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다. 사고를 쳐버렸다. 그것도 엄청 크게. 뻐근하고 나른한 몸을 일으킨 루이스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남자와 자버리다니. 루이스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한 순간 루이스의 뇌리를 스친 건 다름 아닌 제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야한 신음소리였다.
자기가 들어도 야한 비음과 함께, 앙앙거리며 눈앞의 남자에게 매달려 쾌감을 좇던 감각. 질척한 물소리와 함께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난잡하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저를 집어 삼킬 것처럼 열망하고 욕정하는 얼굴. 그 푸른 눈동자.
루이스는 떠오르는 기억을 지워내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어젯밤 저를 탐하던 남자의 자는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쩜 이리도 예쁜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남자, 그러니까 벨져 홀든은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성별을 초월한 절대적인 미. 아름다움과 예술에 관해선 무지한이나 다름없는 루이스지만 그래도 벨져가 얼마나 예쁜지 정도는 알았다. 그는 정말이지 천사 같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미모의 소유자였고, 인간을 굽어 살피는 천사마냥 그를 제외한 사람을 내려다보곤 했다. 굽어 살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그는 오만했다.
원하는 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권력과 재산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고귀함을 몸에 두르고, 타고나길 온갖 재능을 부여받은 채 태어난 고귀한 남자. 루이스는 가만히 벨져를 바라보다, 그의 속눈썹이 희고 길다는 걸 발견했다. 멋지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얼굴은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사고를 친 지금 무엇보다 빨리 그 뒷수습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루이스는 다시 제 상황을 깨닫고 벨져의 얼굴에 다가가고 있던 제 손을 몸 쪽으로 당겼다. 그의 뺨을 만지려던 게 들킨 것 같아 뺨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시 한 번,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른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뒤로 뺐다. 붙어 있던 다리를 떼자 벨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깨지는 않았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날 때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몸 상태와, 어젯밤 이 침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축축한 시트에 루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허벅지와 음부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데, 끈적한 덩어리가 질벽을 타고 쏟아지는 것 같은 그 감각에 몸이 굳었다. 보나마나 뻔하다. 루이스는 그걸 깨닫자마자 욱신거리며 당겨오는 아래에 조금 더 세게 입술을 물었다.
섹스가 처음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때보다 지금이 더 수치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런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벨져가 깨기 전에 이 난감한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말마따나 칼부림을 했으면 했지 낯간지러운 말을 속삭이며 사랑을 나눌 사이가 결코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스의 머릿속에 서서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쉴 곳을 찾아 들어온 살롱의 발코니에 기대어있던 벨져. 그때만 해도 두 사람 다 지루한 파티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에 불과했다. 시작은,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보던 벨져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고부터였다.
* * *
벨져는 불청객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높디높은 자존심과 긍지는 과거의 과오를 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고, 그가 껄끄러운 건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다른 방은 이미 밀담을 나누는 사람들 혹은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로 차버렸고, 다른 방을 찾은들 저를 찾아다니며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남자들이나 제게서 연합의 기밀을 빼내려는 스파이를 만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벨져가 낫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리며 다른 방이 없어서. 라는 시답잖은 이유를 들었다. 그에겐 그냥 둘러대는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쉴 곳을 찾는다는 점에선 사실이기도 했다. 당장 쫓아내거나 빈정거리며 제 신경을 긁을 거라 생각했던 벨져는 루이스를 경계하며 눈을 떼지 않을 뿐, 쫓아내지는 않았다.
비쌀 게 분명한 예쁜 의자에 앉은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다리를 두드렸다. 높은 굽과 뾰족한 앞코의 하이힐은 보기엔 예쁘지만 운동화에 익숙한 루이스에겐 일종의 고문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걸 신고 어떻게 다니는 거지. 다시 한 번 트리비아의 아찔한 킬 힐과 고양이처럼 우아하고 도도한 걸음걸이를 떠올린 루이스는 멍하니 다리를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지만 한 번 벗었다간 다시 신지 못할 게 분명했다.
