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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Bittersweet
*
하루 종일 매달린 보고서를 열다섯 번 째 고치고, '처음이 낫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란. 릭은 부질없이 넘어가는 초침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달고 살고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작성한 보고서와 시계를 다시 한 번 번갈아 본 릭은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고 기다리길 얼마, 신호음 대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트와일라잇 서점입니다.”
“루이스. 나요.”
'아, 릭. 아직 회사인가요?'
“그게.... 야근해야 할 것 같소....”
'고생이 많네요.'
“그대는?”
'잠깐 연합에 들렀다가 들어갈 겁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녁 챙겨 드시고요.'
“알겠소. 그대도 챙겨 드시오. 참, 괜히 기다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끊겠소.”
'네. 이따 봐요.'
릭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누군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은 고된 하루에 위안이 된다. 그와의 시차는 다섯 시간 남짓. 시간을 어림잡아본 릭은 루이스가 잠들 시간이 다 되도록 서점에 있으며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가를 쓸었다.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릭의 책상 위에 김이 오르는 커피 잔 하나가 놓였다. 머그잔을 들고 있는 하얀 손과 붉은 손톱을 본 릭은 깜짝 놀라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놀라요? 뭐 잘못하다 걸린 사람처럼?”
“인기척을 못 느꼈소. 퇴근한다지 않았소?”
“막 가려던 참이에요. 열다섯 번 퇴짜 맞고 원점으로 돌아간 가여운 과장님께 커피 한 잔만 주고 말이죠.”
굽이치는 금발이 매혹적인 그녀가 시원하게 웃으며 릭의 책상에 살짝 몸을 기댔다. 무슨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것처럼 오묘한 미소를 짓는데, 왠지 모를 초조함에 릭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협상의 달인이자 노련한 로비스트다.
그녀 앞에서 비밀이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다. 애초에 감추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릭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그녀라고 알 리 없다는 생각은 그 다음이었다.
“흠. 숨겨둔 애인이라도 돼요?”
“애인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가 남자라는 사실은 둘째치고서라도, 연합의 영웅이 애인이라니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추측이다. 아무리 명석한 그녀라도 이번만큼은 너무 넘겨짚었다. 릭은 아직도 소년 같은 모습이 남아있는 청년을 떠올리며 얇게 웃었다. 그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동거인일 뿐이다. 딱히 틀린 표현도 아니라 그렇게 설명하려는데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할 것 없다는 제스처에 안심하면서도, 붉게 칠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에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렇군요. 표정이나 말투가 꼭 애인한테 말하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나이 차가 조금 나니까. 나도 모르게 동생 대하듯 했나 보군.”
“뭘요,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셨는걸요. 그래서 애인인가보다 했죠.”
“하하, 그야 퇴근하면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퇴근만한 게 없죠.”
“그럼. 기획안을 내던지는 상사보다야 왔냐고 맞아주는 사람이 백 배 낫지.”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그녀의 책상에서 가방을 챙겼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무거운 서류 가방 대신 가벼운 핸드백과 공들인 화장이 그녀의 자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바람에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신세가 더 처량해진 것은 덤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고맙소. 커피 잘 마시겠소.”
앉은 자리에서 그녀를 배웅한 릭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허리에 나쁜 자세라는 것은 알지만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했다. 어쩌면 오늘 내내 일진이 안 좋은 것도 그 영향인지 모른다.
릭이 의외의 인물과 예기치 않은 동거를 시작하게 된 건 지난주부터다. 액자와 시바 포를 찾아다니다 벽에 막힐 때면 릭은 지하연합의 토니 리켓을 찾았다. 그의 뛰어난 지략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가볍게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릭의 이야기를 들은 토니는 생각 끝에 후보지 몇을 골라주었고, 릭은 담소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토니, 이번 분기 생산품 보급 리스트.... 아. 안녕하세요.”
“아, 여기 두게.”
침착하고 의연한 결정사답게 루이스는 놀라는 기색 없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참,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요즘 어디서 지내고 있나. 여전히 여관을 전전하는 중인가?”
“뭐, 여기저기서 해결합니다.”
“그럼 우리 영웅님과 함께 지내는 건 어떤가. 이 친구, 보기보다 외로움을 타서 말이야.”
“토니. 유언비어 유포는 그쯤 하세요.”
“나쁜 제안도 아니지 않나. 자네야 늘 집을 비우기 일쑤고, 두 사람의 생활시간이 겹칠 일도 드물 테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릭은 당황했다. 루이스는 토니에게 쓸데없는 짓 말라는 투로 말하긴 했지만 언제나와 같은 포커페이스라 기분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음. 나는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좋소.”
릭은 사양하는 대신 용기를 냈다. 모처럼 하는 자기주장이라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지만, 놓치면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토니의 꾐에도 끄떡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토니는 잠시 릭을 보다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자네라도 그 집은 좀 크지 않나. 안 그래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다른 사람 눈도 있고. 금전적인 문제라면 내 사비로 보태주지.”
“누구가 들으면 엄청 서운해 하겠네요.”
“그야 있는 집을 두고 떼를 쓰는 거니까. 그럼 승낙했으니 바로 들어가면 되겠군. 릭. 잘 부탁하네.”
릭이 '토니 리켓의 사비'라는 말에 잠시 망설이는 사이 토니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황급히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릭이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이자 토니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과 눈빛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시감과 위화감이 들었지만 릭의 신경은 온통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하여 릭 톰슨은 루이스와 함께 살게 되었다. 잠시 신세를 지는 것이지만 늘 멀찍이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던 사람과 산다는 기대감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연합에서 제공했다는 집은 토니의 말대로 혼자 살기엔 넓었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 가구며 집기는 손을 탄 흔적 없이 깨끗했다. 루이스는 주방과 화장실을 소개하고 빈 방을 내주었다. 그가 건네는 여벌 열쇠를 받아들 때의 설렘이란.
