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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공식에서 갑자기 보이스 업데이트를 해주는 바람에 행복에 겨워 써보았습니다... ^ㅅㅠ
아마도 3부작
블록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씩 목소리가 겹치기 마련이다. 서점과 은행 사이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법한 골목 하나가 전부였고, 한가한 시간엔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목소리를 내봤자 듣는 사람은 그와 자신 단 둘뿐일 때도 빈번했다.
그러니 말투가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이스는 요즘 선배 목소리에 단호함이 느껴져서 덜컥덜컥한다는 토마스의 말을 떠올리고 왼쪽을 흘긋거렸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원인이었다. 서점보다야 은행 업무가 많으니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더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닮아가나? 루이스는 늘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와 말투다. 책과 종이를 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많지만 그래도 기본은 장사.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미소는 기본이다. 물론 재화와 물건을 대여해주는 그에겐 필요 없는 덕목이겠지만.
루이스는 사이퍼의 역사가 기록된 책을 덮고 벽에 기대어 섰다. 영웅이 되기 이전엔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게 소원이었고,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에 아무리 박봉일지언정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지금은 형편이 조금 폈다고 해도 뭐 하나 모자란 것 없이 살아온 그와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능력자에게 물건을 빌려주던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이지만 눈이 마주쳤다. 너무 빤히 본 걸까. 민망함에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넓은 광장과, 카페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 늘 보는 풍경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무게가 느껴지는 구두소리가 다가왔다.
“무슨 용무라도 있나.”
“아, 아뇨. 아닙니다.”
설마 하니 잠깐 쳐다본 걸 가지고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다이무스의 무표정은 여전했다. 워낙에도 표정에 변화가 많지도 않고, 사사로운 일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자신에 대한 모욕,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를 그냥 지나칠 사람은 아니었다. 무례한 짓을 한 건 자신이고, 그 시선에 불쾌했다면 응당 사과를 하는 게 맞다.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다.”
그럼 왜. 라는 생각이 튀어 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 얼굴은 읽기 어렵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예측할 수가 없다. 검은 그 사람을 닮는다 했던가. 검의 궤도를 읽기 힘든 것도 그 주인을 꼭 닮았다. 침묵이 이어졌으나 다이무스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답을 못 들었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마른 침을 넘기고 솔직히 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 고작 이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걸 싱겁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데 다이무스가 말해도 좋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라, 모르겠다. 루이스는 손가락 끝으로 두꺼운 책의 표지를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제 말투가 경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막상 말해놓고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얘기를 들은 거지 정말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의식한 게 민망해 뒷목에 손을 가져가는데 다이무스가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았다 뜨는 눈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실은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군요.”
“하루에 몇 시간씩 나란히 서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그렇지요.”
“그래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말에 수긍하던 루이스는 슬그머니 목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다이무스 홀든은 좋게 말해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필요한 것만 입에 담는 과묵하고 진중한 남자가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가는 게 낯설고, 그가 하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그런 인지부조화 끝에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당장이라도 입가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얼굴이 붉군.”
뺨에 다가오는 손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빼며 뒷걸음질 치다,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뒤통수를 감싼 루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쪽팔려 죽고만 싶었다. 그냥 뛰어내릴까. 얼굴을 향해 오던 다이무스의 손이 고개를 푹 수그린 루이스의 어깨 위에 내려왔다.
“괜찮나. 꽤 세게 부딪친 것 같다만.”
“네, 괜찮, 괜찮습니다.”
그냥은 가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온 다이무스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 속에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기류가 흘렀다. 다가올 것 같은 얼굴이 다가오지 않고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회색 눈동자가 어떤 열망에 흔들린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이무스가 눈을 감으며 물러났다. 어깨를 잡았던 손이 안타깝게 떨어졌다. 미련이 잔뜩 남은 것처럼, 손바닥이 떨어지고 손가락 끝이 쇄골을 스쳤다. 어안이 벙벙했다.
