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만우절. 게임 회사들이 앞다퉈 명절을 쇠듯 만우절 이벤트를 뻥뻥 터트릴 때 사이퍼즈 역시 그 흐름에 합류했다. 합류라기 보다, 그들이 더 신나서 준비한 걸 내놓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유저들도 너나할거 없이 만우절이라는 축제에 몸을 맡겼으니, 프로팀인 홀든A도 예외는 아니었다.
1일 0시가 되자마자 '쉬레'와 '프로즌'의 트위터엔 이런 트윗이 올라왔다.
[HA_Belzer @belzerthebest:
안녕! 모두의 아이돌 쉬레입니다! >_< 오늘 친선경기로 아이스 셀랙할 거예욤! ]
[HA_Louis @realouis :
최강의 근딜러 프로즌이다. 오늘 오후 다섯시에 친선경기가 있으니 참여할 우민들은 대기하도록. ]
누가 봐도 계정을 바꿨다는 게 명백한 트윗에 사람들은 이게 다 귀여운 만우절 장난이려니 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뒤이어 쉬레의 트윗에 주르륵 달리는 형과 오빠 소리에 쉬레의 핸드폰은 쉴새없이 징징거리며 알람을 울렸다. 쉬레에게 형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 중에는 같은 팀의 토마스 스티븐슨도 있었고, 평소 쉬레를 좋아하지만 쉽사리 말을 못 붙이는 사람과 프로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늘 딱딱하고 재수없는 소리나 하던 사람의 트위터 계정이, 비록 안에 있는 사람이 바뀐 걸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프로필과 닉네임을 걸고 절대 할리 없는 애교 섞인 말투를 하니 그 갭이 엄청났다. 게다가 프로즌은 팬서비스가 투철하기로 소문난 사람. 늘 씹히는 게 일상이었던 화면 너머의 사람들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돌아오는 멘션에 별을 찍고 캡쳐를 하기 바빴다.
"아, 내 트윗엔 언제 답멘할 건데!"
"야 네가 얼마나 그동안 사람들을 방치했으면 이러겠어. 지금 알림창 볼 새도 없다."
"넌 알림 꺼놨잖아. 그래놓고 그런 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잠깐만. 이거 마저 답멘해주고."
이층 침대에 누워 루이스의 핸드폰을 가지고 노닥거리던 벨져는 루이스한테 답멘이 돌아오는 대신 시답잖은 것들이 자꾸 말을 거는 통에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밖에다 프로즌이랑 놀아야하니 더 멘션 보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말마따나 이건 제가 뿌린 씨앗이기도 하기에 벨져는 홱 돌아누웠다. 루이스는 벨져의 핸드폰으로 트윗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며 노트북까지 켜는 중이었다.
"그럼 내 커피는."
"직접 사다 먹어. 그리고 지금 열두시 반이야. 밤 새려고?"
"나쁜 새끼."
"네가 먼저 하자며."
루이스의 노트북이 켜지는 소리에 벨져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야 겨우 자기를 보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가까이 오라 손가락을 까딱였으나 루이스는 다시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봤자 핸드폰을 넘겨줬다 뿐이지 노트북을 켠다 해도 제 계정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벨져는 한껏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티를 내려 루이스의 핸드폰 액정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터넷 창을 키더니 벨져의 아이디를 치고 그대로 트위터에 로그인했다.
"뭐야."
"왜?"
"너, 내 비밀번호는 어떻게 아는 거냐?"
"너, 나, 너, 나. 이걸 못 뚫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루이스는 벨져를 돌아보지도 않고 알림창을 켜더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라 벨져는 그 긴 다리를 이용해 이층 침대에서 훌쩍 내려와 루이스의 노트북을 뺏어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벨져."
"커피 먼저."
루이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지만 벨져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턱을 치켜들었다. 곧 죽어도 제게는 잘못이 없다는 태도에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만우절이랍시고 장난을 하는 의미가 하나도 없었다. 루이스는 지갑을 챙겨 일어나며 의자에 걸어둔 후드를 챙겼다. 나가서 확 안 돌아와버릴까보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돌아올 자신을 알기에 루이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원, 벨져 홀든에게 길들여지는 사막여우가 된 느낌이다. 루이스가 방을 나가려 문고리를 잡자 벨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루이스를 멈춰세웠다.
"카드 가져가라."
"나 지갑 있어."
