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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6.
06.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수차례 거절해도 강의가 끝날 쯤이면 백금색 벤츠가 학교 후문에 서있었다. 제가 사는 동네엔 벤츠가 들어오면 이상하게 볼 거라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걸어다니는 삼십분이 아깝다고 했다. 일단은 고용된 입장이라 군말없이 따르긴 했으나 이글이 놀려대며 은근슬쩍 괜찮냐 물을 때면 루이스는 말없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글은 그럴 줄 알았다며 킬킬거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흥이 나면 벨져 홀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늘어놓곤 했다. 주로 불평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전해듣는 건 확실히 즐거웠다. 연예인들 사생활에 대한 가십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여어, 작은 형~.”
“네가 왜 같이 오냐.”
“나? 쨌지~.”
벨져는 이글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벨져의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넣으며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신발 털고 타!”
루이스는 이글에게 짜증을 내는 벨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벨져는 루이스를 돌아보며 턱을 까딱였다. 조수석에 타 안전벨트를 메고 있으니 벨져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턱 닫으며 운전석에 앉았다. 백미러로 다리를 꼰 채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는 이글을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바로 시동을 걸었다. 매끄럽게 시동이 걸리고, 벨져의 벤츠는 복잡한 학교 앞 도로를 빠져나갔다. 조용하고 편안한 승차감에 감탄하는 것도 고작 사흘, 이제는 벨져도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한 계약관계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루이스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됐고, 벨져와 상의 끝에 강의 시간과 아르바이트 시간을 피해 시간을 조정했다. 벨져는 아예 휴학을 하는 건 어떠냐고 권했지만 어차피 마지막 학기라는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번호나 하나 찍으라더니, 루이스는 어제 통장잔고를 보고 기겁했다. 벨져 홀든의 이름으로 들어온 돈은 루이스의 한 달 생활비가 넘는 금액이었다. 물론 그 홀든이고, 씀씀이가 남다른 건 이글만 봐도 알지만 피씨방비에, 종종 하는 식사나 커피 값까지 포함하면 그것보다 받는 게 더 많은 셈이었다. 연습생들은 숙소비다 뭐다 하는 걸 내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건 명백히 벨져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달간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알바를 줄이고, 제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때 맞춰 잔 결과였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루이스는 벨져가 지켜보는 앞에서 첫 배치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골드3이었지만, 거기에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앞으로 한 달 안에 조커를 찍으라는 말로 짤막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거기에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이글이나 다른 클랜원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벨져가 말한 조커를 찍었다. 줄 땐 야박하게, 뺏어갈 땐 가차 없이 오르고 내리는 RP가 허망하고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수없이 많았다. 학기가 시작하고는 집중을 못 할 것 같다는 것도 한 몫 했다. 막학기고, 들을 강의도 세 개 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기를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라 루이스는 강의를 화수목 삼 일 안에 몰아넣었다. 벨져는 가장 사람이 많이 접속하는 금토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고, 자동적으로 루이스의 근무 시간은 금요일 낮부터 일요일 밤까지가 되었다.
조커를 찍고 나서야 벨져는 루이스에게 파티를 걸어왔다. 그게 지난 주 금요일의 일이었다. 타고난 근딜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빠른 속도에 루이스는 첫 판부터 진땀을 뺐다. 벨져는 루이스에게 아이스를 셀렉하라고 했고, 루이스는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서도 그의 닦달에 못 이겨 아이스를 셀렉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져의 시니컬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동기나 이동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쉴 틈이 없었다. 벨져는 착실하게 우위를 점령했고, 루이스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게임을 이어가는 벨져가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그의 서포트를 하느라 바빴다.
루이스의 아이스는 처음부터 극공을 타는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이스의 궁극기는 분명 '영웅플레이'의 정석을 낳는 스킬이지만, 그만큼 성공시키기 힘들기도 했다. Y축을 잘못 잡으면 꼼짝없이 지붕에 얼음성을 짓는 꼴이라 결정 슬라이드를 타고 휠업을 돌리며 내려가면서도 불안한 궁극기였다. 낙궁의 캔슬도를 따지자면 시니컬도 만만치 않지만, 벨져는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굴었다. 천상계는 천상계라 쉽지는 않았지만, 루이스는 섬광과 같이 움직이는 벨져의 뒤, 혹은 옆에서 그를 위해 콤보를 잇고 다가오는 적을 견제했다.
