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의 영웅과 그의 연인 트리비아 카리나가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닌다는 건 이미 널리 퍼진 얘기다. 그림자와 액자, 환영의 도시 트와일라잇. 상처를 입어도 회복되고, 죽음조차 거스르는 이공간의 존재는 일종의 신비인 동시에 모두가 탐내는 기적이었다. 처음 트와일라잇을 발견하고 그 공간을 독점한 채 황혼의 도시에 군림한 여제는 본디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 이였고, 그녀의 연인은 자신만의 공간을 바라는 그녀를 사랑했다.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다.
몇 주에 걸친 집요한 추격 끝에 회사와 연합이 발견한 건 추레한 망토를 뒤집어쓴 한 남자와 찬란하고 처연하게 바스라지는 빛무리였다. 만월의 밤이었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남자가 쓴 망토의 후드를 벗겨냈다. 힘없이 부서져 먼지와 같이 흩날리는 빛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놓아주듯 한 손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던 남자. 빛무리에 감싸인 그의 손 안에서 어둠이 날갯짓하며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그 범접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광경에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행색은 추레했으나 남루한 옷가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옆얼굴에 드리운 깊은 수심과 애틋한 눈빛만이 사라지는 빛무리에 반짝일 뿐. 추격자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그는 한 때 영웅이라 불린 자이자 여제의 신하였고,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였다.
고통을 애써 참아내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는 시리도록 아픈 미소와 함께 돌아서 저를 찾아온 이들을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달을 등진 루이스는 절벽 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맞았다. 몇 차례에 걸친 추격과 정예요원들을 상대해온 그였지만 이젠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보냈어야 할 사람을 제 욕심으로 잡고 있던 그였다. 돌아보지 마, 카리나. 루이스는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켰다. 돌아올 문은 부쉈다. 물론 그 책임은 전부 제게 향하겠지만 감히 꿈꿔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대가를 치루는 것 뿐이었다.
“문을 부쉈나.”
“보는 대로.”
“엠프레스는.”
“달빛을 따라.”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은 건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루이스는 이 이후 벌어질 일을 가볍게 그렸다. 회사가 독자적으로 보낸 이들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이스…….”
루이스는 제 이름을 부르는 동료를 향해 웃었다. 걱정과 불안, 긴장이 섞여 미간을 찡그린 레베카 옆엔 휴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다. 둘이나 보내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앤지의 걱정이 과했던 모양이었다.
달리는 열차 안, 각각 연합과 회사의 능력자가 지키는 1등칸 안에는 단 둘 뿐이었다. 삼엄한 경비 속에 열차를 탄지 십분여 만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이무스는 가방에서 서류 파일을 꺼내 보고, 루이스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빠르게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아슬아슬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안 그래도 오랜 여정으로 지쳐있던 루이스가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이 침묵은 결국 탐색전의 일부일 뿐. 그렇다면 더 지치기 전에 만족할 만한 정보를 주고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나았다. 어차피 포트레너드로 돌아가면 회사와 연합의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게 뻔했다. 루이스는 타라나 브뤼노를 앞에 두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를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오랜만이로군요. 그것도 이렇게 거창하게.”
“네 신변은 안타리우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현 상황에서 연합의 영웅이 죽기라도 하면 연합과 회사의 균형이 깨지겠지.”
“안타리우스가 활동을 개시했다는 건 압니다. 최근 루사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서류를 검토하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창틀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고 바깥을 보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파일을 덮었다. 직접적으로 적대하거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두 사람은 각 진영의 사람이었기에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속내라던가 행동 패턴, 사소한 습관이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 알고 있다면 더 망설일 것도 없다. 다이무스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문을 열었나.”
“그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전 그녀를 배웅했을 뿐이라서요.”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루한 풍경에서 고개를 돌리니 매사 진지하기 그지없는 다이무스 홀든의 얼굴에 초조가 비쳤다. 회사 쪽에서도 어지간히 급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를 보냈다는 것부터가 이 사안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오가는 시선 속에 서로 뭐 하나라도 잡아내려는 그 긴장 속에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아무리 안타리우스가 점거했다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은 연합의 세력권 안에 있습니다. 회사보다는 정보가 빠르죠.”
