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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오후, 커피 한 잔.
유입 키워드가 꾸준히 갱신되길래...
새연성 ㅇㅅㅠ...
“많이 기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엇, 아, 아니오.”
토니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지는 그를 기다리며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깜빡 졸았던 릭은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릭의 앞자리에 앉은 그는 지하연합의 영웅, 루이스였다. 공성 중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사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신입사원의 자세로 돌아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꼿꼿이 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싸한 기백이 느껴져 존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릭은 어두운 무표정의 영웅을 앞에 두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후드 때문에 진 그늘 때문인지 공성에서 볼 때보다도 더 분위기가 무거웠다. 루이스는 테이블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켰다. 영국인이라 틀림없이 홍차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유리창을 통과하는 강렬한 햇빛이 그를 비췄다. 햇빛 때문인가, 흰 피부며 새빨간 눈동자, 선이 고운 턱선이 어우러진 옆얼굴이 그림 같았다. 꼭 도나우 강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온갖 색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순수하게 감탄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크.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방금 그 노골적인 시선은 실례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릭을 마주했다. 무표정인건 여전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그늘이 걷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침묵이 무겁다. 릭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미건조한,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다. 친구 소개로 여자를 만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바지 위에 적당히 닦으면서도 릭은 루이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토니가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겨서 대신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딱히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한 공기가 불편하다. 릭은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상대를 잠시 떠올렸다가 지워버렸다. 아무리 간부라고 하지만 영웅씩이나 되는 사람을 대신 보내다니. 릭은 토니가 제게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깨닫는 동시에 졸지에 대신 체면치례를 하러 나온 그에게 미안해졌다. 며칠 야근을 하다 온 자신도 자신이지만, 애써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는 상대가 신경 쓰였다.
“그…….”
말을 꺼내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제게 향하는 또렷하고 맑은 눈에 릭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 다른 게 아니고, 괜찮소?”
“예?”
망했다. 릭은 어색하게 웃는 그대로 굳었다. 다른 괜찮은 말도 있을 텐데 고작 괜찮냐니, 적어도 그가 소화하는 업무의 양과 스케줄이 평범한 회사원인 자신보다야 많을 텐데! 뻔히 알면서 이도 저도 아닌 긁어 부스럼으로 자폭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았다.
“크흠. 괜찮습니다. 덕분에.”
스위치를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릭은 멍하니 뒷머리를 긁던 손을 내렸다. 웃었다. 잠시였지만, 분명 웃었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니, 애초에 사람이기는 했구나. 살짝, 눈꼬리가 휘는 게 예뻤다. 순간이었지만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것도 예뻤다. 남자에게 비교할 말은 아니지만 꼭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릭은 어디에선가 아침 카페 창가에서 봤던 물망초를 떠올렸다가 꿀꺽 침을 삼키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지만 그래도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한결 풀어진 건 분명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종업원이 커피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릭은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포옥 숨을 몰아쉬었다. 강한 햇볕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데 여긴 왜……. 아, 아니지.”
“피곤하시면 들어가 쉬셔도 됩니다.”
“하하, 그건 아니라오.”
커피를 젓던 그가 고개를 들어 릭을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운데 마냥 싫지는 않다. 릭은 검지로 무릎을 톡톡톡 두드렸다.
“토니가 당신을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얘기를 해보라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숨을 쉰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머리를 받쳤다. 근심에 휩싸인 얼굴을 내려 보고 있으니 왠지 손을 뻗고 싶어진다.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싶었다.
“조언자가 필요하단 뜻이 아니겠소. 아니면 가볍게 사귈 친구라거나.”
릭은 충동을 억누르며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사회인에게 학습된 본능과도 같은 처세술은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릭을 잠시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앉았다. 김이 오르는 커피를 바라만 보고 있는 그에게, 릭은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밀어주었다.
피곤할 땐 단 게 좋다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완곡한 거절에 릭은 조금 서운해졌다. 하지만 강요를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릭은 바구니를 다시 제자리로 당겼다.
