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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이] 엘리멘트리au
쓰고 안올렸던거 올림
한창 엘리멘트리 볼 적에 썼던 이글루~
그리고 저는 기약없는 뒷편과 프롤로그만 쓰는 병에 걸린 사람이 맞습니다
참 연재하던 온실 시리즈와 루루는 계속 쓰는 중인데 제가 갑자기 취직을 해버려서.... 업로드 일정이 미뤄질 것.... (골골
메일로 받은 주소를 찾아 간 주택 문 앞에 선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첫 날, 새로 면접을 보는 것만 같은 떨림에 마음을 다잡고 초인종을 눌렀으나 허무하게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도움을 거부하고 틀어박힌 이다. 그런 사람을 돌보는 일에 벌써부터 끈기를 잃어선 안 된다.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드렸으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커튼이 쳐져있지 않은 유리창을 넘겨 보며 사람의 형체를 발견한 나는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이글 홀든 씨?!"
쾅쾅쾅.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선수금을 받아버렸고, 나에겐 이대로 돌아가서 무섭고 살벌한 고용주에게 이 일을 못하겠다고 할 용기가 없었다.
"이글 홀든 씨! 형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소파에 드러누운 사람의 형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할 각오로 문을 두드리는데 갑자기 안쪽으로 문이 열렸다. 나체나 다를 바 없는 여성의 등장에 멍해진 나는 냉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어머, 귀여워라. 라고 작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진한 향수 냄새에 거북해하면서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금방 일어날 거예요. 어젯밤에 좀 격렬했거든요. 차라도 내줄까요? 아니면...."
"아뇨, 괜찮습니다. 볼 일 보세요. 하는 김에 옷도 좀...."
몸을 훑어내리는 끈적하고 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숙맥처럼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헐벗은 것이나 다름 없는 란제리 차림의 여성을 앞에 두고 태연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것처럼 나의 얼굴을 쓰다듬다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겨우 찾은 평화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앞으로 돌봐야 하는 대상을 찾아 거실로 향하자 문을 열어준 여자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상태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긴 은발과 널찍한 등과 탄탄하게 잡힌 근육이 멋지다는 감상보다는 앞으로 저걸 돌봐야 한다는 막막함이 앞섰다.
"이봐요."
약물 중독, 기행, 그 외 다양한 폭력 사태와 범죄들. 망나니 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삶을 사는 남자의 첫만남이 정상적이고 깔끔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로 닥치니 한숨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막연했다. 나는 소파에 엎드려 미동도 않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이글 홀든 씨?"
"뭐야.... 서비스?"
고개를 돌려 나를 본 남자의 얼굴은 잠과 짜증에 찌들어 있음에도 멋졌다. 오히려 그런 면을 부각해서 위험하고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몸을 일으킨 그의 손이 불쑥 덮쳐왔다.
"읏, 잠, 홀든 씨!"
"응. 알았어, 알았어. 처음이야? 이것도 신선한데."
"형님이 보낸 재활 도우미입니다! 다이무스 홀든 씨요!"
"아."
뒷목이 잡히고 고작 몇 초밖에 안 됐는데 소파에 눕혀진 건 둘째 치고, 버둥거리는 몸을 제압하고 당연하다는 듯 허리와 다리를 쓰다듬는 게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형의 이름이 통했다는 것일까. 무표정마저 잘생긴 남자가 잠시 동작을 멈춘 사이 나는 재빨리 그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아, 귀찮게...."
이글 홀든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다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가려주던 담요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야했다.
"난 그런 거 필요 없는데."
"그건 당신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형이 뭐랬는데?"
"상습적 약물 복용과...."
"아니, 그거 말고. 널 안 받아주면 어떻게 된다. 뭐 그런 조건 말이야. 아무렴 아무런 준비 없이 보냈겠어."
"옷을 입고 나면 말씀드리죠."
