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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White Day
2015/03/16
※ '어느 겨울'과 이어지는 듯 안 이어지는 듯 그냥 공식 목석남 티엔과 ts루이스로 기념일이 챙기고 싶었다.......
차디찬 바람이 한 풀 꺾인 3월의 봄날, 루이스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살폈다. 늘 아무렇게나 방치하던 머리카락도 곱게 빗어 올리고 편하다고 대충 입던 후드와 티셔츠, 청바지, 스니커즈 대신 흰 블라우스에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연분홍색 치마를 입으니 늘 보는 제 모습이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앞머리를 매만지다 긴장을 덜고자 숨을 길게 내뱉었지만 보면 볼수록 어딘가 부족해보였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그와 만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인들의 기념일에 데이트라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루이스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으로 찰싹 뺨을 감싸고 다시 한 번 숨을 내뱉었다. 어설프게나마 화장도 했는데 어떻게 보일지 몰라 자꾸만 두근거렸다. 약속시간까지 앞으로 삼십분. 그는 절대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으니 이제 더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떨리는 가슴 위에 차가운 손을 얹고 천천히 심호흡한 루이스는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티엔!”
“흠. 왔나.”
루이스는 만나기로 약속한 분수대 앞에 서있는 그를 보고 가볍게 뛰었다. 트리비아가 신는 것처럼 굽이 높은 것도 아닌 단화지만 평소에 신던 것보단 뛰기 힘들어 자연스레 걸음이 늦어졌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티엔은 팔을 풀고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양손이 빈 걸 본 루이스는 살짝 실망했지만 이제 막 만난 참이고 어련히 그가 알아서 다 계획을 세웠을 거라 생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화장이나 옷이 어색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티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죽 훑어보고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잘 지냈어요?”
“그래.”
제 생일을 티엔이 말도 없이 그냥 보내고 맞은 밸런타인에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이후로 제대로 시간을 내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한 달 만이었다. 티엔이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고, 루이스는 그의 팔을 잡고 한가로운 리버포드를 걸었다. 모처럼 먹구름이 끼지 않은 화창한 날씨에 데이트. 루이스는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봄바람이 한껏 들뜬 마음을 흔드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리버포드는 회사의 관할구역이지만 사람이 많은 데다 휴양지였던 덕에 세계 각국의 요릿집이 많았다. 그러니 포트레너드에서 데이트를 하기엔 리버포드만한 곳이 없었는데, 연인들의 기념일에 휴일이 겹쳐서 그런지 어디고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 사람이 많네요.”
“걱정마라. 예약해두었으니.”
그냥 한 말에 티엔은 루이스의 그의 팔을 잡은 손을 톡톡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슬그머니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흘긋 그녀의 안색을 살핀 티엔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순조로운 데이트는 완벽한 계획에서부터 시작한다. 티엔은 앞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앞에서 이래서 가기 싫었네, 어쩌네 하고 다투는 연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의 점심으론 제철인 숭어요리와 함께 언젠가 루이스가 맛있다고 했던 화이트 와인, 그 후엔 한창 흥행하는 영화를 보고 제법 괜찮은 차를 들여놓는 카페. 저녁은 중식집에서 먹고 그 다음은 봐서 제 집으로 가거나 루이스를 바래다줄 계획이었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티엔은 삼일 전에 예약을 마쳤고, 오늘따라 햇살도 좋고 루이스의 기분도 좋아 보였다.
좀처럼 꾸미는 법이 없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에 옅게 화장까지 하고 배시시 웃으니 안 그래도 청초한 사람이 막 피어나는 꽃처럼 고왔다. 덕분에 티엔의 가슴도 같이 떨렸지만 거리를 걷다보니 한 번씩 루이스를 돌아보는 다른 남자들 때문에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제 연인이 예쁜 것을 탓할 순 없지만,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불쾌할 따름이었다.
티엔은 곱게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린 덕에 드러난 루이스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늘 머리카락을 후드 안에 넣고 다니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이렇게 드러낼 바에야 차라리 다시 그 후드를 입히고 싶었다. 꽁꽁 숨겨두고 자신만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약해둔 식당에 도착한 티엔은 루이스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고개를 든 루이스의 화사한 미소에 미소로 답한 티엔은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아 계획한 대로 숭어요리와 화이트와인을 시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루이스는 종일 들떠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데이트 이후로 한 달 만이니 그렇게 자신을 만나는 게 좋았나 싶어 티엔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왜요?”