벨져는 제 앞에서 무방비하게 넋을 놓고 있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이젠 자길 위협적이라고 생각도 안 한다는 듯한 그 태도가 괘씸했다. 영웅이라는 자리에 올라 떠받들어주니 자신이 누구인지,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도 잊고 저를 무시하는 거라면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말은 제가 아닌 그녀에게 돌아가야 했다. 물론 워낙에 맹한 사람이니 지금 그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익숙하지 않은 차림새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루이스는 벨져가 보기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리고 진주알과 크리스탈이 반짝이는 머리장식을 꽂고, 같은 세트가 분명한 귀걸이를 한 채 푸른 드레스를 입은 루이스는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순진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벨져는 천천히 루이스를 향해 다가갔다.
전장에서는 한 걸음만 다가가려 해도 고개를 돌려 육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안개 속을 경계하는 그녀다. 이 여자는 지금 그 자신이 너무 힘들어 정신을 잠시 놓았거나, 자신을 위험대상에 넣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희고 둥그런 맨 어깨와 머리카락이 조금 삐져나온 가는 목덜미를 보며 루이스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빛에, 벨져는 옅게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른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제가 있는 곳이 아니라 어디 질 나쁜 플레이보이라도 만났으면 비명 한 마디 못 질러보고 잡아먹히는 순진한 아가씨가 떠올랐지만 루이스는 그 남자를 패고 나왔으면 나왔지 결코 당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리 빤히 보냐는 눈빛에 벨져는 한 손에 쥘 수 있는 목과 곧게 뻗은 쇄골, 그리고 드레스 안쪽으로 얼핏 보이는 살갗의 흉터에 그녀를 훑던 시선을 거뒀다.
“연합이 사람을 잘못 보냈군.”
발끈할만한 말에도 루이스는 그녀의 코드명처럼 차갑고 덤덤하게 벨져를 바라봤다. 그 붉은 눈동자가 살기도,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제게 향해있는 게 꽤 신선해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인계를 쓰려거든 더 적합한 인물이 있었을 텐데.”
“흐응. 실패할 게 뻔한데 인력을 낭비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서.”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에 손을 올려 턱을 괬다. 괜한 신경전으로 체력과 정신을 소모할 여유가 없었다. 벨져 홀든은 오만한 사람이니 적당히 버릇없게 굴며 흥미가 없다는 걸 보여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물러갈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그이니 미인계가 통할 리 없다. 빈정대긴 했지만 루이스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기분을 돋웠는지, 벨져는 기분이 상해 돌아서기는커녕 루이스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버렸다. 편히 쉬고 싶었던 루이스에겐 낭패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픈 발과 다리를 위해 참을 만 했다.
“새로운 공간을 찾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과연 연합의 영웅이란 족쇄는 대단하군. 친히 이런 곳까지 왕림해주시고.”
“그건 벨져 경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식의 문을 파괴하려다 발렸다며?”
“때를 놓친 것뿐이다. 알다시피 워낙 여기저기서 일을 많이 터트리는 바람에.”
“천하의 벨져 홀든도 변명을 하는구나. 이거 놀라운 걸? 어디 신문사라도 찾아갈까봐.”
“살롱에서 나눈 대화는, 그 안에서 비밀에 부쳐지는 법이지.”
“그런 규칙을 따라야 할 정도로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서.”
살벌한 대화 끝에 먼저 말을 멈춘 건 벨져였다. 정말로 흥미가 없다는 듯 구는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 벨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다. 사실 이쯤 되면 그 날 그렇게 무릎을 꿇었다는 게 그리 부끄럽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그 날 이후로 제 빛을 드러내기 시작한 보석처럼 연마되어 더더욱 찬란히 빛나고 있었고,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스노우 퀸보다 영웅 루이스가 새로운 연합의 주축이라는 소리마저 돌까. 벨져는 다리를 꼬았다.
연한 하늘색 에나멜 구두와 흰 발, 그 위로 뻗은 루이스의 가는 발목이 꼭 잘 만든 도자기 같았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글쎄. 뭐인 것 같나.”