차가운 열쇠와 그보다는 조금 덜 차가운 손이 손바닥을 스쳤을 때, 릭은 첫사랑에게 고백을 할 때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릭은 루이스가 방문을 닫자마자 어린 애처럼 침대 위를 굴렀다. 쑥스러움과 기대감이 차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당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릭의 설렘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시차가 있다 보니 릭이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면 루이스는 이미 퇴근한 뒤라 집에 있어야 했는데, 좀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방에 들어가 쉬는 것도 아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루이스를 볼 수 없었다.
루이스는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부러 저를 피하는 게 아닐까, 사실은 불편했던 걸까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혼자선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쓸쓸한 적막만이 반겨주는 넓은 집에서 릭은 루이스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사흘째 되던 날 밤, 릭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숙연해졌다.
루이스의 방은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밖과 안이 다를 바가 없다. 여행자의 짐이래봐야 생필품 조금과 약간의 옷가지, 현금 정도가 끝인데 오히려 릭 자신의 방이 생활감이 넘칠 정도였다.
외롭고 쓸쓸한 방은 영웅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약하고 아픈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영웅이라지만 그 역시 인간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그 수많은 사람의 기대를 혼자 짊어지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마침내 릭은 토니의 말뜻과 표정을 모두 이해했다. 그 날 정 많은 천재의 표정에서 느낀 기시감과 위화감의 정체도, 체념한 것 같았던 루이스의 말도 전부. 릭은 그의 미소와 표정이 인형실 끊기 작전을 부탁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들떠있었으면 '잘 부탁한다'는 말에서 느낀 위화감마저 지나쳤을까. 스스로가 한심해진 릭은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시간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타깝고, 슬프고, 아파서 당장 그를 마주해도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혼자 들떴다가 실망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자신과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이 위태로운 남자를 잡아줘야 한다. 릭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토니는 자신이 이렇게 나올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곤란하고 미안한 일을 떠맡겨 미안해한 것이리라. 릭은 진심으로 루이스를 잡고 싶었다.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이 이것인 것만 같았다.
그 날부터 릭은 언제 올지 모르는 루이스를 기다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루이스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서 그를 기다리던 릭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동안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루이스는 릭이 함께 산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단 눈치였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릭은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투정 부릴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릭?'
'피곤한 줄은 알지만... 기다린 성의를 봐서 잠깐 얘기하지 않겠소?'
그리 길지 않은 대화 끝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라기엔 거의 일방적으로 릭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루이스는 순순히 릭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 그동안 무심하게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감인 것 같았지만 릭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제는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 한 걸 그가 깨워줘서 아슬아슬하게 출근했고, 오늘은 함께 아침을 먹고 나왔다. 릭은 저를 위해 까치집이 된 머리에 덜 깬 눈으로 커피를 내리던 루이스를 떠올리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 같았으면 그 머리를 한 번은 헝클어트려 봤을 텐데. 후드 속에 얌전히 숨어있기 마련인 머리카락과 동그란 뒤통수를 차례로 머릿속에 그려보던 릭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는 광대를 깨닫고 멋쩍어져 헛기침했다. 어차피 사무실엔 자신밖에 없지만 괜히 부끄러워져 주변을 둘러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온기에 문득 숨겨둔 애인이냐던 말이 떠올라 더 부끄러워진 건 덤이다. 릭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치고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돌아가 그에게 뭐라도 먹이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업무를 마치자마자 게이트를 탄 릭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눈을 깜빡였다. 잘 차린 한 상과 먹음직스러운 냄새,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볼을 꼬집었을 뻔 했다.
“루이스? 이게 다 뭐요...?”
“음. 야근하느라 저녁이 부실했을 것 같아서요. 제가 만든 건 아니고 사온 거니까 겁먹지 않으셔도....”
루이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하는 사이 릭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올라갔다. 기쁨과 쑥스러움에 작게 헛기침한 릭은 말끝을 늘리는 루이스를 향해 재빨리 손사래 쳤다.
“아니, 아니오! 그래서가 아니라, 그게. 예상치 못해서....”
“그동안 제가 그리 좋은 룸메이트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생각난 김에 사온 겁니다.”
“고맙소. 훌륭하군. 생일상이라도 받은 기분이오.”
진심을 담아 웃자 루이스가 마음을 놓은 듯 슬며시 웃었다. 엷은 미소가 근사해 살짝 시선을 피하자 루이스가 손을 씻고 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릭은 냉큼 방에 서류가방과 재킷을 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짝 뜨거워진 뺨에 찬 물을 끼얹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기쁜 티를 감추지 못하는 자신이 비쳤다. 정말 이렇게 티가 날 수도 없을 정도다.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마음에 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가자 먼저 앉아있던 루이스가 자리를 권했다. 따뜻한 수프에 빵, 거기에 미국식 챱스테이크와 샐러드 약간. 사온 음식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제게 맞춰 세심하게 고른 티가 났다.
“음.... 좀 어떠세요. 괜찮나요?”
“물론이오!”
격양된 나머지 나온 큰 목소리에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늘 지쳐보이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예쁘다고 생각한 순간, 애써 가라앉힌 뺨에 다시 열이 번졌다.
“다행이네요.”
“루이스. 당신은 정말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오.”
그러니까, 생각을 거치지 않고 이런 말이 나온 건 순전히 그 화사한 미소 탓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해버린 말에 한 번,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빛에 두 번 당황한 릭은 숨을 집어삼키며 쥐고 있던 포크를 움켜쥐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괜찮습니다. 그냥 좀 의외였을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오만....”
“제가 릭 씨보다 어린 것도 사실이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군 것도 사실이죠.”
“...지금 놀리는 거요?”
그 말을 웃으며 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밤잠을 못 이룰 뻔 했다. 릭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웃으며 빵을 잘라 건넸다. 진중하고 침착한 줄만 알았는데 또 은근히 여우같은 면이 있다. 조금 억울했지만 먼저 실수를 한 건 자신이었기에 릭은 루이스가 건넨 빵을 받아 입에 넣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원래 영국식 농담이 좀 그렇거든요.”
