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구한 룸메이트는, 급하게 소개를 받아 구한 것 치고는 꽤 성실하고 괜찮은 사람 같아서, 절대 건드리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헐벗은 청년을 본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주근깨가 매력적인, 금발의 청년.
숙취와 함께 바른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끊었던 담배가 고파왔다.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은 간다. 오랜만에 들이킨 위스키가 반가운 나머지 얼음도 없이 쭉쭉 들이킨 게 화근었다. 거기다 정전까지 되는 바람에 촛불을 켜놓고, 캠프 분위기가 난다며 어린애처럼 담요로 텐트를 치고 마시다 보니 그만 들떠서 취해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룸메이트랑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알몸으로 깨어나진 않았겠지.
머리를 긁다가 일단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보일러가 안 되는 나머지 공기가 찼다. 물도 마찬가지라 대충 세수만 하고 나온 루이스는 널브러진 옷가지며 술병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지러진 거실이 정리가 되어도 일어날 줄 모르는 동거인을 내버려두고, 루이스는 후드재킷을 집어들고 집을 나섰다.
“돌겠네, 진짜....”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나온 말은 생각을 거치지 않은 100%의 진심이다. 착잡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틴은 좋은 사람이다. 스트레이트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성실한, 그야말로 흠 잡을 데 없이 좋은 사람.
게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걸 계기로 곤란해지는 건 한두가지가 아니다. 당장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물론이고 방을 빼야할지도 모른다. 그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감정이 얽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겉잡을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쉬다가 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한 블럭 떨어진 샌드위치 가게는 이 근방에서 그나마 제일 싸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늘 앉는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인사와 함께 커피를 따라주고, 루이스는 여느 때와 같이 아침 특선을 시켰다.
심란하다. 심란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겠지.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마시려다 흘리고, 그걸 수습하려다 소금통을 치는 바람에 소금통이 바닥을 구르며 큰 소리가 났다. 굴러 떨어진 소금통을 줍고, 엉망이 된 테이블을 티슈로 닦은 루이스는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룻밤의 실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술때문이다. 누가 먼저 키스했는지, 옷을 벗었는지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저를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꽤 섹시했다는 것 정도가 떠오르는 기억의 전부지만 그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취해서 미쳤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태연하려 해도 이런저런 걱정이 떠올라 목이 바싹바싹 탔다.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마틴이 꿈을 꾼 것으로 넘어가는 게 베스트다. 기억을 아예 못하면 더 좋고.
마침 나온 식사의 계란 노른자를 괜히 나이프로 건드리다 반숙으로 익힌 노른자가 깨져 흘러내려다. 오늘은 하나같이 되느 일이 없다. 이걸 자초한 건 자신이지만, 억울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정말, 결백하게, 건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루이스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목록을 뒤져 전화를 걸자 잠시 수신음이 들리더니 평소의 촐싹거리는 목소리 대신 지쳐 늘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에, 기자 클리브 스테플입니다.”
“저예요, 클리브 씨. 마틴 말이에요.”
“어. 왜, 싸웠어?”
“아뇨. 혹시 그 친구.... 술버릇 어때요?”
마틴을 소개해준 그라면 알지도 모른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묻자 건너편에서 클리브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입을 다셨다. 밤샘이 잦은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일 분 일초에 애가 탔다.
“술 진탕 마시면 서운하고 섭섭한 일 말하면서 울지 않아? 그러다 쓰러져 자던데. 아, 일어나선 기억 못 하더라. 그걸로 자주 놀려먹었지, 아마?”
“고마워요.”
“무슨 일 있어?”
“아뇨. 아무일도 없어요.”
“에이, 아무일이 없긴. 아무 일이 없으면 어디 우리 영웅님이 이렇게 아침댓바람부터 전화를 하셨겠어?”
“다음에 술 살게요.”
