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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The left stairs
이걸로 끝!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었다. 고민에 빠진 탓이었다. 밥 한 끼 정도가 뭐 대수랴 싶겠지마는, 같이 먹는 사람이 다이무스 홀든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냥 때우는 식사는 어림도 없고, 적당한 선이라고 하면 죄 데이트 코스뿐이다. 형편 상 예약제 레스토랑을 잡을 수도 없으니 도무지 어디에서 뭘 먹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챙겨준 건 고맙지만, 말 한 마디로 충분히 끝날 일이 아닌가.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그냥 상투적인 인사로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이스가 아는 다이무스 홀든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식사 한 끼는 좋든 싫든 대접해야 한다.
사실 그냥 모른 척 하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이글은 '뭐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냐. 그냥 쌩까.'라고 했지만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처지에 그게 될 리가 없다.
이제는 말투만 닮아가는 게 아니라 목소리가 자꾸만 겹치는 바람에 해야 하는 말도 헷갈리는 판국이다. 다이무스가 할 말을 제가 하질 않나, 말해놓고도 뭐가 잘못된 줄 모르다 뒤늦게 깨닫질 않나, 아주 엉망이다. 당황한 나머지 옆에 눈치를 살피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다이무스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쿡쿡 찔렸다.
역사를 읽으러 서점에 들르는 사람보다 물건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못 알아챌 법도 한데 다이무스는 조금 느릴지언정 루이스의 시선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양심이 찔리는 거라고, 전에 진 빚을 갚아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낮고 진중한 그의 목소리에 설렌다거나,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백날 생각만 해봤자 소용없지만.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고 다이무스를 등지고 섰다. 의식하지 말자. 새로 개장한 인도 음식점이 꽤 괜찮다던데. 맛에 까다로운 카리나와 본토 사람인 라즈도 호평을 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이 끝나면 꼭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을 고쳐 쥐었다.
오늘만 아홉 번째. 저를 보다 눈이 마주칠라 치면 바로 홱 돌아가 버리는 게 오늘만 꼭 아홉 번이다. 제 눈치를 보며 신경을 기울이는 그 모습이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이제 그만 뜸 들이고 말을 걸어주었으면 했다.
이번에도 아닌가. 인가 아닌가 흔들리는 것도 슬슬 지친다.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은 분명 전장에 나서는 이에겐 칭찬할만한 덕목이지만 지금은 그 신중한 성격이 꽤, 답답했다. 속 시원히 말 좀 하라던 막내의 말에 이런 식으로 동조하게 될 줄이야. 다이무스는 하루만 더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짜증을 내는 능력자의 말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봤자 소용없는 말 뿐이지만 그 역시 고객의 한 사람.
다이무스는 제게서 등지고 돌아선 그를 흘긋 바라보고, 소위 진상이라 하는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여 사업은 홀든만의 사업이 아니라, 헬리오스의 클랜사무소와 연계된 일이다. 언성을 높이며 시비를 거는 능력자를 차갑게 내려 보며, 다이무스는 이미 몇 번이고 설명한 정해진 규칙을 설명해주려 했다. 그가 들먹인 이름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연합의 영웅을 들먹이며 이따위로 나오면 연합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주고 있자니 짜증보다 피로가 몰려왔다. 그 영웅이 바로 옆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나가던 능력자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은행 앞에서 시비가 붙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연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가 엮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자 의기양양하게 언성을 높이던 그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잡았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 입에 담아도 될 이름이 따로 있다. 이따위에 검을 뽑을 필요도 없다. 다이무스는 그를 내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발끈한 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두꺼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놓으시죠.”
“넌 또 뭐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찾더니.”
엷은 쓴웃음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슬며시 흐르는 냉기에 지켜보던 갤러리도 숨을 집어삼켰다.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제 멱살을 쥔 그가 잠시 굳었다가, 마른침을 넘기며 손에 힘을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을 먹다니 방금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연합으로 가시죠.”
“뭐,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아뇨. 모르는데요.”
“뭐 이 새끼야?!”
