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벨져루이] Night and Day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그렇지요~
하루 종일, 카모라의 중역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방으로 돌아온 루이스는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지만 아직 하루 일과가 끝나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털썩 침대에 앉은 루이스는 서랍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선이 팽팽해지도록 당겼다.
호텔방에 들어오자마자 전화기가 있는지부터 확인한 건 다 이 시간을 위해서였다. 아슬아슬하게 침대까지 선이 닿는 전화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가고, 교환원이 연결해주기를 기다리길 얼마. 수화기 건너편에서 달칵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벨져 홀든이다.”
“나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잘 끝났고?”
“하루 해서 될 거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아직 한참이야. 너는? 잘 돼가?”
“뭐. 당장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피차 마찬가지네.”
루이스는 푹신한 베개 위에 등을 기대고 눕다시피 앉아 웃었다. 피곤하고 졸려서 목소리가 다 늘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기분전환이 될 만한 거 해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뭐, 행복한 거.”
“당장 떠오르는 건……. 글쎄 안 되겠군.”
“왜?”
“네가 없으니까.”
바로 나오는 대답에, 설레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 예쁜 자식. 평소에도 좀 이렇게 살가우면 얼마나 좋아.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수화기 선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다가 아플 정도로 당기는 볼을 꾹꾹 눌러 내렸다. 목을 가다듬고, 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 감동스럽긴 한데 유감이네. 다른 건? 차라던가, 음악이라던가.”
“그러는 넌?”
“나?”
“뭔가 하는 거라도 있나?”
“음……. 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알려주지.”
“약속하마.”
you have my words. 모든 것에 완벽한 벨져 홀든 경이지만 연애는, 그 중에서도 밀고 당기는 그 아슬아슬한 장난질에는 서툴다는 게 이럴 땐 티가 팍팍 난다. 루이스는 솔직한 답변에 작게 웃고 말을 이었다.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느릿하고 나긋했다.
“즉답이네. 좋아. 일단 물을 끓여. 주전자로 하나 정도? 그리고 대야에 부어서 온도를 맞춘 다음 발을 담그는 거야. 비누 거품으로 발장난도 좀 치고.”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나오는 대답은 하찮기 그지없다. 벨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침대 아래 나뒹구는 두 사람의 신발을 떠올리다가, 제 구두보다 한두 치수는 작은 운동화와 루이스의 맨발을 떠올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소박하군.”
“그렇지, 뭐.”
“참고하겠다.”
“하하. 왠지 네가 그러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 우아하게 와인 곁들여서 목욕이면 몰라도.”
“뭐, 그것도 피로를 푸는데 유용한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하지만?”
정말 졸린 지 목소리가 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늘어진다. 이러다 잠든 게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졸린데 잊지 않고 꼬박꼬박 자기 전에 전화를 하는 애인이 귀여워, 벨져는 그리움을 담아 솔직하게 대답했다. 같이 있으면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속마음이었다.
“역시, 네가 있는 쪽이 훨씬 좋다.”
“그거 좀 쑥스럽네.”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에 감정이 다 묻어난다. 벨져는 루이스의 붉어진 얼굴을 어렵지 않게 그리다, 그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꾹 눌러 내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 그러고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부끄러울 때면 눈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입을 열곤 했다.
사귀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전부, 눈에 선하다. 어지간히 감동했는지 더 말을 잇지 못하는 루이스 대신 벨져가 선수를 쳤다.
“금방 마치고 갈 테니 쓸데없는 일 벌리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을 다 비워. 언제 오는데.”
“최대한 빨리 마치겠다.”
“당장 내일이라도 날아올 기세네. 알았어.”
“그래. 얼른 자라.”
보고 싶어. 사랑해. 그런 말을 하는 걸 꺼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면 정말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 해봐야 느는 법이라 했던가. 오래도록 연애를 해본 사람답게 루이스는 그런 말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벨져는 주로 망설이다가 루이스의 간지러운 말과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선수를 뺏기고 그래. 하고 답을 돌려주기 일쑤였다.
“응. 너도. 끊는다. 참, 벨져.”
“또 뭐냐.”
“그냥, 보고 싶어서. 기다릴게. 잘 자.”
그래. 바로 이렇게. 예상을 하고 있어도 막상 이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 벨져는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에 목을 가다듬으며 다리를 꼬았다.
