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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벨져루이] 여름, 소녀들.
* 둘 다 ts, 경성학교 아닌 듯 경성학교 가튼 무언가의 학원 백합
** 소찌님 ts벨루 경성학교 연성 넘나 좋았던 것ㅠㅠ벨져도 루이스도 존예보스인것ㅠㅠㅠㅠS2S2S2
이제 막 여름이 오기 시작한 계절, 쨍한 아침 햇살에 소녀는 길고 우아한 속눈썹을 떨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창문을 열어놓고 잤음에도 이불 속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체온에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소녀, 올해로 열다섯이 되는 홀든가의 둘째 아가씨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론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내려간 이불 속에서 다른 소녀가 흠칫 몸을 떨며 움츠러들었다.
소녀는 룸메이트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도로 누웠다. 얇은 허리를 안고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토닥이자 덩달아 움츠러들었던 미간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이렇게 덥고, 이불 속에 있는데도 잠든 소녀의 몸은 조금 찼고 쉽게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하얬다. 이 사람은, 무엇이든 부족한 거 하나 없이 원하는 건 모두 손에 쥐었던 아가씨의 눈에도 흡족할 정도로 예뻤다. 제가 가진 것 중 이렇게 예쁜 게 있었던가.
다 해진 낡은 잠옷 대신 제가 준 흰 색 실크 잠옷을 입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멍하니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커튼을 쳤다. 따사로운 햇살이 한 꺼풀 옅어졌지만 빛이 약해져도 충분히 밝고, 잠든 소녀는 그보다 더 예뻤다. 새초롬하니 얇고 붉은 입술이 말랑해보여, 조심스레 손가락을 그 위에 올리자 숨결이 와 닿았다.
간질간질한 그 떨림에 소녀, 벨져는 후다닥 손을 거둬 제 가슴 위에 올렸다. 뺨이 화끈거려 가슴에 올린 손으로 주먹을 쥐어도 잠든 소녀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그녀의 이 둔한 면에 짜증이 날 때가 더 많지만 지금만큼은 이 무딘 신경이 감사했다.
“우으응…….”
작게 웅얼거린 그녀가 손을 뻗어 벨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좁혀진 거리만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가슴 앞섶, 짙은 푸른 색 리본이 아슬아슬하게 묶여있었다. 그 리본을 잡아 당겨 풀고 싶은 충동과, 얇은 천 사이로 보이는 살결에서 풍겨오는 따스한 냄새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출신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청순한 외모. 어쩌다 이 얼굴에 홀랑 넘어가버린 걸까. 작게 한숨을 내쉬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그 눈을 떠 저를 바라볼 것만 같은 예감에 벨져는 숨을 집어 삼켰다. 과연, 벨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고 서서히 눈꺼풀이 올라가며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 몇 시야?”
“몰라.”
“모르면 어떡해…….”
칭얼거리면서도 소녀는 벨져에게 더 가까이 달라붙어 푹 숨을 내쉬었다. 도로 눈을 감고 색색 숨을 쉬는데, 얽혀있는 맨다리의 감촉이 좋아 발가락 끝으로 얇고 매끈한 다리를 쓸어내리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하지 말라고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내며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루이스.”
“더 잘래…….”
벨져는 꼭 한 살이 많은 소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제 설레는 마음은 아랑곳 않고 몇 분 더 자겠다고 하는 꼴에 짜증이 확 일어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추워어.”
“흥.”
이불을 걷어버리는 바람에 양팔로 팔을 감싸는 루이스를 두고, 벨져는 아예 이불을 걷어버렸다. 벨져의 심술에 게으름을 피우던 루이스가 못내 눈을 떴다. 비록 찡그리며 뜨긴 했지만 어쨌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벨져는 이불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벗어둔 슬리퍼를 신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왜 또오…….”
루이스는 앓듯 신음하며 벨져를 올려봤다. 여전히 잠이 잔뜩 낀 눈이 얄미워 홱 등을 돌린 벨져는 세면대를 향해 걸어갔다. 예쁜 거울에, 도자기로 된 세면대는 벨져가 입학할 때 사들인 것이었다. 벨져는 찬 물을 얼굴에 끼얹고 화이트 피치와 프리지아 부케 향이 나는 비누로 거품을 내 꼼꼼히 얼굴을 씻었다. 물기를 머금은 피부가 환하게 빛나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로 뒤를 바라보니 루이스가 제게서 시선을 거두고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게 더 얄미워, 벨져는 얼굴을 닦은 수건을 그녀에게 던졌다. 털썩. 수건이 완벽하게 루이스의 몸 위에 떨어졌지만 루이스는 미동조차 없었다. 못된 년 같으니. 벨져는 빗을 들고 침대로 다가갔다. 몸을 웅크리며 아슬아슬한 선까지 올라간 잠옷 치마 때문에 버드나무 가지처럼 곧고 낭창한 루이스의 다리가 훤히 보였다.
“야.”
그제야 실눈을 떠 바라보는 루이스에게 빗을 내밀자 루이스가 눈곱 낀 눈으로 눈을 깜빡이다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며 다 흐트러진 차림이 꼴불견이었지만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 가에 등을 곧게 펴고 앉아있으면 곧 약간 서늘한 체온의 손이 목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한 데 모았다. 그리 손 볼 곳도 없는 곧은 머리카락이지만 그래도 숙녀에게 빗질은 필수이니까.