루이스는 안도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감이 좋은 사람이니 대충 눈치를 챌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추측일뿐이다. 마틴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도 없었던 일로 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왜 불안이 가시질 않는 걸까.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던 루이스는 커피잔을 들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포크를 들어 노른자가 흘러내린 계란을 잘라 입에 넣었다. 밍밍한 계란을 씹다가 바닥에 성대하게 소금을 치고 정작 계란 위엔 소금을 치지 않았다는 게 떠올라 어깨가 축 늘어졌다.
“미치겠네 진짜.”
일단 도망치듯 나오긴 했는데 마틴의 얼굴은 어떻게 볼 것인가. 루이스는 접시를 밀어놓고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몸을 움직일 정도가 됐지만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멈춰있었다. 기억이 수반하는 끔찍한 두통에 비하면 돌아오는 정보는 터무니없이 적고, 단편적인 기억과 습관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체를 유추하는 속도는 답답하다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더디다. 드문드문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고, 루이스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애매한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 생각나지 않으면 잠시나마 쓸 가명을 스스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름 달력을 봐도 내키지 않았다. 루이스는 더 말하지 않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왔다. 화약 냄새와 약 냄새, 싸한 알콜 냄새와 함께 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종이와 책 냄새와 함께 들어오기도 했다.
그 사이 두통은 잦아들고 상처도 아물어 갔지만 짙은 어둠에 잠긴 기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뿔뿔이 흩어진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려 해도 주어진 퍼즐 조각이 너무 적었다.
루이스가 가져오는 신문을 보거나, 집안일을 하고 그를 기다리며 식사를 준비하는 게 하루의 전부. 이렇게 지루한 일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언제든 나갔다 와도 좋다며 열쇠를 줬지만 왠지 모르게 나가고 싶지 않았다.
레시피에 부족한 재료가 있어도 문 앞에 서면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끝끝내 발을 잡곤 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까지, 의식주 전부를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저기.”
“무슨 일입니까?”
부르는 소리에 스튜를 끓이다 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루이스가 구급상자를 꺼내 놓고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지만 해주겠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끓이던 스튜의 불을 끄고 다가가 셔츠를 벗자 루이스가 손을 뻗었다. 그를 둘러싼 냄새들을 전부 걷어내면, 루이스에게선 미미하게 서늘한 향이 났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나 겨우 맡을 수 있는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싸한 민트 향을 떠올렸다. 루이스의 손은 배를 감싼 붕대를 풀고 거즈에 알콜을 묻혀 상처를 소독했다.
아찔한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지만 루이스를 잡지는 않았다. 전에 무심코 잡았다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는 바람에 루이스의 어깨엔 아직도 옅은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멍자국을 볼 때마다 기묘한 도취감에 휩싸인다는 것을 과연 이 단정한 얼굴의 남자가 알까.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동안 소독을 마친 루이스가 상처를 물끄러미 보다가 후, 숨을 불었다. 알콜이 날아가며 닿는 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큼 목을 가다듬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자신이다.
흰 피부를 물어뜯고, 짓씹어 삼키고 싶다. 손끝에서부터 번지는 충동과 열기에 목울대가 울렸다. 잠시 눈을 맞추던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작은 가위를 알콜로 닦고 배를 잡았다. 상처를 꿰맨 실밥을 풀어내려는 것뿐이지만, 제게 집중한다는 그 하나의 사실에 홧홧한 열기가 아랫배에 몰렸다. 당장, 이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고, 아무것도 못 하게 제압한 뒤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치우고 싶다. 흰 목덜미를 손에 쥐면 어떤 표정을 할까. 그 붉은 눈동자에 어떤 감정을 담고 나를 바라볼까.
툭, 툭, 가위가 실을 끊는 소리와 함께 루드빅은 달뜬 숨을 내뱉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흥분했기 때문이다. 가위가 실을 당기는 통증마저도 아찔했다.
“후, 루이스....”
“조금만 참아요. 거의 다 끝났으니까....”
