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의 옷차림은 크게 두 가지다. 책을 만지는 날은 니트에 셔츠, 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날은 후드재킷과 청바지. 그의 후드에서는 언제나 약한 화약 냄새와 싸한 소독용 알콜의 냄새가 풍겼고, 루이스의 몸이며 손에는 언제나 새 상처가 생겼다.
위험한 일을 하는 건 확실했지만 루이스가 말하려 하지 않았고, 더 간섭하기도 주제넘은 짓이라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멀쩡히 나갔던 사람이 팔에 붕대를 감고 들어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신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겁니까, 그 꼴로 지금...!”
“그냥 살짝 금간 거니까. 자, 받아요.”
루이스는 한 손에 안고 온 식료품 봉투와 다친 손으로 들고 온 신문을 내밀었다. 입술이 찢어져 피딱지가 진 채로 웃으면서 회피하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짐을 빼앗아 대충 던져놓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윽....”
“이게 그냥 살짝 금간 거라고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몰아세우던 나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날을 세우는 그의 눈빛에 긴장의 끈이 팽팽해지고, 이 침묵과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진 내가 루이스를 와락 껴안았다.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이렇게 애틋할 수 있을까. 차가운 몸을 끌어안자 어제부터 내내 나를 채운 원망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이 꼴이 되어 돌아온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겨우 이 사람을 내 눈앞에 뒀다는 안도감이 그 자리를 매웠다.
품안에 넣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겨우 날뛰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체구가 가녀린 편도 아니건만 왜 이다지도 위태로운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힘들었다.
“루이스, 제발.... 당신은 내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걱정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없으면 나는....”
“괜찮아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잇기 전, 루이스가 나를 밀어냈다.
“얼른 씻고 올 테니까 같이 저녁 먹어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 루이스 대신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사이 많이 자란 머리카락이 자꾸 속눈썹을 간질이는 것도 짜증스럽고, 선을 긋는 루이스에게도 짜증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나는 수건으로 손을 닦다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다친 건 왼쪽이니 괜찮다며 설거지까지 하려는 걸 기어코 말려 주방에서 쫓아냈건만 정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가다 못 보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좋아요. 뭐가 궁금한데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신경 쓰인다고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진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의심하는 눈이던데.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아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항복 선언이나 다름 없는 행동에 루이스는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물어봐요. 대답할 수 있는 건 해줄 테니까.”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친절이 과한 거 아닙니까.”
“다 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이 지낸 시간이 있잖아요. 날 해칠 거라면 진즉 해쳤겠죠. 그런 낌새가 보였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고.”
아니. 당신은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타인에 불과한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까.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한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루이스의 눈에 담긴 신뢰에 말문이 막혀 시선을 피하며 손을 만지작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눈빛을 받는 것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꽤 자신이 있나 보군요.”
“내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돼요.”
“정말 그냥 궁금해진 것뿐입니다.”
“음. 연합의 루이스가 나라고 하면 믿겠어요?”
책이나 만질 것 같은 단정한 청년이 연합의 영웅이라. 황당한 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 없다는 뜻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루이스는 농담을 하는 사람치고 너무 진지했다.
“설마.... 진짭니까.”
“저 문을 나가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다쳐서 생긴 상처일리 없다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을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가 그 ‘영웅’ 루이스라고는 아무리 좋게 봐도 이미지가 매치되지 않았다. 전설적인 시대의 영웅이 고작 이런 곳에서 이렇게 지낼 리 없다.
“연합의 지원은 한정적이고, 나보다 못한 사정에 처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여유가 되면 양보하는 게 낫죠. 군식구가 생길 줄은 나도 몰랐지만. 어차피 잘 들어오지도 않거든요. 보다시피 이런 집이라 집세도 싸고.”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루이스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의식을 잃은 시간을 합하면 두 달 가까이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지만 그가 가져다주는 신문은 꼬박꼬박 읽었다. 혹시나 기억에 도움이 될까 시작한 일이지만 집안일을 하고 나면 달리 할 일이 없다보니 지루해서라도 읽게 되는데, 연합의 영웅 얘기는 잊을만 하면 등장했다.
“기사나 이야기나, 아무래도 과장되는 면이 많죠. 잔뜩 부풀린 쪽이 더 잘 팔리니까.”
“...그렇군요.”
“사실은 별 거 아니죠? 어떤 녀석 하나는 영웅이란 말에 잔뜩 부풀려진 말을 듣고 대서양을 건너왔는데, 차마 내 입으로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한동안 멋진 척 하느라 고생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냥 평범한 동료지만.”
다른 사람 얘기를 하면서 엷은 미소를 띠우는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속에서 더한 짜증이 올라왔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나에겐 당신밖에 없는데.