벨져는 머리를 쓸어내리는 빗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며 목에 힘을 줬다. 그 어떤 하녀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이렇게 세심하지 않다. 내로라하는 사교계의 아가씨일 뿐더러 어릴 때부터 예민하기가 남달랐던 벨져기 때문에 단언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그녀 자신의 머리야 하루아침에 싹둑 잘린대도 눈 하나 깜짝 않겠지만 벨져에겐 그러지 않았다.
미적 감각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그녀는 꽃이며 호수를 봐도 미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법이 없었다. 루이스가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건 오로지 벨져를 바라볼 때뿐이었고, 벨져는 그걸 내심 뿌듯하게 여겼다. 누가 그걸 명예롭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아름다움을 모르는 이에게 미를 일깨운 것 하나만으로 제 외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뻐기고 싶었지만 벨져는 쉽게 제 속내를 입에 내지 않았다.
천성이 누구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벨져의 눈에도 다른 계집애들과 달리 루이스는 '예뻤다.' 벨져는 처음 학교에 오던 날을 떠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교칙과, 그것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짙은 남색 교복을 입고 교실에 들어갔을 때, 제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며 빌붙어보려는 아이들과 달리 루이스는 한 번도 제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창밖을 내다보는 그 옆얼굴과 무표정이 어찌나 고왔던지. 처음 느낀 시기와 제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기행에 벨져는 그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과 먼저 말을 걸고 다가가는 것은 또 달라서, 제 쌀쌀맞은 태도에 격이 떨어지는 계집애들이 저를 괴롭히기 위해 일삼은 짓이 아니었다면 끝끝내 말 한 마디 안 섞어보고 졸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은 죽은 새였던가.”
“응?”
“왜, 내가 처음 왔을 때.”
“아아.”
루이스는 낮은 목소리로 긍정하고는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녀가 하품을 하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벨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은 여전히 부지런했다.
“넌 너무……. 달랐으니까.”
“흥.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확실히 말해.”
말 사이에 늘어진 틈. 루이스는 분명 오만하다거나, 재수 없게 군다는 말을 하려다 말을 바꾼 게 뻔했다. 그런 얕은 수를 이 벨져 홀든님이 모를 줄 알고? 벨져는 턱을 들고 눈을 감은 채 팔짱을 꼈다. 제 기분이 좋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만 루이스는 평소와 같이 눈 하나 까딱 않을 게 분명했다.
“흠. 글쎄. 말 안해도 알잖아?”
“……나쁜 것.”
노래하듯 느긋하게 굴러가는 목소리에 벨져는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노려봤다. 여즉 눈을 다 못 뜨고 한 번 더 하품을 한 루이스는 벨져를 마주보며 베시시 웃었다.
“그래도 이제 뺨은 안 때리네.”
“흥. 누구 좋으라고.”
“그야 우리 아가씨 좋으라고 그러지.”
“마음에도 없는 소릴.”
벨져는 냉큼 일어나 루이스의 손에서 빗을 뺏어들었다. 루이스는 목을 긁고는 다시 한 번 경망스럽게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곤 도로 풀썩 누워버렸다.
“언제까지 침대에 늘어져있을 셈이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엷은 웃음소리를 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늘 화를 내는 건 자신이고, 루이스는 한 번을 넘어가주질 않는다. 싸움도, 승부도, 게임도.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벨져지만 이상하게 루이스에게만큼은 자꾸만 져버렸다. 루이스는 벨져의 징크스와도 같았다. 뗄래야 뗄 수없는, 지긋지긋한 존재.
“너 진짜 싫어.”
“그래? 나도 그런데.”
루이스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고, 벨져는 더 이상 그녀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스러울 때라곤 잘 때, 혹은 입을 다물고 있을 때뿐이다. 저렇게 멍청하고 모자란 애를 '영웅'이랍시고 떠받들어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말은 조금 더 멋있고, 빛나고, 강한 존재에게나 어울리는 법일진대. 그 호칭을 수여한 건 자신이다. 물론 방심한 것도 있지만 지난 일을 물고 늘어지는 건 추잡할 뿐이었다. 과거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니 더 신경 쓸 건 없지만 루이스는 자꾸만 제 신경을 거슬렀다. 하루도 편하게 보내게 해주질 않는다.
벨져는 잠옷의 리본을 풀고 소매에서 팔을 뺐다. 툭, 바닥으로 떨어진 잠옷과 나신이 된 자신. 루이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벨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굴었다. 침대 발치에 놓인 트렁크에서 얼룩 하나 없이 하얀 실크에 레이스가 수놓인 속옷을 꺼내 입고 그 위에 빳빳하게 풀을 먹인 교복을 걸쳤다. 원래는 조금 더 화려한 게 제 얼굴에 어울리지만 꾸민들 보여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선 의미가 없었다.
깃을 바로 세운 벨져는 바로 옆, 원래 루이스의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을 당겨 발을 침대 위에 올리고 양말을 신었다. 루이스는 이제 그림 속에 그려지는 여자들처럼 모로 누워 팔로 머리를 지탱하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져.”