도저히 이 상태로 대화를 이어가기 민망해 내건 조건에 이글 홀든이 허, 하고 기가 찬 표정을 짓다가 한바탕 폭소를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모욕을 주려는 듯한 웃음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자 배를 잡고 웃던 그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바지를 주워 들었다.
"아, 진짜 귀엽네."
"오늘만 두 번째 듣는 소린데, 별로 유쾌하지 않군요. 특히 당신의 말은요."
"너무한데."
진짜 너무한 게 누구인지 묻고 싶지만 저 페이스에 말려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뻔뻔하기가 아주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뱀과 같은 녀석이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조금 더 새겨들었어야 했다. 그런 후회가 들었으나 돌이키기엔 늦은 뒤다. 나는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한 데 모아 묶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마저도 등 뒤에서 가슴을 안아오는 손길에 놀라 무너지고 말았지만.
"자기. 외로워지면 연락해?"
"아뇨, 저는...!"
"후후. 귀여워라. 이글. 이렇게 귀여운 친구가 있으면 좀 일찍 부르지 그랬어."
"뭐야. 나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흐응. 자기는 신선한 맛이 없잖아."
"아침부터 너무한 말 투성이네."
옷을 다 차려입은 여자는 이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하고 그의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빼냈다. 이런 범법행위도 신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그녀가 나를 지나치며 짓는 눈웃음에 다시 얼굴이 굳었다.
"동정도 아니면서 너무 그러지 마."
"네?"
"여자친구랑 깨진 지 얼마 안 됐고, 그러다 돈이 필요해져서 일을 구했겠지. 꽤 오래 사귄 것 같은데 반지 자국이 없다는 건 반지를 낄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고. 그런 직업을 가진 주제에 한창 나이에 남 돌보는 일이나 한다는 건 그 일에서도 문제가 있었다는 거지. 예를 들면 의료 사고 같은 거."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날카로운 말에 나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맑은 바다를 옮겨 놓은 것처럼 새파란 눈은 너무나 투명해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인형의 눈 같았다.
"그게 당신과 관계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정확히는 내 형이 준 수임료가 그 문제를 상쇄해주는 거겠지."
"네. 거절하기엔 많은 액수였거든요."
"그래서, 널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날 어쩌겠대? 내쫓는대? 무일푼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서 포기한 망나니를 거둬주는 그의 형제의 책임감과 염려는 감사해야 마땅한 것이나 이 망나니 도련님은 그저 거추장스럽다는 양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오늘부터?"
"오늘부터. 두 시간 이상 떨어져있을 땐 연락해야 하고 약물 중독 재활 프로그램에도 참석해야 합니다. 형님이 내건 조건에는 절 위협하거나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도 물론 포함되어 있고요."
"24시간 나를 감시하시겠다?"
"저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당신을 돕는 거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최악이네. 내가 도망치고 속이면 잡아낼 수는 있고?"
"그건...."
그의 눈빛에 담긴 위압감에 나는 말을 멈췄다. 이 사람은 위험하다. 함께 있었다간 언제 목을 물릴지 모른다. 그런 위기감이 도망갈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지만 나 역시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해봐야 알겠죠."
나를 시험하듯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뱀처럼 나를 옭아매고 짓누르던 공기가 누그러지고, 그의 껄렁한 태도와 걸음걸이에서 여유마저 느껴졌다. 한 발짜국 앞에 선 이글은 허리를 짚고 서서 나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해?"
"루이스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그냥 악수를 하는 것 치고 세게 잡힌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손을 빼려 했으나 충분한 악수 뒤에도 이글은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내게 되물었다.
"루이스?"
"제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설마 그 '루이스'는 아니겠지."
"꽤 흔한 이름인데요."
이글은 손을 놓고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가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 침대로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은 미소에 나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하긴. 형이 아무나 붙일 리가 없지. 유일하게 '홀든'을 무릎 꿇린 남자잖아?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척 하긴, 내 작은형 말이야. 그러니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붙이지!"
