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벨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이 무겁지 않다. 아주 잠깐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은 게 대체 얼마마인가. 건강할 땐 너무나 당연했던 감각에 벨져는 기지개를 켜지도, 눈을 비비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순간과 감각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 눈을 감았다. 역시,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
벨져는 침대 머리맡에 둔 작은 은종을 흔들려다 씩 웃으며 종을 손에 쥐었다. 잠을 설치지도 않고, 식은땀에 젖어 깨지도 않은 데다 악몽도 꾸지 않은 건 그 녀석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루이스가 들어왔다. 양손 가득 수건을 들고 있는 루이스의 머리카락은 방금 씻은 것처럼 젖어있었고, 소매와 목깃도 다 잠그지 않은 채였다. 흰 얼굴이 물기에 젖은 것에 비해 입술만 붉다. 거기에 단정하지 않은 차림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벨져가 멍하니 평소와 다른 루이스를 바라보는 동안 루이스도 가만히 멈춰서 눈을 깜빡였다. 어째 덩달아 멍청해지는 것 같다. 루이스는 스스로 일어난 벨져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눈이 떠지더군.”
웃으며 말하자 루이스가 아까보다 더 눈에 띄게 멈칫하며 벨져를 바라봤다. 어딘가 잘못된 곳을 찾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기분이 상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표정은 뭐야.”
“아뇨. 제가 아는 도련님이 맞나 싶어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전혀.”
벨져가 홱 짜증을 내며 돌아서자 루이스가 다가왔다. 벨져는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바깥을 바라봤다. 늘 같은 풍경인데 오늘따라 더 환하게 빛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을 재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아무리 재도 열은 없다. 루이스는 그러고도 의심스러운지 얼굴을 가까이했다. 순간 이마가 차가워졌다.
“윽, 너...!”
“열은 없네요.”
루이스가 이마를 맞대며 눈을 깜빡였을 때, 벨져의 뺨에 없던 열이 번졌다. 기껏 상쾌한 아침을 맞아 좋았던 기분이 그 잠깐 사이에 오르고 내리며 심장이 뛰었다.
“, 네가 오기 전까지 완벽한 아침이었다!”
“제가 뭘요?”
“네가 자꾸...!”
턱, 말문이 막혔다. 벨져는 한숨과 함께 혼내기를 포기하고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세수할 거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주방에서 따뜻한 물을....”
“찬 물도 괜찮아.”
“...도련님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아시죠?”
“얼른 가지 그래?”
이게 아주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 기어오른다. 이러다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오를 기세라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냉큼 화장실로 들어가 주전자에 물을 채워왔다. 벨져는 루이스가 세면대에 물을 붓고 꽃잎을 띄우는 모습을 지켜보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어젯밤 잠옷 소매에 묶어놓은 리본을 풀어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결 좋은 은발을 뒤로 모아 묶었다.
루이스는 수건을 들고 벨져의 세수가 끝나길 기다렸다. 뜨거운 물이 아니라 평소보다 꽃향기가 덜하지만 비누에서 나는 향기와 약간의 물기만으로도 벨져 홀든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일찍 일어나 바람을 쐬는 거며, 잘 웃는 게 아무래도 오늘은 좀 살 만 한가 보다. 루이스는 비누거품을 닦아내는 벨져를 거울을 통해 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전에 여섯 번째인지 일곱 번째인지 모를 하인 하나가 벨져 앞에서 방긋방긋 웃다가 뭐가 그렇게 즐겁냐며 짤렸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루이스는 벨져 앞에서 잘 웃지 않았다. 하기야, 자기는 아프고 비참해 죽겠는데 옆에서 누가 즐겁고 행복해하면 더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하인이라는 사람이 그러고 있는 걸 이 고고한 도련님의 자존심이 허락할 리 없었다.
“수건.”
벨져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한 박자 늦게 보송하게 잘 마른 수건을 건넸다. 늦다고 성질내는 일 없이 거울을 보며 물기를 닦아낸 벨져가 폭 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나?”