“다는 그렇고, 반만…….”
씁쓸하게 거절당한 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시 무르기 전에 초코칩쿠키를 반 잘라 내밀자 입에도 안 댈 것 같던 그가 쿠키를 받아 입에 넣었다.
“여긴 쿠키도 제법이지만 스콘이 제일이라오. 커스터드 크림도 일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잘 먹는 게 뿌듯해 릭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그를 바라봤다. 열심히 쿠키를 먹던 루이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다네요.”
“하하, 그야 물론 초코칩쿠키니까.”
“그러게요.”
릭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잘 먹는 걸 보니 기쁘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묘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토니가 마음을 달래려고 한 거라면 더이상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스터, 저는…….”
“아, 부스러기 묻었소.”
릭은 손을 뻗었다. 뒤로 물러나는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놀라 커진 눈이 귀엽다. 영웅이 아닌, 루이스의 얼굴이 이런 걸까. 릭은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이거 실례를. 거기가 아니라 이쪽이오.”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지르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자신의 입술 왼쪽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쿠키 부스러기를 뗀 루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라오.”
루이스는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커피를 마셨다. 커피잔을 쥐는 손가락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붉게 튼 곳이며 분홍색 새 살 위로 다시 새 상처가 생긴 게 그가 짊어진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에서 책을 들고 있을 때와 공성을 할 때의 그는 정말 다르고,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평화로운 쪽이 좋았다.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평범한 서점 직원이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랬으면 희고 모양 좋은 손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평소엔 괜찮습니다.”
“아니, 미안하오. 그런 게 아니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괜찮다며 커피를 마시는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잠시 어렸다 사라졌다. 혹시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 릭은 필사적으로 무마할 말을 찾았다.
“정말로, 그래서 본 게 아니오. 그게……. 예쁜 손이라 생각해서.”
“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이걸로 오늘만 두 번째다. 이미지는 완전히 망했다. 이게 소개팅이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남자한테 이런 작업멘트를 해서 무얼 한단 말인가.
“톰슨씨.”
“예, 아, 아니. 음.”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누그러진 표정이 어째 저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아 릭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연하의 남자에게 위로를 받는 직장인이라니. 릭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본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는 건 처음이라오.”
“그렇군요. 저한텐 꽤 익숙해서, 죄송합니다.”
“익숙하다니……. 아.”
릭은 잠시 광장에서 게이트를 여닫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능력자들을 이동시키느라 바빠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서점에 서있는 그에겐 제 모습이 보였을 터였다.
“자주 뵙기도 하고요.”
“그야 그렇소만.”
“전 톰슨 씨의 상사도 아닙니다.”
“하하하, 그대를 상사로 두면 내 일이 절반은 줄어들 것 같소만.”
“글쎄요.”
어디 그게 쉬울 것 같으냐는 듯 짓는 짓궂은 미소에 릭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할 줄이야. 릭은 진심으로 대신 그를 보내준 토니에게 감사했다. 덕분에 일주일의 스트레스가 따스한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릭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생각한 것만큼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매번 미안해하는 토니보다 대하기 편했다.
“토니가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딱히 그와 많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오.”
“그럼…….”
“그가 미안해할 뿐이지.”
“…….휘말려든 쪽이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평범한 일상을 누릴 땐 그게 귀한 줄 모르죠.”
덤덤하게 말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삶, 갑작스러운 사건. 송두리째 바뀌는 삶. 릭은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남자를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 애틋한 눈빛으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듯이, 그 먼 곳을 그리는 눈에 릭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가슴 위에 올라온 돌은 조금씩 무게를 더할 겁니다. 결국에는 짓눌려버릴지도 모르죠. 그땐 이미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죠.”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루이스는 경고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릭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릭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까 싶을 정도로, 그는 릭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은 매력적이니까요. 누구든, 붙잡으면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있소?”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릭이 아는 루이스란 사람은 스카우터도 아니거니와 이런 걸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릭에게 루이스는 어디까지나 연합의 리더이자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어째서 연합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지우려 하는가. 예전의 평범하고 로맨틱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고, 또 전쟁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전쟁이 가져다줄 명예도, 부도,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릭 톰슨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글쎄요.”