저를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매서운 눈빛에 루이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눈을 감았다. 그도 아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건 지금 제가 상대하는 다이무스 홀든이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인지 아니면 홀든의 장남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시나, 잔뜩 굳은 그의 얼굴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루이스는 창틀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 눈을 뜨고 순순히 그가 원하는 정보를 내놓았다.
“동생분은 무사합니다. 둘 다.”
“보증할 수 있나?”
“그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군요.”
루이스는 제 패를 슬며시 보여주곤 덮어버렸다. 벨져 홀든이 이글 홀든을 불렀고, 이글은 나이오비와 다른 능력자를 대동하고 벨져를 찾았다. 비록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루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릭 톰슨의 공간이동과 그림자를 열고 이동하는 것, 어느 게 더 빠른가에 대한 실랑이도 이젠 의미가 없었다.
“루이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시다시피 막 실연을 당한 참이라서요. 더 말할 기분이 아니군요.”
“왜 그랬지?”
“…….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어디까지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꽤 감상적인 말이군.”
루이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어설프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곧 세계는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 것이고, 그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될 바에야 그녀만이라도 행복해지는 게 나았다. 트리비아를 보내기 싫어 미적거렸던 루이스가 그녀를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아주 사소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안타리우스가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니는 지금, 루이스는 제 선택이 늦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문을 열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알겠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쉬도록.”
다이무스는 다시 파일을 펴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루이스는 그걸 보곤 일등칸의 푹신한 쿠션에 지친 몸을 기댔다. 로라스만큼은 아니지만 다이무스 홀든 역시 자는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은 못 된다. 거기다 두 홀든의 정보를 쥐고 있는 이상 다이무스는 회사의 명령이 있다 해도 함부로 나설 수 없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루이스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곧 의식이 무거운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거슬리고 방해된다는 이유로 동행을 만들지 않던 벨져로선 제법 후한 제안이었음에도 루이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축 쳐진 채 이끄는 대로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맑아져있었지만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발밑이 훅 꺼져버리는 감각에 놀라 퍼득거린 것도 잠시, 벨져 홀든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악몽을 꾼 것처럼 개운하지가 않았다.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며칠째 벨져 홀든을 괴롭히는 꿈은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아보아도 이미 깬 꿈은 검게 물든 장면에 멈춘 채 흐르지 않고,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안타리우스를 추적하고 인식의 문을 찾아내 파괴하는 데 위험이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멍청이랑 자꾸 마주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기사단에서 보낸 정보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보다 신경을 거스르는 건 그들의 존재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그들은 좋은 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고 남자는 그걸 알면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로 바라보면 한 번쯤 돌아봐줄 법도 하건만 그녀는 매정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쪽에선 제법 유명인이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문이 제법 됐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났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안타리우스의 포인트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작 그들은 저를 못 알아본 데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연인이 뭔가를 발견한다 해도 이미 벨져가 다녀간 후라 상관없지만 그래도 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좋을 리 없었다.
벨져는 마른세수를 하며 어제 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벤치에 앉아 궁상을 떠는 남자의 얼굴은 전보다 더 수척해보였고, 한심하고 바보같았다. 멀쩡한 얼굴을 들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적의 요새 근처에서 빈틈을 보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쓰러뜨린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진 주제에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나부랭이에게 당하는 것 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기에 벨져는 어젯밤도 그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게 벌써 몇 주 째인지. 이렇게 꿈자리가 사나워진 것도 분명 그게 거슬려서인 게 분명했다. 차라리 빨리 이공간을 찾아서 사라져줬으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쉬울 리 없었다. 벨져는 거기까지 흘러간 생각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기사단과 정보통에게 도착한 편지들을 대충 읽고 정보들을 정리한 벨져는 편지들을 갈무리해 객실 금고에 던져놓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곧 하우스키핑 시간이니 나가줘야 청결이 유지되는 데다 호텔 방 안에만 있기엔 갑갑했다. 