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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생일 챙기는 것도 벌써 6년째 루이스 올해도 생일 축하해ㅠ0ㅠ)S2
* 이글->루이 요소 있음
* * *
1월 중순, 애인과 불타는 한 때를 보내고 돌아온 루이스는 업무로 복귀했다. 한 해의 첫 달답게 각 세력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검수하고 일 년의 계획을 짜는 것부터 새로 들어온 신입을 배치하는 것까지 할 일이 산더미였다. 연합에 능력자가 가장 많은 건 사실이지만 업무를 맡길 정도로 유능한데다 믿을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이때만 되면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선배. 여기 커피요.”
“고마워. 거기 두고 가.”
“아침에 드린 것도 안 드시구요?”
“아.... 미안. 바빠서 생각을 못 했네.”
“좀 적당히 하세요.”
루이스는 후배의 걱정스런 잔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답게 사람을 살뜰히 챙기는 토마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제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기 바빴는데, 이제는 한숨과 잔소리다.
“조금 서운한걸.”
“네?”
“아냐. 같이 나가자. 가는 길에 나 좀 도와줄래?”
아침부터 정리해서 쌓아둔 서류가 꽤 됐다. 반절을 덜어 토마스의 손에 들려주고 앤지의 사무실로 가는 내내 토마스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불규칙한 수면과 영양 부족, 과로, 피로 누적 같은 걱정엔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루이스는 알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건 토마스도 알고, 앤지도 알고, 연합의 식구들도 다 안다.
그나마 공성 스케줄이 잡혀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토마스의 푸념을 듣던 루이스는 앤지의 사무실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서류를 넘겨달란 눈짓에 토마스가 루이스가 든 서류 위로 그가 든 서류들을 쌓고 문을 열어주었다. 짧게 감사 인사를 한 루이스는 저와 별 다를 바 없이 서류에 둘러싸인 연합의 수장에게 다가갔다.
“여기. 신입들 서류. 제일 위에 있는 게 인력 배치 검수안이고, 카모라에선 아직도 소식이 없네.”
“고마워. 놓고 가.”
“앤지.”
루이스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상관이자 친구를 불렀다. 그제야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해 안쓰러웠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냥 넘어갈 순 없어.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앤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다들 한숨이 느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쟁 중이고, 거기에 안타리우스까지 더해 더 큰 위협이 되고 있으니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점조직 형태의 연합은 더더욱 내부 세력을 조율하고 관리하기 힘든데, 가장 큰 세력인 카모라 마피아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다른 조직이라고 협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될 게 뻔했다.
“토니는 북아일랜드에 가있어서 무리고, 다른 사람들은 감당 못해. 거기서 하자는 대로 하자고 하고 돌아올 걸.”
물 흐르듯 흐르는 프랑스어 대신 영어로 한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는 없다. 배치가 끝나고 발령을 받으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그 전에 마무리해야 했다. 루이스의 태연한 태도에 앤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로서도 방관할 수 없는 문제다. 무슨 묘수가 떨어지길 바라는 듯한 눈빛에 루이스는 앤지의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갈 사람 하나 있잖아.”
“뭐?”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게, 그리 못할 말이라도 했나 싶었지만 이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다. 루이스가 직접 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모를 리 없건만 앤지의 표정은 의문을 지우질 못했다.
“이번 생일은 조용하게 보내고 싶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허락을 안 할 눈치라 루이스는 솔직히 답했다. 속이거나 얼버무릴 생각이 없기도 했고, 앤지를 걱정시키는 건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 동갑이긴 하지만 첫만남이 그래서인지 늘 지켜야 하는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랑?”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루이스는 애매하게 웃었다. 앤지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루이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고, 기왕 굳은 일을 떠맡아야 한다면 보상이라도 확실한 게 좋다. 더구나 그 때쯤이면 상황도 정리될 테고, 그럼 한숨 돌릴 수 있으니 그리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다.
“매번 가기 싫다고 울상이더니,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내가 그랬나. 루이스는 지친 얼굴로 묻는 친구를 보다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된단 뜻이었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앤지가 한숨과 함께 펜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럴 땐 또 영락없는 윗사람이다. 루이스는 앤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앤지는 어딘가 아련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마주 봤다. 손을 내밀자 맞잡아오는 손이 조금 차갑고 작았다.
“추운데 몸 좀 녹이고 오지 뭐.”
“조심해. 무슨 일 없어도 아침저녁으로 꼭 연락하고.”
“그럴게.”
걱정하는 그녀를 위해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앤지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가라는 말로 루이스를 장난스레 쫓아냈고, 다음날 루이스는 나폴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대는 어둠 속에서 뼈가 굵은 조직의 보스였고, 나폴리는 카모라의 본거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일주일이 될 터였다.
* * *
연합에서 공성이 끝난 뒤풀이로 술자리가 벌어지는 건 예사다. 워낙 술고래인 세 사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글은 그런 연합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에 공성에 참여하지 않을 때도 뒤풀이엔 빠짐없이 참석했다. 호탕한 형씨들이랑 공금으로 공짜 술을 마시는데 그 술자리를 누가 마다하겠냐마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벌어진 술자리에서 마실 만큼 마시고, 주정뱅이 뒤처리는 나 몰라라 하고 내뺀 이글은 연합의 휴게실로 향했다. 가깝기도 하고, 집에 들어가 봤자 싸늘하게 식은 방이 기다리는데다 자칫 잘못했다간 검을 벼르고 있는 큰형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기껏 기분 좋게 마시고 흥을 깨는 건 사양이다. 푹 꺼진 소파가 조금 불편하긴 해도 따뜻한데다 건드리는 사람도 없으니 훨씬 편하다.