"하, 잔소리 말고."
평소 같았으면 주는 대로 받았겠지만 루이스도 심통이 나있던 터라 소심한 반항을 해보았지만 벨져는 코웃음치고는 루이스를 향해 카드를 던졌다.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날린 카드를 잡아챈 루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복수랍시고 얼마를 긁어도 벨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또 제가 긁어봤자 천성이 소시민인지라 쫄려서 많이 긁지도 못했다. 벨져가 제게 던져주는 옷만 해도 뒤에 붙는 0이 얼마인지. 루이스는 전에 토마스가 귓속말로 대충 가격을 말해준 걸 듣고는 그냥 모르는 게 약이라 생각하기로 다짐한 후였다.
하랑의 기분은 몹시 좋지 않았다. 설이라고 새 옷을 맞춘대서 들떠있었더니 웬걸, 재단사가 치수를 재서 깔쌈한 양옷 한 벌 하나 했더니 딱딱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사부는 추위에 그닥 도움도 안 되는 칙칙한 색의 모직 코트 몇 벌을 골라 내밀었다. 뭐 하나 자기 마음대로 고르지도 못하게 할 거면 왜 따라오라고 했담. 하랑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 그냥 그럼 사부가 알아서 사오던가! 존나 춥다고!"
"하랑, 몸을 편안하게 하면 수련에 뒤처지는 법이다."
"아오, 씨!"
하랑은 더 말해봤자 티엔이 같은 말만 반복할 것을 알기에 답답해 가슴을 쳤다. 그냥 다 포기하고 빨리 돌아가 따뜻한 난로 앞에서 몸이나 녹이고 싶었다. 마틴도 그렇고 브루스도 그렇고, 대체 이런 날씨에 어떻게 밖에서 그렇게 입고 하루종일 있을 수 있는 건지, 얇기만 한 옷들을 보며 하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선에 있을 땐 겨울이면 옷 안에 솜을 넣어 누비곤 했는데 천도 솜도 많은 나라에서 왜 겨울옷이 이렇게 얇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따뜻한 옷은 따로 있고 제 사부가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저를 괴롭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티엔이 검은색 코트를 건네고, 하랑은 그를 가늘게 노려보며 받아들었다.
"거, 나온 김에 걔 옷도 좀 사주지그래? 아무리 얼음 능력자라 해도 그렇지 옷이 너무 얇드만."
"...하랑. 여긴 남성복 매장이다."
"난 뭐 눈이 없는 줄 알어? 아까 오다보니 사방이 다 옷가게더만. 쪼잔하긴."
하랑은 배를 타고 영국에 도착하던 날 저와 티엔을 맞아주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때도 제법 날이 추웠는데 루이스의 옷차림은 여전히 가을 같았다. 아무리 얼음쟁이라도 그렇지, 춥지도 않은 걸까. 짧은 치마를 홀랑홀랑 까뒤집고 다니는 여자애들에 비하면 루이스의 차림은 조신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옷이 짧은 거나 얇은 거나 추워보이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한창 때 여자애들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게 고맙다. 하지만 때론 보는 쪽이 더 민망해지기도 했는데, 회사의 공주님도 그렇고 가슴을 훤히 드러낸 조선의 기집애도 그렇고 노출이 너무 과했다. 얼마 전엔 헐벗은 거나 다름 없는 차림으로 공성전을 하기까지 했는데, 하랑은 그 판 내내 기겁하느라 집중을 못했다. 그 바람에 수련의 성과가 없다며 호되게 고생한 하랑은 루이스의 그 꽁꽁 싸맨 차림새를 다른 사람들이 본받았으면 했다. 그런 부끄러운 차림을 하고도 당당하다 못해 치마를 펄럭이며 뛰어다니고 누워있는 사람 위를 훌쩍훌쩍 넘어다니니 심장에 해로웠다.
그런데 비해 루이스의 치마는 무릎 위로 넘어가지 않았다. 정강이에서 무릎 언저리를 오가는 치마에 흰 셔츠. 서점에서 일할 때 입는 게 퍽 단아하면서도 고왔다. 조막만한 패랭이꽃이나, 난초같이 소박하고 청순한 미인상이라 그런가 하랑은 루이스가 남사스런 차림을 한 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공성을 할 땐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에 티셔츠, 후드차림이 기본이기도 하고 애초에 생각해보면 루이스는 맨다리를 내놓는 법이 없었다.
