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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My Hero
2015/01/27
Happy Birthday, My Hero
150127, 00:00:00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팟하고 눈이 뜨이고 침대에서 미적거리는 것도 없이 일어나면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하고 머리도 맑은 그런 날. 느지막한 1월의 끝, 루이스는 커텐을 젖히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의 아침공기에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묻고 다시 잠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오늘은 차가운 아침 공기도 상쾌했다.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고 서점에 출근하기 위해 갈색 구두를 신었다.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아침햇살이 반가워 조금 걸음을 늦춰 걸었다. 중간에 빵집에서 갓 나온 빵을 사고,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며 걷다 보니 서점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아홉시도 되지 않은 시간. 맞은편 클랜사무소엔 드렉슬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홉시에 출근한 루이스가 밖에 가판대를 내놓고, 책들을 진열하고 있으면 그제야 비적비적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타나는 게 그였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게, 마음속에 낀 구름과 안개도 같이 걷힌 것 같았다. 이대로 오후가 되면 거리에 쌓인 얼음이 녹을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어제 나이오비가 엘리가 빙판에서 미끄러져 무릎이 까졌다며 걱정이 잔뜩 섞인 투로 말하던 걸 떠올렸다.
“아이스.”
“우왓.”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 같군.”
혼자 하늘을 보는 중에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검은 코트 차림의 다이무스 홀든이 서있었다.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이지만, 그를 대하는 제 표정도 별 다를 바 없을 터였다.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 홀든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따로 찾아올 정도면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으리란 생각에 잠시 개점 준비를 미루고 그를 바로 마주봤다.
“무슨 일이라도…?”
“받아라.”
다이무스는 말 대신 갈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루이스는 손에 올라온 봉투의 무게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다이무스의 표정에 그의 의중을 읽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런 루이스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다이무스가 말을 덧붙였다.
“받아도 무탈한 물건이다. 그래도 이유가 필요하다면 글쎄.... 빚을 갚는 거라고 해두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홀든?”
루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이무스는 등을 돌렸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뭔지도 모를 물건을 준다고 덥석 받을 순 없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물건을 받을 수 없어 그를 잡으려했지만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에 발이 멈췄다. 아무리 드렉슬러가 괴짜 용기사라지만 회사 사람에게 다이무스와 자신이 만나는 걸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드렉슬러를 보다 다이무스를 올려보자 다이무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오지 말라는 명백한 눈빛에 루이스는 별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침부터 한숨이냐.”
“아…. 좋은 아침입니다, 드렉슬러경.”
“뭐야, 벌써 시작이냐.”
“네?”
드렉슬러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되물었지만 드렉슬러는 혀를 찰 뿐 대답하지 않았다. 워낙 별난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고 돌아선 루이스는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책을 꺼내놓고, 도착한 책 소포를 받아 정리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정리 도중에 전에 부탁받은 책이 들어온 걸 보고 따로 메모지를 꽂아 표시를 하는데,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마틴 챌피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루이스씨.”
“네, 날씨가 정말 좋네요. 아직까지 해가 보이는 게.”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며칠만 더 이렇게 해가 나오면 거리의 얼음들도 녹을 텐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마틴은 잠시 루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분명 날씨가 좋은 것보다, 해가 나와서 거리의 얼음이 녹는 게 더 기쁜 것이리라. 마틴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주머니 안의 주화를 매만졌다. 드렉슬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로 보아하니 아직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찌 한담. 잠시 고민하던 마틴은 진열된 책들 중 가장 두꺼운 책을 골라들었다.
“얼마죠?”
“음, 챌피. 그건 파는 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매일 당신이 들고 있는 거잖아요. 꽤 무겁네요. 자.”
마틴은 능청스럽게 답하며 루이스에게 트와일라잇의 역사를 건네주었다. 루이스가 이 자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흐르다니. 마틴은 광장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역시, 이 책은 당신이 제일 잘 어울리네요. 오래 있어줘요. 새 얘기가 생기면 저도 들으러 올 테니까.”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틴의 미소에 루이스도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마틴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떠난 뒤 루이스는 잠시 멈췄던 책 정리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저, 저기….”
