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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2014/12/15
* 미공개분 추가
그 후로 벨져는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가지 않았다. 병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이글에게 루이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제가 얼마나 얼간이같은 행동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후였다. 이글이 가끔 흘리듯 내놓는 소식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미 그걸로 끝난 일이라면 더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고, 거부한 것은 그 멍청한 여자다.
그걸 다 아는데도 신경이 쓰이는 건, 분명 답지않게 처연한 표정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해버린 그 공허한 눈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벨져의 양심을 자꾸만 괴롭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날 그 병실, 희고 슬프게 빛나던 그녀가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으로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하긴 했지만 분노와 굴욕에 잠 못이루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안 좋았다. 왜 제 오만의 대가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짊어져야하는가. 왜 그 빚을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결국 멤돌던 상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은 벨져는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루이스의 목소리가, 표정이, 그 날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벨져는 분에 못이겨 젖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곤 검을 검집에 넣었다. 셔츠를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향한 벨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다짜고짜 찬 물을 틀었다.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것같은 냉기에 벨져는 몸을 떨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자기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주면 그만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 *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정중했다.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얼마 없기에 루이스는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등을 세워 고쳐앉았다. 병실에 하릴없이 가만 앉아있는 것도 고역인지라, 손님의 방문이 반가웠다.
“들어오세요.”
“실례하지. 잘 지냈나.”
“어제랑 똑같아요.”
은행 업무를 보다 퇴근한 듯한 다이무스는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권했고, 다이무스 역시 사양않고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가 깨어난 지도 벌써 이주. 그동안 다이무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루이스를 찾아왔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을 매번 내치기도 미안하거니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퍽 지루해 그의 방문을 허락한 게 열흘째였다.
“흠. 식사는 했나?”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네요.”
“제대로 안 먹었단 소리로 들리는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루이스는 저를 타박하듯 보는 다이무스의 눈빛에 대답 대신 슬쩍 웃어보였다. 어제도 했던 대화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원밥은 정말 맛이 없으니까요.”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군.”
제가 했던 소릴 그대로 돌려주는 무뚝뚝한 말투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동생이 둘인 맏형답게 사람을 챙기는 데 세심했지만 또 그만큼 단호했다. 루이스는 그의 두 동생들만큼 그에게 익숙하지 못했고, 투정을 부릴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식욕도 없고, 환자식은 정말 맛이 없었지만 결국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고 항복 선언을 했다.
“저녁은 꼭 다 먹을게요.”
“나머지 식사도 거르지 말도록.”
루이스는 빙그레 웃으며 이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작은 형때문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해주는 대로 내버려둬. 안 그럼 더 귀찮아질걸? 혹시 몰라, 사과도 토끼 모양으로 깎아줄지.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속 편한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요 며칠 다이무스 홀든을 겪어본 바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다이무스 홀든이 제 명의로 메이드와 하인이 하나씩 딸린 집 한 채를 해주겠다며 서류를 들고 왔을 때도 그렇지만, 루이스는 그의 이런 행동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몸이 먼저 움직인 것 뿐이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저를 찾아왔던 그를 떠올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양말고 말해라.”
“아뇨. 괜찮아요. 거기까지 신경쓰지 말아요.”
다이무스는 틈만 생기면 뭔가를 해주려했지만 루이스는 그 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능력과 맞바꿀만한 게 있을 리 없다. 더구나 루이스는 그에게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주는 모든 것은 갚아야 할 빚이 된다. 안 그래도 안타리우스가 다시 일어나고, 회사와 연합 안에서도 분쟁이 생기는 마당에 괜한 의혹을 사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걸 모를 다이무스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다는 건 분명 그 역시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그쪽은 좀 어떤가요.”
“...글쎄.”
두루뭉술한 질문과 답. 다이무스는 답하기를 회피했고, 루이스는 더 묻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큼.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쉬어라.”
“조심히 가세요.”
