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피부를 긋는 것만이 자해는 아니다. 루이스는 언제나 괜찮은 척 했다. 그 '척'에 넘어가지 않는 건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 둘은 차라리 제가 손목이라도 그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루이스는 안 그래도 흉한 몸에 더 흉터를 늘릴 생각이 없었다. 모진 학대에 시달린 등은 홀든 가에서 지내는 동안 점차 나아갔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보기 흉했다. 그나마 반반하게 생겨 팔이며 다리, 얼굴같이 보이는 곳은 피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등을 내보일 일은 흔치 않으니까.
루이스는 셔츠를 입으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며 기뻐하는 것도, 그를 마주하는 것도,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전부. 결코 돌아올 리 없는 희망에 매달려 애걸복걸하고, 자신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모는 이 관계를 그만 끝내고 싶었다.
변함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벨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하루 아침에 저를 모질게 버려두고 떠났던 것처럼 제 얼굴따위 보기도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다. 차라리 그 태도가 계속 이어졌으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무관심과 외면 속에 덧난 상처가 아팠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저를 보는 그의 그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머금을 때면 독인 줄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혀끝에 담기는 지독히도 달콤한 독. 넘기자마자 몸 속을 태우고, 끝내는 파멸에 이르게 할 걸 알면서도 그 실낱같은 연민에 기대하게 된다. 다시 한 번, 헌신짝처럼 버려질 희망을 꿈꾸고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이 지독한 굴레.
그래서 루이스는 절대 벨져 앞에서 셔츠를 벗지 않았다. 끔찍한 학대의 흔적을 보면, 그리하여 그가 어린 시절의 그 소년을 떠올리고 값싼 동정을 베풀기라도 할까봐. 그 자그마한 연민에 매달려 놓을 수 없게 될까봐.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루이스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잡았다. 아직까지도 '루이스'를 존재하게 하는 건 그 시절의 벨져였다. 너는 아직도 나를 죽이고 살리는구나.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무릎을 당겨 모았다. 무릎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이 감은 눈 아래 펼쳐졌다.
그 날 벨져는 주름이 들어간 흰 셔츠에, 진한 녹색 비로드 리본을 맸다. 리본과 같은 색 반바지를 입고, 풀밭에 앉아 손바닥에 새로 생긴 상처에 눈살을 찌푸리곤 손수건을 감아주던 소년의 목소리, 표정 하나까지 또렷했다.
[약점을 보여선 안 돼.]
[도련님에게도 그런 게 있나요?]
[글쎄. 뭐일 것 같아?]
당당하게, 턱을 살짝 든 채 말하는 당신은 나보다 어린 소년임에도 너무나 빛나서, 참으로 빛나는 사람이구나. 결코, 때묻지 않은 빛이라 함께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건 소년의 동경이자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감정이었다. 따스한 기억 속 벨져는 어리고, 당당했으며, 햇빛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 기억때문에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그 숨이 이윽고 정반대의 감정을 수반할지라도 작은 위로가 되어 기뻤다.
봐, 벨져. 난 아직도 이렇게 널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어. 루이스는 입만 벙긋거리며 꽁꽁 숨겨온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소리 없이 말하고는 양손을 입술 위에 포갰다. 너무 소중해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뭘까. 이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루이스가 아는 사랑이라곤 그가 가르친 게 전부였다. 그러니 그로부터 부정당하는 순간 숨기며 지켜온 감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터였다. 인어공주의 사랑은 그녀를 죽인다.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한 번 말해보지 못하고 지고 만.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든 꽃에 꽃잎이 한 장이라도 떨어질까 조심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 누구도 이 기억에, 제 애틋하고 괴로운 사랑에 손을 델 수 없도록.
벨져가 그 날에 대해 아주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루이스는 그의 오해와 그날의 진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다이무스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감사와.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 때는 어렸고, 한 사람 외에는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지만, 그 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 앞에 서면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지만 그 때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행복에 겨워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짓밟은 대가였을까.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자신과, 똑같이 아파하면서도 저에 대한 마음을 거두지 않는 그. 그리고 그런 그에게 마음을 기대는 나.
그렇게라도 옆에 두고 싶다는 마음을 알기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봐도 못 본 척하며 저도 참 못됐다는 생각을 지우질 못했다. 다이무스 앞에 서면, 그의 호의와 친절, 그리고 이따금씩 경계를 넘어오는 감정에 도망가기 바빴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이무스를 사랑했으면 달랐을까. 그럼 우리 모두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으나 손에 집히는 게 없었다. 루이스는 작게 욕을 하며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그건 불가능했다. 루이스는 그 간절한 회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힘들어하는 걸 알아도 도와줄 수가 없다. 그게 자신 때문이라 더,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지고 숨이 막혀왔다.