"홀든 씨?"
혼자 신나서 떠들며 방 안을 돌아다니던 이글은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았다.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잘 지내보자고, '영웅' 씨."
여기까지 안다면 더 부정하기도 힘들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항복했다.
"...그렇게 불리는 것도 엄청 오랜만이네요."
"그나저나 진짜 동안이네. 나이 먹은 거 맞아? 참, 그냥 이름으로 불러. '홀든 씨'라니, 다른 사람 얼굴이 떠올라서 소름끼치잖아."
이글은 말을 마치고 익살스럽게 윙크했다. 루이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삐닥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지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상상 이상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글. 일단 약물 검사를 좀 해야겠으니 거기 좀 앉아보시죠."
"말 놓지? 어차피 오래 가지도 않을 텐데."
"입 닥치고 앉아."
휘익. 이글이 휘파람을 불며 양손을 들었다. 그래봤자 신나고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얄미운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순순히 루이스의 말을 따라 소파에 앉았고, 얌전히 팔을 내밀었다.
"잘 지내 보자고. 원한다면 침대 옆자리도 비워놓을 테니까, 언제든지 들어 와?"
이글이 던지는 은근한 추파에 루이스는 눈을 치켜 뜨며 주사바늘을 빼낸 곳을 꾹 눌렀다. 이글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놓지 않고 힘주어 누르다 떼고 소독용 알콜을 방울진 핏방울 위에 떨어트린 뒤 솜을 건넸다.
"하루에 두 번, 네 상태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것만 잊지 마."
"보기보다 되게 과격한게 매력있네. 알았어, 알았다고."
루이스는 솜으로 피부를 문지르는 이글의 손을 잡아 뗐다. 혈관도 건강하고 주사바늘도 정확히 들어갔기에 그래봤자 따끔한 수준이고, 피도 금방 멎었는데 엄살이 심하다. 한 번 더 소독을 해야 할까 생각하던 루이스는 이글의 팔 위에 훅 숨을 불었다. 알콜은 그새 다 날아갔지만 엄살이 심한 아이에겐 관심이 약인 법이었다.
"서비스 좋은데."
"네가 말썽만 안 부린다면, 괜찮은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
"설마 침대 얘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 뭐, 나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그건 사양하겠어. 나는 네 불장난 상대가 아니니까. 함께 지내면서 널 감시하고 돌보긴 하겠지만, 개인 사생활 정도는 구분할 거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대신...."
"그 사생활에 섹스도 포함이야?"
점점 골치가 아프다. 루이스는 허리에 손을 얹고 이글을 응시했다.
"좋아. 그럼 집에서 하는 건 상관 없지?"
"그 정도 사생활은 존중할게. 날 끌어들이지는 마."
"한 번 차이고 나니까 신실한 독신주의자라도 된 거야? 왜 그래, 섹스는 좋은 거라고. 가끔 기분 전환을 해줘야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위층 침실 쓸 테니까 그렇게 알아."
"외로워지면 말 해! 나는 환영이야!"
루이스는 소리치는 이글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올랐다. 얼마나 말을 나눴다고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처음 수임료에 대해 들었을 때는 사람 하나 돌보는데 너무 과한 금액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합당한 금액이었다. 확실히, 이글 홀든을 감당하려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
계단을 올라온 루이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평화롭고 순탄한 일상에 이별을 고했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글 홀든과의 생활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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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그, 이게 무슨....”
토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도착한 장소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였다. 황무지라고 할까, 사막에 가까운 살풍경 속에 철제 의자 두 개와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허허벌판에 의자와 테이블이 어울리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 사람에 당황한 릭은 엉거주춤 서서 주위를 살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벨져 홀든과 수도원에 잠입하는 거나 헌터 둘 사이에 끼는 것보다도 더 불편하다.
“저... 차라도 한 잔...? 커피도 있습니다.”