누구 때문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가끔 다른 여자애들이 입는 치마를 부러운 듯 보는 걸 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또 아닌 것 같던데. 하랑은 팔랑팔랑한 원피스를 입은 루이스를 떠올리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팔짱을 끼고 추운 거리를 걸으며 흘러내린 목도리를 다시 둘둘 둘렀다. 새빨간 색의 보드라운 목도리는 루이스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떠준 것이었다.
하랑은 추위에 한껏 목을 움츠리며 루이스를 떠올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참한 건 둘째치고, 기본적으로 루이스는 좋은 애였다. 티엔을 따라 배를 타면서부터 꾸준히 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아냥과 멸시 어린 눈길에 짜증을 내다 못해 주먹질을 하고 난 뒤라 기분을 잡칠 대로 잡친 후라, 하랑은 웃으며 손을 내민 루이스를 무시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도 루이스는 하랑에게 잘 대해주었다. 수련이다 뭐다 아는 거라곤 일과 수련밖에 없는 것같은 티엔 대신 포트레너드를 구경시켜주고 영어가 짧은 하랑과 손짓발짓으로라도 대화를 해주기도 했다.
얼굴만 보면 제 또래 같은데, 하는 행동거지나 분위기가 묘하게 어른스러워서 한동안 하랑은 루이스가 저보다 연상인줄로만 알았다. 특히 공성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고 칼이나 주먹이 직격하려는 순간 제 앞에 깔리는 얼음 결정을 보면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만다.
아무래도 능력이 능력이다보니, 하랑은 저만치 앞서있는 사부의 등보다 루이스의 등을 보는 일이 많았다. 둘 다 믿음직하긴 하지만 티엔의 등과 루이스의 등에서 느껴지는 믿음직스러움은 조금 그 성질이 달랐다. 티엔의 등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라면, 루이스에게선 절박함이 느껴졌다. 모든 걸 제가 해결하고 떠맡으려는 뒷모습은 저보다도 가녀리지만, 그걸 뛰어넘는 기백이 있었다. 루이스는 뒤에 지켜야할 사람이 있는 이상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등이었다. 그러니 연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하랑은 최근 루이스가 동갑이라는 걸 알고 꽤 놀랐다. 하랑이 루이스를 누나, 누나하고 부르며 따르는 것을 본 티엔이 농땡이 피우지 말라며 한소리 하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터였다. 양놈들이 위아래 없이 말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하랑은 루이스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꽤 좋았던 터라 생일이 빠르단 걸로 우겨 누나라 불렀다.
마틴도 친절하고, 곰 할배도 듬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보단 여자가 좋은 법이었다. 하랑은 자연스레 시간이 남으면 루이스와 어울렸고, 그때마다 티엔은 못마땅해하며 놀 시간에 수련에 정진하라 했지만 그 역시 루이스에게 약하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칙칙한 사내놈들 사이에 열 일곱밖에 안 된 꽃같이 예쁜 여자애가 있으니 어찌 안 예쁘랴마는. 걸음과 함께 정처없이 흘러가던 생각은 문득 한 곳에 멈춰섰다. 루이스는 티엔의 제자도 아니고, 여전히 서점에서 일하는 데다 마틴이나 브루스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 않는다. 티엔만 보면 불편한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마틴을 생각하면 더더욱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사부."
"또 무엇이냐."
"루이스는 왜 그랑플람에 들어온 거야?"
순간 티엔의 미간이 움찔했다. 흔치 않은 반응에 하랑의 궁금증은 더 크기를 불렸고, 하랑은 티엔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보면 굳이 다른 사람 놔두고 티엔과 저를 맞이하러 루이스가 나올 이유가 없었다.
"사부가 꼬신 거야?"
"꼬시다니."
"아니 그럼 걔가 왜 들어왔는데? 어?"
"들을 가치도 없군. 그 얘기는 더 꺼내지 마라."
티엔은 고개를 저으며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자기는 두꺼운 코트 입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했으니 춥지도 않다 이거지. 하랑은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목도리 안으로 얼굴의 반을 쏙 넣었다. 이렇게 추운데 루이스는 왜 아직도 가디건 차림인 걸까. 잠깐 서점에 들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 벌어진 티엔과의 거리에 같이 가자고 소리친 하랑은 잰걸음으로 티엔의 뒤를 따랐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들 뿐이라니깐.
