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비아 카리나를 놓친 건 간발의 차였다. 의뢰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생포. 그게 안 된다면 그녀의 동행인 영웅 루이스라도 생포할 것. 루드빅은 제 발을 잡고 쓰러져 피를 토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접근해 급소를 차버린 덕에 몸을 일으키는 것도 무리일 텐데, 그 와중에 제게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는 게 용했다. 루드빅은 트리비아가 사라져버린 방향을 한 번 슥 보고는 바짓단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영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를 낮춰 쪼그려 앉은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잡아올렸다. 고통에 눈을 찡그린 루이스의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놓고 일어나 잡힌 다리를 털듯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그 와중에도 다리를 놓을 줄 모르는 손이 희게 질렸다. 푸르스름한 서리가 어리는 걸 본 루드빅은 그의 손을 발로 밟았다. 여태 신음 한 번 안 내던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호오, 이제야 조금 협조할 마음이 든 겁니까?”
“협조는, 무슨.... 크흑....”
“저는 의뢰를 받은 것 뿐입니다만.... 그렇게나 그 여자가 소중한 겁니까? 그녀는 당신을 버렸는데도?”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잡아 눈을 맞출까 생각하며 발 아래 손을 짓이기듯 발을 움직이자 루이스가 다시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질렀다. 조금 즐거워졌는지도 모른다. 기회를 노리며 지켜보는 내내 고요한 호수처럼 얼어붙어 연인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남자다.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 루드빅은 루이스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올렸다.
“큿, 컥.... 흑....”
“대답하세요. 그렇게 그녀가 소중합니까?”
루이스가 손을 긁으며 떼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목이 잡힌 채론 말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잡고 있다가 놓아주자 루이스가 막힌 숨을 들이마시며 콜록거렸다. 반복된 폭력은 사람을 체념하게 만든다. 반항해도 상관 없지만, 기왕이면 고분고분한 편이 포획과 이송에 편한 법이었다. 루드빅은 다시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지로 끌려온 루이스의 눈은 여전히 붉은 적의로 가득차있었다.
“사랑 때문에 대신 죽어주려는 멍청이들이 있긴 했지만.... 안심하세요. 당신도 의뢰 대상 중 하나니까. 순순히 말만 들으면 더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큭.... 그냥, 지금 죽여서 시체를 갖지 그래?”
“저런.... 모처럼의 호의였는데, 거절하신다면야.”
루드빅은 루이스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그의 명성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서라도 과격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건만, 도저히 꺾일 줄 모르는 먹잇감을 상대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손과 발을 묶어 어깨에 들쳐맸다. 몹시 드물게도, 흥미가 생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할 방식의 고문 앞에 그는 어떤 표정일까. 기대로 걸음이 빨라졌다.
눈을 뜬 루이스는 입에 묶인 재갈과,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된 채 높이 묶인 팔의 상태를 깨닫고 낙담했다. 무슨 약을 쓴 건지, 아니면 그 사이에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건지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진 것처럼 멍했다.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멍한 머리를 굴렸다.
이래서야 능력을 쓸 수도,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볼 수도 없다. 상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헌터. 입이 자유롭다 해서 세 치 혀의 농간에 놀아날 리도 없지만 그래도 거래가 된다는 점에서 협상의 여지는 있었다. 어차피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건 트리비아의 몫, 루이스에겐 이렇다할 정보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노리는 것은, 능력자 세계에 고하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2차 능력자 전쟁의 영웅, 연합의 영웅이 헌터에게 사냥당했다. 그 한 마디 명제로 안 그래도 소란스러운 밤에 혼란과 공포가 더할 게 뻔했다. 그러니 여기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차분한 방 안은 호텔이거나 그 비슷한 주거공간이고, 원래 입고 있던 옷 대신 얇은 샤워 가운이 입혀져 있었다. 고문용 전기의자나 소, 돼지처럼 매달린 것도 아니고 침대에 누워있지만 루이스의 발이 닿는 곳에는 흉기는 커녕 이불 조차 없었다.
손을 묶은 사슬을 끊어보려고도 했지만 사슬은 얼음의 냉기를 빨아들여 차가워질 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헌터가 사이퍼를 사냥하기 위해 쓰는 사슬이니 그냥 사슬과 같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슬을 끊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안 된다면 괜한 데 힘을 낭비할 수 없다. 깨어날 때부터 멍한 머리가 아파왔다. 몸에 열기가 도는 게, 아무래도 감염이 됐거나 무슨 약이라도 주사한 모양인데 이대로는 루드빅이나 다른 사람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서서히 오르는 열기에 몸을 일으켜 베개 위에 등을 기댔다. 계속 들려있던 팔이 저렸다. 팔꿈치를 내려 차라리 누구든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마침내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고 금발의 사내가 들어왔다.
