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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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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이런 녀석을 받아준 걸까. 벨져는 한순간의 변덕을 후회했다. 덕분에 수월하게 갈 길을 돌아 돌아가고 있다. 얼음심장은 무슨. 세월에 날카롭게 벼려졌나 했더니 여전히 온건하다 못해 물러 터졌다. 연합의 동료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벨져의 곁에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안타리우스와 인식의 문, 그리고 연인을 잃은 남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안타리우스를 쫓던 벨져는 연합으로 돌아가려던 루이스를 낚아챘다. 물론 잡는다고 잡힐 녀석이 아니기에 남아있는 건 그의 의지기도 하다. 벨져는 그 날 펍에서 루이스를 주운 제 변덕과 그의 협조가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헤아리지 않았다. 녀석은 여전히 속을 모를 놈이고, 서로 깊이 얽히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마주한 과거의 실수는 예상 외로 덤덤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걸 알았으면 손을 뻗지 않았을 텐데. 넓은 아량으로 따뜻한 침대를 제공한 벨져는 아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제 심중이나 캐는 루이스를 마주했고, 그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루이스가 순순히 내놓은 정보는 꽤나 유용했다.
여제가 떠난 새로운 공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 곳을 찾는 과정엔 어김없이 안타리우스가 등장했다며 자신이 본 것과 그림자로만 알 수 있는 것들, 유럽을 헤집고 다니면서 알아낸 정보는 벨져가 혼자 수소문하며 모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벨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꽤 쓸 만한 길잡이였다. 능력도 확실하고, 시간이 흐르며 다져진 경험에 나름 쓸만한 머리까지 갖췄으니 껄끄러운 과거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만 아니라면 먼저 나서서 친분을 쌓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 사사건건 부딪히는 게 문제였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과 태생, 경험이 충돌했다. 양보? 녀석과는 원래부터 상성이 안 좋다. 벨져는 혀를 찼다.
알프스 산맥에 연구소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 까지는 좋다. 그 공은 인정한다. 그래서 릭과 함께 알프스까지 왔고, 대낮에 돌아다니는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도 발견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내놓은 수단과 방법은 벨져의 성에 차질 않았다. 고작 열쇠와 신분증을 훔쳐 연구소 안을 둘러보는 거라니.
물론 힘으로 뺏는 것 보다 잠시 잃어버린 걸로 하는 게 위험부담이 적겠지만, 벨져는 열이면 아홉 그의 편을 드는 릭도, 거 보라며 으스대는 녀석도 탐탁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벨져는 해가 지자마자 사람 많은 펍의 구석탱이에 처박혀 영국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수다나 떨고 있는 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화기애애한 꼴이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목적이 뭔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펍의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소문에는 취향이 그쪽이라던데. 과연 농부들과 다른 말끔한 차림새에 여자가 추근덕거려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게 소문이 확실한 것 같았다. 남자의 눈이 닿기 전, 벨져는 머리까지 뒤집어쓴 후드를 더 당겨썼다.
한가롭게 디저트에 대해 얘기하던 루이스를 쏘아보자 슬며시 눈을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눈짓을 주고받은 루이스가 남자가 볼 수 없게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바뀐 분위기에 릭도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살폈다. 뭔가 계획이라도 있는 게 아니었나? 루이스는 흘긋 남자를 보고는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앉아서 서너 잔은 마셨던 것 같은데 얼굴 색 하나 안 변하는 녀석이 릭의 잔까지 잡아 쭉 들이켰다. 열쇠를 훔치든 남자를 납치하든 뭘 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벨져는 눈을 찡그렸다. 그 사이 남자가 두 명째 여자를 거절했다. 낭패라는 듯 펍 안을 기웃거리던 남자가 바에 앉았다. 바텐더에게 무언갈 은밀히 속삭였지만 바텐더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다간 남자가 가버릴 판이다. 벨져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루이스를 채근했다.
“저 쪽?”
“아니. 너 말고. 넌 너무 눈에 띄어.”