“윽…!”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영웅씨? 이쪽도 그쪽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거든.”
쌓아둔 책을 옮기려고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아있는데, 뒤에서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조그만 아가씨 뒤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 불마녀가 보여 그만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 마디 맞받아쳐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세탁소는 어쩌고 찾아왔는지 모를 여자아이 쪽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루이스는 타라를 한번 노려보곤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쭈그려 앉은 채론 고개를 푹 수그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 한쪽 무릎을 꿇고, 타라와 자신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기 바쁜 아이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샬럿.”
“아, 저, 그게…. 그, 생일 축하드려요!”
양손을 등 뒤로 한 채 우물쭈물하던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큰 소리로 말하며 양손으로 선물을 내밀었다. 귀엽게도, 직접 포장했는지 꾸러미를 싼 포장지가 삐뚤빼뚤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루이스는 속으로 날짜를 세며 눈을 질끈 감은 아이의 손에서 작은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오늘 소포가 들어왔으니 얼추 날짜가 맞았다.
“저, 그리고…. 전엔 감사했어요….”
“전?”
어지간히 용가기 필요했는지, 얼굴이 빨개진 샬럿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수선이 엉망이라며 날뛰는 손님을 대신 설득시켜준 것이 퍽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때야 정말 우연이었지만 일부러 생일이랍시고 선물을 준비한 그 마음 씀씀이가 퍽 예쁘고 고마웠다. 루이스는 샬럿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쩍 웃었다. 그제야 안심했는지 샬럿도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자, 그럼 돌아가자. 샬럿.”
“네! 타라 언니, 고마워요!”
훈훈하게 샬럿을 배웅하려 일어나 손을 흔들던 루이스는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드렉슬러는 루이스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타라의 눈치를 살폈고, 샬럿의 손을 잡고 뒤돌아서던 타라는 입가를 실룩이며 루이스를 뒤돌아봤다. 샬럿은 뭐가 잘못된 건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루이스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나이에 그만한 딸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여자가, 언니라. 타라도 알긴 아는지 더 이상 말하면 불태워 죽일 것처럼 살기등등하게 루이스를 노려봤다. 중간에 낀 드렉슬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샬럿을 데리고 피해야하나, 아니면 누굴 불러와야 하나 고민하며 루이스와 타라의 눈치를 살폈다.
“저, 언니…?”
“흥, 생일 선물이라고 쳐둬. 묘비에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같으면 그것도 웃기긴 하겠지만.”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샬럿이 타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매달렸다.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퉁기며 공간발화를 쓸 것처럼 손을 올리던 타라는 그대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하고는 샬럿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둘이 광장의 코너를 돌자 드렉슬러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곤 루이스에게 투덜거렸다.
“너도 참 징하다. 우리 불마녀 성격 어떤지 잘 알면서.”
“질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녀에게 만큼은.”
루이스의 대답에 드렉슬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공성이 있거나 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싫으나 좋으나 하루 반나절을 얼굴을 마주하는 상대다 보니 그래도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렉슬러는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석이 살려준 목숨이라 그런가, 완고하고 터무니없이 무모해서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면이 후배 녀석 하나를 꼭 닮았다.
“몸 좀 사리고 살아라….”
“네?”
“아무 말도 안했다, 멍청아.”
연구실에서 하던 것처럼 실수로 나온 혼잣말에 드렉슬러는 다시 팔짱을 끼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사 양반과 술김에 한 내기에 져버린 게 화근이었다. 할 일도 거의 없는 게 클랜 업무인데 하루에도 수십 수백씩 생기고 사라지는 클랜을 관리할 수 있는 건 드렉슬러 경 당신뿐입니다! 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자신도 멍청이지만.