“이런, 깨어계셨군요. 어떻습니까, 영웅에서 먹잇감이 된 소감은?”
입에 문 재갈때문에 어차피 대답을 할 수 없는 루이스는 소리 없이 그를 노려봤다. 루드빅은 웃으며 다가와 목을 손에 쥐었다. 그대로 힘주어 잡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루드빅의 손은 가볍게 목을 쓰다듬고는 떨어졌다. 그의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동시에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열이 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루드빅이 무릎을 잡았다.
“아, 혹시라도 반항 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루드빅은 아직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움츠러든 루이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말끔히 씻기고, 사전 작업을 해둔 그는 뭇 여성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무릎을 모아 당기는 방어자세가 내내 품고 있던 흥미를 부추겼다.
다급한 목소리와 흔들리는 몸. 루이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데 소매가 끌리고, 벨져가 너무 높이 있었다. 벨져의 당황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벨져가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당연히 어깨에 닿아야 할 머리가, 가슴에 묻혔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몸과, 멍한 머리. 루이스는 상황파악을 위해 벨져를 밀어내려했으나 손에 들어가는 힘이 이상했다. 손의 크기도, 팔의 길이도 전부.
“이게, 무슨…….”
“괜찮나? 루이스. 정신이 드나?”
“잠깐, 나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네 짓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눈 떴더니 네가…!”
벨져의 반응으로 보아 벨져의 짓도 아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손과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벨져의 손에 손을 대어보니 확연히 보이는 차이에 덜컥 겁부터 났다.
“거울! 으우.”
“잠깐, 움직이지 마라.”
일단 제 모습부터 확인해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익숙하지 않은 몸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행히 벨져가 받아내 침대에서 구르는 일은 막았지만, 속옷도 바지도 흘러내려 티셔츠 한 장 차림으로 벨져의 팔에 안겨 욕실로 가는 건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내가 몇 살로 보여?”
“여섯…, 일곱?”
“……어쩌지.”
벨져의 팔에 안겨 거울 앞에 선 루이스는 낙담했다. 늘 입고 다니던 티셔츠가 허벅지까지 내려오고, 몸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짐작 가는 건.”
“어제는 내내 연합에서 일만……. 아.”
루이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벨져를 올려다봤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초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벨져가 낯설 정도로 커 보였다.
“어제, 어릴 때도 생일 파티 같은 거 해본 적 없다고 했더니 엘리가…….”
“그럼 돌아갈 방법은….”
“능력 제어하는 법도 모르는 애야.”
“큰일이군.”
벨져가 이마를 짚었다. 그 바람에 벨져의 한 팔에 안긴 루이스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벨져의 셔츠를 꼭 잡고 매달렸다.
“잠깐, 놓지 마. 읏.”
“아, 미안하다.”
엉덩이를 받쳐 안아든 벨져가 자세를 고쳤다. 눈을 맞춘 벨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루이스의 머리를 매만졌다.
“일단 뭐라도 걸쳐야겠군.”
“입을 게 없을 텐, 엣취!”
벨져는 추운 욕실에서 나와 루이스를 이불로 감쌌다. 그것도 모자라 여우털 목도리를 가져와 둘러주고, 손발을 주무르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유리조각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루이스는 작은 발을 주무르는 벨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고개를 든 벨져와 눈이 마주쳤다. 자꾸만 흠칫거리는 벨져가 낯설었다.
“저기…….”
“루이스. 머, 먼저 말해라.”
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까지. 루이스는 손을 내밀어 벨져의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풍경 속에 믿을 건 이 사람 하나뿐이었다. 루이스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그래도 정신은 아직 스물일곱, 아니 스물여덟이거든?”
“이, 미…….”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벨져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벨져 홀든은 꽤 보기 좋은 구경거리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마음껏 즐길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발을 까딱였다. 꼬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식사부터 하지. 가져다주겠다. 잠깐 기다리도록.”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벨져가 도망치듯 가버렸다. 어색하다. 갑자기 어려진 몸도, 갑자기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도 전부 낯설고 어려웠다. 높아진 천장과 발이 닿지 않는 침대의 높이. 감정을 통제하는 기관이 어려진 몸에 반응하는 건지, 참아보려 해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울긴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수그린 채 참고 있는데 한 손에 접시를 든 벨져가 다가왔다.
“루이스. 일단 이것 좀.... 루이스?”
상냥한 목소리에 울컥, 설움이 차올라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툭 떨어진 눈물이 이불을 적셨다.
“루이스, 잠깐.”
바닥에 무릎을 꿇은 벨져가 넓고 따스한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고 엄지로 눈가를 문질렀다.
“고개 들어봐라. 루이스. 울지 말고.”