불편해진 자리를 먼저 피한 건 다이무스였다. 루이스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게 당연했다. 온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 며칠간 이어진 일상이었다. 루이스는 그를 붙잡지 않았고, 다이무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합의 검과 회사의 검. 그걸로 충분하다. 루이스는 거기에 괜한 채무관계가 더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열리던 것처럼 조용하고 묵직하게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풀썩 누워버렸다. 등의 상처는 아직 욱신거렸지만 가만히 천장을 보며 숨을 마시고 내쉬는 동안 차츰 가라앉았다. 손을 들어 얼음 결정을 만들려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능력은 묵묵부답이었다. 루이스는 멀끔한 제 손을 슥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 * *
귓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루이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그랬냐며 따져묻는 그의 얼굴엔 특유의 시니컬함도 여유도 없었다. 속내를 감출 생각도 않고 또 다시 깨진 자존심에 분노하는 벨져 홀든. 이성을 잃은 채 던진, 순수해서 더 알 수 없는 의문에 루이스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거 산에서 길길이 날뛰던 때도, 영웅이라 불리는 동안에도 그 승리를 얻은 건 전부 자신과 엔지의 조언 덕이라고 생각했지 그에겐 별 감정이 없었다. 자신과 동료를 죽이려던 이에게 정당방위로, 어렵사리 살아나갈 길을 만든 것 뿐.
그런데 왜, 토마스가 아닌 벨져를 감쌌을까. 병실에 누워있는 내내 그 생각을 했지만 끝은 언제나 한숨을 내쉬는 걸로 끝났다. 그저 평소처럼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다른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그 순간의 판단때문에 너무 큰 것을 잃고 말았지만.
루이스는 처음 깨어나던 순간을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아팠고, 그 통증에 제 가슴을 관통하던 날카로운 칼날과 자욱하게 깔리던 연기가 떠올랐다. 그 다음은 다시 칠흙같은 암전. 진통제와 수면제에 의존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깨어나고 잠들길 반복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루이스를 반겼다. 붉어진 눈시울의 앤지가 내뱉던 떨리는 목소리. 몰라볼 정도로 강해진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휴톤이 참담한 표정으로 낮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이스는 그 사망선고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고, 시트를 그러쥐며 결정을 맺으려 했다. 얼어붙어야할 시트는 루이스의 손 안에서 구겨질 뿐, 손에선 한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루이스는 병실 안에 걸린 온도계를 발견하고 다시 웃었다. 급격히 밀려드는 오한에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끌어안고 숨을 삼켰다.
이제와서. 왜 지금에서야. 순간적으로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떠오르는 동료들의 얼굴,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고 했던 맹세. 루이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충격이 너무 크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더니 정말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다. 제게 향하던 기대와 시선에 뭐라 대답해야 할까. 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곧 능력자로서의 삶이, 영웅이라는 이름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영웅이라는 이름에 따르는 책임과 기대에 짓눌려 괴로웠고, 그들을 저버릴 수 없어 힘들어하며 짐이 줄기를 바랐지만 이런 식의 끝은 아니었다. 제가 거리의 고아로 자라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름의 사명감과 벅찬 뿌듯함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고, 루이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던 능력을 잃었다. 그 상실감은 다른 어떤 걸로도 채워질 수 없었지만 루이스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쓰게 웃으며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병실을 찾아오는 이들을 맞았다. 한창 행동을 조심해야할 앤지는 세 번이나 직접 찾아왔고, 보통 사람처럼 온기를 머금은 손을 꼭 잡으며 연합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으니 걱정말라며 비서직을 제안했다.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잔뜩 붉어진 눈과 코를 하고 들어온 토마스는 애써 눈물을 참다가, 결국 채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전부 자기 때문이라며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같이 온 잉게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레베카는 루이스를 복돋아주려고 더 밝은 척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때가 다 되어 찾아온 트리비아와 이글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지친 트리비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잘 얘기하라고 휙 나가버리고, 답지않게 쭈뼛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리고는 루이스의 침대 가에 앉았다.
“좀 어때.”
“별로.”
“그..., 작은형은 왔다 갔어?”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이글의 진지한 목소리가 낯설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뒤통수를 벅벅 긁적이던 이글은 온몸으로 자신이 덩달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루이스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꾹꾹 눌러삼키고 고개를 가로저은 뒤 말했다.
“별로 탓한다거나 원망하지 않아.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아이씨, 지금 누가 잘잘못 따지재?!”
“그럼 뭘 해야 하는데?”
루이스의 날카로운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글은 눈을 크게 뜨고는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벨져 홀든은 목숨을 잃거나,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할 지라도 능력을 잃었을 것이다. 벨져를 대신한 시점에서 홀든은 루이스에게 빚은 진 셈이었다. 이글은 한숨을 내쉬며 입가를 매만졌다. 적잖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루이스에게도 불편했다.
“내가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지. 연합의 영웅님은 이치를 따지는 덴 젬병이니까.”
