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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병약한 도련님 벨져와 그 하인 루이스 시리즈
정원을 가로질러 장미덩굴로 휘감은 퍼걸러를 지나면 나오는 유리 온실. 어느덧 일상이 된 산책길에 벨져는 여느 때와 같이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저 몰래 차에 약을 탄 건 괘씸하지만 루이스는 자기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골탕을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요 며칠 사이 몸상태도 부쩍 좋아진 것도 사실이라 벨져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했다. 물론 말로는 주인을 속여먹은 괘씸한 하인을 벌주는 중이지만 고작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그렇게 험한 길도 아니니 사실 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고작해야 몇 종류의 티푸드와 간식, 그걸 담을 플레이트와 은식기, 찻잔 세트,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 정도일까. 벨져는 앞서 걷던 루이스가 멈춰서는 걸 보고 양산을 고쳐 들었다. 벌써 지친 거냐고 한소리 하려는 찰나 루이스가 들꽃 하나를 꺾어 들었다.
“그런 게 취향인가?”
“정원이나 온실에 있는 꽃은 꺾으면 쫓겨나기도 전에 요제프씨한테 혼나잖아요.”
“변명하고는.”
참 자기 같은 꽃을 고른다 했더니, 대는 이유도 보잘 것 없다. 루이스는 양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팔에 끼우고 꽃줄기를 만지작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뜻대로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중했다.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싶어 슬쩍 넘겨보려 하면 냉큼 감추고 시치미를 뗐다.
“으왓.”
그러다 발밑도 못 보고 넘어질 뻔 한 건 덤이다. 줄곧 루이스를 주시하던 벨져가 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넘어졌다간 피크닉 바구니 안의 내용물이 엉망이 됐을 터였다.
“걸려 넘어질 것도 없는 길에서 한심하기 짝이 없군.”
“감사합니다.”
“깨트렸다간 변상도 할 수 없는 찻잔이니 조심해야지. 그랬으면 몸을 팔아도 부족할 거다.”
“네?”
경악으로 물든 눈빛에 벨져는 제 입에서 '몸을 판다'는 말이 다른 의미로도 들릴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경박한 사고방식이지만 출신이 그러니 그런 쪽으로 해석하는 것도 도리가 없다. 벨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하인을 위해 친히 해설을 덧붙였다.
“내기를 말하는 거다. 네가 이 집에 빚을 만들면 그걸 갚는 동안은 달아날 수 없으니까.”
“아.”
“네가 시작한 내기였다만.”
벨져는 이제야 겨우 생각났다는 듯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서있는 하인을 향해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물론 기억합니다.”
“흥. 그 바보 같은 표정이나 어떻게 하고 말하지 그래. 그리고 그 얼굴,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하지 마. 내 격까지 떨어지는 것 같군.”
“네, 분부대로 하죠.”
말하는 사이 도착한 온실 문을 열자 진한 꽃향기가 진동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왔는데 숨이 차지 않는다. 그냥 걷기만 한 게 아니라 말을 한 걸 생각하면 더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 빌어먹을 약이 차에 섞여 더 효과를 냈나 보지. 벨져는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이제는 두 사람의 지정석이 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벨져가 양산을 접고 땀을 식히는 사이 루이스는 테이블에 가져온 것들을 차렸다. 반듯한 삼각형으로 자른 오이 샌드위치와 스콘, 스콘에 곁들일 클로티드 크림과 찻잔 두 개가 오늘의 티타임 메뉴다. 벨져의 변덕 때문에 다른 것도 이것저것 들어있지만 이 정도면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했다.
“잘 드시네요.”
“무슨 뜻이지?”
“웬만한 건 입에도 안 대시는 분이 오이 샌드위치 같은 걸 드시는 게 조금 신기해서요.”
“단 걸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딱히 오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너는 싫어하나?”
“아뇨. 음식은 가리지 않아요. 그래도 기왕이면 햄이나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가 좋지만요.”
