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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0 [티엔루이] 위험한 사람
- 2016.07.10 [릭루이] 햇살과 나그네
- 2016.06.19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5
- 2016.06.17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4
- 2016.06.17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L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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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이상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이글은 요 며칠 새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최초의 생각으로 회귀했다. 역시 이상하다. 조용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폭풍전야가 따로 없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폭풍을 앞둔 고요다.
최근 들어 가장 이상한 걸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예민하고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 작은 형이라 하겠다.
멋대로 예고도 없이 방을 썼는데 일언반구 없고, 오히려 즐거워보이기까지 했다. 어딘가를 떠도는 건 전이랑 다를 게 없지만 안타리우스의 근거지에서 돌아온 뒤로 한참 바쁘더니, 파티에 참석하질 않나, 요즘은 큰형이 있는 광장에서도 언뜻언뜻 돌아다니기까지. 분명 무언가 감추는 게 있다. 이글의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이글은 제 심증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라지만 이글은 개의치 않았다. 호기심은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고, 그런 욕구는 본디 바로바로 풀어줘야 하는 법. 여느 때처럼 연합의 휴게실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던 이글은 냉큼 일어나 검을 들었다.
워낙에도 딱딱하고 젠체하는 형들을 먹이는 건 특기지만 오늘은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러 가는 기분이랄까. 벨져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을 하니 어린애마냥 들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회사와 연합은 안타리우스와 물밀듯 들어오는 신흥 세력들에 치여 완전 카오스 상태고, 당연스럽게도 이글은 회의에서 배제됐다. 알려주는 건 이미 퍼져서 공공연한 사실이 된 정보 정도일까. 연합에 투신하기 전에도 이런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건 익숙했기에 별 감정은 없다. 그들이 히든 카드로 쓰겠답시고 감춰둔 정보는 이미 이글의 손에 들어와있는 경우도 많았다.
골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맞댄들 이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 누구라도 같은 마음일 테지. 공공의 사라지면 그 후에 이권과 공적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또 치열한 밥그릇 싸움을 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연합과 회사는 여전히 능력자 세계의 큰 축이지만 그 비대해진 몸집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부의 파벌이 힘겨루기를 하고, 그러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언젠가 무너질 걸 알고 있음에도 그들이 독립을 선언할까 섣불리 손을 손쓰지 못하는 건 연합이나 회사나 똑같았다. 그 지경에 이른 걸 어찌 해보겠다고 토니와 루이스를 비롯한 측근 참모진이 고군분투하는 중이지만 전쟁의 행보란 조커 급의 능력자인 토니 조차도 예측할 수없는 문제였다.
“뭐, 애초에 그게 가능했으면 인간이 아니겠지만.”
이글은 가벼운 걸음으로 공중에 혼잣말을 날려보냈다. 따라 붙는 시선이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살기도 적의도 서려있지 않은 미행. 대충 정체는 짐작이 간다. 그제인지 언제인지 벨져의 호텔에서 봉사만 하고 허탕을 친 그것때문이겠지. 이글은 나이스한 바디에 붉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를 떠올렸다. MI7의 요원이라는 건 몰랐지만 홀든 가의 망나니에게 정보를 빼내려 접근하는 미녀는 수도 없이 많았고, 덕분에 이글은 그네들이 예쁘장한 얼굴, 관능적인 몸매, 진한 화장과 화려한 치장으로 가린 정체를 간파하는데 통달한 상태였다.
글쎄, 누구라도 벨져같은 형제와 함께 살다보면 그렇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게 벨져 홀든이고, 그를 낳은 어머니다. 주변엔 하나같이 에쁘고 잘생긴 사람들 뿐이고 이글 그 자신도 얼굴로는 어디 내놔도 뒤쳐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후광쯤 비치거나 웬만큼 신비롭지 않고서야 이글이 외모에 홀릴 일은 없다. 이글은 제 작은 형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다이무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잘난 가문에서 하라면 군말 없이 결혼할 사람이다.
그런데 벨져는, 그 아름답고 오만한 인간은 오죽하랴. 벨져는 그냥 아무 여자랑 원나잇을 하기엔 눈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게다가 그 몹쓸 자존심. 그러니까 귀족으로서 가지는 고결함과 품격엔 맞지 않는 행위라며 점잖을 떠느라 제대로 연애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물론 한 사람과 오래 만나지 않기는 이글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이글은 제 욕구와 흥미엔 충실한 편이었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기왕 사는 거 즐겁게 다 누려봐야지. 하여간 형들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글은 문고리에 걸려있는 룸서비스 사양용 팻말을 슥 보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땄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못 할 것도 없다.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문까지 꽁꽁 걸어잠그셨나 했더니, 그 답지 않게 방 안이 어수선했다. 별다른 위험은 느껴지지 않지만,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빈 방에는 머스크 향이 가득했다. 벨져가 애용하는 향수의 냄새다. 그런데 그 아래로 은은한 꽃냄새가 난다. 강한 머스크와 비누에서나 날 법한 냄새. 다소 이질적인 조합에 이글은 벨져의 화장대 위를 살피다 익숙한 향수병을 집어들었다.
화려한, 딱 벨져 홀든 같은 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쪽. 수수하고 은은한, 웬만해서는 눈치 채지 못할 향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욕실에 들어가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지만 욕실에도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글은 제 형의 취향이 참 일관됐다는 것만 새삼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벨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여기 왔었다. 타인의 흔적을 찾아 방 안을 훑던 이글의 눈이 침대에 멈추고,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어쩐지 요즘 엄청 바쁘더라니. 화장대 앞에 걸려있는 흰 목욕가운과 두 사람이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침대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모르는 사라이라면 또 모를까, 이글의 눈엔 이 방을 본 것만으로 그간의 정황이 훤히 보였다. 이글은 확신을 위해 이불을 걷어 시트를 만져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게 둘 다 나간지 얼마 안 된 모양인데, 그것도 놀라웠다. 벨져 홀든이 다른 사람을 침대에 들인 것도 모자라 아침까지 함께 있었다니! 다른 호텔도 아니고 여기로 데려올 정도면 그건 정말 진심이란 뜻이고, 놀라운 만큼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제일 먼저, 그것도 비밀로 애인을 만들어?
이글은 괘씸한 작은 형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이 눈에 들어온 건 정말이지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결코 짧지 않은, 벨져의 것보다 더 탁한 색의 머리카락. 익숙한 색이다. 머리카락을 집어들어 빛에 비춰본 이글은 떠오른 인물에 말문을 잃었다.
