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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더없이, 덧없이.
※ 루이스 사망 소재 주의 ※
루이스가 죽었다.
실로 그다운 죽음이었다. 고결한 희생을 바쳐 모두를 구하고 참사와 전쟁을 막았다. 극히 이례적으로 영국 왕실에서도 조의를 표했으며 영웅 루이스의 죽음은 세계 곳곳에 퍼져 추모가 이어졌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안타리우스 공습전과 회사와 연합의 갈등. 그 모두를 잠식시키고 일궈낸 평화 앞에 인간된 자들은 경의와 애도를 보냈다.
루이스의 장례식엔 조문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이어졌고, 장례가 끝나도 그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이들은 줄지 않았다. 매일같이 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그의 죽음이 얼마나 고결하고 희생적인 것이었는지, 그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떠들기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영웅을 잃은 연합이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메우고 신문의 헤드라인에서 루이스의 이름이 내려갔다. 전쟁 끝에 사람들이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즈음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벨져 홀든이 나타났다.
잔뜩 굳은 얼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그의 손엔 하얀 장미 꽃다발이 들려있었고, 여전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발은 루이스의 무덤 앞에 멈췄다.
가져온 꽃다발을 시들어가는 다른 꽃 위에 올린 벨져는, 루이스의 이름과 생몰연도, 여왕이 친히 내린 조의 문구를 새긴 비석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끝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 전설이 되어 잠들다.
* * *
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벨져는 제 셔츠를 주워 입은 루이스가 찻잔을 들고 걸어오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깨어있는데도 어딘가 꿈을 꾸는 기분이다. 늘 그렇지만, 아무리 벨져라도 깨어난 직후는 힘들었다.
벨져는 아침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리로 생각을 하는 대신 팔을 벌렸다. 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막상 일어나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린 잔상에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루이스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침대를 벗어난 그 잠깐동안 몸이 식어서 끌어안기엔 별로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를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자 루이스가 벨져의 등을 안아 두드렸다. 아이를 달래듯 자상한 손길은 일어나란 재촉이라기 보단 더 자라는 것 같았다.
“벌써 두시야, 벨져. 휴일 아침에 늑장 부리는 건 기혼 여성의 특권이라고.”
“서두르지 마라…….”
루이스가 작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맨다리에 다리가 얽히고, 루이스의 몸에선 싸구려 비누 냄새와 함께 제 향수 냄새가 났다. 비록 첫만남은 최악이지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잖아. 침대에만 있으려고?”
“시간은 많다. 서두를 필요 없어. 조급하게 굴지 마라.”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에 감은 팔을 당겨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 여자들처럼 부드럽진 않지만, 품안의 온기와 그의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돌아누웠다. 셔츠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에 가늘게 눈을 흘겼으나 루이스는 제 생각에 빠져 처연하게 웃고 있었다.
“글쎄, 왤까. 난 내 미래를 상상해본 적이 없어. 당장 오늘을 사는 것도 벅차서, 내일도 내다볼 수가 없나봐.”
안타까운 말이었다. 한 치의 꾸밈도 거짓도 없는 진솔한 진심 앞에 벨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내내 굳건한 얼음성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그의 본심은 너무나 나약해서, 더 소중히 지켜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파스스 웃고는 굳은 얼굴로 말을 아끼는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려 짓는 미소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얼음꽃과도 같았다.
한 겨울 숲에 소복이 내린 눈꽃. 잔잔하게 가라앉은 얼음 호수. 그 평온한 얼굴에 위로 대신 입을 맞추려던 벨져는 부르튼 입술을 보고 허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감쌌다. 엄지로 도톰한 입술을 문질러도 루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리며 손끝엔 그의 숨이 닿는다.
그 따스하고 간지러운, 평온한 감각. 이렇게 가만히 웃고 있으면 한 송이 물망초가 떠오를 정도로 청초한 얼굴인데, 왜 입만 열면 사사건건 부딪히는 건지. 괜히 부아가 치밀어 루이스의 입술을 매만지던 엄지를 뺨으로 옮겨 그대로 볼을 꼬집었다.
“아야야. 아파!”
저보다 한 살이나 많은 주제에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얼굴이라니. 평소의 그 침착하고 냉정한 분위기와 서늘한 눈빛만 아니면 원래 나이에서 예닐곱쯤은 깎아 불러도 충분히 믿을 법한 얼굴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처럼만 입고 다니면 좀 봐줄만 할 텐데.
