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한 금요일 저녁, 루이스는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책을 덮었다. 이 시간쯤 되면 모두들 집에 돌아가거나 펍으로 향하기 마련이라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하긴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누가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겠냐마는. 최근 연합의 일로 바빠서 서점에 신경을 못 썼던 터라 자청한 일이었지만 인적이 드문 거리에 이따금 지나가는 커플을 보자니 속이 쓰렸다.
공성이 아니면 만날 기회도 적은 연상의 연인이 떠오르자 한숨이 먼저 새어나왔다. 딱히 연상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귀기로 한 지 한 달, 일분일초도 떨어져있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에겐같이 있을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매번 먼저 찾아와주는 게 미안한데, 거기에 이번 주말엔 보기 힘들겠다고 말할 때의 그 기분이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루이스에겐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처럼 그 역시 질려버리는 건 아닐까.
루이스는 제게 뻗은 손의 온기와 그의 미소를 기억했다. 그녀 역시 그랬지만, 그 역시 제게는 너무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루이스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신난 강아지처럼 다가온 그의 얼굴에 실망이 번지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감추던 모습에 루이스도 마음이 아팠다.
사람에게 할 비유는 아니지만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키우는 애완견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덩치는 크지만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개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다며 빈 손을 보였을 때 풀이 죽어 귀와 꼬리를 늘어뜨리는 모습이 자꾸만 그와 겹쳐졌다. 차라리 짜증을 내거나 같이 있자며 투정을 부렸으면 이렇게까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따스하고 햇살같은 사람. 루이스는 토니의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와는 어울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햇살이 가득한 풍요의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그, 릭 톰슨은 밝고 친절했다. 유복하진 않을지언정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 그의 능력조차 하나의 선물로 여기고 그의 삶을 즐긴 사람. 전쟁과는 동떨어진 그 분위기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릭은 루이스가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가진 사람이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시기하거나, 동경하거나. 루이스는 그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경에 가깝겠지만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산더미라 그에 대한 감상은 차차 잊혀졌다.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릭이 귀를 붉히고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왔을 때도 그랬다. 그 때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트리비아의 일로 지쳐있어서 미안하다는 답밖에 돌려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릭은 기다려주었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에 전장에 끌여들여서도, 마음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뀐 건 그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엔가 밤의 여제가 손을 잡아 하늘 위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처럼 나타나 모든 걸 체념한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그는, 릭은 그런 사람이었다. 두렵지 않았냐고, 죽을 수도 있었다고 소리 치자 릭은 웃으며 답했다.
“두려웠소.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그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더 무서웠소. 오늘 이 시간에 그대를 구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후회했겠지. 루이스. 나는 후회하지 않소. 내 무모함이 그대를 살렸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오.”
맞잡은 손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이 어릴 적 런던의 뒷골목에서 상상한 맑은 햇살같았다. 일 년에 몇 번, 빛이 들까말까한 그늘진 빈민가와 추운 거리에서 어렴풋이 꿈꿔온 구원이 여기 있었다. 릭이 울지 말라며 손을 뻗기까지 루이스는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그 손길마저 따스해서, 루이스는 제 뺨을 덮은 그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 날 이후로 릭은 매일같이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왔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귄다고 특별히 하는 건 별로 없지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릭은 별다른 재주 없이 루이스를 웃게 했고, 한결같이 자상했다. 침대 위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자상한 면을 이용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쁘기라도 했으면 일에 치여 잠시나마 잊었을 텐데 텅 빈 거리와 서점은 루이스의 마음을 죄책감으로 무겁게 짓눌렀다. 책임을 다하려 한 것 뿐인데, 오히려 죄를 짓는 기분이다.
정리할 것도 없는 책장을 괜히 눈으로 훑는데 서점 위층에서 갑자기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훔쳐갈 거라곤 먼지 쌓인 책들밖에 없으니 도둑은 아니고, 그렇다면 자신을 노린 기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대체 어느 암살자가 이렇게 대놓고 침입을 알린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에 얼음 결정을 만들었다 털어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창고로 쓰는 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조심히 문을 열자 어둠 속에 익숙한 뒤통수가 들어왔다.
“릭?”
“아, 그, 루이스. 그, 이건.... 그러니까.... 으악!”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 묻자 릭이 말끝을 흐리며 돌아봤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불을 밝히려는데 릭의 비명에 양철통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이어졌다. 등을 밝히자 청소 도구들 사이에 널브러진 릭이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광경에 헛웃음을 흘린 루이스는 등불을 올려놓고 문을 가로막은 빗자루와 대걸레를 한 데 모아 치우고 릭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머리에 붙은 먼지를 털고 있으니 릭이 꼭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멋쩍게 웃었다.