“잘 자라.”
“응. 나 또 횡설수설 하다가 잠들 것 같으니까, 그냥 먼저 끊어.”
귀엽기는. 이미 횡설수설하고 있으면서, 목소리에 잔뜩 묻어나는 졸음에 벨져는 피식 웃으며 모국어로 밤인사를 했다. 어설픈 독일어로 답을 돌려주는 그가 졸린 눈을 비비고 있을 것만 같아, 내내 골머리를 앓으며 힘을 주고 있던 몸에 긴장이 풀어졌다.
이래서 연애를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얼른 끝내고 그에게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아쉬움에 쉽사리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으니 쪽, 하고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키스를 보내왔다. 소리뿐이지만 그 하나에 없던 의욕이 생기고 만다. 벨져는 잠시 망설이다 똑같이 수화기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사랑한다.”
“으웩. 작은 형, 닭살!”
나도. 라는 달콤한 대답이 돌아와야 하는데,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둥실거리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벨져는 애인의 목소리 대신 찾아온 불청객의 목소리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인상을 팍 썼다.
“왜 네가 받는 거냐, 이글.”
“그야 당연히, 같은 방을 쓰니까 그렇지. 으으, 닭살. 우리 영웅님은 주무십니다. 저는 막 씻구 나왔구요, 내일도 오전부터 회의해야 하니까 끊는다.”
“잠깐. 같은 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엉? 아, 진짜.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침대 두 개! 일하러 온 거야, 일!”
억울한 듯 목청을 키우는 녀석 때문에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떨어트려 놓았던 벨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잠든 사람 옆에서 큰소리를 내는 동생을 타박했다.
“목소리를 낮춰라. 이글.”
“와, 대박. 형 지금 질투해? 왜, 내가 막 영웅님 침대에 들어갈까봐?”
“이글.”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으어. 졸려. 우리 배 타고 기차 타고 왔어. 한 판 뜨래도 피곤해서 못 해. 나폴리까지 얼마나 걸렸는 줄 알아? 끊어.”
피곤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침대로 파고들어 '한 판 뜨겠다'는 걸로 들리는 말에 벨져는 짜증을 억눌렀다. 루이스가 뻔히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여지를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글은 저를 놀리겠다는 그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못된 짓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었고,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길 바랐다.
“어이구, 무서워라. 걱정 마. 안 해. 내일 아침에 냉동사체로 발견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신경 끄셔! 흐아암. 아, 누가 추근덕거리면 그건 알려주지. 동생 좋다는 게 뭐야~.”
“이글.”
“고마우면 용돈 좀 찔러줘. 작은형 애인 깨기 전에 끊는다. 뿅~.”
유치한 인사를 끝으로 달칵 전화가 끊겼다. 좋았던 기분에 찬 물을 쫙 끼얹은 녀석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을.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색색 곤히 자는 얼굴이 떠올라 입가를 매만지다가,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간질거리는 말을 하던 그를 떠올렸다.
기다린다고 했으니 한 시라도 빨리 마쳐야 한다. 루이스의 일은 사나흘은 족히 걸릴 테고, 그럼 영국으로 가는 길에 이탈리아에 못 들를 것도 없다. 이글 녀석을 빨리 쫓아내고 나폴리의 해변을 걸으며 지중해의 여유와 풍경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데이트 할 계획을 세운 벨져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해변이 보이는 호텔이나 별장에서 애인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려면 뭐가 됐든 빨리 끝내야 했다.
* * *
애인이 바쁘다. 일찍 오래서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해가 뜨고 나서야 집에 들어온 애인은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쓰러지듯이 고꾸라지는 애인을 받아 안자 눈밑에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서 입술에도 핏기가 없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저녁에 나폴리에서 돌아왔어야 하는 사람이 이 지경이 된 이유야 뻔하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벨져.... 나 진짜, 지금 안 자면 죽어....”
아무렴 연합에 무능하고 한심한 머저리들만 모여 있다고 해도 그렇지, 출장을 다녀온 사람을 또 부려먹을 정도로 손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서서 일을 도맡을 이유가 있는가. 벨져는 멍청하고 미련한 애인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이마를 짚고 끓어오르는 화를 삭혔다.