그럼 그 사이 상황이 정리되기 마련이었다. 안 되면 지는 거고. 다만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쉬레는 확실히 뛰어난 선수지만 그것과 같이 게임을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왜 그의 팀메이트들과 사이가 안 좋은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의 성향이었다. 협력과 공생. 글쎄, 벨져는 이기기 위해서 동맹을 맺는 것은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이루기 어려운 사람같았다.
루이스는 차 안에서 길게 하품을 했다. 첫 주부터 발표 과제가 나오는 바람에 미리 해두느라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졸렸다. 신호등 앞에 멈춘 벨져는 루이스를 흘긋 곁눈질했다. 루이스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했다. 같이 어울려주는 거라 생각하면 피곤하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쁜 게 아니었다. 이만한 꿀알바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마침 초록불이 켜졌고, 벨져는 액셀을 밟으며 쳐다보지 않은 척 정면을 봤다.
“아, 근데 형 그럼 이번 시즌은 쉬는 거야? 요새 갤에 형 얘기 존나 시끄러운데.”
“당분간은 생각 없다.”
“흐응. 그래? 하긴 뭐, 쉬레님은 지금 프로즌을 꼬시느라 바쁘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이글을 바라봤다. 이글은 자기가 뭐 틀린 말을 하기라도 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입가에 지우지 못한 미소와 장난기 가득한 눈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로선 이글이 뭘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게 쉬레와 프로즌에 대한 것임은 확실했다.
“이글.”
“왜. 나 바빠.”
“…됐다.”
“포기해. 저 녀석은 물에 던져놔도 입이랑 손은 둥둥 뜰 거다.”
“손은 왜?”
“그야 트윗을 해야 하니까지.”
이글이 벨져 대신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벨져는 주차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뒤롤 보며 조수석의 의자를 잡았다. 덕분에 드러난 조각같은 턱선과 목선에 루이스는 그에게서 살짝 멀어져 창 쪽으로 몸을 붙였다. 핸들을 돌리는 폼이, 같은 남자가 봐도 정말 멋있었다. 괜히 주차하는 남자한테 여자들이 설렌다는 게 아니라는 걸 루이스는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저도 모르게 두근거릴 정도니 여자들은 어떨까. 루이스는 조심스레 침을 삼켰다. 별 뜻은 없었다. 그저 가을볕이 따가울 정도로 강할 뿐이었다.
“날씨 진짜 좋네. 이런 날 피씨방이 뭐냐, 피씨방이.”
“토를 달 거면 집에 가라, 이글.”
“누가 간대? 그냥 이렇게 날도 좋은데 칙칙한 사내새끼들끼리 피씨방에 쳐박히니까 형들의 청춘이 안타까워서 그렇지~.”
루이스는 이글의 능청에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부터 같이 가자고 조를 땐 언제고 따라나오니 벨져의 신경을 살살 긁으며 장난을 치는 게 역시 형제는 좋구나 싶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벨져와 이글이 투닥거렸다. 벨져는 이글에게 신경질을 내고, 이글은 너스레를 떨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따라 올라오려던 벨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는 게 퍽 귀여웠다. 루이스는 벨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함께 계단을 올랐다.
“넌 왜 저 새끼를 데리고 와서….”
“내가 오라고 한 거 아냐. 자기가 따라왔지.”
“…하아.”
벨져는 진심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지쳐 보여 어깨를 두드려줄까 하다가 손을 내려 문을 열었다. 워낙 까칠한 사람이라 이런 사소한 스킨십에도 기분 나빠할까 조심스러웠다.
“오늘도 아이스 해?”
“네 마음대로 해라.”
“음…. 글쎄, 네 페이스에 맞춰가기 힘들어.”