“앞으론 미국식으로 부탁하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놀리는 게 재밌는지, 루이스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 한 끼에 이렇게 기쁠 건가 싶으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미소가 조금이라도 덜 예쁘고 조금만 더 얄미웠다면 상대를 하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나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릭은 삐진 척 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고기와 빵을 입 안 가득 넣고 씹자 맞은편에서 루이스가 물을 따라 건넸다. 그래도 풀리지 않은 것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자 루이스가 포크를 내려놓고 그의 턱을 괬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해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건 식탁 하나가 고작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은 둘째 치고 연하의 남성이 저를 귀여워하면 불쾌한 게 당연하건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결국 릭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시선에 못이긴 척 고개를 까딱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어찌나 가슴이 세게 뛰는지, 릭은 루이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대신 다시 식사를 시작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릭은 심장을 삼키는 것 같은 심정으로 식사를 마치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직도 먹을 게 남았소?”
“밥은 아니고, 간식이요. 후식으론 좀 무거울 것 같지만.”
의자를 끄는 소리도 없이 일어난 루이스가 낮은 높이의 종이 박스를 내밀었다. 상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단내가 코를 간질이고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선물이오?”
“이 근방엔 미국식 도넛이 없어서. 이 정도로 봐주세요.”
릭은 가지런히 늘어선 머핀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쑥스러운지 머핀 상자를 도로 닫아 릭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잘 먹겠소.”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걱정 마오. 그래도 영국 티푸드는 정평이 나있지 않소.”
“머핀을 티푸드에 넣는다면요?”
“하하, 그럼 지금 한 번 먹어볼까.”
릭은 망설임 없이 제일 앞줄에 있는 머핀을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 설탕의 단 맛과 풍부한 버터 맛이 혀끝을 감돌고 블루베리가 씹혔다. 제 얼굴만 보고 있는 루이스를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스가 안심한 듯 웃었다.
“다행이네요.”
“음. 덩말 맛있소!”
“천천히 드세요. 커피는 많이 마셨을 것 같고... 차라도 드릴까요?”
“아니, 됐소. 정말 괜찮소. 내가 너무 부려먹는 것 같군.”
“하하. 그럴 리가요.”
루이스가 커피나 차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 차가운 물을 쭉 들이켜고 나자 그릇을 치우던 루이스가 검지로 그의 입술 옆을 톡톡 두드렸다. 얇게 뜬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그 눈빛이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릭. 여기. 묻었어요.”
순간 넋을 잃었던 릭은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손등을 긁고 입으로 들어온 설탕과자는 까슬했다. 엉기다 만 설탕 입자가 피부를 긁은 그 간지러운 감각이 아무리 입술을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달고, 끈적하고, 까슬한 감촉과 루이스.
릭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손으로 입을 덮었다. 왜 이러는지 정말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너무 기뻐서라고 하기엔 혼란스럽고, 당황해서라고 하기엔 반응이 너무 과하다. 릭은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한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 붙였다. 루이스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릭은 이런 거라도 해야지 안 쫓겨나지 않겠냐고 능청을 떨었다.
결국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그래도 성인 남성 둘이 서기엔 좁은 싱크대라 릭과 루이스는 서로의 팔이 맞닿도록 딱 붙어 서야 했다. 릭은 루이스가 다 닦은 그릇을 건네면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찬장에 넣었다. 키 차이 때문에 루이스가 그릇을 건넬 때면 릭을 올려다 봐야했는데, 그때마다 릭은 웃지 않기 위해 입 안을 물었다.
가지고 있던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모습 하나가 죄다 귀여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이 없는데,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길고 목이 희었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곁눈질하게 되는 얼굴이다. 속눈썹이 길다는 생각을 하는데 루이스가 고개를 들며 눈이 마주쳤다.
“자. 이게 끝이네요.”
“아, 그렇군. 시간 가는 줄도 몰랐소.”
“얼른 씻고 쉬시죠.”
“그대야말로. 시간이 늦었지 않소.”
“전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그럼 내가 데려다주겠소.”
“괜찮습니다. 이건 제 일이니까요.”
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선긋기가 아쉬우면서도 늦은 시간까지 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다면.
“조심히 돌아오시오.”
“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루이스는 늘 입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문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훈훈하게 데워진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아 릭은 홀로 거실에 남는 대신 방으로 들어왔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아홉 시 반을 조금 넘어가고 있지만 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열 두 시가 훌쩍 넘었다.
외롭고 쓸쓸해졌지만 그가 가고 나니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릭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가볍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답답하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는 걸 떠올리면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아무렴 그보다 힘들까. 릭은 바로 누워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사르르 눈이 녹는 것처럼 번지는 눈웃음과 웃음소리가 깜깜한 적막 속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싱크대에 기대어 입술을 두드리던 그. 그 모습을 떠올린 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갸름한 턱과 긴 속눈썹, 선이 고운 남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진 릭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내 땅 속에 잠들어있던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아해주시는 모든 분을 위해 써봤습니다 달콤쌉쌀한 어른들의 연애 조아요 같이 좋아해주세요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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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유리온실에서 이어집니다.
스물. 루이스는 막연히 제 나이를 셌다. 많다고 하면 많을 수도, 적다고 하면 적을 수도 있는 숫자다. 의지할 곳 없는 거리의 고아치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남는 아이는 별로 없으니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운이 좋았다. 루이스는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표현했다. 어느 해 겨울, 동사 혹은 아사를 목전에 뒀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수도사 하나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친절한 수도사는 혼자 지내기 적적했다며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책을 펴놓고 창밖을 내다보던 루이스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책을 덮었다. 제멋대로에, 더럽게 까다로운 도련님이 마님과 돌아온 모양이었다. 벨져가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벨져를 돌보는 것은 루이스의 몫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라곤 지금처럼 마님이 벨져와 정원을 산책 할 때뿐으로, 보통 이십 분 정도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루이스는 짧은 휴식을 마치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벨져가 돌아오면 주려고 차게 식혀놓은 레몬티를 찾는데 무언가 후다닥 움직였다. 몰라보려야 몰라 볼 수 없는 은발이 툭 튀어나와있는데, 그 딴에는 제법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걸 모른 척 해, 말어. 눈을 가늘게 뜨고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보며 냉장고를 연 루이스는 반쯤 비어버린 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떡하니 놓여있는 물기 어린 컵. 숫제 뭘 훔쳐 먹다 걸린 반응이라고 생각했더니, 정말일 줄이야.