자신보다 일을, 그 잘난 연합을 우선시하는 사람에게 화가 났다. 이럴 거면 일찍 오라고 조르지를 말던가. 누구는 일 분 일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잠도 안 자고 기다렸는데 그동안 이 사내는 안 해도 될 일까지 하고, 이 꼴이 되어 돌아왔다.
벨져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졸고 있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루이스가 대번에 짜증을 내며 인상을 쓰는데, 밤새 기다린 것도 억울한 데다 저만 그를 기다린 것 같아 자존심이 확 상했다.
“손 치워.”
“하, 내가 네 애인인데! 일주일만에 만나서 엉덩이도 못 만지나?”
무심결에 큰 소리가 나왔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성질을 못 이기고 결국 화를 내고 만 벨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붉은 눈으로부터 시선을 피해버렸다. 망할 애인은 연합의 영웅님이셔서 할 일이 다망하고, 연애도 오래 해서 늘 저만 연연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차라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목소리를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사려 깊은 그가 정작 애인인 자신을 뒷전에 두는 게 벨져는 퍽 서운했다. 저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죽죽 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푸른 루이스가 마른세수를 하고 푹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한숨을 쉬어야 할 게 누군데.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도로 벨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안겨들었다.
“벨져....”
짜증을 안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벨져 홀든은 어딘가에 얽매일 사람도 아니고, 눈치를 볼 사람도 아니니 언제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맡은 일을 허투루 할 사람은 아니다. 보고 싶다고, 기다리겠다고 하는 말에 최선을 다해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온 사람은 한참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짜증을 내는 건 당연했다.
다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벨져의 기분을 풀어주고, 그를 헤아릴 정신과 체력이 없었다.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게 당연한데 내가 피곤하니 미안한 마음 전에 짜증이 먼저 날 정도다. 지금은 다투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눌러 참고, 뺨을 그의 어깨에 부비면서 애원하듯 매달렸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잘못한 건 자신이었다.
“나 진짜 졸려.... 제발, 응? 자고, 나 좀 자고 일어나서 하자. 일어나면 놀아줄게 응?”
“.......”
“한 번만 봐주라. 사랑해. 응? 나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벨져어....”
“.....하아.”
죽이니 살리니 해도, 벨져는 제게 약하다. 보석같이 예쁜 눈이 흔들리는 거 캐치한 루이스는 벨져의 뺨과 입술에 쪽쪽 뽀뽀하면서 강수를 뒀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않는 걸 봐선 슬슬 화가 풀리긴 하는데, 그래도 억울하고 서운한 건 여전해서 삐져있는 게 분명했다. 이 기분 아주 잘 알지.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벨져의 윗입술을 입술로 물었다 놓았다가 눈을 뜨며 속삭였다.
“대신 일어나면, 네가 해달라는 거 해줄게. 응?”
“...그 말, 꼭 지켜라.”
“약속.”
“...하아.”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자 벨져의 팔이 등을 안았다.
“나 좀 데려가줘...”
아직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이, 벨져는 루이스를 안아드는 대신 질질 끌고 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그래도 막상 얼굴을 보니 측은해서 이불을 덮어주고, 이불 위로 가슴을 토닥였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배시시 웃는 루이스가 얄미워져 철썩 때렸지만 그래도 좋다고 웃는 사람에게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제정신일 때도 이렇게 애교가 흘러 넘치면 적어도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벨져는 잠시 평소에도 허허실실 웃는 루이스를 상상했다가 냉큼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렇게 웃으며 안겨들고 애교를 부리는 건 제 앞이면 충분하다.
절대,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냉기를 풀풀 풍기는 싸늘한 영웅이어도, 제 앞에선 이렇게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벨져에겐 한참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조금 더, 확신을 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모든 선택지 앞에서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었으면 했다.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불편해 작게 한숨을 쉬자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실눈을 뜬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지간히 졸린지 초점이 흐린 눈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는 게 애틋해, 벨져는 가슴을 토닥이던 손을 멈췄다.
“벨져....”
“또 뭐냐”
“같이 자자.”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겨우 밀어 올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벨져가 잠시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오는 그 역시 어젯밤 내내 뜬 눈으로 지새웠는지 눈에 졸음과 피로가 가득했다.
“...하아. 이거 원, 애인이 아니라 보모라도 된 기분이군.”
“사랑해....”