그러고 보면 둘 다 요즘 통 안 보이긴 했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고, 상관을 안 하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그 실상이 이거일 줄이야. 저도 모르는 사이 충격에 입을 벌렸던 이글은 다시 한 번 손에 쥔 머리카락을 보고 기가 찬 나머지 실소를 흘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둘이? 이글은 문제의 두 사람을 잘 알았다. 가장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것보다는 잘 알았다. 둘 다 연애하고는 연이 없는 사람인 건 둘째 치고 이 시국에 자기들 감정에 빠져 없는 시간을 허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럼 뭔가 더 있다는 건데. 숨은 뜻을 참으로 머리를 굴려도 이렇다할 게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헤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를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무렴. 그 둘이 한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벨져는 과거의 패배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걸 즐겼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정말 초월하고 극복했을 리 없다. 그러기에 벨져는 너무 잘났고, 그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경 안 쓴다고 하느라 더 신경을 쓰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그런데 그 상대와 잔다고? 루이스도 그렇다. 벨져가 그러는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이글은 그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모종의 거래를 상상하며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하긴, 첫 만남이 그렇게 강렬했으니 또 모르지. 소위 운명의 짝이라는 걸지도 모르고, 섣불리 판단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마냥 도도한 발소리에 이글은 방 주인이라도 된 양 일어나지도 않고 괘씸한 작은 형을 맞았다. 예상한 대로 벨져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다가왔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벨져가 예쁜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이글을 쏘아봤다.
“어~. 작은 형,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바쁘게 쏘다녀?”
“뭐하는 짓이냐, 이글.”
“어, 열려있더라구. 왜? 내가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혹시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실 웃자 벨져가 대놓고 그 수려한 외모에 짜증과 불만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다. 핵심을 찔려 더 불쾌하겠지. 이글은 계속해서 아픈 구석을 찔러댔다.
“어? 진짠가 본데. 누구야? 예뻐?”
“이글.”
“에이, 그러지 말고~. 응? 누군데. 응? 아, 속 시원히 말 좀 해봐!”
“그런 거 없다.”
“정말? 그럼 이 머리카락은 뭐야?”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눈을 찡그리던 벨져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당황한 벨져의 눈빛에 이글은 상큼하게 웃었다. 나는 다아 알고 있어요. 비록 제 대사는 아니지만 지금은 재단의 동갑내기 독심술사의 말이 딱이었다.
“어디 보자, 형 거라기엔 좀 길고, 색도 탁하고…. 흐으음…. 누구더라?”
“이글!!!”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르고 그래?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봐?”
벨져가 이죽거리는 이글을 쏘아봤다. 떨리는 입가가 억지로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래봤자 이미 평정을 가장하기엔 한참 늦었다. 이글은 실실 웃으며 손을 펼쳤다. 공중에 뜬 머리카락이 둥실 떠다니다 떨어졌다.
“뭐, 형 반응 보니까 대강 알겠네. 근데 설마 억지로 한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망발이냐!”
“아무렴 시정잡배들고 아니고 명예를 목숨같이 아는 벨져 홀든 경께서 그러셨겠어. 근데, 좋았어?”
“이글!!”
“아, 소리 치지 말고 말 좀 해봐.”
어라, 이상하다. 벨져의 반응이 어째 시원치 않다. 아니,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게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과할 정도로 반응하는 게 어째 더 수상하다. 이러니까 마치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시뻘개진 얼굴이며 자기가 모욕당한 것보다 더 날카롭게 반응하는 게 딱 그랬다.
그 총잡이도 이런 분위기였지. 이글은 제 가정이 점점 더 확실해지는 걸 깨닫고 무미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벨져가 사랑에 빠진 건 두고두고 놀려먹을 일이지만, 웃음이 안 나왔다. 이건 하나도 재밌지가 않다.
“형, 미쳤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적당히 해라.”
“걔가 누군지 몰라? 진짜로?”
“그런 거 아니다. 제길, 설명해줄 테니 나와.”
“형!”
“나오라고 했다.”
싸늘한 눈빛에 이글은 입을 다물었다. 더 볼 것도 없다. 벨져가 하려는 말은 기껏해야 그의 감정을 어떻게든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티가 나다 못해 이 정도면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감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벨져가 루이스를 좋아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감정으로.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길은 너무 험하고 힘든 길이었다. 몰랐으면 또 모를까, 다칠 게 훤히 보이는데 가만히 지켜있을 수는 없다. 이글은 제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였다는 걸 시인했다.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어버렸다.
“루이스가 좋아?”
“…….”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마주한 형제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그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하는 소모전. 이글이 먼저 시선을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걘? 걔도 형을 좋아해?”
“……”
“진심이야?”
사랑이란 한 쪽의 감정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옆에서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는 사람을 봐왔기에 잘 알았다. 그 애처로운 사랑 얘기의 주인공이 벨져가 될 줄은 몰랐지만 그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나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음 심장을 가진 그녀다.
벨져는 원하는 걸 가지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아니다. 이글은 가까이서 지켜본 루이스와, 그녀의 등을 떠올렸다. 얼핏 가녀려 보이는 어깨지만 그 어깨에 짊어진 건 수 십 수만명의 목숨이다. 루이스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또 모를까, 제 아무리 벨져라 한들 그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녀의 이상은 너무나 멀고, 이 혼란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이기에 더더욱.
때문에 이글은 벨져가 말로라도 아니라고 답하길 바랐다. 차라리 모르면, 그렇게 부인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멀어지면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벨져는 답이 없었다. 침묵은 긍정이라 했던가. 더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이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뜻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미친 거야? 걔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그래. 예쁘긴 하지. 근데 예쁘기로 치면 형이 더 예쁘거든?!”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백 번 양보해서 형이 좋아한다고 해. 뭐 그럴 수도 있지! 가끔 하는 거 보면 귀엽기도 하고! 근데…!”
“잠깐.”
말을 막은 벨져의 눈빛이 험악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위협적인 눈빛에 이글은 움찔 뒤로 물러났다. 말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고, 이글은 제 형의 주먹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뭐?”
지금 어이가 없는 사람이 누군데, 벨져는 기가 차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뭐라는 건가. 아니, 기껏 사람이 걱정을 해줬더니 병신 취급을 해? 그것도 친동생을 상대로? 질투를? 벨져 홀든이?