“보다시피 지금 너무 지쳐서 이대로 뻗을 수도 있거든? 제정신일 때 해.”
루이스는 양손을 들어 항복하듯 흔들었다. 아직 정신은 멀쩡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일 뿐이었다. 차라리 공성을 연달아 뛰고 말지, 이런 사교계 파티에서 내키지도 않는 웃음을 짓고 끝없이 이어지는 춤 신청을 거절하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피해 빠져나왔더니 이번엔 벨져 홀든. 정말이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게 딱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다. 벨져는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길고 곧은 손으로 피아노를 치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의 침묵을 기다리는 게, 꼭 나쁜 짓을 저지르기 전처럼 두근거렸다.
“…….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쥐고 있지.”
“예를 들면?”
“정보.”
날카로운 눈빛에 루이스는 잠시 풀어져있던 긴장을 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제 눈빛이, 지금 보고 있는 벨져의 눈빛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란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루이스는 연합이 필요로 하는 안타리우스와, 이글과 나이오비가 끝끝내 함구한 '그 날'을 떠올렸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그 마수는 능력자와 비능력자, 소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을 원하며 시커먼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면, 적어도 제 사람들만이라도 지켜내려면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했다.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
“뭘 원해.”
“거래할 의사는 있는 것 같군.”
“그건 말을 꺼낸 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미리 말하지만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개인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물론, 알고 있다.”
벨져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영웅이기 이전에 연합의 영웅이다. 연합의 한 기둥이니만큼 알고 있는 것도, 손에 쥘 수 있는 정보도 많지만 그녀가 마음대로 다루고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답이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벨져의 말에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다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워낙 선이 곱긴 하지만, 그 턱과 목덜미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이란 가히 사슴에 견줄 만 했다.
“그럼 거래는 성립이네.”
“그런 셈이지. 솔직했으면 좋겠군.”
솔직하고, 진실하게. 갑자기 목이 말라와 일어나자 벨져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와 붙었다. 아무리 솔직하고 진실 되다 한들 마음을, 머릿속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건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이었다.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벨져가 그런 수작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걸 해석하는 건 자신이었다.
제가 잘못하면,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죽음의 공포도, 배신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었다. 자신은 무력했고,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영웅의 행세를 잘 해내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어찌나 당당한지. 어쩜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루이스는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손이 떨렸지만 벨져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등 뒤로 다가온 벨져가, 손목을 잡아챘다. 제 심장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거리. 등 뒤에 선 남자에게 느껴지는 향수냄새.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금은, 위험하다.
“…….”
“벨져.”
간신히 입을 뗀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에 냉큼 돌아서려 했지만, 그보다 벨져가 루이스의 몸을 돌려 제 품으로 당기는 게 더 빨랐다. 말도 하지 못하게 머리를 가슴에 꽉 누르고, 허릴 안은 채 조용히. 라고 속삭이는 벨져의 목소리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벨져.”
“아쉽지만 때를 잘못 잡은 것 같군. 다이무스 경.”
벨져는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의 방문에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이상 그가 아닌 누가 보더라도 밀회를 즐기는 남녀로 보일 터였고,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를 방해하는 건 살롱의 규칙에 어긋났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화가 나있었고,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제가 혼자 있지 않은 이상 더 방해할 순 없다. 벨져는 이렇게 제 큰형을 골탕 먹이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기 직전이라면 더더욱.
“이제 그만 나가주겠어? 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는데. 설마 레이디의 이름에 흠을 내려는 건 아니겠지. 홀든 경?”
“…….”
좀처럼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다이무스지만 지금은 그 속이 훤히 다 보였다. 자신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데서 느끼는 불쾌함과, 내내 답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동생을 향한 답답함과 분노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벨져는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다이무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한 마디 하려는 표정으로 결국 등을 돌렸다. 그는 다이무스 홀든이었고, 여성의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억울해도 나갈 수밖에. 벨져는 다이무스가 나가자마자 루이스를 놓고 문을 잠갔다. 애초에 그를 피해서 들어온 거였는데, 이 정도면 속도 잔뜩 긁었겠다 오히려 이득을 본 셈이었다.