드렉슬러는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추위가 한 풀 꺾였다 해도 아직 1월. 이 겨울에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걸친 꾀죄죄한 꼬마애 둘이 같이 버려진 신문지며 쓰레기나 다름없는 나무조각을 들고 광장을 힘겹게 걸어가는 게 보였다. 드렉슬러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감했다. 천재인 자신의 촉은 꽤 뛰어난 편이지만, 이 전개는 너무 뻔하게 반복된 일이라 예측이랄 것도 없었다.
잠시 아이들의 모습을 어딘가 먼 과거를 그리는 것 같은 눈으로 보던 루이스가 아이들을 불러세우곤, 서점 안으로 들어가 갈색 종이봉투를 들고 나와 아이들에게 건넸다. 무릎을 낮추고, 시선을 맞추며 건네는 가슴 아릿한 미소. 드렉슬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원.
“야!”
자리로 돌아온 루이스는 갑자기 절 부르는 소리에 책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얼굴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가까스로 잡아채자 드렉슬러가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듯 심통스런 얼굴을 하곤 팔짱을 꼈다.
“비실비실해가지고. 맨날 나눠주기만 하니까 그 꼴인 거 아냐. 네 여친은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알긴 하냐.”
양팔로 팔짱을 끼고 입을 비죽이는 드렉슬러의 말은 분명 기분 나쁠 법한 것이었으나 루이스는 종이봉투를 열어 샌드위치를 꺼내곤 피식 웃었다.
“잘 알죠.”
“있을 때 잘해. 이 나이까지 혼자면 서럽다.”
“명심하겠습니다.”
드렉슬러의 충고는 자기가 혼자라 서럽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트리비아. 루이스는 잠시 제 연인을 떠올리곤 입가에 띠웠던 미소를 지웠다. 오늘 만날 수 있긴 할는지. 오늘은 퇴근하면 연합에서 밀린 서류와 함께 생산품 분배에 관한 계획안을 짜야했다.
이글이나 토마스, 레베카와 휴톤 도일은 떠들썩한 걸 좋아하니 생일이랍시고 또 이런저런 걸 준비했을 지도 모른다. 파티같은 걸 좋아하지 않지만, 동료들이 다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노는 걸 보는 건 좋았다. 그 따스한 분위기며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행복과 즐거움이 제게도 스며드는 것 같아 좋았다. 제 옆에서 그걸 같이 봐줄 그녀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루이스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다. 더 이어가면 결국 수렁에 빠질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1월 27일. 괜히 침울해져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쉬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 * *
아니나 다를까, 일을 마치고 연합으로 가니 올해도 저 몰래 깜짝 파티라도 해주려는지 다들 평소와 다르게 저를 대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왜 작년엔 이걸 몰랐는지. 루이스는 한사코 저를 휴게실에 들이지 않으려 애쓰는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토니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토니는 재킷의 포켓에서 새 만년필 몇 자루를 주문했는데 임원들에게 돌리고 남았다며 만년필 하나를 건네며 윙크했다.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하자 토니는 아까 루이스가 토마스에게 했던 것처럼 어깨를 두드렸다. 그 묘한 뿌듯함에 멋쩍어진 루이스는 후드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생일이라고 태도에 더하고 뺄 게 없는 그니 분명 오늘이 아니라도 챙겨주었을 테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회의실에 먼저 도착해 서류를 잔뜩 쌓아놓고 골머리를 앓던 앤지는 토니와 루이스를 보고 업무로 지친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녀에게 안쓰러움 반, 기특함이 반 섞인 미소로 인사한 루이스는 앤지의 옆, 빈자리에 앉아 담당의 간단한 브리핑을 듣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쌓여있던 서류들이 이 손에서 저 손을 거치고, 테이블에 커피잔과 찻잔이 쌓이길 두 시간.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적막을 깼다.
“조기…. 루이스 오빠 업쪄?”
“엘리?”
의자 대신 책상에 걸터앉아 카모라 쪽에서 보낸 서류와 생산량 보고서를 한참 들여다보던 루이스는 저를 찾는 엘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 불리곤 잔뜩 토라진 얼굴로 무작정 달려와 매달리는 통에 쌓아둔 서류탑이 무너졌지만 서류에 찌들어가던 이들의 얼굴엔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미안. 먼저 가볼게.”