“흥, 우는 소리 하기는.”
그러면서도 벨져는 루이스의 랜덤에 맞추어 랜덤을 꾸렸다. 빠르게 파고드는 쉬레를 위해 루이스는 기동력이 좋은 서브탱커를 넣었다. 이글이 음료수를 사러 간 사이 아이스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에게 귓말이 왔다. 대뜸 1과 2가 섞인 욕설로 시작하더니, 쉬레를 들먹이며 날선 비난이 채팅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게임을 하다가 욕을 듣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게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욕이라니. 루이스는 가만히 그가 하는 소리를 훑었다. 그딴 식으로 은퇴하게 만들고, 같이 다니는건 뒤라도 대줘서 그런 거냐는 둥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게 아무래도 쉬레의 팬 같았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뭔데.”
벨져는 자기 랜덤을 다 채우고 유리 칸막이 너머 루이스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제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이며 화면을 보던 벨져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차단해. 어차피 만날 일도 없겠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벨져가 욕을 들은 당사자보다 더 기분 나빠해서 오히려 머쓱해진 건 루이스 쪽이었다.
“뭐야, 뭔데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흐응.”
음료수를 건넨 이글이 루이스의 의자를 잡고 화면을 보다 길게 콧소리를 냈다. 콜라 캔을 깐 루이스는 캔을 기울이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쿨럭였다. 이글이 더럽다면서도 휴지를 가져다주고, 벨져가 등을 두드렸다. 사레 들린 거라 등은 두드릴 필요가 없는데, 천천히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잔뜩 인상을 쓴 얼굴과 달리 상냥했다.
“큽, 크흠. 켈록, 됐어.”
“너 진짜 탄산에 사레 잘 들리더라. 그냥 포카리 같은 거 마셔~.”
“아니, 그래도 콜라가 낫지. 근데 벨져, 너….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는 뭐지? 잠깐 있어봐.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벨져는 첫 게임을 하기도 전에 일어났다. 루이스는 별말은 않았지만 핸드폰까지 들고가는 걸 보고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도움을 구하고자 이글을 바라봤으나 이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모른다는 말을 대신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해~. 자기 최애 선수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반인한테 져서 그 충격으로 팀까지 나가면 팬 입장에선 네가 원수지, 원수.”
“…그렇구나.”
“그런 거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마. 너한테 지기 전부터 나오려고 벼르고 있었어. 기레기들이 자꾸 있지도 않은 소릴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해도, 안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벨져는 제게 시작을 말하면서 끝을 냈다. 프로 선수, 그것도 게이머가 다시 복귀를 하는 건 데뷔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아닌가? 그쪽 사정은 잘 모르지만 계약기간도 남았는데 그걸 파기하고 나온 거면 다른 팀에서도 받아주기 힘들 터였다. 아무리 벨져가 '쉬레'라 해도 괜찮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흡연실에서 잔뜩 인상을 쓴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인상을 쓰고 화를 내도 예쁜 얼굴이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걱정도 잠시 잊어버렸던 루이스는 민망해진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루이스는 옆에서 창을 내리고 커뮤니티를 돌고 있는 이글의 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글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요새 분위기는 어떤데?”
“당연히 졸라 나쁘지. 쉬레 없는 검제는 8강도 못 올라갈 거니 뭐니 하고, 쉬레 팬은 어디고 할 거 없이 너 엄청 싫어하고.”
“그 외에는?”
“글쎄, 직접 보는 게 빠를 걸? 링크 줄까?”
“응. 부탁해.”
이글이 핸드폰을 들었다. 루이스는 입술을 매만지며 초조하게 이글을 기다렸다. 그 사이 흡연실 문이 열리고,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 벨져가 돌아와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홀든 사이에 낀 루이스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벨져의 큐를 기다렸다. 벨져가 피우는 담배 냄새도 거슬리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불편했다.
“야.”
“응?”
“아이스 해.”