“또 내 신경을 긁을 거라면 말하지 않는 편이 좋아.”
“전에 입었던 원피스는?”
벨져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바라봤다. 늘 그렇지만,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얼굴로.
루이스는 거리에서 자란 고아였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라곤 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그런 시궁창의 쥐같은 존재. 그런 루이스를 빼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건, 인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행운이자 일종의 호의였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이 해결되자 루이스는 이곳에서 제 쓸모가 어떤 용도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본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 고생해서 얻지 않은 것은 결국 어딘가에서 더 큰 운이 샜다는 걸 뜻했다. 가령, 밤 사이 하나 둘 씩 사라지는 소녀들이라던가. 루이스는 꽤 영리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감이 좋았다. 거리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살아남으려면 필수적으로 몸에 익혀야 하는 것들이었다.
고요하고, 예쁘장한 이 학교에는 어딘가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그걸 모르는 건 루이스를 제외한 학생들 뿐이었다. 말한들 듣지 않을 게 분명하다. 괜히 몰려 낙인 찍히느니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낫다. 다른 아이들처럼 달리 돌아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루이스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곳에서 벨져의 등장은 단연 이질적이었다.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있는 집안의 아가씨가 뭐가 모자라서 이런 외진 여학교에 들어온담. 루이스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평소처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밖은 전쟁중이었고, 딸을 숨긴다면 이보다 좋은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실제로 그런 아이들도 더러 있었고, 그녀들은 그들끼리 몰려다니며 단 한 명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
루이스는 연필을 굴렸다. 괜한 소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평온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그만. 그럴 수 없어진 건, 소문의 아가씨가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예뻤으며, 그렇게 예쁜 얼굴로 재수없기 짝이 없는 말이며 행동거지를 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가씨들이 그들마저 따돌리고 노골적으로 어울리기 싫다는 얼굴을 하며 무시하는 벨져를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이런 곳에 오래 지내서일까. 폐쇄된 공간과 한정된 교우관계는 때로 아이들을 순진함을 넘어선 음습한 악랄함을 낳기 마련이었고, 벨져는 그들의 표적이 됐다. 슬쩍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거나, 물건을 못 쓰게 만든다거나 하는 게 시작이었지만 벨져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처음을 죽은 새로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벨져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만, 그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이는 게 보고 싶지 않았다. 왜였을까, 단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했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루이스는 마침내 벨져의 인내심이 다한 날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아이의 따귀를 때리려는 걸 막아섰다. 결국 벨져의 매운 손은 그녀 대신 루이스의 뺨에 내리쳤다. 그 다음은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 뿐이었다.
평소의 냉정하고 여유로운 벨져라면 모를까, 그렇게 흥분해서야 고삐가 풀린 것처럼 구는 그녀를 이기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 후로 루이스는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별칭과 벨져를 얻었다. 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하나도 알 수가 없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왜, 보고 싶어?”
벨져는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푸른 눈은 어느 보석에도 비할 수 없을 것처럼 파랬고, 피부는 창백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정도로 희어서 핏줄이 비칠 것만 같았다.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아 제 앞에서 아무렇게나 드러낸 치마 속을 훔쳐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귀한 아가씨 아니랄까봐, 벨져는 허벅지도, 무릎도, 매끈한 선을 그리는 종아리와 가는 발목조차 아름다웠다.
루이스는 제 뺨이 햇살에 붉어지는 걸 느꼈다. 벨져가 길게 콧소리를 내고,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삼일짜리 짧은 방학에 다른 아이들이 집에 돌아갔기에 기숙사에는 루이스와 벨져 단 둘 뿐이었다.
벨져는 본래 그녀의 것인 침대에 앉아 루이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희고, 가는, 예쁜 손가락. 그 손가락에 정신이 팔려 벨져가 엄지로 열이 오른 뺨을 문지르고 다른 손가락으로 턱을 치켜들도록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숙여 다가온 벨져가 못된 짓을 꾸미는 아이처럼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보석보다 더 빛나는 눈동자에 총기가 돌았다.
“좋아. 대신 너도 벗어.”
“그건 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뒤로 빼려는 찰나, 벨져의 얼굴이 다가왔다. 루이스는 숨을 집어 삼켰다.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닿고, 속눈썹이 떨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감긴 벨져의 눈과, 긴 속눈썹이 자아내는 그림자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방안에 들어오는 햇살이, 델 듯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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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2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추천 BGM은 신화의 열병
결국 벨져는 그동안 계속되던 일탈을 그만 뒀다. 땡땡이를 치고 겁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기어들어온 막내의 성화와 협박에 못이긴 결과였다. 사실 이기려면 못 이길 것도 없었으나 생전 그렇게 성을 내는 적이 없던 막내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심지어는 출근하는 걸 봐야 자기도 학교에 가겠다며 버티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글이 등교거부를 하고 틀어박히면 당연히 어머니의 걱정과 큰형의 추궁이 있을 테고, 그런 식으로 그리고 제 얘기가 그런 식으로 다이무스의 귀에 들어가는 건 영 탐탁지 않았다. 분명 한숨을 내쉬며 저를 가르치려 들겠지만, 이제는 벨져 역시 성인이었다. 모든 일을 간섭받을 이유가 없다.