이글은 불이 꺼진 휴게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밀어 젖히려는 순간 안에서 당기는 힘에 몸이 끌려갔다. 그래도 명색이 홀든의 쾌검이다. 평생 몇 번 없는 일에 이글은 당황했고, 술이 들어간 몸이 기우뚱 넘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어둠속에서 이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아씨, 깜짝이야!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칙칙한 후드에 핏기가 없이 질린 얼굴이 어둠 속에서 나오는데 꼭 어릴 적 유모를 졸라 듣던 괴담의 사신 같아 이글은 되레 목청을 높였다. 루이스의 팔을 뿌리치고 제 발로 서자 얄밉도록 침착한 그가 휴게실의 전등 스위치를 켰다. 밝은 전등 아래서도 허여멀건 얼굴이나 얼음같이 차가운 무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막상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일이나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
“출장 다녀온 건 난데 왜 네가 시차적응을 못 해. 이미 날 지났어.”
“거 참, 되게 깐깐하네!”
“일주일이나 비웠으니까 그만큼 일도 쌓였을 것 같아서 바로 왔어. 갈 거니까 얼른 자. 주정부리지 말고.”
“주정은 누가 주정을 부렸다 그래?”
루이스는 그걸 모르냐는 눈빛으로 이글을 쳐다봤다. 자기야말로 당장 자야 될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서류 파일을 들고 있는 걸 보니 기가 찼다. 하여간 여기고 저기고 다 일 중독자들뿐이다. 이글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루이스가 의자에 걸려있던 담요를 던졌다.
“얌전히 잠이나 자. 간다.”
“야! 적당히 해!”
매정하게 돌아선 등에 대고 소리쳤지만 루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들릴 듯 말 듯한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이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쪽도 꼭 누구처럼 산통을 깨는데 일가견이 있긴 마찬가지였다.
* * *
부산을 떨어대는 소리에 일어난 이글은 소리의 근원을 찾고는 도로 누웠다. 토마스가 루이스의 생일이니 깜짝 파티를 해주자고 벼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아주. 제 작은 형이 누구인가. 분명 기회도 안 주고 보란 듯이 데려가서 주말이 다 가도록 독차지하고 안 내보낼 게 뻔하다. 토마스의 열의와 동경도 가상하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 큰 애정과 집착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글은 괜히 기운 빼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했다가 쿠션과 담요를 빼앗기고 나서야 일어나 앉았다. 이 가여운 영혼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해서 좌절하고 낙담하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보복이겠지만 남 좋은 일, 그것도 제 작은 형에게 좋은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이글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퍽 기특한 행동이었지만 맞장구 쳐주는 사이 루이스가 휴게실에 들어온 건 이글도 어쩔 수 없었다.
토마스는 계획이 틀어져 울상을 지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위로할 선배는 너무 지친 나머지 후배님까지 챙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글은 루이스 대신 토마스의 뺨을 거칠게 토닥여 위로하고 하품을 하며 소파에 앉았다. 어제 마신 싸구려 위스키 때문인지 아니면 간밤에 추위가 몸을 덮쳐서인지 몸이 찌뿌듯했다.
“가서 맛있는 건 많이 먹었어?”
“거기서 셰프 코스 세 시간 먹느니 햄버거 세 개 먹는다.”
“크크크큭, 이래야 내 영웅님이지. 그래도 거기 가면 맛있는 거 먹고 극진히 대접 받잖아?”
“그게 바로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지.”
이글은 요기 라즈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떠올리고 킬킬거렸다. 이번에 루이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카모라의 능력자 얘기가 파다했고, 덕분에 영웅님의 유일한 후배께서 바짝 날이 선 상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발끈한 토마스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왜 이글 형이 뿌듯해하는 건데요?”
“어엉?”
“됐어. 토마스. 미안한데 파티는 너희끼리 해야겠다.”
어래, 그래도 아직 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 아닌가 보다. 이글은 어젯밤보다 더 헬쓱해진 얼굴로 토마스를 챙기는 루이스를 보며 그가 밤을 꼴딱 샜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는 또 무엇인가. 사실 답이야 뻔하다. 루이스의 대답이 제 신경을 거스를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이글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원래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랬다.
“근데 왜 이렇게 서둘러?”
백 프로다. 이글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애정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과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보고 한 발 앞서 질색했다.
“빨리 하고 기다리는 사람한테 가야지.”
“네?”
“누구처럼 기다림에 보답할 자신이 없거든.”
토마스는 영 감을 못 잡고 루이스와 이글을 번갈아보며 설명해달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글은 팍 김이 샌 나머지, 루이스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느라 답을 해주지 못했다. 이러니 좋아 죽지. 이글은 루이스가 없는 사이 내내 신경질을 부리던 제 작은 형을 떠올렸다가 이마를 짚었다. 숙취 때문인지, 이 답 없는 인간들 때문인지 몰라도 골이 때렸다.
“지독한 새끼....”
“뭐?”
“아무것도 아니야. 좋아하겠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그럼 주말에라도...!”
“미안, 토마스. 나 일요일까지 휴가야. 이거 마친다고 어제 새벽에 도착해서 밤샜어. 약속도 있긴 하지만.... 이 김에 좀 쉬려고.”
그 인간이 퍽이나 쉬게 두겠다. 이글이 속으로 빈정거렸다. 아까는 실수로 모국어로 욕해버리고 말았지만 이번엔 다행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글이 소파에 드러누워 다리를 꼬고 팔로 머리를 받친 사이 루이스가 풀이 죽은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 달 내내 루이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토마스는 더 매달리지 않았다. 저 착하고 가여운 녀석 같으니. 시무룩한 얼굴로 루이스의 서류 배달을 자청한 토마스가 휴게실에서 나가자 찬 물을 한 컵 쭉 들이켠 루이스가 이글의 옆에 앉아 하품을 했다.
“그 상태로 만날 수는 있겠어?”
“야우젠지 뭔지, 벨져가 예약을 잡아놨어. 시간 안에 안 가면 죽일지도 몰라.”
“어, 응.... 그래....”
너희가 세네시쯤 차 마시는 거랑 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간 벨져가 용돈을 끊을 것 같은 예감에 이글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몇 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 인간 속내 하나 모를까. 딱히 단 것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분명 이런저런 케이크를 잔뜩 늘어놓고 골라 먹게 해주고 싶은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받아야 할 축하도 받지 못하고 살았으니까. 이글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반쯤 졸고 있는 루이스를 보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래도 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승질 좀 부리다 말겠지.”