“그럼 커피로 부탁하오.”
삭막한 풍경 속에 그림처럼 앉아있던 남자는 릭에게 자리를 권했다. 짙은 잿빛 후드, 얼어붙은 결정 조각 같은 것들로 추론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유명한 남자는 연합의 영웅이었다. 릭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빈 의자에 앉았다.
연합의 영웅이 직접 따라준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고, 멋쩍게 주변을 둘러봤으나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포트레너드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군. 그... 용건이 뭐요.”
“이야기를 해보라더군요.”
“나와?”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이 그가 다루는 얼음 결정처럼 날카롭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깨질 것 같이 위태로운 분위기라 어쩐지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단둘이 만나기는 처음이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저를 이리로 불러내 원치 않은 자리를 만든 토니를 원망하며, 릭은 다시 말을 붙였다.
“하하.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위에선 톰슨 씨가 가진 정보에 대해 물으라고 절 보냈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니까요.”
루이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말끝을 늘이는 사이에 다시 침착한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이 일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릭은 내심 가지고 있던 영웅에 대한 인상을 수정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전쟁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익히 알고 있을뿐더러,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의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그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들 주변 사람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별개가 아닌가.
릭은 최근에 만났던 남자를 떠올리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컵을 한 손에 쥐었다.
“음. 그래서 뭐가 궁금하오.”
“...여러가지가 있지만,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떠나셔도 되고요.”
“마치 내가 떠나길 바라는 것 같군.”
내내 다른 곳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는 건 처음이라, 릭은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이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나. 깜빡이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찰나였지만 고개를 숙이며 휘는 입술을 본 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 가볍게 손을 내젓는 루이스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라 제가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 하하. 그렇군.”
후드의 그늘에 가려진 얼굴에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간다. 릭은 루이스 쪽으로 몸을 숙였다. 루이스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웃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감사합니다. 이건 별 거 아니지만... 좋아하신다고 들어서요.”
“이런. 이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루이스는 그의 의자 아래 놓여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릭에게 건넸다. 봉투에 찍혀있는 로고를 확인한 릭은 도넛 가게에 들러 도넛을 사는 루이스를 상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드셔도 됩니다.”
“고맙소. 요즘 이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을 도통 못 만나서 말이지. 다들 하나같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 바쁘더군.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도 않고....”
“상식을 기대하기 힘든 곳이니까요.”
“그러게나 말이오.”
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루이스가 후드 재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도 주머니가 있나 싶어 그의 손에 시선을 옮기자 루이스가 릭을 바라보며 작은 기계를 꺼냈다.
언제부터 녹음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 시작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녹음기를 꺼내 보여주는 건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녹음기를 보고도 민감한 질문에 답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일까. 릭은 답을 찾아 루이스를 바라봤으나 루이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인식의 문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없소. 그저 목격했을 뿐이지. 애초에 나는 그걸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액자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도 액자와 옥사나를 쫓고 있으니까요.”
“나보다는 벨져 홀든에게 묻는 게 나을 거요. 연합에는 그의 형제도 있지 않소.”
“형제도 있고, 그 날 지원하러 간 동료도 있습니다만.... 늦은 탓인지 인식의 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라서요.”
“그래서 날 부른 거요?”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모두 알려진 얘기만 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꼭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 같았다.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고, 최소한의 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머릿속에 정에 약한 천재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그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의문과 흥미만 생겨날 뿐이다.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일 텐데, 계속해서 먼저 입을 열게 되는 것도 이상했다.
“미안하게 됐군. 당신이 이렇게 나오기까지 했는데.”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하.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루이스는 그 뒤로도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그의 질문에 릭은 모른다, 혹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애매모호하게 답을 했고, 루이스는 그럴 때마다 더 캐묻는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게 맞긴 하지만 이래서야 답을 기다리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루이스를 걱정하며 녹음기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여쭤보고 싶은 건 이게 끝입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인사를 받기도 민망하군.”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고문을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조금 조심하시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부른다고 나오시면 그 때는 정말 고문실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지 않았잖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을 잡자 루이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살짝 찌푸린 눈살에 릭은 무심코 잡았던 손을 놓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능력만 믿다간 정말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기엔 특히나요.”