“집에 먼저 들렀는데 없길래 놀래켜주려 했소만....”
“그러다 엇갈리면 어쩌려고요.”
“아, 그 생각은 못 했소. 이제 슬슬 퇴근할 시간이지 않소?”
“그렇긴 한데 누구씨가 일을 벌려주셔서요.”
짓궂게 말하자 당황한 릭이 그가 어지른 창고를 둘러봤다. 양동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걸 보고 울상을 짓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데 그 변화무쌍한 반응이 꽤 귀여웠다.
“하아. 미안하오. 그러려던 건 아닌데.... 끄응. 내가 어질렀으니 여긴 내게 맡기시오.”
“하하, 농담이에요. 어차피 내일 또 쓸텐데. 당신이야말로 일은 어쩌고.”
“루이스.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소.”
“...릭”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왠지 모르게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이 입 안이 간질거린다. 잠시 토라진 척 입을 비죽이던 릭이 해맑게 웃었다. 서른이 넘어서 저렇게 소년같이 웃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루이스는 릭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성큼 다가오던 릭의 발에 양동이가 채였다. 그 사소한 해프닝마저 웃음이 나, 루이스는 오늘 여러 번 그를 괴롭히는 양동이를 한 쪽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머리를 긁으며 창고를 나온 릭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맞췄다.
실로 그답게 상냥하고 간지러운 키스는 곧 어른의 키스로 바뀌어 눈을 감은 채 키스에 집중하던 루이스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 역시 피곤할 텐데 이렇게 달려와 준 게 고마워, 루이스는 릭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뗐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까....”
“같이...!”
“얼마 안 걸려요.”
가볍게 뽀뽀하고 내려온 루이스는 밖에 내놓은 가판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갔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내려온 릭이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기다리는 바람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서점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빼먹은 게 없나 둘러본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전등을 껐다. 등 뒤에서 껴안고 얼굴을 부비는 그가 사랑스러워 몸을 돌리자 릭이 입술을 내밀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릭.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소.”
“공간을 열어줄래요?”
“물론이지.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집으로 가요.”
발밑에 게이트가 열리고, 루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릭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나 그렇지만 참 유용한 능력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루이스는 릭과 함께 그의 집에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 안에는 저녁 노을이 넘실거리고, 루이스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제게는 잘 시간이지만 릭에겐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릭. 저녁은요?”
“그대는 먹었소?”
“...아니요.”
“루이스.”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답하자 릭이 짐짓 엄하게 타이르듯 얼굴을 찡그렸다. 불규칙한 식습관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럴 때면 꼭 꾸지람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일단 빵이나 시리얼이라도....”
“릭. 그것보단 그냥 같이 눕지 않을래요?”
부엌을 향하던 릭이 걸음을 멈추고 루이스를 돌아봤다. 침대에 앉아 나름 잘 먹히는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릭의 갈등이 한층 깊어지는 게 보였다.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릭의 다리 옆으로 큼지막한 리트리버가 꼬리를 흔들며 루이스를 덮쳤다.
“으왓. 안녕 새라. 읏, 간지러워. 핥지마.”
“새라!”
“하하, 이러다 릭씨가 누울 침대가 없겠는데요. 아 따뜻하다.”
격하게 반기는 리트리버를 쓰다듬으며 드러눕자 릭이 억울해 죽겠단 얼굴로 다가왔다. 그를 놀려먹는 게 재미있다고 하면 화를 낼까. 루이스는 웃음을 꾹 참고 개를 끌어안았다. 꼭 그 주인처럼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는 유독 루이스를 좋아했다.
“루이스으. 정말 이럴 거요?”
“뭘요?”
“.....”
말문이 막힌 릭의 얼굴이 붉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 루이스는 장난을 그만 두고 상체를 일으켜 낙담한 채 울상을 짓고 있는 연인에게 키스했다.
“섹스할래요?”
“.......”
대답 대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귀여웠다. 루이스는 웃으며 일어나 릭의 손을 잡아 끌었다. 놀아달라고 조르는 개를 떼어놓고 욕실에 들어가자 밖에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람이 고프긴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를 벗고, 화장실 문에 릭을 밀치며 입술을 맞추자 그의 손이 루이스의 허리를 짚고 티셔츠를 말아올렸다.
“루이스. 사랑하오.”
“윽......”
키스 뒤에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하는 고백에 루이스의 얼굴에 열기가 번졌다. 쑥쓰러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릭이 목에 입을 맞추며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그대도 그렇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소.”
얼굴을 가리고 숨고 싶을 정도로, 릭은 애정 표현에 솔직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자 고개를 숙여 아래서 올려다보며 눈을 빛내는데, 그의 그 애처로운 얼굴에 루이스는 오늘도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사랑해요.”
