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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아무리 졸리고 피곤해도 출근은 해야 한다. 오늘도 착실하게 소시민의 삶을 시작한 루이스는 별 다를 거 없는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서점으로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을 빵을 한 덩이 사고 출근.
루이스는 서점의 문을 열고 일할 때 입는 셔츠와 가디건으로 갈아입은 뒤 서점 뒤 테이블을 정리하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서점은 한가롭다. 아는 사람, 혹은 꾸준히 찾는 사람만 오는 서점에서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소소하게 자리한 서점은 사실 트와일라잇 광장에서 가장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가끔 책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읽긴 하지만 추천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기야 이 시국에 트와일라잇까지 온 사이퍼가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바로 옆에 있는 홀든 은행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이퍼들이 들락거리지만 서점은 한가롭기 그지 없었다. 루이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하루가 갈수록 몸이 예전같지 않다. 여기저기가 삐걱거리고, 만성 수면 부족으로 카페인 없이는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모처럼 볕이 잘 드는 날씨에 몸이 더 나른했다. 인간의 삼대 욕구는 수면욕과 식욕, 성욕이라고 했던가. 안 그래도 요즘은 지치는 일 뿐인데 한밤중에 잠도 안 자고 돌아다녔더니 잘 시간을 뺏기는 건 물론이요, 거기에 머리까지 쓰느라 배로 힘들었다. 하긴, 벨져 홀든을 상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어제는 정말 생각나는 게 거기밖에 없어서 그랬지만 벨져의 말대로 장소를 옮길 필요는 있었다. 뒤에 보이는 트리비아, 방금 막 리스폰 기어에서 내려와 무전으로 들리는 이글의 목소리에 떠오른 게 거기였을 뿐이다.
딱히 거기라야 할 이유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거기까지 오가는 시간과 체력이 아깝다. 게다가 제 아무리 잘난 벨져 홀든이라도 일단은 연합의 세력권인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 중 누군 뭐 안전하겠냐마는,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이미 한 차례 아무것도 아닌 조무래기를 깔봤다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벨져를, 그 아름답고 고고한 남자를 떠올리다가 눈을 비볐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걸 봐선 아무래도 여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얼어죽을 걱정이나 난방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좋지만, 더위와 쨍한 햇살은 견디기 힘들다. 여름은 루이스에게 가장 가혹한 계절이었다. 올해는 더 더울 거라는데 또 어떻게 여름을 나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나고 자란 런던의 뒷골목에 해가 잘 들지 않아서였을까. 추위를 견디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한여름 뙤약볕에는 몸이 맥을 못 추고 늘어졋다. 거기다 햇빛에 노출된 피부는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울긋불긋하게 물들어서 여름에도 몸을 가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편해서 입고다니던 후드는 이제 떼어놓을 수가 없는 필수품이 됐다.
다들 해수욕이다 뭐다 하며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놀러갈 때도 루이스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벨져는 더 피부가 희고 창백한데 여름엔 어떨까. 그 성격과 외모에 양산이라도 쓰고 다닐지 모른다. 분명 화려한 레이스 양산을 쓰겠지. 워낙 하얗고 예뻐서 흰 색이나 아이보리 색이 어울릴 텐데.
지루하기 짝이 없는 뻔하디 뻔한 로맨스 소설을 읽던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았다. 모든 걸 가진 귀족 남자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활발하고 선한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차고 넘쳤다. 흔히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는데, 신데렐라는 원래 귀족 가문의 여성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왠지 그가 이 거리를 지나갈 것만 같다. 그렇게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데 꽃 파는 아이 하나가 서점 문을 열었다.
“저, 저기….”
“응? 무슨 일이니.”
“이거…! 엄청 예쁜 분이 언니 갖다드리라구…!”
뺨이 발갛게 물든 데다 눈이 반짝이는 여자아이가 루이스에게 수선화 한 다발을 내밀었다. 엄청 예쁜 분. 머릿속을 스쳐가는 인물에 루이스는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그리구 이것두요!”
“응, 고맙구나. 다른 말은 안 하셨니?”
루이스는 꽃을 내려놓고 앞치마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열한두살쯤 됐을까, 자매가 아니냐고 더러 묻는 세탁소의 아이 또래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작은 쪽지를 건넸다. 두 번,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접힌 쪽지에선 희미하게 꽃향기가 났다. 이쯤 되면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보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것도 없었다.
“어, 음…. 그지만 이건 비밀인데….”
“나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던?”