“조심하도록.”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뭐였을까.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있는 은행을 등지고 서 손끝으로 입술을 덧그렸다. 닿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그랬으면 왜 밀어내지 않았을까. 그는, 다이무스는, 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것인가.
뺨에 손을 댔다. 얼음을 계속 쥐고 있었던 것처럼 손이 차가운 반면 얼굴이며 목, 귀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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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Notes
아픈 도련님 벨져(19)와 그 병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루이스(20)
언어의 장벽... 그것은 사퍼에게 묻는 것으로....☆
그리구 왠지 이것도 연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든....ㄷㅏ....
Day 1.
늦은 여름, 오스트리아 홀든 가의 저택엔 어김없이 햇살이 쏟아져 들었다. 짜증날 정도로 좋은 날씨에 아직 소년의 인상이 다 가시지 않은 청년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 볼 일 없는 교육수준에, 돌봐줄 사람도 없는 천애고아. 청년에게서 그나마 봐줄만한 곳이라곤 성실한 태도와 준수한 얼굴 뿐이었다.
든 것도 없는 짐가방을 가지고, 루이스는 성 같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죽하면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낼 정도일까.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저택의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건물의 외관도 그랬지만 안은 더했다. 이런 집도 이주면 익숙해지겠지만.
루이스는 앞으로 자신이 묵을 방을 둘러보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때 벗었던 모자를 내려두고 커튼을 쳤다. 식사 시간이며 생필품을 어디서 받으면 되는지, 자잘한 것들을 늘어놓는 집사를 향해, 루이스는 모두가 꺼리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은 어디에 계시죠?”
집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루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닳을대로 닳아서 감흥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청년은 차분한 무표정으로 집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비열하지도, 굽신거리지도 않는 영민한 하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집사는 흔들림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문제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명문 홀든 가의 가장 큰 고민이자, 조금 교육을 받은 것뿐인 고아 따위를 고용한 이유.
문을 두드리자 무언가 문에 맞아 깨지는 소리가 났다. 슬쩍 청년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무표정으로 서있었다. 집사는 아무 말 없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고, 청년에게 들어가보라 눈짓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문을 닫고 물러섰다.
눈 하나 깜짝 않는 게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버텨줄런지. 집사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방을 치우라고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밤중에 도망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문이 닫히고, 루이스는 슬쩍 방 안을 살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지만 성인도 아닌 아이에게 이렇게 큰 방, 거기에 욕실까지 딸려있는 큰 방이라니 과연 손 꼽히는 재력가 다웠다.
“하, 이젠 들여다 보지도 않는군.”
루이스는 허리를 숙여 하얀 도자기 파편이 깨져 나뒹구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큼직한 파편들을 모아 한 데 몰아놓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기 바쁘던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도자기보다 더 하얀, 소년인지 소녀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가 흉흉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노려봤다.
명백한 적의와 경계에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환자에 불과하다. 다만 그 환자가 상상도 못할 부자에, 권력까지 거머쥔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고, 사람을 아주 짐승같이 부릴 뿐이다.
“이렇게 물건을 던지면 다칩니다.”
“뭐야, 넌.”
“도련님의 열일곱번째 하인입니다. 아시겠지만 절 고용한 건 마님이고, 내쫓을 수 있는 것도 도련님이 아니라 마님이죠.”
“하,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루이스는 손을 털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엔 핏기가 없고, 있는 거라곤 귀족 특유의 오만과 거만, 그리고 분노 뿐이다. 그 분노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다. 그 대상이 된다는 게 더럽지만 이미 과분할 정도로 넘치는 돈을 받았다.
그 돈은 파산 직전이었던 수도원으로 갔고, 루이스는 앞으로 삼개월간 꼼짝없이 이 히스테리한 도련님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이주. 사람이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이주가 걸린다. 그게 결코 좋지 않더라도,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해준다.
“내기하시겠습니까?”