“점잖지 못한 취향이군.”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그런 싸구려가 잘도 들어간다는 표정이다. 루이스는 소리 내서 웃지 않기 위해 애쓰며 제 몫으로 넘겨준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왕창 바르며 대답했다.
“뭐, 아시다시피 그런 출신이니까요. 먹었을 때 배가 차는 쪽이 좋죠.”
“그럼 티푸드는?”
“딱히 가리지 않아요. 살면서 먹어본 것보다 여기 와서 처음 먹어본 게 더 많고. 빵에 쨈만 있어도 감지덕지죠.”
“알 만 하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버릇 하지 못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벨져는 책갈피를 끼워둔 부분을 찾아 책장을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바구니를 열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끔 차에 곁들이는 간식이다. 제비꽃 사탕을 꺼낸 벨져는 루이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동그란 케이스를 열어 자기 입에 한 알을 넣고, 또 하나를 내밀자 루이스의 입술이 다가왔다. 당연히 손을 내밀겠거니 생각했던 벨져는 놀라 숨을 집어 삼켰다. 순간이나마 손끝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과 열린 입술 사이로 끼친 더운 숨에 놀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작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 벨져는 고개를 돌렸다. 오도독 굳힌 설탕 입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꽃잎이네요.”
“...그래.”
“도련님이 좋아하실 만 하네요.”
무슨 뜻이냐 물었겠지만 왠지 지금은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벨져는 허리를 더 꼿꼿이 세우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거 드릴게요. 답례라고 하긴 뭐하지만.”
엉성하고 서툴지만 어찌어찌 잘 봐주면 그럭저럭 반지로 보이는 형태다. 루이스는 답지 않게 머쓱해하며 말을 덧붙였다.
“실은 화관을 엮어드리고 싶었는데 여기 꽃들은 함부로 꺾을 수가 없어서요. 잡초라고 생각하셨는지 비슷한 꽃도 안 보이더라고요. 보통은 지천에 널린 꽃인데.”
벨져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이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당당하게 내민 손은 끼워주길 요구하고 있었기에 루이스는 어느 손가락에 맞을까 고민하며 꽃반지의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흐응. 짧은 콧소리와 함께 벨져가 검지와 중지를 접었다. 남은 선택지는 둘. 망설임 끝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에스코트하듯 잡고 새끼 손가락에 꽃반지를 끼웠다. 그마저도 크기가 안 맞아 둘째 마디에 걸리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기분이 영 이상했다.
“이러니까 꼭....”
묘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혹은 긴장하고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 루이스는 벨져 손에 끼운 꽃반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충성 서약 받는 것 같군.”
“프로포즈 하는 것 같네요.”
동시에 흘러나온 말의 차이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이상했다.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비슷한 상황이니까. 그렇지 않나?”
“방금 하신 말 똑같이 돌려드리죠.”
“흐응. 프로포즈 반지라기엔 너무 초라해서. 아, 미안하다고 하면 되나?”
“...그냥 말을 마세요.”
루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벨져를 외면했다. 항복을 받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벨져는 흡족한 미소를 띠고 그의 새끼손가락에 걸린 꽃반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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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05.
전에 쓰던 시리즈에서 이어집니다.
숨이 찬다. 이대로는 잡히고 말 것이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을 피해서, 나를 쫓아오는 그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숨고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안 돼. 누군가, 누군가 나를 좀 도와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에 단내가 나는데도 잡히면 죽을 거란 공포에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만, 이제 그만.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는 어둠, 보고도 외면하고 마는 사람들. 아무리 외쳐도, 아무리 울어도 도움은 오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는 달려야 한다.
급박한 발소리, 나를 쫓아오는 사냥개, 울리는 소리. 온 힘을 다해 달리던 나의 몸이 크게 굴렀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끈적하고 소름끼치는 어둠이 발목을 휘감고 나를 쫓던 이들이 서서히 손을 뻗었다. 발버둥 칠수록 몸을 휘감은 어둠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몸을 뒤덮었다. 빛 한 줌 보이지 않는 어둠에 집어삼켜지며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싫어, 제발, 그만...!