“아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그게….”
시선을 피하는 아이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 루이스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아이를 다그칠 생각은 없다. 대신 아이의 모자 위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 먹었니?”
“아뇨, 아침 일찍 꽃을 따느라….”
“그럼 같이 먹을래? 혼자서 먹긴 심심했거든. 그래봤자 빵이랑 차뿐이지만.”
“네!”
능력자도 아닌 아이가 여기까지 꽃을 팔러 왔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정말 형편이 어렵거나, 아니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스파이거나. 벨져가 뭘 보고 고른 건지 몰라도, 어쨌거나 아이는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낡은 원피스와 앞치마. 그것마저 꽃을 꺾느라 흙으로 더럽히고, 제 때 먹지도 씻지도 못한 데다 음식을 보자마자 기대감에 눈을 빛내는 것까지. 어쨌거나 루이스는 거리의 고아 출신이었고, 그런 것들을 구분하는 눈만큼은 확실했다.
차를 우리고 컵에 담아 내가는 동안 아이는 신기한 듯 서점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루이스는 작은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고 말을 붙였다.
“읽어보고 싶니?”
“아, 아뇨! 읽을 줄도 모르는 걸요. 그 예쁜 분도 제일 먼저 글을 읽을 줄 아냐고 물어보셨고…. 앗!”
손사래를 치던 아이는 해맑게 웃다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밀을 말해버리고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는 빵을 잘라 큰 쪽을 아이에게 건네며 웃었다.
“괜찮아. 비밀로 할게. 약속.”
“정말이죠…?”
“그럼. 별 것도 아닌걸.”
“휴, 감사합니다. 아, 언니도 예쁘세요! 정말로요! 아까 그 분은 장미같구, 언니는 물망초 같아요! 더 잘 팔리는 건 장미지만요!”
“그래. 고마워.”
들어올 때만 해도 간신히 말을 꺼내던 아이는 말이 많고 활달했다. 천성이 밝고,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고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가 빵을 손에 쥐자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천천히 먹으렴. 차도 좀 마시고. 너무 뜨겁니?”
“아뇨! 괜찮아요! 뜨거운 물이 얼마나 귀한데요!”
“그러다 체할라.”
루이스는 아직 김이 오르는 아이의 컵을 들고 후후 불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에게 컵을 건넸다.
그야 물론 보낸 애가 안 돌아오니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도 벨져가 지켜보고 있다. 직접 행차하지 않는 이유는 단연 옆 건물의 그 때문이었다. 이글이 아무리 바닥에 드러눕고 떼를 써도 절대 빌려주지 않는 홀든 가의 장남.
다이무스는 꽤 젠틀한 신사였고, 서점에도 자주 들르는 단골 고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벨져보다야 다이무스의 호의를 사는 게 낫고,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다이무스에게 빚을 지우는 게 이득이지만 어쨌거나 한 번 거래를 시작한 이상 그를 팔아넘길 순 없었다. 못 할 건 또 뭐 있겠냐마는, 그랬다간 정말 그와는 끝장이었다.
답을 아이 편에 돌려보내야 할까. 루이스는 창밖을 흘긋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부러 글을 못 읽는 아이를 보낸 건 단 한 줌의 정보도 흘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마 제대로 전해주는지도 지켜봤겠지. 아무렴 벨져 홀든이 일을 그렇게 허술하게 할 리가 없다.
루이스는 아이가 빵을 먹는 사이 창을 등지고 서서 쪽지를 폈다. 코어레너드의 럭셔리 호텔 이름과 네자리 숫자. 루이스는 객실 번호만 외우고 일어나 물을 끓이느라 썼던 화로에 쪽지를 던져넣었다.
“언니는 안 먹어요?”
“응? 아, 괜찮아. 더 먹을래?”
“정말요?”
“가져갈래?”
조심스럽게 묻는 아이의 앞치마가 불룩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먹을 걸 숨기는 건 나중에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배가 주린 와중에 생각나는 가족 때문이다. 활짝 피는 아이의 얼굴에 루이스는 빵을 잘 싸서 봉투 안에 넣고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심부름 값 대신이라고 생각해.”
“그, 그지만…. 꽃 값도 후하게 쳐주셨는 걸요.”
“괜찮아.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루이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냥 쪽지를 배달시키고 말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아이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나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벨져는 너무 예뻤고, 흔치 않은 일을 접한 아이는 순전히 뿌듯한 마음에 자랑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었다. 꽃 파는 아이, 신문 파는 아이, 구두 닦는 아이. 거리에 넘쳐나는 아이들 틈새로 번지는 소문은 또다시 그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었다.
