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도 박도 못하는 실책. ‘쉬레’ 벨져 홀든은 무력하게 아군의 HQ타워가 부서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고작 8강에서, 그것도 클린스코어로 패배란 홀든 attackers는 물론 벨져 홀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아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제 옆에 앉아있어야 할 그가 선수 부스 밖 관객석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팀원들의 얼굴과 함께 끝자리에 본 적도 없는 놈이 하나 앉아있는 게 보였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며 뒤돌아서는 게 보였다. 벨져는 해설들이 뭐라 떠들건 상관하지 않고 일어섰다. 뭔가 잘못됐다. 이겨야 하는 게임이었고, 그는 게임을 끝내고 무심한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함께 승리를 기뻐해야 했다. 루이스. 프로게이머 ‘프로즌’의 자리는 ‘쉬레’의 옆이었다. 벨져는 삼년이 넘는 시간동안 루이스와 호흡을 맞췄다. 그만큼 자신의 플레이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벨져는 다급하게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관객석과 선수를 가로막은 방음 부스의 벽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는 계속해서 멀어졌고 벨져가 루이스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는 찰나 아직 끼고 있던 헤드셋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벨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프로즌의 주캐, ‘Ice’의 패배 보이스였다.
‘Ice’가 두 사람에게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벨져에겐 첫 패배였고, 루이스에겐 프로게이머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Ice를 들고 져버렸다. 벨져는 이게 루이스 은퇴 후 첫 경기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있을 수 없다. 이젠 내가 뒤를 봐줄 수 없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며 쓰게 웃는 그에게, 너에게 기적을 선물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벨져였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루이스가 없는 첫 경기에서 ‘Ice’로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너무나 잘 알았다. 루이스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Ice’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루이스와 ‘Ice’를 연관 지어 전장의 영웅, 역전의 희망이라고 부르곤 했다. 루이스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쑥스러워했지만 벨져는 그 별명이 루이스와 ‘Ice’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Ice’를 들고 루이스가 보는 앞에서 져버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있을 수 없는 스코어에 헛웃음을 흘렸다. 견딜 수 없는 굴욕감과 분노에 방음부스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루이스를 잡으러 나가려했지만 부스엔 문이 없었다. 사방이 막힌 투명한 상자 안에 갇힌 벨져는 결국 루이스가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조금 전까지 있었던 팀원들과 스태프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루이스가 은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벨져는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한낱 꿈.
그걸 깨닫자 번쩍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천장,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 벨져는 바로 핸드폰을 찾아 홀드 버튼을 눌렀다. 오전 5시 15분. 마지막 게임을 하고 잠들기 전이 3시였으니 두 시간쯤 잔 셈이다. 답답하게 막혀있던 숨을 내뱉은 벨져는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로 훌쩍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곤히 잠든 룸메이트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루이스.”
잠기운에 잠긴 목은 깔끔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끝이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벨져는 상관하지 않고 루이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성인 남자 둘이 함께 눕기엔 좁은 침대였지만 루이스는 잠결에도 몸을 모로 뉘어 벨져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벨져는 냉큼 자리를 차지하곤 루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느껴지는 바디샴푸의 청결한 냄새와 따끈한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간절했던 그의 체취에 불안으로 날뛰던 가슴 속의 폭풍이 가라앉았다.
“루이스.”
한 번 더,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자 루이스가 잠투정을 부리듯 무어라 웅얼거렸다. 벨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콧잔등과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 맞추곤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지 않으면 쉬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취해서 고백하고 사귀게 된 지 고작 세달 밖에 안 된 연인이자 누구보다 믿음직한 파트너.
벨져는 루이스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건 전부 루이스가 은퇴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한계가 오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 말이 은퇴의 밑밥이란 걸 모를 정도로 벨져는 멍청하지 않았다.
