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하고 현관문의 벨이 울리는 소리에 방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토마스가 냉큼 일어났다. 인터폰에 보이는 익숙한 택배 아저씨의 모습에 토마스는 바로 현관을 향했다. 어제 시킨 신발이 온 걸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노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갈색 골판지 상자를 건넸다. 신발이라기엔 부피가 작아 토마스가 어리둥절한 사이 아저씨가 PDF를 꺼내 펜을 내밀었다.
"루이스 홀든씨 본인이신가요?"
"아, 아뇨."
"그럼 동료에 체크하고 서명해주세요."
토마스는 이름을 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루이스 홀든이라니. 루이스 홀든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홀든'이라니!!! 토마스는 황망히 닫히는 철문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박스에 붙은 택배 용지를 살폈으나 프린트 된 글자는 누가 봐도 Louis Holden님 이었다. 애써 부정을 해보려던 토마스의 여린 마음은 그렇게 알파벳 여섯 글자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토마스는 테이블 앞에 앉아 두 손깍지를 끼고 아치를 만들어 얼굴 앞에 두고 외출한 형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껏 진지한 얼굴에 평소엔 웃느라 눈에 띠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가 더해진 것도 모자라 뒤에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모 만화의 사령관 같았다. 그 모습에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두 홀든과 루이스는 현관에서 멈칫 발을 멈췄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심각한 걸까. 순간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지나갔다. 은퇴하나? 다른 팀으로 이적? 그것도 아니면 캐나다의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대체 뭐지? 그 정도로 토마스의 얼굴이 심각했기에 좀처럼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벨져마저 슬쩍 눈치를 보고 루이스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나마 우리 중 제일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건 너니까 빨리 가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 라는 눈빛에 루이스는 난처해하면서도 토마스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저어, 토마스. 무슨 일 있어?"
"선배."
"으, 응."
"말해봐요. 언제부터예요?"
"뭐가?"
루이스는 제게 따지듯 묻는 토마스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부터냐니. 루이스는 토마스가 흥분한 나머지 말을 다 생략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바람에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이글과 벨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토마스가 루이스의 어깨를 턱 잡았다.
"선배!"
"아,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형은 닥치고 있어요!"
늘 웃고 네네 응석을 받아주던 애가 화를 내니 무섭다. 이글은 저를 쏘아보며 소리치는 토마스를 향해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란 말인가. 이글은 흘긋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 골판지 상자를 보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 성인용품이라도 샀나? 그러지 않고서야 토마스가 아무리 루이스 일에 민감하다지만 이럴 리가 없었다. 아니지, 그랬다면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거나 부끄러워하고 있을테니 그것도 아니다. 이글은 토마스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가만히 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 문제의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선배! 설명해주세요!"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루이스는 잠시 상자를 보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토마스를 보곤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걸로 이런 헤프닝이 일어나다니. 하여간 어린 후배가 귀여워 살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웃으며 토마스가 한껏 멋내 세운 머리카락을 흐트리며 쓰다 듬었다. 토마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루이스의 손을 피하지 않아 금방 머리가 엉망이 됐다. 하지만 지금 토마스에겐 머리보다 루이스의 이 여유로운 태도가 더 신경쓰였다.
"악, 선배! 왜 그러는데요!"
"우리 토미가 귀여 워서 그러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야?"
"겨, 겨우라뇨!"
벨져는 영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사이좋은 토마스와 루이스를 지켜봤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언뜻 보니 이 상황을 이해한 건 루이스뿐이라 벨져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박스를 들었다. 내내 궁금해하던 이글도 벨져의 옆으로 와 상자에 붙어있는 배송 정보를 읽었다.
"루이스 홀든 님."
"흐응."
"푸하하하하하핫!"
이글은 소리내어 읽고는 바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콧소리를 길게 내며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 게 꽤 흡족해보였다. 벨져의 그 반응이 토마스가 내내 하던 고민에 설득력을 더했다. 셋 중에 누구인가 했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단 말인가. 토마스는 벨져의 그 여유작작한 태도에 발끈해 루이스를 향해 물었다.
"선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설마 진짜로...!"
"아니. 토마스, 그거 아냐."
루이스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순간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루이스는 신경도 안 쓰고 토마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마우스 새로 사는데 배송 정보에 성은 필수입력이더라고. 그래서 생각나는 거 중에 제일 짧은 걸로."
