내 입은 루이스는 손을 뒤로 돌려 등의 단추를 채우며 시계를 바라봤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그래도 늦지는 않았다. 옷장 서랍에서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앞치마를 꺼내 어깨에 걸친 루이스는 허리끈을 다 묶지도 못하고 캡은 입에 문 채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며 허리끈을 묶고, 머리를 만져 캡을 쓴 루이스는 주방에 아침 식사가 준비된 걸 확인하고 바로 다시 계단을 올랐다. 이층, 다이무스의 방 앞에 선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머리와 앞치마를 매만지고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루이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같이 다이무스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소매의 커프스 단추를 달고 있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옷장에서 넥타이를 골라 그에게 다가갔다.
"잘 잤나."
"그럼요. 잘 주무셨어요?"
"덕분에."
다이무스는 기다렸다는 듯 턱을 들어 목을 내주었다. 루이스는 그의 목에 넥타이를 감아 매듭을 묶고, 다이무스는 그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다이무스가 영국으로 건너와 따로 살기 시작한 후로 두 사람의 아침 일과는 항상 이렇게 시작됐다. 어릴 적 오스트리아의 본가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루이스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일손을 도와야 했고, 다이무스는 매일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교육에 따라 도장에 나가 검을 휘둘렀다.
그보다 더 어릴 적엔 천둥이 치는 게 무섭다며 베개를 들고 찾아온 루이스를 옆에 누이고 같이 자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이를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때 얘기였다. 세 형제에게 또래의 예쁜 여자아이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맏이라는 이유로 다이무스는 곧잘 두 동생에게 루이스의 관심을 뺏기곤 했다. 그래도 제일 먼저 의지할 사람으로 자신을 꼽는다는 게, 셋 중 유일하게 그녀보다 연상인 다이무스만의 특권이었다. 오빠라고 불릴 수 있는 것도 다이무스가 누리는 특권 중 하나였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 밑에 거뭇하게 드리운 그림자가 점점 내려오는 걸 보며 넥타이의 매듭을 마무리지었다. 아무래도 식탁에 브로콜리를 더 올려야 할 성 싶었다. 은행 업무며 헬리오스의 업무까지, 하나만 해도 힘든 걸 병행하고 있으니 피로가 쌓이는 건 당연했다. 루이스는 넥타이에서 손을 떼고 다이무스의 뺨에 손을 얹었다. 말끔하게 면도를 마친 뒤라 까슬하진 않았지만 푸석해진 건 분명했다.
"오늘 오후에 회사로 갈게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있는 게 낫잖아요. 그쵸?"
다이무스는 아침부터 귀여운 소리를 하는 루이스 덕에 피식 웃고 말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안 그래도 아침에 약한 녀석이 머리에 또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싶어 그만두고 다시 한 번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애정이 묻어나는 친애의 표시에 루이스도 슬며시 웃었다. 홀든 형제와 루이스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지라 사용인과 고용주라기 보다는 남매에 가까웠다. 홀든 부인마저 아들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보다 루이스를 더 아낀다며 한탄 아닌 한탄을 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면 말을 다 한 셈이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 사이에선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세 형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건 가문과 그녀가 아니냐는 말마저 돌았다.
다이무스는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른 두 녀석에게 물어도 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루이스는 그들 사이에서 일종의 '깍두기'같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경쟁의 상대도, 적도 아닌 순수한 애정의 대상. 그걸 알기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구속하려 들지 않았다. 균형이 깨지는 순간 무엇이 찾아올 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그녀가 그들을 아끼는 게 그저 가족적인 애정일 가능성이 너무 컸다. 그건 두 녀석 역시 알고 있기에 세 형제는 한 여자를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대신 선을 지키고 있었다.
"자, 그럼 이글 깨우러 갈게요."
"부탁하지."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방을 나와 이글의 방으로 향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막내는 꼭 깨워줘야 일어나는 타입이라 깨우지 않으면 아침도 먹지 않고 잠을 자곤 했다. 루이스는 이글의 방 문을 똑똑 두드리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이글은 커튼도 안 친 방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쿨쿨 잠에 푹 빠져있었다. 자유로운 영혼 아니랄까봐 자는 자세도 가관이다. 루이스는 이글의 침대에 앉아 뺨을 두드렸다.