침대 위에 앉아있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결코 호의를 품지 않는 푸른 눈동자에, 루이스는 담담히 말을 이으며 다가갔다.
“제가 먼저 도망갈지, 아니면 도련님이 절 쫓아내는 게 먼저인지.”
“내가 얻는 게 뭐지?”
“글쎄요, 승리? 도취감? 뭐. 십 분도 채 안 가겠지만.”
“원래 말을 그딴 식으로 하나?”
“뭐, 도련님께서 공손하게 말씀하시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하인 치고 주제 넘은 발언이지만 이 방에는 그와 루이스 단 둘 뿐이었다. 앞으로 더한 것도 볼테니 거리낄 것도 없다. 간병인이며 하녀, 내로라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붙여도 채 일주일을 못 넘기고 도망치고 만다는 도련님이다.
밖에 떠도는 소문은 그렇다 쳐도, 집안 사람들까지 그의 호전되지 않는 병세와 신경질에 진력이 났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게 더 환자를 무력하게 만들고, 무력감은 곧 독이 된다. 열다섯까지만 해도 뛰어난 재능으로 촉망받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응당 화가 날 테고, 그의 형제들을 보면 자신의 것이었던 것이 떠올라 상실감과 분노가 끓어오르겠지.
“흥. 시궁창을 구르던 쥐새끼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길길이 날뛸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싸늘한 눈빛을 한 번 주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조롱 다음은 무시인가. 루이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벨져에게 다가갔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을 잡자 벨져가 손을 쳐냈다. 발끈해서 노려보는 그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고, 손등과 손바닥을 살핀 뒤 놓았다. 검을 잡았다던 손은 생각한 것보다 딱딱하고 차가워서 시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상처는 없군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도자기나 유리는 던지는 중에도 깨질 수 있으니까.”
“너....”
“손목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당혹, 혹은 짜증,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무언가로 얼룩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강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도자기 파편을 치우던 하녀가 움찔 놀라 루이스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친 루이스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어서 나가보라 눈짓했다. 침대에서 사는 것 치고 손이 맵다.
화끈거리는 뺨 대신, 루이스는 방금 제 뺨을 친 손을 잡았다. 발갛게 부은 손바닥을 확인하려는데 그의 손이 다시 날아들었다. 맞아주는 대신 손목을 잡아챈 루이스는 그를 내려다 보며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두 사람의 힘으로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련님. 이거 내리시죠.”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지 알아?”
“때리면, 그럼 기분이 좀 풀립니까? 아닐걸요.”
손을 놓자 다시 한 번 고개가 돌아갔다. 기왕이면 다른 쪽으로 때리던가. 그래도 양 쪽 볼이 퉁퉁 부은 채 흉한 몰골로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인 일이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도련님과 지내는 일은 더 고될 듯 했다.
“얼마든지 해보시죠.”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전 뭔가를 믿는다는 것에 회의적인 편인데요.”
“세 치 혀로 농간을 부릴 셈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걸.”
“앞으로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 전 말이 많은 편이 아닙니다.”
루이스는 목에 맨 타이를 풀고 하녀가 남기고 간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깨진 파편을 정리하고 있으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일어나는 대신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내기를 하자고 했지. 좋아. 받아들이겠어. 대신 조건이 있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 마주한 얼굴이 진지했다. 오가는 시선과 이어지는 침묵 속에 그가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지면, 평생 내 밑에서 일하도록.”
“안정적인 직업 제안 같은데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지.”
“그야 두고 볼 일이죠.”
“흥. 커튼부터 쳐. 빌어먹을 햇빛.”