난리를 친 게 부끄러워질 정도의 사소한 이유에 토마스는 뭐라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이글은 아직도 숨이 넘어가라 웃다 못해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며 흐느끼는 중이었다.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흑역사 적립이다. 이글은 분명 앞으로 쿨타임이 될 때마다 이걸로 놀릴 것 이고, 인터뷰에서 말해버리거나 방송 중에 말할 지도 몰랐다. 그걸 깨닫자 마자 뺨에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토마스는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아났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달아나는 걸 지켜보다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벨져는 웃느라 정신 없는 사람 대신 택배를 뜯었다. 에어캡에 싸인 제품이 제가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인 걸 보고 루이스에게 제품 상자를 건네자 루이스가 받아들고는 실실 웃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흥, 아직 넌 그거 쓸 급이 아닌데."
"어. 너 주려고 샀어."
"뭐?"
태연하게 대답한 루이스는 다시 뜯지도 않은 상자를 벨져에게 건넸다. 벨져가 쓰는 마우스는 게이밍 마우스 중에서도 비싼 순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웬만한 전자기기 하나 값 정도 되는 지라 다이무스가 경비로 처리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왜, 전에 스튜디오에서 인식 잘 안 먹는다며. 그래서 내 거 사는 김에 하나 샀지. 내 건 그 아래 있을 걸? 없어?"
벨져는 상자에서 신문지뭉치를 빼고 다른 마우스 하나를 더 꺼냈다. 제가 쓰는 것보다 더 가볍고 클릭 소리가 적은 루이스가 애용하는 모델. 그 마우스는 벨져가 루이스에게 프로즌 전용이라며 사준 것이었다.
"쯧, 이게 벌써 몇 년전건데 아직도 쓰냐."
"왜, 그거 프로즌 마우스잖아. 진짜 프로즌이 산 거 알면 회사에서 좋아라 하겠다. 프로즌 팬들이라면 다 하나씩 갖고 있는 거 아냐? 근데 내건 없어?"
이글이 눈물을 닦으며 박스 안을 기웃거렸다. 벨져는 이글을 쳐내며 문제의 골판지 상자 안에 마우스를 넣었다. 이글이 인증샷 하나만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들었지만 벨져는 개소리 하지 말라며 달려드는 이글을 발로 밀고는 방으로 향했다. 벨져가 이글의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린 바람에 그마저도 무산됐지만, 이글은 아쉬움에 머리를 긁적이다 루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저었다. 한참 웃다가 이글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신문지뭉치를 던졌다. 잽싸게 받아챈 이글이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쓰레기통으로 던져넣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팔을 얹었다.
"하여간, 노답새끼들이라니깐."
"너도 만만치 않아."
"하하. 그건 그래."
"오랜만에 치킨이나 시켜먹을까?"
"오, 좋지. 야! 토마스! 니네 형수가 치킨 쏜댄다!"
루이스는 이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과장스레 몸을 수그린 이글이 엄살을 부리며 그대로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고, 결국 한바탕 소동은 장을 보고 돌아온 아이작에게 혼나며 치킨을 뜯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바야흐로 꽃이 피는 삼월. 이제 삼학년이라 고전무술부의 부장직은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티엔은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젖은 머리를 털며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증축 공사로 책을 빌린 뒤 처음으로 도서관을 개방한 날이라, 책때문에 가방이 무거웠다. 도서관이 닫히는 건 네 시 반. 씻고 나온 게 네시 십오분이었다. 더 늦기 전에 반납하기 위해 미닫이 문을 연 티엔은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밀려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먹구름이 낀 하늘 같은 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가에 서있던 여자애가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쳤다.
“저기, 아직 대출은 안 되는데요....”
“아, 아아. 반납이다.”
“그럼 이쪽으로.”
파란 리본을 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입생인 것 같은데, 첫날부터 도서관에 익숙한 듯한 태도에 티엔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여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당연한 듯 대출대 안쪽에 앉은 여학생은 책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데 비해 검은 색 세라복 위에 가디건도 입지 않은 채였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걸까. 티엔으로선 드문 타인에 대한 흥미였지만 여학생은 책 다섯 권의 반납 처리를 마치고 티엔을 올려다봤다.
“이제 가셔도 돼요.”
“1학년?”
“네. 그런데요.”