릭이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쓰게 웃는 그의 눈은 후드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있을 곳을 정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겁니다. 경험자의 충고라고 해두죠.”
“......”
“그럼 저는 이만. 다음에는 토니가 나올 겁니다.”
루이스는 단숨에 잔을 비우곤 테이블 위에 두 사람 분의 커피값을 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그대로 릭을 지나쳐갔다. 싸한 냉기가 릭을 덮쳐왔다. 이대로 보내기엔 석연치 않다.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지만, 릭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루이스!”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말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릭은 깜빡이는 루이스의 눈을 보며 마침내 입술을 뗐다.
“후회하오?”
“…….”
루이스는 시선을 피했다. 또, 그 눈이다. 릭은 숨을 죽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있던 루이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릭은 카페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등을 지켜봤다. 끝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릭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두 사람분의 커피값을 테이블 위에 놓고 루이스가 두고 간 지폐는 지갑 안쪽에 넣었다.
날씨가 좋다. 릭은 바로 게이트를 여는 대신 조금 걷기로 했다. 빼먹은 게 있나 싶어 돌아본 창가 자리엔 쿠키 반쪽과 다 식어버린 커피만이 남았다.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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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키스할래요?"
대답할 새도 없이, 그의 눈이 감겼다. 속눈썹이 떨리며 다가오는 입술을 밀어낼 수 없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이대로 끝나는 게 아쉬워 다이무스는 입을 벌려 입술로 그의 입술을 물었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연이어 맞닿았다. 친애라기엔 연인같이 다정하고, 풋풋한 키스라기엔 두 사람의 입술이 말라있었다. 다이무스의 입술은 연이은 야근과 과로로 부르트고 터져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면 따금거렸지만 키스가 주는 따스한 만족감과 포만감은 비할 게 아니었다. 혀를 넣어도 될까. 입술과 입술이 달라붙었다 떨어지며 적나라한 소리가 났다. 다이무스는 제게서 떨어지는 입술과 뒤로 물러나려는 루이스의 뒷목을 잡아쥐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응, 으응...."
쪽, 쪽 하고 입술이 맞닿는 사이 그의 숨결이 훅 끼쳤다. 다이무스는 제 가슴팍을 꽉 그러쥐는 루이스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입술을 뗐다. 훅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들숨과 날숨이 합쳐졌다.
더 해도 될까.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비추지 않는다. 그의 능력만큼이나 차가운 벽이 그의 내면을 엿보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고민하는 대신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는 순순히 눈을 감고 다이무스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윽...."
혀를 넣자마자 깨물렸다. 뭉근한 열기에 취해 흥분했던 다이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손으로 감쌌다.
"아팠어요?"
"......."
다이무스는 대답 대심 천연덕스럽게 묻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슬쩍 입꼬리를 당긴 루이스는 귓가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약하게 한다고 한 건데."
"......."
"아직 거기까진 아니에요."
한 쪽 무릎을 세워 손을 얹은 그는 선을 그었다. 이 모든 관계의 주도권은 그가 쥐고 있다. 그것을 잊지 말라는 뜻인가. 다이무스는 일방적인 선긋기에 기분이 상했다. 실망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대로 다가와 키스하자고 한 건 그다. 다이무스는 억울했다. 그리고 서운하기도 했다. 대체 이 남자는 얼마나 더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일까. 그 기약 없는 희망 고문에 다이무스는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다. 이건 부당한 처사였다. 하물며 피도 눈물도 없다는 은행원도 이정도는 아니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런 사이. 날씨 얘기를 하듯 차분한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바라보는 대신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차라리 못 알아들었으면 좋으련만. 다이무스 홀든은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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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ts루이티엔] Another.