왜 그 땐, 그걸 몰랐을까.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줄 자그마한 선물을 가지고 그의 방 문 앞에 섰다. 저를 구원해준 그가 집을 떠나 유학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방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자 책상 앞에 서서 제가 그에게 주었던 들꽃을 들고 아련한 눈을 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루이스.”
루이스는 슬며시 웃으며 들어갔다. 한 손을 등 뒤에 숨기고, 다 말라 툭 손을 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작은 꽃다발을 든 그의 손을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내내 그랬던 것처럼, 꽃잎 하나 떨어지지 하게 않겠다는 듯이 조심스레 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가져갈 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던 중이었다.”
“다 부서질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는 다이무스는 그답지 않게 어딘가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해야 했기에 아무리 믿음직하고 의젓한 맏형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은 두려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루이스는 제게 눈길을 주는 대신 꽃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다이무스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그,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다이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봤다. 손에 들고 온 선물을 건네기 위해 그의 손을 잡자 다이무스가 흠칫 놀라 손을 빼려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내어주었다. 늘 따스했던 그 손이 차가워진 게 안타까워, 루이스는 그의 손바닥을 엄지로 매만지며 작은 선물을 그 위에 올렸다. 순간, 몸이 확 당겨졌다.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놀라 고개를 들자 다이무스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눈을 꽉 감고 입술로 입술을 누른 그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라 얼어붙은 자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당황하기를 몇 초,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입술을 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루이스. 함께 가자.”
“도련님, 저는....”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입술을 떼 떨어지자 한 박자 늦게 그를 밀어냈다.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웠다. 행위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다. 루이스는 단 한 번도 그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열정과 결의에 타오르는 다부진 눈길이 낯설었다. 다이무스가 다가오자 루이스는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벨져 때문인가?”
“.......”
“널 구한 건 나다.”
한참 뒤에 나온 목소리에는 꽉 억눌린 감정이 모두 배어있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을 보지 못하고, 그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리는 걸 바라봤다. 다이무스의 목소리는 엄하고, 진중한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감정이란 폭풍이 채찍처럼 몰아쳤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다이무스를 모욕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적어도, 그의 감정을 모른 척 외면해서는 안 됐다.
“...큰 도련님은 제 은인이시죠.”
“그런데 왜!”
“그래서, 그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제게 아버지이고, 형이고, 은인이에요. 그럴 순 없습니다.”
“...그래.”
지옥같은 침묵 끝에 내뱉은 말에, 루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한 그대로 다이무스는 제게 벨져만큼이나, 혹은 어떤 의미론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이런 식으로 상처 주는 게 루이스라고 편할 리 없었다. 무거운 죄책감에 한숨짓고 방을 나온 루이스는 그대로 벨져에게 향했다.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마음을 가라앉힐 곳이 필요했다. 그냥 옆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쉬고 싶었다.
그리고 벨져는, 다이무스에게 줄 선물을 같이 고르고 얼른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었던 벨져는 한순간에 돌변했다.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저를 한 번 보고는, 그 뒤로 완전히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말을 거는 것도, 손을 뻗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심장을 꺼내 줄 수 있을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순간에 남보다 못한 사람처럼 자신을 대하는 그 기분이란.
벨져는 철저히 루이스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달라고 해도, 싸늘한 눈으로 한 번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다. 네 죄를 네가 모르냐고 묻는 그 눈빛에 루이스는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건 다이무스를,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벨져가 말하지 않는대도 그걸 아는 순간 벨져는 그의 승리에 도취될 터였고, 그게 사실이라 한들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굴어선 안 됐다.
루이스에게 다이무스는 구원자였다. 존경해 마지않는 형이었으며, 벨져는 이상과도 같았다. 꿈과 이상, 그 반짝임을 몸에 두른 그. 루이스는 그 모두를 손에 쥐려다 한 순간에 두 사람을 잃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게 어떤 것인지 루이스는 몸소 깨달았다.
그래도 처음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해일 뿐이라고, 천천히 시간이 흐른 뒤에 말하면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벨져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알아준 첫 사람이었다. 그런 그니까, 순간의 감정이 누그러지면 분명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돌아와 줄 거라고, 그의 오해였음을 깨닫고 멋쩍어 화를 낼지언정 결국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오년에 걸쳐 배신당했다. 순간의 망설임. 벨져가 준 기회에 잠시 망설인 그 몇 초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게 더, 그와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건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제와 후회한들 흐른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다.