“...이름은?”
“루이스.”
그 이름의 울림이 그녀와 제법 잘 어울렸다. 티엔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티엔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티엔은 깜박이는 그 붉은 눈동자가 꽤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혹시 선생님께 용무가 있으신 건가요?”
“...그건 아니다만.”
“곧 문을 닫을 시간인데요.”
“알고 있다.”
의미 없는 문답. 이러고 있는 게 시간낭비라는 건 알지만 티엔은 좀처럼 걸음을 옮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박또박 말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엔 아직 중학생 티가 났고, 갸름한 얼굴선이며 가는 목덜미, 소매 사이로 흘긋 보이는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게 실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티엔은 괜히 교복의 칼라를 매만지며 돌아섰다. 어차피 도서부원이라면 앞으로 종종 마주칠 터, 그런데 왜 지금껏 관심도 두지 않았던 도서부원에게 흥미가 생긴 건지. 티엔은 대출이 안 된다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저기요.”
그리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티엔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이 도서실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녀와 자신 단 둘 뿐. 천천히 몸을 돌리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에게 다가왔다.
“책갈피. 빼먹으셨어요.”
“...흠.”
티엔은 책갈피를 쓰지 않는다. 가방 안에 넣어놓은 유인물이나 메모지가 끼워져있던 게 아닐까 하는데 예상 외로 루이스가 내민 것은 얼마 전에 참고서를 사면서 받은 영수증이었다.
“여기보단 그 건너편 골목에 윈더미어가 나아요. 포인트 적립은 안 되지만 얼굴 조금만 익히면 싸게 주시거든요.”
윈더미어라는 소리에 티엔은 후미진 간판을 떠올렸다. 낡은 서점과 눈앞의 여학생. 티엔은 무표정한 루이스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는 그것뿐이었는지 루이스는 티엔이 반납한 책을 양손에 들고 서가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티엔은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의 복도를 걷는 내내 기분좋은 꽃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아침부터 홀든A의 숙소는 분주했다. 부엌에선 아이작이 계란과 베이컨을 굽느라 바쁘고, 씻고 나온 토마스는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않고 늘어져있는 이글을 깨우느라, 벨져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며 아침부터 옷장을 뒤엎고 있었다.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안 돼?”
“미쳤어?”
벨져는 스키니진에 흰 셔츠, 그 위에 남색 스웨터를 입은 루이스가 침대에 앉아 이번 봄에 나온 불독인형을 끌어안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넌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그만 심통내. 모처럼 꽃놀이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더 아무거나 입을 수 없는 거다.”
루이스는 인형에 턱을 올리고 뚱한 얼굴의 벨져를 빤히 쳐다봤다. 이거야 원, 여자친구랑 쇼핑간 것도 아니고 벌써 삼십분 넘게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걸 보고 있으니 점점 기다리는 게 지루해졌다.
“베엘져어.”
“보채지 마라.”
벨져는 벌써 상의만 다섯 벌째 집어던지다 겨우 마음에 드는 게 나왔는지 얇게 스프라이트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걸쳤다. 봄이라곤 해도 저러면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꺼냈다간 벨져의 준비시간이 더 늘 것 같아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안에 가디건 입고, 위에 잠바를 입은 다음 벨져가 나중에 춥다고 짜증을 내면 가디건이나 잠바를 벗어주면 그만이니까. 루이스는 손등을 살짝 덮는 스웨터의 소매를 당겼다.
“선배!”
“응, 오오. 토마스, 신경 좀 썼는데?”
왁스로 머리도 만지고 몸에 딱 맞는 새 옷을 차려입은 토마스는 센스가 좋아서인지 새내기 대학생 같았다. 그 뒤로 따라온 이글은 스냅백에 껄렁하다 해야할지 화려하다 해야할지 애매한 차림이었지만 저게 다 명품이란 걸 안 후로 루이스는 이글의 옷차림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누가 맨날 입어서 때가 타고 목이 늘어진 런닝이 브랜드 제품이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냐만은, 또 티비나 보면서 비스듬히 누워 감자칩이나 먹고 있는 걸 보면 진하게 풍기는 백수의 향기에 옷이 묻힐 수밖에 없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표범무늬 모피코트를 두르고도 모델 포스가 나는 거라던가, 가끔 광고 찍으러 갈 때 핏이 사는 걸 보면 옷걸이는 참 좋은데. 사진 찍는 걸 보면 진짜 모델을 해도 될 것 같은 애가 이러고 있으니 가끔은 그쪽으로 안나간 게 안타깝기도 했다.