이글이 연합에 투신한 이후로 죽 서로를 봐 온 두 사람이었다. 이글은 루이스가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었고, 루이스는 이글의 한량같은 모습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았다. 처음엔 호기심, 그 다음은 호의.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동료의 유대. 이글은 함께 지내온 세월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루이스를 잃는다는 것은 곧 등 뒤를 지켜줄 믿음직한 동료를 잃는다는 말이었다.
이글은 루이스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 언제나 미련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랐다. 언젠가 바스라지고 꺾여버릴 지라도 그 등을, 영웅의 상징과도 같아져버린 후드를 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 도사리는 불안과 초조한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그 순간의 뿌듯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글은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루이스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했다. 그 중에 으뜸이어야 하는 사람은 물론, 이 자리에 없는 제 작은 형이었다.
“소식은 전해줄게. 안 그런 척 엄청 불안해하고 있거든.”
이글은 슬쩍 미소를 머금곤 주먹을 내밀었다. 공성을 만족스럽게 치르고 나면 으레 그러하듯이.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링거 바늘이 꽂힌 손을 쥐어 이글의 주먹에 맞부딪쳤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이글은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 그가 찾아왔다.
“하아....”
루이스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쁜 짓이라기보단 애를 울린 쪽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신경이 쓰였다. 차마 동료들 앞에서 내보일 수 없던 억울함과 불안,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절망을 그에게 쏟아부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상처입는 게 빤히 보이는 벨져 홀든이라니, 전 같았으면 쓸 데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등을 돌려 문을 나가기 전, 벨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때 그는 자기가 더 억울하고 아프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보였다. 꾹꾹 울음을 집어삼키는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그녀 자신 조차 의뭉스럽지만, 그래도 만나야 제 안에 또아리 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이제 곧 퇴원이니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도 신중히 생각해야 했다. 다이무스는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그건 받을 수 없었고, 공성은 못하더라도 연합의 일을 하거나, 서점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이글은 연합의 마스코트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건 이미 예전부터 하고 있는 일에 불과했다. 이런 시기엔 일자리를 구할 수만 있어도 행운이었다.
루이스는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밀린 집세와 새로 들어왔을 책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서류는 잉게나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겠지만 이런 사적인 부분까지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울적해진 루이스는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스며드는 익숙한 한기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찬 바람이 루이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흔들었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얼음 결정은 맺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며 제 속에 가둔 공기를 내보낸 루이스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한 번 잃은 것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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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2014/12/09
*마지막이 될 뻔 했던 미발 원고.
벨져는 걸음을 서둘렀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벨져는 정보를 부정했다. 제 앞을 가로막던 작은 몸과 시야를 붉게 물들이던 선혈과 그 뜨끈하고 비릿한 감각이 되살아나 입술을 깨물었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지던 다리와 힘없이 가늘게 흩어지던 머리카락이 지금도 느릿하게 흘렀다.
그 전부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몸을 던져 지킨 사람이 벨져 홀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원이 도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급로를 지키던 건 벨져와 연합의 다른 결정사 마에스트로였다.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토마스 스티븐슨은 실전이 처음인지 연신 불안해하더니 결국 뒤를 노리던 강화인간의 등장에 당황해 도움이 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라고 해도 이미 공포에 하얗게 질린 얼굴에 벨져는 검을 빼들었다. 사실 벨져에겐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네 명 째를 처리 했을 때였다. 급습을 각오한 것 치고 너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께름칙했다. 본디 기습은 두 번 통하지 않는 법. 벨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마에스트로에게 다가가려 발을 뗀 순간 쓰러진 강화인간들이 폭발하며 검붉은 안개가 퍼졌다.
재빨리 스카프를 풀어 코와 입을 막았지만 이미 몸의 반응이 둔해진 후였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서는 강화인간들은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뜯어고친 건지, 몸에서 태엽과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게 노인의 나무인형을 떠오르게 했다.
트루퍼가 해체되며 내뿜는 안개가 능력자를 강화시켜준다면, 이것들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한 번 더 복구되는 게 영 성가셨다. 핵을 완전히 부수지 않으면 동력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회복을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라 검 두 자루를 바투 쥐었다. 토마스가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에 제 가정이 맞음을 확신한 벨져는 확연히 둔해진 몸을 움직였다. 신체강화능력을 잃어도 홀든은 홀든. 겨우 기계 따위에 질 리가 없었다.