가끔 보여주는 순박한 얼굴이 빼도 박도 못하게 취향이라 더 짜증이 났다. 왜 하필이면 루이스 따위에게. 벨져는 루이스의 뺨을 놓았다. 손을 놓자마자 뺨을 문지르는 그에게 작게 핀잔을 주었다.
“엄살은.”
“진짜 아프거든. 하여간 예쁜 게 힘은 세가지고.”
“말이 좀 이상하군. 아름답고 강한 게 뭐가 나쁘단 거지?”
“...말을 말자. 응. 그래.”
루이스가 벙찐 얼굴을 하더니 달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벨져의 마음에 들 리 만무했고, 다시 루이스의 얼굴을 잡자 움찔 몸을 떤 그의 동공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제 손아귀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자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루이스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시선을 피하는 그의 뺨을 단단히 잡고, 벨져는 눈을 질끈 감은 루이스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그저 닿은 것뿐이지만, 닿았다 떨어질 때 나는 소리만큼은 여느 키스 못지않았다.
눈을 뜨자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루이스가 보여, 벨져는 혀를 찼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도 모르나?”
정말 놀랐는지 루이스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가늘고 긴 속눈썹이 떨리는 게 예뻐 가만히 바라보자 루이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를 놀리는 대신 덩달아 부끄러워진 벨져는 도리어 성을 냈다.
“왜 이런 걸 부끄러워하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응,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루이스가 벌떡 일어나 벨져를 마주봤다. 뭔가 굳게 다짐한 듯 결연한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루이스의 손이 벨져의 얼굴을 잡았다. 당황할 새도 없이, 루이스의 입술이 닿았다. 벨져가 방금 한 것과 달리 조심스럽고 간지러운, 부드러운 키스에 벨져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고, 말캉한 입술 사이로 들숨인지 날숨인지 모를 축축한 숨이 오간다. 누군가 혈관 속에 가득 날개를 넣고 부채질 하는 것 같다. 그의 손이 닿은 피부가 덴 것 마냥 화끈거리고, 가슴이 뛴다. 속눈썹이 떨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 * *
눈을 뜸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난 벨져는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선명한 기억은 때로 잔인하게 그 주인을 괴롭힌다.
당장이라도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왜 직접 오질 않냐며 투덜거릴 것 같은데,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 전부 알고 있는데 어째서 가장 행복했던 날의 기억을 되풀이하는 걸까. 벨져는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밝히고, 미풍이 넘실거리는 화창한 날이다.
맑은 날씨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 마지막을 직감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서두를 리 없었다. 손을 잡는 것부터 키스, 몸을 섞는 것까지 남들은 몇 달, 몇 년을 들여 돌아가는 길을 왜 그리 서둘렀으며 왜 그다지도 1분 1초를 소중히 여겼는지. 벨져는 그 모두를 루이스의 무덤 앞에 서서야 깨달았다.
몇 번을 돌이켜봐도 봄날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솜사탕처럼 달콤한 나날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더없이, 덧없이 아름다웠다.
끝까지, 그는 제게 지독히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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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사막 *
* 리케님께 드립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불거진 다툼이었다. 루이스는 자고 일어나도록 비어있는 침대의 옆자리와 텅 빈 거실을 둘러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광의 기록이 가득한 거실 벽 한쪽을 짚고 걷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어젯밤에 내뱉고 만 말이 떠올라 입이 썼다.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에게 그런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루이스는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팀원들을 보다 그 속에서 저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벨져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화, 많이 났겠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혼잣말에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연락 한 번 없는 벨져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거라면 먼저 말을 걸기도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잠은 꼭 같이 자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는데 그것마저 안 지킬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마음이 상한 걸까.
벨져는 보이는 것보다 더 섬세한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상처 받는데 무딘 루이스는 종종 이렇게 벨져에게 무심코 상처를 줬고, 그 다음은 언제나 어려웠다. 자존심때문에 사과를 못해서가 아니라 또 무신경하게 상처를 줄까봐. 그게 마음에 걸려서 쉽사리 먼저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지. 제가 생각해도 답답했다.
착잡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자기비하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지는 기분에 루이스는 불과 오 분도 안 되어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핸드폰을 베개 아래서 꺼내 화면을 두드렸다. 클랜원들의 단톡방과, 매니저의 문자, 정작 기다리는 사람에게선 부재중 통화는 커녕 문자 한 통 메세지 하나 없었다.