마지막 발버둥으로 뻗은 손이 잡혔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일으키는 감각에 눈을 뜨자 짙은 어둠 속에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보였다.
“괜찮아요? 무슨 꿈을 그렇게....”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쿵쿵 뛴다. 불안과 공포, 일방적으로 무력하게 쫓기는 감각이, 그 때의 심장소리가, 아직도 달라붙어있는 것 같다. 마른 침을 삼키자 젖은 손이 등을 쓰다듬다 떨어졌다.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얼굴에 겨우 꿈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그를 꽉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에 뺨을 부비며 숨을 토하자 그제야 밖에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저, 나 옷이 젖어서....”
루이스는 그의 그 순박한 목소리로 난처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나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남성의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안심이 된다. 루이스의 손길은 자상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소리와 미지근한 체온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도닥였다.
“괜찮아.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모르면서, 루이스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나의 등을 토닥였다. 일순 든 충동에 고개를 든 나는 곧장 그에게 키스했다.
“읏...”
당황한 듯 움찔한 그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혀를 얽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진하고 질척한 키스가 주는 아찔한 쾌감에 나는 공포도, 불쾌한 악몽도 전부 단번에 잊어버리고 혀와 입술에 집중했다. 처음에 밀어내려던 루이스도 양순히 입을 벌리고 내 혀를 빨고 입술을 부딪치며 입술과 혀를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숨이 가빠지고 혀뿌리가 뻐근하도록 이어지는 키스에 나는 루이스의 뒷목을 잡고 고개를 돌려 각도를 바꿔가며 혀를 밀어 넣었다. 젖은 몸을 더듬다 그의 허리를 잡으려는데 루이스가 나를 떼어내고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이제 진정했어요?”
“...조금은요.”
“음. 아래는 아닌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도 붉어진 뺨과 살짝 풀어진 눈시울이 예뻐 정신없이 쳐다보던 나는 그의 눈짓에 팽팽하게 솟은 바지춤을 발견했다. 아랫배에 묵직한 열이 쏠린 건 루이스와 있을 땐 으레 있는 일이었고, 키스를 하다 보면 또 그렇게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혼자 지내며 손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는 루이스를 붙잡으려 했으나 루이스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다 안다는 듯 슬쩍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리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깝고 분해 눈살을 찌푸렸으나 옷장을 향해 돌아선 루이스에게 보일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젖은 후드재킷을 의자에 걸어놓고 젖어버린 티셔츠를 벗었다. 꼼꼼하게 균형이 잘 잡힌 등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사이 새 옷을 입은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턱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해결하고 와요. 기다릴 테니까.”
“당신이 먼저 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너무 지쳐서 힘들어요. 오늘만 봐줘요. 나도 그럴 테니까..”
나는 방금 전의 키스를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는 루이스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눕히고 하던 것을 마저 이어가고 싶지만 그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싫다.
망설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옷을 벗으면 어떻게 될지 안다는 듯 젖은 바지는 벗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다.
“...먼저 잠들지 마세요.”
“노력해보죠. 너무 기대는 말고.”
겨우 나온 말이라는 게 이런 거라니,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약간의 침묵과 약하고 애절한 말투로 루이스는 경계를 풀고 미소 지었다. 나는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 화장실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거센 빗소리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루이스의 체중을 받아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를 듣고 지퍼를 내려 단단히 일어선 물건을 손에 쥐었다.
“큿... 흐.... 루이, 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뜨겁게 맥동하는 욕정에 나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그의 단정하고 말간 얼굴이 흥분을 못 이겨 달뜬 신음을 뱉으며 쾌감에 물드는 걸 보고 싶다. 몸에 난 상처와 흉터 위에 입을 맞추고, 흰 목을 물고, 그리고, 그리고.
“후우.... 하.... 하, 하하....”