그, 벨져 홀든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베개에 몸을 기댔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동작에 루이스는 내심 감탄하며 커튼을 쳤다. 얇은 여름 커튼 뿐인 제 방과 달리 얇은 커튼 옆에 두꺼운 커튼이 한 겹 더 붙어있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햇빛이 비치지 않게 커튼을 치고, 방 안에 있던 물병을 집어들었다. 옆에 놓여있는 수건에 물을 적셔 그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지 않았을 뿐 편안하게 누워있는 벨져의 손을 잡아 살짝 부은 손에 적신 수건을 갖다 댔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파편을 만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손을 적시고 호호 불어가며 식히는 동안 벨져는 손을 뿌리치지도 빼내지도 않았다. 사람을 부리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잘한 일 따윈 제 손으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가늘고 흰 손을 식히고 나서야 제가 그 사이 무릎을 꿇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친다.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손을 놓았다. 내내 내려다 본 건 자신일 텐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올려다 본 것만 같다. 루이스는 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서 물수건에 남은 물을 짜고 거울 너머로 흘긋 그를 바라봤다. 그 역시 자신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어 다시 눈이 마주쳤다.
숨 쉬기도 힘든 무거운 공기 속에 루이스는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필요해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타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루이스는 수건을 내려놓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가만히 앉아 눈을 살짝 내리 깔고, 손을 다리 위에 얹었다. 부르면 언제든 답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는 것도 하인의 일 중 하나다. 앞으로는 시간을 죽일 책이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구부정하게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이제 겨우 만난 것뿐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Day 2.
일 없이 가만히 있는 동안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건 좋은데 성질이 사나운 것 같다. 정말 예쁘다. 씻기는 동안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게 고역이었다
Day 3.
우리 도련님은 모시기 정말 힘든 분이다. 왜 다들 못 버티고 나갔는지 알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벨져가 예쁘다는 것이다. 돈때문에 하는 일이긴 하지만 사나흘이면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은데 그 얼굴을 보면 그래도 조금 참을만 하다.
Day 4.
어제는 책을 읽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더니 오늘은 또 괴테를 읽어달라신다. 내일부터는 손에 집히는 반경에 약통 외에는 두지 말아야겠다. 어제는 책에 맞았는데 오늘은 찻잔이 날아왔다. 맞진 않았지만 뭔가를 던지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신호다. 스케치용 연필이야 맞아도 주우면 그만이지만.
Day 5.
신경질과 짜증을 받아주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정신도 쉽게 지치기 마련이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
Day 7
일주일째다. 어제는 일기를 쓸 짬이 없었다.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들었다. 지금은 수면제와 진정제를 먹고 자고 있지만, 솔직히 이 일을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Day 10
하필 오른 손을 다치는 바람에 펜을 잡기 힘들다
Day 11
마님과 얘기를 나눴다 벨져의 상태가 부쩍 좋아보인다고 한다. 어디가 좋은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벨져는 마님을 닮았다. 주인어른은 뵌 적이 없다.
Day 12
노크를 깜빡했는데 그냥 한 번 슥 쳐다보는 걸로 끝났다 지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아름답다
Day 13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에 하인들이 수채 물감이며 유화 물감이며 캔버스를 날라다 내 방에 가져다 놓았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지만 착잡하다 벨져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한다 꽃을 보고 싶대서 꺾어온 장미를 병째 내던졌다. 손질이 다 되지 않은 장미 가시에 찔려서 그랬다고 하는데 변명인지 설명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어달라기에 빗질을 했는데 바로 짜증을 내며 꺼지라고 했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머리 빗는 것도 배워야겠다
Day 14
씻으면서 봤더니 몸에 멍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얻어맞는 것보단 덜하다. 오늘은 점심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안 먹으려는 걸 겨우겨우 달래서 한 스푼씩 떠먹였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벨져는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순수한 웃음이 아니라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보단 낫다 약을 안 먹는다고 뻗대기에 꿀을 잔뜩 넣은 차에 타서 먹였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Day 15.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이 주가 지났다. 까칠하고 까다로운데다 신경질적인 도련님과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깨지고 부서진 집기가 몇, 그 바람에 생긴 상처가 또 얼마쯤. 홀든 가의 하인들은 그래도 다른 도련님들이 안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루이스를 위로했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딱 이주가 걸린다. 그 시간은 지났고, 루이스는 벨져의 화법과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그의 변덕에 익숙해졌다. 그 역시 루이스에게 익숙해졌는지 노크 없이 방을 드나들어도 눈총을 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면 벨져는 일어나 피아노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책을 읽는 건 지루해 하기에 그럼 체스라도 두겠냐고 한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통산 전적 24승 23패. 짜증과 신경질로 무장하고 별 것도 아닌 걸 트집 잡아 시비를 걸던 벨져가 조용해지는 건 그 때와 잘 때 뿐이었다.