“루이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내 품에 가둔다고 가둬질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으로 매달려 붙잡아두면 된다.
“매번 같은 악몽을 꿉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대자 루이스가 무릎 위에 펼쳐놓은 파일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침착하고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으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마음이 복잡한 척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잔뜩 뜸을 들였다.
“누군가에게, 누군지 모를 이들이 나를 쫓는 꿈입니다. 꿈속의 나는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고, 어디로 숨어도 그들은 나를 찾아내서 다시 달아나기를 반복하죠.”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런 제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쫓기는 이가 그들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심지어는 이런 자신을 비웃고 경멸하는 이들. 쫓기는 이유조차 모른 채 도망치는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최악의 악몽.
“그 꿈에서 뭐라도 알아낼 것이 있다면 좋겠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내 이름조차 모릅니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자 손이 잡혔다. 손등을 덮고 어루만지는 그의 손의 온기에 고개를 들자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 당신이란 사람은 어째서 이다지도 사랑스러운가.
“그렇지 않아요. 당신 탓이 아니잖아요.”
“루이스.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기억도, 꿈도..... 차츰 나아지겠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 담긴 눈빛에, 그의 그 목소리에 나는 그만 루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루이스는 손등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이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다친 짐승이 온기를 갈구하는 것처럼 루이스의 목에 코와 뺨을 부비며 체향을 맡았다.
여름해가 차츰 짧아지는 게 느껴지는 애매한 계절, 아침부터 온종일 내리는 비에 벨져와 루이스는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앉은 루이스는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벨져는 침대에 앉아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침대 위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다. 하지만 환절기라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하루쯤은 그냥 쉬라며 루이스가 극성을 부린데다, 가끔은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고 끌리기 마련이라는 말이 떠올라 연필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루이스의 고개가 돌아왔다.
“뭐가 잘 안 되세요?”
“빨리도 묻는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차라도 가져올까요.”
참 시간이 안 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차를 마실 시간이 다 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을 들었다 놓는 애달픈 감정의 이름을 깨달은 이후로 벨져는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손을 잡고, 하얀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손목 안쪽을 문지른다거나, 함께 잠들 때 그의 허리를 안고 은근히 다리를 쓸어내린다거나. 하지만 루이스는 거부하지 않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벨져는 오기에 더 스킨십의 수위를 높여갔으나 루이스는 그 말간 얼굴에 동요나 당황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투라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애초에 루이스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만든 건 벨져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봤자 긁어 부스럼만 될 게 뻔했고, 그렇다고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벨져는 이 꼴이 되고도 누군가에게 부탁 한 번 해 본 적 없었다. 평생 싫은 소리, 입 발린 아부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건 그래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으나 이번에는 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살갑게 굴며 다가가는 것도 통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타고난 아름다움과 고귀한 출신 덕에 벨져는 언제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쪽에 속했다.
덕분에 그 마음과 관심을 거절하는 데에는 능숙했지만 타인의 환심이나 호감을 사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받아주면 그 뿐이겠으나 루이스는 거리를 벌리면 벌렸지 결코 그의 의지로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못 견디게 짜증나 입술을 물던 벨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지금 이 저택에 단 한 사람뿐이다. 루이스는 문을 열고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와 발로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닫았다. 양손으로 들기 힘들었는지 팔에 받치고 있는데 여간 버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안에 계신다고 주방에서 힘을 좀 썼다나 봐요.”
“그걸 그렇게 들고 왔나?”
“이 앞까지는 카트에 올려서 가져왔죠.”
일부러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나 싶어 눈살을 찌푸리자 테이블에 널찍한 트레이를 내려놓은 루이스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무겁진 않았어요. 이것저것 챙겨주는데 거절하기도 그랬고요.”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얼굴로 다 말 하셨어요.”
벨져는 다음부터는 그냥 카트에 실어 오라고 하려다 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트레이 가득 가져온 단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기껏 힘들여 가져온 성의를 봐서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오이 샌드위치는 오랜만이네요.”
“원래 자주 먹는다. 부담도 적고, 단 건 별로라서.”
루이스는 차를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담은 뜻 모를 눈빛에 벨져는 뭔가 잘못 말했나 생각하다 그동안 티푸드로 단 것만 올리라고 지시했던 것을 떠올렸다.
“친절하시네요. 얼마 전까지 이름도 모르셨으면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시선을 내렸다. 대개 그런 행동은 순종의 의미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복종이나 순종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이상하다. 오히려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물지 않았으면 했다.