한 번, 딱 한 번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전화를 할 수 있는데도 루이스의 손은 화면 위를 서성일 뿐이었다. 오늘도 스케줄이 있어서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이렇게 오래 벨져가 집을 비운 적이 없어서 그런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남은 공간을 채웠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잡았다. 깊게 심호흡하고, 메신저를 켜 자판을 두드렸다.
집에 와. 와서 얘기하자. 고작 그 두 마디를 써놓고 전송을 못해 망설이다가 큰 마음을 먹고 버튼을 눌렀다. 돌이킬 새도 없이 날아간 메세지 옆에 뜬 숫자 1은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핸드폰 화면을 잠그고 일어나 침대를 정리했다. 씻고 준비하는데 십 분, 매니저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한 시간.
루이스는 청소기를 꺼냈다. 뭐라도 해야 했다.
* * *
없다. 촬영을 마치고 핸드폰을 받아든 루이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한 번 화면을 확인했다. 그래도 촬영이 끝나면 확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루이스가 보낸 메세지는 보낼 때 그대로였다. 엄습해오는 불안에 루이스는 메세지 창을 위아래로 훑다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침착하려 애쓰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걸그룹의 활기찬 사랑 노래가 대기음으로 울리는 내내 루이스의 손은 입술을 매만졌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탄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어, 왜.”
“이글. 벨져 어디있는지 알아?”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싸웠는데, 아니. 내가 말을 좀 잘못했는데 나가서 안 들어와.”
“에이, 작은 형이 애야. 가출을 하고 안 들어오게.”
이글의 태평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유치한 반항이라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리가 없다.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며 다짜고짜 촬영장에 난입해 멱살을 쥔다면 또 모를까, 이렇게 걱정시킬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핸드폰도 꺼놨어. 벌써 한나절이 지났고, 메세지도 안 읽어.”
“야, 야. 일단 좀 진정해봐. 넌 어딘데?”
“지금 촬영 끝났는데…. 하아….”
“알았어, 알았어. 찾아볼 테니까 물이라도 한 잔 하고! 어? 짝형이 누구 죽이면 죽였지 어디 뭐 해코지 당하고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마!”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너머의 이글이 볼 리도 없건만, 냉정과 이성이 전부 마비된 것 같았다. 이글의 말대로 해코지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행여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저를 안 보려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불안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깟 말 한 마디 때문에 깨질 사이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믿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벨져가 갈 법한 장소를 떠올리던 루이스는 매니저에게 일찍 들어가라며 차 키를 받아들었다. 벨져가 그 나름의 시위를 하고 있는 거라면, 숨은 그를 찾아내는 게 루이스의 몫이었다. 루이스의 차가 도로 위를 달렸다. 이렇게 찾아도 안 만나준다면 그 때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화가 난 완고한 얼굴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돌아온 집. 루이스는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에도 없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저녁도 안 먹고 벨져를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벨져는 커녕 그를 봤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워낙 시선을 많이 받는 녀석이니 못 봤다면 정말로 없는 거다. 루이스는 잠잠한 핸드폰을 보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의 잠금은 너무나 쉽게 풀리고, 큰 마음 먹고 잡아당긴 문 안으로 보이는 현관은 루이스가 나가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기척은 커녕 따스한 온기조차 없는 휑한 집. 루이스는 무거운 숨을 토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문에 기대어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네가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외친 뒤에, 충격에 굳어버린 벨져의 얼굴이 떠올라 빠듯하게 가슴을 조였다. 덮쳐오는 죄책감에 루이스는 등을 차가운 문에 기댄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번에 잘못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그깟 심야 영화, 그냥 보러 갈 수도 있는 거였는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루이스는 너무나 무력했다. 무릎을 모아 안고 이마를 짚었다. 이번 주 내내 스케줄이 바빠서 힘들다고 제대로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고, 집에 돌아오면 씻고 자기 바빴다. 그 정도면 벨져도 많이 참아준 거였는데 이기적으로 군 건 어느 모로 보나 루이스 자신이란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한 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꺼낸 루이스는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벨져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있었고, 루이스의 핸드폰은 배터리를 충전하라며 기계음을 울렸다. 사과하자.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빌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반쯤 마음을 놓았던 루이스는 화면에 뜬 이글의 이름에 자포자기하며 전화를 받았다.