조각같은 몸을 꼭 끌어안고,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벨져의 손이 뒤통수를 감싸고 머리 위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도 아랑곳않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의 몸에서 나는 샤워 코롱 냄새와 햇살보다 더 따뜻한 온기와 단단히 저를 끌어안은 팔에 안심하고 만다.
“벨져어....”
“잠꼬대 하지 말고 자라.”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는 비식비식 웃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3. (0) | 2016.11.20 |
---|---|
[루드루이] 02. (0) | 2016.11.20 |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루드루이] 01.
짐승을 주운 루이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을 썼을 땐, 낯선 공간에 있었다. 격통에 배를 움켜쥐자 까슬한 붕대가 손바닥에 닿았다. 통증에 눈을 질끈 감고 헐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 철제 침대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치료가 된 환부와, 낡고 허름한 집.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필요한 것만 잘 정돈된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주변을 면밀히 둘러보면 볼수록 낯선 공간에 대한 이질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다 할 위험은 느껴지지 않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배의 통증에 더불어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쨍하게 울리는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자신의 몸에는 왜 이렇게 흉터가 많고 이렇게 큰 부상을 입은 채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 것인가. 무엇이든 떠올려보려 해도 초조함에 두통만 심해질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꼭 기억에 검은 잉크를 부어놓은 것 같다.
그렇게 고통에 허덕이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몸을 지킬 수 잇을만한 것을 찾다가, 침대 옆에 있는 가위를 쥐고 도로 침대에 누워 자는 척 숨을 죽였다. 문고리와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 뒤에, 경첩이 삐그덕 거리며 문이 열렸다.
선이 가는 체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종이봉투를 주방에 내려놓고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호의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상과 허름한 집.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준 걸 보면 당장 자신을 해치진 않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죽일 생각을 하다 퍼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혼란스러워졌다. 왜,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당연하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고, 이렇게 부상을 입은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침대로 다가온 사람의 몸에선 낡은 종이와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도서관이나, 서류를 만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서늘한 손이 조심스레 이불을 걷었다가 다시 덮고는 멀어지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너무 낯설다. 어색하고 낯선, 경험해보지 못한 온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손길과 눈길에 덜컥 겁이 나면서, 가슴과 눈이 뜨거워졌다. 마치 이런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구는 자신이 무섭고, 눈을 떴을 때 펼쳐질 상황이 두려웠다. 또다시 쫓기게 되는 건 아닐까.
삽시간에 저를 덮치는 어둠에 손에 꽉 거머쥔 가위를 놓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는 것조차 결심이 필요했다. 눈을 뜨자마자 공황에 빠졌던 것과 너무 차이가 나면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쫓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안전하다는 확인이 더 우선이었다.
지금 이 남자도, 사주를 받고 잠시 저를 돌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어나면 다시 어딘가로 끌려가,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가위를 쥐고 눈을 떴다. 제게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모른다는 불안과,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려야한다는 판단 하에 다시 다가오길 기다리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노련한 사냥꾼은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법.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복부의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굉굉 울리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덮쳐왔다.
“큭...! 크허, 허억. 헉.”
“괜찮아요? 숨 쉬어요. 자, 괜찮으니까....”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부여잡았던 머리를 당겨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제 몸에 손을 대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의 품에 기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으면, 점차 고통이 잦아들며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낡은 종이 냄새와 비누 냄새. 살짝 감도는, 시원한 향. 지척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 소리. 그 사소한 것들에 술렁이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자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떨어졌다. 왠지 그 손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좀 괜찮습니까?”
“당신은....”
“아, 루이스. 그냥 루이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느낌이다. 잘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왠지 이 사람은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처가 꽤 깊었어요.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 날....”
“...기억 안 납니까?”
기억이라는 소리에, 다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고 그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은 누군지, 이 사람은 왜 자신을 도와주었으며 왜 자신은 이런 생각들만 하는 것인지, 혼란에 휩싸여 그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허억. 헉. 당신, 나를 압니까?”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묻자 자신을 루이스라고 밝힌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그 반응에, 낭패감과 함께 혀를 찼다. 방금 했던 것처럼 기대기라도 하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루이스는 다시 머리를 감싸지도 어깨를 내어주지도 않았다.
“당신, 글림듀에 쓰러져있었습니다. 기억 안 나요?”