전부 가질 것이니, 선택은 필요 없다. 벨져는 자신의 팬들이 저를 위해 드는 치어풀을 떠올렸다. 사석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 꼭 맞는 말이었다. 벨져는 제게 팔을 둘러오는 루이스의 잠든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직 그를 그리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오전 은행 업무를 마무리지어놓고 바로 코어레너드의 행정청사로 향했다. 루이스는 아침이 힘들다며 점심때나 출근해 오후까지 일을 하다 다시 서점으로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오후에 오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처음 며칠은 그를 피해보려고 오전에 일을 하고 루이스가 출근하기 전에 은행으로 가버리곤 했지만 안 본다고 꽃을 토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안 보이니 더 그리워지고, 비어있는 그의 자리를 볼 때면 애달픈 마음에 얼음이 성겼다. 안 보고 괴로워할 바에야 보면서 괴로워하는 편이 낫다. 모처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기도 내심 아깝기도 했다. 루이스는 오전에 일을 하지 않는 대신 오후 늦게까지 일을 하는 편이었고, 그러다보니 루이스는 아침과 점심을 거르는 일이 많았다. 다이무스는 은행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대신 그와 먹을 생각으로 샌드위치를 두 개 사서 코어레너드로 향했다.
한창 점심 시간이었기에 아직 오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루이스가 퀭한 얼굴로 다이무스를 맞았다.
"아, 안녕하세요. 다이무스씨."
"일찍 왔군."
"어제 연합에 일이 좀 생겨서 공성 끝나고 바로 불려갔었거든요."
"눈이라도 좀 붙이지 그러나?"
"아뇨, 한 번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럼 들겠나?"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지친 얼굴과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샌드위치 봉투를 건네자 루이스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에 핏기가 가신 게 안쓰러웠지만 더 신경을 쓰기 뭐했다. 아무리 피곤한 상태라고 해도 상대는 결정의 루이스, 과한 호의를 내비쳤다간 그가 제 마음을 알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스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는 걸 확인한 다이무스는 제 몫을 가지고 책상에 앉았다.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무실엔 단 둘 뿐이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이 갔다. 루이스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눈을 꿈벅이다 샌드위치의 끄트머리를 물었다. 오물오물거리면서도 반쯤 눈꺼풀이 내려온 게 퍽이나 졸린 모양이었다. 맛을 느끼면서 먹긴 하는 건지,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길 반복하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다이무스는 제 몫의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눈에 힘이 들어갔지만 먹는 게 시원치 않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이무스는 걱정과 함께 입 안 가득 샌드위치를 욱여넣고 열심히 씹었다. 멀쩡하게 먹다가 토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잠시 얼음꽃이 올라오는 걸 상상한 다이무스는 인상을 구기고 머릿속에서 상상을 지워냈다.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다. 다이무스는 남은 샌드위치의 반쪽을 씹어 넘기곤 일어났다. 촉촉한 흰 빵에 싱싱한 양상추와 토마토, 올리브를 넣고 갓 구운 베이컨과 계란을 곁들여 특제 소스로 완성한 카페 리버포드의 샌드위치는 주변에서도 평판이 좋은 일품이었다. 물론 그 가격을 하긴 하지만, 간단히 식사를 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식사 중엔 물이나 차를 마시지 않는 다이무스는 샌드위치 봉투를 정리해 버리곤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흘긋 루이스 쪽으로 눈을 돌리자 아직도 한 조각을 다 못 먹고 조금씩 우물거리는 게 보였다. 저렇게 먹어서 체력 유지는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전자에 한 사람 분의 물을 더했다. 급탕실에 준비되어있는 차의 종류라고 해봐야 홍차 티백, 커피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홍차 캔은 텅 비어있었다. 레몬이나 오렌지 등의 과일차에 꿀을 듬뿍 넣어 마시면 피로회복에 좋지만 일에 찌든 남자들만 가득한 사무실에 거기까지 세심함이 미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다이무스는 아쉬운대로 머그컵 두 개를 꺼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잠시 장에 기대어 루이스를 보는데, 드디어 샌드위치의 한 조각을 다 먹은 루이스는 남은 한 조각을 드는 대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다이무스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피곤해서 입맛이 없다 해도 그렇지, 식사는 자기 관리는 말 할 것도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야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다이무스는 이번주에 예전되어있는 공성전 스케줄과 참가 인원 명단을 떠올렸다. 오늘과 내일은 루이스가 출전하지 않고, 서점도 안 나가는 날이니 이쪽 일만 끝나면 들어가 쉴 수 있을 터였다.