작은 개가 크게 짖는 법이라 했던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쥐었던 손이 이번엔 루이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얼어붙었던 갤러리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멱살을 잡힌 루이스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냥 어리고 순하게만 보이는 얼굴이, 잠시 앞머리를 올린 것만으로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서점 직원 루이스 대신 영웅 루이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독서를 권하던 사람이 아니다. 눈빛만으로 공기를 얼리고, 좌중을 압도하는 그 기백은 평범한 사람이 따라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의 영웅. 루이스.
이 광장에, 이제 그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다이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하다. 공성에서 마주치더라도 가급적이면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를 그저 그런 능력자가 당해낼 리 없다.
“이거, 놓으시죠.”
“윽.... 서, 설마....”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몰라도, 사무실에 가면 당신이 어느 소속의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그의 팔을 잡은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막힘없이 흐르는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해서, 이 상황을 모르고 들으면 친절한 상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루이스의 얼굴에서 호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가운,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이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무표정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자 그가 뒷걸음질 쳤으나 루이스의 손은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숙여 다가가 아이를 대하듯 눈을 맞췄다.
“자, 잠깐. 아니,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그게....”
겁에 질린 능력자가 루이스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아무리 상대가 에이스 능력자라 한들 공석에 있으면 함부로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란 그 얕은 믿음 하나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던 자가,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빈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거리에서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러났다. 건넨 것은 아마 일종의 경고였겠지만, 어딘가 위험하고 선정적인 그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제의 능력자는 발이 언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서점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건 덤으로, 그를 바라보던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단하군.”
“별 거 아닙니다.”
“뭐라 했나.”
“그것도, 별 거 아닙니다.”
석연치 않은 대답에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지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층계참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내민 채 위의 상황을 염탐하던 드렉슬러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쏙, 아래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 상황을 지켜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회사에 가면 또 이걸로 귀찮게 굴 게 뻔하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가 있었던 층계를 노려보다가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책을 집어 든 그를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호기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지고, 덕분에 골칫거리를 하나 치운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그 자신을 위해, 연합을 위해 했다는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끼어든 이유가 듣고 싶었다.
“어째서지.”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냐고 묻는 거다.”
“...제가요?”
책을 읽는 척 하던 루이스가 손을 멈추고,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에, 어째서인지 다이무스는 조금 즐거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내려 잠시 고민하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모양이 좋은 손가락이, 일전에 몰래 맞춰본 그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그만 일전에 맛본 감촉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는 숨을 집어삼켰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가.”
“경께서는 왜 제가 화를 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건....”
이번에 말끝을 흐린 건 다이무스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예뻐서,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망설이는 중에 루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은 초승달처럼 얄쌍하게 눈을 휘며 짓는 미소가 예뻐, 입을 다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녁을 함께 하며 얘기하도록 하지. 본의 아니게 수고를 끼쳤군.”
“아, 아닙니다. 그리고 식사라면 지난번에....”
금세 당황하는 루이스의 반응에 이번엔 다이무스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무심코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다이무스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잡아먹지 않는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새로 생긴 인도 음식점이 괜찮다더군. 혹시 그쪽 음식은 별로인가?”
“아, 네.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당혹이 가시고, 안도가 대신 묘한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다이무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요즘 부쩍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던 아이들의 말이 떠올리고 흘긋, 그 사소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을 바라봤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덴 것처럼 피해버렸지만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신호다.
거리는 천천히 좁혀 가면 되는 것이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목소리가 섞이고 겹친다. 그 간지러운 울림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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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취중진담
밤늦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급히 달려간 디시카 근처의 한 펍은 좋게 말해도 품위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린 건 공간 자체에 짙게 밴 술 냄새와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거나하게 취해 널브러진 사람들 탓이 더 컸다. 가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벨져는 바닥에, 테이블에 뻗은 연합의 능력자들을 지나 제게 손을 흔드는 혈육에게 다가갔다.
오후에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다 헤어진 연인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엎드려 자고 있는 걸 보는 건, 펍의 공기와 분위기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대놓고 인상을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벨져는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머리카락과 바에 달라붙다시피 한 등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상황을 방관한 것도 모자라 새벽에 저를 불러낸 녀석을 쏘아봤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잘못 없어. 멀쩡한 것 보면 몰라? 난 뒤처리반이라고!”
“용건만.”