이글은 차례로 떠오르는 의문에 헛웃음을 흘리다 웃어제꼈다. 이 정도면 정말 답이 없다. 지랄도 적당히 해야 불쌍히 여기지,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다. 한바탕 폭소한 이글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자신을 가라앉히고 벨져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이글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자초지종을 추궁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벨져 홀든이라니 소름이 끼쳤지만 그래도 그는 제 형이었다. 몹쓸 형이지만 어쨌거나. 그러니 어느 정도까지는 도와주는 게 맞다. 이글은 잠시 머릿속으로 연합과 벨져를 저울질하다 한 번 더 튕겨 보았다.
“나 연합 소속이걸랑?”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아, 예…. 참 잘나셨네요. 하아. 진짜 내가 미쳤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라. 이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옆에서 본 게 몇 년인데 귀여운 거 좀 볼수도 있지! 분명히 말하는데, 걔가 웃어주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거든?! 형보단 내가 걔를 잘 알어! 알아?!”
누구 염장지르는 것도 아니고, 꼴에 좋아한답시고 되먹지도 않은 질투를 하는데 억울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짱을 끼고 못마땅해하던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왔다.
“그럼 아는 김에 말해봐라.”
“…뭐?”
“그녀에 대해 아는 거 전부. 그럼 멋대로 군 것 정도는 용서해주지.”
벨져는 이글을 내려다봤다. 그 딴엔 선심 써서 아량을 베푼다고 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이건 권유가 아니라 협박이다. 말 안하면 용돈을 끊던가, 아니면 주먹이나 발이 날아오겠지. 이미 그의 승리에 도취해있는 형을 올려다보며 이글은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지, 걱정을 해봤자 보람을 느낄 수가 없는 형제다. 이 거지같은 형을 걱정하느니 루이스를 걱정하는 게 심신의 평화에 이로울 성 싶었다. 일단은 제 신세부터 걱정해야겠지만. 이글이 속으로 갈등하는 사이 벨져는 의자를 끌어다 앉고 와인까지 들고 와 홀짝였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다. 판도랑의 상자를 연 순간 빠져나갔다는 온갖 부정한 것들. 그 모두가 한데 섞여 벨져 홀든의 형상을 띠었다. 이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글이 연 상자의 밑바닥에는 일말의 희망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글쎄, 희망이 있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일까.
벨져는 이글이 다 토해내기 전까지 보내줄 사람이 아니었고, 다이무스처럼 은근슬쩍 속아주는 사람도 못됐다. 이글은 지금쯤 연합의 사무실에서 용을 쓰고 있을 루이스를 떠올리고 쓴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샤드가 제 머리를 강타하는 감각이 아직도 선했지만, 지금 그녀는 아주 멀었고 벨져는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가까운 주먹이 무서운 법이었다.
영웅님. 미안. 나도 좀 살자. 이글은 긴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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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일 때문에 몇 번 와보긴 했지만 휘황찬란한 럭셔리 호텔의 구조며 장식들은 여전히 새 것처럼 번쩍거리고, 여전히 낯설었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던 남녀 한쌍은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루이스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괜히 움츠러들어 후드를 더 깊이 눌러 썼다.
이런 장소는 역시 조금 부담스럽다. 화려한 걸로 치면 카모라나 아이리쉬 갱단의 보스들 사무실이 더하지만 공간이 풍기는 분위기는 비견할 수 없었다. 꼭 너같은 게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급스러운 금장이 박힌 문패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우아한 필체를 떠올리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똑, 똑. 루이스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드렸다. 있는 줄 몰라서가 아니다. 보통은 초인종을 누르니까 그런 평범한 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뒤를 내다보고는 루이스가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껴 섰다. 최소한으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벨져는 문을 걸어 잠궜다.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럭셔리 호텔의 객실은 참으로 그다운 화려하고 우아한 가구로 가득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화장대 위에 뜯지 않은 편지들이며 종이들이 흩어져있었다.
[귀엽더라.]
[눈이 대체 얼마나 낮은 거냐.]
[너 말야.]
대충 방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뚱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꽤 귀여운 수를 썼던데? 꼭 자기같은 꽃도 보내고.]
[하, 별일이군. 답지 않게 꽃말도 아나?]
[정확히는 얽힌 일화를 아는 거지만.]
코웃음친 벨져가 루이스를 지나쳐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의 기다림을 알려주듯 테이블 위엔 와인잔 두 개와 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고, 벨져는 코르크 마개를 따 잔에 따랐다.
[앉지 그래.]
[고마워. 안 그래도 다리가 아팠거든.]
그리 오래 서있던 것도 아니지만 루이스는 일부러 벨져의 신경을 긁을 법한 말을 하며 벨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와인을 따르고 있지만, 순간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도 도발은 충분했다.
[질문할 건 좀 생각해봤어?]
[먼저 할 기회를 주지.]
[그 내려다보는 태도는 여전하구나. 그러다 또 다칠라.]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지. 더 할 말 없나?]
루이스는 벨져가 내민 잔을 손에 들었다. 건배따위는 필요 없겠지 싶어 대답하는 대신 그를 바라보며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려 잔을 기울이자 질 좋은 와인의 달고 상큼한 향이 훅 끼쳤다. 펍의 맥주나 위스키가 입에 맞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걸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에겐 뭐든 싸구려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루이스는 싸하게 포도의 향을 남기고 넘어가는 와인을 삼켰다. 은은히 감도는 향이, 꼭 혀를 희롱하는 것 같다.
넌 내게 줄 게 없다. 네가 가진 것들 중에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없고.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던 벨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에겐 이 정도가 당연한 걸 테니까. 아무리 애써도 그의 눈에 찰만한 걸 마련하는 건 무리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전에 내건 조건을 떠올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먼저 물을게. 제키엘 헌팅턴의 테라듀는 우리 쪽 테라듀 능력자의 것과 동일한 금속이야?]
[그렇다.]
루이스는 레베카가 만나러 간다고 했던 '친구'와 가면의 아이작을 떠올렸다. 그리고 레나를 쫓던 스토커. 그 세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면 그의 인간적인 면을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레베카는 그 역할을 하기엔 너무 올곧고, 그렇게 잔인하게 친구를 속일만한 사람이 못 됐다. 배신을 경험하는 건 자신만으로 족하다. 루이스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성급했다. 일단은 이 남자를 상대하는 게 먼저였다.
[네 차례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길래 시간을 준 것 뿐이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벨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렸다. 붉은 와인이 잔 안에서 물결치며 얇은 선을 남겼다.
[해석하는 건 각자의 자유에 맡기기로 했던 것 같은데.]
[흐응. 딱히 궁금한 건 아니다. 관심도 없고.]