"어서오세, 티엔."
딸그랑 울리는 종소리에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늦게 일을 마치는 회사원이나 은행원들 뿐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손님 아닌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능력자에 관한 책은 아직 새로 들어온 게 없는데요."
"널 보러 왔다."
루이스는 돌려말하지도 않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읏샤, 작게 소리를 내며 바닥에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자 티엔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날이 춥더군."
"그러게요. 이제 곧 비 대신 눈이 오겠어요."
"하나 샀다."
티엔이 내민 쇼핑백에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받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티엔이 루이스의 손에 손잡이를 들려주려 해 루이스는 손을 빼며 한걸음 물러났다.
"괜찮아요."
"루이스."
"정말 괜찮아요."
티엔은 눈을 맞추려하지 않는 루이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색해진 공기가 무거웠고, 제가 대하고 있는 건 열일곱짜리 여자애였다.
"루이스."
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하랑이 궁금해하지 않았더라면 떠올릴 일도 없을 정도로 평범한 하루였다. 다만 그때는 루시 일로 티엔이 날카로워져있었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 잠시 방황하던 때였다는 게 중요했다.
"이미 많이 주셨어요. 티엔, 자꾸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푹 꺼진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다가와 티엔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티엔은 자기가 주는 건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주기만 하려는 소녀를 바라봤다. 자신이 상처입는 게 두려워 호의는 받으려 하지 않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도 싫다. 티엔은 루이스가 하랑에게 잘해주는 것도 마틴과 남매처럼 지내는 것도 싫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왜 자신의 사람이 되어주지 않는 것일까. 티엔은 그랑플람에 들어오라는 권유도 한사코 거절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문을 닫아버렸던 날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애먼 책만 노려봤다.
루이스는 험악한 무표정의 티엔을 보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이 사람은 어렵다.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섰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무뚝뚝하기는 다이무스와 다를 바가 없지만 루이스는 티엔이 자꾸만 제게 무언가를 해주려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걸 아는 것과 편하게 대하는 것은 다르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티엔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면 언제나 눈이 마주친다. 다른 사람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제게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억하고 챙겨주는 사람에겐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이 돌려줄 능력도 무엇도 없는데 왜 자꾸 주려는 걸까. 루이스는 티엔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계속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돌아서기라도 하면.
루이스는 가끔 공성전에서 마주치는 루시 리를 볼 때마다 긴장에 침을 삼켰다.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루이스에게도 껄끄러웠다. 그녀가 티엔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티엔은 제게 그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대해줄 리도 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빛나는 루시를 보고 있으면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자신은 너무 초라한 사람이라서 견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제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이스가 티엔의 끈질긴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회사에 먹혀버릴 지도 모르는 그랑플람이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사와 연합이 싸우는 동안 죄 없는 사람들이 다쳤고, 그들이 야욕을 채우려는 동안 거리에선 동전 한 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루이스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제 능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루이스가 그랑플람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건 고작 열두살밖에 안 된 메어리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었다. 월급 봉투를 받은 루이스는 과자와 조그만 선물을 사서 제가 자란 고아원을 향했고,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들것에 실려나가는 메어리를 봤다. 고아원을 나온 루이스는 거리를 걸었다.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티엔을 만났고 아는 얼굴에 그만 눈물이 흘러 넘쳤다. 혹시라도, 제가 티엔이 처음 권유했을 때 그랑플람에 들어갔더라면, 그래서 재단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면, 그랬으면 메어리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 속에 스스로 숨을 멈추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루이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쪼그려앉아 울었다. 티엔이 수차례 왜 그러냐 물으며 울지 말라 했지만 모든 게 제 탓 같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티엔의 손에 이끌려 간 그의 집에서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엔은 더이상 묻지 않았고, 루이스는 그랑플람에 들어가겠다는 말 한 마디만 했다. 그 후로 쭉, 티엔은 저만 보면 무언가 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고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시간이 늦었어요."
"바래다주겠다."
"...잠시만요."
티엔 정은 괜찮으니 먼저 가란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늘 당당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자신때문에 축 쳐져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루이스는 정리를 서둘렀다. 내일 아침에 해야할 일까지 미리 정리해둔 루이스는 서점 안을 밝히는 등을 끄기 위해 스위치 앞에 섰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쇼핑백에서 코트를 꺼내 루이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버리던, 환불을 하던 네 마음대로 해라."