"이글.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이정도로는 반응조차 없다. 루이스는 이글에게 조금 더 가까이 앉아 엉덩이를 두들겼다. 토닥토닥, 아이를 깨우듯 가볍게 토닥이려니 이글이 입을 다시며 베개를 더 꼭 끌어안았다. 벨져는 그냥 찬 물 한 바가지 끼얹으라고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도 막내는 막내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이그을.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으으응....'
입술이 꿈틀거리는 걸 본 루이스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더 가까이, 얼굴 앞까지 다가가 쪽. 입술을 가볍게 맞추자 단숨에 허리가 잡혀 끌려갔다. 베개 대신 안긴 루이스는 눈곱이 낀 채 씩 웃는 이글과 눈을 맞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아침~."
"일어나세요."
"뽀뽀해주면 놔주지."
"조금 전에 해드렸잖아요."
"몰라~. 난 좀 더 잘래."
이글은 고개를 도리젓더니 루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바디워시와 샴푸의 꽃냄새가 달근해 놓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곤란해하지도 않고 이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일어나래도."
"윽, 아. 진짜 아팠어."
"자, 뽀뽀."
루이스는 냉큼 루이스가 엄살을 피우는 사이 뽀뽀를 해주고 단단한 막내 동생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잘생긴 얼굴에 기름기가 번드르르 하고 눈곱이 낀 게 영 마뜩찮아 억지로 일으켜 팔까지 걷어부치고 세수를 시켰다. 역시, 그냥 찬물을 붓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내일 해가 뜨면 또 똑같이 이글의 어리광을 받아줄 게 안 봐도 뻔했다.
"누나아."
"옷부터 입으세요."
말끝을 늘여 달라붙어봤자 꼴랑 팬티 한 장 차림이라, 루이스는 이글을 밀어내고 빗을 들었다. 이글은 투덜거리면서도 고분고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을 주워입고 루이스는 이글의 머리를 빗었다. 평소하는 것처럼 위로 높게 올려 묶기엔 루이스와 이글 사이의 신장 차도 있고, 무엇보다 아직 머리를 안 감아서 그 긴 머리를 아래로 내려 느슨하게 묶었다.
"빨리. 이미 준비 마치고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난 아침부터 칙칙한 형이랑 밥 먹느니 누나랑 침대에서 뒹구는 게 더 좋은데."
"이글."
루이스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짓자 이글은 반팔 셔츠를 대충 입고는 루이스를 따라 나섰다. 제 아무리 망나니인 이글 홀든이라도 그를 이십년 가까이 돌분 루이스를 이길 순 없었다. 아마 유일하게 이글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는데, 이글은 어디까지나 그녀에게 져주는 것 뿐이었다. 아니, 사실 못 이기는 게 맞았다. 매를 맞거나 혼나는 것보다 루이스가 더 무섭다. 이글은 뒤에서 투덜거리며 루이스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다이무스가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형에게 간단히 눈인사를 한 이글은 제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는 아침식사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다이무스의 손에 들려있던 신문을 뺏고, 다이무스는 빈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몸을 쓰는 검사답게 아침 식사라 해도 꽤 양이 많았다.
"아아, 브로콜리 싫은데."
"편식하지 마세요."
"네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글."
"햄버거~."
이글은 입을 비죽 내밀곤 브로콜리를 접시 한 편으로 몰기 시작했다. 아삭한 식감의 브로콜리를 계란과 함께 입에 넣고 씹던 다이무스는 더 잔소리하는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래도 일 때문에 점심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는 날이 많다보니 집에서 먹는 식사라곤 아침이 고작이었다. 루이스는 아침만은 꼭 먹여서 보내고 싶어 했고, 바쁜 와중에도 아침 식사 만큼은 직접 식단을 짤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걸 아니 이글 녀석도 일어나 아침을 먹는 거겠지만. 다이무스 역시 일주일에 나흘은 올라오는 브로콜리에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지만 그게 제 눈가에 드리운 다크서클 때문이라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누나."