“하아. 그게 문제란 말이야.”
“...별일 없을걸? 작은 형도 좋아할 거고, 너도 뭐....”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에 왠지 양심이 찔려 말을 얹자 루이스가 등을 푹 수그리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지금 걱정해야 되는 건 약속 시간에 늦는 것보다 그거 몇 분 안 늦겠다고 무리해서 초췌해진 얼굴과 말이 아닌 몸 상태 쪽이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그 격한 운동을 했다간 사람 하나 잡을 게 뻔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누군가. 일주일동안 벼르고 벼른 벨져 홀든이다. 딱히 친형제의 잠자리 사정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도 않고, 남의 연애에 끼는 것도 달갑진 않지만 걱정이 되는 나머지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나왔다.
“야, 사람이 때론.... 아니라고도 말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연합의 영웅이 남자 애인이랑 게이섹스하다가 복상사로 죽었단 기사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
진지하게, 진심으로 걱정돼서 한 말이었는데, 루이스는 이글을 멀뚱히 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같잖은 소리 말라는 반응에 이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새겨들어! 진짜 훅간다니까??!!? 너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니까 괜찮아.”
“네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나본데....”
“이글.”
답답한 나머지 일어난 이글을 올려다보는 루이스는 어느새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과 목소리를 하곤 이글을 타일렀다.
“너도 알아보는데, 벨져가 지금 내 상태를 모를 것 같아?”
입을 다물자 도로 소파에 등을 기댄 루이스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하곤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피곤해 나른해진 눈매며 분위기가 어른스러워 제가 아는 루이스 같지가 않았다.
“괜찮아.”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리 없다는 강한 믿음이 눈부시다. 이글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도 쉽게 가져가버리는 형제를 떠올리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루이스는 눈을 얇게 휘며 웃고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토마스에게 했던 것처럼 이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럴 때만 연상인 티낸다?”
“네가 연상 대접을 안 하는 거겠지.”
“내가 그런 거 할 사람이야?”
괜히 심통이 나 투덜거려도 루이스는 웃을 뿐이었다. 누구는 좋겠네. 애인이 이렇게 믿어주고. 자존심상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이라 입만 삐죽이고 말았지만 영 속이 쓰렸다.
때마침 들어온 나이오비가 루이스를 찾고, 이글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주인 없는 생일상에서 술이나 퍼마셔야겠다고 벼르며 그를 보냈다. 야우제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고, 이글은 제 숙면을 방해하고 아침부터 염장을 지른 몹쓸 인간을 응징할 권리가 있었다.
전화기 앞에서 목을 가다듬은 이글은 다이얼을 돌렸다. 비록 선물이 아니라 생일빵일지라도 기쁘게 받아 주리라 믿으며, 사랑을 담아.
* * *
“그래서, 에프터눈 티랑 다를 게 뭐야?”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네 거다. 전부.”
루이스는 예쁜 탁자 위에 끊임없이 나오는 케이크며 과자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메이드처럼 풍성한 프릴을 단 앞치마와 헤어 캡을 쓴 종업원들이 순식간에 테이블을 채우고 나니 그야말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삼단 트레이에는 흔히들 곁들이는 샌드위치나 스콘 대신 단단해 보이는 케이크과 돔 형태의 무스케이크가 올라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했다.
“이걸 다 나 혼자서 먹으라고?”
“뭘 좋아할지 몰라서. 뭐, 한 입씩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게 무슨 소리야. 신종 괴롭힘이야? 난 불태울 로마가 없다고.”
“괴롭히는 것 같나? 아니면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건가? 듣자하니 그 쪽 애송이가 널 졸졸 따라다녔다는데.”
이번 출장 내내 카모라의 능력자 하나가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닌 건 맞다. 소문이 언제 벨져의 귀까지 들어갔는지 몰라도, 루이스는 그에 관해서라면 결백했다. 어디 결백하다 뿐이랴.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건 한 사람으로 충분하고, 자신을 동경하며 따라다니는 것도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열 살이나 어린놈한테 추파 받으니 좋았나? 오늘도 안 나타났으면 내가 직접...!”
어쩐지 오랜만에 봤는데도 반가운 얼굴이 아니더라니. 루이스는 삐진 애인을 어떻게 달래야하나 생각하다 퍼뜩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벨져가 하는 말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대체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렇게 쉽게 말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 뿌리는 분명 제가 잘 아는 바로 그것이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내가... 아니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날 따라다녀서?”
“질투는 누가...!”
“나 너랑 보내려고 연합에서 떠들썩하게 해주는 생일파티도 마다하고 어제 밤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밤새 일하다 왔어. 약속시간 맞추려고. 기특하지 않아?”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자 벨져가 시선을 피했다. 이해는 할지언정 마음이 영 내키지 않는 것쯤은 충분히 안다. 루이스는 손을 뻗어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는 벨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손 안에서 흠칫 떨렸다가 이내 엄지로 손등을 쓸어오는 벨져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마주했다.
“기분 풀어. 벨져 홀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겨우 기분이 풀렸는지 벨져가 의기양양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려 씩 웃고는 커피잔을 들었다. 따로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제 앞엔 티팟과 빈 찻잔이 놓여있었기에 루이스는 잔에 차를 따랐다. 벨져가 오늘의 다과회를 아주 단단히 벼르고 준비했다는 건 세 살 꼬마라도 알 것이다. 진하고 묵직한 찻잎의 향이 달디 단 케이크와는 잘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많다.
선물에 값어치를 따지는 것도 아니고, 벨져의 주머니 사정 상 이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입 밖에 내는 순간 분위기는 얼어붙고 또 싸우게 될 게 분명해서 참고 있지만, 테이블을 꽉 채운 케이크의 산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러니까 꼭 그거 같네.”
운을 떼자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던 벨져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속눈썹이 떨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 루이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몸이 피곤하니 말이 헛나가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했다.