물이 끓는 소리에 등을 돌려 커피를 내리던 다이무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돌아봤다. 여전히 반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서류를 보고 펜을 놀리고 있는 게 안쓰러워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려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손을 멈췄다. 루이스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느샌가 제 책상에 달칵 컵을 내려놓는 건 루이스였고, 다이무스는 받아 마시는 쪽이던 탓이었다. 홍차라면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걸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지만 루이스가 커피를 마시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제 취향대로 진하게 내린 커피 향이 고소하게 퍼지고 있음에도 루이스는 이쪽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다 여전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루이스를 돌아봤다. 같은 공간에 단 둘이 있음에도 마주하지 않는 시선이, 꽃을 토할 정도로 좋아하면서 차를 마시는 취향 하나 모르고 있던 자신이 착잡했다. 그는 제 사소한 취향이나 습관을 알아채고 한 박자, 혹은 반 박자 앞서 배려해주곤 했다. 비록 차를 타준다거나 서류를 읽기 쉽게 정리해서 준다거나 설명이 필요한 일은 꼭 눈을 마주쳐가며 하는 사소한 친절에 불과하지만, 그런 친절도 다이무스에겐 크게만 느껴졌다.
빈 머그잔 하나를 다시 찬장에 올려놓은 다이무스는 제 몫의 커피를 들고 자리로 향했다. 얼음꽃을 토할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가슴 한 켠이 콱 막힌 것마냥 답답했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뜨거운 물이 상처에 닿아 쓰라렸다. 이도 저도 되는 일이 없다. 다이무스는 자조했다.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는 딱 제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큼 썼다.
애초에 바라면 안 되는 걸 바라고 있으면서 달디 단 디 상황에 취해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꽃이 나오지 않는 것은 지금 제가 느끼는 것이 그에 대한 애달픈 사랑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이무스는 다시 한 모금 커피를 머금었다. 본분을 잊어선 안 된다. 제가 여기 와있는 건 루이스와 사내연애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코어레너드의 행정사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다이무스는 서류철의 위에 붙은 루이스의 메모를 떼어냈다.
서류를 보고 있으니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와 인사를 건넸다. 다이무스는 그들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 괜한 생각은 일에 빠져있으면 잠시나마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검토를 마친 서류를 내려놓고 뻐근해진 눈을 감았다 뜨니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이며 졸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도 아니고 한 손엔 펜을 들고 고개를 수그린 채 그러고 있는 게 퍽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은 각자 제 할 일 하느라 바빠서 루이스가 졸고 있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라 다이무스는 주변을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내려둔 커피는 커피포트에 담겨있던 덕에 아직 따뜻했다. 찬장에 올려두었던 머그를 꺼내 커피를 따르기 전 뜨거운 물을 부어 컵을 데운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다 설탕을 두 스푼 넣고 적당히 휘저었다. 딱히 그의 차 취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카페인으로 잠을 깨고 머리에 당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탄 커피라고 합리화한 결과였다. 머그를 들고 루이스의 책상으로 가는 몇 걸음, 다이무스는 긴장에 마른 침을 삼켰다.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자 루이스가 화들짝 놀라 퍼드득 튀었다. 그 바람에 무릎으로 책상을 쳐서 커피를 쏟을 뻔 했지만 아직 다이무스가 손잡이를 쥐고 있던 덕에 기껏 해놓은 서류 위로 커피가 얼룩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피다 다이무스를 보곤 눈을 깜박였다.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그의 손잡이를 놓았다.
"아, 하하. 감사합니다."