벨져가 떠난 첫 해, 그동안 루이스는 어떤 수단으로도 벨져와 닿지 못했다. 며칠을 걸쳐 심혈을 기울인 편지는 뜯지도 않은 채 반송됐고, 전화는 제가 수화기를 받아들면 끊겼다. 다가오는 부활절에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벨져는 여전히 루이스를 유령 취급했다. 말 한마디 붙여보려 하면 자리를 피했고, 방문을 두드리면 자는 척 하거나 문을 걸어 잠갔다.
문 밖에서 아무리 기다리고 말을 건넨들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루이스의 말을 단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도 모른 척 무시했다. 이 년째엔 방학이며 명절에 여행을 간다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 때문인지 굳이 생각할 것도 없다. 벨져는 그의 인생에서 자신을 그의 치부처럼 여기고, 지워버렸다. 가장 반짝이는 시절은 그렇게 외면당했다.
다이무스와 벨져가 떠난 저택엔 적막이 흘렀다. 이글마저 없었다면 혼자 고독에 잠기어 자신을 죽이고, 인간의 삶을 끝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은 건 산 채 죽어가는 자신에게 이글이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간간히 그보다 더 자신을 걱정하는 다이무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책임감이라고 자조하면서도, 이글이 까불거리다가도 금세 표정을 바꿔 손을 꽉 잡아온다거나 지친 목소리의 다이무스가 제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 비탄에 찬 삶을 견뎌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려니 진동 소리가 울렸다. 마음 같아선 그것도 몰라라 하고 싶었지만 두 번 빠르게 울렸다 잠잠해지는 소리에 루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글이면 끊어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자 어찌 또 힘겨워하는 걸 알았는지, 다이무스의 이름이 액정에 떠있어 급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예. 접니다.”
“음. 그래. 몸은 좀 어떻고.”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걱정과 상냥함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괜찮다고 답했다. 잠겼던 목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요즘, 무리하는 것 같다더구나.”
“늘 그렇죠.”
“나는...... 네가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상냥한 진심에 루이스는 잠시 느꼈던 따스한 위로와 그 뒤에 찾아온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잠시 핸드폰을 뗐다가 다시 얼굴 옆에 가져갔다.
“전 괜찮습니다.”
“혹시 그래도 힘이 들면....”
“네, 큰 도련님은 항상 제가 필요하시죠.”
다이무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던가. 루이스는 작게 웃었다. 그가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듯, 루이스 역시 다이무스를 잘 알았다.
“정말입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루이스.”
“아시잖습니까. 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단 강해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다른 말을 붙이기 전에 냉큼 반대편의 시간을 계산하고 다이무스에게 그야말로 휴식이 필요하며, 제가 없다고 마구 야근을 하다가 기껏 올려놓은 다크서클이 다시 내려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몰아붙였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제게 약했다. 먼저 사랑에 빠진 쪽이, 혹은 더 사랑하는 쪽이 지기 마련이라고 하는 세간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다이무스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을 때, 루이스도 그를 따라 웃으며 그만 자라고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자리가 되어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오히려 더 갈 수가 없다는 걸 알까. 루이스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한숨짓는 일이 많아졌다는 걸 안다.
그걸 보게 된 건 정말이지 질 나쁜 우연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벨져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열린 문에서 불어오던 바람에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는데,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고 말았다. 루이스가, 다이무스와 입을 맞추는 그 장면.
때는 겨울이었고, 바람이 차가웠으며 그 날은 며칠 내내 나리던 눈이 멎은 날이었다. 눈이 멈춰서였을까, 문 너머의 목소리가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루이스. 함께 가자. 나와 같이 해다오.”
“도련님, 저는…….”
앞으로도, 쭉 자신의 것이리라 생각했던 그였다. 그 때의 충격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졌다. 져버리고 말았다. 쓰디 쓴, 인생의 첫 패배였다. 벨져는 그 길로 무작정 예정에 없던 유학을 떠났다.
차라리 펑펑 내리던 눈과 함께 영원히 따스한 벽난로 앞과 같은 기억에 머무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벨져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머릿속에 박제된 것처럼 선명한 기억을 제 머릿속에서 지워내고 싶었다. 그 부분만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벨져를 마주했다. 서류를 하고 나갔을 땐 바지와 베스트가 바뀐 그가 문 앞에 서있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루이스는 방 안에서 오간 거래에 언급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눈빛이라도 한 번쯤 바뀔 만한데, 그는 차디찬 얼음조각같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다가갈 수가 없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벨져는 루이스를 외면하고 그를 지나쳤다.