“뒤처리반이 할 일이 다 그렇지, 뭐. 데려가.”
이글은 양 손을 어깨 높이로 들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등받이가 없는 원형 의자를 빙글 돌렸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며 발뺌하는 녀석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팔짱을 끼자 곧 이글이 다시 의자를 돌려 벨져를 마주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쉰 이글은 그 옆에 뻗은 사람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계속 형 찾더라.”
저를 찾더라는 말에 벨져는 잠시 이글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내렸다. 바와 한 몸이라도 될 것처럼 엎드린 사람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김없이 망할 후드를 입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더럽게 손이 많이 간다. 벨져는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과 함께 팔짱 낀 팔을 풀어 완전히 뻗은 그녀를 일으켰다. 축 늘어져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웅얼거리며 감았던 눈을 뜨는데, 평소의 총기와 서늘한 눈빛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흐리멍텅했다. 거기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풍기는 술 냄새는 덤.
그녀, 그러니까 벨져의 연인이자 연합의 영웅님께서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졸리고 취한 와중에도 눈앞의 사람을 확인하려 눈을 깜빡이다가 배시시, 이런 지저분한 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치는데, 이것만 봐도 얼마나 마셔댔는지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으응, 벨뎌어…….”
침대에서도 가끔, 저 좋을 때나 내는 콧소리와 함께 루이스가 안겨들었다. 머리와 몸을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은 루이스의 뺨이 붉었다. 안아 올려 달라고 투정인지 술주정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는 루이스의 머리를 받치고, 벨져는 한가롭게 위스키를 마시는 이글을 바라봤다.
“아, 또 뭐어.”
“다른 말은 없었나?”
“별 얘기 안 했어. 알잖아, 우리 영웅님 취하면 자는 거. 그냥 뭐……. 형이 얼굴만 예쁜 개새끼라는 거?”
벨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집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바 위에 툭 던졌다. 이글의 손이 냉큼 지폐를 가져가고, 벨져는 계속 안아서 데려가라고 칭얼거리며 제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안 마셨어. 쌩으로 위스키 두 병? 내가 오기 전에 뻗은 모양이더라고.”
용돈을 쥐어주자 술술 잘도 나오는 증언에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뺨을 잡아 올려 눈을 맞추고, 잘도 웃음을 흘려대는 그녀를 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이게 귀여워 보이니, 정말 답이 없다.
“속이 안 좋으면 바로 말해라.”
“뭐야, 천하의 벨져 홀든 경께서 그런 허드렛일도 한단 말이야? 우리 영웅님 대단하네~. 사랑의 힘?”
“토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버릴 거다.”
“으응…….”
짓궂은 농담에 차갑게 대답하면서도,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벨져의 손은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자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진 사람의 체온과 술 냄새가 훅 끼쳤다.
“간다.”
“조심히 들어가~.”
급하게 나오느라 몰랐는데, 밤공기가 꽤 찼다. 머릿속으로 루이스의 집과 거리를 계산한 벨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디 이대로 무사히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언제 역류할지 모르는 게 바로 술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루이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벨져의 목을 끌어안은 루이스가 벨져의 가슴팍에 뺨을 부비작거렸다. 평소에 이렇게 살갑게 굴면 좋으련만, 루이스는 애정을 표현하는 데는 영 서툴렀다.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루이스는 어떨지 몰라도, 벨져에겐 루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관계가 이어질 리가 없다.
매번 싸우고 다투고 잠시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도 다 사랑하니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만나면 하나가 되기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잃어버린 반쪽.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이 짠해 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음 같아선 어디도 못 가게 잡아두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욕심이지 루이스의 행복이 될 수는 없었다. 마음껏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 사랑이 뭔지 참 어렵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벨져는 기사단 쪽 일을 하느라 잠시 오스트리아에 다녀오느라, 루이스는 연합 때문에 이 주간 얼굴 한 번 못 보다 겨우 만났는데 만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서로 언성만 높이다 헤어져서 지금 이 모양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정말 결백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다 잠시 화장실에 간 루이스를 기다리는데 예의 그 거너가 접근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뿐이면 또 모르지만, 다짜고짜 예쁜이. 시간 있어? 라고 껄렁거리면 누구라도 시비를 건다고 생각하지 작업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대체 뭐가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부분은 건드린 것인지. 물론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벨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콤플렉스 덩어리에, 한없이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 빌어먹을 총잡이가 대뜸 옆자리에 앉아 척하니 팔을 제 어깨에 얹고 쫓기고 있으니 대충 말을 맞추라고 속삭이느라 얼굴을 가까이 했으니, 뒤에서 봤으면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그 순간에 이주 만에 하는 데이트를 생각했다.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되도 않는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사람이 신경을 쓸까봐 그냥 넘기려 한 것뿐이었다. 정말로, 오늘은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재미 좋냐는 천박한 말도 참아 넘겼건만 돌아온 건 루이스의 싸늘한 냉대였다.