루이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대충 짚이는 곳이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오시죠.”
“으아, 봤어?”
“다 보였는데요.”
“거 눈 되게 좋네.”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지금까지 다들 그냥 눈 감아 준 거 아닙니까.”
“헤헤. 너, 제법인데?”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장난기 가득한 눈을 빛낸 그가 식탁 아래서 나오다 머리를 찧고는 엄살을 부렸다. 막내다운 응석이었으나 루이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비워놓은 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곧 도련님이 돌아오시는데요.”
“나도 도련님이거든!”
“아픈 도련님은 아니죠.”
“뭐, 그건 그렇지만.”
“제 도련님도 아니시고요.”
“우와, 방금 그거 엄청 위험하게 들리는데?”
루이스는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막내 도련님을 내려다봤다. 매사가 장난인 양 가볍게 굴고 있지만 본능적인 감이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리 출신답게, 살아남기 위해 익힌 눈치와 감각이다. 아닌 척 철없는 막내의 가면을 쓴 채 제 잇속을 챙기는 영악함은 루이스가 잘 아는 것이었다.
귀족가 막내 도련님치고는 의외지만, 그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오래 살아남으려면 저와 상관없는 문제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차피 계약제지만요.”
“하하하, 작은형 하인이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도망가는데 뭘. 며칠 째야?”
대체 얼마나 하인을 갈아치웠는지 날짜를 세는 단위도 이 모양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속으로 오늘의 날짜와 처음 이 저택에 온 날을 셌다.
“한 달이 조금 넘었네요.”
“뭐? 한 달? 흐응. 보기보다 인내심이 훌륭한가봐?”
“식사 시간도 못 참고 주방에 숨어드시는 도련님보다야 낫죠.”
하인치고 다소 건방진 발언이었지만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저택의 막내 도련님은 그마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의지랄 것도 없었고, 이 댁의 말썽꾸리기에 대해 들은 게 있었기에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았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벨져 홀든의 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하인이었다. 지금 벨져의 기분을 잘 맞추고 있는 걸 생각하면 겨우 막내 도련님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해고되진 않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조금 괴롭힘을 받을지는 몰라도, 반응을 보고 있으면 정말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이 시답잖은 대화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루이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으므로, 루이스는 그가 마음껏 즐거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조롱에 익숙한 몸이다. 고작 재밌다고 웃는데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작은형은 어때?”
다짜고짜 묻는 게 너무 직설적이라, 루이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질문은 같이 지내기에 벨져 홀든이 어떠냐는 뜻으로도, 벨져 홀든의 상태가 어떠냐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루이스의 감은 전자를 가리켰으나 처음 본 사이에 고용주, 그것도 까다롭고 예민하기로 유명한 벨져 홀든과 사이가 어떠냐는 얘기는 하인으로서 대답하기 난처한 것이었다. 루이스는 가장 무난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오래 보지 않았던 가족이다. '네가 보기에 우리 작은형은 어떤 사람이야?' 보다는 형제의 상태가 어떤지 묻는 게 당연했다.
“도련님이야 늘 그러시죠.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져서....”
“잠깐, 나한테 몸이 어떠하네 상태가 좋네 그런 건 설명할 필요 없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홀든이고, 벨져보단 어려. 그러니 난 태어난 순간부터 벨져를 본 거라구. 나한테 내 작은형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필욘 없어. 그리고, 너도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진 않을 거잖아?”
말투는 여전히 장난스럽지만 그 안에 든 말은 홀든이 자랑하는 검만큼 날카롭다. 식탁을 짚고 빙긋 웃은 그의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웃고 있지만 수가 틀리면 언제든 제 목을 꺾어버릴 것처럼 흉흉하다. 벨져보다도 어리니 저보다 어린 것은 당연한데, 홀든 가의 막내는 '홀든'이 원래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미소 끝에 이글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장난스러운 제스처의 의미는 항복이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롭고 가벼웠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에 루이스는 '말썽꾸러기 막내'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했다. 약자에겐 약자 나름의 방식이 있다. 루이스는 그저 이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루이스가 침착해진 것과 반대로, 탐색하듯 루이스를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잠시 웃음을 참는가 싶더니 결국 폭소를 터트렸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루이스는 굳이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웃는 바람에 한 번 뒤로 넘어가기까지 하면서, 배를 잡고 눈을 훔친 이글 홀든이 루이스를 마주했다. 겨우 몇 분, 혹은 몇 십 초를 보냈을 뿐인데 무거운 공기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너무 그러지 마. 해칠 생각 없다고. 요즘 날카롭지? 그럴 거야. 곧 어머니 생신이고, 그날만큼은 아버지가 큰 파티를 열거든.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그 때라도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댁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병신은 아니라고 말이야. 덕분에 나는 올해도 작은형을 위한 희생양이 될 참이고.”
저택이 떠들썩하고 벨져가 날카로운 건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걸 제게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루이스는 오래 있지도 않을 소모품에 불과했다. 애초에 시중이나 드는 하인에게 집안사정을 말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뭡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하인을 이용해 친형제를 해치려는 게 아닌 이상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낀 위기감. 루이스는 벨져와 닮은, 그러나 전혀 다른 빛을 띤 눈을 마주했다.
“오, 예리한데? 한 달 지났다고 했나? 그럼 적어도 벨져 마음에 들었다는 거네.”
이글은 이런 취향인 줄 몰랐는데 말이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 혼잣말이 다 들린다는 거지만 루이스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내내 장난스럽던 그의 눈빛이 달라진 탓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더 이상 놀잇감이 되어주기 싫거든. 네가 해줄 일은 아주 쉬워. 독을 타라거나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말만 해주면 돼. 없는 애길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형한테 날 만났다고만 해. 아, 물론 내가 시켰다는 말은 말고. 어때? 이 말만 전해주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기는 거야. 까칠한 도련님 모시면서 설설 기는 종노릇 그만 두고, 내 집 마련해서 행복하게. 어때? 끌리지 않아? 자, 이건 선금.”