“비밀로 해줄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 가족한테도,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꽃들한테도요?”
“응. 사실, 언니랑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거든. 언제 어디서나 감시하고 있어서, 잘못하면 너도 네 가족들도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알겠니?”
짐짓 심각한 척 아이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속삭이자 겁을 먹은 듯한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걸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괜히 겁을 준 것 같아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눈을 돌리려는 순간 꼼질락거리는 아이의 손과 작은 잇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 한 거짓말, 조금 더 보탠들 어떠랴 싶어,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동생이 있니?”
“네, 이제 다섯살이구…. 몸이 아파요….”
“네가 동생을 사랑하는 것처럼, 언니도 그 분을 사랑한단다.”
“…정말요?”
아이들은 감정에 예민하다. 아이의 질문에 뜨끔한 루이스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직접 만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그 분의 말을 전해주겠니?”
루이스는 최대한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말하려 애썼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읽었던 소설의 정신 나간 여주인공이 새를 붙들고 하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하는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이 나이 소녀들은 으레 동화속에 나올 법한 로맨스를 동경하는 법이니까. 슬픈 척 눈을 깜빡이자 아이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예요!”
“고마워.”
루이스는 아이를 한 번 안아주고 일어났다. 오래 쪼그려 앉은 탓에 다리가 저렸다. 어떻게 이게 통했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금단의 사랑을 하는 가련한 여주인공 보듯 힘내라며 서점을 나섰다.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뒤에서 손을 흔들던 루이스는 의자에 털석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의욕이 넘치는 것도 문제다. 아이가 벨져에게 힘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벨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조금 궁금했지만 당장은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택도 없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걸 가지고 또 한 소리 할 지언정 그도 이해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가벼운 아이들의 입을 믿을 순 없을 테니까.
한 차례 폭풍이 몰아친 것 같다.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빵부스러기와 컵 두 개, 그리고 서점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와 눈이 쨍할 정도로 노란 수선화가 남았다. 오늘 아침에 꺾어왔다는 말을 증명하듯 물기가 어린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가장 예쁜 유리병을 찾아 반쯤 물을 채우고 꽃을 꽂아 햇볕이 가장 잘드는 창가에 병을 놓았다. 싱그러운 여름의 향기가 오래된 종이로 가득한 서점을 채웠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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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다음주에 온다던 사람입니다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
불꽃이 일고 금속음이 터지며 곳곳에서 공격이 날아드는 교전 상태, 가장 앞에 선 벨져는 박쥐로 변해 후방으로 달아나는 여제를 쫓았다. 그녀를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를 악문 순간, 벨져의 옆으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얼음 레일이 벨져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제길…!”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급하게 몸을 돌려 검을 던져다. 섬광보다 빠르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이라면 막을 수 있다…!
“전부, 얼어버려!”
한 끝, 한 끝 차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녀를 막지 못한 대가는 차가운 얼음 감옥이었다. 후드 안으로 휘날리는 청회색 머리카락. 얼음 속에 갇힌 채 후방에서 교전중이던 이들이 얼음 산탄총에 쓰러졌다. 벨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짐이라고는 하나 회사의 능력자라는 사람 넷이 단번에 리스폰 기어로 올라가버리는 기분이란. 꼼짝할 수 없게 가뒀던 얼음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벨져는 모든 기술을 써버린 루이스에게 달려들어 올려 베었다. 네 번, 베고 잡아 착지하며 안개지역의 상자 안으로 밀어넣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크흣…!”
“그 잘난 영웅의 이름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군.”
“네가 상관할 바가…, 큭!”
“아직 내 질문에 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하, 먼저 내빼놓고 이제 와서?”
벨져는 유치한 도발로 기회를 엿보는 루이스를 잡아 빠르게 발도해 베었다. 그녀만큼 단번에 큰 피해는 입힐 수 없지만 일대일인 이상 이런 식으로 갉아먹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우위를 점하고 이어가는 건 제 쪽이다.
아무리 환영의 도시라한들 고통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물들었다. 그 와중에도 눈을 감지 않는 건 칭찬할만 하지만 그녀는 과거 첫 대결에서도 그랬다. 그러니 딱히 칭찬해줄 필요도, 전처럼 한 수 물러줄 것도 없다.
“흥, 아직 남은 질문이 있지 않나?”