“...새겨듣도록 하지.”
토니에게 느끼는 위안과, 브루스에게 느끼는 존경심, 그리고 벨져에게 느끼는 막연한 기대감과 다른 감정에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았던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는 사이 루이스가 녹음기를 끄고 짐을 챙겼다. 생각에 잠겨있던 릭은 자리를 뜨려는 루이스의 등을 향해 물었다. 이 이상한 질의응답이 시작됐을 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왜 이런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이게 무슨 뜻일까. 나름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대답에 릭은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봤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릭을 향해 돌아섰다.
“상황에 떠밀려 괴로워한다는 걸 들은 바 있습니다. 전쟁과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지만.... 이미 한차례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굳이 보태는 설명을 듣고 있던 릭은 마침내 루이스가 무엇을 바랐는지 깨닫고 입을 벌렸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실험의 재료로 쓰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고맙소.”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수 있다고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도 그 사실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는 사람도 있고,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운데 모두가 외면한 일상과 권리에 대해 말하는 남자를 보며 릭은 말로 형언하기 벅찬 감정에 차올랐다. 루이스가 지키려 애쓴 것은 릭 그 자신마저 포기한 것이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 였으니까.
“할 수 있다고 그게 쉬운 건 아니지.”
짧은 문답이었으나 릭은 루이스라는 사람이 왜 '영웅'이라 불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지 이해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은 희망을 맡길 수밖에 없다. 힘이 없고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진 릭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신세를 졌군. 내가 필요해지면 부르시오.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건 회사만으로 족하지만.... 긴급 택시로 이만한 게 또 없거든.”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루이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릭의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악수 뒤에 떨어지는 손이 왠지 아쉬워 그를 향해 웃자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최근 너무 눈이 부신 사람들을 봐서 그렇지, 이쪽도 남자치곤 선이 가늘고 예쁜 얼굴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청초한 분위기가 감도는 게 이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무슨 부탁이든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톰슨 씨?”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등을 돌렸고, 릭은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멀쩡히 가는 사람을 이유도 없이 붙잡은 건 릭 자신도 놀랄 만큼 충동적인 행동이라 입을 열고도 저를 돌아보는 루이스의 눈에 돌려줄 말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 그게.... 나도 토니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오... 연합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같이 가지 않겠소?”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말은 꽤 그럴 듯 했으나 너무 허둥댄 나머지 영 신빙성이 없었다. 처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소년도 이렇게 떨지는 않을 것이다. 릭은 부끄러움과 긴장이 뒤섞여 미친 듯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붙잡은 손목을 놓았다.
하긴. 갑자기 이런 말을 해봤자 수상쩍게 보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말 한 마디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체념하려는 순간 피식 웃음이 새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이 얇게 휘었다.
“그럼 기꺼이 동행하죠.”
“...아, 그럼 게이트를 열겠소.”
잠시, 그의 미소에 눈을 빼앗겼던 릭은 바로 발 밑에 게이트를 열었다.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도 민망한데 좀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런 모습을 보고 웃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친절히 고개를 돌려주었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 그러면 나도 민망하오.....”
“크흠. 죄송합니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웃지 말란 뜻은 아니었는데, 말해놓고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아쉬워진 릭은 그를 가까이 끌어 당겼다.
“이러는 편이 능력을 쓰기 편해서 말이오.”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릭은 능력 핑계를 댔다. 발 아래 반짝이는 게이트를 본 루이스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섰고, 줄어든 거리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릭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릭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가까워서야,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다. 문제는 거리를 벌려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루이스 역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저기....”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얼굴이 귀엽다. 남자한테 귀엽다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 보는 게 귀엽다는 말이 딱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건 알지만.... 모두에게 이러는 건 아니오.”