그 말을 마치자마자 매칭이 됐고, 루이스는 벨져의 말대로 순순히 아이스를 셀렉했다.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이 관계를 제안한 건 벨져지만, 팀을 나와 이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곧 저 하나를 위해 그가 가진 것들을 버렸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먹고 살 길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루이스는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손을 얹었다. 벨져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힘내서 이겨야 했다.
벨져는 제게 건 게 많았다. 그의 기대와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뿐이었다. 프로즌은 쉬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쉬레는 프로즌에게 새 삶의 시작이었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단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루이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가 피운 담배냄새가 공기와 함께 깊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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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5.
원고를 업로드 하다보니 편집점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슴니다만 이렇게 연재를 하다 보니 다음엔 언제 올라올까 하는 기다림과 기대도 받고 있는 것 같네요
읽는 시간은 짧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05.
벨져는 팀을 나왔다. 제레온이 딸 크리스티네 때문에 감독을 그만두고, 반년을 더 있으며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으니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대표는 붙잡으려 했지만 애초에 벨져는 이 팀이 아니라도 오라 하는 곳은 많았다. 아쉬울 건 없었다. 멤버간의 유대라는 것도 없다.
벨져가 팀에 있었던 건 단 하나, 제레온에 대한 의무와 책임 때문이었다. 제레온 프리츠가 없어도 검의 형제 기사단은 건재하다. 라는 걸 보여줬으니 충분했다. 지난 스프링의 우승, 섬머의 준결승 진출. 세간에서는 쉬레가 자꾸 이상한 데로 나돌아서 그렇다는 소리가 무성했지만 벨져는 여느 때처럼 개의치 않았다. 유명인에겐 언제나 구설수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대표는 계약금을 올려주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았네 어쩌네 하며 붙잡았지만 벨져 홀든은 다른 선수들처럼 돈에 매여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깟 위자료, 내고 말지. 관련 서류는 홀든의 변호사 쪽으로 보내라고 하니 허옇게 질리는 대표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그러게 제레온을 잡으라고 할 때 잡을 것이지. 제레온을 퇴출시킨 그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벨져는 벙찐 그를 매몰차게 뒤로 하고 연습실에 뒀던 짐만 챙겨 나왔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비롯해, 상자 하나짜리 짐을 싸서 뒷자석에 대충 던져놓은 벨져는 핸들을 피아노 치듯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루이스 녀석한테나 갈까. 오늘은 수요일이니 일찍 끝날 텐데. 대표가 끈질기게 붙잡는 바람에 공연히 시간을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퇴근 시간에 맞출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벨져가 루이스에게 간다고 전화를 하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데 전화가 왔다. 루이스였다.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없는 녀석이. 벨져는 드물게 놀라 잠시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의 액정을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묘하게 떨렸다.
“여보세요.”
'어, 난데. 지금 통화 괜찮아?'
“괜찮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좀 보자.'
“뭐?”
'안 되면 말고.'
먼저 전화를 하더니, 만나자는 말까지. 벨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상황이 반갑고 기쁜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루이스가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닌데,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벨져는 전화를 끊을 것 같은 눈치에 냉큼 대답했다.
“아니, 된다.”
'그럼 서점 앞 카페에서 보자.어딘지 알지?'
“곧 가지.”
전화는 그걸로 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일까. 벨져는 초조해진 나머지 입술을 매만지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꿨다. 그의 서점까지 가는 길은 이제 네비게이션 없이도 갈 수 있었다. 다만 전에 없는 상황에 왠지 모를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제발 그만 좀 오라며 짜증을 내고 화를 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벨져는 신호등 앞에 멈춰서 있을만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당장 데뷔라도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벨져는 제가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별 볼일 없는 팀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 제가 없는 리그에서 그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스러져간다면. 그대로 밑바닥에 다시 처박힌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애매하게 퇴근 시간대에 걸린 나머지 다 와서 길이 막혔다. 혹시 벌써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건 아니겠지. 이글 녀석에게 뭐 들은 얘기가 없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이글은 아직도 자고 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져는 차를 세워두고 빠른 걸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자리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2층으로 올라가니 창문을 열어놓은 창가 자리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창밖을 보고 있는 루이스. 그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른 벨져는 머리와 옷을 정리하며 다가가 그의 앞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메리카노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였으나 유리컵에는 물방울이 잔뜩 맺혀있었다.