거울에 비친 벨져 홀든은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제 모습에 만족한 벨져는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바람도 선선히 부는 게 딱 좋은 날씨라 잠시 들른 카페의 이층 야외 테라스에 앉아 본 노을은 아름다웠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차와 샌드위치는 제법 먹어줄만 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고 한 잔 할 기분이었기에 적당히 펍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왁자지껄하게 노는 무리에 낄 생각도 없고, 벨져가 즐겨 마시는 좋은 술이 있을 리도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잠시 한 잔 하고 사라지면 그뿐. 벨져는 오늘 한 기사가 편지의 끄트머리에 오만한 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한 걸 떠올렸다. 마티니 한 잔을 주문하고 낡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벨져는 실소를 흘렸다. 오만하기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격에 맞는 이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 역시 격이 떨어지는 쪽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원형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기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착취당하며 속고 있는지도 모르고 술에 취하는 이들이었다. 더러는 그런 생각을 하는 벨져를 일컬어 사정도 모르는 귀한 귀족집 도련님이라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다르다.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특권을 누리는 게 바로 귀족이고, 술에 취해 시시덕거리는 일개 필부와 자신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검의 형제 기사단에 들어올 정도의 기사라는 자가 하는 간언의 수준이 그 꼴이라니,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텐더가 마티니를 내려놓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리던 벨져는 얼핏 스친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손등으로 이마를 지탱한 채 맥주를 들이키는 옆모습이 낯이 익었다. 바의 끝과 끝이라지만 그리 큰 펍도 아니었기에 그와 벨져 사이의 거리는 채 5미터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 입고 다니는 후드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올리는 바람에 주홍빛 조명 아래서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술을 넘기면서 목울대가 움직이고, 맥주병을 문 입술에서 흐른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둑한 펍 안에서도 얼굴이 제법 붉은 걸로 보아 꽤 마신 것 같았다. 더운지 후드를 넘기고 티셔츠를 펄럭이는데 게슴츠레 뜬 눈가가 빛에 반짝였다. 슬쩍 벌어진 입술 새로 새는 더운 숨결이 여기까지 닿는 것 같아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시켜놓은 마티니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칵테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겨우 루이스 따위를 넋을 잃고 바라본 게 자존심이 상했다. 한 모금 넘기자 싸하게 넘어가는 알콜에 정신이 들었다. 분명 제가 시킨 건 온더락이 아니었는데, 얼음이 녹아 진에 섞이는 게 영 껄끄러워 짜증이 났다. 바로 미간을 찌푸리자 바텐더가 다가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이봐, 혹시 그쪽?”
“치워라.”
대답할 가치도 없었지만 바텐더가 음흉한 눈으로 가리킨 건 분명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어느 멍청이였기에 벨져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바텐더는 움찔하더니 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 한 걸음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진엔 성긴 얼음이 조각나 물이 섞이고 있었고, 벨져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웨이터에게 손짓했다.
“너, 너. 이리로.”
“예, 말씀하시죠….”
빳빳한 지폐를 마티니 옆에 올리자마자 방금 전의 능글거림은 어디로 갔는지, 바로 굽신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벨져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펍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은 이미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 녀석, 얼마나 마신 거지.”
“여섯시였나, 일곱시였나 그쯤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마셨죠. 아무리 포터라지만 앉아서 마신 것만 해도 혼자서 열댓 병은 마셨을 겁니다.”
벨져는 바텐더의 대답에 인상을 썼다. 아무리 낮은 도수의 맥주라 해도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셨으면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시간상으론 저녁도 안 먹고 마셨을 게 뻔했다. 보기보다 술일 센 건지 아니면 홧김에 마시고 있는 건진 몰라도 지금의 루이스는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더 물이 섞이기 전에 마티니를 한 모금 넘긴 벨져는 흘긋 그를 살폈다. 턱을 괴고 상념에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것도, 뺨이 붉게 물든 것도 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시며 궁상을 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벨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저 자식 것까지. 이거면 충분하겠지.”
“헛, 물론입죠!”
“흥.”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 순간의 흥 때문에 싸구려 술로 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잡친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도 대신 내줬겠다, 그냥 그대로 나가서 가버리면 그만인데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해서 어쭙잖은 놈팽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든, 찬바람을 맞고 거리에서 얼어 죽든 객사하든 알 바 아니다.
바를 뒤로하고 나가려던 벨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신경이 쓰여서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뒤돌아선 벨져는 나올 때와 달리 척척 걸어가 축 쳐진 어깨를 잡아챘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미련하긴.”
“……벨져?”
“다 마셨으면 그만 하고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되묻는 루이스의 표정이 어딘차 서글퍼 벨져는 더 짜증이 났다.