"네?'
"나 오늘 늦어. 기다리지 마."
"내일 들어오실 거예요?"
"몰라? 내가 좀 유능해야지, 아주 그냥 놔주질 않아~."
이글의 너스레에 루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글도 루이스를 따라 씩 웃고,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사이 다이무스는 무표정으로 이글을 보며 브로콜리를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포크로 장난질을 치는 이글을 두고 먼저 접시를 비운 다이무스는 물로 간단히 입가심을 하고 일어났다.
그에 맞춰 루이스가 우편물과 함께 아까 뺏어갔던 신문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읽다 만 신문과 편지들을 받아들며 눈을 맞췄다. 루이스가 아무 말도 않는다는 건 별다른 소식이 없다는 뜻이다. '홀든'에게 쏟아지는 각종 청탁과 셀 수도 없는 초대장을 걸러내는 건 루이스의 일 중 하나였다. 다이무스는 우편물을 서류가방에 넣었다. 양치를 마치고, 가벼운 코트를 팔에 든 채 내려오자 루이스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져주었다. 흘긋 식당 쪽을 보니 이글도 식사를 마치고 마저 자러 올라간 모양이었다.
"큼. 점심 같이 들겠나?"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데이트 하자구요?"
넥타이를 바로잡고 카라를 세웠다 내린 루이스가 빙그레 웃자 다이무스는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사려 깊고 침착한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필요한 걸 말하기 전에 준비하고, 언제나 깔끔하고 완벽하게 집안을 관리하는 데다 예쁘고 상냥하고 똑 부러지기까지 한 그녀는 완벽에 가까운 메이드이자 안주인이었다. 다이무스는 이런 사람을 골라온 아버지의 안목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이렇게 길러낸 어머니의 수완에 감탄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맡은 일이 많다 보니 힘들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녀가 맡은 업무를 대신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일은 본가의 사용인들도 할 수 있다 치더라도, 형제들을 아우르는 건 오로지 그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셋이 모여있을 때와 넷이 모였을 때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다이무스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벨져를 떠올렸다. 편지를 제대로 읽긴 했는지. 이미 오래 전 일인데도 답장이 없었다.
코트를 걸친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미소와 함께 내미는 서류가방을 받아들고 모자를 썼다. 문을 나서기 전, 으레 부부들이 그러하듯이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추는 건 다이무스 홀든이 출근 전 마지막으로 누리는 여유이자 온기였다.
"이따 봐요."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루이스는 출근하는 다이무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매일 아침 하는 거지만 이렇게 그를 배웅할 때면 쉬지도 못하고 일에 쫓겨사는 그가 안쓰러워지곤 했다. 다이무스의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본 루이스는 주방에서 사용인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 세 형제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불만은 밥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루이스가 요리를 잘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 결국 루이스는 홀든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영국 태생이라서 그런 건지 고아 시절에 배만 채울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탓인지 요리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웬만한 일은 다 눈감아주는 다이무스마저 이틀 버티고는 조심스럽게 요리사를 고용하자는 말을 꺼냈을 정도였다. 결국 루이스는 오스트리아에서 고용해 데려온 요리사에게 주방을 내주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잘 한 일이었다. 한나는 이제 주방일을 하기엔 나이가 많았고, 메이어 부인의 요리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리 실력의 소유자였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싸가면 좋아할까.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회사 근처에 괜찮은 샌드위치 가게가 없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메이어 부인에게 넉넉히 점심을 준비해달라 부탁하자 부인은 신이 나서 연어가 좋으냐, 햄이 좋으냐 묻기 시작했다. 다들 집에서 식사를 안하는 데다 아침부터 무거운 요리를 올릴 순 없다 보니 내심 제대로 된 요리를 못 하는 게 서운했던 모양이라 루이스는 종류별로 양껏 준비해달라 부탁했다. 둘이 다 못 먹어도, 헬리오스의 동료분들께도 나누어 드리면 그만이었다. 능력이 상극이라 그런지, 아니면 귀한 도련님을 마구 부려먹어서인지 그 쪽의 불의 마녀와는 아무리 해도 데면데면하지만 어쨌거나.
