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무스는 내려온 지령서를 읽고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그 지령서를 가져온 타라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다이무스는 보고 있던 서류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어, 홀든. 그렇다고 내가 갈 순 없잖아?"
"지금 하고 있는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고 생각한다만."
"그거라면 걱정마. 어제 용기사 둘이 복귀했으니까."
타라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싱긋 웃었고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명왕조차 이기지 못하는 그녀를 다이무스가 이길 수 있을 리 없거니와,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다이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라는 만족한 듯 다이무스가 책상 위에 쌓아뒀던 서류철들을 들었다.
"이건 정의로운 쪽에 가져다줄테니까, 나머지는 되는 대로 괴짜한테 가져다줘."
"알겠다."
짧게 대답한 다이무스는 타라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울컥 치미는 욕지기에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런다고 막아질 리가 없었다. 책상을 짚고 등을 수그리자 바로 입에서 쏟아지는 얼음꽃이 사무실 바닥에 부딪혀 깨졌지만 다이무스는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날카로운 꽃잎들이 입 안의 살을 찢고 베어도 당장 숨을 쉬는 게 먼저였다. 다이무스는 가슴을 치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코로 마시는 걸론 부족해 입을 벌려 공기를 마시고 뱉기를 반복하며 눈을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구토때문에 따라붙는 생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다이무스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눈을 떴다.
입에 느껴지는 피맛에 물로 입을 헹구려 일어나려다 휘청이는 바람에 급히 책상을 짚었다.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이런데, 한동안 같이 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늘어난 인구때문에 전부터 코어레너드 관리 부서에서 인원 보충을 요구하긴 했지만 하필 그게 자신과 그가 될 줄이야.
코어레너드는 연합과 회사의 공동 관리 구역이기 때문에 아무리 적대세력이라 해도 일단은 협렵을 해야 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경쟁과 분란이 없겠냐만,은 같이 부대끼며 일하는 사람들인지라 지내다보면 정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코어레너드로 보냈던 이들 중 몇몇은 소속을 바꾸기도 하고, 종종 커플이 생기기도 했다. 위에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저를 고르고, 연합에선 그를 내보낸 것이겠지만 문제는 다이무스 홀든이 엽합의 영웅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애절하고 애틋하게.
다이무스는 이마를 짚고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들고 화장실로 향한 다이무스는 물로 입을 헹궜다. 물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렸지만 그보단 가슴이 더 따금거렸다. 세면대에 뱉어낸 물이 붉게 물들어 수채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전에 생긴 상처가 아물어도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입가를 매만지다 약통을 열었다. 상처를 낫게 하는 연고가 쌉쌀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아홉시 정각에 딱 맞춰 출근한 다이무스는 잔뜩 어질러진 책상들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야 필요한 서류를 제때 찾기도 힘들 게 뻔했다. 그와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라 다이무스는 혀를 내둘렀다.
"홀든?"
"아이스."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저도 그게 더 익숙하니까요."
루이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 한 반자 늦게 손을 맞잡았다. 불쾌할 법도 한데 루이스는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손을 놓았다. 차가울 거란 인상이 있던 손은 보통 사람들처럼 따스했다. 걱정과 달리 얼굴을 마주하고 손까지 잡았음에도 아직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전 손을 잡았을 때, 조금 더 붙잡고 있을 걸 하고 후회했지마 이미 늦은 후였다.
"잘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제 미리 들러서 만나봤는데 다들 일만 하면 그만이라더군요."
"코어레너드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 세력의 지역이라면 모를까, 공동 관리 구역에선 연합이고 회사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자칫 잘못했다간 잘못과 책임을 뒤집어쓰는 데다 적에게 자치권을 뺏길 수도 있는데 그 위험을 무릎쓸 필요가 없었다. 마침 들어오는 직원과 눈인사를 나눈 루이스가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은 저걸 쓰시면 됩니다. 바쁘다면서 저한테 안내를 해달라고 하던데 그래도 회사쪽 사람이 편하면 조금 더 기다리시죠."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귀찮게 할 거 없지."