이글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루이스에게 던졌다. 꽤 묵직한 주머니를 열자 노란 빛이 루이스를 맞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금화일 것이다. 그것도 순금. 생전 가져본 적 없는 금화를 손에 들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진짜 금으로 된 금화라구. 일이 잘 되면 똑같은 무게로 하나를 더 줄게. 어떻게 할래?”
루이스는 말없이 무거운 주머니를 챙겼다. 뜻하는 바를 이룬 이글이 씩 웃으며 다가와 루이스의 어깨 툭툭 두드렸다.
“그럼 잘 부탁해.”
얼굴이 가까운 거리에서, 이글이 한 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고개를 까딱였다. 루이스는 잠시 이글의 행동을 곱씹는 듯 가만히 서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모두를 창 너머에서 지켜본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는 새 꽉 쥔 주먹이 떨렸다. 손톱이 마른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한 번 쥔 주먹을 풀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빨라지고 거세진 걸음에 매일 반질반질하게 닦는 목재 계단이 쿵쿵 울렸다.
온 저택이 다 들으라는 듯 발을 굴러 방에 도착한 벨져는 방금 산책에서 돌아온 것처럼 식식거렸다. 큰 소리로 진즉 나와 저를 맞이했어야 하는 녀석을 부르려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갛고 순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차가운 레몬티를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온 루이스가 능숙하게 방문을 닫았다. 벨져의 매서운 눈빛에도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양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차를 따랐다. 루이스가 공손히 내민 잔이 바닥을 굴렀다. 유리가 깨져 부서지고 차가 양모 러그를 적셨으나 루이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신 깨진 유리조각을 한 번 바라보고, 작게 한숨 비슷한 것을 삼켰다.
“......다른 걸로 바꿔와.”
“위험하니까 도련님은 잠깐 앉아 계세요.”
루이스는 능숙하게 러그 위에 있는 의자를 옮기고 유리조각 위에 러그를 덮어놓고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벨져 홀든은 긴 숨을 토하며 침대 앞 디반에 앉았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하녀 하나가 들어와 러그와 유리조각을 치웠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제 할 일을 마친 하녀가 나가고, 벨져는 머리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벨져의 숨이 가라앉을 즘 다시 문이 열렸다. 루이스는 얼음을 띄운 컵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벨져는 노란 꽃잎 하나가 떠다니는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루이스가 쥐어준 그대로 들고만 있었다.
곧 벨져의 발치에 장미 꽃잎이 담긴 도자기 대야가 놓였다. 루이스가 소매를 걷고 김이 오르는 물을 붓더니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고 주전자에 담아온 물을 더 부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루이스의 물기어린 손이 벨져의 구두와 양말을 벗겼다.
물 온도를 재던 손은 딱 좋을 정도로 따뜻했고, 하얀 발을 만지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했다. 트집 잡을 곳 하나 없이 도련님의 발을 씻긴 루이스가 한 쪽 무릎을 세웠다. 무릎 위에 수건을 올리고 벨져의 발을 그 위에 올려 물기를 닦았다. 발가락 사이로 수건과 손가락이 파고들고, 꼼꼼히 주무르고 마사지 한 뒤에 빠져나간다.
고작 발을 닦는 것뿐인데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 번 맡은 일은 허투루 하는 법 없는 충직한 하인. 벨져 홀든을 위해 손을 데우고, 물의 온도를 맞추고, 발을 주무르는 루이스.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발에 키스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벨져는 얌전히 내리깐 눈과 그 위에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제 발등에 키스하는 루이스를 겹쳐 보다 동그란 정수리로 시선을 올렸다. 꽉 막혀있던 숨을, 들리지 않게 토해냈다. 속단하긴 이르다. 출신이 미천해 당장은 돈에 혹했을지 몰라도 주인을 저버리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적어도 아직은.
생각이 떠다니는 사이 루이스는 다 닦은 발을 다른 수건 위에 올려두고 물에 잠겨있던 발을 꺼내 방금 한 행동을 반복했다. 발을 온전히 내맡긴 채 벨져는 루이스의 동그란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상상을 했다. 머리에 손을 얹고, 퍼석하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귓바퀴를 어루만지는 상상을 끊은 건 루이스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얄팍한 기대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스가 운을 뗐다. 이불 위에 올려놓은 벨져의 손이 부드러운 천을 움켜쥐었다. 잘 개켜놓은 천이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도련님의 동생 분을요.”
벨져의 발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루이스가 말을 이었다. 어떤 기색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안한했다. '오늘은 날씨가 궂네요.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돈도 주더군요. 주머니 가득 채운 금화로.”
더 참지 못하고, 벨져는 제 발을 마사지하던 루이스의 가슴팍을 찼다. 루이스가 형편없이 뒤로 나동그라졌으나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조차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했다.
“지금 날 팔아 넘겼단 소릴 하는 건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돈 몇 푼이라뇨. 저 정도 금을 제가 살면서 만져볼 일이나 있겠어요. 뭐, 상관없어요. 저 말고도 거기 또 누가 있었으니 어차피 새어나가게 될 텐데.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보자보자 하니 아주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파행을 당연하다는 듯 입에 담는 하인이라니, 당장 채찍질을 해 내쫓아도 할 말이 없다. 기가 막힌 나머지 말문이 막힌 벨져는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난 루이스가 엉덩이를 털었다.
“쌓인 게 많았나봐요. 벨져는 고약한 심술쟁이에, 성격도 더러운데다 꼴같잖은 거드름이나 피우고 다니는 멍청이라고 하더라구요.”
“뭐? 이글은 그런 말까진....!”
아차. 홧김에 반박하던 벨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버렸는지 깨닫고 말을 멈췄다. 피식, 엷은 소리와 함께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벨져는 그동안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얇게 휜 붉은 눈과 슬며시 올라간 입매.
“저도 충성을 시험한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하지 않겠어요?”
루이스는 답지 않게 엷은 미소와 함께 노래하듯 말했다. 당했다. 당혹감과 함께 빠르게 돌아가는 이성이 벨져 홀든의 패배를 고지했다. 졌다. 완벽한 패배다. 벨져는 뺨과 목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맹하고 우직하게 일만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정도면 제법 얄밉고 영악한 하인이 아닌가. 물론 진짜 얄밉고 영악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 알고 있었나?”