“네 그 잘난 애인한테 가야할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벨져는 바로 애수에 차 깊어지는 루이스의 눈을 보고 아차 싶었다. 루이스란 사람이 애인을 몇 시간 동안이나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실 사람인가 답은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여긴 안타리우스의 요새 근처. 아무리 싸웠다 해도 두세 시간을 여자 혼자 보내게 둘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벨져가 표정을 굳히자 루이스는 미소인지 울상인지 모르게 입가를 씰룩였다. 아픔을 견디려 술을 마시는 그의 옆얼굴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손깍지를 긴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옆을 떠날 수 없는 건 이대로 두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루이스는 위험하다. 그동안 그를 지탱하던 한 기둥이 빠져나간 상실감이 냉정과 침착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적진에서 이렇게 취하게 만들었다. 멍청한 자식. 차였으면 얌전히 그 잘난 연합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단 말인가. 벨져는 아직 반절이 남은 병에 손을 뻗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만.”
“신경 꺼. 벨져 홀든. 어차피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멍청한 자식.”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고, 루이스는 실소를 흘렸다. 멍청하다는 말에 웃는 걸 보면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목이 한 손에 잡힐 정도로 마른데다 눈 밑이 검은 게 그동안 어지간히도 무리를 한 게 뻔했다.
“놔.”
“흥,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 주제에.”
루이스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먼 곳을 그리며 청승을 떠느니 적의를 품고 저를 향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벨져는 그를 도발하기 위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코웃음쳤다. 취한 루이스는 평소의 냉철함을 잃은 후였고, 내지른 주먹은 맨정신의 벨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윽…!”
“하, 미련하다!”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주먹을 한 손으로 잡고 뒤로 꺾자 루이스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펍 안은 시끄러웠고 바텐더는 벨져의 눈짓에 끼어들려하지 않았다. 루이스의 등 뒤에서 손목과 팔을 잡아 제압한 벨져는 루이스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눈앞에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잠시 머뭇거렸다. 저항할 생각도 않고 저를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는 다시 깊은 슬픔에 흐려져 벨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벨져는 루이스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취했다.”
“알아….”
“하, 정말이지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군.”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벨져는 미련한 남자를 놓아주었다. 가볍게 내치듯 놓았을 뿐인데 이미 술에 절어있던 루이스는 휘청이다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아 의자를 잡고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낮게 신음했다. 그 모습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쯧, 한 번 차인 것 가지고 찔찔 대기는. 따라와라. 발목을 잡으면 바로 버릴거다.”
벨져의 퉁명스러운 말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슬리고 방해된다는 이유로 동행을 만들지 않던 벨져로선 제법 후한 제안이었음에도 루이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축 쳐진 채 이끄는 대로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맑아져있었지만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벨져의 푸른 눈과 루이스의 붉은 눈이 마주했다.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던 벨져는 한숨을 내쉬곤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말없이 벨져를 올려다보다 눈을 깜박였다. 펍 안은 어두웠으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건 선명했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벨져를 올려다보며 손을 맞잡았다. 벨져는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당기고, 그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어디고 할 거 없이 벚꽃이 만개한 봄, 잠깐 나갔다 오자는 벨져의 막무가내에 끌려 점심을 먹고 호숫가까지 드라이브를 하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에 커피 한 잔 하고 나니 오후가 훌쩍 지나고 말았다. 가끔은 느긋하게 늦잠도 자고 숙소에서 좀 뒹굴어도 좋을 텐데. 루이스는 익숙하게 액셀을 밟으며 흘긋 조수석에 팔짱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벨져를 바라봤다.
기껏 비싼 차를 사놓고 자기가 모는 건 취한 자신을 데리러 올 때 뿐이다. 덕분에 루이스는 남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고급세단을 자기 차처럼 몰았다. 처음 벨져가 차 키를 던져줬을 땐 혹시라도 기스라도 날까 조심조심했지만 어차피 벨져는 홀든이었다.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의 가격은 0이 두 개는 더 붙고, 굳이 게이머 생활을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데다 은퇴하더라도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말 그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홀든.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나 데리고 살라고 하는 것도 벨져에겐 쉬운 일이었다.