서면상으로라곤 해도 이미 할 일도 숙지하고 있고, 코어레너드의 행정관 구조도 알고 있지만 다이무스는 순순히 루이스의 뒤를 따랐다. 루이스는 넓은 건물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문마다 걸린 팻말을 살피며 가끔 발을 멈추고 눈을 맞추며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다이무스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귀에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제게 향하는 붉은 눈동자에 심장의 박동이 거세졌다.
기분 좋은 설렘에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걷던 다이무스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표정을 굳혔다. 잠잠한가 싶더니 순간 격통과 함께 찾아온 역한 구토감에 다이무스는 입을 틀어 막았다. 다른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당사자 앞에서 누군를 향한 마음인지 빤히 보이는 꽃을 토할 순 없었다.
"홀든?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여기까지 하지."
다이무스는 올라오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참아내며 뒤돌아섰다. 입을 막고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다이무스는 변기를 잡고 참았던 얼음꽃을 토해냈다. 얇은 칸막이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려 고개를 쳐들자 피식 웃음이 샜다. 그의 친절은 제게 독이었다. 타는 목마름에 너무 달아서 마실 수밖에 없는 바닷물. 마셔봤자 달고 시원한 것도 잠시일 뿐,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걸 알지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는 제 어리석은 마음에 실소했다.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표정을 굳힌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입이 썼다.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역한 구토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이 감각엔 익숙해질 수 없었다. 감출 수도 없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꽃은 감정의 산물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감정이, 나오지 못하고 꽃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는 건 듣기엔 제법 로맨틱하지만 겪는 당사자에겐 고역일 뿐이었다. 토하는 게 아무리 꽃이라 해도 입 밖으로 나오기까진 이물질에 불과한 데다, 목구멍을 역류해 넘어오는 감각은 그냥 토악질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큽, 컥...! 으욱...."
더구나 뱉어내는 꽃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꽃이 되고, 그 안에 담긴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형태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설득력있는 설이라곤 하지만 그걸 안다고 나아지는 건 없었다.
"커헉, 후.... 하...."
가슴이 울렁이고 목에 뭔가가 걸린 것 같은 감각에 헛구역질을 반복하다 마침내 남은 것마저 토해낸 다이무스는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며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졌다. 현기증과 함께 입안에 비린한 철의 맛에 고인 침을 가까스로 넘겼다. 이미 입 안은 상처투성이가 된 지 오래고, 낫는 것보다 빠르게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입 안이 제일 회복이 빠르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꽃을 토하다보면 멀쩡할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흘긋 제 입에서 나온 꽃을 바라봤다. 차라리 평범한 꽃이라면 나았을까, 다이무스는 심호흡하며 제가 뱉은 얼음꽃이 서서히 녹는 것을 지켜봤다. 보드랍고 향기로운 꽃잎 대신 투명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얼음꽃잎의 끄트머리엔 붉은 피가 맺혀있었다. 견고하고 아름답게 핀 결정꽃을 제 색으로 물들이지도 못하고, 이물질이 되어 붙어있을 뿐인 한 방울.
다이무스는 미간을 좁혔다. 혀를 움직여 입 안을 헤집은 상처들을 훑었다. 약을 발라 씁슬한 맛이 퍼졌지만 새로 생긴 상처를 찾는 게 먼저였다. 입맛을 다시자 비릿한 냄새와 함께 혀에 닿는 혈액에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 치솟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 토해내는 얼음꽃이 가리키는 건 너무 명백했다. 열음, 결정. 하지만 그는 연합의 영웅이고, 다이무스 홀든은 헬리오스 소속의 능력자였다. 감히 가까워져서도 안 되거니와 같은 남자인 그에게 이런 감정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래서 제 감정의 꽃은 마냥 예쁘고 향기로운 대신 이리도 아프고 아름다운지.
약으로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는 병은 담아 누르는 감정을 밖으로 꺼내 사랑이 이루어지면 낫는다고 하지만 다이무스는 차마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돌아올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거절뿐이었다. 난색을 표하며 거절하더라도, 제가 말을 꺼낸 순간 루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와 불쾌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에야 아예 꺼내지 않는 게 낫다. 그렇게 애써 부정하고 외면했던 다이무스였지만 매일같이 토해내는 얼음꽃 앞에선 나약한 남자일 뿐이었다.