“제길,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누군지도, 뭘 하던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일순 루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루이스가 몸을 돌려 책상에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데, 그 옆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눈치라 덩달아 긴장하다가도 문득 학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자란, 순수하고 선한 청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그 옆얼굴을 바라보는데 루이스가 한 쪽으로 기운 천칭을 그린 종이를 눈앞에 내밀었다.
“혹시 이런 문장 본 적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게 뭐죠?”
“그렇군요.”
예상을 벗어났는지 루이스가 종이를 책상 위에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건 순식간이다.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에 무심코 옷깃을 잡자 루이스가 돌아보며 제 손 위에 그의 손을 올렸다. 막연히 생각한 것과 달리 그의 손은 조금 차갑고 딱딱했지만 제 손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얼핏 서늘해보여도 제게 매달리는 사람은 내치질 못한다. 그리 매정한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전 집을 비울 때가 많아서.... 뭔가 생각나거나 그러면 말없이 그냥 나가도 됩니다. 일단 오트밀 죽을 만들긴 했는데.... 음. 있는 건 다 먹어도 돼요.”
“보통은 의심부터 하는 거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나요?”
침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수긍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데도 수상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루이스는 잠시 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해서 접근하는 거라면, 보통은 기억을 잃었다는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생각을 하지는 않죠.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그걸 알면서 이러는 겁니까?”
“네.”
“왜죠?”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 거 아닙니까?”
“덜컥 사람을 믿는 타입은 아닌데요. 굳이 따지자면 불신하는 쪽이라서.”
“행동과 말이 어긋나는데요.”
“당신, 일주일 넘게 누워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남을 속일 정신머리가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사경을 헤매다보면 무슨 일이 안 생기겠어요.”
루이스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겪어본 적 있다는 듯 덤덤했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 같아 슬쩍 기분이 상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기억이 없었고, 아무리 시큰둥하게 굴어도 그는 제 생명의 은인이었다.
당장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밖으로 나간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당장 내쫓겨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한 사람의 에게 조금 더 신세를 지는 게 괜히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낫다는 건 따져 볼 것도 없었다.
“그럼 조금만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트밀을 데워 오겠다며 일어났다. 오트밀 죽은 맛이 느껴지지 않지만 따뜻했고, 그는 다 먹는 걸 지켜본 뒤에 물 한 컵과 함께 침대 옆 책상 위에 있는 약을 종류 별로 알려주고는 차를 끓여 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찻잎 향이 가득 퍼지고, 루이스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차와 책. 어딘가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그. 이 모든 게 왠지, 기묘한 운명이 쓴 하나의 드라마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창밖은 어둑했고, 큰 상처를 입은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점차 약기운에 눈이 감기며 그렇게 다시 몽롱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 * *
또 얼마를 잤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숨소리마저 시끄러울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그 사이에 붕대가 바뀌었고, 집주인인 그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릎 밖을 소파 밖으로 뻗은 채로 고른 숨소리를 내는 그에게 발소리를 다가가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살이나 됐는지, 갓 스물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삶에 지친 자의 얼굴이다. 달빛조차 희미한 짙은 어둠 속. 천천히 홀린 것처럼 그의 목에 손을 뻗었다. 흰 피부는 서늘하고, 손끝에 닿는 맥박에 갑자기 두통이 찾아와 머리를 부여잡았다.
꾹 감은 눈꺼풀 아래로 비명과 피비린내, 살육의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체와, 차가운 피부, 그리고 손끝에서 사라져가던 생명의 울림. 그 모든 것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눈을 뜨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다시 그가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숨소리가 가슴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다지도 끔찍한 장면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대뜸 목을 쥔 것도 그렇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와 눈을 감고 한숨과 함께 낮은 신음을 내뱉자 루이스가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덮어주려 손을 뻗는데 돌연 그가 제 손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움찔 숨을 집어 삼켰지만 그냥 잠꼬대에 불과했는지 더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에도 루이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손은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애틋해 놓고 싶지가 않았다. 서늘한 목과 달리 그새 따뜻한 손을 마주잡자 잠시나마 그의 얼굴이 풀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호감을 느끼다니.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마음 어딘가에선 이 사람에게라면 그래도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2. (0) | 2016.11.20 |
---|---|
[벨져루이] Night and Day (0) | 2016.10.06 |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존잘님께서 자라고 던져주신 연성의 벨루가 넘 조아서...