“응. 고맙소. 덕분에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오.”
“릭....”
루이스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연인과 눈을 맞췄다. 넘치는 사랑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당신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또 사랑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걸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릭이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몇 번을 되새겨 생각해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축복인지. 루이스는 입 안에서 얽히는 진한 키스에 그를 마주안았다. 이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에 숨이 차올랐다. 이 사람의 온기가, 맞닿은 피부의 감촉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좋았다.
오래된 기억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찐득한 젤리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엿 같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만. 꼭 어릴 때 호기심에 집어먹은 터키쉬 딜라이트에 크게 체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싸구려에, 찐득거리고, 혀가 마비될 것처럼 달고 목구멍에 달라붙어 뜨거운 물을 아무리 마셔도 그 거식한 느낌이 남아있는 느낌.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까지 어쩌면 그리 닮았는지.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곤 티푸드랍시고 접시 위에 다소곳하게 올라온 마카롱과 터키쉬 딜라이트, 한 조각의 쇼콜라에서 눈을 거뒀다. 굳이 차를 마셔보지 않아도 오늘의 다과가 루이스의 손을 타지 않은 게 분명히 보였다. 혹시나 해서 한 모금 마셔본 차는 온도가 낮고, 제대로 우리지 않아 떫은맛까지 났다. 이런 걸 다과랍시고 올린 인간의 면상에 네가 한 번 먹어보라고 한 바탕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겨우 이런 걸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아깝다.
벨져는 제 기분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래.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이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오늘은 늦은 시간에 왔음에도 나와 맞지를 않았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그렇지 다과가 이따위로 나오도록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게 괘씸했다.
그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득 될 게 하나도 없다. 벨져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위를 매운 서류철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없어도 돌아간다는 걸 입증하듯이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에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뒤로 받은 돈이며 정보, 사람이 전부 종이 위에 있었다. 참으로 작은 세상이다.
늘상 하던 것처럼 사인을 하기 위해 펜을 들던 벨져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종이 속에 담긴 세상을 찬찬히 훑었다. 그냥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시간을 때우려던 것뿐이었는데. 벨져는 본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다른 서류철을 열어 종이를 넘겼다.
이 작은 세상 위에는, 루이스의 이름이 없다.
벨져가 느낀 위화감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언제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리 서류에 사인하는 게 일의 전부라지만, 정말 그것뿐일 리 없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 두 달간 벨져의 책상 위로 올라온 서류는 이 거대한 성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담고 있다기엔 너무 적고 깨끗했다.
누군가 일부러 더러운 일을 전부 치워버리지 않고서야 이렇게 깔끔할 리가 없다. 이 자리에 앉기를 거부한 것도 다 추악하고 썩은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대로라면 아직 미성년자인 이글을 앉혀놔도 될 정도였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읽고 있던 서류철을 전부 펼쳐봤다.
가장 먼저 집어 들었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시간이 이렇게 가도록 눈치를 못 챈 자신이 한심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제게 이런 얕은 수를 썼다는 데서 더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나타나지 않는 루이스와 대답을 피하는 비서. 그것만으로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눈으로 그를 추궁하자 비서는 시선을 피하며 답하지 않았다. 그래, 다 한통속이라 이거지.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당황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지만 아무리 그런들 벨져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을 닫고 그 앞에 버티고 선 비서를 노려보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비켜.”
“저, 그게, 금방 오실 겁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것도 자네에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하, 하나같이 자기들이 뭘 위해 일하는지 모르는 자들뿐인 건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 비켜.”
비서는 곤란해 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 그가 열어준 문 밖으로 나간 벨져는 고위층을 접대하는 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더니 층버튼을 누르고 비껴섰다.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이 비서조차 다이무스가 남겨둔 사람이니 그와 함께 뒤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제 행적을 죄다 고해바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좀처럼 저를 그의 눈 밖에 내놓지 않는 형을 떠올리자 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제 혈육이라지만 그와는 좀처럼 잘 지내기가 힘들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어쨌거나 벨져에게 형제란, 특히 형의 존재란 귀찮고 성가신 것에 불과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가르치고 돌보려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리고는 결국 제 것이어야 할 것을 모조리 가져가고는, 남은 걸 선심 쓰듯 내주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혈육이라 한들 그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벨져는 패배의 기억을 떠올리곤 손등이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어디에 있나.”
“그게…….”
“자네가 누굴 위해 일하는지도 알려줘야 하는 건가?”
“…이쪽입니다.”