다리를 벌리고 그의 안으로 파고드는 상상 끝에 나는 사정했다. 정액을 토하며 꺼떡이는 분신도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으나 아직은 상상에 불과한 욕망일 뿐이었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 아무리 친절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해치려드는 사람을 계속 품어주진 않을 테고, 그랬다가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 뿐이다.
더해가는 열감 속에 흥분하면서도 철저한 계산을 하고 마는 자신을 알면 루이스는 더 경계할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비치는 건 어딘가 세간의 상식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자신이 아닌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자신이다. 그럼 결코 나를 버리지 못할 테니까.
루이스의 미소와, 곤란해하면서도 끝내 받아주고 말 때의 표정을 떠올린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그가 조금 더 마음을 놓고, 내게 익숙해지면 이렇게 혼자 달래지만은 않을 것이다.
도저히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어진 나는 더운 숨을 내쉬며 땀과 정액으로 젖은 손으로 다시 내 분신을 감싸고 짜릿한 상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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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루이] 세상의 끝
존잘님 생일 선물로 드렸던 리퀘 시리즈 첫 번째
배경만 좀비 아포칼립스...ㅠ
일상이 무너졌다. 평범한 일상을 지탱하던 커다란 시스템의 붕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은 너무나 빠르고 쉽게 무너지고 부서졌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죽은 자가 걸어 다니고, 한 때 가족, 친구, 혹은 그저 지나치는 행인에 불과했던 이들이 원초적인 위협을 가하는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 날 전까지는.
“다이무스. 일어났어요?”
“지금 막 가려던 참이다.”
“이글이 또 말썽이에요.”
상념을 정리하던 다이무스는 한숨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새벽 내내 불침번을 섰기 때문이지만 동생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보다 더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 나니 정신을 흐리고 무르게 만드는 약에 의존하고 마는 녀석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민폐를 끼치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세간의 상식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맏형의 책무는 세상의 붕괴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루이스.”
녀석이 몸을 지배하는 짜증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약을 찾듯, 다이무스는 앞서 걷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 자신을 마주하도록 돌려 세우고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루이스는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으나 이내 입을 벌리고 숨과 혀를 섞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격식을 차릴 것도, 체면을 차릴 것도 없으니 전부 내던지고 단 둘이 되고 싶었지만 루이스는 그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는 게 다이무스 한 사람일리 없으니 이미 여러 번 유혹을 받았을 텐데 여기 계속 있지 않은가.
루이스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그런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이무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책임을 다할 때까지는 그 누구의 손도 잡지 않으리라는 것도.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벨져가 짜증을 부리는 거라면 언제나 있는 일이니 신경 쓸 거 없다.”
“그냥 짜증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음. 좀처럼 타협을 모르는 녀석이니까.”
그 말이 그의 여린 마음을 찔렀는지, 루이스는 허리를 안고 뺨에 입 맞추던 다이무스를 밀어냈다.
“루이스. 나는....”
“알아요. 일단은 이글부터 보러 가죠.”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나머지 그만 말을 잘못 골랐다. 급박한 상황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흔한 일이라지만 세 형제가 모두 같은 사람에게 꽂히는 건 극히 희박한 확률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남성이라는 것까지 더해지면 여간 난처한 게 아니다.
루이스는 누군가를 선택할 상황이 아니라며 모두 거절했지만 생존자 캠프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나 형제 사이에 불협화음이 나는 것을 전부 그의 탓으로 생각했다. 원래부터 형제간의 우애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사실도 루이스에겐 전부 다 보이는 변명에 불과했다.
유력가의 자제로 태어나 부족함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사람 하나를 얻지 못해 이렇게 궁색해질 줄 몰랐기에 더더욱 홀든의 세 형제는 루이스에게 매달렸다. 무언가에 열중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세상 탓이기도 했다.
“이게 다 무슨....”
“아, 왔어? 둘이 같이 올 줄은 몰랐네.”
“이글.”
“안 터트릴 테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응?”