“네. 일어나서 환기도 해야 하고 씻고 밥도 먹어야죠.”
그러고 보니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벨져가 보는 루이스는 언제나 문 앞에 세워둬도 될 만큼 멀끔하고 깔끔했고, 그게 너무나 당연해 다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 흐트러진 모습이라던가 씻고 먹는 것만 해도 그렇다. 잠시 머릿속에 느슨한 잠옷을 입고 잠든 루이스를 상상한 벨져는 괜히 차가운 물에 다시 손을 넣었다.
“아침 드셔야죠. 조금만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안 급해.”
“드시고 나면 더 기운이 날 거예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벨져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물기를 털려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손을 수건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까지 빈틈없이 닦아내는 섬세한 손길에 고개를 내리자 생채기와 흉터로 엉망인 루이스의 손이 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벨져의 손도 그리 다를 건 없었다. 검을 잡아 생긴 굳은살과 상처들이 자랑이었던 적도 있다.
“그럼 하고 싶으신 건요.”
검을 잡기는커녕 정원을 산책하는 게 고작인 몸이 되고 부터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녀석이 오기 전 까지는 그저 하루하루, 피와 살로 만든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억울해서 분풀이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글쎄.”
애매한 대답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옷장 문을 열었다. 미의식이 꽝인 하인 대신 벨져는 매일 아침 입을 옷을 직접 골랐다. 루이스가 셔츠가 가득한 서랍을 다섯 개 열고, 일상복으로 채운 옷장을 두 개 열고나서야 벨져는 오늘의 옷 고르기를 멈췄다.
“정원에 꽃이 피던데 나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늘 보는데 뭐 하러.”
셔츠를 입히고 단추를 채운 루이스가 다시 무릎을 꿇고 바지를 입혔다. 벨트를 허리에 꿰고 나서야 루이스는 작게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버클은 채우지 않은 채로 벨져의 등 뒤로 돌아와 셔츠를 입힌 루이스가 벨져의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온실은 잘 안 가시잖아요. 다들 예쁘다던데. 올해 장미가 더 탐스럽게 피었다고 얘기가 자자해요. 그걸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던데.”
“흥. 잘도 아는군.”
“주워들은 게 있죠. 같이 가자는 사람도 있고.”
벨져가 시큰둥하게 빈정거리자 루이스가 다시 벨져 앞에 섰다. 아래서부터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길은 언제나와 같이 군더더기가 없었다. 다만 단추를 채우느라 집중하며 내리깐 눈이 신경 쓰일 뿐이다.
“그래봤자 꽃이 꽃이지.”
“그래도요.”
“하,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 가지 그래?”
가시 돋친 말에 베스트의 장식 줄까지 채운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하고 무심했다. 이 말간 얼굴로 다른 하녀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전 도련님 몸종이잖아요.”
당연한 소리다.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명제인데도 그 말 한 마디에 울컥 감정이 치밀고 눈가가 시큰해진다. 말문이 벨져는 괜히 목을 만지며 구두를 신기는 루이스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누가 뭐래도 나는 당신의 것이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다시 우쭐해졌다.
벨져는 루이스가 구두끈을 묶는 동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씰룩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썼다. 구두끈을 묶고 일어나 열어놓은 서랍과 옷장을 정리하는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는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가면 되겠군.”
“피크닉이란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피크닉 바구니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시죠? 그 안에 식기며 그릇까지 다 들어간다구요.”
“내가 들면...!”
“그럼 제가 짤리는 거구요.”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기껏 인심을 써줬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영 별로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가자고 꼬셔놓고. 루이스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불쾌했다.
“그래서, 나랑 가기 싫다는 건가?”
“...가고 싶으시면 가세죠. 도련님 집이잖아요. 누가 당신을 막겠어요.”
“그럼 준비해. 조금 걸을 거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요.”
그 놈의 식사. 벨져는 한 번 웃고 휑하니 나가버린 루이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도로 침대에 누웠다. 루이스의 젖은 머리카락이 아른거리고, 물기를 닦아주다 닿은 손이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