그걸 무엇보다 알려주는 게 이 부당한 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제 동생이자 홀든의 삼형제 중 막내인 이글 홀든은 뱀처럼 교활하고 영악한 놈이라 언제 어떻게 엿을 먹이려들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말썽에 휩쓸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그 공간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그는 한결같은 태도로 벨져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화려한 로비 앞에 차가 멈췄다. 저를 재촉하는 기사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떠 쓰디 쓴 현실을 마주했다. 아무리 옷을 차려입고 향수를 뿌린들 공간이 가진 음습함 자체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조차 고역인데, 그 안에는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게 항상 제 뒤를 맴돌았다.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서있던 루이스가 오늘도 변함없이 정갈한 차림으로 벨져를 맞았다. 허리를 깊게 숙인 루이스의 동그란 머리에 시선을 준 벨져는 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고급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 뒤로 따라붙는, 서늘하고 고요한 발소리. 그 발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처럼 작아 주의 깊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소리에 벨져는 일부러 발을 더 굴러 구두소리를 냈다.
“여전히 좋은 하인이군.”
벨져는 빈정거리며 넓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지독히도 풍류가 없는 방이다. 삭막하고 텅 빈, 그래 마치 눈앞에 선 도자기 인형 같은 남자처럼. 속은 다 비어있는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어차피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거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다이무스가 앉았을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등을 기대고 의자를 뱅그르 돌리며 빈정거리자 한 박자 늦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이라는 게 몹시도 짜증나는 긍정이었기에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곧은 자세로 서있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그래도 눈 하나 깜빡 않고 저를 마주하는 게 더 짜증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편한 심기를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연했다. 한참 입을 열지 않던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벌어진 틈으로 작은 한숨이 새고, 그와 함께 눈을 감는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렸다. 눈이 감기는 그 짧은 순간 왠지 모르게, 그의 눈이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벨져는 묻어놓았던 기억과 한동안 제 무의식이 투영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의 단편과, 한 순간이나마 푸르른 하늘 아래 맑은 호수와 같다고 여겼던 미소.
어쩌면, 상처를 줬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것도 잠시, 그 작은 숨 뒤에 이어진 목소리가 차갑게 벨져의 날선 눈빛을 막아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적이죠. 주인이 없는 조직은 없습니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도련님. 이건 제 일입니다.”
“네가, 고작 이딴 일이나 하고 있다고? 아버님께 밉보이기라도 했나? 아니면 정말로 형의 개라도 된 건가?”
벨져는 제 오해를 조소로 바꿨다. 농락당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아무리 다이무스의 사람이라 한들 그래봤자 여기선 제 말을 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날카롭게 후벼 파는 말에 루이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무표정으로 돌아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이런 모욕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듣고 있는 모습이 꼭 저만 속 좁은 남자가 된 것 같아 짜증이 솟구쳤다.
“뭐, 그렇게라도 있을 자리를 찾았다니 축하해줘야겠지.”
“……. 결재 서류가 밀렸습니다.”
계속해서 화를 내봤자 저만 바보가 될 뿐이란 생각에 벨져는 의자를 돌리며 다리를 꼬고 빈정거렸다. 이어지는 담담한 목소리는 결국 그 자신이 아쉽단 소리다. 벨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글쎄, 굳이 내가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
벨져는 바로 돌아오지 않는 답에 코웃음 치며 턱을 들었다. 이정도면 아무리 그라도 눈살을 찌푸릴 터, 그걸 빌미로 총괄 매니저란 사람의 태도가 이래도 되는 것이냐며 기를 꺾으려 의자를 돌리자 변함없는 얼굴의 루이스가 벨져를 마주했다. 그 때와 닮은, 그 때와 다른 얼굴과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군.”
“무엇을 바라십니까.”
차분한, 고저가 없는 목소리에 벨져는 눈을 흘겼다. 그는 하인의 복장을 한 채 제게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듯 굴었다. 분명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자신일 텐데, 그는 높다란 벽 위에 올라가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빨아. 그럼 그깟 서류쯤 해줄 지도 모르잖아?”
충동. 지극히 저열하고, 위아래를 가르치기 위한 행위를 주문하자 루이스가 눈을 깜박였다.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벨져를 향해 걸어왔다. 정말로 할 생각인 걸까. 벨져는 꼰 다리를 풀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느려 목이 탔다.
목끝까지 채운 단추와 단정하게 맨 넥타이, 거기에 몸에 딱 붙는 베스트와 같은 옷감으로 만든 바지까지 그는 당장 홀든 가의 집사로 들어와도 손색이 없는 옷차림으로 벨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목울대가 울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자극적이라, 벨져는 제가 아는 그 사람을 돌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그 시절 그 소년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었는데, 5년이라고 하는 공백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어쩌면 그와의 관계에서 변했는지도 모르지. 벨져는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떠올리고 초조해졌다. 잊힐래야 잊힐 리 없는 기억 속 루이스는 지금보다도 더 낯설었다.