잠시 들었다 놓는 바람에 테이블에 작은 소리가 나고, 뜨끈한 김이 오르는 커피를 본 루이스가 민망한 듯 웃었다. 슬쩍 눈을 휘며 짓는 눈웃음에 다이무스는 숨을 멈췄다. 차오르는 감정이 목구멍과 가슴을 두드리는 불길한 예감에 주먹을 쥔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서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제 자리에 놓아둔 서류철을 집어들고,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 꾸역꾸역 나오려는 걸 삼켰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자기주장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이무스는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트리위저드 시합 덕에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연회가 열렸건만, 찾는 사람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잘나신 호그와트의 챔피언님은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고, 망나니 동생녀석은 제 기숙사 녀석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벨져가 파트너로 데려왔던 여자애는 덤스트랭의 멍청이들에게 춤신청을 받아 홀에서 춤을 추는 중이었지만 벨져는 더이상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보여주기 위해 데려온 파트너였고, 두 곡이나 췄으면 충분히 가문의 영광이 될 터였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뒤로 묶고, 무도회 의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벨져 홀든은 열 넷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넘쳐흘렀다. 순수혈통 가운데서도 홀든이라 함은 귀족 중에 귀족이었고, 형제들 가운데서도 벨져는 귀족이란 어때야하는가를 몸소 보여주는 쪽이었다. 우아하고, 고상하고, 품격이 넘치는 귀족. 전쟁을 겪은 후론 머글태생이나 혼혈이라고 하는 잡종들이 많이 섞여들었지만 다른 순수혈통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벨져는 그들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벨져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격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편이었고,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잡종들과 순수혈통은 현격하게 구분되기 마련이었다. 불안을 느끼는 건 그들이 혈통만 믿고 나대는 나약하고 저급한 멍청이들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다. 물론 개중에도 조금은 봐 줄만한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벨져는 계단을 올라 연회장 안을 다시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기껏 옷까지 신경써서 챙겨줬건만 일찌감치 달아난 모양이었다. 벨져는 팔장을 끼고 계단을 내려가다 낄낄거리고 있는 동생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으악! 뭐하는 짓이야, 작은형!"
"루이스는."
"루이스? 우리 영웅님은 안 온댔어. 지금쯤 기숙사에 있거나, 아니면 도서관에 틀어박혀있겠지. 하여간 재미가 없다니까~."
예상대로의 대답에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썼지만 이글은 개의치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뺨도 붉고, 평소보다 더 들뜬 모양새가 한 잔 한 게 분명했다. 고작 열 세살짜리한테 누가 술을 준 건지, 다이무스가 바빠서 신경쓸 틈이 없으니 바로 꾀를 부리는 막내동생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자 갈기는 벌꿀색~."
"흥. 사고 치지 말아라."
"에이, 작은 형도 참. 됐으니까 가 봐."
"거기 너, 이리로."
루이스를 찾는다며 놀리는 대신 순순히 기숙사 문의 암호를 말해주는 게 아무래도 이미 살짝 맛이 간 모양이라 벨져는 주변을 둘러보다 옆 테이블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녀석을 불렀다. 턱을 치켜들고 손가락을 까딱이는 게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벨져는 상급생에게도 하대를 하는 사람이었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기자에게 둘러싸여 이글이 무슨 짓을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뻔했고, 루이스라면 또 모를까 그리핀도르의 다른 멍청이들은 같이 사고를 치면 쳤지 말릴 종자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빌어먹을 자식이 여기 있었으면 이럴 필요도 없지만, 하여간 만악의 근원같으니. 벨져는 한숨을 쉬는 대신 혀를 찼다. 그래도 녀석들과 자주 어울려다니던 후플푸프의 꼬맹이를 붙여두면 집안 망신은 피하겠지 싶었다. 벨져는 벙쪄서 달려온 녀석에게 이글을 잘 지켜보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연회장을 뒤로했다.
그리핀도르 남자기숙사의 뚱뚱보 여인은 예복을 차려입은 벨져를 호들갑으로 맞았다. 그걸 상대하느라 골을 썩이다 겨우 안으로 발을 들이자 캄캄한 어둠이 벨져를 맞았다. 밝은 조명에 익숙해진 눈이 적응을 못 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벽을 짚고 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이 어른거리고, 푸르스름한 달빛을 맞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먼 곳을 향하는 눈동자가, 갸름한 턱선과 목이 벨져의 눈을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스웨터에 면바지 차림이건만 요정 벨라의 피를 이었다는 보바통의 챔피언같은 건 순식간에 지워져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창틀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창밖의 눈을 보는 루이스는 어둠 속에 홀로 빛나고 있었고, 벨져는 그를 보며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제게 향하는 눈동자에 숨을 집어삼켰다.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야, 벌써 돌아왔..., 벨져?"