자신이 '프로즌'이 아니었을 때도 벨져는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알바하는 식당, 서점, 술집 그것도 모자라 반지하 자취방까지 찾아와 귀찮게 굴던 게 벌써 몇 년 전인지. 루이스는 신호등이 초록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는 걸 보고 천천히 액셀에서 발을 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매끄럽게 멈춰선 차 안에서 루이스는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 고개를 돌렸다. 밖을 보고 있던 벨져가 그 시선에 루이스를 마주봤지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벨져가 대번에 눈썹에 힘을 줬지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루이스는 그래도 벨져가 다시 채널을 돌리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벨져는 칫, 하고 작게 혀를 차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때마침 봄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파란불이 켜졌다. 루이스는 액셀을 밟으며 경쾌한 하모니카의 멜로디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렸다. 벚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도로의 풍경이 예뻐서 절로 노래가 나왔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차를 몰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루이스는 창문을 조금 열고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나쁘지 않은 선곡이라 그런지 별 말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빠는 벨져를 옆에 두고 루이스는 정면을 보며 물었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벨져의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벨져.”
“왜.”
“오늘 며칠이지?”
“4월 4일 토요일. 그건 왜, 아.... 오늘이었나.”
벨져가 컵을 내려놓고 입가를 매만졌다. 별로 큰일은 아니지만 워낙 까탈스러운 성미라 루이스는 걱정이 됐다. 안 그래도 자기 공간을 침해받는 걸 질색하는데 과연 괜찮을런지. 루이스는 이제 겨우 열일곱인 그랑플람의 원딜러를 떠올렸다.
피지컬도 좋고 센스도 있고 대담하기도 한 원딜러 하랑은 그의 닉네임보다 미친 고딩이라는 수식어를 더 자주 달고 다니는 선수였다. 나이차가 꽤 나긴 하지만 하랑은 이글과 죽이 잘 맞는 아이였다. 쾌활하고 명랑한 딱 그 나이 남자애. 벨져의 말을 빌리자면 ‘시끄럽고 산만하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물론 같은 팀의 티엔이 잘 잡아주긴 하지만 그래도 넘치는 혈기는 주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루이스는 오늘 홀든A 숙소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 티엔이 브루스 감독과 함께 중국에 출장간 사이 일박이일로 묵어가는 것 뿐이지만 하랑이 오는 시점에서 평화로운 휴식은 물 건너가는 셈이었다.
루이스는 고가도로에서 커브를 돌며 오늘 일찍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아예 자고 들어가는 게 아니면 전쟁통처럼 시끄러운 숙소에서 자야하는데 문 하나로 그 목소리를 다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보나마나 이글이 술도 먹일 텐데, 고등학생인 하랑이 술을 마시는 건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숙면과 숙소의 평화, 아이작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브루스나 티엔에게 연락을 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가 하루 놀겠다는 걸 훼방 놓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벨져.”
“왜, 또.”
“우리 외박할까?”
그 말에 벨져가 눈을 크게 떴다.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에도 루이스는 능숙하게 운전을 계속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은퇴하면 네 수행비서나 할까봐 하고 농담하긴 했지만 이정도면 정말 벨져 홀든의 비서나 운전수로 취직해도 좋을 갓 같았다. 아무렴 벨져가 대리를 부를 리 없으니 꽤 괜찮은 것 같은데. 딱히 미래에 뭘 해야겠다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루이스였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추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싫음 말고.”
“아, 아니. 싫다고 한 적 없다!”
“됐어, 끝났어. 잠이나 자두던가.”
“차 돌려.”
루이스는 들은 체도 않고 액셀을 밟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제가 못 잔 것도 벨져 때문이니 그라고 잠 좀 못 자면 어떻단 말인가. 루이스는 시내로 들어서며 창문을 올렸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벨져가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고 운전에 집중했다.
“…칠성급 호텔.”
“됐어. 하랑이 볼래. 아무리 그래도 집이 최고지.”
“그럼 내 집으로 가던가.”
“내가 너네 집을 왜 가.”
“외박하자며!”
벨져는 자꾸 말을 돌리고 간만 보다 빠지길 반복하니 짜증을 냈다. 이렇게 좀 삐지게 뒀다가 손을 내밀었을 때 만족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짓궂게 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스는 벨져가 퍽 귀엽다 생각하며 숙소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이 가까워질수록 벨져의 표정은 뚱하게 굳어졌지만 루이스는 벨져 홀든을 엿 먹이는 게 아주 즐거웠으므로 계속 이어지는 무언의 시위에도 차를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