“그렇게 보고 있으니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루이스는 티엔의 솔직한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아치를 만들던 루이스는 티엔이 손을 내밀자 바로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 포개진 두 손의 온도가 같아질 쯤,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티엔은 숭어의 살을 발라 루이스의 접시에 덜어주었고, 루이스는 아무리 괜찮다 말해도 티엔이 말을 안 들을 걸 알기에 얌전히 생선살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맛나게도 먹는 게 보기 좋아 티엔은 제가 먹는 건 뒷전으로 하고 루이스를 먹였다.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옷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입으니 더 말라보여 잘 먹여야할 것 같았다. 맛있는 걸 먹이면 수줍고 간지러운 미소를 짓는데, 티엔은 루이스의 그 얼굴을 볼 때면 행복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카페로 향했다. 유난히 거리에 연인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티엔은 옆에 여자친구를 끼고도 루이스를 쳐다보는 남자들 때문에 점점 더 짜증이 났고, 내심 사탕을 기대하고 있던 루이스는 한 나절이 다 가도록 사탕은 줄 생각은 않는 티엔 때문에 점점 우울해졌다.
티엔 정이 기념일을 챙길 사람이냐, 하면 사실 루이스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다가 챙겨주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신경도 안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루이스는 내내 차가운 무표정으로 제게 말도 걸지 않는 티엔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속만 썩였다. 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이 저마다 손에 안고 있거나, 그녀들의 옆에 서있는 남자들이 들고있는 귀여운 포장의 상자를 보며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티엔, 저…. 혹시…….”
“무슨 일이냐.”
“으,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이스는 저녁을 먹고도 아무 조짐이 없는 티엔을 보며 자포자기해버렸다. 티엔은 루이스가 주저하는 것을 힘들어서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쉬었다 가자며 공원으로 들어갔다. 티엔이 벤치에 깔아준 손수건 위에 앉은 루이스는 티엔의 팔을 놓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혼자 멋대로 기대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이인데 이 정도 기념일정도는 챙겨줘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한 달 만에 만난 건데. 하지만 이런 걸로 속상해하는 게 유치하고 쪼잔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라 루이스는 티엔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실 거라도 사올 테니 잠시 쉬고 있어라.”
티엔은 제 눈을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그녀를 뒤로 했다. 티엔은 티엔 나름대로 낮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저기압이 된 루이스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분명 제 계획은 완벽했고, 루이스도 즐거워했는데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티엔은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되짚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리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생리 중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아직 루이스가 생리를 하려면 열흘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럼 대체 뭘까. 콜라 두 캔을 산 티엔은 미리 한 캔을 따서 들고 가며 제가 잘못 안 것인지 날짜를 다시 한 번 셌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도 이 쯤 만났던 것 같은데. 순간 티엔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티엔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설마. 혹시, 설마. 임신을 한 게 아닐까?
임신 초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티엔은 몸에 오르는 열기에 잠시 숨을 골랐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목이 타 미리 딴 콜라를 쭉 들이켰다. 루이스와 자신 사이의 아이를 상상하던 티엔은 그럼 연합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이는 누가 돌보고 제 집에 루이스를 들어앉힐 수 있는 것인지 현실적인 문제를 재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달려간 티엔은 벤치에 앉아있는 루이스 앞에 한 남자가 뭔가를 내미는 모습을 보고 발을 멈췄다.
“저, 그, 오늘 서점엔 안 나오셨더라구요. 저같은 게 루이스씨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아, 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날이 날이니까. 못 드리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머쓱한 듯 수줍게 웃으며 뒷머리를 만지는 남자와, 조심스레 그가 내민 상자를 받은 연인. 티엔은 차갑게 표정을 굳히고 다가갔다. 티엔을 발견한 루이스가 눈을 깜박인 순간, 티엔은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내 연인에게서 떨어져주지 않겠나?”
“아, 예, 예!”
“티엔!”
방금 전까지 꽃분홍빛으로 물들어있던 남자가 겁에 질려 달아나고, 루이스는 티엔을 말리려했으나 이미 남자는 혼비백산해 달아난 후였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내가 왜 내 여자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를 봐줘야하지?”
“나도 왜 이런 날 연인도 아닌 남자한테 선물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겠거든요?!”