"하,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시길래 나오지도 않나 했더니. 파트너를 못 구해서 틀어박힌 거냐?"
"그러는 넌?"
별로 달갑지 않은 루이스의 반응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아무래도 그리핀도르의 녀석들이 기숙사 안에 무슨 향이라도 피워놓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녀석을 보고 두근거릴 리가 없거니와, 아름답다고 생각할 리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께서 친히 납셔주셨는데 반가워하지는 못할 망정 떨떠름한 얼굴을 한 루이스가 흘러내린 스웨터의 소매를 올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등을 덮고 있던 스웨터의 소매가 올라가며 드러난 손목에 침을 삼키다 여기까지 온 목적을 떠올리고 눈에 힘을 줬다.
"사람의 호의를 무시한 정의로운 그리핀도르의 영웅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겨우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겨우라니, 네 녀셕! 그게 얼마짜린데!"
벨져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며 빈정거리자 루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순간 열이 뻗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이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두어번 깜박였다. 벽난로의 불빛이 닿는 것도 아니고, 보름인 것도 아닌데 속눈썹이 떨리는 것까지 선명했다.
"오다 주웠다며."
"윽...!"
허를 찔린 벨져가 그대로 움찔했다. 영웅이네, 뭐네 해도 루이스는 성조차 없는 고아였고, 당연히 이런 연회에 입을 좋은 예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안 그래도 트리위저드 시합때문에 바빴고, 이글은 종일 같이 다닌다 해도 그런 데 신경쓸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레번클로의 반장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녀가 챙겨줬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녀 성격에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전남친에게 예복같은 걸 챙겨줄 리 없었다.
더구나 루이스는 무도회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다들 무도회 파트너를 구하느라 바쁠 때도, 여학생들이 각자 드레스를 준비하느라 분주할 때도 다이무스랑 도서관을 향하는 게 고작이었다. 트리위저드 시합이 시작된 이후로 다이무스 홀든이 친동생들보다 그를 더 가까이 두고 자문을 구한다는 건 호그와트 학생은 물론 보바통과 덤스트랭의 학생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후줄근한 꼴로 연회장에 나타난다면 다이무스는 물론 홀든과 호그와트의 위신에까지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제 형은 물론 교수들에 본인까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길 한 번 이겼던 녀석인데, 얼굴도 멀쩡한 녀석이 후줄근한 꼴로 다니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결국 벨져는 자신을 위해서,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 내키진 않지만 따로 주문을 넣었다. 그게 벌써 이주 전의 일이었고, 지난 주엔 벨져 앞으로 도착한 옷상자를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루이스에게 던져주었다. 죽어도 널 위해 준비했으니까 곱게 입고 나오라는 말은 할 순 없었기에 별 걸 다 생각하다 뱉은 말이 오다 주웠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믿다니. 이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멍청한 수준이 아닌가.
말문이 막힌 벨져가 초조해진 나머지 입술을 핥았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꺼내 보지도 않았나?"
"오다 주웠다며."
그걸 믿냐, 이 멍청아!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어떻게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지? 차라리 이글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다못해 이글 녀석이 이런 소리를 하면 한 대 칠 수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상급생이고, 그리핀도르고, 루이스였다. 어느 기숙사가 안 그러겠냐만은 슬리데린이 그리핀도르를 건드려봤자 오랜 앙금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벨져는 가문의 위신과 형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참았다. 참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잡종새끼같으니."
"시비를 걸러 여기까지 온 거라면 돌아가."
"하..., 사람이 기껏 준비해줬으면 고맙단 말은 못 해도 입어는 보는 게 예의 아닌가!"