[좋아. 그래서 네 질문은 뭔데?]
[이공간을 통해 얻은 힘은 공간을 파괴하면 사라지나?]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다. 관측할 수 없는, 보고된 적 없는 주제에는 답을 할 수 없다.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새 공간이 발견되긴 해도, 사라진 경우는 아직 우리 쪽에서도 전례가 없어. 그러니까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어. 나만 손해만 본 것 같네.]
모른다는 말을 돌려 말해도 벨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여유롭고, 내려다보는 시선은 변함이 없다. 와인잔을 입에 가져간 벨져의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순간 루이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이 질문의 답은 솔직하게 대답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벨져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한 번의 기회를 버린 셈이었다.
[답지 않게 의심이 많네, 벨져.]
[확실할수록 좋다고 한 건 너였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그 정도는 내줘도 상관 없다는 태연자약한 태도에 루이스는 생긋 웃었다. 오만한 말투며 사람을 깔보는 태도하며, 혼자 여유를 만끽하는 저 잘난 얼굴이 짜증났다. 얄밉다는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재수 없다. 어쩌다 이 남자와 다시 얽히게 됐을까.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날 그 문을 열었던 걸 후회했다. 아예 마주치질 말았어야 하는데.
[뭐, 그럼 다시 질문하지. 공간을 없애는 걸 시도한 적 있나?]
루이스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잔의 밑동을 만지작거리다 가볍게 잡고 들어올렸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고, 눈으론 그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이 아까울 정도의 고급 와인이지만 쉬지 않고 한 숨에 쭉 잔을 비웠다. 입술을 떼고 흐르는 방울을 혀로 핥자 벨져가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내가 친절했다는 생각은 않고? 전에 누가 먼저 뻗었는지 기억 안 나나 보네.]
[흥. 그딴 배려 필요 없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벨져 홀든이시겠지.]
살짝 툭,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 벨져가 발끈해 눈에 힘을 줬다. 안 들어도 뻔한 말에 목소리를 겹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뺨을 받쳤다. 지킬 게 없다는 건 그만큼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그만큼 외롭고. 루이스는 어깨에 준 힘을 뺐다.
벨져는 못마땅하단 표정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아무리 그의 기분이 언짢은들 루이스는 그의 눈치를 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시큰둥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벨져 대신 객실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갚아주는 게 도리다.
[네 의무는 아직 다하지 못한 거지?]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해낼 거다. 난, 벨져 홀든이니까.]
테이블 대신 둥근 와인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건드리던 루이스는 한결 진중해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벨져의 표정에 여유로 가득한 오만한 미소가 걷혔다. 하나마나인 질문을 하는 걸, 같은 방식으로 돌려준 것뿐이고 그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한 번 하기로 했으면 적어도 상대를 대등하게 대하는 게 그가 수호하는 기사도가 아닌가. 그러니 이 질문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있음에도 충분히 가치있었다.
[좋아. 질문해.]
벨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새삼 벨져의 속눈썹이 길고 예쁘다는 걸 깨닫고 와인잔의 테두리를 검지의 지문으로 매만졌다. 원을 그리는 손가락에 와인 방울이 맺혀 잔 위를 미끄러졌다.
[회사로 넘긴 연구 일지, 누락된 건 의도된 거였나?]
[계속 말하기 곤란한 질문 뿐이네. 맞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토니는 알고 있어.]
고르고 골라, 정제해낸 신중한 질문에 루이스는 성의껏 답했다. 모르는 거라면 몰라도 알고 있는 걸 감추진 않는다는 게 이 게임의 규칙이었고, 벨져에게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선 신뢰를 쌓는 게 우선이었다.
비록 그의 시험에 한 차례 통과했다고 해도 교묘하게 답하는 거나, 회피하면 결국 둘 다 시간만 버리고 헛수고만 쌓일 뿐이었다. 전 게임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도 결국은 신뢰의 문제였으니까. 특유의 오만함이 전부 걷히지는 않겠지만,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면 충분했다. 사실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하는 게 반칙이지만 흥미가 생겼는지 벨져의 눈빛이 이유를 요구했다.
[감이야.]
[뭐?]
예상한대로 벨져가 미간에 힘을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 물론 그냥 피하려 하는 거라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루이스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근거가 없기에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
[못 믿겠으면 말고.]
[연합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나?]
[기사단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정해놓은 규칙도 존중 안 해?]
[너...!]
[분명히 해두지만, 조직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으로 하는 거래야. 싫으면 당장 그만두던가.]
루이스는 잔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고 나기를 귀족, 그것도 홀든의 벨져. 이 남자와 동등한 자격으로 거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스는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고 생각도 없었고,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이 게임을 이어가야 할 정도로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연합은 가장 능력자들이 많은 조직이고, 그만큼 들어오는 정보도 많았다. 물론 그걸 솎아내는 것도 일이지만 연합은 회사, 혹은 국가 하나와 정보전을 해도 밀리지 않는다. 하물며 오스트리아에 국한된 기사단이 얼마나 유익한 정보를 가지고 있겠는가. 루이스는 벨져에게 이렇게까지 의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쉬운 건 벨져고, 그걸 알기에 제안한 것 뿐이다. 두 가지에 답했고, 한 가지 답을 얻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벨져의 목소리가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잠깐.]
[영양가 없는 소리나 하면서 계속 날 무시하고 깔볼 거라면 더 있고 싶지 않은데.]
[...다시 앉아주겠나?]
딴에 많이 참은 듯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 나름대로 양보한 거라는 걸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자의 입장에서 봐주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아량을 베풀 듯 굽혀주는 게 아니라, 동등한 위치를 원했다.
[다시 앉으면? 어차피 계속 그런 식으로 굴 거잖아? 자기만 양보하고, 참는 것 같고 그래?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하지 마.]
[...약속하지.]
[뭘?]
[노력하겠다.]
겨우 한다는 말이 노력하겠다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벨져는 자신이 한 약속을 나몰라라 할 위인은 못 됐다.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그 높다란 자존심에 꽤 상처일 테고,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에 루이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질문할 차례였다.
[프리츠를 돕는 건, 한 사람을 위한 거야?]
[아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나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이득을 볼 수는 있겠지.]
[흐응. 그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투군.]
벨져가 그 예쁜 얼굴에 불쾌하다는 걸 드러냈지만 루이스는 덤덤했다. 한 차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자기는 이런 식으로 구냐는 불만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지금은 연합의 능력자도, 기사단의 단장님도 아니니까 뭐.... 내가 감이라고 답한 거랑 비슷한 거지.]