“응.”
“야, 짝형 날랐어.”
“무슨 소리야.”
“너랑 싸우고 바로 그냥 아무 비행기나 탄 것 같아. 공항사진이 좀 찍혔더라고.”
“하하, 벨져답네.”
“아직 비행중이라 전화 못 받는가보지 뭐. 걱정하지 마. 연락 오면 빌고! 나 좀 그만 찾어! 알았어?”
“…그래.”
과연, 벨져 홀든은 마음 정리하는 스케일도 남다르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이글과 전화를 마치자마자 핸드폰이 꺼지고, 루이스는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일단 안전하게 잘 있다는 걸 확인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 서니 하는 줄도 몰랐던 긴장이 뜨거운 물에 녹아내렸다.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들로 가만히 뜨거운 물을 맞고 있던 루이스는 욕실 안에 차오르는 수증기에 콜록거리며 물을 껐다.
환풍기도 안 돌려놓고 들어오다니,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벨져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른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나가도 옷 좀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 보일러도 안 켜놓고 나가서 욕실 밖 공기가 차가웠다.
한기와 외로움에 바르르 몸을 떤 루이스는 온도부터 맞춰놓고 핸드폰을 켰다. 샤워하는 사이 충전된 배터리는 겨우 5%. 물에 젖은 머리를 털며 핸드폰을 침실로 가져와 다시 충전기에 연결했다. 진동으로 해두면 혹시라도 못 들을까봐 전화 알림을 진동과 벨소리로 바꾸고, 벨소리 음량을 최대로 올린 뒤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메신저 창에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일일줄이야. 루이스는 종종 벨져가 투덜거리던 걸 떠올리고 다시 한 번 깊게 반성했다.
여태껏 널 이렇게 서운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말 없이 기다려주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해버렸다. 둘이 있어도 넓은 집은 한 사람에겐 너무나 넓다. 빈 공간이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신경질을 내며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다가와 머리를 말려줄 사람이 없다. 루이스는 드라이기를 꺼내 혼자 머리를 말렸다.
같이 쓰는 샴푸와 바디워시 향에 무심코 기대하게 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걸까, 아니면 네게 길들여진 걸까. 제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향기는 벨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말린 루이스는 그대로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늘 눕는 제 자리 대신 벨져의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다.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노래 가사와 같은 마음에 루이스는 벨져의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전화 오면 뭐라고 하지. 자다가 놓치는 건 아닐까. 그럼 일어나 있어야 하는데, 한 번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 안에서 맨살을 부비고 있으니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루이스는 손을 뻗어 충전기에 연결된 핸드폰을 침대 옆 협탁에 놓고 스탠드를 켰다.
쨍한 불빛에 눈이 아프다고 하자마자 바꾼 스탠드였다. 스탠드 갓을 한 번 쓸어보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지 않는 연락을 막연한 기대로 기다리는 루이스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왔다. 자지 않기 위해 일어나 앉았지만 일주일 째 쌓인 피로에, 저녁 내내 긴장한 채로 벨져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이불 속에 들어온 이상 잠이 오는 건 제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불가항력이었다. 아침해가 밝아오는 새벽, 결국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루이스의 눈이 감겼다.
그렇게 잠들어 고른 숨소리를 내던 루이스를 깨운 건 진동과 함께 울리는 벨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깊게 잠들었던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눌러 밀었다.
“으으응….”
“루이스.”
알람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어도 핸드폰에선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웅얼거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뜬 루이스는 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침대 위에 엎드려 핸드폰을 집어들자 화면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말문이 턱 막혔다.
졸음에 다 뜨이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화면에 비치는 풍경은 여전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땅. 쏟아지는 별빛과 그 모두를 담은 풍경은 언젠가 TV에서 함께 본 곳이었다. 한 번 쯤 가보고 싶다고 했던 걸 또 기억하고 있었는지. 루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참을 생각도 없었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벨져어.”
영상통화라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동이다. 어떻게 이걸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루이스는 핸드폰을 공손히 양손으로 들고 먼 땅에 홀로 떠나버린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끝내주는 앵글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소금 사막을 보여주던 화면이 빙그르 돌아가더니 조금 지친 얼굴의 벨져가 비쳤다. 루이스는 화면 한 쪽에 뜨는 제 얼굴이 엉망인 걸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무 좋은데, 좋아하는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자니 부끄러웠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라, 핸드폰 액정에 뜨는 벨져를 보며 웃자 벨져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흥, 이런데도 내 사랑이 느껴지질 않는다고 투정을 해?”