엘리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싶어 루이스는 엘리를 안아올리고 앤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앤지는 얼른 가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루이스는 황급히 엘리를 데리고 나왔다.
“엘리, 무슨 일이야. 왜 너 혼자 있어. 다른 사람들은?”
“같이 루이스오빠 기다렸는데, 움…. 엘리가 오빠 데려오기루 해써!”
시무룩한 아이의 얼굴이 걸려서 걱정스레 묻자 엘리가 열심히 대답하다 말을 멈췄다. 말도 재롱도 많은 순진한 아이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고, 루이스는 이내 엘리가 한 말을 알아듣고는 피식 웃었다. 다 같이 기다렸다는 말은 아까부터 동분서주하던 생일파티를 말하는 걸 테고, 엘리가 데려오기로 했다는 건 기다리다 못해 엘리를 전령사로 보냈단 뜻이었다.
급하게 데리고 나오느라 안은 채로 복도를 걷는데, 문득 나이오비가 애 버릇 나빠진다며 혼자 걷게 하라고 잔소리했던 게 떠올랐다. 피터가 은근히 부러워한다는 것도 알기에 안아주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부쩍 무거워진 것 같았다.
“착하네, 엘리.”
“웅! 오빠도 착해!”
방긋 웃는 엘리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는 휴게실 앞에 다다라서야 엘리를 내려주었다. 엘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난 표정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잔뜩 들떠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엘리는 루이스가 문을 열길 꾹 참고 기다리는데, 그게 몹시 귀여웠다.
숨을 들이마시며 철문의 문고리를 양손으로 잡고 힘주어 열자 안에서 폭죽이 터졌다.
“““Happy Birthdady!!!”””
제각각의 목소리가 겹쳐져 나는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루이스는 움찔하고는 피식 웃었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색종이며 폭죽의 잔해에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털자 이글이 기분나쁘게 웃으며 다가와 옷 속에 색종이가루를 집어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주인공 주제에 늦게 온 벌이지!”
“오오, 이글! 말 한 번 잘했다! 자자, 벌주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고~.”
“있지, 있지! 엘리랑 피터 오빠랑 열심히 색종이 자르고 장식해써!”
“자, 벌주데이~. 시원~하게 한 잔 하그라!”
“저, 선배! 별건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자꾸만 옷 안에 색종이를 넣으려는 이글을 막으랴, 엘리와 피터 칭찬하랴, 벌주라며 맥주컵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내미는 도일과 휴톤에게 사양하랴, 토마스가 내미는 선물도 받으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작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 년이 지나면서 그만 까먹은 모양이었다. 이럴 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루이스는 이글이 받아 제 입에 들이붓는 술을 흘리고 마시며 잠시 방심한 것을 후회했다.
“자자, 잠깐잠깐! 그 전에!! 이것들아 다 조용히 좀 해!!!”
루이스의 도착으로 소란스러워진 휴게실은 사람들을 주목시키려던 나이오비가 결국 고함을 지르면서 조용해졌다. 루이스의 영구동토라도 맞은 듯 일동이 모두 꼼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제야 부끄러워졌는지 헛기침을 한 나이오비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든 좋으니까 자기 생일케이크의 촛불 정도는 끄게 해주라고. 이러다 촛농 떨어지겠다.”
양손으로 이글의 팔을 잡고 있던 루이스는 그녀의 배려가 고마워 표정을 풀었다. 이글도 나이오비의 말에 순순히 루이스를 놓아주고, 루이스는 한 걸음 나아가 ‘Happy Birthday’가 삐뚤빼뚤하게 쓰인 케이크 위에 꽂힌 초에 힘껏 바람을 불었다.
“루이스 오빠, 생일 추카해!”
“생일 축하해요.”