비서는 벨져를 더 깊고 후미진 복도로 이끌었다. 어두워진 조명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은 분위기에 화려한 오탁의 향이 더 짙어졌다. 벌써부터 그 지독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지만 벨져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보이는 공간보다 보이지 않는 밀실이 훨씬 화려하고 넓다. 홀에는 거의 헐벗다시피 한 여자들이 돌아다니고, 좋은 옷을 갖춰 입은 사내들이 짐승의 냄새를 풍기며 게걸스럽게 탐욕을 채우는 공간. 더러는 비굴해지고, 더러는 추악해지는 이 공간이 역겨웠다.
향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스무 살의 벨져에겐 낯설다 못해 더럽게 느껴졌다. 벨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려했지만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둡고,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속에 비서가 걸음을 멈췄다.
룸의 앞에 선 벨져는 문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렇게 하면 안이 투시되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애꿎은 문을 노려봤지만 방음처리가 워낙 잘 된 터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안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얼마든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지만 벨져는 움직이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이는 것밖에,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또, 같은 장면을 보고 싶지 않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뭐 하러 되풀이한단 말인가. 벨져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제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천박하게 그지없는 행위에 흥분에 젖은 숨을 눌러 삼키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벨져는 이 비이성적인 행위를 없던 것으로 하기로 하고 돌아섰다. 비서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이르고 싶으면 이르라지. 다이무스가 뭐라 하던 알 바인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상관하지 않으면 그 뿐이었다.
올 때만큼이나 단호하고 빠른 걸음으로, 벨져는 아편굴 같은 내실을 빠져나왔다. 확 밝아진 조명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벽과 바닥이 전부 끔찍했다. 이 안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어 벨져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숨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넥타이를 푸르고 싶었지만 여즉 붙어있는 비서 때문에 꾹 눌러 참았다. 다이무스에게 말이 흘러가는 건 상관없지만 루이스에게 전해지는 건 그렇지 않았다.
뭐가 그렇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벨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거세게 닫고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 당겼다. 겨우 이딴 거나 보자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눈빛을 외면하고, 여길 떠나야 했다. 벨져는 재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서류가 쌓여있는,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책상 따위 꼴도 보기 싫었다. 마음 같아선 다 뒤엎고 싶지만, 그랬다가 손해를 보는 건 자신뿐이라 그렇게 홀로 분을 삭이고 있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하게 두 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소리. 벨져는 이를 악물며 문을 노려봤다. 저를 이렇게 뒤흔든 그가 문 앞에 서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고저 없이 평소와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져는 팔걸이를 꽉 잡았다.
“……아까 저를 찾으셨다고.”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일어난 벨져는 문을 뒤로 하고 섰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벨져의 사무실 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한 침묵이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루이스였다. 몇 시간이고 불러놓고 세워둬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저를 밀어내고 거절하고 있었다. 벨져는 홱 몸을 돌렸다. 한 마디 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희게 질린 얼굴과 핏기가 가신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며, 애써 참고 있는 그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하려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잠깐.”
벨져는 끝을 고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자 루이스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피했지만 벨져의 손보다, 루이스의 목보다 벨져의 눈이 더 빨랐다. 마침 흘러내린 진득한 붉은 방울에 벨져의 손이 멈췄다.
베스트를 적신 짙은 자국과, 평소와 다른 앞머리의 방향.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흰 피부에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지독히도 붉은 선혈에 벨져는 방금 전 그랬던 것보다 더 세게 이를 물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흰 셔츠에 떨어졌다.
“...누구지?”
“도련님, 이건....”
“누구냐고 물었다.”
이를 악 문 채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벨져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벨져는 거절당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선 이 사내에게 이 분노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걸 너무나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그동안 외면해온 탓에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끝내는 이런 식으로 제 앞에서 망가지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벨져는 주먹을 쥔 손을 내렸다. 너는 내 건데. 왜 함부로 너를 망치지?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묻지 못하는 건, 그의 입으로 부정하는 걸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며 루이스에게 돌아섰다. 너무 세게 힘을 준 주먹이 부들거렸다.
이 감정은 갈 곳이 없다.
“...나가봐.”
간신히 내뱉은 한 마디에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옮겼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그 발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이다, 문이 닫히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벨져는 참아온 분노를 표출했다. 컵이 깨지고, 서류철에 곱게 끼워져있던 종이들이 공중을 날았다. 벨져는 엉망이 된 사무실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제 것에 손을 댄 무뢰한에게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벨져는 풀었던 넥타이를 고쳐 매고 벗어둔 재킷을 걸쳤다.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잔뜩 움츠러든 채 서있던 비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새끼, 아직 거기 있나?”
“예? 아, 잠, 대표님!! 대표님!!!”
벨져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버렸다. 남은 건 켜켜이 쌓인 분노를 받아 온당한 곳에 쏟아내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