“네. 모를 수가 없었죠. 알려주던걸요. 손가락으로 당신이 있는 곳을 열심히 가리키더라구요. 친절히도.”
“칫, 이글....”
벨져는 자신의 시야의 사각에서 이글의 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쩐지 녀석 치고 시킨 대로 잘 한다 했다. 녀석을 너무 믿은 것이 제 패착이다. 하물며 제가 놓은 수에 자신이 걸려들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치사하게 시험하는 것보다는 낫죠. 그쪽은 그래도 형을 도와준 거잖아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만 툭 던지고, 루이스는 다시 한 무릎을 꿇고 젖은 수건을 주웠다. 루이스가 대야를 치우는 동안 벨져는 평생 몇 번 맛본 적 없는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웃고 있을 이글의 얼굴이 그려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의기양양해진 루이스가 가련한 패배자를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제길. 다 알면서 왜...!”
“제가 말해야 했나요?”
원망이 가득한 말에 돌아온 대답이 매정할 정도로 침착해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진한 굴욕과 패배감에 끓는 화를 내보내는 벨져와 달리 루이스는 여전했다. 그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하고 화가 나, 벨져는 크게 소리 쳤다.
“그게 무슨!”
“저는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죠.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 눈치도 빠르고, 예민하고. 뭐 다른 게 있나보다 하고....”
“뭐?”
“...모르셨어요?”
엉뚱한 대답에 벨져는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루이스는 그 자신이 오히려 당황했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벨져의 머릿속에서 내내 맞춰지지 않았던,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던 답답함의 퍼즐 조각이 나타났다.
“드문 일이네요. 그것도 몰라보시고. 평소엔 셜록 홈즈 저리가라시면서. 설마 모르실 거라곤 생각 못했죠.”
벨져 홀든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모든 정황을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장난에 어울려준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루이스의 그 짜증날 정도로 무심한 태도도 말이 된다. 멀쩡히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고 시험한 주인에게 서운해 하고 따져 묻지 않는 것만 해도 그렇다.
모든 것은 벨져 홀든이 이 모두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벨져 홀든은 루이스에게 그런 존재다. 그 별 거 아닌 인정을, 얼마나 바라 마지않았던가. 잠시 잊었을지 몰라도 벨져 홀든은 원래 대단한 사람이다. 격의 차이와 품위, 모두가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
방금 전까지 화를 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뿌듯해진 벨져는 루이스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뭐,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도 깜빡 속았을 테니까 기분 푸세요. 이건 추가 수당으로 칠 테니까.”
“흥. 말은 잘 하는군. 다음엔 이렇게 끝나진 않을 거다.”
“또 시험하시면 그땐 그만 두죠. 이거랑 지금까지 일한 거면 십 년은 거뜬할 텐데.”
“윽, 지금 해보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조금만 봐주면 바로 기어오르는 게 아무래도 하인 길을 잘못 들인 것 같다. 겁을 먹지 않고 옆에 붙어있는 건 칭찬할 만하지만 역시 이래서 하인으로 부리기엔 곤란하다. 벨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제 기분을 들었다 놓는 버르장머리 없는 하인을 노려봤다.
좀 눈치를 살피란 뜻이었으나 루이스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대신 루이스는 손을 씻고 다가와 벨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얄미워 도로 걷어차 줄까 생각하는데 루이스가 다시 엷게 눈을 휘었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바닐라에 제비꽃 사탕 얹어놨는데.”
“너나 먹어!”
“정말요?”
조금 봐줬더니 아주 사람을 갖고 논다. 잠시 그 미소에 숨을 죽였던 벨져는 울컥 치미는 짜증에 손에 집힌 베개를 집어 던졌다. 루이스는 슬쩍 몸을 옆으로 돌려 손쉽게 피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올게요.”
다시 한소리 하려 입을 열려는 찰나, 루이스가 벨져의 무릎을 토닥이며 일어났다.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그와 자신만의 비밀 같아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기분이 불쾌해진 벨져는 방을 나서는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너.”
등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문을 나서려던 루이스가 돌아봤다. 이대로 그를 온전한 승자로 두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문을 나가면 제 손을 빠져나갈 것 같아서 더, 손에 쥐고 있어야만 안심이 됐다.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마.”
“네?”
무슨 연유에서인지, 벨져의 혀와 입술은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저가 잘나봤자 하인, 괴롭히려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창을 뒹굴고 고된 일만 하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고, 채찍을 들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인데도.
“이글이랑 얘기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아이스크림만 가지고 바로 올라와.”
“...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이상 루이스는 벨져의 이상한 명령을 따를 것이다. 문이 닫히고, 벨져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다 제 행동이 참을 수 없어져 이불을 마구 차고 베개를 던졌다. 분이 풀리지 않아 식식거리면서도 떠오르는 건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라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와 미소뿐이었다.
일을 할 땐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원망과 짜증이 뒤섞였다. 이게 다 이글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이상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조금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고 차오른 숨에 벨져는 다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픈 몸과, 빼앗긴 것들 대신 얻은 건 하인 하나뿐이다. 밤낮으로 먹어야 하는 약과 어머니의 걱정을 비롯한 다른 모두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하나마저 자신을 저버린다면 그때는. 벨져는 생각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었다. 다정도 지나치면 무정이라는 말이 떠올라 눈을 감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정말,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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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Midnight fight?
해리포터au
루이스 2학년 벨져 1학년 꼬꼬마 애기시절
늦은 밤, 루이스는 몸을 뒤척였다. 침대에 든 지 오래 된 것 같은데 잠이 오질 않았다.
‘오늘 밤 자정, 숲으로 나와!’