“고마워. 피터, 엘리. 직접 만들어줬구나.”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자 엘리는 방긋 웃으며 까르륵 웃었고, 피터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이어지는 축하인사에 루이스는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쑥스럽게 웃으며 고맙단 말을 돌려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없어선 안 될 동료이자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1년 365일 열두 달,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하루를 축하하기 위해 기꺼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벅차올라 속이 시릴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키는 것으로 감정을 눌렀다.
케이크를 나눠먹고 엘리와 피터가 돌아가자 휴게실은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러운 술자리로 변했다. 한 시간쯤 됐을까, 적당히 어울려주던 루이스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슬쩍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니 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이글이 먹인 술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토마스가 달려와 무릎에 손을 짚고는 숨을 골랐다.
“왜, 따로 할 말이라도 있어?”
“어…, 그게. 선배!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어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하던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우렁차게 말한 토마스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포옥 내뱉었다. 루이스가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슬그머니 눈을 뜬 그는 아차 싶었는지 뺨을 긁으며 시선을 피하다 겸연쩍은 듯 웃었다.
“아, 하하. 그게, 어…. 처음엔 영웅 루이스를 동경해서 연합에 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영웅 루이스, 라는 말에 가슴이 따끔했다. 루이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토마스를 마주했다. 지금 토마스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용기를 냈고, 그가 하는 말은 이렇게 따로 독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진심이었다. 루이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쥐었다.
“지금은, 믿을 수 있는 선배고, 리더고, 그리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로 신뢰 받고, 인정 받고 있다는 건 솔직히 부러울 정도에요. 그러니까, 선배가 선배여서 다행이에요!”
무서울 정도로 솔직한 말에 루이스는 천천히 멈췄던 숨을 내뱉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차가운 술도, 저만치서부터 올라오는 뿌듯함을 후드도 없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감추지도 못한 감정을 속으로 삭였다. 꾹꾹 눌러온 감정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후배 앞에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루이스는 애써 차오르는 덩어리를 누른 채 미소지었다.
“고마워.”
“아…. 죄송해요! 그, 어…. 지금의 선배가 선배라서 좋지만, 힘들 땐 혼자서 참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차…!”
당황한 토마스가 횡설수설하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은 후였고,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는데 그게 후배라는 사람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니, 이래서야 선배의 체면이라고 할 것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맞는 말이야. 조금 더 우릴 믿으라고 영웅님.”
“니 혼자 짐을 지우게 할 만큼 연합은 약하지 않다 아이가!”
“뭐, 나는 그런 형씨가 마음에 들지만.”
“이글!”
“아, 거 이렇게 감상적인 거 나하곤 안 어울린다고~. 어려울 거 뭐 있어,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지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
더해지는 동료의 목소리, 따스한 격려에 루이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슬렁슬렁 나타난 이글이 어깃장을 놓았지만, 루이스를 지나치며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그의 눈에서 루이스는 이글 홀든이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 진심을 보았다. 어떤 선택을 해도, 어떤 길을 골라도 그걸 믿고 따르겠다는 신뢰, 그 감각을 잊지 말라는 그 나름의 격려. 루이스는 사람 키보다 더 큰 검을 어깨에 지고 설렁설렁 걸어가는 이글의 등을 보다 피식 웃었다. 좁은 복도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저를 달래려 이런 말 저런 말을 덧붙이는 것부터 해결해야 할 성 싶었다.
* * *
오늘 받은 선물을 양손 가득 들고 돌아온 루이스는 선물을 방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지친 목과 어깨를 풀었다. 이대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면 하루가 갈 것이다. 오늘 하루는 이걸로 끝.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그녀는 원래 이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고,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괜한 기대는 접고 내일을 준비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서, 혼자가 된 루이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침대에 앉아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게 지내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떠들썩한 곳에서 놀다가, 평생 듣기 힘들 정도로 좋은 말들을 들었는데. 혼자가 되니 밀려드는 상념에 더욱 외로워졌다.