셋, 둘, 하나. 마지막 실이 끊기고, 자그마한 핀셋으로 실을 뽑아내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이어졌다. 낮게 신음하자 작게 속삭이듯 말한 루이스가 다시 알콜을 묻힌 솜을 갖다 댔다. 아린 통증에 고개를 숙이자 그의 손이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토닥였다.
그 상냥하고 자상한 손길에 그만, 참고 있던 충동이 달려 나갔다.
“읏.”
“당신....”
침대 위로 넘어트린 루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붉은 눈으로 바라볼 뿐. 등골이 오싹해지는 스릴에 고개를 숙여 내려가자 루이스의 손이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이, 서늘한 무표정에 강한 욕망이 들끓는다.
단호한 거부 앞에 얇게 눈을 휘며, 혀를 내밀어 제게 향한 손바닥을 핥자 루이스의 손이 움칫 굳었다.
“루이스.”
“좀 당황스럽네요.”
“하하, 당황한 얼굴이 아닙니다만.”
흠칫흠칫 떨리며 주먹을 그러쥐는 손끝에 입을 맞추고 눈을 치켜 올리자 루이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 허리를 쓸어내리자 루이스가 턱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짓,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합니까?”
“쫓아내기라도 하려고요? 이제 와서?”
“못할 것도 없죠. 이제 거의 다 나았고.”
“몸이 낫는다고 전부 낫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 팔을 잡아챈 그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깍지를 끼기 전, 루이스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내 잡히고 말았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쪽, 그의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며 다리 사이로 무릎을 넣어도 루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저항하고 거부하며 혐오할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너무 조용하다.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고개를 들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뺨을 감쌌다. 약간 차가운 그의 손이 뺨에 닿을 때, 움찔 떤 것은 오히려 다가가던 제 쪽이었다.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는 게, 호의를 베푸는 게 낯설다.
감정 없는 관계. 그저 유린하고, 농락하며 제 욕구를 채울 뿐인 그런 무미건조한,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야 했다.
“그만.”
“...루이스.”
“괜찮아요. 이런 짓 안 해도 되니까.... 조금 쉬어요.”
잠시 망설이다 저를 끌어안은 루이스는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헐떡이며 일어난 자신을 달랠 때처럼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어르는 목소리는 자상하고, 뺨에 닿는 피부는 따뜻했다. 이 남자는 제가 남창이나 귀부인들의 노리개 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쫓기며 달아나는 꿈을 꾸다 보면 그것이 제 과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루이스의 추측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른단 생각이 들면서도, 몸에 가득한 상처와 문신을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린 피 냄새와, 살육, 먹잇감을 쫓고 먹어치우는 그런 충동과 감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데 겨우 그런 일을 했을 리가. 하지만 그런 오해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들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것이라, 나는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품.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달고, 또 따스했다. 한 순간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 더, 놓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 모두가 그저 값싼 동정과 연민에 불과할지라도.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금은 태도가 변할 법도 하건만 그는 서운할 정도로 태연했다. 같이 저녁을 먹고, 루이스는 서류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드러눕는다.
실밥도 풀었으니 이제 당당히 그의 침대를 요구해도 될 텐데. 말을 꺼내려다, 거절할 것 같아 도로 입을 다물었다.
며칠간 함께 생활한 바로 미루어 보건데 루이스를 움직이려면 곧이곧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아닌 것 같아도 정에 약한 그를 뜻대로 움직이려면 약은 수를 쓰는 게 훨씬 빠르다.
나는 불을 끄고 누워 잠시 시간을 죽이다 화들짝 놀란 듯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잠에 빠져든 그. 소파 앞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이름을 불렀다.
“루이스.”
“으응.... 또 악몽 꿨어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손을 잡에 제 머리 위에 올리고, 머리를 기대자 루이스가 올라오라 손짓했다. 냉큼 그의 위에 올라타 몸을 겹치자 루이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자줬으면 좋겠는데.”
“...나 잠버릇.... 있어서....”
“무슨?”
“옆에 누구 있으면.... 자꾸.... 끌어안아서....”