“후우. 하,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거야? 의외로 쪼잔하네! 홀든!”
깔끔하게 베어넘기며 잠시 손을 놓은 틈으로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날카로운 얼음의 위력은 몸소 체험해 본 자만이 안다.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걸, 벨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검의 괘적을 바꾸는 것보다 루이스의 검이 더 빠르다. 벨져는 검으로 쳐내는 대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이 거리면 언제든 검을 던져 공격할 수 있다. 루이스의 사정거리를 가늠한 벨져는 다시 그녀에게 검을 던져 돌아가려 했다.
“나가라!”
여제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뒤에서 날아든 박쥐 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앞은 루이스, 뒤는 여제. 벨져는 작게 혀를 찼다. 어느 쪽이든 피할 수 없다. 루이스가 미소짓는 게, 옅은 안개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작게 움직이는 입술.
“제길…!”
박쥐 떼가 등을 덮치고, 몸이 떠오른 순간 루이스가 벨져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른팔을 왼팔로 받치고, 귓가에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속삭이더니 곧장 쨍한 냉기와 함께 얼음이 폭발했다. 쟁쟁한 소리와 투박한 통증이 이어지고, 곧이어 벨져는 리스폰 기어 위로 올라갔다.
자아도 없이 끌려가는 기분이란 언제 당해도 기분 나쁘다. 먼저 올라와있던 넷이 제 눈치를 살피는 게 더 짜증나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십 분 내내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방금 그 한 방으로 열세를 극복하고 승기를 가져간 주역이 본진까지 들어와 무자비하게 수호자를 쓰러트리는 걸 손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영 심기가 불편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녀의 능력만큼이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이야말로 벨져가 방금 전까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전날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여느 아가씨마냥 머리를 틀어올린 게 이레귤러일 뿐이었다. 제 눈 앞에서 까딱이던 희고 가는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향락의 기억.
당황한 나머지 먼저 살롱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할 거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루이스가 너무 태연한 탓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쪽은 말을 꺼낸 벨져였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저들끼리만 화기애애하느라 공성을 망친 팀원들이 먼저 리스폰 기어를 나간 탓에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의 그 술집에서 봐.”
홀로 남은 벨져는 마지막으로 루이스가 속삭인 말을 곱씹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겨우 그 말만 가지고 어떻게 찾아가겠냐고 하겠지만 벨져에겐 짚이는 곳이 있었다.
아니, 거기밖에 없다. 루이스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디시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제 망나니 동생이 그가 가진 가장 귀한 재산에 흉터를 내고 가문의 위상을 더럽힌 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능력자에게 당한 제가 낫다. 비록 3급 능력자라 하지만 적어도 루이스는 그녀가 가진 다른 이름 앞에 한 치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분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상대였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벨져라 한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벨져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 루이스를 옹호해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겨우 그렇고 그런 능력자따위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만큼 굴욕적인 건 없을 테니까.
그 때의 일은 제 오만과 방심이 빚어낸 실수에 불과했지만 '루이스'는 달랐다. 그녀는 벨져 홀든을 꺾은 능력자답게 성장해나갔고, 이제는 더 나아가 연합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이 쯤 되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어차피 일생에 한 번쯤 겪을 일이라면, 오히려 그녀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벨져는 화를 내며 올라온 르블랑의 꼬마 숙녀와 명왕의 양녀를 내버려두고 부서져가는 HQ를 바라봤다. 니케가 루이스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누구에도 지는 법이 없는 자신이건만 루이스 앞에만 서면 흐름이 이상하게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어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내려가지 않았다. 여제가 비행을 시작한 이상 끝난 게임이었고, 내려가봤자 기세등등한 적을 마주해 분풀이를 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 당초 얼굴을 비추는 것에 의의가 있었던 만큼, 벨져는 이번 공성을 진들 이긴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예정에도 없던 루이스가 나오는 바람에 아주 약간 진심이 되었던 것뿐이다. 오히려 소득이라면 소득이 있었지.