그렇게 악을 쓰듯 외친 녀석의 분에 찬 얼굴이 아른거려 잠을 잘 수가 없다. 벨져 홀든은 입학 첫날부터 루이스를 괴롭히고 시비를 거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결과였다. 맹세코, 루이스는 벨져의 첫인사가 호의적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열차에서 그의 제안 아닌 제안을 거절했을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렇게 선언하고는 대꾸할 새도 없이 슬리데린 테이블로 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결국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사로잡혀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저녁 시간에 말을 해보려 슬리데린 테이블을 기웃거렸지만 벨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맛있는 저녁을 제대로 못 먹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도 잠들지 못하는 건 전부 벨져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다시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벨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슬리데린 기숙사로 찾아갈까 하면서도 벨져의 형을 비롯한 슬리데린의 상급생이 떠올라 걸음을 돌렸다. 교수님이나 반장들에게 얘기했다간 또 벨져 때문에 슬리데린이 벌점을 받을 테고, 벨져는 또 제 탓을 할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심지어 늘 같이 다니는 앤지조차도 없었으니 벨져가 잡히는 즉시 제가 일러 바친 것을 알아챌 게 분명했다. 그럼 또 미움을 사겠지. 주변을 맴돌며 괴롭히는 것도 심해질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상관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역시 엄청나게 신경이 쓰인다.
결국 루이스는 체념하고 몸을 일으켰다. 포근하고 따뜻한 깃털 이불을 걷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루이스에게 조금 높은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루이스는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엄지가 바닥에 닿는다. 몇 번 굴러 떨어져본 뒤로 루이스는 항상 침대에서 내려올 때 발끝을 세워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슬리퍼에 발을 넣고 차가운 공기에 팔을 쓸어내린 루이스는 잠옷 위에 망토를 걸쳤다.
낡은 잠옷과 낡은 망토는 모두 물려받은 것이다. 고아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므로 루이스는 기꺼이 물건을 나누어준 상급생들에게 고마워했다.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불평하기엔 너무 과분하다. 혹시 모르니 지팡이를 챙기고, 구겨져 올라간 원피스형 잠옷의 끝단을 내린 루이스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기숙사를 나왔다.
벨져 하나 때문에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인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시험 기간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늦게까지 공부하는 상급생들에게 꼼짝없이 붙들렸을 것이다.
휑한 복도를 조심히 걸으며 루이스는 목도리라도 챙길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텅 빈 공간만 해도 추운데, 벽과 바닥이 죄 돌이다 보니 더 추웠다. 지금이라도 따뜻한 침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벨져가 숲에서 혼자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쪽은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를 손봐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벼르고 있다 해도, 벨져는 이제 막 입학한 일학년이다.
고작 한 살 차이에, 키도 몸집도 비슷하다지만 어쨌거나 신입생이다. 고아로 자라 제 밑의 아이들을 챙기는데 익숙한 루이스는 이것도 어쩔 수 없는 버릇이라 생각했다.
알아주는 명문가 출신에, 어려움이라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라도, 사사건건 시비에 어깃장만 놓는 되바라진 애라도 돌봐줘야 할 것 같았다. 더 훌륭하고 듬직한 보호자가 있음에도 그랬다.
숲은 위험하니까 얼른 데려와야 한다. 자칫 잘못했다간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저를 골탕 먹이려고 불러낸 거고, 정작 벨져는 침대에서 잠들어있으면 좋겠다. 물론 벨져 홀든 성격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루이스는 벨져가 다이무스에게 붙잡혔거나 시간이 되길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기를 바랐다.
다들 자러 갔는지, 평소엔 꼭 한두번 씩 마주치기 마련인 유령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학교를 나온 루이스는 멀리 보이는 사람의 형체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온 모양이다.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루이스는 지팡이 끝에 자그마한 불빛을 밝히고 걸음을 재촉했다. 발에 젖은 풀잎이 스치고, 선물 받은 슬리퍼를 망치는 게 조금 미안하고 아까워졌지만 그보다 급한 게 있었다.
“벨져!”
“조용히 해, 이 멍청아! 꼴이 그게 뭐냐? 너, 설마 내가 부른 걸 까먹고 잠들었어?”
기껏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나왔더니, 환영 인사 한 번 거창하다. 루이스는 머리를 숙이고 달려오느라 차오른 숨을 뱉었다. 방금 침대에서 나온 차림인 루이스와 달리 벨져는 망토 안에 스웨터에 가디건까지 제대로 입고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됐다. 시답잖은 일로 불러낸 거면 이번엔 꼭 한 대 날려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루이스는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하?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진짜 바보야? 당연히 결투지! 그것도 몰라?”
피가 싸하게 식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여태 벨져를 걱정한 자신이 한심해진 루이스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등을 돌렸다. 짜증이 치밀어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한밤중에 몰래 기숙사를 나온 것도 모자라 명문가의 자제를 때리기까지 하면 퇴학 처분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이를 악물고 왔던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저따위를 걱정해준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야!”
“거절할게, 홀든. 그럼 이제 끝이지? 앞으론 말 걸지 말아줄래? 이딴 식으로 사람 휘두르는 거, 도련님인 너한텐 당연할지 몰라도 정말 불쾌하거든.”
루이스는 전에 없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계셨다면, 그랬다면 앞뒤 안 보고 다퉜을지도 모르지만 루이스는 지금 호그와트에 다니는 것도 기적이었다. 교수님들이나 같은 기숙사의 상급생, 친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역시 나중에 좀 성가셔도 그냥 이를 걸 그랬다. 흙이 묻고 젖어버린 슬리퍼가 눈에 들어와 더 서러워진 루이스는 눈을 문질러 닦았다. 아무리 분하고 서러워도 벨져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 서!”
직접 말하긴 무섭고, 다이무스 홀든에게 익명의 투서를 몰래 보낼 생각을 하는데 벨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루이스를 붙잡았다. 얼굴만큼이나 예쁜 목소리라 그만, 걸음을 멈췄다. 루이스는 사실 벨져가 벨라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했다. 예쁘고, 똑똑하고, 가진 것도 많으면서 왜 저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루이스가 받아치려 고개를 돌린 순간 벨져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벨져! 뒤!”
“뭐, 뭐야!”
루이스는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털로 뒤덮이고, 팔다리가 네 개 달린 요정을 닮은 생명체. 픽시랑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루이스는 그들에게 지팡이 끝을 겨누며 벨져에게 달려갔다. 날개를 파닥거리던 그들이 뒤를 돌아본 채 굳어버린 벨져를 향해 달려들고, 루이스는 재빨리 벨져를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루모스!”