홈에 박수로 남겨주신 리퀘 그 두번째입니다! ><
" 다이무스의 파트너로 파티에 참가하는 루이스, 그걸 지켜보는 티엔 "
살다 보면 여자라서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지금 이 성가신 일도 그 중 하나에 속했다. 루이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끈을 조여맸다. 다이무스가 속옷부터 구두, 악세서리 하나까지 빼먹지 않고 보낸 드레스와 초대장.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가지였고 루이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파스텔 톤의 연분홍 쉬폰 드레스는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디자인이지었만 첫 프롬에 가는 열일곱 소녀라면 모를까, 스물일곱씩이나 된 여자가 입는 건 아무래도 머쓱했다. 하지만 어쩌랴, 이걸 입은 제 모습이 보고 싶다는데.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다이무스가 보낸 이상 다른 걸 입을 수도 없다. 흰 레이스 속옷과 속이 비치는 얇은 슬립 차림의 루이스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살이 쪘나…."
가슴부터 허리까지 꼭 달라붙는 라인의 드레스인데 아무래도 지퍼가 잘 올라가질 않았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등 뒤로 손을 뻗었다. 힘겹게 지퍼를 올린 루이슨느 갑갑한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푹,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지퍼가 잘 잠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한 번 돌아보고, 풍성한 치맛자락을 정리한 뒤 다시 거울을 바라보자 꼭 십대로 돌아간 것 같은 자신이 보였다.
루이스는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장신구함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앙증맞은 벚꽃모양 크리스탈 귀걸이와 목걸이는 걸치고 나면 꼼짝없이 십대 소녀로 보일 판이었다. 이미 파일로 고등학교 시절의 제가 어땠는지 다 봤으면서. 장난기가 발동한 루이스는 어디 한 번 신고나 당해보란 심보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했는지 안했는지 모를 정도로 엷은 화장에, 드레스와 같은 연분홍 블러셔를 가볍게 볼에 두드린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립글로즈를 바르고 입술을 안으로 모아 물었다. 입꼬리까지 바르고 화장솜으로 삐져나온 걸 지우고, 머리도 엉성하게 모아 올려 장식핀을 꽂자 정말 파트너의 손을 잡고 졸업 프롬에 가야할 것 같았다.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마지막으로 전신 거울 앞에서 앞뒤로 제 모습을 꼼꼼히 살핀 루이스는 묘하게 들뜬 기분으로 클러치백을 챙겼다. 구두의 발목 리본을 묶다가 퍼뜩 깜빡 잊고 있었던 반지가 떠올라 급하게 깨끔발로 방에 뛰어들어갔다. 반지까지 끼는 걸 마지막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루이스는 집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리무진에서 친절한 기사님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푹신한 좌석에 앉은 루이스는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벌써부터 다이무스의 반응이 기대됐다. 프롬 같은 거 가본 적도 없는데, 첫 데이트 상대가 누구냐며 있지도 않은 상대에게 질투를 하고 꼬치꼬치 캐묻던 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여워서 사실을 말해준 적은 없지만 아직까지도 거기에 집착하고 있었다니. 루이스는 자신이 한껏 들떴다는 걸 순순히 인정했다.
진정하기 위해 손을 무릎 위에 모아 놓고 숨을 폭 내쉰 순간, 장갑을 빼먹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차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봤으나 이미 차는 멘션에서 한참 멀어진 후였다. 꼭 이렇게 하나를 빼먹는다니깐. 루이스는 맨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루이스.”