여느 때처럼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 받는 회사 사람들을 두고 벨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잔소리꾼이라도 만나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
* * *
포트레너드의 쪽, 디시카는 워낙에도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회사와 연합의 갈등이 깊어지고 안타리우스가 성횡하는 근래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술냄생와 퀴퀴한 악취가 진동하는 술집으로 발을 들인 벨져는 손을 들어 코를 손등으로 가렸다. 그런다고 악취가 가시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손등에 남아있는 향수 냄새가 이 냄새에 적응하기까진 도움이 될 터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술집에는 불량배며 정신이 빠진 녀석들이 즐비했고, 벨져는 저를 이런 곳으로 불러낸 사람을 찾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능력자라 한들 여자 혼자서 들어올 곳이 못 된다. 척 봐도 질이 나쁜 녀석들이 여자를 끼고 수작을 부리거나, 공기가 탁해질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며 싸구려 술을 퍼마시는 지저분한 술집은 고귀함과 품위를 호흡하며 자란 벨져에겐 아무리 좋게 봐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잘도 이런 싸구려 술집에 발을 들일 생각을 했구나, 이글. 막내를 떠올리며 혀를 차던 벨져는 안쪽 구석에 후드를 쓰고 앉아있는 루이스를 발견했다. 눈여겨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엔 싸구려 위스키 한 병과 유리잔 두 개, 맥주병이 늘어서있었다. 혼자 마실 양은 절대 아니다. 벨져는 갈색 맥주병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훑던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눌러쓰고 고개를 수그린 그녀를 내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꼭 이런 곳이어야 했나?”
“보다시피 제정신 안 박힌 놈들 뿐이거든. 이 시간엔 더더욱. 걱정마, 여기 주인이랑 아는 사이니까.”
“흥. 말은 잘하는군.”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평소에 입는 후드재킷보다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여성 특유의 골격까지 감출 순 없다. 조악한 불빛 아래 잘 보이지 않는 얼굴과, 곳곳에 생채기가 난 가는다란 손가락. 벨져는 잔을 들어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마시지도 않을 맥주병만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이런 술이야 그냥 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얼음이 나올 리도 없고.”
“그냥 달라고 해.”
루이스는 손을 쥐었다 펴며 빈 잔에 얼음을 채웠다. 기묘한 장면이지만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이 정도는 놀라운 축에 끼지도 못했다. 라벨도 상표도 없는 위스키를 따 잔에 따른 벨져는 얼음과 술이 섞이도록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대로 내려놓으려 했는데, 무언가의 기대를 담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단숨에 들이켰다.
“후후. 만만히 볼 게 아니지?”
“…너….”
“그게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야. 싫으면 다시 문 열고 나가.”
색을 보고 당연히 위스키겠거니 생각한 술은 식도와 위를 태우는 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셌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썼던 벨져는 여유롭게 웃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루이스는 만지작거리던 병을 따 손에 들고는 의장에 등을 기댔다. 가시지 않은 쓴 맛과 타오는 속 때문에 입가가 씰룩거렸으나 루이스는 제가 먹인 골탕이 만족스러웠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래.”
“잘도 나를 기만하는군.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고.”
“기대할게.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게 인지상정. 말문이 막혔는지 루이스가 테이블에 팔을 올리며 벨져 쪽으로 몸을 숙였다. 후드 안에 감춰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피처럼 붉은 눈이 벨져를 향했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혼자 남겨지는 거, 기분 정말 별로였거든.”
“윽……. 그때는….”
“알아. 경황이 없었겠지. 바쁘셨거나. 그런 걸로 연연하고 매달리는 레이디가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렇지 않게 아픈 구석을 찌르고 빠지는 바람에 기세등등하게 루이스를 몰아붙이던 벨져의 기세가 꺾였다. 아침에 일어나 목도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벨져가 입을 다문 사이 루이스가 도로 몸을 뒤로 빼고 팔짱을 꼈다.
“그땐 나도 완전히 취했었고…. 그냥 서로 실수한 걸로 치고 넘어가자고. 참고로 전에는 술로 때우려다가 그 방에 있는 술을 동내고 밑천이 없어서 옷 벗기로 했던 거야.”
“누가 먼저….”
“알고 싶어?”
“아니, 됐다!”
누가 침착한 결정사 아니랄까봐, 잘도 부끄러운 얘기를 술술 늘어놓는 루이스때문에 벨져만 뺨이 달아올랐다. 어느 쪽이든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전말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고, 없던 일로 하는 건 이쪽도 원하는 바였다.
벨져가 죽고 싶을 정도로 쪽팔려하는 게 재미있어,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발로 벨져의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그가 루이스를 볼 때 고운 얼굴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고, 확률로 치면 다시 한 번 거대 일식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희박했다.
“뭐, 지난 질문에 다시 답하는 건 포함시키지 말자구.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냐고 물어본 거야. 이걸로 세 번째네.”
“으윽….”