벨져는 불만의 표시로 살짝 눈을 찡그렸으나 애석하게도 루이스의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래서 너무 아름다워도 탈이라니까. 루이스는 곤란해 하는 릭을 한 번 올려다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를 향해 걸어가는데,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루이스는 그의 옆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처연한 얼굴하며, 살짝 내리깐 눈, 거기에 얼음도 없이 마시는 독한 술. 누가 봐도 실연을 당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태연해서 잊고 말았던 이유를 다시 깨달을 정도였다. 연거푸 잔을 비운 루이스 옆, 남자가 루이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무어라 말을 걸었다. 작은 목소리라 뭐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순간 팽팽 돌아가던 생각이 멈췄다. 그를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 팔에 턱을 기대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술을 마시던 녀석이 말을 거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사르르 웃는데,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마치 몇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는 남자의 팔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에 이를 악물었다. 헛웃음이 샜다. 사내새끼가 눈웃음을 치는 꼴 하고는.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저런 싸구려 수작질이라니, 같잖기 그지없다. 실망하기도 아까울 정도로 기가 차는 수준이었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펍의 벽에 등을 기댔다. 루이스는 아예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살거리고 있었다. 펍은 시끄러웠고,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남자는 기분이 좋았고, 루이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입을 여는 건 추임새를 넣는 것 뿐이다.
남자가 들뜨면 들뜰수록 벨져의 기분은 수직 하강했다. 저 녀석이 뭘 하던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저렇게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갑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루이스 앞에 놓인 잔에 술이 다시 채워지고 남자 앞에도 잔이 늘어섰다. 가끔 속삭이는 말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 아주 침대까지 갈 모양이다. 남자의 손이 루이스의 어깨에서 등까지 내려갔음에도 루이스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마실 뿐이었다. 저게 진짜 취했나. 남자는 거부하지 않는 게 동의의 표시라 생각했는지 등줄기를 따라 훑으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벨져의 인내심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이, 그 손 놓지.”
“뭐야, 그쪽 애인?”
“애인...?”
루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짜 취한 건지 표정이 나른했다. 무슨 짓을 하는 짓이냐며 눈으로 묻자 루이스가 씩 웃었다. 저 새끼가...!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남자는 루이스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글쎄, 저런 타입 별론데.”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으며 순순히 끌려가자 남자가 비웃음이 분명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참아줘야 하는가. 명백히 저를 놀려먹고 있는 그의 그 잘난 얼굴에 당장이라도 한 대 휘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예 머리가 없는 놈도 아니고, 완전히 술에 취한 것도 아니니 뭔가 하려는 게 있을 것이다. 벨져는 꾹 눌러 참았다.
“집착이 심한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
“뭐 이 새끼야?”
벨져는 기어코 제 속을 뒤짚어 엎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루이스는 슬쩍 웃더니 남자 뒤편으로 던지라고 눈짓했다.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일어났다. 제정신이 분명한 차가운 눈빛에 벨져는 자신이 그의 계획대로 놀아났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너 뭐야?”
남자가 쓰러진 루이스를 넘어 벨져에게 성큼 다가왔다. 취한 척,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그를 붙잡은 루이스가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미안해요. 잠깐, 윽....”
그의 가슴에 기댄 루이스가 숨을 고르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눈을 찡그리며 낮은 한숨을 내쉰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렸다.
“저쪽 것까지.”
바텐더가 빠르게 지폐를 셌다. 루이스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고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지 루이스를 바라봤다. 벨져에게 걸어온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가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벨져는 남자를 응시하며 루이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서, 뿌리칠 수 있음에도 같잖은 연인놀이를 계속했다.
“미안.”
펍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바로 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벽에 기대서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벨져는 안에서 꾹 참았던 일을 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윽...!”
각오할 새도 없이 얻어맞은 루이스는 그대로 엎어졌다. 비릿하게 퍼지는 피맛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다.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화를 참고 있는 벨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하하, 그러게.”
더 맞을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전보다는 철이 든 모양이다. 루이스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진심으로 때려서인가,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급하게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킨 것과 맞물려 속까지 울렁거렸다. 루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덕분에 챙겼어.”
벨져는 루이스가 꺼낸 지갑과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핥는 루이스를 번갈아보고 그가 내민 지갑을 받아들었다.