차에서 내리자 까만 턱시도를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 다이무스가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다가와 손을 잡아 손등 위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기꺼이 그의 입맞춤에 미소로 화답한 루이스는 그대로 팔짱을 끼는 다이무스의 곁에 섰다. 다이무스의 얼굴이 붉었다. 루이스는 작게 키득거리며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춘 줄 알았던 다이무스는 잠시 넋을 놓았던 게 민망해 헛기침을 했다. 이글이나 벨져가 알았다면 석달 열흘은 놀려먹었을 정도로 얼빠진 표정이었을 것이다. 루이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위아래로 루이스의 모습을 훑다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그녀와 마주봤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 메시지에 로비로 나간 다이무스가 본 것은 요정같은 소녀였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만 울리고, 멈춘 시간 속에 그녀가 웃으며 제게 걸어왔다. 한참을 루이스와 눈을 맞추던 다이무스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며 그 예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예쁘군. 잘 어울린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누구씨가 신경 좀 썼죠.”
홀린 듯 들뜬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쓸 새도 없이 루이스가 수줍게 웃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렸다. 자연스레 감기는 눈과 떨리는 속눈썹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췄다. 어여쁜 연인인 건 변함이 없지만 오늘은 더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팔짱을 끼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져 입가를 매만졌다. 역시 실수였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차림의 루이스는 좋지만 그녀에게 달라붙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은 불쾌하기 그지 없다. 게다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미성년자를 데리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네 실수다.”
“뭐가요?”
“조금만 덜 예쁘고 덜 영리하지 그랬나.”
루이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할까 싶으면서도 정말로 곤란해하는 다이무스가 귀여웠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팔에 매달려 걸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기대 이상의 반응에 즐거워진 루이스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뽀뽀했다. 다이무스가 기쁜 것인지 기분이 나쁜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 더 유쾌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왜요, 싫어요?”
반박을 하려던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목에서 빛나는 핑크색 펜던트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신경 써서 고른 벚꽃 펜던트가 루이스의 흰 피부에 잘 어울렸다. 다이무스는 손을 놓고 목걸이의 펜던트를 가볍게 잡았다. 펜던트를 만지는 척 쇄골과 목을 더듬자 루이스가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한결 낫군.”
“네?”
“목을 죄는 초커보다 훨씬 낫다는 거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쇄골에 입술을 맞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루이스의 볼이 인공적인 색에서 자연스러운 분홍으로 물든 게 훨씬 보기 좋았다.
“한 곡, 추겠나?”
“이거 지금 제가 침착해야 하는 상황 맞죠?”
“레이디.”
“발을 밟아도 화내거나 잔소리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요.”
새침한 표정에 다이무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렇게 투정을 부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다이무스는 손등으로 연인의 뺨을 다정하게 쓸며 미소를 머금었다. 저를 바라보며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보다 예쁘게 웃는 연인은 제 손에 뺨을 기댔다.
다이무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홀로 이끌었다. 허리를 감싸 안고, 흐르는 왈츠곡에 발을 움직이는 둘 사이의 거리는 손 한 뼘밖에 되지 않았다.
“겁을 준 것 치고는 나쁘지 않군.”
“가르친 선생님이 엄했거든요.”
“누군지 얼굴 한 번 보고 싶군.”
낮게 속삭이며 잡은 손을 올리자 루이스가 한 바퀴 돌며 풍성한 치맛자락이 넓게 퍼졌다. 다이무스는 매끄럽게 그녀의 등을 받치며 다시 발을 옮겼다. 그녀가 말하는 엄한 선생이란 다름 아닌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총을 쏘고 피할 땐 그렇게 유연하고 재빠르면서, 춤을 추라니 각목처럼 뻣뻣하게 굳어 손과 발이 따로 놀던 루이스가 떠올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어엿한 레이디로 만든 것 역시 자신이란 걸 생각하면 발을 밟히고 정강이를 걷어차인 것쯤이야.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허리를 잡아 들어올렸다 내려놓으며 한 바퀴 돌았다. 바로 손을 맞잡고, 리듬에 맞춰 물 흐르듯 이어지는 템포와 스텝이 뿌듯했다. 곡이 끝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다. 다이무스는 곡이 끝나며 제 어깨에서 떨어지는 루이스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를 보고 잡고 있던 오른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웃는 루이스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포옥 숨을 내쉬었다.
