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고 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도 멈춰서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뛰었다. 살기위해선 뛰어야 한다. 흰색 방호복의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은 움직임이 둔하고 느리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과 골목을 달리던 소년은 발 아래 자욱하게 깔린 흰 안개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소독약이라고 불리는 가스가 소독약이 아닌 것쯤은 다운타운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른아이 할 거 없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소년은 급히 뒤를 살폈다. 방호복을 입은 청소부들은 다가오고,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코와 입을 가리고 가스가 퍼지고 있는 쪽으로 달렸다. 청소부들이 붙은 이상 추격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가스를 향해 돌진할 거라곤 생각을 못 할 테니 잠시 그들의 눈을 피해있다가 도망치면 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게 깔린 흰 가스는 작은 몸 하나 쯤은 충분히 가려줄 터였다.
가스의 밀도가 가장 높은 쪽으로 달리던 소년은 따가운 눈을 깜박이다 결국 눈을 감았다. 벽에 손을 대고 뛰다 보니 숨이 가빠왔지만 피할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눈을 떴지만 하얀 가스밖에 보이질 않고, 너무 달린 탓에 입에선 단내가 났다.
그래도 맞아죽는 것보단 나을지 몰라. 소년은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입과 코를 가렸지만 가스의 농도가 높은 곳으로 뛰어든 탓인지 벌써 어지러웠다. 하다못해 고백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제게 말을 걸어주곤 했던 여자애를 떠올리며 후회해보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에 아찔한 현기증이 소년을 덮치고, 다리가 무너지면서 작은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밖보다 깨끗한 공기에 숨이 트였다. 공기를 들이마시느라 무방비하게 널부러진 소년 앞으로 사람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도움의 손길인지, 죽음의 사자인지 모를 발소리는 코앞까지 다가와 소년의 배를 찼다.
“큭, 흐억…!”
강한 충격에 구르는 사이 문이 탁 닫히고,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당장 문 하나를 경계로 앞이 분간이 될 정도로 가스의 농도가 옅다. 다운타운엔 이정도까지 가스를 막을 수 있는 기술도 자제도 없다. 소년은 제가 찾아온 곳이 제 무덤이 될 것을 직감했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가스를 들이마신 몸은 뜻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하, 쥐새끼 한 마리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군.”
머리채가 쥐어잡히고, 두피가 당겨지는 고통에 손을 뻗었지만 바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른 소년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흰 방호복을 입은 그의 눈이 새파랬다.
“흐응. 뭐냐 그 눈빛은. 치워라.” “…사람이네.”
소년은 눈을 깜박였다. 방호복을 입은 청소부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였다. 오싹한 레이저가 몸을 훑고, 오염 정도에 따라 제거하거나 소독한다. 어느날 예고도 없이 닥쳐온 재앙은 으레 하는 얘기처럼 전쟁도, 외계인도, 자연재해도 아니었다.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세균은 빠르게 번졌고, 인간은 무력했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그 나름의 생존법을 강구했지만 그것은 전부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소위 청정지역이라 불리는 방호시설을 만들고 거기에 틀어박혔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혹시나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 하나로 연구시설과 청정지역 근처에 판자촌을 구성했다. 청정지역, 연구시설, 판자촌, 그리고 그 변방.
재앙이 닥치고 두 세대가 지난 지금은 사는 지역이 곧 계급이자 신분이었고, 소년이 사는 곳은 변방의 다운타운이었다. 끔찍하다고 일컬어지는 변방, 밑바닥 중의 밑바닥인 다운타운의 거리에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들은 해충이라 불렸다. 해충을 처리하는 데 사람의 손을 쓰는 것조차 아깝다고 선포한 대통령이 청소부를 보내기 시작한 게 삼 년 전. 그 이후로 소년은 방호복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무례하군.” “눈, 되게 예쁘다.”
솔직한 감상에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움찔하더니 팔짱을 꼈다. 두꺼운 옷 때문에 그마저도 힘들어보였지만 어쨌거나.
“흐응. 눈이 있으면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지.”