분명 엇비슷하게 마셨던 것 같은데 먼저 정신을 놓고 기억을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벨져는 도로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분명해서, 루이스는 조금이나마 다이무스의 고충을 이해했다. 이글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픈데 벨져까지 돌보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루이스가 그런 생각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사이 벨져는 이미 몇 번이고 되짚었던 기억을 돌이켰다. 영화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유독 생각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레코드가 긁힌 것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는 기억 속에는 지금의 이 무감각한 얼굴이 아닌, 잔뜩 흐트러져 할딱이는 여자가 있었다. 충동에 휩싸여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타들어가는 속만큼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쓰린 속에 또다시 누가 불을 지른 것만 같다.
눈을 감았다 뜬 벨져는 자신을 다잡았다. 취한 것도 아닌데 멀쩡한 제정신으로 루이스에게 말려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서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만 해댔지. 네가 여제의 행방에 마지막 남은 와인을 들이키던 것까진 기억난다.”
“설마하니 그렇게 다 피해가고픈 질문만 할 줄은 몰랐거든.”
“동감이다.”
“규칙을 수정해야겠어. 물론 계속한다는 가정 하에.”
“무슨 생각이지?”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돼. 어쨌거나 조건은 전과 같아. 소속의 대표가 아닌 개인으로서 하는 거래고, 제공자의 신원 보호는 철저하게 지켜야 해.”
“차라리 종이와 펜이라도 가져오지 그러나.”
“이런 건 확실히 하는 편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서로 안전한 편이 좋잖아?”
“그래서 새 규칙은.”
“간단해. 답은 예, 아니오. 대신 대답하기 곤란하면…. 술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요구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지.”
“그렇게 하면 네가 내놓을 게 있나? 공평한 거래라고 들리지 않는데.”
“벌써부터 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왕이면 안전한 편이 좋지.”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사항을 늘어놓는 건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의 성격탓일 수도 있지만, 벨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영웅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 한들 변함없이 겁쟁이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모두를 쥔 건 벨져지 루이스가 아니다. 벨져의 말은 다소 가혹할지 몰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루이스가 가진 거라곤 그녀의 몸과 명석한 두뇌, 능력과 정보 정도가 전부다. 자랑하는 능력도,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영리함도, 그리고 그녀가 아껴 마지않는 동료들도 전부 하나같이 내놓을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나를 줄게.”
“하! 전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군. 이만 일어나도 되겠나?”
“그래? 전에는 꽤 좋아했던 것 같아서. 아쉽게 됐네.”
이 인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 하룻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러는 게 불쾌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이래서 엮이고 싶지 않았건만. 벨져는 입가를 씰룩이며 루이스를 노려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덤덤한 무표정으로 맥주병을 기울이며 벨져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금 그 말, 상당히 불쾌하게 들리는군.”
“그러게 누가 기억하지 말래? 잊은 건 너야. 홀든. 정 궁금하면 질문이라도 해보던가.”
“흥. 차라리 술을 마셔라.”
“그게 별로라는 걸 경험해서. 아까도 말했지만, 혼자 남겨진 기분 진짜 별로거든.”
“윽…,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내 마음이다. 그리고!”
주먹을 부들거리던 벨져는 홧김에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건 전혀 벨져 홀든스럽지 않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도발하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 번쯤 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결코, 음란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소녀같이 순수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바람에 더 오기가 생겼다.
“장소는 내가 정해.”
“아무렴.”
생긋. 루이스는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막 봉우리를 틔운 하얀 꽃처럼 웃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얄미워 벨져는 대충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술값을 던졌다.
“이런 악취나는 곳에 한 시도 더 있고 싶지 않군. 일어나.”
“응? 잠깐. 아깝잖, 으왓…!”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술이 아까운 것 뿐이었는지 루이스는 저항 한 번 없이 끌려왔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벨져는 술집을 나오자마자 루이스의 손목을 놓았다.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가늘다. 장갑을 끼고 만졌음에도 손에 남은 촉감이 왠지 간질거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찼다. 말 한 마디 없이 가스등이 드문드문 서있는 거리를 걷는데 루이스가 추운지 팔을 감싸고 목을 움츠렸다. 손으로 팔을 쓰는 궁상맞은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샜다.
“저기, 난 이쪽인데….”
“그래서?”
“응?”
“앞장서라.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로의 갈림길에서 멈춰선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말하는 의도야 뻔하지만 그렇다고 새벽에 혼자 돌려보내기엔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루이스가 얼음보다 더 차갑고, 능력자 다섯쯤은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라 한들 이런 시기에 혼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할 리 없었다.