씻고 자자. 루이스는 자꾸만 떠오르는 이런 저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옷장에서 새 속옷과 잠옷을 꺼내들었다. 씻고 자리에 누우면 잠이 들 것이다. 잠이 들어 일어나면 아침일 것이고, 그럼 또 하루를 시작한다. 그 반복일 뿐이다. 루이스는 샤워기 앞에서 물을 틀었다.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물이 제 감정과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함께 씻어주길 바랐다.
커튼을 치지 않은 방,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엔 큰 달이 떴다. 구름이 끼지 않은 하늘엔 달이 평소보다 밝게 빛났고,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창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손에 활짝 열렸다. 손가락 끝부터 우아하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자가 형태를 갖추고,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창문을 타고 넘어온 여인은 침대에 곤히 잠든 루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어온 바람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훤한 달빛은 수려한 용모를 비췄다. 잠든 그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던 그녀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침묵했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더니 천천히 루이스가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곳을 바라본 그는 그녀를 보곤 배시시 웃었다. 그 아이같이 순수한 미소에 여제, 트리비아 카리나는 자신의 연인에게 미소로 답해주었고, 제게 손을 뻗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그정도는 봐줘도 좋을 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카리나….”
잠결에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웃으며 반기는 걸로 보아 잠이 덜 깼거나,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트리비아는 새침하게 웃었다. 이렇게 귀엽게 구는 연인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몸을 움직여 모로 누운 루이스는 제 옆자리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옆에 누우라는 그의 흔치 않은 어리광에 잠시 고민하던 트리비아는 자신이 아직 풀메이크업 상태이며, 잠들기엔 불편한 옷차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미 맨얼굴을 보여준 남자친구지만,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런 트리비아의 고민을 읽기라도 한 양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손목을 잡아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빠져나가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트리비아는 못 이긴 척, 받아주기로 했다.
내일 일어나면 분명 그동안 자길 두고 어딜 갔었던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또 싸우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늘 하루의 마지막을 오롯이 차지하는 값으로 치르기로 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리 밑지는 것도 아니란 생각에 트리비아는 다시 눈을 감고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내 영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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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외출, 삼십분.
2015/01/21
포트레너드에 위치한 홀든 은행, 오후 두 시 반. 다이무스 홀든은 서류에 사인하고 안경을 벗었다. 흰 종이에 빽빽하게 쓰인 검은 글씨를 오래 보고 있자니 눈이 피곤했다. 남은 서류와 시계를 번갈아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짬을 내도 기껏해야 삼십분 정도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면 좀 살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코트를 집어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서두르면 오며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오며가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 생각이 향하는 곳에 발이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다이무스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출근할 때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따스한 게 딱 밖에서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라 그와 함께 공원이라도 거닐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놀랍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헛기침을 하며 클랜사무소의 기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드렉슬러를 지나 서점의 문을 열었다. 난로에 주전자를 올리던 루이스는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잠시, 피식 웃으며 다이무스를 맞았다.
“나도 한 잔 주겠나.”
“어쩐지 오늘은 물을 많이 넣고 싶더라니.”
루이스는 물을 더 붓는 대신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권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미소에 잔뜩 굳었던 얼굴의 근육을 슬쩍 풀며 소파에 앉았고, 루이스는 책장에 기대어 서선 물끄러미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점심은 먹었나?”
“네. 요 앞 카페에서 샌드위치 사다 먹었죠. 당신은요, 일 하다 거르진 않았나요?”
“바쁘긴 하지만 그정도는 아니다. 요전에 애인한테 한소리 듣기도 했고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뜨며 애인이라고 돌려 말하는 다이무스의 말에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숨을 집어삼키듯 웃고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한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마주한 시선에 눈이 감기고, 입술이 닿는다. 다가왔던 것처럼 천천히 입술을 떼고. 눈을 뜬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짙은 회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냥 그것만으로 좋아서 미소를 머금자 다이무스가 한 번 더 입술을 마주쳤다. 짧게 여러번, 새가 모이를 쪼듯 입술을 맞추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물이 끓으며 내는 소리에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잠시만요, 단 둘 뿐임에도 작게 속삭이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다이무스는 멈칫했다. 그 목소리는 잠자리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것과 매우 닮아있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묵묵히 차를 타는 루이스의 등을 보며 다이무스는 제 애인의 몸을 훑었다. 머리부터 흰 목덜미, 곧게 뻗은 등줄기를 따라 매끈한 허리와 탄탄한 엉덩이, 그리고 자신밖에 모르는 은밀한 곳과 바지 안에 감춰진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다이무스는 그의 피부를 만지며 단정한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겨내는 상상을 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왔던 길을 되짚어가자 때마침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마른 것 같군.”