“후우,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아요?”
“그랬나.”
“당신이 너무 좋아해서 분위기 깨기 싫었거든요.”
“잠시 앉아있어라.”
한적한 테라스로 루이스를 데리고 나온 다이무스는 오늘 작정하고 저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듯한 루이스를 대리석 난간 위에 앉혔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흔드는 루이스는 순진무구한 소녀같았다.
물을 가져오는 길에 백합이나 흰 작약으로 꽃다발이라도 사다 안겨주면 완벽 할 것 같은데, 아쉽게도 당장 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따가, 집에 가는 길에라도 안겨주고 싶지만 그쯤이면 웬만한 꽃집은 다 문을 닫을 터였다. 다이무스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루이스의 이마에 뽀뽀했다.
그런 게 없어도 제 연인은 충분히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다이무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웨이터에게 꽃을 구할 곳이 있냐 묻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기뻐한다면 뭐든 해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정작 루이스가 들으면 애먼 꽃을 구하러 다니느니 새 구두를 신느라 지친 발을 주물러달라고 했겠지만 그는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홀로 남겨진 루이스는 테라스 문 너머로 보이는 홀에 다이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곤 조심스레 구두의 리본을 풀었다. 굽도 낮고, 예쁘긴 하지만 새 구두가 편하기란 흔치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길도 들지 않은 새 구두를 신고 춤까지 추고 나니 발뒤꿈치가 까져 쓰라렸다.
루이스는 피가 맺힌 발뒤꿈치를 슥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발이 아프니 이만 가자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구두를 벗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뻐근한 목을 돌리는데 달칵,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당연히 다이무스겠거니 하고 고개를 든 루이스는 예상치 못한 얼굴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단정하고 늠름한 외모의 그.
“티엔…?”
“루이스.”
약간의 망설임이 섞인 목소리에 티엔은 덤덤히 대답했다. 티엔은 루이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루이스가 난간에 기대고 있던 손을 떼고, 그가 잡으려는 다리를 뒤로 빼면서 몸의 중심이 뒤로 넘어갔다.
“어엇.”
“루이스!”
기우뚱 넘어가던 몸이 순간 강하게 당기는 힘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푹, 몸이 부딪히는 충격을 예상하고 질끈 눈을 감았던 루이스는 익숙한 향수 냄새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제 허리와 등을 단단히 감싸안고,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을 내쉬는 사람은 연인이 아닌 다른 남자다. 그럼에도 떼어낼 수 없는 건 어째서일까.
루이스는 다시 가슴속에 일렁이는 혼란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소중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타는 갈증을 겨우 축이는 듯이 눈을 감은 채 저를 안고있는 티엔을 마주 안지도 못하는 손으론 주먹을 쥐었다.
“저기…. 저, 괜찮.”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다오.”
“티엔….”
이미 한 차례 그를 속였던 루이스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을 빠진 걸로, 잠시 백일몽을 꾼 것이라 생각하라 해도 그는 포기할 줄 몰랐다. 다이무스는 그가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일 뿐이라 했지만 루이스는 정말로 그렇게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의 진심을 봤다. 진심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러니 다이무스의 말마따나 정말로 티엔이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일지라도 루이스는 그를 차갑게 밀어낼 수 없었다. 아니, 이미 그 날 그 키스로 루이스는 그를 자르고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럼에도 티엔은 물러서지 않았다. 설마하니 요원인 자신을 찾아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루이스였다.
티엔은 잠시 더 그러고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떨어졌다.
“미안하다.”
“…….”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티엔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루이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발목을 잡았다.
“읏…!”
“아름답더군.”
차갑게 적신 손수건이 발뒤꿈치를 감쌌다. 찌르르 올라오는 알싸한 통증에 눈을 찌푸리며 다리를 빼려 해도 티엔은 한 손으로 발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화가 날 정도로.”