키나 목소리를 보아하니 제 또래인 것 같아 슬쩍 경계심이 풀어졌다. 잘만 구슬리면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청소부들은 주민등록이 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니 방패로 삼아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기분이 좋아진 건 그가 가늘게 코웃음 치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서 너, 이름은?” “…….”
소년이 대답하려 입을 연 순간 갑자기 짚고 있던 마루가 진동하더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의 바닥이 꺼졌다. 그 짧은 찰나에 눈이 마주치고, 둘은 동시에 손을 뻗었다. 내뻗은 손을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힘주어 잡자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두 사람이 그대로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벨져는 문득 아침에 루이스가 식탁 위에 써놓은 메모를 떠올리곤 식료품점에 들러 우유를 샀다. 처음엔 엿을 먹여줄 생각으로 가사 전반을 맡기긴 했지만 식사까지 맡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말 영문을 모를 일이지만, 영국인들의 손을 거치면 멀쩡한 식재료도 쓰레기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런 얘기는 영국 태생들을 놀릴 때나 쓰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정말 입에 댈만한 음식이 없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영국인이었으므로 벨져는 루이스가 한 음식엔 절대 손을 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차피 혼자 살면서 뭘 해먹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적당히 먹을 만한 걸 사먹고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차려놓은 아침을 같이 먹었는데 의외로 먹어줄 만 했다.
씻고 나왔더니 까치집을 하고선 불 앞에 서있길래 그 노력이 가상해서 한 입 정돈 먹어주려 했다. 물론 당연히 맛이 없을 테니 아침부터 욕해주고 상큼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던 심산이었는데, 벨져는 멀쩡한 아침식사에 감사해야할지 아니면 기껏 준비한 욕이 무용지물이 된 걸 탓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아침식사에 뒤이어 그래도 먹어줄 만한 음식을 내놓을 때면 벨져는 그동안 제가 알던 상식이 잘못된 건가 싶어 곤혹스러워졌다. 샌드위치나 간단한 수프, 샐러드같이 패턴은 단조롭지만 그래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기껏 그 점을 높이 사 식재료비를 부담하겠다고 마음먹은 다음날, 루이스는 늦잠을 자서 벨져를 엿 먹였다. 아침을 먹고 나갈 생각으로 일어났더니 식탁은 비었고, 버터 냄새가 돌아야할 부엌엔 싸한 냉기만 감돌았다.
같이 살다보니 자연스레 생활 패턴 정도는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루이스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이른 아침을 맞는 편인 벨져에게 내내 맞춰주다가 아차 방심한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정도 되는 맨션에 얹혀살면서 그것도 못하랴싶지만 피차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아침 한 끼 얻어먹겠다고 자는 사람을 깨우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나가서 사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쉽고 섭섭한 감정이 쌓이다보니 한 마디 했던 게 소소한 다툼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같이 살면서 지킬 규칙을 쓰고 있었다.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타협점을 찾아서 대화를 해보려는 노력이 가상했기에 벨져는 한 번 져주기로 했다. 집세며 금전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기에 얼마든지 우위에 설 수 있지만, 고작 그런 걸로 쪼잔해지고 싶진 않았다. 절대 휘말린 게 아니다.
벨져는 묘하게 저를 애 다루듯 하는 게 찝찝했지만 펜과 종이를 내밀며 잠시 시간을 갖자는 루이스는 반쯤 체념한 표정과 말투를 떠올리곤 얼굴을 찌푸리는 것밖에 못했다.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맞춰주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얼음쟁이 놈은 자기가 한 발 물러선 주제에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이래서야 꼭 애새끼처럼 투정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벨져는 총 스물 세 개의 요구조건을 적었고, 루이스는 딱 다섯 개를 적었다. 그것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들이라 벨져는 혼자 열심히 고민한 것 같아 머쓱해졌더랬다.
벨져는 벌써 한 달도 더 된 기억을 떠올리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어째 계속 저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상이 싫은 건 아니지만 자꾸만 루이스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기분이라 찝찝했다.
계단을 올라 열쇠도 꺼내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루이스가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이자 같이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벨져는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 시간이면 부엌에 있어야 할 루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 식료품점의 봉투를 내려놓은 벨져는 집안을 한 번 슥 둘러보곤 바로 루이스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않고 문을 열어젖히자 이불 위로 빼꼼 나온 머리카락이 보여 미간을 찌푸렸다.