“그런가요.”
루이스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일에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했다. 다이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은 루이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그쪽이 아니다.”
다이무스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봤다. 다이무스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고, 루이스는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귀가 붉어지는 걸 본 다이무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제 손을 움직였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루이스가 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보여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보탰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할 정도로 급하진 않다.”
“윽….”
정곡을 찔렸는지, 루이스가 움찔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하니 안 놀릴래야 안 놀릴 수가 없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 루이스는 얼굴을 붉힌 채 쭈뼛거리며 다가와 다이무스의 무릎에 앉았고, 다이무스는 만족스럽게 애인의 몸을 끌어안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점 특유의 종이와 잉크냄새와 섞여 나는 비누냄새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가 그렇게 루이스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자 꼬물거리다 포기하곤 몸에 힘을 뺐다. 애초에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건만, 루이스는 늘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했다. 루이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을 쓰다듬으며 도드라진 견갑골을 매만지던 다이무스는 제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쯧, 역시 말랐군. 잘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냥 바빴을 뿐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꼭 제 때 챙겨먹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지?”
“다이무스.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군. 데리러 오겠다.”
다이무스의 막무가내에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무릎에 앉힌 덕에 본래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가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턱을 치켜들어 그에게 키스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루이스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면 나오는 버릇에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들어줄 시간은 앞으로 오 분 정도지만.”
“그…. 어차피 안을 거라면, 음…. 보통 그렇잖아요.”
아무리 머리가 좋은 다이무스라도 루이스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정말이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다 하는 말이 겨우 이런 거라니.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그 마음이 귀여워 낮게 웃었다. 루이스는 제가 한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깨닫고는 당장 달아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다이무스에게 허리를 잡힌 채론 어딜 갈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진정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는 루이스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우니 견딜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지. 그리고 나는….”
다이무스는 천천히 허리를 쓰다듬다 대화를 거부하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움찔, 몸을 떨며 무슨 짓이냐는 듯 저를 쏘아보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을 때 살이 만져지는 쪽이 좋다.”
루이스의 얼어붙은 얼굴에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은 다이무스는 그의 이마에 입 맞추고, 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차는 이렇게 마시는 게 아니지만, 차를 마시러온 게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이무스는 포켓에 넣어둔 금장 회중시계를 꺼냈다. 두시 오십분. 떠나야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하아. 결국 당신도 홀든이네요.”
“무슨 뜻이지.”
루이스가 말하는 홀든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기에 다이무스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비교를 당해서가 아니라, 루이스가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는 데서 나오는 유치한 질투였다. 계속 다이무스에게 휘둘리던 루이스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빼곤 빙그레 웃었다.
“여기 서있으면 당신 목소리 들리는 거 알아요?”
“루이스.”
“전 오늘 일곱 시에 퇴근할 겁니다. 앞으로 네 시간 조금 남았네요.”
명백한 말 돌리기와 축객령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엷은 미소에 조금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일곱시까지 퇴근해 루이스를 데리러 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자세한 건 이따 듣도록 하지.”
“조심히 가세요.”
문까지 마중을 나온 루이스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쉬이 알려줄 것 같지 않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도발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묻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이무스는 코웃음 치며 은행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서 같은 베개를 베면 못 할 말이 없다고, 오랜만에 같이 해가 뜨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그 한탄과 닮은 말이 무슨 뜻인지 자연스레 듣게 되리라. 오후 세 시. 초침이 막 5를 지나가는 걸 확인한 다이무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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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루이] Intro.