“...다행이군요.”
릭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살짝 눈을 내리깐 루이스의 속눈썹에 하려던 말을 잊었다.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을 때우는 가볍고 상투적인 말에 불과했지만 릭의 게이트는 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을 연합에 옮겨놓았다.
“그럼 저는 이만.”
“저, 루이스.”
루이스는 연합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말을 붙이기 어려웠지만 릭은 저를 위해준 사람을 위해 용기를 냈다. 그가 써준 마음에 비하면 아주 약간의 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릭은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소?”
“릭!”
말없이 릭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입술을 뗀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더 반갑게 맞는 연합의 참모 덕에 애타게 기다리던 답을 못 듣게된 릭은 토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루이스는 릭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돌아섰고, 릭은 풀이 죽은 나머지 돌아선 루이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남겨져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쓴 거랑 ctrl+c/v한 것 같지만 새로 나온 보이스 드라마를 듣고 나니 생각나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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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온실시리즈 이어서 제목을 얼른 정해야 하는데....
루이스는 빈 꽃병에 백합을 꽂아 놓고 곧장 욕실로 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소매를 걷고 목욕 준비를 하고 있으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지지만 하인 신분으로는 손을 담그는 게 고작이다.
매일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 병이 같은 무게의 금값과 비슷하다는 향유며 입욕제를 풀고 그 물을 그냥 하수구에 버리는 건 귀족들, 혹은 그만한 부자나 할 수 있는 호화로운 목욕이다. 감히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맨몸으로 있어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욕실이 수증기로 덥혀지고 나서야 루이스는 도련님을 모셔 왔다. 낮에 입힌 옷을 벗기고, 미리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벨져가 들어가면 그 때부터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옆을 떠날 수도 없는 루이스는 욕조 옆 작은 간의 의자에 앉아 벨져를 바라봤다. 하루 종일, 몇날며칠을 함께 있었는데도 이 얼굴은 질리지가 않는다. 어디 질리다 뿐이랴, 매번 새롭게 감탄하고 만다.
루이스는 날카롭게 뻗은 눈매며 오뚝한 코, 다물린 입술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벨져 홀든은 미의 극치를 인간의 형태로 빚어놓은 것만 같은 사람이고, 그의 까다롭고 극성스러운 성미에는 익숙해질지언정 벨져 홀든의 고매한 아름다움에 익숙해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깐 좀 뜨거운 것 같았는데, 지금은 딱 좋네요.”
벨져는 별다른 말없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 것으로 루이스의 말을 긍정했다. 제 취향대로 섞은 향기와 따스한 온기에 취해 몸과 마음이 노곤해졌다. 근거 없는 행복에 젖어 정신을 놓고 있으니 욕조 옆에 앉아 물을 찰박이던 루이스와 손이 스쳤다. 눈이 마주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타오르는 석양의 색을 하고선, 불꽃조차 삼켜버릴 것 같은 냉기를 품은 심연의 눈동자. 들여다보면 그 심연에 빠져버릴 걸 알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신비로운 눈이다. 저 벽 너머, 깊은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벨져가 생각을 하는 사이 눈을 내리깐 루이스가 스펀지에 비누거품을 냈다. 손을 물에 담그며 슬며시 풀어지는 눈매가 곱다.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따뜻한 물로 씻는 것도 감지덕지라며 엷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고, 날숨과 함께 말이 튀어나왔다.
“들어오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불현듯,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노골적이다.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당연했다. 제길. 며칠 있었다고 벌써 이글의 나쁜 점이 옮기라도 한 걸까.
루이스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하고 덤덤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게 다행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바로 쫓겨나요.”
“여긴 너랑 나 둘 뿐인데 누가 안다는 거지?”