“야, 어이!”
“으우움….”
루이스는 잠투정을 부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저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이 짜증난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자 그제서야 게슴츠레 눈을 떴는데 눈빛이 몽롱한 게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리곤 배시시 웃는데, 그바람에 손목이 잡히는 것도 뒤늦게 깨닫고, 뿌리치려 했을 땐 이미 저를 끌어당기는 힘에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그대로 침대로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벨져를 끌어당긴 루이스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끌어안고는 씩 웃었다 그리곤 다시 고른 숨을 내쉬는데 영락없는 잠꼬대라 애꿎은 벨져만 휘말린 셈이었다.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사람을 안고 난리인지. 루이스는 말 그대로 벨져를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상체만 애매하게 끌리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발을 딛고 있던 벨져는 따끈따끈한 체온과 폭신한 이불에 고민하다 신발을 벗었다. 아예 발까지 올리고 누우니 그나마 편하긴 했지만 저를 곰인형처럼 끌어안은 루이스가 새근새근 잘도 자는 건 아니꼬웠다. 저를 끌어안고 빙긋 웃던 얼굴에 떠오른 만족감에 자기만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밥하라고 깨우려던 거지만.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냐.”
“…….”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얌전히 기어들어온 자신인 것 같지만, 벨져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루이스는 대답도 않고 눈을 깜박이다 다시 눈을 감아버리는 게 퍽 피곤한 모양이었다. 벨져는 지난 삼 일간 집안일을 팽개친 동거인을 노려봤다. 묘하게 뜨끈뜨끈한 게 또 아프기라도 하나 싶어 손을 이마에 댔다. 멀쩡한 체온에 안심하고 손을 떼려는데 루이스가 고개를 돌리며 벨져의 손바닥에 이마를 부비더니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야.”
“일곱 시 이십분.”
“…미안.”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져가 대번에 인상을 쓰자 루이스가 피식 웃더니 이불을 당기며 바로 누웠다.
“난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챙겨 먹어.”
“흥,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명백한 축객령에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자기가 끌어당겨놓고는 이제 와서 쫓아내는 것까지 하여간 예쁜 구석이 없다. 김이 빠져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라도 갈까 생각하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삐졌어?”
“헛소리 마라.”
“흐아암, 그래도 오자마자 청소하고 스튜 해놨는데.”
벨져가 돌아서서 팔짱을 끼자 루이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도 졸린 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입술만 움직여 씩 웃었다.
“삐졌네.”
“졸려서 정신이 나갔군.”
“안 먹을 거야?”
“먹을 만 하면.”
루이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벨져가 시선을 피하는 걸 놓치지 않고 슬쩍 웃었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본심을 말하기 쑥스럽거나 부끄러울 때 이런 식으로 눈을 피했다. 하여간 누가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자존심은 세가지고.
몸은 무겁고, 자꾸만 눈이 감기지만 벨져를 이대로 혼자 뒀다간 나중에 더 귀찮아질 게 뻔하단 생각에 루이스는 따끈한 이불의 유혹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시큰둥한 무표정을 짓고 있던 벨져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말은 사납게 해도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마저 완벽히 감출 순 없는 법. 더구나 같이 살다보면 이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도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말은 안 해도 기뻐하는 걸 보니 역시 일어나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독야청청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외로움을 타는 건가 싶기도 했다. 개는 싫어할 것 같고, 조만간 어디서 혈통 좋은 고양이라도 구해다 안겨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 뒤치다꺼리도 다 제 몫이 될 것 같아 생각을 그만뒀다.