“뭐냐, 할 얘기라는 거.”
“……. 이제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
묘한 침묵.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는데 루이스가 선수를 쳤다.
“플레인 요거트에 얼음 반만 넣어서 갈아주세요.”
“…….”
그건 또 언제 알았는지, 대신 주문을 하는 루이스를 보며 벨져는 팔짱을 꼈다. 물론 여기서 먹을 만한 건 그것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걸 알고 있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라 벨져는 몸을 카우치의 등받이에 기대고 양손 깎지를 껴 배 위에 놓았다.
“뭘, 정리하자는 거지.”
“한 달. 그쯤 했으면 됐잖아? 진짜 원하는 걸 말해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주문까지 가로채 사람을 물리나 했더니, 꽉 찬 돌직구가 날아와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오는 동안 가정한 최악의 수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걸 물어본다는 건 정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벨져는 잠시 루이스와 눈을 맞추다 눈을 감았다 뜨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나는 네가 프로로 데뷔를 해서, 네 가치를 입증하길 바란다. 이 쉬레를 꺾은 게 그냥 찌끄레기 듣보가 아니라, 아이스를 영웅으로 만드는 선수라는 걸 보여줬으면 해. 됐나?”
이건 그 때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한 달 동안 그를 지켜보며, 가끔 짬을 내 접속한 그와 함께 게임을 하며 느낀 것이었다. 그냥 이대로 썩히기엔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신에게 도움을 바래본 적은 없지만 루이스와 만난 것은 신이 정해준 운명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함께 게임을 하는 게 즐거웠다.
장마도 불볕더위도 사그라든 계절, 긴 여름해의 끝 무렵에 불어오는 바람이 벨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들어오는 햇빛에 루이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물방울이 잔뜩 맺힌 아메리카노 잔을 가볍게 쥐고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널 위해서?”
“…그래. 날 위해서.”
벨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를 거짓 유혹으로 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거에 휘둘릴 위인도 아니거니와, 그렇게까지 제 자존심을 팔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나 말고도 잘 하는 선수는 많아.”
“하지만 그들은 '프로즌'이 아니지.”
“…그래, 그렇다 치자. 네 자존심을 채우고 나에게 남는 건 뭐야?”
“돈? 명예? 인기? 부족한 게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줄 수 있어.”
루이스는 그 오만하고 자신이 넘치는 말에 피식 웃었다. 눈을 내리깔고,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다 축축해진 손을 뗐다.
“미안하지만 홀든.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
“…왜지?”
벨져는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존심? 한 달 동안 지켜본 그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눈앞의 기회를 걷어차버리는 멍청한 사람이었던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벨져는 루이스라는 사람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지? 평생 이렇게 궁핍하게 사는 거?”
“…….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한 번도?”
“한 번도.”
벨져는 덤덤한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꿈도, 희망도 가져본 적 없다니. 그는 고작 저보다 한 살이 많을 뿐이었다. 다른 환경에서였다면 어땠을까. 벨져는 주먹을 쥐고 침묵했다. 이해할 수도, 쉽게 지레짐작할 수도 없다. 한 달은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한 사람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가 벨져를 향했다. 벨져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 바로 앉았다. 프로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를 향해 승부수를 던졌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도, 완벽한 계획도 아니었지만 벨져는 예전부터 하던 생각이 있었다. 안 되면 되게 하는 것 역시 능력이었다.
“앞으로 세 달.너는 네가 바라는 걸 생각해보고, 나는 네가 내게 걸맞는 상대인지 확인해보겠다. 시간과 형편이 여유롭지 않다면 내가 널 고용하지. 시간도, 봉급도 네가 정해라. 대신 진지하게 해.”
“연습 상대가 되라고?”
“아니.”
“그럼.”
“…그걸 알아보려는 거다.”