꽃을 피우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향한 애정과 감정이기에 하루하루 그를 그리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 수록 힘이 들었다. 얼음꽃을 토할 때면 어김없이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꽃을 토하는 횟수도, 한 번에 토하게 되는 꽃의 수도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꽃을 토하는 건 이미 제 마음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났기 때문이요,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는 탓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가슴이 뛰고,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지만 그 모든 순간이 단 한 사람의 존재로 물드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아서 다가올 아픔마저 기꺼이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제게 슬쩍 지어보이던 그 미소를 기억했다. 그의 눈인사를 받기 위해 일부러 광장 한 바퀴를 돌아 늦게 출근하는 척을 했고 사흘에 한 번 읽지도 않을 책을 샀다. 그 붉은 눈동자도, 얼음이 성겨 생채기가 가득한 손도,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도 전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다이무스는 주저앉은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기억은 눈을 감자 더욱 또렷해졌다. 다이무스는 고통에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토하고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입 안이며 가슴이 찢기고 베여 만신창이가 되어도 원망조차 할 수 없는 먹먹하고 애틋한 감정의 이름은 분명, 사랑이었다.
연합의 오후, 나이오비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엘리를 돌보며 휴게실을 지키던 토마스는 그만 난로 앞에서 깜박 졸고 말았다. 그 사이 그림을 그리며 놀던 엘리가 토마스의 얼굴에 낙서를 해놓고 까르륵 웃으며 우다다 뛰어가고, 토마스는 엘리를 잡으러 복도로 뛰어나갔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냅다 뛰어가는 엘리 앞에 문이 열리며 문과 아이의 머리가 부딪치기 일보직전, 토마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엘리!”
“히히, 엘리 몰라!”
“앗, 선배?”
“안녕, 토마스.”
“고생이 많군요, 스티븐슨군.”
열리던 문이 멈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는 다시 까르륵 웃으며 빙글 돌았다. 겨우 따라잡은 토마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엘리를 안아 올리자 다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순간 움찔한 토마스는 루이스 옆에서 미소를 머금은 요기 라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점에서 일하는 옷차림의 루이스에겐 어설프게 웃었다.
“루이스 언니 예쁜 옷! 엘리 마니마니 보구시펐어!”
“고마워, 엘리.”
엘리가 토마스의 품에서 루이스에게 양팔을 뻗었다. 엘리를 안아든 루이스는 제게 뺨을 부벼오는 애교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사람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훈훈한 광경에 요기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엘리가 루이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요기는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눈짓을 교환하고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버렸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토마스는 셋이 되고 나서도 편하게 입을 열지 못했다. 루이스가 병실에 있는 동안 한참 바빴기에 얼마 찾아가지도 못했던지라 오랜만에 보는 선배가 반가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무거운 감정들이 앞섰다.
“선배, 좀 어떠세요?”
“그럭저럭 괜찮아.”
“아, 있지이. 엘리가 빨리 나으라구 맨날맨날 기도했어!”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엘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칭찬을 받은 엘리는 제가 생각해도 뿌듯했는지 루이스의 품에 안겨 부비거리며 웃었다. 엘리의 천진난만한 말에 혼자 가슴을 졸이던 토마스는 루이스의 씁쓸한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제 동경의 대상이자, 언젠가 뛰어넘겠다고 생각한 목표가 무너졌다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는 루이스를 보는 게 더 마음 아팠다.
“선배…….”
“오늘 이 말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토마스는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그렇게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지만 지금 한 말은 믿기 힘들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거짓으로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믿음직하게 보였던 팔과 등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서, 언제나 동경의 눈길로 바라본 후드 차림이 아니라서. 나란히 걷는 걸음이, 전과 같지 않아서. 토마스는 느릿하게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고작 한 사람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너무했다.
“루이스!”
“핫, 언니!”
“안녕, 잉게.”