자신의 것이라고, 제 손에 쥐고 있다고 의심치 않았는데. 그렇게 벨져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루이스의 흰 손이 벨져의 허리띠를 푸르고 지퍼를 내렸다. 지지직. 천천히 내려가는 그 소리가 어쩌면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소리와 닮았을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브리프 안으로 손을 넣었다. 맨 살갗에 닿은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그 역시도 조금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벨져는 그만두지 않았다. 노라고 말하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그런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차가운 손이 벨져의 성기를 쥐고 가볍게 흔들다, 루이스가 무릎을 꿇은 채로 벨져의 다리 사이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차가운 손과, 약한 떨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거부감은 결코 아니었다. 다이무스라는 연인을 두고 저와 오랄 섹스를 한다는 죄책감? 혹은 그저 긴장했을 뿐? 저도 모르게 초조해진 벨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슬쩍 눈을 올려 뜬 루이스가 불을 붙여주려는 듯 제 베스트로 손을 가져갔지만 벨져는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해. 그 눈빛에 루이스는 그의 손을 다시 벨져의 바지춤에 올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에 제 흔적을 마구 흩뿌려서 그를 정복하고 싶다. 비록 그러고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길지라도 이 무채색의 차가운 남자를 제 색으로 물들이고, 그를 가지고 싶었다.
분명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침내 루이스가 벨져의 성기를 입에 담았을 때, 벨져는 습하고 따뜻한 점막과 뜨거운 숨결에 얼굴을 찌푸렸다. 서툴다. 이건 결코 펠라치오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깨 너머로 익힌 지식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 같은 혀놀림에 벨져는 불을 붙여놓고 한참을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빨았다. 니코틴이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그 감각과 함께 머리가 맑아지니, 아래서 느껴지는 어설픈 자극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눈까지 감고 집중하며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설픈 건 여전했다. 벨져는 아직 점령할 고지가 남아있다는 걸 깨달은 모험가처럼 신이 났다. 루이스의 혀가 기둥을 핥고, 그의 입 안에서 크기를 불려가는 성기를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아들였다. 벨져는 더 열심히 해보라는 뜻으로 손을 뻗어 그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여유롭게 만끽했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 벨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희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머리를 잡은 채 살살 달래듯 어루만지다, 그의 목구멍까지 닿도록 허리를 쳐올리자 루이스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고환을 세게 쥐지 않으려는 노력이 갸륵해 두어 번 허리를 움직이다 놓아주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콜록거리며 바닥을 짚는 그 옆얼굴이 어찌나 가련한지. 벨져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튕겨 담뱃재를 털었다.
“입을 쓰는 건 처음인가보지?”
“흐, 하아……. 하…….”
루이스는 손등으로 입을 막고 콜록거리다 눈을 떠 벨져를 바라봤다. 노려보는 것도 아닌, 무감각한 그 시선이 사내의 정복욕을 부추겨 벨져는 담배를 발아래 던져 구둣발로 짓이겼다.
“도련님…….”
“이리와.”
굳은 얼굴로 하는 말에 루이스는 무릎으로 기어 벨져의 다리 사이로 다가왔지만 벨져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시 제 것을 잡고 입 안에 넣으려는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제 다리 위에 앉히자 루이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이 다른 남자를 떠오르게 해, 벨져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한 손에 쥐었다.
“도련님, 이건…….”
“벗어. 왜, 못 하겠나?”
시선을 피하던 루이스가 입술을 다문 채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이렇게 내비칠 사람인가. 벨져는 루이스를 올려다보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못하겠다고, 당신은 아니라고 말하리라 생각했던 루이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춤에 손을 가져갔다. 버클을 푸르고, 바지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내리며 복종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이 행위를 거부하며 떨고 있었다.
대체 너는, 어디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지?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으나 목에 꽉 막힌 말이 그 위로 올라오질 않았다. 그 사이 루이스는 색색 숨을 몰아쉬며 베스트의 단추를 푸르고, 단정하게 묶여있던 검고 얇은 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매듭을 잡아당기고, 그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가 검은 넥타이가 그의 흰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 뱀처럼 감겨들었다. 손에 감겨들었던 넥타이는 매듭을 풀자 힘없이 스르르 루이스의 손을 한 번 휘감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끝까지 채운 단추의 첫 단추를 하나 푸르고, 루이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도 꽤나 용기가 필요한지, 여기서 그만둘 거냐 도발하려는 찰나 루이스가 다시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툭, 툭,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잘 다려진 셔츠 안쪽으로 보이는 살결이 왠지 모르게 보면 안 되는 걸 훔쳐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의 흰 가슴팍과 배가 숨과 함께 떨리며 오르내리는 그 애처롭고도 가련한 모습에, 벨져는 제 안의 가학심이 타오르는 걸 느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이 슬며시 일어나, 벨져는 짐짓 여유로운 척 한 팔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어설픈 스트리퍼를 바라봤다.