“왜 있잖아. 과자와 초콜릿으로 만든 집으로 유혹해서 잡아먹는 동화.”
“하, 그래도 사탕 하나로는 왔던 길을 다 표시할 수 없지 않나?”
“윽.”
찔리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전에 회사의 아이들이 찾아왔던 그 날. 어느새 거기까지 퍼진 건지.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의 반응이 즐거운지 미소를 머금고는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냈다.
“선물이다.”
“너한테 받는 건 안 내키는데.”
“앞으론 이걸로 용돈을 주도록.”
“아무리 그래도 내 형편에 안 맞거든?”
이것도 미리 준비했는지 빳빳한 100달러 지폐 열 장이 루이스 앞에 놓였다. 하여간 질긴 놈. 안 받으면 또 안 받는다고 짜증을 낼 것 같아 카드처럼 늘어선 지폐를 챙겼다.
“고맙다. 용돈 줘서.”
“천만에.”
정작 생일인 사람은 즐겁지가 않은데, 벨져는 지금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드는지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애인이 즐거워하는 걸 보는 건 좋지만, 어째 그게 저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자. 이것부터 먹어봐라.”
루이스가 착잡한 심경으로 가만히 차를 홀짝거리자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던 벨져가 포크를 집어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잘라 내밀었다. 루이스는 몸을 숙여 다가가 포크 끝의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입 안에 번지는 상큼한 민트와 레몬 향이 좋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데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제 행동을 되새기던 루이스는 주변의 시선에 한 번, 그리고 얼어붙은 벨져의 얼굴에 또 한 번 죽고 싶어졌다.
“...미안.”
화끈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 손을 뺨에 대고 시선을 피했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 뒤에는 분명 테이블 매너를 지적할 것이다. 그만 무심코 해버린 일이라 따져도 할 말이 없었다.
“너.”
“.......”
“이리로.”
옆에 놓고 패려고 그러나. 망설이던 루이스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자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벨져가 턱을 살짝 치켜들곤 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물론 옆에 앉을 수야 있지만 그 다음에 뭘 하려는 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루이스는 살짝 상기된 뺨에 뿌듯하고 흡족해 마지 않다는 시선을 보내는 벨져가 부담스러웠다. 갔다간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 제 손으로 케이크 하나 못 먹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어서.”
어떻게든 안 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정하게 재촉하는 벨져의 목소리와 그 눈빛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벨져 홀든이 벨져 홀든인 이상, 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 이상 벗어날 수 없다. 루이스는 제가 판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크게 한숨을 쉬고 의자에서 일어나 벨져 옆에 앉았다.
* * *
두 시간에 걸친 티타임 끝에 벨져는 루이스를 옆자리에 태우고 직접 차를 몰았다. 기어이 모든 케이크를 한 입씩 떠먹인 뒤라 레몬수로 입을 헹궜음에도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기엔 시간이 이르고, 영화를 보기엔 사람이 많을 시간인데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하니 졸음이 밀려왔다.
잠깐 조는 사이 도착한 호텔 로비에서 루이스는 하품을 했다. 체크인을 마친 벨져가 손을 잡아 이끄는 것도 스위트룸으로 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맞잡은 손이 따뜻해 놓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어떤 방해도 없이 단 둘이 주말을 보내게 될 것이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해가 지기도 전에 뻗을 정도는 아니다.
루이스는 제 상태를 가늠하며 문을 여는 벨져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키스하고, 자연스럽게 섹스로 이어질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벨져는 꽤 담백하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코트를 벗었다. 잡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는 허전함과, 예상외의 행동에 루이스는 벨져를 빤히 바라봤다.
“안 해?”
“졸려 죽으려는 주제에. 아까 먹은 케이크 종류가 몇 개인지는 기억나나?”
물론 기억할 리가 없다. 그런 걸 일일이 세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은데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바로 옆에 즐거워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웃고 있는 벨져가 있는데 그깟 케이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는 루이스를 향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벨져가 목에 맨 스카프를 풀었다. 섹스어필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행동에 루이스는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게 어려우면 호텔로 오는 길은.”
“음....”
“흥. 정신없이 졸았으니 기억날 리가 없지. 씻고 잠이나 자라.”
“그럼 너는?”
오랜만에, 그것도 특별한 날에 만난 애인이 이렇게까지 담백하게 나오는데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조심스럽게 묻자 재킷을 벗고 셔츠의 커프스까지 푼 벨져가 다가와 뺨을 잡고는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루이스를 담았다.
“옆에 있겠다.”
“화 안 내?”
“자고 일어나면 낼 거다.”
이제야 겨우, 제가 아는 벨져가 돌아온 것 같아 루이스는 슬며시 웃으며 뺨을 감싼 벨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차라리 싸우고 시비를 거는 게 낫지,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더 조바심이 난다. 따뜻하고, 배가 부른데다 안심이 되니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씻기 귀찮은데....”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벨져를 올려다봤다. 이상하게 벨져랑 있으면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지금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말도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부릴 리 없는 어리광.
“그럼 조금 기다려라. 욕조에 물부터 받을 테니.”
“씻겨준다고? 네가? 나를?”
“이미 여러 번 해봤다만.”
“뭐?”
“먼저 뻗어버린 널 누가 씻기고 입혀서 재웠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널 맡기기라도 할 것 같나?”
예쁜 입술을 타고 귀를 감아드는 목소리가 하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벨져가 불쾌하단 티를 팍팍 내지만 않았어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꿈이었음 좋겠다.
당황한 루이스가 황급히 기억을 더듬는 사이 푹 한숨을 내쉰 벨져가 소매를 걷었다. 욕실로 가려는 걸 직감한 루이스는 벨져의 손목을 잡았다. 이전에야 기절해서 그랬다 치더라도 의식이 있는데 몸을 맡기는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 그냥 내가 씻을게.”
“...양치 꼭 하고.”
어째 애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지만 루이스는 내려다보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한 평생 하인을 부리며 누군가가 시중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산 사람이라서 더더욱.