벨져는 어느새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자식을 상대하고 있으면 느는 건 짜증과 두통밖에 없다. 루이스는 창틀에 앉은 그대로 미간을 찌푸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괘씸하기 짝이 없어 더 성질이 뻗쳤다.
"알았어. 입어보면 될 거 아니야."
"완전 엎드려 절받기가 따로 없군."
"절을 받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빈정 상하게 비비 꼬지 말고."
루이스는 가볍게 창틀에서 뛰어내려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아래에서 일주일 전 건네준 상자를 꺼낸 루이스는 무표정으로 뚜껑을 열었다. 벨져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재질의 예복은 얼마 전 퀴디치 선수복을 새로 맞출 때 잰 사이즈를 어렵사리 얻어내 맞춘 것이었다. 벨져의 안목은 높은 편이었고, 미적 감각도 뛰어났다. 분명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며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상자에서 조심스레 옷을 꺼내든 루이스가 벨져를 흘긋 쳐다봤다.
"문제 있나?"
"...한 둘이 아니어서 어디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흥."
벨져는 자신만만하게 코웃음쳤다. 껄끄러워하는 루이스의 표정에 조금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곤 포기한 듯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었다. 스웨터 안에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까지 벗자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에 등부터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살을 보일 일도, 볼 일도 거의 없는 벨져는 마구 벗어제끼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무미건조하게 옷을 벗는 루이스의 표정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삐쩍 말랐을 줄만 알았는데, 팔뚝이나 옆구리 선이 제법 탄탄하면서도 얄쌍했다.
드레스셔츠를 집어들고 팔을 넣은 뒤 단추도 채우지 않고 소매부터 만지는 루이스의 얼굴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냥 옷을 입는 것 뿐인데, 살짝 내리깐 눈이 묘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벨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아노 건반을 치듯 팔뚝을 토도독 두드리며 누구의 것인지 건너편 침대에 걸터앉자 루이스가 단추를 여미고 바지를 벗었다.
평범한 검은색 브리프에 감싸인 엉덩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벨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셔츠 위로 도드라진 견갑골이, 바지를 입느라 등을 숙이는 바람에 드러난 허리가, 바지를 올려도 여전히 탱탱한 엉덩이가 벨져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은 물론, 아랫배 그 아래에도 피가 쏠리는 바람에 벨져는 다리를 꼬았다. 아무래도 그리핀도르 녀석들이 다른 기숙사 학생들을 골려주려 이상한 향을 피우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벨져가 입가를 매만지는 사이 루이스는 벨트를 채우고 베스트를 걸쳤다. 거기에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테일코트까지.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신은 루이스의 뒷모습은 가히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봐줄만 했다. 제 작품에 흡족해진 벨져가 크게 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넥타이를 매며 뒤돌아섰다. 평소에 짓는 얼빵한 표정 대신 서늘한 무표정이 검은 예복에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불편해. 연회장에 나갈 것도 아니고. 이정도면 성의 표시는 한 거잖아. 아니면 뭐가 더 필요해?"
"멍청한 새끼...."
벨져가 낮게 목소리를 끌자 루이스가 인상을 썼다. 벨져는 그를 마주 노려봤고,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루이스 주제에 자길 내려다보는 것도 영 탐탁지 않았다. 기껏 예쁘게 꾸며줬더니 바로 벗으려 하지 않나,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해도 이건 도리가 아니었다. 벨져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자 루이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싸우고 싶진 않다."
"누가 싸우자고 했나?"
"지금 네가 시비 걸고 있잖아."
"흥, 격이 떨어지는 상대와 싸울 가치도 없다."
"하아.... 그래, 다 봤으면 돌아가."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빈정이 상한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평소같았으면 이쯤에서 제 신경을 박박 긁었을 텐데, 순순히 제 말을 따르는 것도 모자라 피하려 드는 게 영 마음에 걸렸지만 계속 상대하다간 저만 우스워지는 꼴이었다.
"옷은 고마워.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뒤돌아서 나가려 걸음을 옮기는 벨져의 뒤로 루이스의 목소리가 닿았다. 벨져는 멈칫했을 뿐 뒤돌아보지 않았고, 루이스는 더 잡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벨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복도의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자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