벨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 감각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루이스를 놓고 싶지 않았다. 지금 놓아버리면 다신 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약이라고 하는 걸 써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다. 어떠한 '관계'. 벨져는 루이스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싶었다. 함께 승리의 기쁨을 공유하고,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캐릭터를 분석하며 메타를 짜올리는. 팀메이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너무 복잡하고, 왠지 자존심이 상해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말로 내뱉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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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4.
04.
날이 조금씩 더워지면서 학교 앞 호프집에 손님이 늘었다. 기숙사 살 때가 좋았는데. 혼자 사는 게 좋기도 하지만 집세에 다음 학기 생활비며 면접비, 졸업용 자격증 비용을 생각하면 알바를 늘려도 힘이 들었다. 4년 장학금을 받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중간에 학업을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잠시 심부름을 하러 마트에 다녀온 루이스는 기름 앞에 선 사장님에게 파와 양파가 든 비닐봉지를 건넸다. 사장님은 말도 거칠고, 사람대하는 것도 서툴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었다. 새로 사는 바람에 필요 없어졌다고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노트북을 거저로 주기도 하고, 시험기간이며 과제철이면 손님도 없는데 일찍 접자며 삼사십 분씩 일찍 들여보내주기도 했다.
그와 눈인사를 하고 주방을 나온 루이스는 허리에 두르는 검은색 앞치마를 다시 입었다. 끈을 앞으로 돌려 매려는데 드르륵,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울리는 부저 소리에 루이스는 매장 안으로 가볍게 뛰어가 주문을 받았다.
“사장님! 간장이랑 양념 반반이요!”
루이스는 주문서를 뽑아 렌지후드에 붙여놓고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잔 두 개를 가져다 생맥주를 따랐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품과 맥주의 비율에 속으로 한 번 뿌듯해하고, 뻥튀기를 접시에 담아 한 번에 들었다. 균형을 잡아 빠른 걸음으로 손님 테이블에 배달한 후에야 루이스는 핸드폰을 꺼냈다.
[야, 우리 형이 너 존나 찾어.]
[한번만 도와줘라 진짜 끈질기다니깐?]
너도 끈질기다 이 자식아. 루이스는 이글의 카톡을 읽고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안 왔네. 루이스는 뻥튀기를 퍼 담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한 얼굴을 떠올렸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쉬레는 다시 한 번 붙어보자며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알아내 찾아왔더랬다. 그날은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하기야 누가 쉬레를 일하다 볼 줄 알았겠냐마는. 덕분에 루이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귀찮은 짐이 하나 늘고 말았다.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오후 알바 장소인 서점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그냥 한 번 져주고 끝내려고도 해봤고, 방해가 되니 찾아오지 말라고 화도 내봤다. 하지만 그는 제 사정 따위 알 게 뭐냐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애초에 게임은 가끔 기분 전환 겸 애들이랑 놀 때나 하는 게 전부라 이기고 지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쉬레는 일부러 지려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대번에 무효라며 봐줄 생각 말고 제대로 하라고 눈을 번뜩였다. 그때처럼 멱살을 잡거나 길길이 날뛰진 않았지만, 무섭기로 치면 멱살을 잡히는 쪽이 차라리 나았다. 옆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이 말려주지 않았더라면 사단이 났을 지도 몰랐다. 덕분에 루이스는 일주일을 더 시달려야 했다.
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 예쁘장한 얼굴 뒤에 그에 못지않게 더럽고 사나운 성질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아니 아예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었고, 덕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쪽은 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이글의 형 아니랄까봐 끈질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쯤 했으면 충분하련만 벨져는 끈질기게 함께 공성할 것을 권했다. 말이 권하는 거지 눈빛으로는 안하면 어떻게 할 기세였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피곤하고 귀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그런 말은 제게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한테 하는 편이 백배는 더 건설적일 텐데. 문제는 그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자꾸만 넘어가는 자신이었다.
게임을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더, 루이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제게 큰 의미를 두는 건지도 모르겠고, 잘한다는 얘기는 적잖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게임만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에겐 그런 것보다 당장 모레 내야할 전기세와, 다음달에 내야 할 수도세 같은 게 더 중요했다.