루이스 파자마에 벨져 샤워가운 최고최고ㅠㅅㅠ)S2
일을 하다보면, 가끔은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는 법이다. 회사가 헌터의 폭로로 어수선한 사이 연합은 안타리우스를 쫓아 능력자와 불안한 세계 정세의 수호자가 되려 했고, 벨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조력자가 필요했다.
다이무스가, 가문이 알면 기겁할만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세상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인형실 끊기 작전 당시 연합이 입수한 안타리우스의 내부 자료와 벨져가 독자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교환하기로 하고, 은밀히 만날 약속을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날 기대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 건은 연합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고, 그러니 당연히 이 거래를 하러 오는 건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어느 정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에 유리하도록 거래를 이끌어 갈 인물이어야 했다.
아무리 연합 소속의 능력자가 많은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많겠는가. 그러니 회담장에 나타나는 건 연합의 수장 앤지 헌트, 수뇌부의 토니 리켓, 마지막으로 영웅 루이스 이 셋 중 하나가 될 게 뻔했다.
회담장에 도착한 루이스를 보고,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뒤에 줄줄이 따라온 것만 아니었다면, 진즉 소모적인 신경전을 건너뛰고 데이트를 했을 텐데. 딸려온 잔챙이들이 너무 많았다. 보는 눈이 많아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쫓기듯 자리를 피했는데 루이스는 여즉 감감 무소식이다.
저녁 식사 시간을 훨씬 지나,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벨져는 저도 모르게 엄지를 물었다.
“아, 정신 사납게 진짜!”
“닥쳐라. 이글.”
“그렇게 보고 싶으면 전화라도 해! 대체 그 좋은 머리는 뒀다 어디다 써?”
소파에 길게 누워 속 편하게 노닥거리던 이글을 쏘아보다 시선을 돌렸지만 녀석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원래 성질 같았으면 이미 목덜미를 잡아다 침대 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서로 일은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게 벨져의 발을 잡고 있었다.
따로 만날 땐 가급적이면 일 얘기는 꺼내지 않고, 서로를 우선하기로 했지만 이렇게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됐을 때는 아무래도 저를 우선해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또 싸우기라도 하면 그 때는 다음에 시간이 맞아 만나도 서먹하게 감정 소모만 하게 될 게 뻔했다.
“이글.”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나가라.”
“허, 그래. 간다, 가.”
늘어져있던 이글이 몸을 일으켰다. 연합 쪽에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출장을 보내면서 투 베드 룸을 예약한 것인지.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자 숙소까지 찾아왔는데 벨져를 맞은 건 술냄새를 풍기는 동생 녀석이었다.
처음엔 잘못 찾아왔나 싶어 얼굴을 보고 바로 문을 닫아버렸는데, 다시 열린 문틈으로 이글이 얄밉게 웃으며 방을 같이 쓴다고 할 때의 그 기분이란. 기껏 좋은 잠자리를 두고 이글과 방을 바꿨는데도 루이스는 그 빌어먹을 보고때문에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이래서야 방을 바꾸기 위해 용돈을 두둑하게 쥐어준 것도 다 쓸모없는 짓이 아니었나 싶어 머리를 짚는데 방을 나가던 이글이 문 앞에서 홱 돌아섰다.
“작은 형.”
“또 뭐냐.”
“메에롱.”
유치하고, 짜증나게 혀를 내민 이글이 잽싸게 문틈으로 사라지고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던 벨져는 주먹을 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막내 녀석은 도무지 철이 들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싹수가 글른 놈이긴 했지만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만났는데 기왕이면 같이 있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나. 저만 애를 태우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자괴감도 들었지만 벨져는 전화기를 드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방 안을 서성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수화기를 들었다.
“벨져?”
단조로운 기계음을 듣고 있는데 뒤에서 수화기를 거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얼떨떨한 듯 눈을 깜빡이며 서있는 사람은 벨져가 내내 기다린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네가 왜 여기 있어?”
“이글 녀석을 내쫓았다.”
양손에 짐을 들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뺨에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나 아직 일 해야 할 거 남았는데....”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미안해하며 입을 맞춰왔다. 스킨십을 꺼리는 편도, 아끼는 편도 아니지만 루이스가 이렇게 달라붙을 땐 미안하거나 저 내킬 때뿐이었기에 벨져는 좁힌 미간을 풀지 않았다.