물이 아니라 술을 적셔오기라도 한 건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지만 루이스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티엔은 기어코 반대쪽도 잡아쥐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달리 맨발을 감싸쥔 그의 손은 따뜻했다. 닿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그 자상한 손길에 루이스가 돌려줄 수 있는 건 아픈 대답 하나뿐인데도.
티엔은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에 빼어난 능력까지 뭐 하나 모자란 게 없으면서 왜 하필이면 제게 마음을 준 걸까. 루이스는 티엔이 안타까웠다. 비단 그의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루이스는 티엔 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경 쓰였다.
“여긴 어떻게.”
“재단으로 초대장이 왔다. 챌피가 시간이 나지 않아 대신 왔지.”
티엔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눈만은 여전히 타오르는 채로, 루이스는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면서도 가슴이 옥죄어 오는 것 같이 갑갑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유구무언이란 말은 이럴 때를 두고 말하는 말이리라. 루이스는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거기서 뭘 하는 거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이 무서운 표정의 다이무스와 그와 똑같은 표정의 티엔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이스는 놀라 걸터앉아있던 난간에서 내려왔지만 방금 전까지 긴장을 풀고 있어서였는지 힘이 풀리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이스!””
“읏!”
양 옆에서 팔을 붙드는 남자들 덕에 꼴사납게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누구고 할 거 없이 힘을 꽉 주어 잡은 탓에 붙잡힌 팔이 아팠다.
“일단 이거 좀 놓고!”
“실수는 인정하지.”
티엔이 순순히 사과하며 손을 놓자 다이무스가 그대로 루이스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그 바람에 엉성하게 올린 머리에서 장식핀이 떨어지며 머리카락이 쏟아져내렸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안은 채 불쾌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티엔을 마주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이 싸움에선 결코 물러날 수도 질 수도 없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티엔을 보지 못하도록 끌어안았다. 헬리오스의, 홀든의 다이무스 홀든이 아니라 루이스의 연인으로서 제 사람을 넘보는 불한당에겐 시선 한 줌도 허락할 수 없다.
불쾌한 건 티엔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서로에게 서로는 사랑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다. 십분 양보해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저, 다이무스.”
“이만 가줬으면 좋겠군. 보다시피, 밀회중이라서.”
“기껏 어울려주느라 다친 것도 모르고 제 욕심만을 강요하는 남자라면, 더 두고 볼 것도 없지 않겠나.”
다이무스는 티엔의 비아냥거림에 눈살을 찌푸렸다. 매서운 얼굴이었으나 티엔은 그 정도에 움츠러들 애송이가 아니었다. 다이무스도 그가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면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티엔 정은 함부로 봐선 안 될 상대였다. 루이스를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그저 눈앞의 남자가 너무 위협적인 상대라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남의 애인에게 무슨 짓이지.”
“사람을 물건처럼 얘기하는군.”
티엔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난간에 기대어 섰다. 먼저 평정심을 무너뜨렸으니 기선제압은 한 셈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건, 다이무스의 품에 안긴 루이스가 얌전히 안겨있기 때문이리라. 티엔은 한 마디도 거들어주지 않는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복숭아 빛의 하늘하늘한 드레스와 꾸밈없이 웃는 루이스. 치파오를 입은 그녀 역시 아름다웠지만, 그 차림을 본 순간 티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제가 루이스를 아는 것에 비해 훨씬 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녀의 그 미소였다. 시종일관 그를 사랑스럽단 눈길로 쳐다보는 걸 지켜보고 있는 매 순간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제 앞에선 보여준 적 없는 눈빛과 미소, 장난스레 농담을 건네며 새침한 척 애교를 부리는 것까지. 그래서 더더욱 발뒤꿈치가 까지고 새 구두가 힘들어도 기꺼이 그를 위해 감내하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티엔은 주먹을 쥐며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동안 티엔의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은 결코 짧지 않았다.