“뭐야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작은 형!”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나가!”
이글의 껄렁한 말투에 벨져가 문가에 서있는 토마스와 이글에게 짜증을 냈다. 흔히 있는 일이라 이글은 귀를 파며 들어오고, 토마스는 벨져와 이글의 눈치를 살피다 루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보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고,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씨는 뭐해?”
“도시락 싸고 계세요. 아까 슬쩍 보니까 샌드위치랑 과일 싸고 계시던데.”
“오오오.”
“오늘도 안 간대?”
“가겠어? 우리 없다고 대청소한대.”
루이스는 팬이 선물해준 쉬레와 프로즌의 스노우볼을 높이 띄웠다 잡아채는 이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옆에서 루이스의 오늘 옷차림이 교회 오빠 스타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차분하고 평범한 게 좋을 뿐이지만,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귀여운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기껏 공들인 머리를 망치면 안 된다 생각에 손을 멈췄다.
“너, 너, 저리로.”
이번에야말로 끝났나 싶었더니 벨져는 토마스와 이글이 들어온 뒤로 옷을 또 갈아입었다. 루이스는 허허 헛웃음을 흘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벨져가 이글이 가지고 노는 스노우볼을 뺏고 방에서 쫓아내는 걸 지켜봤다. 이래서야 나갈 수는 있을까. 사람들 붐비기 전에 가서 자리 잡고 싶은데. 루이스는 벨져와 눈이 마주치자 인형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꽃놀이 가자~. 옷 그만 갈아입고~.”
“그게 뭐냐, 어린애도 아니고.”
“네가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렇지. 씻기도 제일 먼저 씻어놓고.”
“너희가 너무 무신경한 거다. 선크림은 발랐냐?”
루이스가 대답이 없자 벨져는 한숨을 쉬고 화장대에서 선크림을 집어 루이스에게 던지려다 옆에 토마스가 있는 걸 깨닫고 손에 크림을 죽 짰다.
“눈 감아.”
“그거 네 대사 아니잖아.”
“입도 닫아.”
루이스는 벨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남자치고 매끄러운 손이 뺨과 이마, 코와 턱을 지나 목을 매만지다 떨어졌다. 토마스는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저를 향한 싸늘한 벨져의 눈빛에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쭈뼛거렸다.
“어, 음. 전 아이작씨 도시락싸는 것 좀 도와드리러 갈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심술 부리지 마.”
“흥, 심술은 무슨.”
벨져는 선크림 뚜껑을 닫고 루이스의 손등에 남은 크림을 문질러 닦았다. 루이스는 그냥 손등을 문지르며 벨져가 대충 늘어놓은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꽃보러 가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혼잣말같은 그 말에 벨져는 선크림을 내려놓고 거울 너머로 루이스를 흘긋 쳐다봤다. 청승맞기는. 벨져는 옷장에서 인디언핑크색 브이넥을 꺼내 입고 위에 감이 톡톡한 감색 재킷을 걸쳤다. 이 정도면 옆에 섰을 때 흉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오늘의 루이스의 패션에 맞춘 벨져는 향수를 꺼내 루이스 옆에 다가가며 뿌렸다.
“아, 좀 밖에서 뿌리라니까.
“내가 내 방에서 외출준비를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그게 내 방이기도 하니까 문제라는 거지.”
“흐응, 싫어?”
“나한텐 너무 화려해서 안 어울려.”
벨져는 루이스의 대답에 흡족해져 길게 콧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당겼다. 단둘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래도 봄나들이로 꽃구경이라니, 이번 기획이 누구 머리속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제법 칭찬해줄만했다.
“와, 진짜 얼마만이지. 도시락 들고 피크닉 가는 거.”
“전엔 누구랑 갔었는데?”
“고아원에서 다같이.”
루이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퉁명스레 묻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오는 바람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아픈 구석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눈치를 살피자 루이스가 씩 웃으며 일어났다.
“됐어, 나가자.”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지만, 말을 잘못했단 자각은 있기에 벨져는 토씨 하나 못 달고 루이스를 따라 나섰다.