“피곤할 텐데 먼저 자. 오래 걸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팔 가득 들고 있던 송수신기와 장비를 내보였다.
“이글을 그렇게 믿나?”
“어차피 코드는 나밖에 모르는데 뭐.”
괜한 투정에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뺨을 살짝 어루만지다 아쉬움만 잔뜩 남긴 채 떨어져 옆방으로 가버렸다. 일하는 중에는 터치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 말인즉슨 옆방에서 밤새도록 전보를 보내도 건드릴 수가 없다는 뜻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은 내내 독수공방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따로 방이 있는 객실에 침대가 둘인가 했더니 이런 용도였나 싶어 푹,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방을 바꾸자고 하지 않았어도 이글은 두 명이 쓸 공간을 혼자 썼을 것이다. 다 알고 시치미를 뗐다 이거지. 벨져는 한 마디 벙긋 하지 않고 낼름 용돈을 받아먹은 막내를 향한 짜증에 이를 물었다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렇게 된 이상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일념 하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굳게 닫힌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내심뿐이었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문을 연 루이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곤 한숨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자라니까.”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야 없지.”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잖아. 그냥 우연이라고.”
“우연이 곧 인연이고 운명이라는 말 못 들어봤나?”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니지 않아?”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쓰라는 거지?”
벨져는 수척해진 얼굴로 미안해하는 루이스에게 와인을 따라 건넸다. 잔을 들고 사양하는 법 없이 마시는 걸 봐선 그 역시 아쉽긴 한 모양이라 기다리는 동안 절절 끓던 짜증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미안. 그냥 먼저 자. 이거 끝나면 휴가 낼 테니까, 응?”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거슬리긴 하지만 제게 절절매는 루이스를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일단 씻고 나오지 그래. 새벽에라도 침대에 들어올 거라면.”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한숨을 폭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섹스는 못 하니까 이런 거라도 들어준다는, 그 속내야 안 봐도 뻔했다. 뻔하고, 미련하고, 사랑스럽다. 결국 이렇게 하나하나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벨져는 제 뜻대로 고분고분하게 욕실로 들어가는 루이스를 흡족하게 바라보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도로 소파에 앉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여전히 고양이 세수라도 하듯 후다닥 씻고 나온 루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벨져가 미리 준비해둔 파자마를 입은 루이스의 몸에선 따끈따끈한 김이 오르고, 흰 피부는 촉촉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그의 눈이 제게 향했을 때, 벨져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의 루이스에겐 '좋다'는 말밖에 못 할 거라 확신했다. 이런 몸을, 이런 눈을 하고 일이나 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벨져는 바로 제 연인에게 다가가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려 했다.
“미안. 다음에.”
손으로 입을 막은 루이스는 난처한 듯 웃으며 눈을 깜빡이다 냉큼 일하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망갈 곳을 주지 말고, 팔에 가뒀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이미 야속한 님은 도로 일을 하러 가버려서, 벨져는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문을 잠근 것도 아니니 그냥 들어가면, 들어가서 따뜻하고 촉촉한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출 수 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울컥 치밀어 이마를 짚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누군 지금 가운 차림으로 기다리는데, 그냥 한 번쯤 모른 척 넘어오면 어디가 덧나나. 야속함에 화까지 났다. 기껏 준비한 와인이며 촛불은 다 무용지물이 됐다.
서로의 영역은 존중해주기로 하는 게 아니었다. 루이스는 결코 좋은 연인이 아니다. 질투에, 기다림에 방치해 두고는 그 자신은 혼자 태연한 게, 자신을 우선해주지 않는 게 짜증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고작 그런 것에 연연하는 자신이다.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질투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고, 어설픈데다가 가끔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니 그 틈을 파고들어보려는 잔챙이가 꼬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잔챙이가 아니라 루이스 그 자신이다.
지금처럼, 저를 내버려두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네가 날 신경써주지 않는 게 짜증난다고 말하긴 자존심이 상한다. 왜 항상 자신만 아쉬운 상황이 되고, 져줘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벨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와인을 따랐다. 마음 같아선 그냥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잔뜩 풀이 죽어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른거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자 나오진 못하고 문틈 사이에 선 루이스가 죄인이라도 된 것 처럼 벨져의 눈치를 살폈다.