잠들면 그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가장 반짝일 시간에 이렇게 침대에 박혀 지내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의 수발을 드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지만. 이래서 돈이 좋다. 귀찮고 성가신 일을 미루고도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니까. 돈이란, 재물과 권력이란 일단 가지고 보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자신을 도닥였다. 벨져는 오늘도 어김없이 까다롭게 이 옷 저 옷을 벗었다 입길 반복했고, 벨져가 그나마 낫다고 하며 거울에 그의 몸을 비춰 볼 땐 녹초가 되어 찬 물을 들이켰다.
오늘은 산책을 가겠다며 나가기도 전에 체력을 뺀 장본인은 아주 큰 마음을 먹어주신 걸 감사히 여기라는 듯 뻐겨댔다. 그것 참 아주 감사한 일이네요. 라고 빈정거리지 않는 건 기특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쨌거나 마님은 벨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며 기뻐하고 있었고, 집사는 새로 하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홀든 저택의 사람들은 루이스가 떠나기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벨져조차도.
첫날 이후로 루이스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필요할 때 손발이 되어주고, 자잘한 일을 처리하고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루이스는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그만두고, 왜 밤중에 도망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아냥과, 아픈 구석을 쿡쿡 찌르는 날카로운 말투, 거기에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모욕을 주는 것까지.
벨져는 특권층이었고, 그가 가진 것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와 하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와 벨져의 태도가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그의 말이 무조건 맞는 척을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거리의 고아로 자라 온갖 것들을 보고 자란 자신도 가끔 울컥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는 주방에서 챙겨준 피크닉 용 도시락과 벨져의 약, 돗자리를 챙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양산까지 챙기고 나서야 벨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제 손으로 입히며 보긴 했지만 일곱 번이나 갈아입은 흰 셔츠 위에 감색 조끼, 베이지색 면 바지가 퍽 잘 어울렸다.
다른 하인 없이 단 둘이,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세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고, 벨져는 뒷짐을 진 채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벨져의 걸음이 멈추고, 루이스도 따라서 멈춰 섰다. 탐스럽게 핀 꽃을, 와인 잔을 들듯이 잡은 벨져는 부쩍 지쳐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쉬어 가자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푹, 숨을 내쉬며 꽃을 놓았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나?”
“아니오. 꽃은 잘 모릅니다.”
“...그래. 그렇군.”
“조금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들은 적이 없군.”
“아.”
루이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주 하고도 하루가 되도록 이름도 몰랐다 말인가.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루이스는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너라고 부르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루이스가 입을 다문 동안에도 벨져는 재촉하는 일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순순히 늦은 답을 내놓았다.
“루이스. 루이스입니다.”