“배운 거 없는 거리의 고아라서.”
묻지도 않고, 보기만 했을 뿐인데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코웃음을 흘리고 지갑에 들어있는 명함과 고리에 매달린 열쇠를 떼어냈다.
“좋은 지갑이네.”
“좋기는.”
볼 일을 마친 벨져가 다시 지갑을 루이스에게 던졌다. 루이스는 지갑을 살피다 펍의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나온 릭이 서글서글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잘 됐소? 아니, 루이스 그대 입술이.”
“성질이 좀 더러워서 말이죠.”
“아직 덜 맞았나보군.”
“이것 좀 펍 안에 버려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소.”
루이스는 릭에게 지갑을 건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닌 척 사람을 다루는 게 능숙하다. 벨져는 혀를 찼다. 하여간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다. 주먹을 털며 검자루를 쥐었다 놓자 루이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물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슬퍼보여서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거니와, 그와 정다운 대화를 할 사이도 아닌데 왜 자꾸만 시선이 가는지 모를 일이다.
슬쩍 눈을 뜬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졌음에도 반쯤 뜬 눈만은 붉게 빛나고, 그 나른하고 퇴폐적인 눈빛에 순간 벨져는 침을 삼켰다.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는 녀석의 얼굴에 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까 펍에서 남자에게 짓던 눈이 아니다. 도발도, 유혹도 아닌 그저 흡연에 불과한데 야릇한 분위기가 벨져의 입과 발을 얼려 꼼짝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릭이 나오자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끈 루이스가 방금 그 얼굴과 분위기는 전부 허상이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드디어 숨통이 트여 벨져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내가 이 벨져 홀든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고작 저거 따위에? 언짢아진 이유를 찾아낸 벨져는 후드를 뒤집어쓴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여간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따지고 보면 이 일도 다 제 멋대로 자기 잘난 맛에 한 거 아닌가. 사람을 들러리로 쓰기나 하고.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한 대 더 패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다.
멀쩡히 걷던 녀석이 비틀거리지만 않았어도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 그 면상에 한 대 갈겨주었을 텐데. 릭과 걷던 녀석이 그의 팔을 잡으며 낮게 신음했다. 멀쩡해 보인다 했더니, 급하게 마신 술이 이제야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멍청하긴. 한 손으로 입을 틑어막은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루이스에게 괜찮으냐 묻는 릭의 손에 쥐어주었다.
“먼저 가겠다. 버리고 오던지, 사람 꼴로 만들어오던지.”
황망하게 저를 바라보는 릭의 눈빛에도 벨져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녀석의 추한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고, 그 뒤치다꺼리를 해줄 생각도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으니 그걸로 끝,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면 그만인데도 자꾸만 눈에 밟혀 기어이 멈춰 섰다.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린 벨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루이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를 다시 만난 날도 저렇게 취해있었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오려는지, 바람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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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벨져는 루이스의 방을 나서 바로 옆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 왔는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릭이 벨져를 맞았다.
“오, 왔소?”
“일행이 늘었다.”
“응? 동생도 떨어뜨리고 온 거 아니었소?”
“그녀석 말고, 좀 더 궁상맞은 결정사.”
“결정사? 잠깐, 그대 혹시…!”
릭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벨져는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일일이 답해줄 필요는 없다는 게 벨져의 지론이었다. 릭 앞이라고 바뀔 것도 없었다. 걱정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준 성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는 아량을 보이기로 했다.
“괜찮…소…?”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오.”
되려 묻자 릭은 머쓱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신문과 커피를 드는 대신 불안하게 손을 매만지며 눈치를 보는 게 거슬렸다. 그래도 벨져는 참았다. 건방지고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따박따박 하는 말마다 어깃장을 놓는 녀석보다야.
“그런데…. 정말 그… 그 사람이오?”
“연합의 3급 능력자 나부랭이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색한 기류 속에 눈치를 보기 바쁜 그를 향해 눈을 흘기던 벨져는 먼저 시선을 거뒀다. 릭 역시 흔히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를 책망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지겹도록 들은 소리고, 지겹다 못해 무뎌진 눈빛과 표정이다. 벨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를 신경 쓰고,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이 제게 씌운 편견의 굴레 속 벨져 홀든이었다.