방 안에 폭약을 잔뜩 쌓아두고 회로와 라이터를 들고 있던 이글이 회로를 내려놓고 루이스에게 안겨들었다. 이글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루이스에게 뺨을 비비며 다이무스를 향해 혀를 내밀었고, 안 그래도 힘이 잔뜩 들어간 다이무스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 똑같은 짓을 해댔음에도 불쾌했다.
“내가 처리하지.”
“루이스. 응? 한 번만. 한 번만 하자. 그럼 얌전히 있을게. 응?”
이게 한 두 번이 아니었는지, 이글은 집요하게 루이스의 허리와 엉덩이를 더듬으며 매달렸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치를 보며 이글을 밀어내려 했으나 완력의 차이는 그리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이스. 난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영악한 녀석 같으니. 다이무스는 이글의 수완에 혀를 내두르며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으로 능구렁이처럼 온갖 문제를 다 피해가고, 보급품도 은근슬쩍 더 챙기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눈앞에서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읏, 이글!”
각자의 방식에 끼어들지 않기로 맺은 약속만 아니었다면 매달리는 녀석을 바로 떼어냈을 텐데. 다이무스는 겨우 이글을 떼어낸 반동으로 휘청거리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이거 당장 해체해서 레이튼 씨한테 돌려드려. 네 입으로 어떻게 된 건지 해명하고, 앤지한테도 네가 직접 말해.”
“같이 안 가줄 거야?”
“먼저 약속을 어기고 제멋대로 군 건 너야. 그런 표정해도 안 봐줄 거니까 알아서 해.”
한껏 가여운 척 울상을 짓던 이글이 루이스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루이스는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폭탄으로 가득 찬 방을 나가버렸다. 형으로서, 경쟁자로서 한 마디 할 차례였다.
“이글.”
“알아, 알아. 도화선 설치도 안했다고.”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형이랑 작은형이 무슨 생각인지는 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지? 우리 영웅님은 나랑 더 끈끈한 사이거든. 아까 못 봤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어제 새벽에 형이랑 작은형이 싸운 건? 자기들도 할 말 없으면서.”
이글은 코웃음을 치며 켜켜이 쌓아둔 폭약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젯밤이라는 얘기에 잠시 펴져있던 다이무스의 미간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아니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지 몰라도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우리 다이무스 홀든 경께서 더러운 편법까지 동원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어. 나도 아니고, 형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니 나도 좀 놀랐지 뭐야?”
“이글.”
“작은형이 화낼 만 했던데? 하필이면 형이랑 루이스가 같이 정찰을 가는 날 다른 조원들이랑 연락이 끊기고, 루이스가 다쳐서 급하게 피했는데 거기에 물자며 약이며 방공호까지 있어. 너무 우연이 과하지 않아? 둘이 그렇게 사라져버리지 않은 게 얼마나 놀라운지 말 안 해도 알겠지?”
다이무스는 이글이 손을 꼽는 것을 지켜보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
“이제는 부인도 안 하는 거야? 너무하네. 내가 이십 사년간 알고 있던 다이무스 홀든이 아닌 것 같아.”
“사회의 상식과 규율에 묶여있던 것뿐이다.”
“이제 그 사회가 붕괴했으니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 여기엔 또 이곳만의 규율이 있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아무리 스노우 퀸이 자애롭더라도 이 정도 양의 폭약을 빼돌렸다는 게 알려지면 총살을 면하기 힘들 테니.”
“괜찮아. 난 루이스가 살려줄 거거든.”
“그럼 그 전에 누군가가 널 처리할지도 모르지.”
다이무스의 싸늘한 말에 선을 분리하던 이글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의 다이무스 홀든이라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랑에 눈이 멀고 질투에 타오르는 게 아니라 미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사실, 미치지 않는 게 더 어렵긴 했다.
“형. 그거 알아?”
“사실 우리 중에 형이 제일 못된 거. 바보같이 규칙에 얽매여 있는 척, 온갖 고상하고 고결한 척은 다 하지만 속은 제일 시커멓잖아. 아무리 나라도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지는 않거든.”