“……미안.”
잠결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게 휘는 눈매가 별빛이 가득한 하늘만큼이나 예쁘다.
“지금 당장 키스해주고 싶은데….”
화면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린 목소리는 닿지 못했는지, 벨져가 다시 카메라를 풍경으로 돌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자꾸만 광대가 올라갔다. 보고싶다는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었다. 루이스는 몸을 돌려 누웠다. 팔을 뻗어 핸드폰을 높이 들고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이름을 불렀다.
“보고 싶다…….”
잠결에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한 말에 다큐멘터리처럼 풍경을 보여주던 핸드폰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다 듣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긴. 루이스는 당장 떠오르는 말을 더했다.
“사랑해. 진짜 많이…….”
분명 잠들기 전까진 할 말이 많았는데, 사과도 하고, 또 다른 말도 하려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미안….”
눈을 비비며 잠을 몰아내려 했지만 한 번 찾아왔던 졸음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핸드폰을 떨어트리며 뺨을 맞은 루이스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며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예쁘다. 근데…. 지금은….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미련하긴.”
“하하, 그러게.”
하는 말은 타박이지만 그 말을 하는 목소리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 벨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떠올라 루이스는 베개 위에 화끈거리는 뺨을 기댔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핸드폰 액정을 채운 풍경이 아름답다. 그보다 마음을 울리는 건 감히 그 크기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었다.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기분에 루이스는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랑을 어떻게 다 돌려줄 수 있을까. 벨져 홀든은 언제나 제게 넘치도록 과분한 사람이었다. 초라한 불안과 걱정은 그 앞에 서면 언제나 하잘 것 없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제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뉘우치며 밤하늘을 바라보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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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생각할 땐 재밌었는데....ㅠㅠ 쓰다보니 재미가 없어서 쓴 곳까지만 올림
** 게이머 은퇴 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셰프들이 유명인의 냉장고로 하는 시간제 요리쇼에 오늘 게스트로 초대받은 벨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루이스에게 카톡을 보냈다. 촬영을 시작했냐는 질문 옆에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 걸 봐선 핸드폰을 볼 여유가 없거나, 아니면 정신 자체가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벨져는 잠시 응원차 방송에 들어가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괜히 봤다가 또 망해가는 거 보고 심란해지면 이번 방송을 망칠 가능성이 컸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자리에 앉아 셰프들이며 패널들과 인사를 나눈 벨져는 제작진이 미리 옮겨놓은 냉장고를 보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닥달을 하긴 했지만 집을 비운 이틀 사이에 루이스가 또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아, 오늘의 특급 게스트를 모십니다!”
벨져는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 그래도 몇 번, 루이스가 집에서 셀프카메라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잡히면서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벨져였다. 셰프들의 요리 대결에 앞서 냉장고를 공개하는 시간이 이렇게 긴장될 줄이야. 적당히 오프닝 멘트를 주고받던 벨져는 냉장고 앞에 선 진행자들이 손잡이를 잡는 걸 보고 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어, 왜요. 왜 긴장을 하시죠? 여태 여유만만이시더니.”
“벨져씨 이런 모습 처음 봅니다. 경기할 때도 긴장을 안 하는 선수였거든요.”
두 엠씨가 긴장을 풀라는 듯 사람 좋게 웃었지만 벨져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정리도 안 된 집을 보여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인가. 벨져는 영혼 없이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제 동거인이 워낙....”
“아....”
“아, 루이스씨와 동거중이시죠?”
“그렇습니다. 지금 촬영중일텐데.... 제가 집을 이틀동안 비웠는데 그동안 얼마나 엉망으로 해놨을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셰프들이며 같이 나온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벨져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또 오늘 특집이 숙소요리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클레어씨?”
“어머, 그럼요! 사실 아이돌 숙소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또 선수들은 아니잖아요.”
“사실 프로게이머 숙소 냉장고는 이런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이돌 대표로 나온 클레어 스미스가 해맑게 웃었다. 전에도 한 번 집에 방문해 벨져가 만든 요리를 맛봤던 그녀는 두 사람의 집이 얼마나 깔끔하며 벨져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늘어놓으며 벨져의 냉장고 오픈을 잠시나마 늦춰주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루이스씨가 집에서 뭔가 요리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뇨. 주방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 아니 루이스씨는 절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야, 그렇게까지 가나요.”