“그…. 벨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그렇다면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소?”
벨져는 창문 앞에 섰다. 안타리우스의 의식은 성공해 인식의 문은 열렸고,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다. 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액자를 찾아 시바 포를 쫓는 것이고 아직 시바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한 벨져는 릭의 눈을 마주했다.
“그 녀석 하나 낀다고 달라질 건 없어. 난 내 일을 할 뿐이다.”
“…그대는 정말 대단하구려.”
“흥.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그러니 앞으로 며칠만 더 신세를 지도록 하지.”
릭이 난처한 듯 시선을 피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 좋다. 그보다는 루사노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의식이 성공해버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거리를 내려다봤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둠이 내렸던 거리엔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 속에 섞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인식의 문에 다가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문의 형태가 아니기에 더더욱 접근하기 어렵고, 그나마 아는 통로는 안타리우스에 점거됐다. 릭의 공간 이동 능력이 알려졌으니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긴 무리다. 벨져는 그림자와 액자를 넘나드는 그녀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하나는 행방을 모르고,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돌아올 가능성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멍청한 남자가 적들이 포진해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할 리가 없으니. 벨져는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자꾸만 어젯밤 어둑한 조명 아래 슬픔을 술로 삼키던 그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겠지.”
“으응?”
“어쨌거나 그림자를 열고 다녔으니 아무것도 모르진 않겠지. 액자에 대한 행방도 어쩌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지만. 릭이 눈을 깜박였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뚱하게 있느니 실제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벨져는 릭에게 옆방에 가보란 뜻으로 턱을 까딱였다.
“바로 옆이다.”
“그럼…. 다녀오겠소.”
벨져는 릭을 보내고 발신인도 수취인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런 게 없어도 누가 보낸 건지 뻔하다. 벨져는 시킨 일을 마무리했다는 짧은 메모를 보고 동봉된 정보를 외운 뒤 봉투째 태워버렸다.
릭이 마시던 커피에선 김이 올라오지 않고, 탄내 대신 벨져가 뿌린 향수 냄새가 방 안에 퍼지도록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질 않았다. 뭔가 일이 있으면 소리라도 들릴 텐데. 벨져는 루이스가 릭과 함께 연합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렸다가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이 있는데 그대로 꽁지를 내뺐으리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얕은 수를 썼던 녀석이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벨져는 다리를 꼰 채 문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온 신경을 문 너머에 집중하고 있기를 얼마, 릭의 웃음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와 냉큼 릭이 보던 신문을 집어들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신문에는 헌터에 대한 속보가 실려 있었고, 바로 얼마 전 마주쳤던 소리 능력자 자매에 대한 칼럼도 실려있었다.
“벨져, 우리 왔소.”
우리. 라는 말에 벨져는 눈썹을 꿈틀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 봤다고 벌써 우리라니. 벨져가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상기된 얼굴의 릭이 루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젖은 루이스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방울지고, 맺힌 물방울은 흰 목을 타고 흘러 티셔츠를 적셨다.
“칠칠치 못하긴.”
작게 중얼거리자 벨져를 향해 슬쩍 눈을 치뜨다가, 릭이 커피를 권하자 바로 고개를 들어 언제 눈을 흘겼냐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벨져는 다시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더 볼 일이 남아있는 겁니까?”
“아, 나는 벨져와 동행한 것 뿐이라.”
“그렇군요.”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자신을 빼고 돌아가는 대화에 벨져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둘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니 그 정도 주도권은 가져도 무방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안타리우스와 그 세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럼…. 인식의 문은?”
“내가 아는 루트는 막혔다.”
당당한 벨져의 말에 루이스가 기가 찬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를 매만지다가 벨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흰 손이 테이블 위에 있던 지도를 잡아 펼친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이었다.
벨져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마른 손목과 손등에 난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그 자신조차 갉아먹는 결정검 때문인지, 루이스의 손은 몇 년 사이에 성한 곳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온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도를 톡톡 두드리던 손끝이 한 점을 짚었다.
“스위스…?”
“일단 제일 가까운 곳은 인터라켄인데….”