[시키지도 않은 설명을 한 건 너다.]
[그러니까 잘 걸러서 들어야지. 그건 해석하는 사람 몫이야.]
[자의적 해석으로 답을 회피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질문에 포함이야?]
질문에는 질문으로. 싸늘한 신경전 속에 날카로운 말이 오갔다. 계속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바람에 고작 세 번 질문이 오갔음에도 피곤이 몰려왔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고급 와인이라 방심하고 한 번에 들이킨 게 이제야 올라오는지 머리가 아팠다. 임시방편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 같으니.]
[동감이야. 그보다 슬슬 피곤한데.]
[쯧.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랬나.]
벨져가 일어나 객실 한 쪽에 있던 크리스탈 물병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고압적인 말투나 시종일관 사람을 얕잡아보는 것만 아니면 소설 속에나 나오는 기사님 같았을 텐데. 물론 전형적인 기사님은 따로 있지만 이런 면에선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두 사람의 정의가 다를 뿐이라던 말을 떠올린 루이스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물을 마셨다. 와인보다 더 미지근한 물에선 비린 맛이 나지 않았다. 얼음을 녹이지 못한 날이면 그냥 수도에서 따라 마시는 물과는 천지차이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루이스는 잔을 반쯤 비우고 내려놓았다.
[네 차례야.]
[계속 할 수 있겠나?]
[이정도 쯤이야. 사실 오늘 야근해야 했는데 덕분에 탈출했거든.]
루이스는 엷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마사지하던 손을 내렸다. 앤지도 토니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 벨져는 영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춰서 해가 됐으면 됐지 득이 될 게 없다는 건 벨져 역시 잘 알았다.
[헌터가 프리츠에도 관여했나?]
[헌터라....]
모호하고 위험한 질문에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졌다. 헌터가 어느 개인을 특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직업군을 뜻하는 것인지도 애매할뿐더러 프리츠에 관계했냐니. 홀든과 프리츠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전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제게 묻는 의도는 무엇인가. 정말 몰라서?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더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벨져가 잔을 들었다.
[망설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넘어가도록 하지.]
[조금 의외라서. 그런 거 안 궁금할 것 같았거든.]
[그런 거라.]
[그렇잖아. 아니면 이것도 너를 위한 거야?]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나른하게 고개를 저었다. 뺨이며 몸이 뜨뜻한 게 피곤한 나머지 술기운이 금방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 해도 될 말이 나오는 건 다 그 때문이었다.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꽤 많이 돌아다녔거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미지근한 물에 얼음을 만들어 넣었다. 잔에 얼음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연합이야 그렇다 쳐도 그동안 서점에서 안 잘린 건 기적이지.”
“흥. 둘 다 같은 이유겠지.”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다른 건 몰라도 ‘영웅’의 이름은 꽤 매력적인 선전 도구니까.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돌려 말해주는 게 친절인지, 아니면 그냥 한 말인지 몰라도 그 핵심만큼은 정확했다. 그래. 둘 다 같은 이유다. 그걸 제외하면 남는 거라곤 얄팍한 연민과 정뿐이다. 그렇게 배신당해놓고 또 사람을 믿는 자신도 참 우습지만.
“다른 소릴 해대는 걸 보아하니 취했나보군.”
잠시 생각에 빠져 동료들의 얼굴을 그리는 사이, 벨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이 떨리고 그림자가 지는 모습이 예뻐 눈을 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엷게 웃었다.
벨져 홀든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남자다. 외모도 그렇지만,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포식하는 맹수와도 같이 강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하기 때문에 여유롭고, 강하기 때문에 약자를 굽어 살피는 아량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그 자신만을 사는 그에게 제 모습은 퍽 답답하게 비춰질 터였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한심하다는 듯 볼지도 모른다. 벨져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고, 이유를 말한다 한들 이해할 수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오해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안 하느니만 못 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 겨우 와인 한 잔에 취할 리가 없고, 설령 취했다한들 정신은 말짱했다. 피곤에 절은 몸이 받쳐주지 않는 것 뿐. 그렇다 해도 벨져는 더 이어갈 의지가 없어보였기에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 와인 잘 마셨어.”
“간다고? 이 시간에?”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물론 날이 바뀌어 오긴 했지만 못 갈 것도 없는 시간이다. 루이스는 그게 뭐 어때서?란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아하고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론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벨져가 인상을 쓰며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전장을 나뒹군다 한들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협은 어쩔 수 없다. 성큼성큼, 힘으론 절대 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루이스는 긴장하며 뒷걸음질 쳤으나 벨져는 홀든의 쾌검사였다.
등이 벽에 닿고, 벨져가 다가와 팔을 뻗었다. 얼굴 옆, 벽을 짚어 자신을 가둔 그의 손과 팔이 거북했다. 그래봤자 한 팔 뿐이니 완전히 가둔 것도 아니고 못 빠져나갈 것도 없지만 이런 식은 불편하다. 문득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에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세게 뛰었다.
“저, 저기…. 벨져…?”
“아무리 너라도 새벽 두 시는 늦은 시간이지. 자고 가라.”
진중한, 푸른 바다를 담은 듯한 눈동자. 에메랄드와 코발트의 염료가 함께 섞여 어우러진 것 같은 예쁜 눈은 이탈리아의 바다를 떠오르게 했다.
“…원래 이런 식이야?”
“이런 식이라니.”
“이렇게 꼬시냐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친 벨져가 턱을 살짝 올려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원래도 내려다보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깔보는 시선이라니. 그 잘난 얼굴에 얄미운 미소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명치에 주먹을 꽂아야 할까 생각하며 주먹을 쥐는데 귓가에 금속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옆 방을 빌려놨다.”
“모든 귀족이 다 너같은 건 아니지?”
“흥. 그럴 리가. 모든 영국 남자들이 신사던가? 종종 불청객이 찾아와서 그 방비용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고마워.”
“…가 봐.”
루이스는 실없이 웃으며 열쇠를 받아들었다. 태연한 척 미소를 머금고 열쇠를 고쳐 쥐자 사납게 치켜 올라갔던 벨져의 눈매가 슬쩍 풀어졌다. 짜증나긴 하지만 한편으론 참 알기 쉬워서 좋다. 루이스는 돌아서자마자 가식으로 띄운 미소를 거뒀다.