“지금 나한테 하나 빚진 거 맞지?”
기분 좋게 돌아서는데 들려오는 간드러진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이 기분을 만끽했을 텐데. 벨져는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와인을 마시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였으나 루이스는 이미 그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흐리멍덩한 눈을 반쯤 뜨고 있던 주제에, 지금은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생기가 넘치는 게 정말이지 밉상이 따로 없었다.
“……. 원하는 걸 말해.”
“좋아. 스무 고개 할 줄 알아?”
벨져는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은 여자를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맹하고 순진해서 무슨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루이스는 영리하고 교묘한데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유치한 놀이 말인가.”
“그래. 직접 모든 걸 주는 건 너무 쉽잖아? 장황한 얘기라면 더더욱 이야기를 섞기 쉬워지니까. 알다시피 질문에 대답은 예스와 노. 뭐, 대답하기 곤란해서 답을 피하고 싶다면 글쎄……. 침묵 한 번에 한잔씩?”
“나쁘지 않군.”
“굳이 예스 노가 아니더라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
예쁘게 웃는 게, 누가 보면 연인에게 짓는 미소라 해도 믿을 법 했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라곤 그녀의 코드명만큼 차디 찬 거래일뿐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덫이 아닐까 의심부터 했겠지만 제가 아는 루이스는 누굴 속여가면서, 그것도 자신을 속여가면서 이런 제안을 할 사람이 아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할 걸 상정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잔 두 개와 비치된 위스키 병을 양손에 들었다. 다리를 꼰 채 발을 까딱거리던 루이스의 발끝에 걸린 구두가 유리구두를 연상시켰다. 동화 속의 공주님과 달리 열두시 종이 울린다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지만, 그 여리고 가는 발과 발목만큼은 그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좀 편하게 있을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루이스는 아슬아슬하게 발에 걸려있던 구두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른 한 쪽도 벗어버리고, 발을 문지르는 그녀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벨져는 혀를 찼다.
“질문 몇 개면 바로 뻗겠군.”
“누가 나만 줄창 마신대?”
“그야 두고 볼 일이지.”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벨져를 응시했다. 새초롬하다고도, 무미건조하다고도 못할 무언가. 아무리 뛰어난 벨져라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어려웠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벨져의 중심 아주 가까이에 맴돌고 있었다. 비록 그게 의도한 게 아닐지라도, 그날 이후로 언제나 벨져 홀든의 아주 깊은 곳에는 ‘루이스’가 있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손을 털어 얼음을 만들어내는 걸 지켜보며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얼음으로 손을 닦고는 빈 잔에 얼음을 채운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시작하지.”
“좋아. 누가 먼저 마시게 되나 보자고.”
루이스의 도발에 벨져는 턱을 치켜들며 가벼운 코웃음으로 답했다. 질문은 스무 개 뿐이지만, 긴 밤이 될 터였다.
루사노에서 포트레너드로 온 후 은신처를 만드는 대신 함께 살았던 루이스의 플랫에 이글이 토마스 스티븐슨을 달고 찾아왔다.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는데,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다. 순순히 맞아줄 리 없는 녀석이 일부러 맞고는 꺼낸 말이 더 가관이었다.
“형이 루이스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형의 착각일 뿐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만 좀 해! 형만 슬픈 줄 알아? 연합은 아직도 초상집 분위기라고! 그런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두지 말았어야지!”
“이글씨!”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공허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공허. 이글의 말이 맞았다.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미소로 제 뺨을 쓸던 그를 그냥 보내선 안 되는 거였다. 그게 기억 속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연합이 소중하다 한들 자신을 두고 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모두가 제 오만이었다.
“그럼.”
“뭐?”
토마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이글이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박스에 넣다 말고 반문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데?”
“작은형….”