당장 다음 달이면 개강인데 쉴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둬야 했다. 졸업 요건을 채워뒀다곤 해도 자격증이네 면접이네 하면 돈 나갈 일이 잔뜩이었다. 당장 제대로 된 정장 한 벌도 없는데. 영라인 정장도 위아래로 한 벌 맞추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글이 한 시즌 우승이면 두 학기 등록금이야 껌값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도, 다 철이 없어 하는 소리로 들렸다. 공연히 헛된 꿈과 희망을 좇기에 루이스에겐 당장의 현실이 더 급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한 달 용돈으로 백화점 명품매장 쇼핑을 다니는 그와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이제는 짜증이 난다거나 화가 나기보다는 비참했다. 학습된 경험은 쉬이 떨쳐버릴 수 없다.
센치해지려는 찰나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루이스는 냉큼 홀로 나가 주문을 받았다. 여름이라 사람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이 일을 한 지도 꽤 되다 보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금토일 주말만 아니면 그럭저럭 할 만 했다. 감당이 안 되는 진상은 사장님이 알아서 처리해주시기도 하고. 루이스는 주문을 받아 포스기에 입력하고 풀린 앞치마 끈을 앞쪽으로 꽉 동여맸다.
그래도 월요일이라 그런가 벌써 아홉시가 되어가는 데도 테이블이 반쯤 비어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주방을 흘긋 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어젯밤 퇴근하고 나서 새벽에 게임을 했더니 잠이 부족했다. 최근엔 확실히 잠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하루가 고단한 일정에, 쉬레의 장단에 맞춰주느라 잠을 줄이다보니 더 피곤했다.
하루 중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점에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학기 초였으면 바빠서 몇 번이나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 실수를 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없는 게 방학 중의 대학 서점이지만, 그렇다고 서점에 들여오는 책을 정리하고 검수하는 일은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주문을 마친 손님에게 뻥튀기 서빙을 마치고 멍을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있던 커플이 소란해지더니 여자가 물을 남자한테 뿌리고 나가버렸다. 가게 안 손님들과 루이스의 시선 역시 물벼락을 맞은 남자에게 쏠렸다. 그는 잠시 앉아있다가, 이내 여자를 따라 나가버렸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루이스는 냉큼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들어간 마지막 주문은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 보였지만 그래도 양념을 입히기 전에 이 상황을 알렸다. 마침 앉아있던 두 테이블이 계산을 하면서 홀이 비었다.
루이스는 영수증을 전출함에 넣어놓고 핸드폰의 홀드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마감시간이라 바닥에 떨어진 물을 닦고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누가 턱 등을 세게 두드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튀어나갈 뻔 했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험악한 인상의 사장님은 기름 앞에서 열기를 쐬느라 벌게진 얼굴로 루이스의 등을 두드렸다.
“그거 해놓고 문 닫아라. 닭도 남았는데 오랜만에 술 한 잔 하자. 거, 얼굴도 좀 피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가끔 있는 일이었다. 레이튼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루이스는 아픈 등을 쓰다듬으며 허리를 폈다. 한산한 거리를 한 번 슥 내다보고, 앞에 백금색 벤츠가 있는지 확인한 루이스는 매장 문을 닫고 바깥 조명을 껐다. 아무리 그라도 이 시간에 나타나진 않으리라. 보고 싶은 것도 아닌데 자꾸 앞에 나타나니 이젠 없으면 조금 서운했다. 사람 마음만큼 이기적인 게 없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가져다 매장을 닦고, 다시 빨아서 걸고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오니 레이튼이 치킨 한 소쿠리와 2000짜리 용기에 맥주를 가득 담아놓고 루이스를 맞았다. 하루 일과의 끝 치고는 후한 대접이라, 루이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 앉았다.
“참, 그놈은 안 왔나? 그 허여멀겋게 생겨서 예쁘장하니 고상한 척 하는 놈.”