“멍청아, 그런 걸로 되겠...!”
“누구 때문에 저것들이 따라오는데! 네가 시끄럽게 하니까 그렇잖아!”
지팡이가 내뿜는 빛에 그들의 날개짓이 수그러들며 주춤했다. 밝은 빛에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본 루이스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지팡이를 거뒀다. 저건 사람을 골리는 픽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독시다. 더 다가오지 않고 독낭을 부풀리는 걸 본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이 주문이 통하길 빌며 주문을 외쳤다.
“임페르비우스!”
다행히, 루이스가 만들어낸 방수막이 한껏 부푼 독시의 독낭에서 흩뿌려지는 독액을 막아냈다.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걸 감지한 독시들이 날개짓을 하며 웅성거리고, 루이스는 안도했다. 한숨을 내쉬고, 한 팔로 꼭 안고 있던 벨져를 놓아주려는데 루이스의 발이 끈적한 무언가에 젖어들었다. 방수막을 타고 흐른 독액과, 이미 젖어버린 슬리퍼.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끔직한 통증에 지팡이를 꽉 쥐었다. 독시들이 다시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루이스?”
“윽....”
“임묘뷸러스!”
“벨져!”
독시들이 얼어붙고,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져의 고개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급히 달려온 다이무스가 벨져를 발견하고,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인 카인 스타이거와 함께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벨져!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나는, 그러니까.... 형아, 난....”
“홀든! 동생을 데리고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라. 나는 루이스를 병동에 데려다줘야겠다.”
안절부절 못하는 벨져가 다이무스의 망토를 잡고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앓고 있는 루이스를 안아든 카인이 돌아서고, 다이무스가 어린 동생을 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벨져, 정말이지, 네 녀석은...!”
“홀든 군. 자네가 빚을 졌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좋을 걸세.”
“.......”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벨져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다이무스는 제 동생이 분에 못 이겨 교수에게 달려들어 소리치면 어쩌나 했지만, 고개를 든 벨져는 다이무스의 예상과 정 반대의 말을 했다.
“내일, 병동에 보러 가도 될까요.”
“사과 받을 사람은 따로 있지.”
“알겠습니다.”
머글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공손한 모습에 다이무스는 내심, 벨져가 루이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양 굴던 게 다른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쌤통이라고 못된 말을 했을 녀석이, 장난을 치다 이글을 다치게 했을 때처럼 굴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관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벨져는 솔직하지 못한 아이였으므로, 다이무스는 기숙사 점수를 오십 점이나 깎아먹은 주제에 제 앞에선 죽어도 울지 않으려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독시의 독이 그리 위험하지 않으며, 루이스는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위험천만했던 밤이 지나고, 루이스는 병동에 한가득 쌓인 사탕과 과자, 쿠키, 케이크, 초콜릿 사이에서 눈을 떴다. 조금 다쳤다고 이렇게 대접을 받는 게 처음이라 쑥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지루한 마법의 역사 수업도 빼먹고, 하루 종일 누워서 과자나 야금야금 먹고 있는 신세라니, 분에 겨워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새 슬리퍼와 잠옷을 선물해준 트리비아에게 조금 혼이 나긴 했지만 루이스는 그것도 좋았다. 걱정과 애정이 섞인 꾸지람은 평생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 더 각별했다. 점심시간에 찾아온 앤지는 작은 꽃다발 하나와 꼼꼼히 정리한 필기 노트를 건네주고, 벨져가 아침 식사 내내 저기압이더란 얘기를 해주고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버렸다.
루이스는 발에 감겨있는 붕대와 선물을 보다 몸을 뒤척였다. 기껏 이런 기회가 왔는데 공부는 싫다. 뭘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작은 헛기침 소리에 루이스는 커튼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지만,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소년에겐 또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벨져?!”
“윽, 괘, 괜찮나보네.”
“뭐,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양팔을 등 뒤로 감춘 벨져는 평소의 기세는 어디 감췄는지 루이스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왜 왔어. 설마하니 벨져 홀든 경께서 미천한 천민한테 사과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난, 그....”
가볍게 한 농담에 벨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 말을 망설이는 모습에 루이스도 덩달아 당황해버렸다. 이런 모습의 벨져는 처음이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제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거나, 멍청하게 자기 발밑도 못 본다거나, 너 때문에 혼났으니 책임지라는 뻔뻔한 태도를 예상한지라 너무 낯설어 벨져 홀든이 아닌 것 같았다.
“미안....”
“어, 어.... 응....”
내내 양 손을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벨져가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작고 엉성한 꽃다발과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 그리고 풀물이 잔뜩 든 손. 루이스는 감히 받을 생각을 못하고 눈만 꿈뻑거렸다. 뽀얗고 보드라운 벨져의 손에 물든 풀물만큼이나,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벨져가 침묵과 쑥스러움을 못 이기고 소리쳤다.
“어, 얼른 받아, 이 멍청아!”
“아, 응!”
얼떨결에 받아든 루이스는 꽃다발이라고 생각했던 나뭇가지와 꽃을 다시 살폈다. 꽃다발이라기엔 묘하게 모양을 만든 것 같은데, 타원도 원형도 아닌 무언가라 영 의심이 갔다.
“저기, 벨져.”
“뭐냐.”
평소대로 소리치고 나니 조금 괜찮아졌는지, 팔짱을 낀 벨져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린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거... 화환.... 맞지? 엄청 못 만든다.”
“뭐야?! 너, 사람이 기껏...!”
“고마워.”
겨우 눈을 마주친 벨져에게 생긋 웃자 길길이 날뛰려던 벨져가 방금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과 예쁜 파란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펑, 하고 터지는 것처럼 벨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벨져 홀든이라도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화환을 엮으면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윽.... 두고 봐! 다음엔 그런 소리 절대 못 하게 해줄 테니까!”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던데.”
“너, 이익...!”
“으악, 사람 살려!”
폼프리 부인이 달려들려던 벨져에게 병동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며 쫓아내고, 루이스는 식식거리며 돌아보는 벨져를 향해 예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루해했던 게 거짓말처럼 즐거워지고, 이상한 화환 하나와 편지 한 장이 손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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