“...격이 떨어지는 이름이군.”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도 아니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벨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가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해하며 홱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걷는데, 여전히 그 변덕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Day 16
어제 산책을 하고 온 뒤로 벨져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는다 헐레벌떡 가보면 그냥. 이라고 한다 내 이름에 노이로제가 걸릴지도 모르겠다 빗질하는 건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
Day 17
벨져가 자고 있다 하루밖에 안 됐는데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자다가도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깜짝깜짝 놀란다.... 여전히 잘 때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다
Day 18
차에 약을 타는 걸 들켰다 앞으론 어떻게 먹여야할까 길길이 날뛰는 벨져를 진정시키느라 펜을 들 힘이 없다
Day 19
큰일났다 아무래도 잠깐 존 것 같다 아닌 척 펜을 들었는데 벨져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무슨 말이 쏟아질지 안 봐도 뻔하다 꽃이라도 꺾어와야 할까
다행이다. 오늘의 빗질은 통과인 것 같다 머리카락이 가늘고 결이 좋아서 꼭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 그리고 씻길 때마다 생각한 거지만 정말 피부가 희고 깨끗하다 전에 생긴 상처인지, 오래된 흉터 몇개가 있는 게 아까울 뿐이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Day 20
오늘은 비가 와서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려도 벨져는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기에 다가가서 손을 잡았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머리를 기대왔다 창문을 닫는 대신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금은 자고 있다 일어나면 따뜻한 거라도 먹여야겠다
Day 21
벨져가 감기에 걸렸다 의사가 다녀 갔다
Day 22
열이 도통 내려가지 않아서 밤새 돌봤다 열에 시달리는 내내 내 손과 소매를 잡는 바람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열이 내려서 잘 자고 있다
Day 23
의사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자 벨져는 그딴 건 쓸모가 없다며 짜증을 냈다
Day 24
벨져가 마님과 산책을 나갔다 아무래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돌아와서 다시 열이 오를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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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제 영원한 레이디 아씨님께 드립니다...☆
“네. 접니다.”
“잘 들어갔나.”
“네. 아무렴요.”
“그래. 잘 자라. 사랑한다.”
“네. 저도요.”
액정에 뜨는 익숙한 이름에, 정해진 수순으로 흐르는 대화.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권태기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기다림에 조금씩 지치고, 끝내는 화를 낼 것도 없이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얼굴을 본 지 일 억 년쯤 된 것 같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가끔 하는 통화가 전부라는 게 씁쓸할 뿐이다.
이러다 헤어지는 걸까. 루이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침대에 앉았다. 솔직히, 지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우리 형이랑 사귀면 금세 나가떨어질 거라던 이글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한숨과 함께 침대에 누운 루이스는 찬찬히 머릿속에 집어넣은 시나리오를 되새겼다. 벨져는 배우로도 유능했지만, 감독이 더 적성에 맞는지 아직 젊은데도 휙 진로를 틀어서 지금은 메가폰을 잡고 있었다. 쉽사리 오케이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같은 씬을 다섯 번쯤 찍는 건 예사였다.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형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작업보다 지치는 건 사실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첫 번째 영화에 이어 두 번째 영화에도 주인공을 맡았다. 다이무스는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 번 질투나 실컷 해보란 심산으로 회사로 들어온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는 질투는 커녕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원거리 연애도,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루이스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별 네 개짜리 호텔답게 떡하니 들어있는 와인을 꺼내 잔을 두 개 가지고 성큼 방을 나섰다.
문을 두드리자 벨져가 문을 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루이스는 당당하게 벨져의 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뭐냐.”
“술 한 잔 하자고.”
“꺼져.”
“이러고?”
“그걸 아는 새끼가 이래?”
벨져는 인상을 쓰며 맞은편에 앉았다.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 한 장 달랑 걸친 채 슬리퍼를 신고 야밤에 감독의 방으로 들이닥친 주연 배우. 어디 잡히기라도 하면 그 날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다.
잔에 싸구려 와인을 따르는 루이스를 쏘아보던 벨져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기분이 안 좋으면 혼자 퍼마시고 잘 것이지, 왜 저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술만 마실 거라면 그렇게 싸고도는 후배 배우도 있다. 벨져는 혀를 찼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있어야 마셔?”
“내일도 촬영이 있다는 건 아나?”
“그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루이스는 눈만 올려 뜨며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풍류 없는 놈. 하, 실소를 흘리자 루이스가 잔을 내려놓았다.
“찍을게.”
무엇을. 벨져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루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싫으면 말고.”
“안 한다고 하지나 마라.”