“...동료의 범위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지.”
이글은 방을 나서는 다이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동안 가문이며 회사며, 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았던 벨져나 자신과 달리 억눌린 게 많았다는 건 알지만 평생을 망나니인 척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던 이글의 눈에도 다이무스의 행동은 너무 과격했다.
그를 구성하고 있던 체제와 규칙, 시스템이 무너지니 함께 무너지기라도 한 걸까. 이래서야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나 다를 게 없다. 미친 듯이 달리다 그 자신도 다른 열차도 들이받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겠지. 문제는 그 다른 열차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성격에 저렇게 된 게 자기 때문이라고 하면 절대 끊어내지 못하겠지. 이글은 벽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 푹 숨을 내쉬었다. 루이스를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루이스가 다이무스를 선택한다 해도 절대 저런 상태의 다이무스에게는 넘겨줄 수 없었다.
더 어그러지기 전에 수를 쓰지 않으면. 이글은 입술을 매만졌다. 경쟁자들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고, 그를 거머쥐려면 단순한 생각을 뛰어넘어 치밀한 계략이 필요했다. 지난 밤 잠든 루이스가 그도 모르는 사이 중얼거린 이름을 떠올린 이글은 뜻 모를 웃음을 짓고 다시 하던 일에 착수했다.
사람을 찾아 옥상을 오른 루이스는 진한 주홍색으로 물든 하늘을 등지고 검을 휘두르는 남자를 발견했다. 사실 임시 거처로 쓰는 쇼핑몰이 아무리 넓어도 그가 있을 곳은 여기밖에 없기도 했다.
“여기 있었네.”
“잔소리라면 사양하지.”
“그런 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그럼.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하러 오셨나? 그 외엔 딱히 듣고 싶지 않군.”
시니컬한 말투가 왠지 기뻐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루이스는 그에게 다가갔다.
“난 괜찮아. 큰 부상도 아니었고. 멀쩡히 돌아왔잖아.”
“넌...!”
계속 무시하다 뒤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음에도 아름다웠다. 루이스는 난간에 걸터앉아 눈부신 석양을 등지고 벨져를 바라봤다. 머리까지 올려 묶고 격양된 감정을 풀어내던 벨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 마음을 뒤흔든다. 벨져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역광이 지는 바람에 그런 것도 있지만 기분이 언짢기도 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봐선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구름이 드리우며 루이스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뭐가 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전부.”
“그것도 나 때문이야?”
“쓸데없는 소리만 할 거라면 가겠다.”
“알잖아.”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등을 돌려 걷던 벨져는 걸음을 멈췄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살아만 있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마음을 할퀴고 있는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했다.
언제나 명확한 것들뿐이었던 벨져의 세계에, 루이스는 유일하게 혼란을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만 자신을 잃고 발을 헛디디고 만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잖아.”
“...그래.”
루이스는 그 말을 내뱉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이 수척했다. 아스라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에 벨져는 입술을 물었다가 루이스의 옆에 섰다.
단둘이 있음에도 말을 고르고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낼 수 있는, 루이스가 감추고 있는 비밀. 벨져는 알면서 입을 다물었다. 함께 가자는 말을 거듭해 거절하는 이유도, 초라하고 나약한 이들을 지키려는 마음도 전부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벨져는 루이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옆에 두고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겠지.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남자 때문이었다.
“내가 화가 난 건 형아가 널 독점하려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럼?”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나는 여기서 죽어도 된다는 생각.”
루이스는 엷게 웃었다. 그 희미한 웃음은 정답이라는 뜻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벨져는 더 화가 났다. 걱정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다. 애초에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이 꼴이 났다지만 벨져 홀든과 벨져가 가진 정보를 원하는 곳은 많았고, 벨져는 그 후보들 중 마음에 내키는 곳을 고를 수 있었다. 가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루이스가 떠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나?”