“그렇습니다. 완제품을 먹는 건 괜찮은데, 자기가 직접 하는 건.... 라면 정도일까요.”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말에 애써 웃음을 눌러 참은 진행자가 냉장고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루이스씨는 그럼 전혀 냉장고에 손을 안 대는 겁니까?”
“못 대게 하죠. 보통.”
“이야.... 이거 왠지 불쌍한데요. 그 친구가 참 괜찮은 친구거든요.”
“사람이야 뭐....”
갑자기 루이스에게 기우는 동정론에 말끝을 흐렸다. 물론 사람이야 괜찮지만, 동거하는 애인이 아니라 같이 사는 입장에서 보면 루이스는 꽤나 번거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청소하기 귀찮다고 안 움직이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안 먹고 사람 속을 썩이는 데다 또 냉장고는 왜 그렇게 헤집어놓는지. 벨져는 지금 열심히 방송을 하고 있을 애인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럼 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죠! 전화 연결 한 번 해볼까요!?”
“아마 지금 촬영중이라 힘들 겁니다.”
“아, 어떤...?”
“타방송국의 조그만 텔레비전인데 실시간으로 하니까 아무래도....”
“그렇군요! 하긴 또 요즘 섭외순위 1순위가 아닙니까. 제가 듣기론 벨져씨보다 더 버신다고....”
짓궂은 질문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수입으로 치자면 그렇지만 워낙 보유 자산이 다르니까요.”
턱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자 셰프들이 박수를 치고 말을 꺼낸 진행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종종 가는 레스토랑의 메인 셰프가 계산은 루이스가 하지만 실제 카드는 벨져의 카드라는 증언을 보탰고, 벨져는 이틀동안 첫 출연이라고 저를 보는둥 마는둥 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그까짓 BJ 짝퉁 방송, 그냥 자기 채널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방송국까지 가서 해야 하나 싶었지만 루이스는 첫 공중파라며 같이 이 프로에 나오자는 벨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가버렸다.
그래. 그까짓 출연료 안 벌어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 수 있다. 벨져 홀든은 애인 한 사람쯤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못해 그를 위해 구단까지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어올라 벨져는 아까 접어든 카드를 꺼냈다.
“그래도 뭐, 시험 삼아 한 번 전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방송중이라고 전화를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벨져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 시작 전에 꺼둔 전원을 넣고 잠깐 흘러가는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는데 손에 든 핸드폰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벨져는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피식 웃었다.
“또, 우리 루이스씨가 양반은 못 되네요.”
“아! 루이스씨한테 전화가 온 겁니까!”
“받겠습니다.”
벨져는 셔츠에 찬 마이크를 약간 당기고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자마자 여태 속을 썩인 못난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아직 안 들어갔어? 다행이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클레어가 눈을 반짝였다. 평소 프로즌의 팬이라던 그녀니 당연하지만,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긴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어. 너는.”
“나? 이제 생방 끝났는데 완전 정신 없었어.... 너는 언제 끝나? 데리러 갈까?”
“지금 촬영중이다.”
벨져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침묵 속에 감도는 당황과 혼란이 여기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약간의 투정과, 늘어지는 말끝에서 풍기는 그 나름의 애교에 결국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루이스?”
“야, 이...!”
“루이스씨! 안녕하세요!”
“아, 어.... 안녕하세요! 아 근데 이거 방송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루이스의 맹한 대답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루이스의 황망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고, 진행자가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앞서 벨져씨가 두분의 동거생활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셨는데요, 평소에 벨져씨가 요리를 자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 그게 좀 허세가 든 방송용....”
“뭐?”
“네, 자주 해주죠. 오늘 셰프님들이 벨져씨의 입맛에 맞춰주시느라 힘드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짓말 아니구 벨져 요리 되게 잘해요.”
“그렇군요! 허세가 좀 들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다?”
짓궂은 질문에 루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 벨져씨도 그렇고, 서로를 감싸주는 두 분의 우정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언제 한 번 나오셔야죠!”
“하하, 같이 사는데 같은 냉장고로 두 번 나갈 수는 없죠. 아니면 지금 갈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오긴 어딜 와. 집에 가!”