새벽의 꽃잎, 혹은 세상을 소복이 덮는 눈 같은 미소가 보기 좋았다. 눈이 싱그러워지는 느낌이라고 하면 알까. 벨져는 시집의 온갖 미사여구와 언어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저 미소를 다 담을 표현은 없다. 그야 물론 그 저명한 시인들은 이 녀석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만.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어떻게 되는 지 가르쳐줘야 하나?”
“흠. 전 가끔 도련님 침대에 콩 한 알을 넣어보고 싶어지는데, 지금이 그러네요.”
루이스는 납죽 엎드리는 대신 부드럽게 응수했다. 돌려 말했지만 까다롭고 예민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을 벨져가 모를 리 없었다. 벨져는 작게 실소를 흘렸다.
이 녀석은 첫날부터 그랬다. 돌보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를 고용한 건 홀든의 안주인이니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던가. 하인이라기엔 거친 느낌이 나는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끔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수를 둔다.
그의 그 당돌한 면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일단은 말이 통하는 상대도 오랜만인데다, 제 말 한 마디에 죽는 시늉을 하는 하인들에게 싫증이 난 상태였기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루이스의 이런 반응은 꽤 신선했다. 그래서 벨져는 채찍을 드는 대신 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해보지 그래?”
“싫어요. 그럼 제가 매트리스까지 다 갈아야 하잖아요.”
“넌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글쎄요.”
루이스는 애매한 말로 에둘렀다. 활자 속에 눈을 두고 있는데도 바로 맞받아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끔은 이 '당연함'이 무섭다. 겪어본 적 없는 세계,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과 사고는 낯설다 못해 섬짓했다. 여기 익숙해지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위기감과 막연한 공포. 다른 세계를 접하는 충격 앞에 루이스는 애써 의연한 척 했다.
벨져는 지금 오랜만에 적수를 만나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약한 면을 보였다간 금세 흥미를 잃고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될 게 뻔했다.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는 부품은 교체된다. 거리에서 나고 자란 루이스는 그 섭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계속 그렇게 살 생각인가? 남 수발이나 들면서? 그렇게 봉사를 즐기는 타입은 아닌 걸로 아는데.”
“도련님이 건강해지시면 전 떠나게 될 텐데요.”
“남겠다는 생각은 없나? 굳이 이 저택이 아니라도 홀든에 네 자리 하나 쯤이야 우습지도 않지.”
“남아서 계속 당신을 모시라고요?”
아름다운 얼굴이 속내를 들킨 양 얼어붙었다.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는 반응에 입맛이 썼다. 평생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라니, 대를 이어 한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자란 귀족 도련님 답다.
벨져 홀든에겐 이게 당연한 것이다. 이쯤 되면 우습지도 않다. 설마하니 이 유치한 억지가 통할 거라 생각한 걸까. 루이스는 책을 덮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결국은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다.
아무리 디킨스 책을 읽어도 루이스같은 사람의 삶과 미래가 어떤지 알 리 없다. 그래. 한 입 크기로 자른 오이 샌드위치를 티푸드로 먹으며 빵에는 갈색 껍데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귀하디 귀한 도련님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했다.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벨져도 이 거리를 느끼고 있을 터다. 뭐든 척척 대답하는 사람이 말문이 막혀 눈만 꿈뻑이고 있는 걸 보면 그랬다.
“차가 식었네요. 다시 준비해올게요.”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저 등을, 저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벽에 가로막히는 느낌이다. 그 벽은 너무 두텁고 높아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거부당하는 느낌, 모두 벨져 홀든에겐 생소한 것이라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같이 자라다시피 한 형제나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당황스러움이었다,
“가끔, 난 네가 너무 멀어.”
멀어지는 등에, 닫히는 문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중얼거렸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라 그 말이 루이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씻으러 들어갔던 루이스가 나의 등 뒤에서 발돋움을 해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면서 킁킁거리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신선한 채소라곤 여기 올라온 게 전부니 내일은 장을 봐와야합니다. 그러고 보니 비누도 새로 사야겠더군요. 어서 앉으시죠.”
다 된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놓자 루이스가 웃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가 처음 주방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는 티가 나는 식탁과 의자였으나 지금은 그와 나의 흔적으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오늘 저녁 메뉴는 남은 자투리 채소로 만든 포토푀에, 끄트머리만 남은 빵, 치즈를 얹은 감자와 소시지 구이가 전부인데 루이스는 이렇게 단출한 식탁이 크리스마스 정찬이라도 되는 양 나의 노고를 치사했다. 그가 내가 한 음식을 맛있다고 하는 것도, 내가 들인 시간과 정성을 알아주는 것도 꽤 흡족하고 뿌듯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빈말로도 그만 하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한때는 이런 걸 꿈꾼 적도 있었는데. 감회가 새롭네요.”
“흠. 저랑 말입니까.”