루이스는 욕실에 들어가 문에 등을 기대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뺨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였다. 그러니까, 아마. 이건 감동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저를 씻긴 것도 모자라 친히 옷까지 입혀 재웠다니,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좋다. 부끄럽고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바닥을 구르며 이불이라도 차고 싶지만 그럴 순 없기에 찬 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세면대 앞에 놓인 거울에 비친 얼굴이 붉어져서 원래대로 돌아올 줄 몰랐다. 참 꼴이 말이 아니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토하고 연거푸 찬물을 끼얹었다.
정신을 차리는 데는 냉수만한 게 없다. 얼굴에 이어 손, 발까지 피부가 얼얼할 정도로 씻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힌 루이스는 앞머리가 젖어있는 거울 속 자신을 보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넋이 나간 표정에 진하게 드리운 다크써클까지 더해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니 벽에 걸린 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켰다.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벨져가 고개를 들고는 턱 끝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연한 아이보리 색 파자마는 연한 광택이 흐르는 걸로 봐선 어째 실크 같다. 과연 준비성도 남다르지. 루이스는 군말 없이 옷을 갈아입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게 선물이야?”
“그럴 리가. 말만 해라.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
“믿음직스럽네.”
벨져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빛나고 한껏 치장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교회 파티장에나 어울릴 법한 인사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루이스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 위에 배를 깔고 누워 깃털을 가득 채운 베개를 끌어안고 있자니 다시 몽롱해졌다.
이쯤 되니 벨져가 옳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은 무슨, 눕자마자 이렇게 몸이 늘어진다. 하긴 출장 기간 내내 긴장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돌아와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 몸이 못 버티는 것도 당연하다. 노곤하게 밀려오는 잠에 취해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루이스는 입을 열었다.
“벨져....”
“뭐냐.”
“나, 너한테 진짜 받고 싶은 거 있는데....”
대답 대신 신문이 접히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발소리가 침대를 향했다.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는 손길에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올린 루이스는 옆에 앉은 벨져를 발견하고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안마 받고 싶어. 마사지 받으면서 자면 최고일 거야.”
“그런 거라면 살롱에 연락해서....”
루이스는 벨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바로 앉아 벨져의 손을 잡아끌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침대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에 벨져는 잠시 망설이다가 구두를 벗고 들어와 루이스의 눈가에 키스했다. 반쯤 뜬 루이스의 눈과 또렷한 벨져의 눈이 마주하고, 루이스의 눈매가 사르르 휘었다.
“너한테.”
“...이젠 하다하다 날 하인처럼 부리는군.”
“넌 나한테 맨날 그러잖아.”
“돌아누워라.”
어이가 없다는 듯 굴면서도 결국 져준다.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목을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입술로 입술을 물고, 비비다 떨어지는 가벼운 장난 같은 키스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등허리를 받쳐 안았다. 짧은 뽀뽀를 끝으로 루이스를 눕힌 벨져가 루이스의 허리 위에 걸터앉아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냥 앉아도 상관없는데 체중이 느껴지지 않게 무릎으로 서있는 배려가 고맙고, 뭉친 근육을 풀며 주무르는 손끝에선 묻어나는 애정이 감격스럽다. 기분 좋게 몸을 만지는 손길에 정신이 점점 더 몽롱하고 흐릿해진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지 않았다. 몸을 겹치고 쾌감과 열락을 나누는 사이 제 몸의 성감을 파악하고, 어쩌면 주인인 자신보다 더 제 몸을 잘 알 수도 있는 벨져다. 마음만 먹으면 마사지가 애무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지만 벨져의 손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그 주인을 닮아 뼈대는 물론 손톱까지 예쁜 손은 섹스할 때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경고하듯 말했다.
“딴 맘 먹지 마.”
“하,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
피식피식, 멈출 줄 모르는 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자 벨져가 우뚝 척추를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꿀꺽,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나고 벨져가 몸을 숙여 다가왔다. 그 푸른 눈에 담긴 열망과, 참아야 한다는 갈등이 보여 루이스는 먼저 손을 뻗었다. 벨져의 어깨를 잡고 살짝 몸을 일으켜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입을 맞췄다. 입술이 열리고, 혀가 넘나들며 숨과 타액이 섞이다 떨어졌다.
“대신.... 나 자고 일어나서 잔뜩 하자.”
“...기억 안 난다고 하지나 마라.”
“응. 근데 나, 오늘 안에 못 깰지도 모르니까.... 너 기다리기 지루하면....”
“쓸데없는 감상은 그만두고 눈을 감도록. 내가 지켜주겠다.”
미안함에 길어지려는 말을 자른 벨져가 머리와 귀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토닥였다. 다시 한 번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고, 루이스는 도로 누워 눈을 감았다. 걱정할 거리도 긴장할 것도 없이 잠드는 게 얼마만인가. 견갑골을 문지르고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따뜻하고,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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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겨울만 되면 이런 게 보고 싶어지더라...
따뜻한 날씨. 내리쬐는 햇살. 먹구름도 자욱한 안개도 드리우지 않는 맑은 하늘.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하늘이 이곳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펼쳐진다. 그 풍경이 마치 제 모습 같아 루이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 이런 환경에서 큰일이라고 해봤자 고양이가 잼단지를 깨트린 것 정도다.
지루하고 심심한,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평화에 익숙해져도 되는 걸까.
“아직 날이 차다고 했을 텐데.”
“따뜻하니까 괜찮아.”
타박하듯 말하지만 어깨 위에 담요를 덮는 남자의 손은 더없이 다정하다. 보석보다 아름답고 바다보다 푸른 눈은 그의 손보다 더 다정한 걱정을 담고 있어 루이스는 사양하는 대신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른 벨져가 혀를 찼다.