티엔의 싸늘한 말과 눈빛에 여태껏 설움을 꾹꾹 참아왔던 루이스도 터져버리고 말았다. 분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른 루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면 또 다툴 것 같고, 티엔이 자신을 겨우 이런 거에 서운해 하는 속 좁은 여자라 생각할 것 같아 더 마주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문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티엔은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를 따라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루이스.”
“놔요.”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다오.”
“됐어요! 어차피 내가…!”
결국 눈물이 흘러넘치고 만 루이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기껏 예쁘게 꾸미고 나왔는데. 그래도 기념일이라고 내심 많이 기대했는데. 어쩜 완벽한 남자가 이럴 때만 무심한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이런 것 때문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성긴 얼음이 와그작 깨지는 것처럼 무너지는 자존심에 이를 악물고 티엔을 노려봤다.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했다.
“루이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냐.”
티엔은 천천히 루이스를 품에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연인을 안고 등을 토닥이자 루이스도 티엔의 등에 팔을 둘렀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글쎄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날카로운 결정검처럼 티엔을 가슴을 쿡쿡 눌렀다. 여자를, 그것도 연인을 울렸다는 양심의 가책에 티엔은 토를 다는 대신 루이스를 토닥였다. 남달리 사려 깊은 사람이니 아마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걸 제 무신경함이 건드린 모양이었다. 일이 아닌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티엔에게 연인이란 관계는 루이스가 처음이었고, 완벽하려 노력은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또 이렇게 그녀를 상처 입혔단 생각에 티엔은 죄인이 된 기분이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나를 만나러 온 날. 유난히 햇살이 좋고, 네가 햇살보다 더 예쁘게 웃어준 날.”
루이스는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티엔의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무뚝뚝하고 무신경한 남자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다 알면서, 그깟 사탕이 뭐라고. 밀려오는 후회와 자괴감에 루이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만가만 저를 달래려 등을 토닥이는 그 무거운 애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틀린가?”
티엔의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티엔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턱을 잡아올리려다 완강한 거부에 손을 놓았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지 않게 무릎 안쪽에 팔을 넣고, 허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은 그대로 루이스를 번쩍 안아올렸다.
“으앗!”
“이제야 겨우 얼굴을 보여주는구나.”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느냐.”
티엔은 제 목에 팔을 감은 루이스에게 씩 웃어보였다. 수줍게 붉어진 뺨이 붉은 노을을 받아 예쁜 다홍빛으로 물들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담았다.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티엔은 입술을 내밀었다. 살포시 눈을 감고 제게 다가오는 그녀와 가볍게 입술을 부비고, 루이스를 내려놓자 루이스가 발돋움을 해 다시 한 번 티엔에게 살짝 키스했다. 티엔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뺨을 엄지로 쓸다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연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럼 이제 가지.”
“어디로요?”
티엔은 대답대신 씩 웃으며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작고 고운 손은 티엔의 손 안에 충분히 들어오지만 언제나 이 손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잡아야할지는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거리를 걷다보니 가스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티엔의 집으로 가는 길, 문득 사탕가게가 눈에 띠었지만 루이스는 가게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을 뿐 더 이상 다른 여인들이 안고 가는 사탕상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제 손이 아플까 힘주어 잡지도 못하는 연인의 온기가 더 소중했다.
“……티엔?”
진열된 형형색색의 사탕에서 눈을 돌리는데 티엔이 사탕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런 거 없어도 되는데.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티엔은 사탕가게 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까지 루이스가 보던 사탕들의 값을 치르고 봉투를 루이스의 손에 들려주었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느냐.”
“네? 별로 사탕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닌데….”
루이스는 차마 말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사다준 게 기뻐 생긋 웃자 티엔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이트 데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한참 보고 있으니 먹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고 사다준 거라는 걸 알지만 루이스는 그게 더 기뻤다.
“고마워요.”
티엔은 다시 찾은 루이스의 미소에 겨우 시름을 덜었다. 이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루이스는 사탕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볼이 볼록 튀어나온 게 꼭 소녀같이 귀여웠다.
“다 먹을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루이스는 대답 대신 티엔을 올려다봤다. 오물오물 사탕을 굴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을 마주한 티엔은 반들거리는 루이스의 입술에 입 맞췄다. 달디 단 입술이 떨어지자 루이스는 입을 벌려 동그란 사탕을 내보였다 닫으며 사르륵 웃고, 티엔은 집 앞에서 주머니 안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길 모양이었다.