내가 접시에 음식을 더는 동안 루이스는 식탁에 턱을 괘고 평소에 하던 칭찬과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듣기 좋은 소리였기에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루이스는 순박한 청년처럼 작게 웃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정해진 상대는 없었어요. 남자일 줄은 몰랐지만.”
“저랑 있는 게 좋다는 소리로 들리는 군요.”
루이스는 웃으며 긍정했다. 나는 그의 웃는 얼굴과 가볍게 울리는 웃음 소리를 퍽 좋아했고, 내게 눈웃음을 짓는 루이스는 더 좋아했다. 이렇게 웃어주기만 하면 무슨 요구를 해도 다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자주 들어오는 겁니까?”
“그것도 있고,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나는 음식을 접시에 던 두 개의 접시를 내려놓고 내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식전 기도 같은 걸 하지 않았기에 루이스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바로 포크와 스푼을 들었다.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 묘한 열을 일으켜 음식을 먹는 대신 숟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나를 흘긋 보고 씹던 음식을 넘겼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고 섬세한 그답게, 조금 전보다 더 긴 말이 이어졌다.
“전에는 그냥 일하다 휴게실에서 잤지만 이제는 다르잖아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그러다 잘 자라고 인사하고 아침에 다시 만나는 그런 거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통해 가슴까지 퍼지는 감각에 나는 그를 바라보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기억이 없으니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같은 것을 바랐던 것 같다.
마음을 쉴 수 있는 안식처.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의지가 되는 온기와 감정 같은 것. 타인과의 관계가 굳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루이스는 특별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전부 알고 싶고 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는 열망. 어쩌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이 남자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나는 살짝 테이블 두드려서 루이스의 시선을 끌었다.
“당신. 그거 압니까?”
막 덜어낸 음식을 입에 넣으려던 루이스가 눈 동그랗게 뜨고, 그의 포크에 달랑 들린 감자와 소시지 덩어리에서 치즈가 길게 늘어졌다.
“당신, 웃으면 정말 어려 보인다는 거.”
루이스는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거였냐는 듯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눈을 휘며 보내는 눈빛이 더없이 따스했다.
“남자한테 외모로 칭찬 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은데요. 진짜로 잘생긴 사람이 그러면 더 기분 이상하다구요.”
“칭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해요.”
루이스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그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대신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루이스를 관찰했다. 잘 먹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보고 있으면 그를 기다리는 내내 지루해한 걸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웠다.
식사를 마치고,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서는 루이스에게 주방을 맡긴 나는 포트에 커피를 내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음식을 하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설거지는 맡겨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을 너무 못 믿는다며 노골적으로 서운하다는 티를 냈지만 아무리 귀여운 얼굴을 해도 안 되는 건 있는 법이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루이스가 가져온 신문을 대충 훑는 사이 집안 가득 진한 커피 냄새가 퍼지고 이내 물소리가 멎었다. 양손에 컵을 하나씩 들고 온 루이스는 내 전용이 된 머그컵을 내밀고 소파에 앉아 컵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래서인지도 몰라요.”
“뜬금없이 무슨 소립니까?”
“자주 들어오는 이유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나도 좀.... 힘들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좀 지쳐있었어요. 다른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도피처가 필요했는지도 모르죠.”
루이스는 쓴웃음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아련하고 지친 표정에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손을 루이스의 다리 위에 얹었다. 따로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맞춘 듯 두 벌씩 마련되어 있던 식기와 읽지 않는 책. 불현 듯 스쳐지나가는 불쾌한 의혹에 얼굴이 굳었다.
“여자 문제입니까?”
“...내가 빠지면 곤란한 일이 많아서요.”
“그녀가 떠났군요.”
정곡을 찔렀는지 루이스가 눈을 감으며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서도 안쓰러움 대신 알 수 없는 분노와 질투가 끓어올라 나는 추궁을 계속했다.
“그래서 떠난 겁니까? 당신이 일에 매진하는 바람에?”
“그녀와 나는 바라는 게 달랐어요. 항상 여길 떠나고 싶어 했죠. 좀 더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당신은 남고 싶었고요.”
루이스는 비참하지만 다 괜찮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리석고 한심해서,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남자.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있는 힘껏 안고 그의 고통까지 들이마실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손길이 나의 등을 두드렸다. 아픈 구석을 찌른 건 난데, 어째서 당신이 나를 위로하는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나는 당신의 세계에서 숨을 쉬지 못할 테고, 당신 역시 나의 세계에서 숨을 쉴 수 없다. 누구 하나는 망가지고 말겠지. 더 다가가면 안 된다는 이성의 경고음이 굉굉하게 울리는데도 나는 품에 안은 남자를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