“지금 레이디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고개를 기울여 올려다보는 루이스에게 정색하고 말하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바로 섰다.
“다행이네. 보다시피 사람이 전혀 없거든.”
루이스는 싱긋 웃더니 거리에 얼음길을 깔고는 미끄러졌다. 자랑하는 기동력이 이럴 때도 쓰이는 모양이다. 벨져는 한달음에 멀어진 루이스의 뒷모습과 바스라진 얼음이 순식간에 기화되는 걸 보고 돌아섰다.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따라갈 의무까진 없다. 어차피 쉽게 당할 리가 없기도 하고,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건 그녀에게 추근덕거릴 멍청이들의 안위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인다. 벨져는 이미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꾸 루이스가 마음에 걸리는 건 몸에 익힌 매너와 습관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손에 쥐었던 가느다란 손목이 생각나서, 벨져는 샤워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루이스를 생각했다.
하루를 늦게 마치는 것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하루에 두 번 씩이나 루이스를 마주하기란 여간 피곤한 게 아니어서, 금세 잠이 몰려왔다. 눈을 감기 전, 연락할 수단과 만날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이것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깨달은 벨져는 베개를 잡아 당겨 편한 자세를 잡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나머지는 일어나서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는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그녀가 나왔다. 귀에 끈적하게 감겨드는 목소리가 달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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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위험한 사람
* 현대물, 비오는 날 검은 머리 짐승을 주운 루이스
위험한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위험할 줄이야.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 갔다가 서점 알바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 둘이 나타나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연히 겁을 먹고 피하려 했지만 남자들이 내뿜는 위압감에 어쩔 수 없이 검은 대형 세단에 올랐다.
어렵게 살긴 하지만 목돈을 빚진 데도 없고, 기껏해야 친구들에게 가끔 얼마씩 꾼 게 전부였다. 그러니 남자들은 사채업자도, 인신매매단도 아니다.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같이 가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게 부탁일리는 없지만, 폭력이나 협박같은 과격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사실 이렇게 실려가는 이유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며칠 전까지 루이스의 원룸에서 한 침대를 쓰다가 말도 없이 사라진 그. 잘 잡힌 근육과 손에서 팔을 휘감은 문신, 그리고 그 눈빛만으로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비 오는 날 야밤에 거리에서 배에 칼을 맞고 쓰러져있다면 더더욱. 루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그의 이름도 하는 일도 말하지 않았지만 같이 살기엔 나쁘지 않았다. 사람의 온기가 반겨주는 집, 김이 오르는 음식은 루이스가 일평생 막연히 그랬으면 좋겠다고 꿈꿔온 것들이었다. 늠름하고,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는 남자. 그는 단단한 바위같았다. 비바람에도 꿈쩍 않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바윗돌. 샤워를 마치고 나와 낮게 숨을 내쉬던 그의 벗은 몸과 눈빛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유도 목적지도 모르고 모르는 사람들의 차에 실려가면서 너무 태평하지 않은가. 루이스는 다시 제 상황을 상기하며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사람들을 상대로 육탄전을 해서 이길 자신도, 달아날 자신도 없다. 침착하자.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루이스.
창밖을 흘긋거렸지만 어둠이 내린 거리엔 적막만이 가득했고, 점점 더 모르는 풍경만 들어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바다에 루이스의 머릿속에 진부한 드라마의 전개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어둠의 조직원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런 그를 노리는 세력이 인질로 쓰기 위해 잡아들이는 그런 흔하고 뻔한 클리셰.
주인공도 그렇지만, 인질들의 끝도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인질은 죽거나, 온갖 험한 꼴을 당하고 결국은 목숨만 부지하거나 평생 트라우마가 될 기억만 안고 살아간다. 그래도 사랑한다며 나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건 소설이나 영화, 만화 속에나 있는 얘기일 뿐이다. 루이스가 탈출 계획을 세우는 사이 해안도로를 달리던 차가 휘황찬란한 건물에 멈췄다.
듣도 보도 못한 건물 앞, 먼저 내린 남자가 뒤로 와 차의 문을 열었다. 건물 앞에는 저를 데려온 남자들과 비슷한 남자들이 서있었고, 루이스는 깔금하게 도주할 계획을 포기했다. 남자들은 루이스가 내리자마자 양 옆에 서서 연행하듯 걸었다. 팔을 잡지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결국 루이스는 반항 다운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발을 옮겼다. 곳곳에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가득한데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힘을 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들도 위에서 시킨 일을 하는 것 뿐이니 제 처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얘기를 해야 했다.