당황한 목소리가,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손이 더 미웠다. 못 돌아가나 하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어려졌다고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에 대한 서러움이 복잡하게 섞여 흘러 넘쳤다. 루이스는 제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토닥이는 벨져의 품에 안겨 울었다. 소리 내 꺼이꺼이 우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지만,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약해진 모양이었다.
“쉬이. 루이스. 괜찮을 거다. 괜찮아. 울지 마라.”
벨져는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치고 훌쩍거리는 루이스의 등을 토닥이며 뺨을 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작고 귀여운 얼굴이 눈물범벅이 돼선, 눈가며 코가 발갰다. 눈을 부비는 손도 작고, 발도 한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벨져는 꿀꺽 침을 삼켰다.
갑자기 연인이 어린애가 된 건 벨져에게도 충격이 상당했다. 그러니까, 루이스가 느끼는 당황과 별개로. 이 통통하고 보들보들한 뺨에 입 맞추고, 희고 부드러운 다리며 팔을 만지고 싶다. 변태도 아니고, 어린애를 보고 그런 쪽으로 상상을 하고 마는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그만 울고, 일단 먹어라.”
머리론 눈앞의 아이가 오늘로 딱 스물여덟이 된 남자라는 걸 알아도 막상 보이는 게 어린아이니 더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지고 다칠 것 같다. 거기에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벨져는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루이스의 작은 손에 포크를 들려주었다.
챙그랑, 쥐어주기 무섭게 포크가 바닥을 굴렀다. 코를 훌쩍이는 루이스에게 티슈를 뽑아 건네고, 벨져는 저도 모르게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새 포크를 가져왔다.
“쇼핑부터 해야겠군.”
“이대로 나가자고?”
“일단 이것부터 먹고.”
벨져는 루이스에게 다시 포크를 쥐어주는 대신 어제 먹고 남은 케이크를 잘라 내밀었다. 애인이 아니라 애 취급을 하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 이 몸으론 포크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매트리스를 발로 두드리며 입을 벌렸다. 입 안에 들어온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워서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너는?”
“그렇게 배고프지 않다.”
꼬박꼬박 아침점심저녁 세 끼를 챙기는 사람이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게 웃겨 눈을 흘겨도 벨져는 끄떡없었다. 하긴, 벨져 홀든은 원래도 식사에 대해 은근히 집착이 심했다. 그래도 성인일 때는 먹었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배가 고프지 않다고 뻗댈 수라도 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몸을 따라서 정신과 마음도 어려지는 건지, 자꾸만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벨져는 기어이 접시에 담아온 음식을 다 먹이고 나서야 굽혔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기 위해 손을 내밀자 인형처럼 작은 루이스가 눈을 감고 턱을 올리는데, 순간 확 열이 돌았다. 너무 귀여워서 위험할 정도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고 루이스의 시야에서 도망쳐 벽을 짚었다.
작은 입술이 키스를 부르는 것 같다니, 미친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어린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다. 결코, 절대로, 단연코 소아성애적인 성향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루이스기 때문에, 원래의 그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다.
벨져는 낮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루이스는 고아였다. 그것도 거리를 떠도는 고아. 그러니 지금처럼 어린 시절을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생일, 마땅히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시기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보내버린 그다. 그러니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랐다.
돌아갈 수 없다면 그건 곤란하겠지만, 연합의 상상구현 능력자 꼬맹이의 능력 지속 시간은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스물 네 시간 정도일까.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가라앉은 심박수에 벨져는 루이스에게 입힐 옷부터 생각했다. 피부가 하얗고 예쁘니 무슨 색이든 잘 받을 테고, 이 기회를 틈타 자신만 아는 그의 모습을 더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기, 벨져.....”
“헉, 무, 무슨 일이냐.”
“아니,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이불을 꼭 쥐고 바지를 잡아당긴 루이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당장 부둥켜안고 침대 위를 구르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벨져는 이글이 꼬맹이들이 노는 걸 보면 그냥 대뜸 뽀뽀해주고 싶어진다고 하던 말을 십분 이해했다. 그야,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가만 둘 수 있을 리가. 벨져는 잠시 멈췄던 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혔다. 벨져 홀든이 오늘만 벌써 몇 번을 무릎을 굽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깟 무릎 따위 작은 루이스 앞에서야 어찌 되어도 좋았다.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나.”
“아니, 그냥....”
“루이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단호한 목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앙 문 루이스의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언제 잠잠했냐는 듯 심장이 널을 뛰었다.
“이런 나는.... 싫어?”
“싫을 리가!”
“...정말?”
“하, 정말이지. 지금 네 모습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뒹굴고 싶은...!”
루이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흥분한 나머지 오해할 법한 말을 했다는 걸 두 박자 늦게 깨달은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변태....”