루이스가 난처해했지만 티엔은 여지조차 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겨울용 르블랑 코트는 비싼 만큼 제 값을 하는 상품이니 적어도 추위에 떨진 않을 것이다. 기성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 봄에 재단에서 단체로 옷을 맞추면서 루이스의 치수도 남아있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겨울 코트를 따로 주문했다. 그게 벌서 보름 전이었고 오늘에서야 티엔 앞으로 도착해 전해주러 온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환불도 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모르겠지만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은 대개 두둑한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잘 입을게요."
"가지."
티엔은 루이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코트에 팔을 꿰는 걸 보며 문을 열었다. 하얀색을 기조로 한 코트는 루이스에게 퍽 잘 어울렸고 티엔은 제 안목이 훌륭했다는 것에 뿌듯해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 검은 코트와도 퍽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서점의 문을 잠그는 루이스를 보며 본디 흑과 백으로 나타나는 음양은 하나라는 생각을 하던 티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이스는 문을 잠그곤 티엔을 올려다봤고, 티엔은 그 투명한 붉은 눈을 보며 제가 잠시라도 속된 마음을 품었던가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루이스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몇 해만 더 있으면 성년이라곤 해도 아직 한참 어린애였다. 게다가 저와는 띠동갑이니, 자칫 잘못했다간 연합의 테라듀 능력자에게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손목에 감기던 차가운 수갑의 감촉을 떠올린 티엔은 팔을 내밀지 않고 앞서 걸었다. 곧 빠른 걸음으로 쫓아온 루이스가 옆에 걷기 시작했지만 티엔은 루이스보다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서 걸었다. 그러다보니 걷는 게 아니라 경보 수준이 되어버리고, 그러다보니 쫓아오던 루이스가 그만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으왓!"
재빠르게 넘어지려는 루이스의 허리를 낚아챈 티엔은 급격하게 줄어든 거리에 잠시 숨을 집어삼켰다. 놀란 루이스가 눈을 깜박이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소녀를 바라봤다. 주황색 가스등불 아래 제 품에 안겨있는 루이스. 가슴이 크게 뛰고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그녀가 꼭 끌어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가, 감사합니다."
"...발밑에 집중해."
"당신이 너무 빨리 걸으니까.... 아얏."
"괜찮나? 쯧."
발목을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티엔의 가슴을 밀치고 물러난 루이스가 한 걸음 내딛다가 눈살을 찡그렸다. 티엔은 바로 무릎을 굽혀 루이스의 발을 살폈다. 루이스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티엔이 발목을 잡자마자 시큰거리는 통증에 작게 신음을 내고 말았다.
"안 되겠군. 업혀라."
"네? 아뇨, 혼자 걸을, 으아앗...!"
티엔은 루이스의 발목을 놓고 그대로 무릎 아래로 손을 넣었다.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일어나는 바람에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티엔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업히고 만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듬직하고 너른 등에 업혀있자니 어째 쑥스러웠다. 그것보단 놀란 심장이 자꾸 큰 소리를 내며 뛰는 게 신경쓰였지만 티엔이 루이스를 고쳐 업으면서 루이스도 자세를 고쳤다.
"나빴어요, 진짜...."
"제대로 발밑을 안 본 네 부주의겠지."
"하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도 없다. 루이스는 하랑이 짧은 영어로 티엔 흉을 늘어놓던 걸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랑의 말대로 티엔이 한 번 막무가내가 되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루이스는 티엔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얹었다. 티엔의 등에 업혀있으니 찬 겨울바람이 부는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제 다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의 팔과 너른 등, 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덥다는 게 루이스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어김없이 네시 반이 넘어가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도서실을 정리한 루이스는 마우스를 흔들어 화면을 띄웠다. 검은 머리에 단정하고 늠름하게 생긴 3학년 선배는 문 하나도 그냥 여는 법이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세를 고쳤다. 낡은 미닫이문이 소리도 많이 내지 않고 열렸다. 워낙 도서실에 학생들도 별로 없는데다 티엔이 들르는 시간은 도서실 마감 시간과 가까웠기에 루이스는 혼자 티엔을 맞았다.
"자주 오시네요."
"면학은 학생의 본분이니까."