이런 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건 어디까지나 주인과 하인의 관계고, 그건 아직도 그가 저를 깔보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자신이 베푸는 아량에 감사할 줄 아는 시녀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루이스는 찝찝한 감정을 뒤로 하고 벨져의 방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기대 비슷한 걸 한 게 무색하기도 하고,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도 못하는 걸 혼자 의식하고 있다는 게 쪽팔리고 분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도로 열쇠를 던지고 싶지만,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 침대와 최신 설비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손을 대고 열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옆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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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아무리 졸리고 피곤해도 출근은 해야 한다. 오늘도 착실하게 소시민의 삶을 시작한 루이스는 별 다를 거 없는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서점으로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을 빵을 한 덩이 사고 출근.
루이스는 서점의 문을 열고 일할 때 입는 셔츠와 가디건으로 갈아입은 뒤 서점 뒤 테이블을 정리하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서점은 한가롭다. 아는 사람, 혹은 꾸준히 찾는 사람만 오는 서점에서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소소하게 자리한 서점은 사실 트와일라잇 광장에서 가장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가끔 책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읽긴 하지만 추천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기야 이 시국에 트와일라잇까지 온 사이퍼가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바로 옆에 있는 홀든 은행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이퍼들이 들락거리지만 서점은 한가롭기 그지 없었다. 루이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하루가 갈수록 몸이 예전같지 않다. 여기저기가 삐걱거리고, 만성 수면 부족으로 카페인 없이는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모처럼 볕이 잘 드는 날씨에 몸이 더 나른했다. 인간의 삼대 욕구는 수면욕과 식욕, 성욕이라고 했던가. 안 그래도 요즘은 지치는 일 뿐인데 한밤중에 잠도 안 자고 돌아다녔더니 잘 시간을 뺏기는 건 물론이요, 거기에 머리까지 쓰느라 배로 힘들었다. 하긴, 벨져 홀든을 상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어제는 정말 생각나는 게 거기밖에 없어서 그랬지만 벨져의 말대로 장소를 옮길 필요는 있었다. 뒤에 보이는 트리비아, 방금 막 리스폰 기어에서 내려와 무전으로 들리는 이글의 목소리에 떠오른 게 거기였을 뿐이다.
딱히 거기라야 할 이유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거기까지 오가는 시간과 체력이 아깝다. 게다가 제 아무리 잘난 벨져 홀든이라도 일단은 연합의 세력권인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 중 누군 뭐 안전하겠냐마는,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이미 한 차례 아무것도 아닌 조무래기를 깔봤다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벨져를, 그 아름답고 고고한 남자를 떠올리다가 눈을 비볐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걸 봐선 아무래도 여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얼어죽을 걱정이나 난방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좋지만, 더위와 쨍한 햇살은 견디기 힘들다. 여름은 루이스에게 가장 가혹한 계절이었다. 올해는 더 더울 거라는데 또 어떻게 여름을 나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나고 자란 런던의 뒷골목에 해가 잘 들지 않아서였을까. 추위를 견디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한여름 뙤약볕에는 몸이 맥을 못 추고 늘어졋다. 거기다 햇빛에 노출된 피부는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울긋불긋하게 물들어서 여름에도 몸을 가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편해서 입고다니던 후드는 이제 떼어놓을 수가 없는 필수품이 됐다.
다들 해수욕이다 뭐다 하며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놀러갈 때도 루이스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벨져는 더 피부가 희고 창백한데 여름엔 어떨까. 그 성격과 외모에 양산이라도 쓰고 다닐지 모른다. 분명 화려한 레이스 양산을 쓰겠지. 워낙 하얗고 예뻐서 흰 색이나 아이보리 색이 어울릴 텐데.
지루하기 짝이 없는 뻔하디 뻔한 로맨스 소설을 읽던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았다. 모든 걸 가진 귀족 남자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활발하고 선한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차고 넘쳤다. 흔히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는데, 신데렐라는 원래 귀족 가문의 여성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왠지 그가 이 거리를 지나갈 것만 같다. 그렇게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데 꽃 파는 아이 하나가 서점 문을 열었다.
“저, 저기….”
“응? 무슨 일이니.”
“이거…! 엄청 예쁜 분이 언니 갖다드리라구…!”
뺨이 발갛게 물든 데다 눈이 반짝이는 여자아이가 루이스에게 수선화 한 다발을 내밀었다. 엄청 예쁜 분. 머릿속을 스쳐가는 인물에 루이스는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그리구 이것두요!”
“응, 고맙구나. 다른 말은 안 하셨니?”
루이스는 꽃을 내려놓고 앞치마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열한두살쯤 됐을까, 자매가 아니냐고 더러 묻는 세탁소의 아이 또래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작은 쪽지를 건넸다. 두 번,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접힌 쪽지에선 희미하게 꽃향기가 났다. 이쯤 되면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보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것도 없었다.
“어, 음…. 그지만 이건 비밀인데….”
“나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던?”
“아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그게….”
시선을 피하는 아이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 루이스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아이를 다그칠 생각은 없다. 대신 아이의 모자 위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 먹었니?”
“아뇨, 아침 일찍 꽃을 따느라….”
“그럼 같이 먹을래? 혼자서 먹긴 심심했거든. 그래봤자 빵이랑 차뿐이지만.”
“네!”
능력자도 아닌 아이가 여기까지 꽃을 팔러 왔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정말 형편이 어렵거나, 아니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스파이거나. 벨져가 뭘 보고 고른 건지 몰라도, 어쨌거나 아이는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낡은 원피스와 앞치마. 그것마저 꽃을 꺾느라 흙으로 더럽히고, 제 때 먹지도 씻지도 못한 데다 음식을 보자마자 기대감에 눈을 빛내는 것까지. 어쨌거나 루이스는 거리의 고아 출신이었고, 그런 것들을 구분하는 눈만큼은 확실했다.
차를 우리고 컵에 담아 내가는 동안 아이는 신기한 듯 서점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루이스는 작은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고 말을 붙였다.
“읽어보고 싶니?”
“아, 아뇨! 읽을 줄도 모르는 걸요. 그 예쁜 분도 제일 먼저 글을 읽을 줄 아냐고 물어보셨고…. 앗!”
손사래를 치던 아이는 해맑게 웃다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밀을 말해버리고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는 빵을 잘라 큰 쪽을 아이에게 건네며 웃었다.
“괜찮아. 비밀로 할게. 약속.”
“정말이죠…?”
“그럼. 별 것도 아닌걸.”
“휴, 감사합니다. 아, 언니도 예쁘세요! 정말로요! 아까 그 분은 장미같구, 언니는 물망초 같아요! 더 잘 팔리는 건 장미지만요!”