루이스는 잠깐이나마 글래머의 금발 미인이랑 연인 놀이라도 해서 좋았냐고 빈정거렸지만, 벨져는 정말 그 점에 대해선 티끌 하나만큼도 죄가 없었다. 금발의 미녀가 아무리 많은들 루이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 그녀가 제 편을 들기는커녕,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는 바람에 덩달아 벨져도 빈정이 상했다. 차분히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먼저 생각하기엔 지쳐있었고, 결국 벨져와 루이스는 자기 얘기만 하다 헤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떨어져있는 내내 생각했지만, 벨져는 정말 억울했다. 제 편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며 믿어주지를 않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머리가 식으면 다시 전화를 하겠거니 싶어서 잠도 설치고 기다렸는데 걸려온 전화는 취한 사람 데려가라는 전화였다.
속상하고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풀어야지, 왜 그걸 술로 푼단 말인가. 미련한 사람 같으니. 그걸 또 받자마자 달려온 자신도 미련하긴 마찬가지다. 사랑. 그래,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벨져는 루이스를 고쳐 안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이 이렇게 찬데 아직도 반팔 티셔츠에 후드 한 벌이 전부라니 이 꼴로는 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빠른 걸음으로 루이스의 집에 도착한 벨져는 문 옆 화분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잘 열리지도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고 허름한 공간에 냉기가 감돌았다. 바람만 안 분다 뿐이지 밖이나 다를 게 없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벨져는 루이스를 침대 위에 눕혔다. 내려놓자마자 칭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루이스는 후드를 벗고,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등을 더듬거리는데 한 손으론 역부족인지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벨져는 한심해 하는 대신 루이스의 손을 잡아 내리고 그녀의 등 뒤에 앉았다.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어깨끈을 내리자 한결 편해진 얼굴의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바람에 날린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 익숙해진 것인지 전보다 술 냄새가 덜했다.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벨져는 동그란 이마에 키스하며 캐미솔 아래로 브래지어를 빼냈다. 하는 김에 꽉 죄는 타이트한 청바지도 벗기려 루이스의 다리를 무릎에 얹자 루이스가 꼼지락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바지까지 벗기고 나니 루이스는 까만 캐미솔 하나에 얇은 면 팬티 한 장 차림이라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벨져…….”
“속이 안 좋으면 당장 화장실에…….”
“미안…….”
루이스는 고개를 도리 젓다가 벨져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속을 태운 게 다 부질없어지는 사과에,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벨져는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루이스를 안고 좁은 침대에 누웠다. 피부 위, 옷 위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과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벨져가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허리를 토닥이는 것처럼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안겨 이따금 얼굴을 부볐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 심장 박동만이 정적을 채웠다.
“루이스.”
“응…….”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다.”
단호한 말투와 함께 손길이 멎었다.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어쩜 이렇게 한 점 흔들림 없이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사람인지.
다시 고개를 드는 자격지심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얼굴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루이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널 사랑한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
“벨져, 난…….”
“사랑해.”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게 전부 제 탓인 것 같아서. 언젠가 이런 제게 질려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처럼 당당할 수가 없었다.
“난……. 미안. 미안해.”
곧은 시선을 피할 곳이 없어 눈을 감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밀려드는 자괴감에 숨을 집어 삼키며, 루이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네가 언젠가 날 떠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루이스. 날 봐라.”