물러서야 할 때다. 지금이 아니면 그녀 앞에서 꼴사납게 질투하는 추태를 보이게 될 게 뻔했다. 티엔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여전히 매섭게 저를 경계하고 있는 다이무스를 마주봤다.
“너무 안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홀든.”
“흥. 나대지 마라.”
“루이스.”
티엔은 인사를 하기 위해 루이스를 불렀다. 단 세 글자. 특별할 것도 없는 이름. 그 뿐인데도 입에 담는 순간 혀끝이 아리도록 달았다. 이름의 주인은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들어 저를 안은 남자를 올려다봤다. 다이무스는 놓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잠시만요. 하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에 다이무스는 어쩔 수 없이 루이스를 꼭 붙들고 있던 팔을 풀었다.
“고마워요.”
“…그래. 그럼 그 답례는 다음에.”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손을 뻗은 티엔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손끝으로 만지다 놓았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제게로 향했다. 티엔은 쓰게 웃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하는 루이스의 손을 잡은 티엔은 그 보드라운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왼손 약지에 빛나는 반지가 안 그래도 무거운 마음에 추를 더했다.
손을 놓은 티엔은 쓰게 웃으며 두 사람을 뒤로했다. 멀어져가는 티엔의 등을 바라보는 루이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스는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가슴 앞에 놓고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루이스.”
“알아요.”
“후우….”
다이무스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역시 답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해졌다. 이번에는 제 편을 들어주었지만 다음에도 그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이무스는 아직도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 연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끌려온 루이스가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머리에 입술을 맞추며 등을 쓰다듬었다.
“나만 봐라.”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말고. 넌 나만 보면 돼.”
“다이무스….”
“사랑한다.”
“저도요.”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너른 품에 안겨있으면 세상의 어떤 비바람도 다 막아줄 수 있을 것같이 듬직한데, 이번만큼은 쉽사리 평온이 찾아오질 않았다. 그건 아마 문제가 밖이 아니라 제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품에 파고들어 뺨을 부볐다. 결국 오늘 데이트는 이렇게 망친 셈이었다.
“몸이 차군. 들어가지.”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있어요.”
그 와중에도 자길 먼저 생각하는 다이무스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어 다이무스를 올려다봤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안타깝고 미안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맞췄다.
“사랑해요.”
그 말에 다이무스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혀를 얽고 입안을 희롱하는 진한 키스는 녹진하게 생각을 앗아간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질척하게 젖어 섞이는 타액과 오가는 혀에 달근한 신음이 샜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는 게 좋겠군.”
“응. 그래요.”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루이스는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다이무스의 팔에 매달려 머리를 기댔다. 겨우 돌아온 그의 미소에 안심한 루이스는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안심하고 여유를 되찾은 것은 다이무스도 마찬가지라, 이제야 겨우 루이스가 벗어놓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새 구두에 발뒤꿈치가 까졌다고 한 것도 떠올랐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다리를 흘긋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뺨과 턱을 어루만지고, 떨어진 구두를 주워다 한손에 들었다.
“루이스.”
“네.”
“앞으론 미리 말해라. 무조건 맞춰주려 하지 말고.”
“그렇지만 당신이 기뻐할 것 같았는걸요. 좋아했잖아요?”
“난 네가 다치는 게 싫다.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루이스는 대답대신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다이무스는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입 맞추고, 그녀의 코를 잡았다 놓았다. 아프지 않게 한다고 했건만 루이스는 바로 손으로 코를 감쌌다.
“그럼 가지.”
“으으. 이렇게 아프게 잡는 게 어딨. 꺅!”
다이무스는 다시 구두를 신기는 대신 그녀를 안아들었다. 루이스가 귀엽게 소리를 지르며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루이스는 괜찮으니 내려달라고 했지만 다이무스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들고 테라스를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루이스는 부끄러워하며 다이무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다이무스는 시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시선들 사이에 그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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