* 이틀이나 늦었지만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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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2015/03/12
“그만 하고 와서 앉아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티엔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티엔은 루이스가 부르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돌아가기 위해선 이 사람이 필요하다. 바위 위에 앉은 루이스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장작더미를 뒤적였다. 또르르 굴러 나온 새까맣고 투박한 감자 네 개. 껍질은 새까맣게 탔지만 나뭇가지로 이리 저리 굴리니 껍질이 타서 떨어진 곳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걸 보니 또 식욕이 돌아 티엔은 루이스가 앉은 것처럼 적당한 돌덩이 위에 앉았다.
“아직 뜨거우니까 손대지 말아요.”
한번 허기가 지니 나무가 타는 냄새마저 식욕을 돋웠다. 지금 만졌다간 입에 넣기도 전에 손을 델 것을 알지만 눈앞에 먹을 걸 두고도 먹지 못하는 건 꽤나 인내가 필요했다. 티엔이 감자를 빤히 보며 침을 꼴깍 넘기는 사이 일어난 루이스는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밟았다. 놀란 티엔이 쳐다보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불을 끄는데, 티엔은 기껏 피운 불을 꺼트리는 까닭을 몰라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해가 지면 더 추워질 텐데?”
“해가 지면 불빛도 더 잘 보이죠.”
티엔은 모든 주도권을 뺏긴 채 휘둘리는 게 묘하게 불쾌해 시선을 돌렸다. 듣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루이스는 마지막 불씨까지 꺼트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감자를 이리저리 옮기다 까맣게 탄 껍질을 반 벗겨내 티엔에게 건넸다. 기분이 상했던 티엔은 잠시 감자와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곤 감자를 받아들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당장은 포슬포슬한 감자를 주린 배에 넣는 게 더 중요했다.
티엔은 제 몫의 감자 두 개를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고 물을 마셨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감자는 소금도 치지 않고 구웠을 뿐인데도 맛있었다. 그리고 먹을 게 들어갔는데도 허기가 달래지기는커녕 더 배가 고파지고 말았다. 어릴 적 정관정요를 다 외우지 못해 스승님이 벌로 다 외울 때까지 식사를 금지했을 때도 이렇게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티엔이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루이스가 제 몫을 하나 양보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티엔은 염치가 없어 선뜻 받지 못했다. 아직 하나도 채 먹지 않은 루이스는 입을 오물거리며 감자를 집어 내밀었고, 티엔은 못 이긴 척 받았다. 티엔은 마지막 감자를 루이스가 하는 것처럼 천천히 먹었다. 물론 그 하나를 먹는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허기가 달래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감자를 먹는 사이 하늘엔 검은 장막이 드리웠다. 둥근 달과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장식하고, 루이스는 챙겨온 모포 한 장을 티엔에게 건넸다. 황궁을 떠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침상도 없이 냉기가 올라오는 땅에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자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티엔이 모포를 들고 가만히 있자 루이스가 다가와 모포를 삼단으로 접어 불을 피웠던 자리 옆에 펼치곤 두꺼운 쪽은 깔고 나머지 한쪽과 외투를 덮고 자야한다고 일러주었다. 티엔은 방금 먹었으니 바로 누울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내일도 길을 가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했고, 어차피 불을 피울 수 없다면 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성 싶었다.
티엔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양손으로 팔을 쓸며 온기를 더하는 사이, 루이스가 물통을 담았던 주머니에서 통을 꺼냈다. 빈 주머니에 불을 지필 때 감자와 함께 넣었던 둥근 돌은 아직도 뜨거워 장갑을 낀 손으로도 못 집고 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담아야 했다. 주머니 안에 뜨거운 돌을 넣은 루이스는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던 티엔에게 건넸다.