어지간히 졸린 것인지 루이스의 말이 다 늘어졌다. 버릇인 줄은 몰랐지만 품에 파고든다는 것은 전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성실하게 답을 하는 게 귀엽고 안쓰러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 그에게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눈을 휘며 웃었다.
“좋아요. 좋습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안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었다는 게 기뻐, 잠투정처럼 하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침대는 아직 체온이 다 식지 않아 미지근했지만 성인 남성 둘이 눕기엔 역부족이라 모로 누워야 했다. 숨이 닿는 거리, 무방비하게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그.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먼 과거부터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 속 나는 쫓기고 있었고,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그 긴 추격 끝에 내가 승리했으리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지만 기억이 돌아올 때 함께 찾아오는 두통과 감정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왜, 어째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런 의문과 억울함은 서서히 분노가 되었고, 이윽고 빛으로 덮여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됐다. 거추장스러운 기억일 뿐이지만,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쥐면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차가운, 자잘한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은 머리나 등을 쓰다듬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고, 그저 가만히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머리를 쓰다듬는 온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이 사람만 이렇게 함께 있어주면 지긋지긋한 두통도, 악몽처럼 다가오는 기억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루이스.”
가만히 누워, 입모양으로 달싹거린 이름에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혀끝에, 손끝에 피어오르는 열과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야망도, 분노도, 짜릿한 희열도 아닌, 작고 따스하게 피부를 간질이는 미풍.
차가울 뿐인 공기가 이 사람을 거쳐 달콤한 숨이 된다. 루이스가 내쉬는 공기를 마시며, 그를 가진 기분에 흠뻑 취한 나는 팔 안에 안긴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느껴본 적 없는 온기가 따스해 양손에 움켜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가 늦는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오던 사람이 사나흘에 한 번 꼴로 들어오는데, 그를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한 나머지 밖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매번 신문과 이런저런 잡지를 가지고 돌아와, 식사도 건너뛰고 죽은 듯이 잔다. 그마저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소파에서 뒤척거리며 잠을 설치기 일쑤라 침대로 옮겨준 게 벌써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도 문이 열리자 지친 얼굴의 그가 종이 뭉치를 한 다발 내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는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마른세수를 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 루이스를 불렀다.
“루이스.”
“괜찮아요. 오늘은 좀 잤으니까....”
혼을 내듯 짐짓 엄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리고,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초췌했다.
피곤한 것뿐이지만 무감각한 시선이 묘한 긴장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홀린 듯 다가가자 루이스의 손이 내 셔츠의 소매를 만지고, 그의 조금 차가운 손끝이 손목을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그러쥐었으나 루이스는 개의치 않고 옷을 만지다 보풀이 일어난 부분을 잡았다.
“잠시만 잡고 있어요.”
서랍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온 루이스가 나를 옆에 앉혔다. 바늘구멍에 실을 꿰고, 손목을 잡아 튿어진 소매의 단추를 풀어 해진 천에 바늘을 넣어 빼는 행위를 반복하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뛰는 소리가 부쩍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눈앞을 가리는 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루이스와 그의 손. 저 손을, 곧게 뻗은 손목을 잡아 쥐고 싶다.
숨을 죽이던 나는 팽팽한 긴장과 솟구치는 욕망을 감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능숙하군요.”
“필요하면 다 하게 되어있는 거죠.”
별 거 아니란 듯 대답한 루이스는 고개를 소매에 처박다시피 하고 손을 놀렸다. 새하얀 손등에 새로 난 분홍색 흉터. 마지막으로 본지 얼마나 됐다고 루이스의 손등이며 손가락에 상처가 또 늘었다. 루이스의 몸에선 여전히 오래된 종이와 먼지 냄새가 났지만 종이만 만지는 사람이 이렇게 다칠 리 없다.
단정한 얼굴과 달리 그의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과 단순한 사무직이 아니라는 것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은 그냥 이대로, 고요한 호수처럼 있어줬으면 좋겠다.