“그래도, 하인과 함께 목욕하는 주인은 없어요. 홀든의 도련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인과 도련님이라는 관계를 들먹이며 사양했지만 벨져의 귀에는 정중한 사양이라기보단 완고한 거절로 들렸다. 욕조에 걸친 팔을 따뜻하게 적신 스펀지가 문지르며 지나간다. 벨져는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하인에게 매달릴 사람이 못 됐기에 시큰둥하게 다른 팔에 턱을 괬다. 괘씸한 녀석 같으니.
“뭐, 그렇다면야.”
벨져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 루이스는 착실히 하인의 본분을 다했다. 오히려 오늘따라 손이 더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을 끼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것 같은 손길은 처음 목욕을 도울 때와 변함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능숙해졌다는 것일까.
눈을 내리깐 채 제 몸을 씻기는데 열중하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불쾌한 감정이 비누거품과 함께 조금씩 씻겨 나갔다. 팔과 어깨, 가슴과 배를 거쳐 물속에서 다리를 문지르고 있을 때 벨져는 굳게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군.”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 걸요.”
“그건 내가 결정해.”
루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종아리를 문지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의 당혹만은 여실히 느껴졌다. 저 침착하고 투명한 눈이 흔들리고 표정이 바뀌는 걸 보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때는 무슨 짓을 해도 눈 하나 까딱 않던 녀석이 고작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원하신다면야.”
원하는 걸 얻어낸 벨져는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기다렸다. 루이스는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지 작게 숨을 내쉬었고, 그 숨이 담은 체념과 포기에 벨져는 점점 더 의기양양해졌다.
“음...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고아입니다. 어떤 애들은 부모를 알기도 하고, 한쪽만 알거나 친척에게 맡겨지거나 하는데 전 어느 쪽도 아니었어요. 그냥 거리의 고아였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깐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에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섞여들었다. 그러고 보면 참, 물을 닮은 남자다. 벨져는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드넓은 호수를 떠올렸다.
“그중에 몇몇은 자기 발로 고아원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얼마 못 가 돌아오곤 했죠. 거리에 고아가 넘치는 만큼 고아원에도 자리가 없었거든요.”
말하는 사이 몸을 다 씻긴 루이스가 자리를 옮겨 벨져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두피를 마사지하고 머리카락을 감기는 손길에 절로 눈이 감기고 졸음이 밀려왔다. 온전히 루이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잡념을 비누거품과 함께 물에 쓸려 보내던 벨져는 문득 루이스의 이야기가 제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수도원출신 아니었나?”
“원래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얘기는 흥미로운 법이죠.”
시니컬한 대답에 벨져 눈살을 찌푸림 그런데 귀를 씻기던 중이라 루이스가 아파서 그런 줄 알고 작게 죄송해요. 라고 속삭이듯 말하고 다시 얘기를 이어나감.
“그래서 보통 애들이 그러는 것처럼 버려진 아이들 무리에 끼어 살았죠. 우리는 각자 하는 일이 달랐어요. 보통은 으레 그러하듯 소매치기나 도둑질, 구걸, 배달, 구두닦이, 신문팔이부터 꽃팔이, 돈 되는 건 뭐든 해서 그걸로 먹고 살았죠.”
“너는? 어느 쪽이었지?”
“글쎄요. 뭐였을 것 같으세요?”
말끝에 피식 웃는 소리가 섞인 것 같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는 요령 좋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수건을 덮어 마무리했다.
“물에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돼요.”
좀처럼 웃지 않는 녀석이 띠운 엷은 미소에 벨져는 그러쥔 주먹에 힘을 줬다. 그 자신도 짓고 있는 줄 모르는 미소는 아주 예쁘고 상냥해서,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너는 나를.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에 벨져는 짜증내던 것도 잊고 루이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말로 다 하지 못한, 할 수 없는 마음을 담은 손은 뜨거웠고, 붙잡은 팔은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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