어깨를 으쓱인 루이스가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우수에 젖은 듯, 서늘한 무표정이 당장 카메라에 담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야릇한 분위기 대신 긴장감을 더하는 게, 딱 벨져가 원하던 비주얼 그 자체였다. 벨져는 머릿속으로 촬영 계획과 일정을 수정하며 루이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별 일이군. 절대 안 벗는다고 그렇게 학을 떼더니.”
“그럴 일이 생겼거든.”
“형아?”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에 벨져는 확신했다.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녀석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쥐고 흔드는 건 다름 아닌 제 형이었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젓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턱을 괬다.
“그러게 그냥 스폰만 받고 끝내지 그랬나.”
“다이무스 홀든한테 그게 돼?”
“못할 것도 없지.”
벨져는 신이 나 웃음을 머금고 와인 잔을 들었다. 가져온 게 겨우 호텔에 비치된 싸구려 와인이라니, 하여간 멋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뱉었을 와인을 마시며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덕분에 이를 악물고 포기한 누드씬도 생겼겠다, 배우의 감정도 딱 역할에 이입되는 게 감독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별로지만, 배우 루이스는 벨져의 심미안을 채우다 못해 탐미에 대한 욕구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은 잘 풀리지 않는 연애사업에 심란한 나머지 어떻게 이용해보려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징그러운 커플의 고난과 주연 배우의 누드씬이 반갑기만 했다.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주고 누드씬. 이 정도면 완전 땡큐다. 짜증나는 연애 상담도, 이 조건이면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내가 질렸나?”
“그럴 리가.”
“...어차피 청소년 관람 불가인 거, 야하게 찍자. 할 수 있지?”
“호오. 감당할 자신은 있고?”
“운동할게.”
맡은 역에 충실 하느라 원래 체중에서 5킬로그램이나 빼놓고, 자진해서 이렇게 나와 주니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다. 벨져는 여유롭게 등을 의자에 기대며 가운을 벗어보라 손짓했다. 날카롭게 눈을 뜨면서도 잔을 놓고 일어난 루이스가 허리끈을 풀고, 샤워 타월 재질의 가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 작품을 천천히 훑으며 벨져는 길게 콧소리를 냈다. 돌아보라 손짓하자 말없이 순순히 따른다.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 곧게 뻗은 등과 도드라지지 않는 세밀한 근육이 나름 볼 만 했다.
“유지하는 걸로 하지. 앞은 됐고, 뒤만 쓰지.”
“그것 참 희망적이네.”
바닥에 떨어트린 샤워가운을 집어든 루이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허리끈을 동여맸다.
“형아가 보면 난리가 날 테지.”
“그 전에 귀에 들어가도 좋고. 아니, 역시 그게 좋을지도.”
“흥. 내가 제 발로 기어들어온 기회를 놓칠 것 같나?”
“그래. 그래서 너한테 온 거야.”
“하,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이란.”
“싫으면 마.”
벨져는 샐쭉해진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한 시라도 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담아주는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튕기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벨져는 손에 쥔 걸 놓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멍청이는 눈앞에 있고, 그 덕을 본 건 자신이다. 일단은 영화사에서 압박을 받기 전에 기자들에게 흘리는 게 먼저다.
그새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벨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큰 형을 떠올렸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어디 동남아에 잠적이라도 해야 할 성 싶었다.
하나, 둘, 셋. 루이스는 까만 광택이 도는 진홍색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숫자를 세고 전화를 받았다. 계속되는 촬영으로 그 사이에 머리가 말라서 바람에 휘날렸다.
“네. 접니다.”
‘루이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아니라, 네가...!’
“아, 잠시만요. 응. 아, 거기? 그래 더 찍지 뭐.”
루이스는 핸드폰을 잠시 떼어내고 일부러 들리도록 말했다. 한 번 스위치가 켜진 벨져는 방금 찍은 샷을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반응을 끌기엔 충분했다.
‘루이스!’
“아, 미안해요. 무슨 일이에요?”