“그 빌어먹을 자식은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 그런데 뭐? 내가 그녀석을 가장 잘 안다고? 웃기지 마라, 이글. 그 녀석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 사랑했다면 이렇게 모질게 굴 리 없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잊을 수도 없는 최악의 기억을 남기고 떠났을리 없다. 그의 부고를 신문을 통해 듣고, 장례도 끝나 무덤 앞의 꽃마저 시들어갈 때에서야 찾아가도록 두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형은 아무것도 몰라.”
“그러는 넌 얼마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벨져는 이글의 멱살을 잡아챘다. 자기도 분해 죽겠다는 듯한 이글이, 입을 열려다 말고 시선을 피했다.
“이글 홀든!!!”
“그만해요!”
가만히 지켜보던 제 3자의 개입에 벨져는 시선을 돌렸다. 눈물 범벅의 애송이가 주먹을 꽉 쥔 채 벨져를 보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선배는, 루이스 선배는….”
“닥쳐라.”
“형!”
“네가 그 자식이 지키려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라.”
“애먼 애한테 화풀이 하지 마!”
잠자코 잡혀있던 이글이 벨져의 분노가 토마스에게 향하자마자 팔을 잡았다. 애초에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게 누구인가. 그토록 아끼던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리 연합의 영웅이라 한들, 한 사람이 그 모두를 감당할 수있을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루이스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웠다. 영웅의 그늘에 숨어, 그를 앞세워 살아남은 이들을 벨져가 용서할 수 있을리 없었다. 생전에 지키려하지 않았다면 살인귀가 되어서라도 복수했을 것이다.
벨져는 묻고 싶었다. 왜 자신만의 루이스가 될 수 없었는지.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제 옆에 있는 걸로 충분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럼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토록 지키려했던 이들은 제게서 추억 한 조각마저 앗아가려 하는가.
“선배를 아낀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지, 넌 모를 거다.”
“루이스 선배는…!”
“그러니 네 영웅에게 감사해. 지금 여기서 널 베지 않는 건,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이니까.”
서슬퍼런 눈빛에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진심이다. 모두가 슬퍼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벨져같진 않았다. 갈 곳 잃은 분노와 상실감에 허덕이는 남자는, 고고한 벨져 홀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제 기억 속 마지막 루이스를 떠올렸다. 머리를 쓰다듬고, 슬며시 웃던 루이스는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같았다. 평소의 듬직한 선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후련해보였다.
그래서 잡지 못했다. 잡는다고 잡힐 것 같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쓰게 웃으며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역시, 걱정이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선배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걱정했어요. 하지만 이 남자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동경하던 사람이다. 그와 같은 선에 서고 싶었다. 그의 등을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자리를 너무나 쉽게 꿰찬 남자에게 마지막까지 지고 싶지 않았다.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해. 둘 다.”
“나가.”
“…하아. 플랫은 형이 알아서 해.”
이글은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쓸어담고는 박스를 토마스에게 넘긴 뒤 돌아섰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엔 그의 물건이라고 할 것도 얼마 없었다. 벨져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작은형.”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나가.”
“…너무 얽매여있지는 마.”
얽매여있지 말라는 말에 벨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벨져 홀든에게 루이스를 떼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과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이 마음같이 나오지 않는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물을 수 없는 질문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토마스는 제 어깨를 잡는 루이스의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졌어.”
“네?”
“발을 딛고 있던 땅도 사라지고 어둠 속에 갇혀. 살아도 고통뿐이고,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지. 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아침 해가 뜨지 않기를 바랐어.”
“선배….”
담담하게 이어가는 것은 그의 절망이었다. 토마스가 본 선배는, 루이스는, 영웅이란 남자는 강한 사람이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는 영웅. 비록 그 방향이 제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를지라도 존경받아 마땅한 사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결코 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털어놓는 절망의 무게란 과연 어떤 것인지. 토마스는 루이스의 절망을, 그 어둠의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나는…. 더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포기해버렸지.”
“…….”
“그런데도 죽을 수가 없었어. 책임과 의무와 날 믿고 기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선배의 탓이 아니에요…!”