루이스가 벨져를 잡을 때라곤 서류가 밀리거나, 중요한 고객을 상대해야 할 때뿐이었다. 그것도 그가 알아서 하는 선을 넘을 경우뿐이라 많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 업소를 관리하느라 바빴고, 벨져는 더러운 뒷거래와 돈세탁 같은 업무를 거부했다. 다이무스가 해온 일은 결국 루이스의 손으로 넘어가 벨져가 찾지 않는 이상 루이스가 따로 벨져를 찾는 일은 사실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먼저 찾기는 기분이 상한다. 매달리고 애원하는 쪽은 언제나 타인이었지, 벨져 홀든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벨져는 책상에 앉아 하릴없이 클래식이나 오페라를 듣거나, 읽히지도 않는 책을 읽는데 질려버렸다. 차라리 일이 바쁜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이따금 올라오는 서류나 만지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루이스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서지 않는 건, 글쎄. 벨져조차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성가실 뿐이다. 루이스는 벨져 홀든에게 언제나 예외가 되는 이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이렇게 그를 몰아붙이다보면 자연스레 형이나 아버지에게도 제 태만이 전해질 테고, 그럼 제게 걸맞는 자리를 찾아 이 더럽고 추악한 성을 떠나면 그 뿐이었다.
벨져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박자에 맞춰 책상을 두드리다가 일어났다. 지금 필요한 건 인내와 시간뿐이지만, 가만히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최소한 이 찝찝한 기분만이라도 해결해야 한다. 벨져는 무슨 일이냐 묻는 비서를 뒤로 하고 루이스를 찾아 홀로 내려갔다. 이미 해가 진데다 저녁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이 바로 접대의 시간이었고, 그 때문에 루이스가 한창 바쁠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홀에 있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기가 더 어려웠고, 벨져는 홀 이층 난간에서 아래를 살피는 것으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루이스는 일전에 제 앞에서 벗었던 감색 베스트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보란 듯이, 그때와 같은 차림으로 다른 남자에게 미소 짓는 그.
루이스의 그 미소에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벨져의 발이 멈췄다.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남자가 노골적으로 루이스에게 추근거리며 더러운 손을 그의 허리에 얹었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기 무섭게, 루이스가 웃으며 그의 손을 떼어내고 눈꼬리를 휘었다. 사르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그 눈웃음.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비록 벨져를 등지고 있지만 벨져의 눈에는 남자가 루이스에게 완전히 빠져버리는 게 훤히 보였다.
못 볼 걸 봤다. 벨져는 이를 악물고 가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다시 제 성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저는 주인이 있는 몸이라.”
넓고 웅장한, 층을 하나 터놓은 홀이라 여러 사람의 소리와 음악, 그 외의 잡음이 마구 섞여들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벨져의 귀에 꽂혔다. 귓가에 대고 속삭여서도 그보다 더 선명할 수는 없다. 벨져는 난간을 잡은 채 멈춰서, 쓰인 자재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려 했다.
훌륭한 솜씨로 마감된 대리석은 분명 최고급이고, 제가 보기에도 이 홀의 인테리어는 흠잡을 데가 없다. 고풍스러운 양식도, 허투루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화분과 도자기, 그림도 결국은 벨져의 신경을 돌리지 못했다. 벨져는 눈을 감은 채 빈 손으로 이마를 짚고 저 깊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숨과 함께 삼켰다.
주인이 있는 몸이라던 그 목소리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눈웃음이 고막과 망막에서 떠나질 않았다. 감각은 다른 걸 차단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고 했던가. 벨져는 감은 눈 아래 떠오르는 장면과 반복해 재생되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그가 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루이스와 남자는 떠나고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을 것도 없다.
루이스는 그의 주인을 위해 다른 이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 테고, 그건 제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결코, 루이스가 먼저 제게 안겨올 일은 없다. 벨져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그러쥐고 왔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명치, 혹은 그 아래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은 분노였고, 억울함에 터져 나오는 울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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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숨을 쉬기 힘들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찌뿌드한 몸을 일으켰다. 벨져가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는 바람에 미처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지도 못한 채로 한 달. 그동안 언제 어디에 있을지 모를 그를 피하느라 짐을 가지러 가지도 못하고, 루이스는 한 달째 사무실에서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쪽잠을 자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웨이터며 직원들이 여기 침대가 몇 개인데 그런 고생을 사서 하냐며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어디에 누우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뒤로 들어오는 검은 돈들을 세탁하는 거며,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거래의 장소 제공, 기밀 엄수와 함께 그들의 검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준비와 관리 역시 지금은 루이스의 몫이었다.