핸드폰 너머에 침묵이 이어졌다. 차마 누드씬을 찍는다는 말을 못 하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적어도 내겐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이에요.”
‘루이스.’
“내 몸이잖아요. 당신도 없고.”
‘......내가 그리로 가겠다.’
“걱정 마요. 상대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않나!’
“그럼요? 우리, 세 달 동안 한 시간도 못 본 거 알아요?”
‘그건....’
“이젠 당신 기다리는 것도 지쳐요. 나도 내 삶이 있다구요.”
‘만나서 얘기하자. 일단 만나서....’
다이무스의 착잡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보니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하고, 벨져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루이스. 다음 숏 들어갈 거다. 여기서 여기까지. 가운을 벗고 테라스에 서. 역광으로 비출 거다.”
“앞에 누구 있는 건 아니지?”
“흥. 볼 것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밉살맞게 말하는 벨져의 엉덩이를 쳤다. 짝 소리가 나게 후려치는 바람에 벨져가 발끈해 주먹을 쥐며 노려봤지만 그의 작품을 위해서라도 벨져는 지금 루이스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촬영 들어가야 해요. 끊습니다.”
‘루이스...!’
“오려면 오세요. 어차피 안 올 테지만.”
모질게 말하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한 루이스는 대기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믿었던 보스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남자 주인공이 될 시간이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꺼놓고, 하루치 촬영이 끝났다. 벨져는 더없이 흡족해했고, 루이스는 배역의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저질러버린 일을 수습하러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꺼둔 사이 온 문자와 메시지, 부재중 통화 기록이 쏟아졌지만 다이무스의 기록은 없었다.
큰일을 저질러버린 건 아닐까. 뒤늦게 불안이 닥쳤으나 그래봤자 엎질러진 물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맥주를 사러 나가기 위해 후드를 집어 들었다. 내일은 촬영도 없겠다, 오늘 마시고 죽자는 마음으로 여섯 개 들이 팩과 보드카를 담아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땐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회사 차원에서 만난 그는 빈틈없는 슈트 차림에,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딱히 이렇다 할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루이스는 맥주병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이무스 홀든쯤이나 되면 달라붙는 사람도 많을 거고, 저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줄을 설 텐데. 내가 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데다,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남은 병을 비웠다. 벨져의 말이, 다른 모두의 말이 맞다. 오래 갈 수 없는 관계다.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땐 그냥 이 사람이 나와 같은 감정으로 봐주는 게 기뻐서, 통화 한 번에도 설레서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술병이 비어갈수록 루이스의 속은 타들어갔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이 타는 속에 막힘없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마셨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루이스가 눈을 떴다. 몸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살인범이면 어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벽에 머리를 세 번쯤 부딪치고, 겨우 호텔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문이 열리며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단단한 팔이 고꾸라지는 몸을 받치고, 익숙한 향수 냄새와 몸이 훅 루이스를 덮쳤다.
“루이스.”
“다이무스....”
“하아. 이 지경이 되도록....”
한숨을 쉬는 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기댔다. 번쩍 들린 몸이 침대 위에 놓여지고, 루이스는 제게서 멀어지는 팔을 잡고 매달렸다.
“다이무스.... 가지 마요. 나, 계속.... 기다렸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났다. 옆자리가 훅 꺼지고, 뜨겁고 단단한 몸이 루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를 마주 안고 루이스는 이게 꿈이 아니길 바랐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그래. 안다. 그래서 온 거다. 루이스....”
“가지 마요. 그냥, 나랑....”
“자라. 옆에 있을 테니까.”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꾹꾹 눌러 참다가 터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더 심각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며 등을 쓸어줘도 루이스는 내내 다이무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죄책감이 빠듯하게 가슴을 옥죄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내일. 내일 얘기하자.”
급하게 비행기를 잡아타고 오는 내내 걱정이 돼서 한숨도 못 잔 건 다이무스도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할 일이 태산이지만 일단 지금은. 이 사람을 안고 잠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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