문제는 소형화된 기계들이 다 제각기 다른 패턴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감각에 입술을 악물며 두 번째 기계의 팔다리를 베어냈을 때, 멀리서 절그럭거리던 기계가 포탄을 쐈다. 원상태였다면 장치를 베어내고 그것마저 피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포탄에 맞은 벨져는 그대로 주르륵 쓰러졌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나머지 내상에 울컥 피를 토했다.
루사나 수도원에서 봤던 강화인간마냥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장착한 채 다가오는 기계가 하나, 또 다시 포탄을 쏠 준비를 하는 기계가 또 하나. 벨져가 이를 악물며 검을 쥐었으나 팔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벨져의 움직임을 더뎌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은 동시에 전에도 겪었던 참혹한 패배가 떠올랐다. 빠른 도약과 함께 흩날리던 머리카락, 결연한 빛을 띤 붉은 눈동자.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기억이 하필이면 뼈저린 오점이라니. 허무하고 어이없어 코웃음쳤을 때였다.
‘샤드!’
순간, 그 때가 떠오른 건 비단 벨져의 회상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쨍그랑,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포를 쏘려던 기계가 와르르 부서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은 여전히 벨져에게 향해있었기에 무릎을 세우고 검을 들었으나 순간 어찔하게 찾아온 현기증에 눈을 찡그렸을 때,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벨져의 얼굴에 튀었다.
비틀거리던 루이스가 피를 토하고, 다시 한 번 쨍한 파열음이 귀를 두드렸다. 그녀의 몸을 관통한 칼날이 기계팔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수상쩍은 안개를 내뿜기 시작했다. 부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가고, 루이스의 등에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다리가 무릎부터 털썩 무너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찰나의 시간이, 벨져에겐 늘어진 필름마냥 느릿하게 흘렀다. 단 일 초도 놓치지 않고 새겨진 기억은 벨져 홀든의 오만의 대가였다. 이미 한 번 그녀를 통해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이면.
급한 대로 재킷을 벗어 상처부위를 눌러 지혈을 해보았지만 이미 전방에서 구르다 온 루이스는 정신을 잃은 후였다. 지원부대가 도착해 그녀를 데려가기 전까지 벨져는 저를 감싼 멍청함을 책망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감정은 벨져 홀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빚을 졌다. 이번엔 그냥 오만함의 대가를 치렀다는 말로 넘어갈 수 없었다. 벨져가 그녀에게 치러야 할 것은 제 목숨값이었다. 그걸 알기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큰형을 만났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소식을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온 동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벨져는 말을 꺼내길 주저하는 동생을 채근했다. 참담한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글의 멱살을 잡았다. 죽었다는 말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 그리 여겼건만, 벨져는 마침내 입은 연 동생의 말에 순간 아득해졌다.
숨을 밭으며 실소를 흘리자 대번에 인상을 쓰며 저를 노려보는 이글의 표정에 손을 놓았다. 그럴 순 없었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라는 말에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무시하면 그뿐이었다.
도착한 병실 앞. 문 옆에 쓰인 그녀의 이름에 벨져는 숨을 골랐다. 문고리를 돌려 열면 그만인데도 쉬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려오긴 했지만 마주하는 데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벨져는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창에서 빛이 쏟아져 눈을 찡그렸다 뜨자 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흔드는 머릿결이, 그녀의 뒤에 퍼지는 빛이 눈이 부셨다. 바람에 실려 온 약냄새에 벨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오만했음을 시인했다.
능력을 잃었음에도, 루이스는 그 삭막한 병실 안에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너…!”
그림같은 풍경에 잠시 멈춰 섰던 벨져는 태연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그게 무슨 태도냐고 따지려다 다시 입을 다문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루이스의 태도 때문이었다. 제가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벨져는 순간 제 막내동생이 또 질 나쁜 농담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벨져가 진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벨져는 말을 골랐다. 도대체 이 사람을 어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죄책감을 닮은 온갖 착잡하고 꿉꿉한 감정들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이 이어졌다.
단조롭고 삭막한 병실 안, 루이스만 홀로 색을 띠었다. 푸른빛이 도는 잿빛 머리카락도, 흰 피부도, 그리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 루이스의 그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에 벨져는 마른침을 삼켰다. 침묵 속에 감정을 내보인 게 저뿐이란 생각에 분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이제 루이스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이냐.”