이 남자는 한 번을 봐주는 법이 없다. 숨고, 도망가고 싶어도 언제나 이 눈빛에, 목소리에 잡히고 만다. 이번에도 벨져는 봐 줄 생각이 없었고,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하지 않는 한 이 상황이 계속될 게 분명했다. 차가운 공기를 폐에 집어넣고,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한다.”
“난...!”
“사랑한다.”
“벨져, 그만…….”
“사랑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실어, 꾹꾹 눌러 새기듯 말하는 그의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으니 그제야 벨져가 루이스의 뺨에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하는 벨져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벨져의 팔을 잡았다.
“나도.”
“사랑한다.”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도, 벨져는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했다. 벨져 홀든은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도, 쉽게 사랑을 입에 담을 사람도 아니다. 루이스는 이러는 이유가 벨져의 얼굴에 있기라도 하다는 양 벨져를 바라봤다.
“내가 널, 사랑한다.”
“...무슨 뜻이야?”
“네가 아무리 자존감이 낮고, 못났어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이 벨져 홀든이 사랑하는 건 너니까. 알겠나?”
“...뭐야, 그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지. 물론 네 모든 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계속 눈을 맞추려 밀어내던 벨져가 이번엔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완벽한 벨져 홀든 경께서는 지금 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있을 리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고, 다른 사람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니 그 시답잖은 불안과 걱정일랑 할 필요가 없다고.
참 위로에 서툰 사람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파고들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도무지 솔직하지가 못하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에 담긴 갖가지 감정과 애정은 열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을 받고 그냥 입을 다무는 건 공평하지 않다. 루이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벨져의 얼굴은 어느새 퍽 자상해져서, 덩달아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늘, 자기가 사랑받는 걸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대.”
“그렇군.”
“그러니까 나도, 아마 계속 이럴 거야. 잠깐 괜찮았다가..., 또 불안해하고.”
“그 잠깐을 늘려나가면 된다.”
“...할 수 있겠어?”
벨져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 미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벨져. 벨져 홀든이다. 난 내가 원하는 건 전부 손에 넣어. 너도 예외는 아니지.”
“대단하네.”
도망가고 숨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단단히 잡고 놔주지 않는 그가 좋아서, 루이스는 고개를 쭉 내밀어 입술을 맞췄다. 몸이 맞닿은 온기에 술이 들어간 몸이 노곤해지고, 무거운 졸음이 다시 몰려왔다.
“벨져.”
“말 하도록.”
“사랑해…….”
루이스는 벨져의 몸 위에 엎드린 채 그의 탄탄한 가슴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허리를 감싸고 머리를 토닥이던 손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 입으로 몇 번이나 한 말이고, 안 들어본 것도 아닌데 또 느낌이 달랐다. 배시시 웃더니 기력이 다했는지 그대로 잠들어버린 루이스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벨져는 품에 안은 연인을 꽉 끌어안지 않기 위해 이를 물었다.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연인의 사랑스러움이란,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다.
오늘 쌓인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다 못해 행복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꾸만 광대가 올라가고, 웃음이 나와서 벨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그 누가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간 자기 자신에 대해선 한없이 무딘 사람이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심호흡한 벨져는 이불을 끌어당겨 루이스의 등을 꼼꼼히 덮었다. 아무리 취해도 기억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니 일어나면 분명 이불을 차겠지만,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것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아무렴, 장장 이주 만에 연인을 안고 잠드는 밤인데 그쯤이야. 좁고 불편한 침대도 상관없다.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해진 벨져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기대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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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보이스를 내주는 바람에....22
은행의 실질적인 업무는 일반 창구 업무가 끝나는 4시부터다. 헬리오스의 에이스에서 은행원의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도 딱 4시였다. 그것뿐이라면 어떻게 병행할 수 있다. 문제는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 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씩이나 되는 사람이 창구 업무를 볼 위치에 있는 건 아니지만 트와일라잇이라고 하면 내로라하는 능력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아무리 능력자 등록제가 시행되고 있고, 연합과 회사가 관리를 한다고 한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이, 그것도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를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로부터 기간을 엄수해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어느 정도 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신뢰와 정확, 냉철함을 두루 갖춘 데다 능력자들에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이미 중역에서 그들의 임무를 다하기 바빴고, 그들을 고작 대여 업무나 시킨다고 트와일라잇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몇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는 자연스럽게 다이무스에게 돌아갔다. 이 결정이 가장 효율적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일감은 줄지 않고, 시간은 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업무에 은행 지부장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업무, 거기에 장비 대여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두말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건 그것이 다이무스 홀든의 책임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홀든의 직계, 그것도 장남의 위치란 그런 것이다. 두 동생이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으나 둘 다 제 역할을 다하긴 커녕 다이무스의 속만 썩이기 바빴다. 전에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졌다면 요즘은 그냥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의 업무를 마치려면 퇴근은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이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을 하다 사무실을 나왔다. 내내 앉아서 서류를 보느라 뻐근한 목을 돌리며 서점 앞을 지나려는데 문득, 걸음이 멈췄다.