복도 끝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토마스와 루이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 나이오비는 루이스의 품에서 엘리를 빼앗아 내려놓고는 토마스를 다그쳤다.
“넌 생각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그만, 잉게. 토마스가 안 된다는 걸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야.”
“너도 그래! 얘가 아직도 갓난앤 줄 알아? 퇴원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나이오비의 불같은 성격은 토마스에게서 바로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배려하지 못한 제 불찰에 토마스가 얼굴을 붉히고 엘리가 울상을 지었다. 나이오비가 이러는 것도 다 자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루이스는 얌전히 그녀의 잔소리를 들었다. 나이오비를 말린 건 함께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레베카와 도일이었다.
그마저도 잠시 들른 것뿐이지만, 복도에서 이러지 말자며 휴게실로 돌아온 그들은 이내 소란스럽게 루이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질문에 다 대답할 수 없어 곤란해 하던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이 반갑기도 하고 드디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루이스 앞에 떳떳하지 못한 토마스는 휴게실을 오가던 사람들이 루이스를 알아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인사를 건네는 걸 멀찍이 떨어져 지켜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앤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배는 전설이 되고, 저는 영웅이 될 거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깨질 것 같지 않던 얼음성같은 그녀에게서, 연합에게서 영웅을 빼앗아간 그가 미웠다. 능력이 사라진다니, 그런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제 막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허무하게 망쳐버린 자신이 미웠다. 토마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날, 제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과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도 전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무엇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미안함에 눈물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거라는 걸 아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미숙함과 함께 그에 대한 원망이 끓어올랐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루이스가 그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겠지만 루이스는 아니었다.
점점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토마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제게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영웅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토마스는 제가 책임을 지고 연합에 도움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시간이라.”
“피터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또 올게.”
나이오비의 아쉬움 섞인 말에 토마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이스는 코트도 없이 일어났고, 밖에는 버린 물이 얼 정도로 추웠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이 나서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가, 같이 가요. 선배!”
“응?”
“그…, 저도 그쪽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원래대로라면 아직 더 늑장부려도 될 시간이지만 성치 않은 발목으로 빙판이 진 길을 가려면 전보다 서둘러야 했다. 매년 겨울, 눈이 내리고 빙판이 지면 마음 놓고 결정 슬라이드를 타도 되니 편하겠다고 하던 우스갯소리도 이제는 전부 과거의 추억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에스코트를 자청하는 토마스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워낙에도 세심한 성격이긴 하지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시종일관 주눅이 들어있는 그가 가여운 동시에 미안했다. 아무리 잊으라 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것도, 그 짐은 그리 쉬이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도 루이스 역시 잘 알았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토마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오랜만에 둘이 나갈까? 잘 부탁해, 후배님.”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토마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생긋 웃었다. 토마스는 팔짱이 어색한지 쭈뼛거리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고, 루이스는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토마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걸 슬쩍 바라보곤 넘어지는 척 그의 팔을 꼭 잡았다.
“미안.”
“아, 괜찮아요!”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가 팔짱을 낄 수 있게 팔을 내주었다. 팔짱을 끼며 자연스레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조금씩 차이가 나던 걸음이 같아졌다. 어색하던 기류 대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별 거 아닌 농담에 마침내 토마스가 웃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따라 미소지으며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며 걸었다.
별 거 아니지만, 루이스는 이렇게라도 토마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완전히 잊거나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을지라도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건 자신 하나로 족했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자신이었다. 애써 밝은 척, 제 앞에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토마스를 보고 있으니 자신의 오만이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카페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으며 속으로 쓴 속내를 삼켰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은 루이스가 마지막까지 능력자로서 가졌던 마음이자 다짐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이 모두를 구할 순 없다고 말해도 루이스는 그 첫 마음만은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비극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게 싫었다.
그러니 능력을 대가로 두 사람을 살렸으면 그리 밑지는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 루이스는 제게 소리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불쑥불쑥 튀어오르는 그 날, 병실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길게 숨을 토하곤 제 팔을 지지해주는 토마스의 온기에 조금 더 몸을 기대어 걸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