“하늘이랑 눈밖에 볼 게 없는 곳이군.”
“여기서 소득이 없으면 거기로 가려했습니다.”
루이스는 지도를 짚으며 안타리우스의 연구소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고 릭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얘기의 주인공이고 연합의 영웅인데다 방금 처음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건의 주요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저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유명인을 직접 보면 신기할 테지. 릭에겐 얼마든지 이해하고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쪽. 또, 엄연히 같은 자리에 있는 자신을 빼놓고 릭에게 말을 건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루이스에게 불쾌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그를 노려보자 애먼 릭이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아, 그……. 그렇지. 커피. 커피 가져오겠소. 얘기들 나누시오.”
황급히 일어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숨을 내쉰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조하겠다더니, 저와는 말도 섞으려 들지 않는다. 벌써부터 어긋나는 말과 행동에 벨져는 젖은 머리를 터는 루이스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흰 목덜미에 물방울이 떨어져 흘렀다.
“협조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협조하겠다고 했지, 네 비위 맞춰주며 수행원 노릇 한다고 하지 않았어.”
릭에겐 그렇게 친절했으면서, 오늘 처음 본 사람보다 못한 냉랭한 취급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 여전하군.”
“지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홀든.”
“어떻게 믿지?”
“난 내가 들어가게 될 구덩이에 함정을 설치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거든.”
한 없이 0도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 타오르는 황혼의 색으로 정반대의 기운을 품은 눈을 마주하며 벨져는 수를 셌다. 말 한 마디 없지만 그 역시 자신의 수를 읽고, 읽고, 또 읽어 그 다음을 노리고 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기싸움. 먼저 백기를 든 건 루이스였다.
“그만. 이런 거 그만 하기로 했잖아.”
“먼저 시작한 건 너다.”
“…그래.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진짜야. 못 믿겠으면 말고.”
“믿는다.”
루이스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피곤하다는 듯 무심한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벨져를 바라봤다. 조금 즐거워진 벨져는 손을 모아 배 위에 얹고 노래하듯 말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의뭉스러운 모양이었으나 벨져 자신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안다 해도 말해주고 싶지 않다. 유치한 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벨져는 우위를 점한 이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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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Scarface. 02.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한 다이무스는 따라 나갈 필요도 없게 준비된 식료품들을 보고 찬장 가득 들어찬 통조림에서 눈을 돌렸다. 베이컨을 꺼내고, 계란을 꺼내 팬을 달궜다. 간단하게 먹는 거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직접 겪어본 게 아니니 섣불리 판단하는 건 금물이지만 루이스는 영국인이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부엌을 맡기긴 불안했다. 달궈진 팬에 베이컨을 먼저 올리고, 양상추를 흐르는 물에 씻는 중에 큰 소리가 났다. 계단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다이무스는 불을 끄고 부엌을 나갔다.
“루이스!”
계단에서 내려오다 굴렀는지, 루이스가 머리를 잡고 낮게 신음했다. 약한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다이무스는 몸을 웅크리는 루이스를 일으켜 앉히려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난 것도 아닌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심상치 않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이렇게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대체 왜 퇴원을 하고 불편한 조건을 받아들였는가. 다이무스는 발로 문을 열고 루이스를 침대 위에 바로 눕혔다. 상태를 살피는 건 그 다음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으론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의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겨우 진정이 됐는지, 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다이무스를 향한다. 다이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군.”
“…괜찮습니다.”
“이게 괜찮은 거라고?”
루이스는 머리를 누른 다이무스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제대로 힘도 주지 못하는 주제에, 괜찮다고 하는 건 허세라고 하기도 안쓰러울 뿐이었다. 루이스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이 정도로 안 좋은 줄은 몰랐다만.”
“잠깐 현기증이 나서 그런 겁니다.”
적대세력의, 그것도 자신의 감시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고, 다이무스가 아는 결정의 루이스는 그런 데 약은 수를 쓸 사람도 아니었다. 읽지 못한 다른 수가 있는가. 다이무스는 이 집 문을 열고 들어오던 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은 루이스의 얼굴을 보며 이 일을 정한 회사의 수뇌부와 연합을 떠올렸다. 홀든을 겨냥한 함정일지도 모르고, 연합의 계략일 수도 있다.