2015/01/21
*무언가의 번데기au
오후 아홉시 반. 잔뜩 쌓인 업무로부터 퇴근한 다이무스 홀든은 자택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고급주택답게 육중한 쇠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다이무스는 불이 켜진 거실에 노닥거리는 형제들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제 와인 셀러에 손을 댔는지,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리며 향을 음미하던 벨져와 눈이 마주친 다이무스는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왔구나.”
“불러놓고, 늦었네. 형아.”
“그러는 작은형도 좀 전에 왔으면서~.”
이글은 장난스레 벨져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쳤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다이무스, 당장 어느 파티에 참석해도 될 법한 차림의 벨져와 달리 이글은 청바지에 점퍼차림이었다. 각각 경감, 검사직을 하나씩 꿰찬 형들과 달리 책상머리 업무는 싫다며 멋대로 군 자유로운 영혼다웠다. 다이무스는 이글과 벨져를 한 번씩 쳐다보곤 가방에서 서류철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이건 또 뭐야.”
“귀찮은 일이면 안 해.”
벨져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고 이글은 소파에 길게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 서류철에 손도 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안타리우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핵심만 짚어서, 간단하고 짧게. 다이무스의 말에 이글과 벨져가 눈을 치켜떴다. 안타리우스라고 하는 조직은 어느 쪽으로든 손을 뻗고 있었기에 이쪽에 몸 담은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접근하려고. 꼬리는?”
“걔네가 잡혀는 준대?”
“우리만으로는 부족하지.”
다이무스는 깔끔하게 시인했다. 경찰조직을 전부 동원해도 그들의 꼬리만 쫓을 뿐 정작 그들의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각종 범죄부터 정치, 경제, 종교에까지 숨어든 그들은 일반인에 섞여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울 뿐더러, 잡아도 꼬리를 자르고 도마뱀처럼 빠져나가는 게 안타리우스였다.
“더 깊이, 들어가야한다.”
“어떻게?”
방금 전까지 심드렁하던 이글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있었고, 벨져는 와인잔을 흔들던 손을 멈췄다. 이글의 질문과 벨져의 눈빛에 다이무스는 대답 대신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빤 그는 막 불을 붙인 장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지 않은 신호에 벨져와 이글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이무스가 아무 말 없이 입가를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기대자 벨져는 이글에게 눈짓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펼친 뒤 바로 인상을 구기고 파일을 내던지긴 했지만.
“뭔데 그래?”
흔치않은 벨져의 반응에 흥미가 동했는지 이글도 파일을 집어들었다. 바로 첫 장에 나오는 신상명세에 이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바로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 하하. 작은형이 질색할 만 하네.”
“닥쳐라, 이글.”
“지금 상황에 그보다 적임자는 없다.”
“그래서 그 더러운 범죄자새끼를 끌어다 쓰겠다고? 그렇게 사람이 없나?”
벨져는 여과없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타고난 능력과 배경으로 주구장창 탄탄대로를 달리던 검사 벨져 홀든의 이력에 단 한 번 굴욕을 남긴 그를 벨져가 좋아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다이무스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엔 서류를 거들떠도 안 보던 이글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서류를 읽어내렸다.
“재밌네. 난 찬성.”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형아?”
“더 큰 목적을 위해 가치있는 일이다.”
벨져가 어깃장을 놓는 건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기에 다이무스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와인병을 들었다. 그리 달가운 선택지는 아니지만 최악보단 차악이 낫다. 이이제이, 오랑캐는 오랑캐로 막는다. 다이무스는 창가에 서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병째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위에서 허가는 내려왔지만 이번 일은 다이무스 홀든에게도 쉽지 않았기에 적어도 함께 할 두 동생에게 미리 알릴 필요는 있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벨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이 하는지 입술을 매만지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두사람을 번갈아 보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벨져, 이글. 우린 지금 설계자가 필요하다.”
사전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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