“푸하하. 네, 오늘은 없네요.”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쉬레, 아니 벨져가 희고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레이튼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이글 홀든의 형이라니.”
“그 형제들이 닮은 거라곤 머리카락뿐일 걸요.”
“그런 것도 같다만.”
전에 이글이 스타이거 교수와 한바탕 소란을 피운 곳도 바로 여기였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잠시 전화번호를 가르쳐줄 때까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 출석 도장을 찍던 벨져를 떠올렸다. 알려주면 안 올 줄 알았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서점으로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와 하는 공성이 싫은 건 아니었다. 프로답게 벨져는 게임을 잘 했고, 의견 충돌도 잦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 거냐.”
“아무 일도 없는데요.”
“흥, 거짓말은. 어디 그런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치킨이나 뜯고 있을 놈이냐? 척 봐도 너 때문에 오는 건데.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조심스러워지는 말투에 루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벨져가 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벨져가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고 섬세한 데다 까탈스럽긴 하지만 결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지. 사실 그와 제 관계는 딱히 이렇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했다. 스카우터라기에 벨져는 안정적인 수입이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았고, 친구라기엔 소원했으며, 그냥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 하기에도 뭔가 모자랐다.
“그냥 같이 게임하자고 하는 것 뿐이에요.”
“그것뿐이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겠지.”
“...대회를 나가자는데, 아시잖아요.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는 거.”
루이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입안이 씁쓸한 이유였지만 레이튼은 턱을 만지며 그 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다 되물었다.
“잘하냐?”
“글쎄요.”
“그 녀석은.”
“걘 프로구요. 꽤 유명해요. 우승도 몇 번 하고, MVP도 몇 번 받고.”
레이튼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크게 숨을 뱉었다.
“그런 녀석이 같이 하자는 건 너한테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팡, 아플 정도로 센 손바닥이 등짝을 두드렸다.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아픈 등에 손을 얹었다. 순간의 고통이 가신 후에도 얼얼한 게 아무래도 티셔츠를 까보면 레이튼의 그 거북이 등딱지 같은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실수할 수도 있지! 해보지도 않고 벌써 겁부터 먹는 거냐? 사내자식이. 잘 하는 게 있는 지도 모르고 사는 녀석들이 태반인 세상이다. 루이스. 기회가 앞에 왔는데 겁부터 먹고 뒷걸음질 칠 테냐?”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쉬레도 그렇게 말했다. 도망치지 말라고. 왜 기회를 앞에 두고 안전한 길만 가려 하느냐고. 그 말에 루이스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기회에 걸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 위험을 생각하면, 그 다음을 생각하면 지금 있는 자리라도 놓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섭다고들 하지만, 백을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과 하나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은 다르다. 그 무게가 너무나 달라서 어떻게 이해를 시킬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시선을 피하며 숨을 집어삼켰다.
“루이스. 나는 말이다, 네가 더 크게 될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손님들이 놀라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던 레이튼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워낙이 괴팍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굉장히 상냥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틀렸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루이스는 대학이 매 년 쏟아내는 엘리트들과는 다를 거란 말이지. 알겠냐?”
서툰 위로와 격려에 담긴 건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루이스는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역시,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루이스는 레이튼이 포스기 정산을 확인하는 사이 마저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했다. 괴팍한 사장님의 변덕 덕에 호프집 일렉버스트의 영업시간은 들쭉날쭉했다. 루이스는 대걸레까지 빨아 걸어놓고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홀로 나왔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또 비가 쏟아졌다. 매장 안에는 에어컨이 추울 정도로 돌아가고 있지만 루이스의 마음 에는 창밖에 내리는 것 같은 장대비가 내리며 지독한 습기를 채웠다. 루이스는 금세 지치고 우울해지는 이 계절이 싫었다. 앞으로 이주면 창밖의 비가 그치겠지만 제 마음 속의 비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다들 제가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라는데, 그게 저한테만 안 보이나 봐요. 루이스는 문 앞까지 나와 우산을 챙겨주는 레이튼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담은 한숨은 우산을 두드리는 거센 빗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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