“알고 온 거 아니야? 부인하고 싶은 거라면 대답해줄게. 사실이야.”
딱 잘라 선을 긋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루이스를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그 벨져 홀든의 얼굴은 잔뜩 경직되고, 오만하게 타인을 내려보던 눈동자 역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결정사 루이스는 이제 없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 씁슬하고 아픈 미소에 벨져는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돌아가.”
단호한 축객령에도 벨져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루이스가 언뜻 내비친 그 뼈저린 상실감은 저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벨져는 그녀가 잃은 것을 되찾아줄 수도 없다.
“왜 그랬지.”
그래서 벨져는 물었다. 이대로 고분고분 루이스가 하는 말에 따라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하는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벨져에게서 고개를 돌렸던 루이스는 크게 숨을 내뱉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그녀를 마주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가까이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벨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이스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가 저를 구한 이유를 구했으나 끝끝내 답을 얻지 못한 벨져였다.
“글쎄.”
“얼버무리지 마라.”
“…너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누군가를 지키는 건, 습관같은 거야. 그 날부터 쭉.”
그 날. 벨져는 루이스가 말하는 그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말도, 지킨다는 것도 다 연합의 동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벨져는 루이스가 지키는 울타리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벨져에게 루이스는 유일무이한 패배를 안긴 사람이었고 벨져는 한 때 그녀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이었다.
서로의 목을 노리는 사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스와 벨져 사이엔 유대감이라 부를 것도 무엇도 없었다. 덕분에 벨져는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지는 동시에 설욕의 기회를 잃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증오와 분노가 섞인 말을 내뱉으며 원망하는 편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루이스를 대하는 건 그녀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우리가 그런 사이였나?”
“네게 받은 이름, 돌려줬다고 생각해.”
그래서 벨져는 일부러 날을 세웠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이번에도 자신이 될 것 같아 비아냥거렸지만 루이스는 전보다 더 두터운 얼음벽을 두른 채 벨져를 밀어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무엇도 바라지 않을 뿐더러 되려 오래전 진 빚을 청산한 거라 말하는 루이스 앞에 벨져는 무력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 한단 말인가.
“하, 건방떨지 마라. 이렇게 내숭떤다고 네게 남는 게 뭐가 있지? 내가 괴로워하길 바라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홀든? 원하는 게 있어서 꾸민 일인 거 아닌가? 얼마든지 주지. 그러니까 말 해!”
“윽…!”
성큼 다가간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올리고 소리쳤다. 환자고, 여성이란 것도 잊고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벨져에겐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차가운 눈동자에 잔뜩 일그러진 벨져의 얼굴이 비쳤다.
“없어.”
벨져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환자복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우악스런 멱살잡이에 끌려왔던 루이스는 목 언저리를 만지며 콜록거렸고, 벨져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움찔 입가를 씰룩였다. 흐트러진 환자복 안으로 흘긋 보이는 붕대와 손목에 꽂힌 바늘, 피가 역류하는 튜브. 워낙에도 희긴 했지만 백지장처럼 핏기가 가신 얼굴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벨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콜록, 흐…….”
제가 한 짓이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선 벨져는 제 분에 못이겨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한 상대를 앞에 두고 길길이 날뛰었던 건 그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그 때는 상황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왜, 잘 된 거 아냐?”
침착함을 유지하던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 벨져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젠 ice도, 영웅도 죽었으니까!”
악을 쓰듯 내뱉는 말은 그녀의 결정검만큼이나 날카롭고 시렸다. 벨져를 구한 대가로 루이스가 치른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신경을 다친 채로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다시는 뛸 수 없다고도 했다. 사이퍼에게 능력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아주 잘 알았다.
힘을 바라며 모여드는 비능력자들, 그 욕망을 이용한 조직. 전쟁 이후로 꾸준히 그들을 쫓았던 벨져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전쟁 이후로 책임과 기대를 떠맡으며 영웅이 된 사람이었다. 영웅 루이스가 벨져 홀든을 구하고 능력을 잃었다. 사실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신문 1면에 실릴 헤드라인으로 이것보다 더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벨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이게 질 나쁜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깨고 말 하룻밤의 꿈이라면 그걸로 끝일 텐데. 하지만 입을 앙 다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은 이게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일깨웠다.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친 그녀 앞에서 벨져는 입이 두 개 라도 할 말이 없었다.