주방에서 볼 일을 마친 루이스는 방으로 향했다. 하우스 메이드의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세탁물은 정리해 세탁소에 맡기고, 청소부터 자잘한 일까지 전부 루이스의 손을 거쳐야 했다. 대개는 집사가 할 일이지만, 본래 입이 가벼운 하녀들이나 하인들로 부터 새어나가는 게 정보다. 게다가 홀든은 홀든이니 만큼 집안일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했다. 그렇다고 본가에 계속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나이 먹은 아들들이 할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루이스가 비서의 역할까지 떠맡고 있었다. 벨져는 미련하게 일을 사서 한다고 핀잔을 주고 다이무스는 미안해지만 정작 루이스는 이게 다 제 일이려니 했다.
고아에 불과한 자신을 거둬 먹이고 재워주는 것도 모자라 딸처럼 키워주신 홀든 부인에게 받은 걸 보답할 방법이라곤 성심껏 홀든을 위해 일하는 것 뿐이었다. 루이스는 어젯밤 앞치마 안주머니에 넣어둔 두툼한 편지를 꺼냈다. 이름도 없이 제 앞으로 온, 화려한 필체의 편지. 편지의 겉봉투엔 여러 나라를 거쳐 오느라 우표가 잔뜩 붙어있었다.
루이스는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의 옆구리를 잘랐다. 굳이 안을 확인 하지 않아도, 제레온의 뒤를 이어 안타리우스를 쫓느라 얼굴 한 번 내빛치지 않는 둘째로부터 온 편지가 분명했다. 다이무스의 편지는 읽다 말았다더니, 한 장짜리 제 편지엔 답장으로 다섯 장이나 써서 보냈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 루이스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이쪽이야말로 길어서 읽다 말고 싶다. 하지만 장난으로라도 말을 꺼내면 바로 삐질 게 뻔했기에 루이스는 자리에 앉아 편지를 펼쳤다. 벨져의 편지는 언제나 사랑하는 누이,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편지를 모두 읽은 루이스는 답장을 쓰기 위해 편지지와 만년필을 꺼냈다.
일을 하다 보면 오전은 훌쩍 가기 마련이라, 루이스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수표책과 샌드위치가 한가득 든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이글과 함께 집을 나섰다. 이글은 대번에 자기한텐 찾아와주지도 않는다며 생떼를 썼지만 엉덩이를 조금 세게 두드려주는 걸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도 '나 삐졌소.'하고 시위하듯이 입을 비죽 내밀고 틱틱 걸리는 돌맹이를 차는 바람에 루이스는 결국 이글에게 내일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이글은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나서야 만족하고 다이무스가 그랬던 것처럼 뺨에 뽀뽀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스스럼 없는 애정 표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긋거렸지만 그마저도 루이스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세 사람 다, 형제 아니랄까봐 이런 데선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끼는 법이 없었다. 제게 하는 것에 반만 했어도 이미 애가 있을 텐데. 루이스는 가벼운 걸음으로 가는 이글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그들의 눈을 너무 올린 탓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살짝 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점심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지만 헬리오스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오후와 저녁은... 시간이 나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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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齒亡脣亦支.
리퀘로 쓴 다이루이 동양물
"큰일이로군."
"큰일이네요."
다이무스 홀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골치가 아파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다이무스의 참모이자 가신인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조용히, 찻잎이 풀어지며 물에 우러나자 뜨거운 물을 한 번 더 부어 잔을 데우고 차를 따라 골머리를 앓고 있는 다이무스에게 권했다.
"드세요."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내온 찻잔을 감싸쥐고 들어올려 향을 맡았다. 완벽하게 제 취향에 맞춘 온도와 향이었다. 슬쩍 미간의 주름을 편 다이무스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음미하는 동안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문제가 된 서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탁상을 두드렸다.