티엔은 그 말에 슬며시 올라가는 루이스의 입꼬리를 보며 바코드 전산 처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부활동이 끝나고 들르는 도서실에서 나누는 잠깐의 대화. 티엔은 그 짧은 시간이 꽤 기꺼웠다. 요 며칠동안 지켜본 결과, 루이스는 교무회의가 있는 월요일과 수요일 방과 후엔 꼭 도서실에 있었다. 그걸 알게 된 티엔은 월요일과 수요일이면 부활동을 마치고 꼭 도서실에 들렀다.
그냥 두고 가면 되지만 티엔은 루이스가 바코드를 다 찍기를 기다렸다. 얼굴도 곱지만 티엔은 루이스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모양이 예쁜 손가락이 책을 정리하고, 바코드를 다 찍으면 모니터를 보고있던 루이스가 티엔을 바라봤다. 그럼 티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을 빌리기 위해 서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책장에 서있으면 선생님이 돌아와 잠시 루이스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곧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이 반납한 책을 꽂으러 서가로 들어왔다.
책을 전부 고른 티엔은 일부러 루이스가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 책을 가지고 나온 티엔이 대출을 하는 사이 루이스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서기까지 약 3초. 지퍼를 죽 올려 어깨에 가방을 맨 티엔도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앞에 서면, 바로 뒤에서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엔은 문을 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텅 빈 복도에 겹쳐들리는 발소리. 그 묘한 기분에 티엔은 잠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있던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는 건 순식간이었고, 제가 돌아볼 줄 몰랐는지 루이스도 그대로 멈춰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잠시 사로잡혔던 티엔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 비...."
"우산, 안 가져왔나?"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살피는 티엔은 가방 안에 고이 들어있는 접이식 우산을 떠올렸다. 어차피 제가 사는 자취방은 멀지 않고, 기껏해야 봄비니 그리 거세지도 않다. 곤란해하는 루이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우산을 써도 비를 피하기 충분하단 생각에 티엔은 그녀를 바래다줄 생각이었다. 루이스는티엔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나올 땐 맑았으니까요."
"어느쪽으로 가나? 바래다주지."
"아, 아니에요. 안 멀어요. 이 정도는 맞아도 돼요."
바래다주겠단 말에 당황한 루이스가 손을 내저었다.그 모습이 퍽 귀여워 티엔은 아무 말도 않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옆에 따라붙은 루이스가 연신 안 그래도 된다고 설명했지만 티엔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여자애가 비를 맞고 가게 둔다는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학교 현관에 다다른 티엔은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먼저 가보겠다 말하는 루이스의 옆에 서 우산 반쪽을 씌워주자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요 앞에 윈더미어까지 부탁드려요."
어렵게 꺼낸 말에 티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전에도 그 서점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티엔은 입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정사로 따지면 티엔 역시 그리 할 말이 없었다. 신경쓰는 건 아니지만 입학 상담이라거나 자기소개서엔 선생님들 사이에 꾸준히 오르는 주제가 바로 티엔의 가정사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홀어머니 아래서 문무를 겸비한 완벽한 아이. 티엔은 자신을 평가하고 수식하는 말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완벽해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사람보다 강해지는 것 정도에나 흥미가 있는 정도였다.
더러는 주위는 돌아보고, 친구도 사귀고 놀라고도 하지만 티엔은 그런 데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텐데. 티엔은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곤 그녀쪽으로 우산을 슬쩍 기울였다.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루이스를 곁눈질하다보니 샴푸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희미한 꽃향기, 우산 아래 단 둘. 티엔은 하얀 목덜미와 세라복 안쪽으로 흘긋 보이는 쇄골에 마츤 침을 삼키며 정면을 바라봤다. 루이스의 팔과 닿아있는 팔이 간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윈더미어까지는 오분이면 넉넉한 거리였고, 두 사람은 한 마디 말을 주고받는 법도 없이 걷기만 했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춰 걷다보니 평소보단 더 걸렸을 테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저, 여기까지면 돼요.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라."
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그녀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들어간 루이스는 서점 주인과 반갑게 인사하며 싱긋 웃었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저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앞치마를 둘러맨 루이스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다 눈이 마주쳤다. 그바람에 티엔은 훔쳐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움찔했지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었다.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티엔은 서점에서 발을 돌렸다. 정말 사소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루이스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수고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빗속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티엔의 어깨는 약간 젖어있었고, 입가엔 희미하게 웃음이 걸려있었다. 봄비에 언 땅이 녹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