그 아련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아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건 그의 탓이 아니다. 그저 막지 못했을 뿐. 아무리 특수요원이라 한들 화학병기와 싸울 수는 없다. 한 발 늦은 건 벨져 역시 마찬가지였고, 세상에는 아직도 그보다 더 악질적인 이들이 그들만을 위해 만든 벙커에 숨어 호의호식하고 있다.
루이스 역시 그 거대한 음모에 대해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떨쳐내지 못할 뿐. 그래서 안전을 확보한 뒤에도 정찰대를 꾸려 생존자를 찾아 나서고, 위험을 감수하고, 매일같이 죽음 속에 자신을 던지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루이스의 무모한 행동을 두고 영웅이라 칭했지만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미안.”
“반성이 동반되지 않은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게.”
담담한 목소리에 더 울컥한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어깨에 떨어지고 루이스와 벨져의 얼굴 사이에 커튼처럼 드리웠다.
“넌 아무것도 몰라.”
침묵을 지키는 그의 눈에 어린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벨져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부르트고 거칠어진 입술임에도 끔찍이 좋았다. 그래서 더, 오래 맞대고 있기가 힘들었다.
“벨져.”
“닥쳐.”
“미안해.”
팔을 잡은 채 읊조리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벨져는 루이스를 품에 안았다. 숨이 막혀오는데도 놓을 수가 없다.
“그 때가 좋았지. ”
“그 때 널 완전히 밟아놨어야 했는데.”
벨져는 루이스의 웃음소리에 발끈하는 대신 그 날의 루이스를 떠올렸다. 스무 살의 자신과, 스물 한 살의 루이스. 참 질긴 악연이다. 그 때 널 만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네가 이렇게 괴롭지 않았겠지. 벨져는 말을 삼키고 루이스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애틋했다.
“내가 지금....”
“하지 마.”
“...그래.”
내가 지금 널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면 무슨 터무니없는 소망도 전부 들어주고자 할 것임을 알기에 벨져는 루이스의 말을 끊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잠시 이렇게 세상에 단 둘뿐인 것처럼 서로를 안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은 짧고, 부서지기 쉬우니까. 우리의 세계가 무너지고 부서져 온전치 못하더라도 지금 이 찰나에 우리가 완전했다는 것이면 충분하다.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모를 것들이지. 벨져는 말을 삼켰다.
“참. 이거.”
루이스는 주머니에서 뜯지 않은 담뱃갑을 꺼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쇼핑몰에 자리를 잡은 덕에 부족한 생필품은 거의 없었으나 언젠가는 소모되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호품은 더 귀한 사치품이 되어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꽤 괜찮은 방공호였나 보군.”
“클램차우더 스프 캔도 있더라.”
벨져는 비닐을 뜯고 입에 담배를 물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도 담배지만 자신을 생각해 가져온 마음이 기뻤다. 한 대 피우겠냐는 뜻으로 담뱃값을 내밀자 루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너한테 그 담배 냄새가 나는 게 좋더라.”
“...참고하지.”
불을 붙여준 루이스가 라이터를 넣고 벨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미안할 일을 잔뜩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사랑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벨져는 루이스에게 약했다. 제 눈치를 살피며 예쁘게 구는 루이스에게는 더더욱.
“다른 사람들이 찾을 거야.”
“...그래.”
“너무 오래 있지 마.”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예쁘게 굴며 기분을 풀어줬으니 이제 다른 사람을 찾아갈 차례라는 걸 알지만 꼴사납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기분 나쁘다고 총질하면 안 돼! 비 올 것 같으니까 맞지 말고 들어 오고!”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입에 대고 외치는 루이스를 향해 벨져는 손을 내저었다. 하여간 눈치는 아주 귀신같다. 그게 자기 자신한테 한없이 무뎌서 문제지. 벨져는 자신의 차례가 조금이라도 빨리 오길 바라며 날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석양에 섞여 흩어졌다. 세상이 무너졌음에도 해는 뜨고 진다. 타오르는 저녁노을도, 내리는 비도,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마음도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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