“안고 자는 게 없는 것 보단 나을 거예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무엇이냐 묻는 대신 저를 빤히 쳐다보는 티엔에게 루이스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엔 그저 고집 센 귀족 도련님이겠거니 했는데, 힘든 길도 힘들다 소리 한 번 않고 따라오는 게 장하기도 하고 평생 배고프고 추운 걸 몰랐을 사람이 불평 한 번 않는 게 놀랍다 못해 신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아무리 말단 관직에 서출이라 해도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으스대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 귀한 집 자제분은 명령도 강요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하다 뿐이지 정갈한 말투와 행동거지가 옛 성현들이 그리는 선비의 모습 그대로라 루이스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굳센 입술이며 침착하지만 강한 눈매, 짙은 눈썹.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루이스는 이 년 전 헤어진 친구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험한 산을 타며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몇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며 떠돌았다. 자신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익힌 것들은 루이스가 이런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산을 헤매던 그때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 그때도 둘이 감자를 캐 나눠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금도 물도 없이 참 잘도 먹었단 생각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더러 가끔씩 외로워질 때면 그냥 그녀를 따라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늙은 주인어른을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남기로 한 걸 후회하진 않지만 가끔 그 아가씨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긴 했다. 귀한 가문의 따님이니 아마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루이스는 추억이 된 기억을 회상하며 외투의 끈을 풀었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나았다. 지금은 적이 나타나도 어느 정도까진 대처할 수 있고, 식량도 있는 데다 야영 경험도 있고 추적이 붙은 것도 아니니 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루이스가 외투를 이불 대신 덮고 누우려는데, 티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안개가 걷힌 밤하늘엔 크고 둥근 달이 은은하게 빛나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뜨거운 돌이 든 주머니의 온기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뱉었다. 뿌연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밤하늘의 광경에 넋을 잃고, 경치에 취한다. 티엔은 먼 산골로 유배 간 이들이 자연을 노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을 벗 삼아 술 한 잔에 시를 읊는 것이야말로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닌가.
티엔은 그런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적어도 티엔에겐 허락되지 않은 삶이었다. 훌훌 털고 떠나버리기엔 제 어깨에 짊어져야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 모두를 떨쳐버리기란 쉽지도 않을 뿐더러 티엔은 제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가며 얻은 자유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쾌해진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스가 깔아둔 모포에 누웠다.
딱딱하고 냉기가 올라오는 잠자리가 불편해 이리저리 뒤척이던 티엔은 몸을 모로 뉘었다가 다시 바로 누웠다. 주머니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전부 막아주진 못했고, 군데군데 돌이 박힌 돌 때문에 어떻게 누워도 등이며 다리가 욱신거렸다. 티엔이 자리를 못 잡고 몇 번 쯤 자세를 바꾸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티엔이 고개를 들자 루이스는 덮고 있던 외투를 티엔에게 건넸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민 두꺼운 외투를 받자 루이스는 다시 모포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티엔이 외투를 돌려주려 했지만 루이스는 티엔에게 등을 돌리며 난 익숙하니 괜찮다고 말하곤 길게 하품했다.
“흐아암. 그냥 아래 한 겹이라도 더 깔아요. 돌이 식으면 더 추울 거예요. 해가 뜨면 또 쉴 새 없이 걸어야 하니까 뒤척이지 말고 자둬요.”
티엔은 한사코 돌려주려고 외투를 넓게 펼쳐 루이스의 모포 위에 덮으려 했다. 루이스의 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단호함에 손을 거뒀다. 티엔은 루이스에게 외투를 돌려주는 대신 덮고 있던 제 외투를 아래 깔고 발끝부터 배를 덮는 게 고작인 루이스의 외투를 몸 위에 덮었다.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루이스의 외투와 달리 티엔의 외투는 늑대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값은 물론 보온성도 비교할 수 없었지만 열을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과 하나를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루이스의 친절을 바닥에 깔 수 없었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우니 아까보단 한결 나았다. 루이스의 외투 위에 모포를 한 겹 덮긴 했지만, 그래도 어깨며 가슴이 휑해 외투를 끌어올리자 이번엔 발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키차이가 있다 보니 몸을 다 덮기엔 외투가 짧았다. 발과 가슴 사이에서 고민하던 티엔은 그대로 외투의 모자 부분으로 목을 감쌌다. 외투를 덮지 않아도 모포로 덮으면 바람은 피할 테고, 두꺼운 가죽신발에 안에는 부드러운 털을 덧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고 가만히 숨을 쉬고 있으면 작은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 바람에 나무의 잔가지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작은 숨소리. 