“그래. 고마워.”
들어올 때만 해도 간신히 말을 꺼내던 아이는 말이 많고 활달했다. 천성이 밝고,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고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가 빵을 손에 쥐자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천천히 먹으렴. 차도 좀 마시고. 너무 뜨겁니?”
“아뇨! 괜찮아요! 뜨거운 물이 얼마나 귀한데요!”
“그러다 체할라.”
루이스는 아직 김이 오르는 아이의 컵을 들고 후후 불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에게 컵을 건넸다.
그야 물론 보낸 애가 안 돌아오니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도 벨져가 지켜보고 있다. 직접 행차하지 않는 이유는 단연 옆 건물의 그 때문이었다. 이글이 아무리 바닥에 드러눕고 떼를 써도 절대 빌려주지 않는 홀든 가의 장남.
다이무스는 꽤 젠틀한 신사였고, 서점에도 자주 들르는 단골 고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벨져보다야 다이무스의 호의를 사는 게 낫고,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다이무스에게 빚을 지우는 게 이득이지만 어쨌거나 한 번 거래를 시작한 이상 그를 팔아넘길 순 없었다. 못 할 건 또 뭐 있겠냐마는, 그랬다간 정말 그와는 끝장이었다.
답을 아이 편에 돌려보내야 할까. 루이스는 창밖을 흘긋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부러 글을 못 읽는 아이를 보낸 건 단 한 줌의 정보도 흘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마 제대로 전해주는지도 지켜봤겠지. 아무렴 벨져 홀든이 일을 그렇게 허술하게 할 리가 없다.
루이스는 아이가 빵을 먹는 사이 창을 등지고 서서 쪽지를 폈다. 코어레너드의 럭셔리 호텔 이름과 네자리 숫자. 루이스는 객실 번호만 외우고 일어나 물을 끓이느라 썼던 화로에 쪽지를 던져넣었다.
“언니는 안 먹어요?”
“응? 아, 괜찮아. 더 먹을래?”
“정말요?”
“가져갈래?”
조심스럽게 묻는 아이의 앞치마가 불룩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먹을 걸 숨기는 건 나중에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배가 주린 와중에 생각나는 가족 때문이다. 활짝 피는 아이의 얼굴에 루이스는 빵을 잘 싸서 봉투 안에 넣고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심부름 값 대신이라고 생각해.”
“그, 그지만…. 꽃 값도 후하게 쳐주셨는 걸요.”
“괜찮아.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루이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냥 쪽지를 배달시키고 말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아이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나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벨져는 너무 예뻤고, 흔치 않은 일을 접한 아이는 순전히 뿌듯한 마음에 자랑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었다. 꽃 파는 아이, 신문 파는 아이, 구두 닦는 아이. 거리에 넘쳐나는 아이들 틈새로 번지는 소문은 또다시 그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었다.
“비밀로 해줄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 가족한테도,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꽃들한테도요?”
“응. 사실, 언니랑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거든. 언제 어디서나 감시하고 있어서, 잘못하면 너도 네 가족들도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알겠니?”
짐짓 심각한 척 아이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속삭이자 겁을 먹은 듯한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걸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괜히 겁을 준 것 같아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눈을 돌리려는 순간 꼼질락거리는 아이의 손과 작은 잇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 한 거짓말, 조금 더 보탠들 어떠랴 싶어,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동생이 있니?”
“네, 이제 다섯살이구…. 몸이 아파요….”
“네가 동생을 사랑하는 것처럼, 언니도 그 분을 사랑한단다.”
“…정말요?”
아이들은 감정에 예민하다. 아이의 질문에 뜨끔한 루이스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직접 만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그 분의 말을 전해주겠니?”
루이스는 최대한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말하려 애썼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읽었던 소설의 정신 나간 여주인공이 새를 붙들고 하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하는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이 나이 소녀들은 으레 동화속에 나올 법한 로맨스를 동경하는 법이니까. 슬픈 척 눈을 깜빡이자 아이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예요!”
“고마워.”
루이스는 아이를 한 번 안아주고 일어났다. 오래 쪼그려 앉은 탓에 다리가 저렸다. 어떻게 이게 통했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금단의 사랑을 하는 가련한 여주인공 보듯 힘내라며 서점을 나섰다.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뒤에서 손을 흔들던 루이스는 의자에 털석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의욕이 넘치는 것도 문제다. 아이가 벨져에게 힘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벨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조금 궁금했지만 당장은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택도 없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걸 가지고 또 한 소리 할 지언정 그도 이해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가벼운 아이들의 입을 믿을 순 없을 테니까.
한 차례 폭풍이 몰아친 것 같다.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빵부스러기와 컵 두 개, 그리고 서점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와 눈이 쨍할 정도로 노란 수선화가 남았다. 오늘 아침에 꺾어왔다는 말을 증명하듯 물기가 어린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가장 예쁜 유리병을 찾아 반쯤 물을 채우고 꽃을 꽂아 햇볕이 가장 잘드는 창가에 병을 놓았다. 싱그러운 여름의 향기가 오래된 종이로 가득한 서점을 채웠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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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다음주에 온다던 사람입니다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
불꽃이 일고 금속음이 터지며 곳곳에서 공격이 날아드는 교전 상태, 가장 앞에 선 벨져는 박쥐로 변해 후방으로 달아나는 여제를 쫓았다. 그녀를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를 악문 순간, 벨져의 옆으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얼음 레일이 벨져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제길…!”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급하게 몸을 돌려 검을 던져다. 섬광보다 빠르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이라면 막을 수 있다…!
“전부, 얼어버려!”
한 끝, 한 끝 차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녀를 막지 못한 대가는 차가운 얼음 감옥이었다. 후드 안으로 휘날리는 청회색 머리카락. 얼음 속에 갇힌 채 후방에서 교전중이던 이들이 얼음 산탄총에 쓰러졌다. 벨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짐이라고는 하나 회사의 능력자라는 사람 넷이 단번에 리스폰 기어로 올라가버리는 기분이란. 꼼짝할 수 없게 가뒀던 얼음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벨져는 모든 기술을 써버린 루이스에게 달려들어 올려 베었다. 네 번, 베고 잡아 착지하며 안개지역의 상자 안으로 밀어넣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크흣…!”
“그 잘난 영웅의 이름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군.”
“네가 상관할 바가…, 큭!”
“아직 내 질문에 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하, 먼저 내빼놓고 이제 와서?”