“아니다! 루이스! 오해다!”
루이스가 진저리치며 벨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그 짧은 다리로 종종종 뛰어가는 게 너무 귀여워 잡을 수가 없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동물이 심장에 해롭다는 걸 되새기며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루이스……. 들어봐라. 오해다. 오해가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문을 다시 두드리고, 벨져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을 때도 매번 루이스가 먼저 사과를 했기에 해본 적 없는 사과였다.
“미안하다. 나는.... 후.... 그래. 네게 그런 걸 느낀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가 너라서 그런 거지, 절대 내가....”
달칵, 문이 열리고 허리 아래에서 루이스가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벨져를 올려다봤다. 벨져는 더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를 안아올렸다. 순순히 제 품에 안겨 셔츠를 꼭 잡는 루이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루이스.......”
“연합으로 갈래.”
“지금 그 꼴로 어디를 나간다는 거냐.”
“왜, 너도 쇼핑부터 하자며.”
“그러니까, 일단은 옷부터 제대로 입고 나서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거였다.”
“연합엔 피터도 있으니까 괜찮아.”
루이스가 부루퉁하니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루이스의 완강한 고집 앞에 최단시간으로 무릎 꿇은 벨져는 급한 대로 외출 준비를 하고 루이스를 한 팔에 안아들었다.
“이러니까 꼭 납치당하는 것 같아.”
“꼭 범죄자가 된 기분이군.”
“이미 전과가....”
“먼저 입 맞춘 건 어디까지나 너다!”
“넌 어디까지 상상했는데?”
벨져는 불리한 싸움 앞에 입을 다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아동복 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벨져와 루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들이야 아름다운 미남자와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아이의 사랑스러운 외모에 넋을 놓고 바라본 것뿐이지만, 어디까지나 연인인 그들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매우 곤란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재단사를 불러 몇 벌이라도 옷을 해주고 싶지만 당장 입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옷을 몇 벌 산 벨져는 루이스에게 르블랑의 아동용 남색 세일러 수트와 두꺼운 케이프 코트를 입혔다. 하얀 털에 감싸인 루이스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직접 코트의 리본을 매준 벨져는 내친 김에 후드까지 덮어씌웠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데, 정작 본인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루이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거, 여아용 아니야?”
“상관없다.”
“있지!”
“괜찮다. 잘 어울린다.”
벨져는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눈을 깜빡이다 확 얼굴을 붉힌 녀석이 귀여워 후드 째로 머리를 쓰다듬자 루이스가 작은 손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도리 저었다.
“하지 말라니깐!”
“안 되겠군.”
“뭐?”
“역시, 연합으로 가는 건 보류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루이스는 기가 차 물었다. 안 그래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해 죽겠는데 벨져는 아침의 상냥함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혼자 턱을 짚고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오늘 하루는 원래 내게 주기로 했었으니까.”
“그건....”
“게다가 어제는 네가 그대로 자버렸지.”
“설마 이 몸으로 하자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벨져가 정색하며 부정했다. 얼굴을 찡그린 벨져는 혀를 차고는 루이스를 다시 안아들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무심코 두근거릴 정도로 근사한 미소가 번졌다.
“그냥,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연합에 가면 여러모로 난리겠지. 설마하니 그런 생일을 보내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다시없을 기회다. 어린애 돌보기는 영 껄끄럽지만, 뭐. 생일이니 참아주도록 하지.”
“......벨져.”
“왜, 감동했나?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좋다.”
루이스는 싱긋 웃으며 벨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벨져의 뺨을 꽉 잡아 양쪽으로 당기자 바로 아픈 신음이 샜다.
“무슨 짓이냐!”
“미운 소리를 하길래. 어린애 방식으로 응징.”
“너...!”
“어리광 받아준다며. 뭐해. 얼른 안 가고.”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쁜 짓을 할 때나 저를 엿 먹일 때 짓는 미소를 띠운 루이스가 옷깃을 잡고 채근했다. 이거, 완전히 잘못 걸렸는지도. 하지만 그래도 행복했기에 벨져는 기꺼이 루이스의 집사 역할을 자처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루이스를 보여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벨져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루이스가 가리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비록 주려고 했던 선물은 이게 아니지만, 어린 루이스의 투정과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그의 어린 시절을 보상해주는 역할을 떠안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작은 발을 까딱이던 루이스는 곧 내려달라더니 혼자 걷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녀석이 귀여워 벨져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루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자 심통이 난 얼굴로 다가와 새끼손가락을 꼭 잡고 걷는데, 얼음에 상처가 나지 않은 작은 손이 따뜻했다.
다소 파렴치한 내용의 성인용 뒷이야기는 31일 디.페스타에 돌발본으로 나옵니다.... 2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