그새 식어버린 차는 정원의 흙 위에 가차 없이 버려졌다. 비싼 차지만 루이스는 아깝다는 말도 그만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벨져 홀든이고, 이 집의 주인이며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권리다. 그저 몸을 위탁한 신세니 그가 그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자격이라기 보단 염치가 없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겠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태연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 저 역시 벨져의 소유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인, 부서지고, 깨진 인형.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섬세한 손길로 고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저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루이스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벨져를 시야에서 밀어냈다. 숨을 쉬듯 생각이 맴돌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안 그런 척 상냥하고 섬세한 도련님은 모질고 무딘 말에 상처받을 것이 뻔했다.
“너 오기 전에 너 닮은 고양이랑 놀고 있었는데.”
“기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털도 부드럽고, 애교도 많아서 귀엽더라.”
벨져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하자 그 잘생긴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만 더하면 토라질 눈치라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벨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네가 더 예뻐.”
“당연하지.”
가늘게 뜬 눈은 그대로지만 앙 다문 입술은 만족스럽게 휘어진다.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 우쭐해하는 표정이야말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뒀다. 찬바람에 몸이 차가워진 나머지 으슬으슬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일주일 전, 감기에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기침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루이스는 손으로 팔을 쓸었다. 바로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일어나. 들어가지.”
“그래야겠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굳어서인지 일어나려는데 눈앞이 아찔하게 흐려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도 이젠 일상인데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머리를 감싸고 중심을 잃은 몸을 붙잡은 벨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 발로 걸을 수 있으니까 안아들 생각 마.”
짐짓 엄한 척 목소리를 깔았지만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오만한 남자가 저를 업신여기며 재수 없게 굴 때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루이스는 매번 벨져를 밀어냈다. 이 안온한 환경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익숙해지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랬다간 돌아갈 수 없게 될 터였다.
벨져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테고. 루이스는 숨을 몰아쉬며 벨져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연합의 영웅이 있어야 할 곳은 전장이다. 자신의 가치를,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건 그 곳이고, 끝내는 것 역시 그곳이어야 한다. 아직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거운 걸음을 떼며 벨져에게서 떨어졌으나 벨져의 시선은 루이스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한 걸음 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가 있다. 벨져가 지켜보는 한 루이스는 무리를 해서라도 괜찮은 척 해야 했다.
“다리, 후들거리는 건 알고 있나?”
“괜찮아. 다리를 다친 건 아니거든.”
“그래. 대신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
“부정하지 않을게. 그래도 괜찮아.”
“하, 퍽이나.”
짧은 조소를 끝으로, 벨져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몸을 받쳐든 손과 팔은 조심스럽고,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부축한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거야?”
“그러다 또 한나절 걸려 들어가려고. 됐다. 사양하지. 네 몸이 못 버틸 거다.”
루이스는 더 말하는 대신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원치 않게 들려가는 신세에 기사의 품에 안긴 공주처럼 목에 팔을 감을 생각은 없다. 벨져는 숨 한 번 흐트러지는 일 없이 테라스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가장 볕이 잘 드는 따뜻한 방 침대 위에 루이스를 내려놓고 스물 네 시간 불을 꺼트리지 않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벨져.”
부름에 망설임도 없이 돌아본다. 그를 올려다보며, 루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왜 그를 불러 세운 것인지 자신조차 모른다. 그저, 돌아서는 등이 눈에 밟혔다.
“아니야.”
“하아. 또 미련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만 두도록.”
“아니. 크루통 넣은 치킨 수프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준비시키겠다.”
딱히 뭘 먹고 싶은 건 아니지만 벨져의 관심을 돌리는데 이만한 게 없다. 자기가 먹는 것보다 제게 무언가를 먹이는 걸 더 좋아하는 벨져를 돌려보내려 한 말이 먹혀들어 벨져가 걸음을 옮겼다. 고작 몇 걸음, 문이 닫히기까지 몇 초인데 그만 벨져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코가 간질거리며 재채기가 나왔다. 벨져가 돌아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앞으론 밖에 혼자 나가지 마라.”
“그냥 재채기가 나온 것뿐이야.”
성큼 다가온 벨져가 손을 들어 루이스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피부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엄지로 훔쳐낸 벨져는 코를 훌쩍거리는 루이스를 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감기가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라니까.”
“지켜보면 알겠지.”
루이스의 얼굴에서 손을 뗀 벨져는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린 채 방을 나갔다. 아마 돌아올 땐 따뜻한 수프와 생강과 레몬을 넣고 끓인 차를 가져올 것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누웠다. 몸이 차가워진 것은 사실이다. 고작 바람을 쐰 정도로 감기에 걸릴 정도로 몸이 약해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와 살로 만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벨져가 오려면 적어도 삼십 분은 걸릴 것이다. 딱히 무언갈 먹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벨져와 실랑이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여력도 없었기에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이라면 모를까 정말 잠들어버리면 벨져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꿈속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책을 읽고 움직였을 뿐인데도 피곤했다. 낮은 숨을 쉬고 있으면 천천히 몸이 무거워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을 일으키긴 커녕 눈꺼풀도 밀어 올릴 수 없다.
“루이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벨져의 작은 목소리 뒤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한 번 나고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덮고 있는 이불이 목까지 끌어올려지고 따스한 손이 머리를 덮었다. 그의 손이 닿아서야 머리카락이 차갑다는 걸 깨닫고 만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의식이 점점 더 멀어지고,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녹아 잠잠해졌다.
그새 잠든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벨져는 한숨과 함께 손을 멈췄다. 기침이 멎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몸이 약해지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라지만 마음 한 켠에선 그 명제를 부정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거나 무술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결정 능력 하나 있다고 전방에 설 수 있을 리 없는데도. 특별히 생각할 것도 없다. 앤트워프에서 마주친 그 때부터 루이스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내였으니.
억지로 그 자신을 갉아먹으며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빠져나간다. 그 아련하고 서늘한 감촉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멈췄다.
참아보려 해도 한숨이 새어나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약해진 남자를 볼 때면 걷잡을 수 없이 의식하기도 전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루이스는 녹아내리기 시작한 빙산처럼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었고, 자신은 그를 돌보는 동안 그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견고한 마음에 금이 간다.