건물은 휘황찬란할 정도로 고급스러웠지만 위험하고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야 이 공간을 채운 사람들이 이 모양이니 당연하지만,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힌다. 마침내 저를 찾은 사람을 만나는 건지, 남자가 양쪽으로 여는 커다란 문을 두드렸다. 긴장으로 마른 침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렸다.
루이스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부디, 이 문 너머에 부디 제가 아는 얼굴이 있기 만을 바랄 뿐이었다.
“...계속 거기 그렇게 서있을 건가?”
“당신....”
“앉지.”
양복 대신 중국의 전통 복식을 갖춰입은 그가 기다렸다는 듯 루이스를 맞았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그가 한 번 눈짓하자 루이스를 데려온 사람들이 문을 닫고 나가고, 딱딱한 막대기마냥 그 자리에 서있던 루이스는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신세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괜 채 저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과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루이스의 걸음을 이끌었다.
“저녁은 먹었나?”
“아, 아뇨....”
“그럼 밥부터 먹지. 편하게 있어도 좋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요. 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루이스는 말을 꾹 눌러 참았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호화로운 방 안의 카페트로 시선을 내리고 있으니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한, 즐거움을 참아내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들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말 하지 않았나. 빚은 갚겠다고.”
“안 주셔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대가 호의를 베푼 게 그대의 마음이듯, 나 역시 내 마음대로 할 뿐이다.”
“...덕분에 오늘 삶의 위협을 느꼈는데.”
“그들이 무례하게 굴던가?”
잘생긴 얼굴에 미간이 좁혀지며 확 번지는 짜증에 루이스는 고개를 도리저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손 하나 까딱 않고 사람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이다. 제 말 한 마디에 사람 하나의 목이 날아가는 건 루이스로서도 썩 달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양해주었으면 했다.
루이스는 평화와 안온한 일상을 사랑하는 소시민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을 잃고 싶지 않다. 무겁게 짓눌린 공기 속에서, 후드를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은데요.”
“시간이 늦었다만.”
“늦은 시간인 걸 알면서 이렇게 데려와요? 말 한 마디 없이?”
“....... 루이스.”
“기왕 물어본 김에 하나만 더 물을게요. 난 당신 이름도 몰라요. 그건 압니까?”
이 지경이 되어서도 루이스는 남자의 이름조차 몰랐다. 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왜 바라지도 않은 보상을 주려는지는 몰라도 이런 식은 아니다. 말을 하다보니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라 그를 노려봤다. 남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루이스와 눈을 맞추다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에 무게가 느껴져 짓눌릴 것만 같았다. 괜히 혀를 놀렸나. 그냥 가만히 있을 걸.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 이를 악물고 눈을 감은 순간 뺨과 귀에 그의 손이 스쳤다. 후드가 벗겨져 목 뒤로 떨어지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티엔. 티엔 정이다.”
말문이 막혀 고개를 들자 그가 루이스의 귀 언저리에서 맴돌던 손을 거두고 뒷짐을 지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저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잘 지내는지 궁금했고..., 그리고....”
남자, 티엔은 말끝을 흐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을 고르는 그의 그 얼굴에 루이스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불안과 공포로 세차게 뛰던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저 당연한 신체 반응일 뿐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루이스는 꾹 눌러온 숨을 천천히 토했다.
“보고 싶었다구요?”
“....”
예상치 못한 답이라는 듯, 혹은 그 의표를 정확히 찔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새나왔다. 무서운 사람이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다. 가령 생각지도 못한 식사를 차려놓는다던가, 빨래를 예쁘게 접고 바느질을 한다던가 하는 것들. 이제야 겨우 제가 아는 사람이 돌아온 것 같아 손을 뻗었다.
그는 루이스가 조심스레 뻗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고 뺨을 감싼 손바닥에 그의 얼굴을 부볐다.
“보고 싶었다.”
“네.”
“넌 아니었나?”
“...별로요?”
바로 눈꼬리가 올라가며 입이 일자로 굳어지는 게 퍽 귀여워, 루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삐지면 달래기가 여간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냉큼 웃으며 말을 고쳤다.
“농담이에요.”
“썩 유쾌한 농담은 아니군.”
“아무렴 여기까지 끌려온 저만 할까요.”
“...식사 하겠나?”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인지, 여긴 어디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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