“벨져.... 피곤하니까 일찍 자는 게 어때.”
“하, 피곤할 일이 뭐가 있지?”
“역시 오지랖일까... 그렇지만 늦게 자면 안 좋으니까.”
시무룩해진 얼굴이 귀여워서 그만, 잠시 흔들렸던 벨져는 괜히 헛기침하며 다가가 뺨을 맞췄다. 문을 잡은 손을 잡아 끌어당기자 순순히 끌려온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보던 루이스의 턱을 잡아 슬며시 들어 올리자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떨리며 살포시 감기는 눈이 예뻐 그 눈꺼풀 위에 짧게 키스한 벨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금은 서늘해진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와 마주 안아오는 팔. 허여멀건 얼굴이 미안해 죽겠다는 듯 울상을 지으니 화를 내기도, 억지를 부리기도 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참아준다.
“한 시간 주지. 그 때까지 침대 안으로 안 들어오면 한동안은 볼 생각하지 마라.”
벨져는 축 늘어진 채 올려다보던 루이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졸리면 그냥 먼저 자.”
“얼른 마치기나 해.”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루이스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뽀뽀하고는 도로 문을 닫았다. 베개를 정리하고 침대를 붙여 놓은 벨져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애꿎은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려댔다. 누굴 기다리고, 얽매이고 이런 건 천성에 맞지 않는다.
그 무엇 하나 맞지 않는데, 자꾸만 벨져 홀든 답지 않은 일을 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 애가 타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미련하고 바보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
사랑. 그래,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조차 길을 잃을 것 같이 짙은 어둠이 내린 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연인은 돌아올 줄을 모르고 시간이 갈수록 제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기다려놓고 그냥 자버리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내 영영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고 루이스가 그 방의 전등을 껐다.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에 일어나자 루이스가 먼저 벨져의 품에 안겨들었다. 꽉 끌어안은 채 벨져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다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지는 그의 등에 손을 얹자 루이스의 숨이 벨져의 목덜미에 닿았다.
“원래는 내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 무리했거든. 우리 만난 지 오래 됐으니까.... 그래서 하고 있던 일까지 같이 하느라 그래. 미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랬어.”
입술이 천 위에서 움직이는 감촉과 함께 조근조근,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자상하고, 그 목소리가 내뱉는 말은 더 듣기 좋았다. 그냥 바로 이렇게 말했으면 속을 썩이며 원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여전히 야속하고 서운하긴 했지만 벨져의 입가엔 그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풀어져버려서 김이 샜다. 벨져는 내심 끌어안은 채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루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바로 제 뺨과 뺨을 부비다, 그것도 모자라 연거푸 입술을 맞추는 그의 살가운 스킨십에 벨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해명이 너무 늦었단 생각은 안 드나?”
“사랑해.”
“흥. 말로만.”
“미안하다니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허리를 쓸어내리자 루이스가 얼굴을 붉히며 벨져의 팔을 잡았다. 한결 깊어진,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눈빛을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뭐야. 이러려고 기다린 거야?”
“당연하지.”
파자마는 입기도 쉽지만 벗기기도 쉬운 옷이다. 툭, 툭 단추를 풀며 쇄골에 입술을 묻자 루이스가 움찔 몸을 떨며 벨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읏, 잠깐. 나, 나 내일도 흣.... 하아....”
“원래 옷 선물은 벗기려고 하는 거라고, 그런 소리 못 들어봤나?”
“하으, 으응. 잠, 힛...!”
벨져는 잘 빠진 허리를 쓸어내리며 금세 오똑 선 가슴을 입에 담았다. 워낙에도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지만, 약한 곳쯤은 이미 훤했다. 골반에서부터 손끝을 미끄러트리며 바지 안으로 손을 넣자 눈을 감은 루이스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졸리면 둔해진다던데.”
짓궂게 웃으며 그의 중심을 잡고 주물거리자 루이스가 눈을 흘겼다.
“하고 나면 더 잘 잘 수 있을 거다.”
“안 해도 잘 잘 수 있거든?”
씨도 안 먹히는 허세에 벨져는 코웃음을 치고 루이스를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가 손을 뻗어 벨져의 목에 그의 팔을 두르며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열린다. 마침내 달디 단 인내의 결실이 맺히는 순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Night and Day (0) | 2016.10.06 |
---|---|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