“비웃으려면 지금 해. 어차피 앞으로 계속 들을 테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뒤돌아섰다. 도망치듯 병실을 나와 어떻게 쉬었는지 모를 숨을 토해냈다. 최악.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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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감사합니다
2014/11/09
* 전력 60분: 주제 - 감사합니다
여덟시 반, 루이스는 책상에 앉아 아직도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은 조합체제로 돌아가다보니 수확철이 되면 각지에서 식료품과 장부가 도착하는데 그걸 형편에 맞게 분배하는 건 전부 본부의 일이었다. 덕분에 앤지는 물론이고 공성에 투입되는 사이퍼들까지 가을만 되면 정산에, 예산 분배, 그리고 각지에서 밀려드는 요청까지 받아주느라 정신이 없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바쁜데도 일처리에 도움이 안 된다거나, 정보의 유출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정산과 사무처리에 투입되는 인원은 적었다. 새사람을 투입하는 것도 아니라서 결국 하는 사람만 하는 일에 벌써 육년째 끌려다닌 루이스는 이제 이 서류지옥에서 빠져나가길 반쯤 포기한 후였다. 처음엔 의욕에 넘쳐서 연합을 재건하는 일이란 생각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더랬다. 지금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반, 이렇게 된 걸 어쩌겠냐 하는 체념이 반이지만.
게다가 오늘은 리버포드에서 크게 불꽃놀이를 한다며 대대적으로 광고한 날이었다. 리버포드가 회사 영역이라곤 해도 축제는 축제인 법. 더구나 먹고 살기 힘든 와중에 이런 식으로 거리에 활기가 도는 건 오랜만이라 해가 지기도 전에 자리를 잡으러 간 연합원들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계속되는 업무에 지친 사람들이 낮부터 하나 둘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나도 불꽃놀이....'같은 말을 중얼거리거나, 서류 끄트머리에 나가고싶다는 말을 끄적였다. 그리고 언제 작당을 한 건지 저녁 시간이 가까워오자 하나 둘 저녁 먹으러 간다는 말과 함께 슬금슬금 사무실을 빠져나가버리고, 결국 남은 건 루이스와 잉게 나이오비뿐이었다.
루이스는 제게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후배의 괘씸함과 자길 쏙 빼놓고 가버린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에 더 우울해졌고, 잉게는 며칠 전부터 같이 불꽃놀이가 보고싶다고 한 엘리때문에 멀쩡한 펜을 두 개나 망가뜨리고 말았다. 와드득, 연필이 부서지는 소리에 루이스는 슬쩍 엘리한테 가보겠냐고 운을 띄웠다. 이대로 제대로 업무를 할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그냥 두면 기껏 며칠동안 고생해서 만든 지출계획과 회계장부가 잿더미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운을 띄우자마자 피곤과 근심이 드리웠던 잉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루이스는 얼른 코트를 집어들며 혼자 괜찮겠냐 묻는 잉게에게 말없이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게 벌써 한 시간 전, 루이스는 장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아홉시에 시작이라고 했으니 아직 삼십분쯤 시간이 남은 셈이지만 이쯤이면 다들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어둠이 내린 창밖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피식 웃었다.
평소에도 이 시간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라 지금도 사무실에 있을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는 전화기를 들고 머리보다 손이 먼저 기억하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대기중 연결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 홀든입니다. ]
"역시, 아직 사무실이군요."
[ 흠.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다. ]
"당신이요? 불꽃놀이라도 보러 가는 건가요."
[ 그러는 너는? ]
"하아, 사무실이에요."
보통은 다이무스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루이스가 서점에서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뒤바뀐 처지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루이스는 수화기를 든 채로 눈가를 쓸었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은 언제나 말을 뱉은 후에나 드는 법이었다.
[ 사무실이라, 혼자인가보군. 나와라. ]
"네?"
[ 틀린가? ]
무뚝뚝한 억양과 고압적인 태도때문에 명령처럼 들리는 말에 루이스가 놀라 물었음에도 다이무스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읽힌 느낌이라 멋쩍어진 나머지 귓가를 긁적였다. 사실 나가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지금 데이트하자는 건가요."
[ 삼십분 뒤, 노던브릿지 중간에서 보지. ]
"다이무스?"
다이무스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바람에 루이스는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전자음을 들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시계를 봤지만 그런다고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도 아니라서,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곤 의자에 걸쳐뒀던 후드를 집어들었다. 삼십분 안에 리버포드까지 가려면 서둘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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