서국의 제후가 방문하니 화려한 연회로 맞이하라는데, 문제는 그가 엄청난 난봉꾼이고 이 쪽엔 시중을 들 하녀들은 있어도 연회에 참석할 기녀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기방 세 곳이 단체로 뇌물 수수에 연루돼서 전 수령과 함께 압송되어 옥살이를 살게 된 게 바로 한 달 전 일이었다. 서국의 제후는 전에 맛본 그 화려한 연회를 기대하고 오는 게 분명한데, 지금 군영엔 잘 훈련된 군사들은 있을 지언정 연회를 위한 기녀는 없었다.
급하게 다른 지방에서 구하려 해도 파발이 가는 데만 사나흘이다. 서국의 제후는 당장 모레 도착할 텐데 어디서 기녀를 구한단 말인가. 서국으로 가는 무역상이 오가는 길목의 땅을 수백리나 가지고 있는 제후다. 그의 기분이 틀어져 갑자기 세를 과하게 물리기라도 하면 무역상들은 물론 나라의 재정에도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어떻게 해서든 맞춰줘야한다. 하지만 어떻게?
다이무스는 비리를 뿌리뽑겠다며 그들을 전부 처벌한 것을 후회했다. 그래도 기방을 완전히 없애선 안 된다고 루이스와 지방 토호들이 말릴 때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필요가 있으면 다시 생기기 마련이라고 다이무스는 기방의 주인을 법에 따라 처벌했다. 비리는 사라졌지만, 일자리를 잃은 기녀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게 이렇게 아쉬워질 줄이야.
다이무스는 차를 마시다 말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는 전에 있었던 화중왕 트리비아 카리나를 보러 오는 것이리라. 이 삭막한 곳에 볼 것이라곤 없으니 어두운 밤의 여제라도 없으면 뭇 사내들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주제에 그녀의 목소리는 그림자가 스며드는 것처럼 고혹적이었다. 다이무스는 잠시 그녀의 풍성한 치맛자락과 고양이가 걷는 것처럼 간드러지는 걸음걸이를 떠올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등을 덮는 차가운 손에 고개를 들자 루이스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바라봤다. 이럴 때도 제 편이 되주는 건 오로지 이 사람 뿐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골치 아픈 일일랑 다 던져버리고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유랑이라도 떠나면 좋으련만, 주어진 형편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치망순역지라는 말도 있고, 어떻게든 해볼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다이무스는 저를 어르듯 말하는 루이스를 향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말만이라도 고맙지만, 그라면 왠지 없는 사람도 솟아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어루만지다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다가온 그에게 입을 맞추고,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손에 쥐었다.
"윽..., 집무실에선 안 돼요."
"...안 한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고, 이따 방에서 봐요."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고선 귓가에 속삭였다. 귀를 스치는 숨결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으나 루이스는 미소를 끝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하아...."
루이스가 돌아 나가면서 연한 쪽빛의 겉옷 자락이 펄럭였다. 단정하고 차분한, 검소한 차림은 그에게 퍽 잘 어울릴 뿐더러 한 떨기 난꽃 같은 청아한 매력을 풍기곤 했다. 그가 나가고 다시 찾아온 두통에 다이무스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럴 때 만큼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구는 막내가 부러워질 따름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파발이 인근 기방에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땐 이미 서북의 제후가 도착한 후였다. 다이무스는 쓸모 없어진 서찰을 찢어서 버렸다. 제후는 도착한지 얼마나 됐다고 노골적으로 연회를 언급하며 기대가 크다며 다이무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다이무스는 급히 모은 군영의 무희들을 떠올렸다. 말만 무희지, 평범한 여인들이다. 그녀들이 아무리 능하다 한들 밭일을 하며 부른 노래요, 동네 잔치 때나 되는 대로 춤을 춘 게 고작이었다. 온갖 화려한 연회에 익숙해진 제후의 눈에 그게 얼마나 하찮게 비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히려 기만하려 든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연회는 시작도 안 했건만,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아 다이무스는 제후의 옆에서 차를 따르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제후는 혼자 신이 나서 떠들고,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하게 차를 따르던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루이스는 걱정말라는 듯 살짝 눈꼬리를 휘며 웃엇지만 오늘은 그 미소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연회에 여인들을 빼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하하. 참, 그녀는 잘 있소? 화중왕말이오. 지난 번에 왔을 땐...."