어쭙잖은 위로라는 걸 알지만,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그것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제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더 나은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토마스의 말에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걸론, 이 사람을 붙잡을 수 없다. 토마스는 문득 트리비아를 떠올렸다. 그 둘은, 그 연인은 트리비아가 떠나려 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루이스가 슬퍼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게 아닐까. 처음부터 그 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도 허공을 딛고 있던 게 루이스이며 그를 기다려주던 게 트리비아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텅 빈 허공에 사는 그를 받아줄 수 있을까. 루이스의 사랑이 트리비아의 사랑보다 깊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애정을 쏟아도 상대가 그걸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눈앞의 남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토마스 안에 켜켜이 쌓아올린 루이스라는 사람의 근간이 흔들리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알아.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지.”
“선배…!”
“그런데, 그 녀석이 날 잡아줬어.”
아득해진 머릿속에 루이스의 미소가 들어와 박혔다. 부서질 것 같은 미소가 아니라 홀가분하고 따스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상하지. 그런데 말이야,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떨어지는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데…. 걔가 그러더라고.”
루이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목을 가다듬고, 입꼬리를 올리는 그에게 전에 없던 여유가 보였다.
“그러면 왜 안 되느냐고.”
숫제 꿈을 꾸는 것처럼 읊조리는 루이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날이 서 다가오는 이들을 상처 입히는 고드름이 아닌, 끝없이 펼쳐진 얼음평원과도 같은 고요. 고향의 얼음호수가 그러했듯, 그 고요 앞에 인간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이 사람과 마주하려면,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루이스는 눈을 휘며 빙그레 웃었다.
“벨져는…. 알아줬어. 그리곤 그래도 된다고 하더라고. 가치 없는 삶이 뭐가 소중하냐면서 화를 내는 거 있지?”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마침내 루이스는 발을 디딜 땅을 찾았다. 그를 잡는데 필요했던 게 고작 말 몇 마디밖에 안 됐다는 허무보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재빨리 고개를 숙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자 루이스가 어깨 위에 올린 손으로 토마스를 토닥였다.
“살아도 된다고 해줬어. 자기가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저희가 못 미더운 건가요?”
“응?”
“왜, 왜 그게 벨젼데요? 우리는, 우리도, 당신을 걱정하고, 당신을…!”
“달라.”
내내 담담하게 남 얘기 하듯 말하던 루이스가 토마스의 격정을 딱 잘라 끊었다. 침착한 연합의 영웅의 얼굴을 한 루이스가 낯설다. 아니, 방금 전까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고요를 머금었던 남자가 동경해온 선배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야. 나는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했어. 너희들을 앞세워 살아남는 걸,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토마스. 그건 날 더 괴롭게 하는 거야.”
“선배!”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그 녀석은 달라.”
루이스의 입을 막고 싶었다.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녕, 나는 당신의 첫 번째가 될 수 없나.
“벨져는…. 글쎄, 나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렇게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르지. 영웅 전기의 시작은 언제나 벨져 홀든이잖아?”
더 말하지 말아요. 제발. 더 들었다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런 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입술 한 번 달싹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끔찍이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니까, 다시 돌려놓는 것도 그 녀석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배라고 불러선 안 되는 거였다. 그를 계승하고 싶었다. 그의 절망이 아닌, 찬란히도 빛나는 명예를 이어받고 싶었다. 이런 걸 잇게 되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손이, 아련히도 빛나는 미소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을 리 없다. 이어받는 것조차 자신이 없다. 영웅이 전설이 된다는 말을 그리 쉽게 담아선 안 됐다. 차고 두꺼운 얼음벽으로 나약한 자신을 감추던 인간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버렸다. 영웅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이길 수 있을까.
그 두 사람 앞에서 자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저, 보호받아야 하는 조연.
“미안.”
“…제가 강해져도, 소용없겠죠.”
“넌 잘 해낼 거야. 내가 없으면, 그 다음은 네 시대니까.”
아니오. 저는 당신의 시대에 당신과 함께이고 싶어요.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말을 가슴에 묻고, 토마스는 애써 웃었다.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팔을 벌려 토마스의 등을 감싸 안고 토닥였다. 몸이 닿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망 없는 첫사랑이 시리도록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