차를 타고 삼십분, 꽃이 만개한 공원에 도착한 토마스와 이글은 루이스와 이글이 주차하는 사이 알아서 찍으라고 쥐어준 카메라를 들고 신나서 붕붕 뛰다니다 갑자기 인터뷰를 시작했다.
“홀든A의 막강한 서포터, 마에스트로! 오늘의 의상 컨셉은 뭡니까?”
“어, 오늘은 글쎄요? 봄이니까 상큼한 새내기?”
“이야아, 죽인다~. 모델 뺨치네 우리 토마스!”
이글은 카메라로 토마스의 발끝부터 머리까지를 훑으며 토마스 주변을 뱅뱅 돌았다.
“아, 형. 그만해요. 쪽팔려.”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상큼한 우리 토마슈~. 우쮸쮸쮸.”
“형 자꾸 이러면 방에 뭐가 널려있는지 앨리셔씨 트위터에다 제보할 거예요!”
“그건 안 되지.”
얼굴이 붉어진 토마스가 빽 소리를 지르자 이글은 바로 표정을 굳히며 카메라를 노란 개나리가 잔뜩 핀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형들을 향해 돌리고 혀를 찼다. 하여간 벨져 홀든 저거저거 아주 이게 데이트인 줄 아나. 척 봐도 루이스와 맞춰입은 티가 나는 옷차림에 이글은 제 작은형이 정말 어찌 할 수 없는 노답이라 생각했다. 아이돌 좋아한다고 뭐라 할 게 아니다. 저게 사생팬이지. 그것도 순 악질.
이글은 얼마 전 벨져가 루이스의 팬사이트에서 조공이랍시고 선물로 보낸 스니커의 가격을 떠올리고 고개를 도리저었다. 그걸 알면서도 봐주는 저 새끼도 정상은 아니지만.
“뭐 하냐?”
“쉬레와 프로즌의 팬들을 위한 서비스 타임.”
“뭔 소리야.”
“아냐, 우리 방송의 18퍼센트는 형들의 그 끈적한 사이가 책임지고 있다고.”
사뭇 진지한 이글의 목소리에 벨져는 또 헛소리겠거니 하고 무시하려했지만 둔하기 짝이 없는 루이스가 말을 거는 바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에 미묘한 수치에 억양이 거세진 건 분명 착각이 아니겠지만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그야 물론 귀엽고 멋진 이글이 비중이지~. 이글이글이 몰라? 하, 역시 유행에 뒤쳐지시네~, 안 되겠어~.”
“그게 유행이 된다면 난 그냥 죽겠다.”
“하, 하하. 벨져 형이 그런 말 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요....”
“당연하지. 농담이 아니니까.”
벨져가 정색하고 말하자 옆에서 걷던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철썩 치고는 슬쩍 토마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루이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좋지만, 뒤통수가 따끔하다 못해 뒤에서 검은 오오라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게 아무래도 위험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루이스에게 오늘 도시락 메뉴를 화제로 말을 걸었고, 루이스는 기대된다면서 토마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평일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공원은 그닥 붐비지 않았다.
“선배 너무 인기 많은 것 같아요.”
“응?”
“우리 팀은 다들 인기가 많잖아요. 이글형도 그렇고, 벨져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게 무슨 소리야.”
뒤에선 벨져와 이글이 또 버럭버럭 하며 투닥거리고 있지만 그러느라 계속 걷는 두 사람과 거리가 제법 거리가 벌어졌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에 토마스는 속에 품고 있던 얘기를 터놓았고, 루이스는 가볍게 받았다.
“서포터는 눈에 띠는 포지션도 아니니까요.”
“우리 전적 살펴보면 네가 제일 승률 좋을걸?”
“하지만 그거랑 그건 다르잖아요.”
“다르지. 그지만 네 덕에 우리는 착실히 이기고 있어. 나도 벨져도 널 믿으니까 앞으로 가는 거야. 공방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토마스는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루이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서포터란 포지션이 눈에 띠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몫은 진입을 하는 이니시에이터나 딜러가 가져가지 마련이라 5인궁이라도 넣지 않는 이상 토마스는 카메라나 해설진의 주목을 받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걸 인정해줄 사람은 결국 팀원들밖에 없는데, 점점 모두가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의 톱니바퀴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서운했던 차였다.
“토마스. 우리가 말은 안 해도, 언제나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벨져도요?”