"......"
올 게 왔다. 다이무스는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기생따윈 없으니 기대를 접으라 하고픈 마음을 누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이를 어찌한다. 생각하는 와중에 침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시는 길에 기방이 텅 빈 것을 보셨을 겁니다. 근처의 기방들이 문을 닫으면서 그녀도 떠났지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하지만 어디 꽃이 그녀 하나 뿐이겠습니까. 봄 꽃이 지면 여름 꽃이 피기 마련이지요.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루이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차분히 말을 잇자 제후는 자기가 성을 낸 게 머쓱해졌는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찻잔을 들고 있던 다이무스는 한 고비 넘긴 것에 안도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데다, 묘하게 루이스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향기로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제후는 형식적으로나마 근황을 묻고 다이무스 역시 형식적으로 답하면서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급히 들어온 토마스가 루이스에게 은밀히 말을 전하자 루이스마저 자리를 뜨고, 루이스를 보며 버티던 다이무스는 지루해하는 제후에게 방을 안내하기 위해 일어났다.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여독을 풀라는 말에 제후의 얼굴이 확 폈다. 제후는 사양하는 법도 없이 가버리고, 다이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점점 날이 갈 수록 근심만 느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유례없이 지친 몸을 일으켜 연회장으로 향했다. 지시한 대로 완벽하게 준비가 됐는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잠시나마 위안을 얻어보고자 루이스를 찾아보았으나 언제나 제 시야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던 사람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다들 연회 준비로 바쁘다보니 루이스를 봤다는 사람도 없고, 그 역시 일을 서두르느라 경황이 없을 거란 생각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찾기를 포기했다. 대신 단상 위에 마련된, 가시방석이나 다름없는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회가 시작해도 제후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 역시 모두 예상했지만, 다이무스에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자 제후는 연회가 너무 지루하다며 아무리 그래도 무희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냐는 둥 불만을 터놓기 시작했고, 다이무스는 조잡하게 구성된 무희라도 불러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안 좋은 기분을 더 그르칠 가능성이 더 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이무스가 하늘에서 선녀라도 내려오길 간절히 바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짙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넘실 흘러들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고, 얼굴을 얇은 너울로 가린 무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선녀와 같이 하늘하늘한 옷으로 몸을 겹겹이 감싼 무희가, 왠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슴 앞에 팔을 모은 채 들어온 무희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자 스르륵 흰 연기가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피리 소리와 함께 위로 팔을 올리자 손을 감싼 긴 천이 천천히 너울지며 흘러내렸다.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무희의 자태는 오월 버드나무의 가지같이 낭창하고, 한 마리 학처럼 우아했다. 다이무스는 넋을 놓고 그 손짓과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다른 말이 무에 필요한가. 제비가 하늘을 노닐 듯 아름다운 춤사위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바닥을 채운 흰 연기가 마치 구름같아 정말 선녀의 춤을 보는 것도 같았다. 한 바퀴 빙그르 돌며 얼굴을 가린 너울이 펄럭이고, 그 안에 가려잇던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절대, 잘못 보지 않았다. 잘못 볼리 없었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제게 보낸 그 눈웃음. 다이무스는 제가 앉아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습게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지도 몰랐다. 손에 힘이 들어가 술잔이 떨렸다. 다이무스는 작은 잔 안에 이는 파문을 단숨에 삼켰다. 시원한 술은 목을 타고 넘어가며 가슴속에 붙은 불을 키웠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음악이 끝나고, 연회장 안을 잠시 신선의 술자리로 만든 무희도 춤을 멈췄다. 무희가 들어올 때와 같이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인사를 올리고 나서야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곧 안에 있던 이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어안이 벙벙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제후는 무희를 아래위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이무스는 혼자 술잔을 채웠다.