티엔은 그 소리를 듣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하루종일 걷다보니 지치기도 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하늘 가득 펼쳐진 별이 저마다 반짝이는 그 절경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황궁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찬란하고도 순수한, 때묻지 않은 별빛. 궁에선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 없었는데. 티엔은 그 별빛에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르지 않은 흙의 축축한 냄새, 나무와 풀이 내는 성긴 겨울의 냄새. 숨을 뱉을 때마다 뿌옇게 흐려지는 하얀 입김. 티엔은 변하지 않는 하늘을 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티엔의 호흡이 겹쳐지고, 천천히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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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2015/03/06
티엔이 멀건 죽으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루이스는 바삐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거친 외투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짐을 꾸리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티엔은 루이스가 한쪽 벽에 걸어놓은 제 외투와 갑옷, 검을 확인하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져 계곡을 떠내려온 것치고 티엔의 몸은 멀끔했다. 어딜 크게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긁힌 상처 하나도 없는데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몸이 개운하고 상쾌했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낡았지만 깨끗한 면옷을 집어들었다. 짐을 꾸리던 루이스가 지나가며 입고 있던 비단옷은 아직 덜 말랐으니 귀한 옷이면 들고 가라고 말했지만 티엔은 고개를 저었다. 옷 한 벌에 연연할 것도 아니거니와 티엔은 애초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린 것은 평민의 옷이라서가 아니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데다 날렵한 루이스의 몸에 이런 옷이 맞을 리 없으니 분명 루이스를 거둔 이의 것일 텐데,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의 옷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일단 성의를 생각해 입었지만 그래도 소매가 짧았다. 어쩔 수 없는 지라 훤히 드러난 손목을 매만지던 티엔은 조용히 혼자 갑옷을 입었다. 출병할 때보다 더 결연한 의지로 매듭을 묶고, 외투를 걸치고 검까지 차고 방을 나오니 다 짊어질 수 있을지 의뭉스러울 정도의 짐이 나와있었다. 군장을 비롯한 모든 짐싸기는 간결하고 정말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기본이거늘. 티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길을 떠나기 전부터 괜히 동행의 심기를 어그러뜨릴 필요도 없거니와, 지금 티엔은 머리를 숙여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종이로 싼 뭉치들이 서너개, 두꺼운 모포가 둘, 그리고 낡은 천으로 둘둘만 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모자가 달린 긴 외투를 덧입은 루이스는 바닥에 꿇어앉아 능숙하게 늘어놓은 짐들을 한 데 모았다. 두꺼운 모포를 착착 접는 것부터 시작한 짐싸기는 금새 하나의 뭉치가 되어 등에 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요령좋게 어깨끈까지 만든 루이스가 짐을 지고 힘을 주며 일어났다. 그런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티엔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짓에 의미를 모르고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게 없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작은 집을 나서니 바깥은 온통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해 햇빛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내리쬈다. 아직 입춘이 되지 않은 데다 북쪽 땅인데도 싹을 틔운 것이 신기해 나무들을 둘러보며 걸었다. 비가 왔는지 땅이 축축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 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람이 다닌 티가 나는 좁은 길은 루이스가 다니며 만든 길이리라. 나무와 하늘을 둘러보던 티엔은 곧 흥미를 잃고 루이스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이 다 가리도록 진 짐의 가장 위, 천으로 감쌌지만 감출 수 없는 형태의 물건에 티엔은 한 손으로 나무를 짚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가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뱉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 같이 멈춰서니 루이스가 멀쩡한 길을 두고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고, 티엔은 그저 인적이 드문 길로 가겠거니 하며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 지나자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었다. 분명 남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일 텐데 오르막이 계속되고 길도 없는 나무 사이를 헤쳐가려니 힘은 힘대로 드는데, 점점 숲도 우거지는 게 수상해 티엔은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거지?”
“청 주둔지로 가야죠. 그나마 14군이 제일 믿음직하니 거기로 갈 거예요.”
루이스는 앞서 걸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청의 주둔지, 거기에 14군이라는 소릴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냥 막역하게 청의 영역까지가 아니라 딱 짚어 말하는 게 미심쩍었다.
“왜 하필 14군이지? 황자들, 아니 황자님들이 계신 곳도 있지 않나?”
티엔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이스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타박 대신 설명을 했다.
“아무리 청의 사람이라도 그렇게 좋은 검과 갑옷은 구하기 힘들죠. 그렇다면 꽤 명망높은 귀족이란 뜻인데, 황자들은 자신의 세력에 따라 당신을 박대할 수도 있고 몰래 제거할 수도 있죠.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도와줄 사람은 곰 장군밖에 없어요.”