루이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만히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다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 남자는 자신이 부서지며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내 참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와서야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고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스러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돌보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뿐이다. 벨져는 루이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불을 뗀 탓에 공기가 건조했고, 건조한 공기는 환자에게 좋지 않다. 기껏 나은 감기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벨져는 창문을 조금 열고 수건을 적셔 방 안 곳곳에 걸었다. 루이스가 이 방의 주인이 된 그 날부터 죽 벨져가 해온 일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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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04.
“우산 없었습니까?”
“어차피 씻으면 그만인데요, 뭘.”
비가 내리는 저녁, 쫄딱 젖은 채로 돌아온 그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천이 바닥 타일에 철퍽 떨어지고, 문이 닫히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나는 스토브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날도 추운데 비를 맞아놓고 찬물로 샤워를 하려면 몸이 차가워지는 게 당연했다.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루이스는 금세 욕실을 나왔다. 머리 위와 허리에 수건을 둘렀을 뿐인 그는 추위에 무방비했고, 발뒤꿈치를 든 채 덜덜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고 걸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 잠시 담요라도 덮어주기 위해 다가갔다.
“루이스.”
흠칫. 담요를 덮어주기 위해 젖은 맨 어깨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루이스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맹수 앞에 선 토끼같이 떨리는 몸과, 희게 질린 얼굴, 붉은 눈동자 위에 드리운 속눈썹에 물기가 어려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표정을 감추기 힘들 정도로, 아찔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차는 뭘로?”
“아무거나 괜찮아요.”
흰 피부. 왜소하지도, 근육이 과하지도 않은 다부진 몸. 섬세한 잔 근육이 팔을 올리며 드러나고, 이내 밋밋한 천에 가려졌다. 그게 무척이나 아쉬워 나는 그의 맨 등에 손을 얹고, 손끝에 닿는 피부를 느끼며 근육 하나하나를, 그 아래 혈관의 떨림까지 모두 가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군데군데 총상이며 자상, 그을린 흉터까지 온전한 곳을 찾기 힘든 몸이지만, 고작 그런 것들로 본래의 매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구석구석 핥고 입 맞추고 싶어 목이 탔다.
빤히 지켜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루이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흘긋, 책망하듯 보는 시선에 나는 찻잎을 고르는 척 딴청을 피웠고, 루이스가 허리에 묶어둔 수건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수건 아래 감추고 있던 허리와 엉덩이가 드러났고, 나는 그의 몸을 눈에 새겼다.
매끈한 허리와 희고 튼실한 엉덩이. 거기에 허벅지로 떨어지는 라인까지, 양껏 눈요기를 하다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물을 찻잎 위에 부었다. 찻잎이 투명한 물을 물들이며 떠다니고, 루이스가 팬티와 바지를 걸쳤다.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척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귀여운 사람 같으니.
“밥은 먹었습니까?”
“아. 깜빡했어요.”
“차보단 수프가 낫겠군요. 머리라도 말리면서 기다리시죠.”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디건을 집어 들었다. 스톡을 끓이고, 간단하게 루를 만들어 섞은 뒤 후추와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수프가 완성되고, 남은 빵으로 만들어둔 크루통을 올려 마무리했다. 한 손엔 수프, 한 손엔 숟가락을 들고 가는데 그새를 못 참고 드러누운 루이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샜다.
입을 벌린 채 잠든 건 그렇다 쳐도, 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테이블 위에 뜨거운 수프를 내려놓고, 그릇을 들고 오느라 뜨거워진 손을 그의 배 위에 올렸다. 그냥 올린 건 아무렇지도 않은지 루이스는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팔을 가슴 위에 올릴 뿐이었다. 그에겐 다소 큰 내 가디건의 소매가 그의 손등을 덮고 손끝이 앙증맞게 나와 있어 장난기가 돌았다.
“헉, 흣...!”
매끈한 배를 문지르다, 노골적으로 간질이자 루이스가 퍼드득 몸을 떨며 일어났다. 놀라 깬 그가 나를 칠 뻔했지만 버둥거리느라 팔이 허공을 휘젓고 허무하게 내려갔다. 나는 킬킬거리며 다시 부드럽게 그의 배를 쓰다듬었다.
“만져달라는 줄 알았지 뭡니까.”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체념한 듯 한숨을 쉰 루이스가 그의 배 위에 손을 얹은 내 손을 잡아 떼어냈다.
“당신... 가끔 엄청 아저씨 같은 거 알죠?”
“변태 같다고 해도 됩니다.”
“알고 있네요.”
“뭐....”
어깨 으쓱이자 루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흘겨보는 게 아닌, 조금 진지해진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건조한 눈빛이 향하는 곳은 자신의 배다. 니트 아래 가려진 피부에 자리한 문신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먼저 운을 뗐다.
“만져도 됩니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냥...”
“그냥?”
“...아파보여서요.”
“그렇습니까?”
한참 뜸을 들였던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 보인다니. 생각해본 적 없는 감상에 나는 솔직히 답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요. 알다시피,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군요. 당신도 해보는 건?”
루이스는 고개를 젓다가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눈은 비록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내 옆구리에 자리한 문신과 그 아래 흉터들, 그리고 실밥을 빼고 분홍색 새살이 돋은 상처가 선명히 떠오를 터였다.
상처투성이인 것은 같은데, 어째서일까. 이 사람은 너무 상냥하다. 그의 상처는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다친 희생의 결과가 아닐까. 루이스의 손이랑 등에 무수히 많은 흉터를 떠올리며 그의 손끝을 지긋이 보고 있으니 루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소매 아래 가렸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 이것부터 들어요. 더 식기 전에.”
거짓말. 실은 다 알고 싶으면서.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으며 몰아붙였다간 겁을 먹고 달아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든지 감정의 거리를 넓히고, 토끼처럼 굴을 파고 숨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릇을 받아든 루이스가 냄새가 좋다며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턱을 괬고,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루이스는 그릇을 비우고 맛있었다는 말로 감사를 표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상.