“하하, 당연하지. 뭐, 그건 저 녀석 마음이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널 빼겠다고 하면 당장 미쳤냐고 할 걸?”
토마스는 결국 한 대 맞은 이글과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도 토마스를 보며 마주 웃고, 그 사이를 벨져가 치고 들어왔다.
“아, 형!”
“형 소린 꺼내지도 마.”
“꽃 보러 온 거야, 싸우러 온 거야?”
“아, 같이 가! 쫌! 어휴, 드러워서 정말.”
이글이 잔뜩 투덜거리며 다가와 카메라를 루이스에게 넘겼다. 카메라를 받아든 루이스는 토마스와 벨져, 이글을 차례로 비추다 꽃이 만발한 공원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조그만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뒤돌아서 세 사람을 담기도 하고, 양 손이 자유로워지자 목 뒤에 깎지를 끼고 걷는 이글에게 농담같은 인터뷰 질문도 던졌다.
“요새 BJ로 버는 수입이 엄청나다면서요?”
“제가 워낙 멋져야 말이죠, 방송 치면 바로 나옴.”
“그게 그랑플람의 미친 고딩때문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글은 대번에 입술을 내밀었다. 그게 퍽 귀여워 루이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물었다. 이글은 주로 토마스와 듀오를 돌거나, 하랑이와 듀오를 돌거나, 아니면 그 둘과 삼인을 뛰곤 했다. 하랑은 피지컬이 뛰어난 원딜러인데다 센스도 있는 편이라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딜러인 이글과 함께 있으면 시너지가 엄청났다. 엊그제도 벨져와 듀오를 돌리다 세사람을 만나 진 루이스는 일부러 예민한 구석을 찔렀다. 진 다음에 벨져가 이게 다 뽀뽀를 안 해서 그렇다며 멱살을 잡고 달려든 복수였다.
“그건 걔가 바른 생활 어린이라 그런거지! 그랑플람에선 열두시 되면 걔 컴 전원을 빼버린다드라.”
“네가 하다가 술자리 데리고 오니까 그렇지.”
“쉿!”
이글은 큰일난다며 손사레를 쳤다. 어차피 다 편집해서 나갈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적당히 정도를 지키긴 해야 했다. 루이스와 이글이 노는 사이 벨져와 토마스가 음료수를 사서 돌아왔다. 이글의 첼시 콜라, 토마스의 민트초코 프라푸치노, 벨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루이스의 체리코크가 담긴 사각 트레이에 삼단 찬합이 두 개. 이글과 토마스, 벨져는 각각 트위터, 카스,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루이스는 세 사람의 촬영을 위해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오오오.”
“역시 아이작씨, 굉장하네요!”
“대단한데?”
“흐응. 나쁘지 않군.”
각각 다른 감상과 함께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다들 작성을 마친 후에야 각자 손을 뻗어 샌드위치와 유부초밥을 입에 가져갔다. 카메라는 잘 내려두고 먹는 동안 바람이 홱 불며 벚꽃잎이 흩날렸다.
“좋다. 날씨도 좋고, 꽃도 예쁘고 밥도 맛있고.”
“아이작씨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토끼랑 같이 보라고 갈 때 꽃가지 하나 꺾어가자.”
벨져는 이글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 동생을 쳐다봤지만 이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글의 말마따나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꺾어다주고 싶을 정도로 진풍경이라 혹했다.
“품위 없는 것들. 꽃가지 하나 보느니 차라리 휴일을 줘라. 쯧.”
토마스와 루이스는 관심도 없는 척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 벨져를 보고 둘이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뭐.”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치고 손에 묻지 않게 잘 싼 샌드위치를 집어든 벨져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루이스는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이글과 프라푸치노를 마시는 토마스를 차례로 훑어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파랗고 분홍색 꽃잎이 살랑인다.
“꽃놀이, 나오길 잘했네.”
루이스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하여간 가끔 늙은이같은 소리를 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긴장과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즐기는 루이스의 모습이 오랜만이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있는데 당연하지.”
“다음엔 아이작씨랑 다이무스씨도 같이 와요!”
벨져는 애먼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의 체리코크를 뺏어마셨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벨져는 체리코크를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다음주 수요일, 시간이 비니 다음 시즌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기분 전환삼아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아랑 아이작까지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지만. 벨져는 미리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날씨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