루이스의 행위에서는 그들이 이따금 던지는 추파나 유혹, 혹은 성적 어필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트립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따지자면 그저 옷을 벗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벨져는 루이스가 옷을 벗는다는 그 사실과 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에 흥분했다. 그저 흥분했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몰입해있었고, 그래서 더 선명하고 또렷했다. 지금이라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내면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바지 안에 잘 갈무리해뒀던 셔츠 밑단의 마지막 단추가 풀리고, 루이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매일 수도 없이 봤을 거면서, 어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그에게 벨져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전혀 섹시하지 않게 제 다리에 체중이 실리지 않도록 힘겹게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루이스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루이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신선한 반응에 이건 이거 나름대로 재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벨져는 그 다음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본디 인내 끝에 맛보는 과실이 가장 단 법. 벨져는 최대한 무던한 척하며 루이스에게 위로 올라가라 손짓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루이스는 양팔로 뒤에 있는 책상을 짚고 일어나 엉덩이를 그 위에 올렸다. 허리띠며 바지 지퍼까지 풀어헤친 채 책상 위로 올라가는 루이스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뒤에 펼쳐놓은 서류를 밀어내는 사이 다리를 꼬았다. 남자에게 욕정하는 성향은 없지만, 그래도 아직 사정 후에 흥분이 가시지 않은데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얼마든지 다시 발기할 수 있었다. 아무렴, 스무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 고작 한 번 뺀 걸로 만족할리가 없다. 벨져는 묵직해져오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루이스는 서류를 밀어놓고 잠시 머뭇거리다 걸치고 있던 감색 베스트를 벗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카펫 위로 떨어진 베스트 다음은 당연히 셔츠일 거라 예상했건만 루이스의 손은 셔츠대신 허리춤으로 향했고, 루이스의 다리를 감싸던 바지가 베스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유혹에는 영 소질이 없었지만, 애를 태우는 데는 소질이 다분했다. 애를 태우는 것만으로 스트리퍼가 될 수 있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밖에 있는 소문난 이들을 전부 제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벨져는 입술을 매만지며 다음을 기다렸다. 굳이 셔츠를 벗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딱히 벗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희고 다림질한 냄새가 나는 셔츠가 그에겐 더 잘 어울렸다. 어울린다고 할까, 다 벗는 것보다 훨씬 더 색정적이라 한 편의 포르노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버클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벨져는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훤히 드러난 그의 다리를 지그시 훑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오래된 흉터에 잠시 눈이 멈췄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게 발목까지 훑고 나서 고개를 들자 아직 벗지 못한 검은 브리프와 그의 중심이 눈에 들어왔다.
“흥분했나? 그렇게 좋으면 직접 해보지 그래.”
“…….도련님, 이건…….”
“왜, 아니면 내가 만져줬으면 좋겠다 뭐 이런 건가?”
벨져는 상기된 루이스의 얼굴에 즐거워졌다. 한없이 차가워 동요라곤 보이지 않던 그가 난처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 반응이 자신의 우위를 확인해주고 있었다.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울지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그와 그런 그를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 기형적이고 비이상적인 이 상황이, 그럼에도 즐거웠다.
생략은 미덕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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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1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 벨져루이<-다무 주의
오년에 걸친 유학 생활은 벨져에게 있어 사춘기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사이 자신의 입지는 꽤나 좁아졌을 테고, 그 많은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한 때의 혈기이기도 했다. 세 형제 중 유독 저를 아끼던 교사이자 숙부는 벨져의 유학을 극구 만류했지만, 벨져라고 오스트리아의 본가에 있는 게 더 이득임을 모를 리 없었다.
반항, 혹은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오 년을 보낸 벨져는 홀든 가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가문의 엄격한 훈련과 그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 마침내 진정한 '홀든'으로 거듭났다. 그간의 공백과 자신을 향한 걱정, 혹은 기대를 완전히 종식시킨 건 따로 말할 것도 없었다. 벨져 홀든은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남자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영리했고, 빼어난 외모를 타고난 데다 다른 형제들보다도 우수했다. 그렇기에 오만했고, 그 오만은 곧 벨져의 자부심이자 그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수식이기도 했다.
타고난 것을 갈고 닦은 끝에, 좋은 쇠를 수천수만 번 담금질해 벼려낸 검이 바로 벨져 홀든이다. 그런 벨져에게, 세상의 일이란 온통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한때나마 흥미를 붙여보았던 음악도, 그림도 결국은 질려버렸다. 집을 떠난 오년간 벨져는 자유를 누렸다. 비록 집안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 걸로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는 충분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홀든가의 당주인 아버지조차 벨져를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타고나기를 완벽하게 태어나 자신이 가진 것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벽이 범인과 벨져 사이에 존재했다. 넘볼 수도 없고, 허물 수도 없는 벽. 벨져는 그 차이를 '격'이라 표현했다.
그런 벨져가 다이무스가 나온 영국의 대학을 보란 듯이 조기 졸업하고 돌아온 것이다. 누구보다 뛰어난 아들이니, 바로 홀든 은행의 경영진에 이름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돌아온 벨져에게 홀든가의 당주가 내민 것은 홀든 가 소유의 호화 클럽이었다. 거물급 인사들의 은밀한 회담이 오가고, 웬만한 인사가 아니고서야 출입도 할 수 없는 휘황찬란한 클럽은 말이 좋아 클럽이지 더럽고 추악한 욕망의 온상이자 윤락업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 클럽을 통해 뒷돈이 오가고, 돈세탁이 이루어진다는 건 숨길 것도 없다. 벨져는 경악했다.