그래, 사실 지금도 사람 하나 뒤치다꺼리하기 바쁘다. 루이스는 제 옆을 떠나지 않고 툴툴거리는 벨져를 보며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지. 루이스는 벨져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국자를 들었다. 속 편히 한 대만 칠 수 있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삭막한 복도엔 약냄새와 소독용 알콜의 싸한 냄새가 났다. 그리 길지도 않은 복도를 걸을 때면 언제나 숨을 집어삼키게 된다.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어 익숙한 나무문 앞에 서면 언제나 망설이게 된다. 그래도 벨져 홀든은 매일같이 깨어나지 않는 한 남자를 찾아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병실엔 누가 가져다 놓은 꽃향기가 약냄새와 섞여 벨져를 맞았다. 삑, 삑 일정한 간격으로 상태를 알리는 전자음도 베이지 색의 싸구려 벽지도 어제와 같다. 병실 안엔 그 흔한 시계 하나가 없어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안에서 시간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건 야속한 남자의 몸에 양분을 공급하는 수액과 링거액, 그리고 화병의 꽃이 전부였다.
철제 파이프 의자를 대충 발로 끌어다 앉은 벨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의 눈은 애틋한 감정을 담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았다면 연인이라고 생각할 법한 장면이었으나 그를 이렇게 만든 건 벨져 홀든 본인이었다.
살짝 떨리는 속눈썹에 벨져는 손을 거뒀다. 혹시나, 깨어날까 하는 기대에 그를 지켜보았으나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벨져를 괴롭혔다.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본 지 얼마나 지났는지. 벨져는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몸을 관통하던 감각이 선명했다. 피를 토하고, 자신의 품으로 쓰러지며 아스라이 지은 그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여느 때와 같이 차가웠고,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가리고 있던 환각이 겨우 걷혔다.
‘벨져. 벨져 홀든.’
그가 여기 있을 리 없다. 분명 그는 제 뒤에 있었을 터, 지금 제가 꿰뚫은 건 성가신 빛능력자 클론의 심장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지하연합의 영웅쯤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력하게. 정신을 차렸음에도 벨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방심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결정의 루이스는 6년 전 결정검 하나로 저를 꺾었던 능력자였다.
주르륵 쓰러지며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이 제 손을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제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힘없이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벨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충격이 심했다. 쓰러진 루이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티셔츠를 적시는 걸 보고서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그의 몸을 안아들자 루이스가 힘겹게 눈을 뜨고는 피식 웃었다. 벨져는 죽지 말라고 했고, 루이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론 선명한 기억이 없다. 루이스를 데려간 의료진들, 이글이 넘겨주던 검에 말라붙은 핏자국같은 것이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흐릿했다.
안개에 섞여있던 환각물질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벨져는 환각물질 따위에 당했다는 분노보다, 제 검이 향한 게 치명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를 찔렀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벨져는 진심으로 죽이려했고, 환각이 덧씌워진 상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몸이 루이스보다 작았기 때문에 심장을 빗겨나갔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멍청한 새끼.”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으면 한 대 후려갈기기라도 하지, 왜 그걸 고스란히 쳐맞고 심지어는 저 혼자 후련하다는 듯 구는지. 루이스는 단 한 번도 제 뜻대로 움직여준 적이 없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빚을 지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벨져는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에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용서를 빌진 않을 것이다. 따지자면 이건 쌍방과실이고, 그가 제게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사랑한다는 낯 간지러운 말은 꺼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를 연인이라 칭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제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제게 죄책감과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감정만을 남겨놓은 채 왜 그랬는지 답도 주지 않고 가버릴 순 없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조차 없었고, 기다림의 시간은 길기만 했다. 어서 깨어나서 그 붉은 눈동자에 투명한 빛을 담아 자신을 바라봐주었음 했다. 이대로 떠날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잘난 동료들을 두고 훌쩍 가버릴 인물도 아니거나와 그리 약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제 곁으로 돌아와 주었음 했다.
벨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는 건, 이렇게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혹시라도 제가 없는 사이 영영 떠나버릴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잠든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되고, 애틋하고 무거운 감정은 조금씩 그 부피를 늘렸다. 하루에 하나씩 더해, 매일 커져만 가는 감정은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다.
누가 열어놓았는지 창문을 타고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약한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뻗어 넘겨주다 문득 든 생각에 몸을 일으켜 다가갔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루이스의 뺨을 스치고, 벨져는 고개를 숙였다.
맞닿은 입술은 거칠었고 피부에 닿는 숨은 안타까우리만치 미약하게 느껴져 가슴께가 시큰했다. 이 감정에 확신을 주지 않는 남자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