참다가 짧게 윽박지르자 루이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며 능청스레 넘어가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그럼 저희 벨져씨한테 맛있는 거 많이 먹여주시구, 저는 집에서 본방 시청하기로 하고 여기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전화를 끊고 집에서 보자며 (웃음) 이모티콘을 보냈다. 아직 냉장고를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메시지에 답장도 않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벨져가 핸드폰을 끄고 집어넣는 사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냉장고로 돌아갔다. 저들끼리 얘기를 진행하다 마침내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은 그들이 냉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스튜디오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이야.... 이거 여느 살림꾼 냉장고 못지 않은데요?”
“일단 굉장히 깔끔합니다. 이건 와인인가요?”
벨져는 진행자들이 꺼내든 와인 병을 보고 기억을 더듬었다. 제 술은 전부 와인 셀러에 있으니 직접 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루이스가 넣어둔 것일 텐데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보다는 제가 집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가 배는 신경 쓰였다.
내내 방송 준비한다고 전화도 안 받더니, 냉장고 정리용기에 정리해놓은 거며 유리병, 플라스틱 통, 냉장고 주인인 벨져조차 꺼내 봐야 알아볼 비닐팩에 유통기한과 내용물이 라벨지에 곱게 적혀있었다. 멀리서 흘긋 봐도 선명한 루이스의 글씨에 잠시 품고 있던 감정이 녹아내렸다.
“글쎄요. 제 건 아닙니다.”
“이렇게 두 분의 사생활이 탄로나나요! 이게 동거인한테 주긴 아까운.... 그.... 벨져씨가 집을 비울 때 마시려고 넣어둔 게 아닐까요. 혹시 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노골적인 떠보기에 벨져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 숨겨둔 연인이 있느냐, 묻는 것이지만 그 연인이 다름 아닌 벨져 홀든 그 자신이라는 건 아무리 당당한 벨져라도 대답하기 곤란했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후환은 두렵다. 벨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중에 루이스씨가 나오면 물어보시죠.”
“아, 이렇게 피하시는군요! 이 아름다운 우정!”
“아무래도 오래 됐으니까요.”
“또 이렇게 마음이 맞는 친구끼리 사는 것도 로망이 있죠.”
“아무렴 이렇게 같이 살면 집에 여자는 안 데리고 오게 되는 게 또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주거니 받거니 저들끼리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늘어놓던 두 사람이 허허 웃고, 아까 벨져의 편을 들었던 셰프가 벨져의 눈치를 봤다. 데이트할 때 자주 가고, 그 역시도 스트레이트가 아니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저 와인 되게 구하기 힘든 거예요.”
“아, 그런가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브랜드의 샴페인인데, 저게 지금 딱 27년된 거거든요. 진짜 구하기 힘든 거예요.”
27년. 벨져는 들어있던 와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연말도 연초도 아니니 루이스가 선물받은 와인인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이건.... 같이 먹는 건가요?”
“그것도 선물 받은 겁니다. 루이스씨가 여기저기서 받아오는 게 많죠.”
“인기인이군요?”
“뭐, 그래도 나쁜 친구는 아니니까요. 밤마다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야, 밤마다.... 외박을 자주 하는 편인가요?”
“아뇨. 잠은 꼭 집에 와서 잡니다.”
루이스의 신상 캐묻기가 되어가는 흐름에 벨져는 한 팔로 턱을 괬다. 루이스가 보고 싶다. 냉장고 따위 평소대로 해놔도 괜찮으니 어제 영상통화나 조금 더 길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산 지 반십년이 다 되어가도 루이스의 세심함은 어딘가 모르게 벨져의 핀트를 어긋나곤 했다. 자상하고 세심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다른 것보다 제게 신경을 써주었음 하는 마음을 토로해도 그때 뿐.
벨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리는 동시에 냉장고 탐색이 끝나고, 진행자들이 오늘의 요리 주제를 발표했다.
“이야, 범상치 않습니다! 밤에 먹어도 부담 없는 한 끼 식사는 그렇다 치고, 건강한 정크푸드는 대체 뭐죠?!”
“저는 제 입에 들어가는 이상 좋은 재료에 건강과 맛을 둘 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야 그렇죠. 그런데 이건....”
“전 제 취향에 맞게 해먹을 수 있으니까요. 맛있는 걸 해줘도 안 먹고 햄버거같은 걸 찾는 누구씨를 위한 절충안입니다.”
셰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벨져는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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