이 시간까지 뭘 하기에 아직 불이 켜져 있나 했더니, 서점 안 의자에 널브러져 잠든 그가 눈에 들어왔다. 꼭 막내 녀석 같은 포즈로, 입까지 벌리고 자는 게 퍽 안쓰럽고 귀여워 서점 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깰 줄 알았더니 꽤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을 열어둔 채 불까지 켜고 불편하게 자느니 제대로 정리하고 돌아가 쉬는 게 나을 성 싶어 다이무스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낡은 경칩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 영웅씩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방비한 건 위험하다 못해 무모한 일이다. 이글이야 천성이 그런 녀석이지만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물론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루이스에게 실례되는 일이지만. 모름지기 평소 행실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심하다는 생각 대신 같은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이 먼저 들고 만다. 그런데 왜, 그 다음엔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다이무스는 한 손에 책을 안은 채 눕다시피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숙련된 검사인만큼 발소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정장에 맞춰 신은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고작 몇 걸음.
가장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깨우기 위해 뻗은 손이 멈췄다. 몸을 뒤척이며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몸을 모로 살짝 튼 채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입술과,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고른 치아에 그만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루이스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차마 다가가질 못했다. 아마도, 그때도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눈을 감으며 살짝, 닿았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그를 깨우려던 손으로 의자를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친애의 표시로도 하는 행위지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다이무스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고 화끈거리는 목을 매만졌다. 루이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고, 입을 맞추었다는 건 자신밖에 모른다. 다이무스는 헛기침을 했다.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데서 이렇게 잠든 걸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도무지 깨어날 줄 모르는 게 반가웠다.
잠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이무스는 본래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하기 위해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루이스.”
“으응…….”
“일어나라. 돌아가서 자도록.”
몸을 웅크리며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도리 저으며 깨어나길 거부하던 루이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다시 잠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루이스가 눈을 떠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에 조금 서운해지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피해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 큼. 크흠. 그, 다이무스 경....”
“퇴근하던 중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아, 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깨우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루이스도 급히 일어나 떨어트렸던 책을 줍다가 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발 앞서 나간 다이무스의 손이 루이스의 팔을 잡은 덕에 어디 부딪치는 일은 막았지만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괜찮나?”
“...네,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입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가 눈을 내리깐 채 작게 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무척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것으로 격려를 담아 인사하고 돌아섰다.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나가는 것 역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작 몇 걸음을 옮기는 게 아쉬워진다. 다이무스. 그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했다.
그런 기대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기다린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불러 세웠다.
“저....”
기대한 것처럼 이름을 불러준 건 아니지만 충분하다. 다이무스는 한 박자 쉬고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동안 낸 목소리만큼이나,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이 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려는 것 같아서 손에 든 서류 가방을 꽉 잡았다.
“감사합니다.”
망설임 끝에 겨우 입 밖에 낸 감사가 어찌나 기특한지. 그 자신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지.”
“네? 아, 예.”
“그럼.”
“좋은 밤 되시길.”
기분 좋게 서점을 나선 다이무스는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나긋한 목소리를 되새겼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피로가 반절은 덜어진 것 같다. 고작 몇 분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다. 상투적인 인사일 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다이무스 홀든에게 오늘밤은 그저 평범한 여느 하루와 같지 않아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시상에 다이무스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가 이토록 영감을 줄 수 있을까.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사랑스러운 간질거림이 피어올랐다.
그의 말 그대로,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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