그냥 무시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이 때 괜히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다이무스는 신중해야 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됐다. 그래야 한다. 응당 그래야 했다. 하지만 다이무스는 눈 앞의 남자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눈과 상황을 모두 지워버려도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숨을 멈출 것 같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음 절벽 끝에 서서 기우뚱 쓰러질 것만 같은 그였다. 서늘한 전의를 풍기며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과거의 루이스가 아니다. 전장이 아니더라도 흘러나오던 냉기였다. 이렇게 약한 사내가 아니었는데.
다이무스는 베개를 세워 루이스의 등 뒤에 놓고, 이불을 끌어다 무릎을 덮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만큼이나 아무 말 없이 제 도움을 받는 그가 낯설었다.
“쉬어라.”
“…다이무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을 모아 앉은 루이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 한 게 아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슬며시 웃었다. 쓰디 쓴, 부서지는 듯한 미소에 다이무스의 얼굴이 굳었다.
“저도 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습니다.”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뭐지?”
“숨겨봤자 소용 없을 테니까요. 한동안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이 무슨 어리석은 발상인가. 다이무스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과 달리 루이스는 한 짐을 덜었다는 듯 베개에 몸을 기대고 다이무스와 눈을 맞췄다. 그는 저를 속이려 했다는 것에 불쾌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냐는 듯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연합의 영웅이 안타리우스의 습격에 당해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있는 게 좋을 리 없다. 그건 연합도 회사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웅'이기에 더더욱. 다이무스는 이제야 겨우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를 깨달았다.
루이스가, 능력자들의 영웅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불안과 공포가 만연한 능력자 세계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불안과 공포는 안타리우스를 비롯한 어둠의 세력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그들은 공포와 불안을 먹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어 세력을 늘리고 회사와 연합,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전체를 혼란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더 기세등등하게 활개를 치고 다닐 테고, 끝내는 연합과 회사가 손을 합쳐도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마지 못해 그가 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는 걸로 하겠다.”
“고맙습니다.”
“따로 필요한 건.”
루이스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다이무스는 그대로 돌아섰다. 연민인지 무엇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어지럽게 섞이며 가슴을 짓눌렀다. 누구의 의견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설득하는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모두를 위해서'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 가혹하고 부당한 요구에 싫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 마치 과거에 가문을 위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내려오던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쓰러졌던 자리에 멈춰섰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더 무거운 역할을 떠맡고 말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있는 침실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하게 하려던 점심이었는데, 편하게 할 수는 없게 돼버렸다. 다이무스는 꺼내놓은 계란과 다 식은 베이컨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오, 홀든 경.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막내! 그래서 저쪽이랑은 어때?”
오랜만에 만난 회사의 용기사들이 살갑게 다이무스를 맞았다. 다이무스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빼면 딱히 불편한 건 없다. 첫날 합의한 대로 다이무스는 그가 보이는 곳에서 업무를 보고,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말 같지만 전혀 다르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는 질문에 다이무스는 그저 다르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찾았다. 그는 연합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제게는 보여주지 않은 서글서글한 미소에 다이무스는 시선을 거뒀다. 그걸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드렉슬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면 어디 에이스까지 나서야 하겠냐. 그가 작게 덧붙인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들킨 후로 두터운 벽을 약간 허문 것 같긴 하지만 결정의 루이스는 비밀을 쉽사리 터놓을 인물이 못 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타라의 목소리에 화기애애하게 안부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싹 입을 다물었다. 타라와 루이스가 서로 못 잡아 안달이 난 사이라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고, 그 둘의 신경전을 막아서던 여제는 이제 없었다. 연합 쪽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의 눈치를 보는 그들을 두고 다이무스는 타라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누구고 할 거 없이 자리에 참석한 능력자들이 불과 얼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야 물론 회사와 연합의 축이 되는 둘이니 회의에 빠질 수 없지만 이래서야 초장부터 삐걱거릴 판이었다. 서늘한 냉기가 가라앉은 공기 속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타라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루이스,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서류를 정리하는 타라.