간단하지만 타당한 논리에 티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제 옷차림만 가지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이런 곳에서 썩히긴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루이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등을 가릴 정도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루이스와 짐이라곤 봇짐 하나도 들지 않은 티엔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매일 무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다, 어마마마나 황제폐하, 황후마마께 문안을 여쭙느라 꽤 걷는 편인데도 쉬지도 않고 험한 산길을 가다보니 절로 숨이 찼다.
“서둘러요, 해가 지면 더 갈 수 없으니까.”
결국 티엔은 조금씩 뒤쳐졌고, 앞서 걷던 루이스가 뒤쳐진 티엔을 기다리느라 멈춰서고 다시 길을 가는 게 반복됐다. 가끔 루이스는 갔던 길을 되돌아와 같이 걸으며 아직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으니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했지만 티엔은 오히려 그 말에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힘들 일 하나 없는 황궁에서보다, 오늘 깨어났을 때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더더욱. 남자로서 저보다 어리고 왜소한 이에게 체력으로 밀린다는 건 퍽 자존심 상하는 거라 티엔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떨어지기 전에야 나온 평지에 티엔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오르막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이 붉게 물들자 바삐 걷던 루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왔고 지금 제가 어디쯤 왔는지 모르는 티엔은 루이스가 더 걸을 생각을 않자 안심하는 한편,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골랐다.
두리번거리던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루이스를 따라 들어간 티엔은 루이스가 너른 돌 아래 짐을 내려놓는 걸 보곤 팔짱을 꼈다. 온종일 산을 타다 겨우 평지를 만난데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야영을 준비하는 게 영 못마땅했다.
“얼마나 온 거지? 어제가 보름이었으니 달빛을 따라 더 가도 되지 않나?”
“달이 밝아서 안 돼요.”
루이스의 단호한 말에 티엔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한밤중에 험한 길을 가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티엔은 마음이 급했다. 안전하게 가는 게 엿새, 루이스가 말한 게 사나흘, 밤낮없이 걸으면 하루 하고 한나절. 대체 어떤 길로 어떻게 가기에 해가 지면 꼼짝도 않고 사나흘이라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한나절을 걷는 동안 말 한 마디 않고 따라왔지만 정말 믿어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가 가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길안내를 하게 할 수도 없었다. 자칫 제게 앙심을 품고 안격의 소굴로 가서 팔아넘긴다거나, 혼자 헤매게 두고 갈 수도 있다. 티엔은 지금 제 처지를 알기에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정말 그렇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티엔은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재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저울질했다.
루이스는 티엔이 가만히 서있는 데도 개의치 않고 주위에서 나뭇가지며 마른 나뭇잎을 모아다 불을 붙였다. 나무가 타는 냄새에 티엔은 복잡한 심경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붉은 눈동자에 맞서 불쾌함을 표하자 루이스는 짐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다짜고짜 티엔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날아드는 물체에 놀란 티엔은 냉큼 그것을 잡아챘다.
묵직한 주머니를 흔들자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물이나 술인 것 같은데, 이걸 주는 의미를 몰라 루이스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이미 불이 오른 장작더미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티엔은 주머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다 주머니의 매듭을 풀고 안에 든 나무통의 마개를 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게 술은 아닌 것 같은데 물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망설이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냥 물이에요.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실 테니 주세요.”
“…….”
생각을 읽혀 민망해진 티엔은 물을 들이켰다. 깨어나 먹은 죽 이후로 처음 입에 대는 물은 유독 시원하고 상쾌해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갈증을 해결한 티엔은 물통에서 입을 떼고 입가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마개를 닫아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자 티엔을 보고 있지도 않던 루이스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고, 바람소리와 마른 장작이 타며 틱틱 불티가 튀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티엔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온 길을 보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며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그 아래 드리운 겨울산의 풍경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문득 황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그리던 그녀를 떠올린 티엔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제가 행방불명된 지 꼬박 이틀. 내일이면 사흘이 되니 황도에 연락이 갈 것이다. 말은 안 해도 제가 아버지처럼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리진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명절이면 다른 황숙들이 황제께 문안을 여쭙고 복진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때도 티엔의 어머니, 1황자 적복진은 홀로 그 모진 풍파를 견뎠다.
그렇기에 티엔은 어머니를 위해서 더 완벽한 아들이 되고자 했고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해 침묵했다. 어릴 적 왜 제겐 아버지가 안 계시느냐 여쭈었을 때 어머니의 그 슬픈 미소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티엔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패륵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하나뿐인 아들로서 어머니께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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