옷을 벗기지도 않고, 한 번 찌르는 일도 없이 소매를 꿰매던 그가 실을 팽팽하게 당기다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 최근 한 달 실종자 명단을 봤는데... 당신이랑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뇨. 아마.... 신고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루이스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다 이로 실을 끊었다. 왜냐는 말도, 뭔가 생각났냐는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툭. 실을 끊으며 나의 말도 끊어낸 그는 실과 바늘을 갈무리해 일어났다. 나는 목 아래 고여있던 숨을 뱉고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그의 등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필요한 건?”
“글쎄요, 새 옷이랑.... 등유, 밀가루, 토마토, 당근이랑....”
왠지 모를 오기와 불만에 퉁명스럽게 말하자 루이스가 도로 소파에 앉더니 작은 통을 건넸다.
“웬 겁니까? 사탕이라니.”
“전에 잔뜩 받은 게 있었는데, 다른 건 아이들 나눠주고 남은 거예요.”
“의도를 모르겠군요. 먹고 입 다물란 겁니까?”
루이스는 싱긋 웃으면서 사탕 내밀었고, 나는 그 미소에 못 이긴 척 사탕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 사람의 얼굴에, 그 중에서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웃음에 약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민트의 향에 모르게 반가운 기분이 들어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단 맛에 입을 열었다.
“뭐.... 나쁘디 않군요.”
“다행이네요.”
“당시는?”
“장 봐올게요.”
사탕 때문에 새는 발음이 우스꽝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짓는 미소에 생각이 멈췄다. 루이스는 바로 일어나버렸지만, 손끝이며 뺨에 번지는 열은 쉬이 가시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금방 올 줄 알았더니 저녁 늦게 양손 가득 식료품을 들고 온 루이스는 소파에 앉았다가,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대로 누워 반대편 팔걸이에 다리를 올렸다.
“밥 안 먹어도 되니까 깨우지 말아줘요.”
“또 거기서 잘 겁니까?”
담요를 끌어다 덮다가,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무미건조한 시선에 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종이 식료품을 정리하다 말고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다가가 빈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그의 소파에 손을 올렸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
말없이 눈을 깜빡이던 루이스가 시선을 내렸다. 내리깐 눈과 떨리는 속눈썹, 그 아래 드리우는 그림자. 그 뺨에 손을 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크지 않지만 명확한 동의의 표현 앞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고, 이불을 덮어쓰곤 돌아누웠다. 나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를 바라보다 소파 위의 담요를 접어놓고 하던 정리를 마저 하기 위해 일어났다.
딱히 배가 고프다거나 식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리를 마치고 바로 그가 잠든 침대로 향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잠들어 무방비한 상태의 루이스가 어른거려 옆에 있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들어가 좁은 침대에 몸을 누이자 루이스가 몸을 웅크렸다. 작은 동물 같은 반응이 귀여워 건드리고 싶으면서도, 이대로 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싶어 머리를 받치고 그를 내려다 봤다.
이렇게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에게 구해져, 이 집의 가구처럼, 혹은 말을 잘 듣는 개처럼 이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삶.
묶여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 있다니. 묘한 기시감과 불쾌한 기분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가,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 떨리며 움츠러드는 게 꼭 괴롭히지 말라는 것 같았다. 괜한 심술에 꽉 끌어안자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이던 그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무거운 눈을 밀어 올려 제게 향하는 멍한 시선.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던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다 몸에 힘을 빼곤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을 잡고, 검지로 손바닥을 간질이자 루이스가 미간을 좁히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귀엽다. 누군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제게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루이스.”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 불러보는 이름이 달았다. 마치 전에 그가 준 쿨캔디처럼,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들어 서늘한 향이 퍼지는 것 같았다. 루이스가 쥔 주먹에 잡힌 손가락을 그대로 밀어 넣어 손깍지를 꼈다. 잠든 그는 밀어내지 않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맞춰 숨을 쉬는데 루이스가 작게 웅얼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추위를 원망했다면 모를까 반겨본 적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오늘만큼은 추위와 어둠이 고마웠다. 감사해야 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