제가 누린 시간에 대한 값이라기엔 치러야 할 것이 너무 컸다. 그 공간엔 발조차 들이고 싶지 않다. 벨져는 완강히 거부의사를 피력했지만 홀든가의 당주는 단호했다. 벨져의 오만은 언젠가 독이 될 것이며, 그 때를 위해 적당한 처세술과 함께 복잡하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게 그가 내세운 이유의 전부였다. 협상의 여지라곤 없다는 걸 깨달은 벨져는 제 성질에 못 이겨 입술을 깨물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다이무스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라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온 벨져는 마침 계단을 오르던 제 형과 마주하고는 그를 무시해버렸다.
다음날, 다이무스는 친절하게도 큰형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벨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런 자질구레하고 더러운 일일랑 저와 단 1나노그람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가시 돋힌 말을 내뱉어도 다이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린 동생의 성질을 받아준다는, 혹은 이미 전부 예상했다는 그 태연한 반응에 더 짜증이 난 건 당연했다. 벨져는 어릴 적부터 저를 자신보다 모자라고 돌봐줘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까다로운 동생으로 대하는 다이무스를 못 견뎌했고, 그가 먼저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나이를 먹고 해가 지난다고 그를 향한 벨져의 반발심이 변할 리도 없었다.
벨져는 갈 테니 먼저 가라는 말과 함께 방문을 세게 닫고 어쩔 수 없이 넥타이를 매고 코트를 입었다. 애초에 격을 따질 것도 없다. 그 일은 여태껏 다이무스의 소관이었고, 그것이야말로 그와 자신의 격을 나누는 분명한 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제 것이어야 할 자리에 앉고, 제게는 시궁창이나 진배없는 자리를 물려주다니! 벨져는 다이무스의 것을 물려받는 게 싫었다. 그를 비롯한 모두가 그게 꼭 물려받는 것은 아니라고 위로했지만 그런다고 진실이 거짓이 될 리 없었다.
그의 형은 가문을 위해서란 명분으로 그 더러운 일을 해왔다. 원래부터 그랬다. 다이무스가 관심도 없는 경영을 공부하고, 홀든의 훈련을 받은 것은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다. 벨져는 그런 그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벨져는 그 모든 시련을 자신을 위해 이겨냈다. 그렇다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그 일을 맡아 하는 게 맞지 않은가.
누군가 저를 음해하지 않은 한 일이 이렇게 꼬일 순 없다. 벨져는 새 주인을 기다리는 직원들과 다이무스를 그대로 두 시간 대기시켰다. 마침 비가 왔고, 제 기분을 맞추기 위해 틀어놓은 카오디오에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좋은 곡은 모름지기 시작부터 끝까지 경청해야 하는 법. 벨져는 카시트에 몸을 기대고 피아노 소리가 끊길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내 눈을 뜬 벨져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빠른 기사는 바로 운전석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고 벨져가 앉은 뒷자석의 문을 열었다. 로비 밖에서부터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지나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고급 자재에 샹들리에며 귀한 도자기같은 것들이 즐비했지만 그런다고 공간이 품은 추악한 욕망과 더러운 거짓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바로 벨져의 옆에 다가온 남자가 건물의 구조를 소개시켜드리겠다고 했지만 벨져는 손을 드는 걸로 그의 입을 막았다. 벨져는 얼어붙은 남자의 얼굴에 코웃음치며 사무실로 안내하라고 짤막하게 제 기분이 그리 좋지 않으며, 그가 제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딱딱한 목소리로 내비쳤다. 과연 온갖 거물이 드나드는 업소에 일하는 사람답게 눈치가 빨랐고, 두 사람의 구두가 대리석을 두드리는 소리만 넓은 공간을 채웠다.
“이쪽이 앞으로 쓰실 사무실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문을 두드렸다. 그말인즉슨 안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곧 제게 이 자리를 주고 떠날 사람이었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린 사이 문이 열렸다. 다이무스는 제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책상이 아닌 소파에 앉아있었다.
“앉아라.”
다이무스 앞에 놓인 커피는 이미 식은지 오래인지 김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벨져는 일부러 다이무스의 말을 못 들은 척 시큰둥하게 넓디 넓은 사무실을 느긋하게 걸었다. 앞으로 제 공간이 될 사무실은 모던하고 클래식했다. 큰 형의 성격을 반영하듯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허투루 존재하지 않는 공간. 벨져는 벽면이 유리일 뿐 창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뿐이다.
“이 일을 맡는 게 내키지 않는 건 안다만,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내키지 않는 걸 알면 그냥 그대로 거기 있지 그래.”
“벨져. 내게는 다른 일이 있다. 물론 네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와주겠지만,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제 형은 동생을 위하는 척 속을 긁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빨리 그가 꺼져주길 바랐다. 벨져에게 형이란 있어봤자 제 신경만 긁을 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 다이무스라고 제가 그를 껄끄러워하는 걸 모를 리 없다. 벨져는 다이무스가 침묵에 못 견뎌 떠나길 바랐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침묵에 익숙한 남자였다.
벨져의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을 깬 소리에 다이무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런 태도가 형제 사이에 골을 더 깊게 만든 것임에도 다이무스는 여전히 성인이 된 벨져를 돌봐야 하는 동생으로 대하고 있었다.
“긴 말 않겠다.”