하나 둘 눈치를 보며 자리를 채우고 마침내 루이스가 둥근 테이블로 다가와 다이무스 옆에 앉았다. 타라와 정반대 자리라곤 하지만, 굳이 다른 자리를 두고 제 옆자리에 앉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몸은 좀 어때?”
“그쪽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럼 다행이네. 바로 실전에 투입할 인력도 부족한데.”
“돈 몇 푼에 휘둘릴 정도로 궁핍하진 않아.”
“어머, 그랬어? 몰랐네.”
아니나 다를까 가벼운 안부로 시작한 대화가 채 일 분도 못가 살벌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둘의 신경전은 어디까지나 있는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그만 하란 뜻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자자, 그만 하고. 이러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연합의 아론 휴톤이 사람 좋은 말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루이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이었지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팔걸이에 얹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다이무스는 못 본 척 했다.
“좋아요.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안타리우스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니는 사이에 우리는 근거지를 급습해서 안개수집장치를 파괴합니다. 이미 윗선에서 얘기가 끝난 거니까 더 할 말은 없고, 인선을 확정하고 세부 작전을 세우면 그걸로 회의는 끝. 어때, 간단하죠?”
타라는 안경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루이스는 가만히 그녀를 노려보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지는 바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이무스는 지금 루이스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잔뜩 힘을 준 미간. 어지간히 몸이 안 좋은지 의자 팔걸이를 쥔 손에 살얼음이 꼈다. 이쯤 나섰어야 할 루이스가 말이 없자 아론 휴톤이 입을 열어 연합에서 내정한 인선을 터놓고, 로라스가 그 대화에 끼어들며 타라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사이를 틈타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움찔한 루이스가 한 박자 늦게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다이무스에게 눈길을 줬다. 잡은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려 맞잡자 얼음이 녹아 손을 적셨다.
“그래서, 아무리도 토마스가 괜찮지 않을까…하는데…. 루이스?”
“아니. 안돼.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토마스를 내보내기엔 위험이 커. 차라리 재단의 챌피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때론 실전이 더 큰 경험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언제까지 후방에서 깨작거리고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래?”
타라의 도발에 루이스가 눈을 치켜떴다. 여제가 없는 그에겐 여유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
“…좋습니다.”
의외의 답에 앉아있던 이들의 눈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와 잡았던 손을 놓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 양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당신이 동행하는 걸 조건으로.”
“…좋아.”
타라는 루이스의 눈을 바라보다 시원하게 긍정하고 펜을 움직였다. 서로 한 발씩 물러난 셈이다. 루이스에게 온통 신경을 집중하느라 잠시 흐름을 놓쳤던 다이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누군가 질문이라도 했으면 곤란했겠지만 평소에도 과묵한 다이무스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랑 새끼 결정사가 전방에서 연구소 파괴를 맡는 걸로 하고…. 사방에 둘씩은 배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후방은 내가 맡지. 휴톤과 레베카가 각각 측면을 맡아줘.”
“좋아. 우리는 이쪽에 있는 용기사 둘.”
“윽….”
드렉슬러가 낭패를 봤다는 얼굴인 반면 로라스는 화색을 띠었다. 그가 연합의 아론 휴톤을 흠모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아무래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보가 새지 않게 시행일만 직전에 고지하는 걸로 남겨놓고 나서야 회의가 얼추 마무리 됐다.
다이무스는 내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꽤 시간이 지나서 오늘 은행 업무를 보긴 무리일 듯 싶었다. 타라는 서츄철을 챙기며 일어나 냉큼 도망가려는 드렉슬러를 잡아 세웠다. 또 서류를 미루고 공방에 틀어박혔겠거니 어림짐작했다. 늘상 있는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타라는 회의실을 나가기 전, 다이무스를 불러세웠다. 무언가를 부탁할 때, 미안해하는 얼굴로.
“홀든. 그럼 수고해줘. 둘이 세트잖아?”
다이무스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둘이 세트, 라는 건 물론 지금 상황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고,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가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지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걸까. 루이스의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일이 늘 것이라는 표현인가, 그도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 사이 물이 마른 손을 그러쥐었다.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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