"허, 허허허. 하하하하! 아니, 이런 보물을 두고 이렇게 이 사람의 애를 태우신 겁니까. 하하하하,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소.내 잘나간다는 무희를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이오. 그래, 네 이름이 무어냐. 어서 그 너울을 벗어보거라!"
목소리는 속일 수가 없다. 다이무스는 가만 서있는 무희를 바라봤다. 가라. 흥을 돋우는 거라면 이미 충분히 성공했으니 돌아가도 될 터, 저 호색한이 어찌 한 번 품어보려 해도 없는 사람이라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잠시, 불쾌한 생각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리자 무희가 고개를 들었다.
"으응?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야?"
그리고 팔을 내려 손가락 끝으로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고 가까이 다가왔다. 웬일로 상석을 양옆의 자리와 떨어뜨리다 못해 몇 단이나 올렸나 싶었더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계획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더니, 이런 것이었나. 다이무스는 계단을 오르는 무희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제후의 눈은 이미 그 옷을 벗기고 있었다.
제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짓을 계획한 루이스도, 그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도, 호색한에 무능한 제후의 억지를 들어줘야 하는 것도 전부 다 못마땅했다.
어느덧 단상에 올라온 무희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천천히 너울을 걷었다. 화장까지 했는지, 고운 얼굴엔 연분홍빛이 어린 데다 작고 얇은 입술은 탐스럽게 붉었다. 거기에 살짝 내리깐 눈이, 더없이 매혹적이라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냥 순진한 처녀같은 얼굴로 요부같은 눈을 하다니. 싱긋, 입술과 눈을 예쁘게 휘며 웃는 바람에 무희가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가슴이 떨렸다. 누군지 알기에 더 떨리는 건지도 몰랐다. 다이무스의 요동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웃음을 친 무희는 다시 너울을 내리곤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잡았다.
제후의 존재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깨끗히 잊어버리고, 눈을 떼지 못하는 중에 무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이무스의 옆에 다가와 풀썩, 그 무릎에 앉았다. 팔을 목에 감으며 안겨와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 허리를 감싸안았다. 코를 마비시키기라도 할 것 처럼 짙은 꽃 향기에 꽃을 안은 것인지, 사람을 안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루이스."
"쉿. 적당히 알아서 둘러대주세요.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사람 앞엔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꽤나 귀여운 짓을 하는 구나."
"어서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는 물론 뺨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별 수도 없기에 다이무스는 다시 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제후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저와 품 안에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쇼. 이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그렇습니다."
"아, 아니. 아닐세. 헌데, 그....혹시...."
"제 정인입니다."
여전히 그 눈에 더러운 탐욕이 떨어지지 않아 불쾌해지려는 찰나, 루이스가 길게 콧소리를 내며 응석을 부리듯 품에 뺨을 부비며 안겨들었다. 제후와 이야기하고 있던 다이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할 거라면 제대로 하는 게 나았다.
"...자꾸 보채서 안 되겠군요. 먼저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이무스는 그대로 무릎에 앉아있는 루이스를 안아들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 내일이나 모레면 기생들도 도착할 테니 그 때 잘 구슬리고 달래주면 그만이었다. 문을 나서자 루이스가 너울을 걷어 넘기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도 한 고비 넘겼네요."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급하게 배웠죠. 이제 내려주세요."
"네가 보채지 않았더냐. 기왕 한 거 제대로 해야지. 이대로 침실까지 갈 거다. 침상 위에 내려주지."
루이스의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다이무스는 이제야 제 연인의 얼굴이 돌아온 것 같아 흡족하게 씩 웃었다.
"곱군."
"그야 화장에만 반 시진을 들였으니까요."
"기왕이면 가끔 해다오."
"...저도 사내놈입니다."
"정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게 이상한 일이더냐?"
루이스는 질색하다가 다이무스의 그 의기양양한 미소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번쩍 들어 다시 고쳐 안으며 곱게 연지를 바른 입술에 입맞췄다. 적어도 오늘 밤은 쉬이 재울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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