쏟아지는 업무도 업무지만, 루이스가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보 같고 한심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느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벨져를 맞이하는 걸 빼먹어서는 안 된다. 온갖 부정하고 부패한 일들이 다 벌어지는 곳에서 홀든의 개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루이스는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더러는 이런 루이스의 행동에 다이무스가 간 지 얼마인데 벌써 줄타기를 하냐는 말이 돌았지만 루이스는 그 말에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 않았다. 멋대로 떠들어대는 말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숨어있었고, 루이스는 그걸 부정할 수 없었다.
제가 그에게 품고 있는 마음. 그 마음만큼은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비척거리며 일어나다. 핸드폰의 알림등이 빛나고 있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다른 쪽이었다면 또 모를까, 업무용은 오늘도 변함없이 말만 다른 청탁과 온갖 요구들로 가득할 게 뻔했다. 그걸 준비하는 건 급하지 않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루이스는 애초에 시궁창 속에서 숨을 쉬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 시절의 기억이 없다지만 이 화려한 어둠의 순리만큼은 확실히 안다. 이 가혹한 세계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빛나고 있는 건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 오탁에 물들게 둘 수는 없다. 루이스가 저와 함께 가자는 다이무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은 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 한 사람 때문이었다.
세탁이 끝나 문고리에 거려있는 옷을 집어든 루이스는 바로 샤워를 하기 위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여벌로 미리 가져다둔 셔츠 두 벌과 정장 한 벌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돌려막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홀든가에는 비밀이 없다. 아무리 입이 철벽같은 집사님에게 부탁했어도 누군가의 입을 타고 소식이 전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루이스는 급하게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을 샀다. 본가로 돌아가 짐을 가져오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을 다이무스에게 더 걱정을 끼칠 순 없다.
게다가 돌아갔다가 그 안에서 벨져와 마주치느니 이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백 번 나았다. 물론 이글이라면야 쥐도 새도 모르게 해내겠지만, 그 녀석에게 제 공간을 허락하기도 내키지 않거니와 이글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아무리 밖에서 만난다손 쳐도 이글은 끝끝내 이리로 올 테고, 그럼 또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이글은 항상 제게만 취급이 요 모양이라며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더 끼어들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도와줄 걸 알지만 그래서 더 말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고, 이건 어디까지나 벨져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애초에 해결할 가능성이 있긴 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깊고 깜깜한 구덩이 안에 갇힌 기분. 루이스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 도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그는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외치고 아니라고 부인해도 벨져는 저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 잠겨있던 제게 한 줄기 빛이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그 날의 소년이 아니었다.
차라리 영원히 입을 다물었으면 조금 달랐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위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기억이란 거대한 저택에 들어오던 그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었고, 그 중심엔 언제나 벨져가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차마 다가갈 수도 함부로 바라볼 수도 없었던 작은 도련님.
그 때와 변하지 않은 거라곤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홀로 빛나고, 자신은 더 더럽혀질 곳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라는 것뿐이었다. 감히 그에게 닿고자 한 마음이 죄가 되어 그 벌을 받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더는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이 벼랑 끝에 선 건 온전히 자신의 의지였지만 벨져의 외면은 기다림보다 더 가혹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입을 열지 않아도 신기하게 제가 바라는 것을 알아내던 그 작은 도련님이 너무나 그리웠다.
루이스에게 기억이란 바닷물과도 같았다. 너무 목이 말라 타오르는 사막에서 겨우 도망쳐 순간의 갈증을 채우면, 그 다음은 폭풍이 치는 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다시 파도에 밀려 뭍이 올라와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했다.
그 누구도 채울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다. 내 주인은 영원히 넌데. 이럴 거면 시작을 말지.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끝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싫었다.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을 처음 가르친 사람은 너무나 변해버렸고 과거에 머물러있는 자신은 하루가 갈수록 그 하루를 버티는 게 점점 더 힘이 들었다. 기다림을 견디게 해준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바지와 팬티를 벗고 셔츠를 벗었다. 하루 동안 입었던 옷가지를 다시 세탁실로 보내기 위해 한 데 던져두고 샤워기 앞에 섰다.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달군 열이 씻겨 내리며 몸에 오한이 들어 몸이 떨렸다. 이 추위야말로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제가 머무를 계절은 영원히 그 겨울이라고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삶은, 시간은 전부 벨져가 떠나던 그 날에 멈춰있다. 제 삶에 좋은 부분, 따스한 기억이라곤 전부 오 년 전에 머물러있었다.
차디찬 타일을 짚고 깊은 한숨을 토한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찬 물을 맞고 있음에도 눈가와 머리가 뜨거웠다. 여전히, 숨을 쉬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