“읏.”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자란 손톱에 또, 니트의 보풀이 걸렸다. 손톱 아래 약한 살에 파고드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손톱에 걸린 니트의 보풀을 뜯어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손톱이 자라서 자꾸 걸리는 것뿐입니다.”
“당기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요.”
루이스는 그릇을 내려놓고, 바느질용 작은 가위를 가져와 내 손을 잡고 보풀을 끊었다. 끄트머리만 남은 실 가닥을 빼려했으나 루이스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톱 가장자리에 가위를 댔다. 조심스럽게 손톱의 흰 부분을 자르는 루이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상처라도 입힐까 작은 가위질에 공을 들이는 게 나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 같다. 뿌듯해진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 위에 나의 손. 자연스럽게 루이스의 손을 보게 된 나는 짧게 자른 손톱을 보고 띠웠던 미소를 지웠다. 이렇게 손이 예쁜데, 아깝다.
잘려나간 손톱 조각이 다섯 개가 되고, 나는 반대편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렇게 짧게 자르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책을 만지다보니 종이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책을 만지는 일을 하는구나. 그의 몸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책 냄새라는 걸 알고 나니 책이 가득한 장소에서 차분학고 고요히 책장을 넘기는 루이스가 떠올랐다. 모양 좋은 손에 자리한 상처는 종이에 벤 상처라기엔 투박하고 훨씬 깊었지만 새삼 떠오른 호기심에 잠시 위화감을 덮었다. 나는 이 사람이 몇 살인지도 모른다. 그저, 이십대 초반쯤 되겠거니 짐작할 뿐.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군요.”
“아뇨, 뭐 익숙하니까. 고아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왠지 모를 동질감에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나의 손등을 토닥이고, 떼어냈다. 이 거리를 좁히려면, 당신에게 더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욕망을 채우려면, 그렇게 하려면.
“루이스.”
“정말 괜찮아요. 혼자인 것도,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니니까. 그냥 가끔 외로울 뿐이죠.”
쓰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을 잇는 그의 손을 잡아 쥐고, 나는 눈을 맞췄다. 루이스는 난색을 표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놓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봤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루이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당황해 나를 일으키려는 그의 손을 잡고, 나는 홀린 사람처럼 말한 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른 입술과, 그보다 더 건조한 손등. 경애의 키스. 이 사람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루이스....”
“그만, 다 됐으니까 일어나요.”
그의 손등에 뺨을 부비다 나를 일으키는 그를 올려다보며 열기에 가득 찬 숨을 쉬었다. 루이스. 나의 사랑. 그래. 이것은 사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마음을 해명할 길이 없다. 당혹스러워하는 그를 더 몰아붙이려다가, 나는 인내하기로 했다.
본디 좋은 사냥꾼은 인내할 줄 아는 법이다.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려, 상처 하나 없이 사로잡을 그 때까진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시야에 두고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당신을 내 손에 넣고, 내 품에 가졌을 때, 당신은 어떤 표정을 할까. 상상만으로 등골이 오싹거리는 희열에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뜨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혜를 갚겠다는 겁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알겠으니까 일어나요.”
“물론 갚는 방법은 제 마음대로입니다만.”
“잘 모르겠지만 거부권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글쎄요. 두고 보시죠.”
“처음으로 두고 보자는 말이 두려워졌어요.”
“저런. 책임지고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죠.”
“그런 뜻이 아닌데요.”
나는 능청스럽게 싱긋 웃으며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널브러졌고, 하품을 했다.
“졸리면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누가 자꾸 자는 동안 추행을 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까?”
“네.”
“인과를 따지자면, 당신이 자꾸 누군가에게 달라붙어서 끌어안는 게 먼저입니다만. 주의하도록 하죠.”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고,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가 묘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나는 차가운 물에 그릇을 씻으며 애써 그를 모른 척 했다. 루이스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고, 나의 말도 사실이었으나 나는 온전히 내 의지로 잠든 그를 만져댔기에 언쟁에선 불리했다.
물론 그가 이 쓸데없고 하찮은 언쟁에 이긴다 해도 다시 혼자 자는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릇을 마른 천으로 닦아 올려놓는 사이 루이스는 침대에 누웠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자는 얼굴이 정말 귀엽다. 괜히 볼을 콕콕 누르며 괴롭히고 싶은 충동에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눈을 떠 나를 흘겨보는 바람에 놀라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상한 생각 말아요.”
“이상한 생각이라니, 어떤?”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긴 어려운지 루이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홱 돌아누웠다. 토라진 아이 같은 반응에 나는 소리 내어 웃었고, 루이스는 하나뿐인 이불을 그의 몸에 꽁꽁 둘렀다. 그만 웃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애벌레 같은 모양새가 귀여워 웃음이 멎질 않았다.
“좋아요. 제가 졌습니다. 쿡, 큽.”
“비도 오는데 어디 계속 해보시죠.”
“오, 내쫓기라도 하려고요?”
“못할 것도 없죠.”
루이스는 시니컬하게 대답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나는 허리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이불 위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댔다.
“봐주시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비오는 거리로 내쫓기다니 처량하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 문 앞에서 동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르고요.”
“신원 미상의 시체가 한 구 늘겠네요.”
“루이스.”
지그시 그를 바라보자, 따박따박 시니컬하게 대답하던 루이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꽁꽁 싸맨 이불을 조금 풀고 몸을 벽에 가까이 붙여 자리를 만들어준 그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하고, 나는 좁은 자리에 내 몸을 욱여넣었다. 침대를 넘어가는 긴 다리로 루이스의 다리를 감싸고 한 팔은 그의 허리에 감자 비로소 안정감이 들었다.
“나는 가끔, 당신 없이 어떻게 잠드나 싶습니다.”
루이스는 등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역시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바람은 더 차가워지고 있기에 혼자인 밤은 더더욱 외롭고 추워질 터였다. 함께 라는 것만으로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 또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곤히 잠들 리가 없다. 나는 그의 허리를 안고,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씻은 지 얼마 안 되는 그의 몸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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