다이무스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도 벨져는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의 뜻대로 놀아나는 장기말이 되는 건 질색이다. 그게 사사건건 신경을 거스르는 제 형이라면 더더욱. 다이무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벨져는 책상에 놓인 오브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이 흉물은 다이무스가 여길 나가는 순간 쓰레기통 행이다.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벨져는 슬쩍 곁눈질했다. 다이무스가 방금 들어온 듯한 남자가 내민 코트를 입고, 그는 벨져에게 등을 돌린 채 다이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뒷모습 뿐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 모습에 벨져는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잘 다린 흰 셔츠에 검은 베스트, 거기에 일자로 떨어지는 검은 정장 바지와 구두. 그 단정한 차림에 푸른 빛이 섞인 잿빛 머리카락. 누군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집을 떠나기 전 집에 있던 고용인 중 한명인지 아니면 제 착각일 뿐인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쪽은 총괄 매니저다. 원래는 내 비서로 데려가려 했다만, 그랬다간 곤란할 것 같더구나. 사무실은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럼 이만 가보지.”
끝까지 형이랍시고 훈계하는 게 꼴보기 싫다. 이미 벨져의 신경은 온통 뒤에 서있는 남자에게 쏠려 어서 방해꾼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다이무스는 벨져를 한 번 돌아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퍽 자상한 눈빛으로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걸로 끝인데도, 남자는 끝까지 문을 열어 다이무스를 배웅했다.
빨리, 어서, 얼굴을 보여. 남자의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문을 닫고,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분명, 벨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의 것이었다. 없애고 싶은, 감춰놓고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울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에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은 표정이 낯설지만, 그 때보다 키가 자랐을 뿐 그는 여전히 제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자신의 새 주인을 바라보는 그에게, 벨져는 다이무스가 썼을 마호가니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장갑을 벗으며 최대한 덤덤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내 형이 너를 꽤 아끼나 보더군. 뒤라도 대줬나?”
“우아하고 고상하기로 소문난 벨져 홀든 경이 이런 저열한 말을 하실 거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눈 하나 까딱 않고 대답하는 남자. 그 목소리가 낯설었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는 것도 사무적으로 답하는 것도 거슬린다. 벨져는 제 기억 속의 그와 눈앞의 남자를 겹쳐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그렇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단하고 높다란 얼음벽을 마주한 것 같아, 벨져는 팔짱을 꼈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쌓인 해묵은 감정들이 한 데 섞여 벨져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나는 널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런데, 왜 너는 아무렇지 않은 거지?
벨져는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으나 그는 제게 내려올 임무를 기다리는 기계처럼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시키실 일이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이어진 침묵 끝에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벨져는 그를 노려보다가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전부 쓸어 버렸다. 버리려고 했던 오브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잉크 병이 깨지고 벨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짜증이 치밀어올라 씩씩거리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더러운 시궁창에 버려진 것도 모자라 비참한 패배자가 되어 남이 쓰던 거나 물려받는 꼴이라니, 제 꼴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웃던 벨져는 책상을 짚고 허탈한 실소를 흘리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본디 그는 제 것이었다. 그 미소도, 그 목소리도, 그 눈빛, 숨결 하나조차도 제 소유였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다이무스와 키스하는 걸 봤을 때의 기분이란. 그 날로 벨져는 추궁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유학길에 올랐다. 집을 떠나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여자를 사귀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얼굴을 보자마자 이 꼴이라니. 벨져는 무거운 숨을 토하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추적하게 내리는 비때문에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이무스는 이걸로 제게 차남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영역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제 치부와 같은 그를 동원해가면서. 정말이지, 명색이 홀든의 장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저열한 수를 쓰다니. 이런 시궁창을 구르다 보니 가문의 일원으로 가져야 할 긍지마저 버린 모양이었다.
그의 뜻대로 놀아날 수는 없다. 벨져는 입술을 짓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공간에서 더는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조롱하는 다이무스도, 저를 생판 모르는 사람인 듯 대하는 그도 못 견디게 싫었다. 벨져는 그 다이무스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막내를 잠시 따라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제가 구태어 돌보지 않은들 업무가 갑자기 마비되어 난처해질 일도 없거니와, 설령 그러한들 아버지의 호통과 꾸지람 뒤에 제가 응당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면 그 뿐이었다.
제게 주어진 임무를 내팽게치고, 골프 클럽이며 승마를 하러 다니며 벨져는 그가 자신의 태만을 고해바쳐 그 늪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계속되는 태업과 파행에도 그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비오는 날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난 그 모습 그대로 벨져를 맞았다.
벨져의 인내심이 동난 건, 마지못해 이 주 만에 네 번째 방문을 했을 때였다.
“왜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뭘 말하는지 알 텐데.”
담담하게 커피를 내리던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벨져와 눈을 마주했다. 오 년만에 처음으로, 벨져는 그의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를 제대로 보았다. 그 색이 본래 상징하는 것과 전혀 다른 온도의 빛을 머금었다. 저를 떠나보내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묻지.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도련님.”
“대답해. 다이무스가 그러라고 시켰나?”
“.......”
“루이스.”
채 정리하지 못한 과거의 악연은, 때로 예상치 못한 순간 부매랑처럼 돌아온다. 벨져는 그 붉은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을 떠올렸다. 꺼내고 싶지 않은, 묻어놓은 나쁜 기억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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