벨져는 유치한 도발로 기회를 엿보는 루이스를 잡아 빠르게 발도해 베었다. 그녀만큼 단번에 큰 피해는 입힐 수 없지만 일대일인 이상 이런 식으로 갉아먹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우위를 점하고 이어가는 건 제 쪽이다.
아무리 환영의 도시라한들 고통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물들었다. 그 와중에도 눈을 감지 않는 건 칭찬할만 하지만 그녀는 과거 첫 대결에서도 그랬다. 그러니 딱히 칭찬해줄 필요도, 전처럼 한 수 물러줄 것도 없다.
“흥, 아직 남은 질문이 있지 않나?”
“후우. 하,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거야? 의외로 쪼잔하네! 홀든!”
깔끔하게 베어넘기며 잠시 손을 놓은 틈으로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날카로운 얼음의 위력은 몸소 체험해 본 자만이 안다.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걸, 벨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검의 괘적을 바꾸는 것보다 루이스의 검이 더 빠르다. 벨져는 검으로 쳐내는 대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이 거리면 언제든 검을 던져 공격할 수 있다. 루이스의 사정거리를 가늠한 벨져는 다시 그녀에게 검을 던져 돌아가려 했다.
“나가라!”
여제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뒤에서 날아든 박쥐 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앞은 루이스, 뒤는 여제. 벨져는 작게 혀를 찼다. 어느 쪽이든 피할 수 없다. 루이스가 미소짓는 게, 옅은 안개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작게 움직이는 입술.
“제길…!”
박쥐 떼가 등을 덮치고, 몸이 떠오른 순간 루이스가 벨져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른팔을 왼팔로 받치고, 귓가에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속삭이더니 곧장 쨍한 냉기와 함께 얼음이 폭발했다. 쟁쟁한 소리와 투박한 통증이 이어지고, 곧이어 벨져는 리스폰 기어 위로 올라갔다.
자아도 없이 끌려가는 기분이란 언제 당해도 기분 나쁘다. 먼저 올라와있던 넷이 제 눈치를 살피는 게 더 짜증나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십 분 내내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방금 그 한 방으로 열세를 극복하고 승기를 가져간 주역이 본진까지 들어와 무자비하게 수호자를 쓰러트리는 걸 손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영 심기가 불편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녀의 능력만큼이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이야말로 벨져가 방금 전까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전날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여느 아가씨마냥 머리를 틀어올린 게 이레귤러일 뿐이었다. 제 눈 앞에서 까딱이던 희고 가는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향락의 기억.
당황한 나머지 먼저 살롱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할 거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루이스가 너무 태연한 탓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쪽은 말을 꺼낸 벨져였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저들끼리만 화기애애하느라 공성을 망친 팀원들이 먼저 리스폰 기어를 나간 탓에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의 그 술집에서 봐.”
홀로 남은 벨져는 마지막으로 루이스가 속삭인 말을 곱씹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겨우 그 말만 가지고 어떻게 찾아가겠냐고 하겠지만 벨져에겐 짚이는 곳이 있었다.
아니, 거기밖에 없다. 루이스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디시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제 망나니 동생이 그가 가진 가장 귀한 재산에 흉터를 내고 가문의 위상을 더럽힌 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능력자에게 당한 제가 낫다. 비록 3급 능력자라 하지만 적어도 루이스는 그녀가 가진 다른 이름 앞에 한 치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분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상대였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벨져라 한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벨져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 루이스를 옹호해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겨우 그렇고 그런 능력자따위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만큼 굴욕적인 건 없을 테니까.
그 때의 일은 제 오만과 방심이 빚어낸 실수에 불과했지만 '루이스'는 달랐다. 그녀는 벨져 홀든을 꺾은 능력자답게 성장해나갔고, 이제는 더 나아가 연합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이 쯤 되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어차피 일생에 한 번쯤 겪을 일이라면, 오히려 그녀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벨져는 화를 내며 올라온 르블랑의 꼬마 숙녀와 명왕의 양녀를 내버려두고 부서져가는 HQ를 바라봤다. 니케가 루이스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누구에도 지는 법이 없는 자신이건만 루이스 앞에만 서면 흐름이 이상하게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어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내려가지 않았다. 여제가 비행을 시작한 이상 끝난 게임이었고, 내려가봤자 기세등등한 적을 마주해 분풀이를 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 당초 얼굴을 비추는 것에 의의가 있었던 만큼, 벨져는 이번 공성을 진들 이긴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예정에도 없던 루이스가 나오는 바람에 아주 약간 진심이 되었던 것뿐이다. 오히려 소득이라면 소득이 있었지.
여느 때처럼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 받는 회사 사람들을 두고 벨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잔소리꾼이라도 만나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
* * *
포트레너드의 쪽, 디시카는 워낙에도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회사와 연합의 갈등이 깊어지고 안타리우스가 성횡하는 근래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술냄생와 퀴퀴한 악취가 진동하는 술집으로 발을 들인 벨져는 손을 들어 코를 손등으로 가렸다. 그런다고 악취가 가시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손등에 남아있는 향수 냄새가 이 냄새에 적응하기까진 도움이 될 터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술집에는 불량배며 정신이 빠진 녀석들이 즐비했고, 벨져는 저를 이런 곳으로 불러낸 사람을 찾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능력자라 한들 여자 혼자서 들어올 곳이 못 된다. 척 봐도 질이 나쁜 녀석들이 여자를 끼고 수작을 부리거나, 공기가 탁해질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며 싸구려 술을 퍼마시는 지저분한 술집은 고귀함과 품위를 호흡하며 자란 벨져에겐 아무리 좋게 봐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잘도 이런 싸구려 술집에 발을 들일 생각을 했구나, 이글. 막내를 떠올리며 혀를 차던 벨져는 안쪽 구석에 후드를 쓰고 앉아있는 루이스를 발견했다. 눈여겨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엔 싸구려 위스키 한 병과 유리잔 두 개, 맥주병이 늘어서있었다. 혼자 마실 양은 절대 아니다. 벨져는 갈색 맥주병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훑던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눌러쓰고 고개를 수그린 그녀를 내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꼭 이런 곳이어야 했나?”
“보다시피 제정신 안 박힌 놈들 뿐이거든. 이 시간엔 더더욱. 걱정마, 여기 주인이랑 아는 사이니까.”
“흥. 말은 잘하는군.”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평소에 입는 후드재킷보다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여성 특유의 골격까지 감출 순 없다. 조악한 불빛 아래 잘 보이지 않는 얼굴과, 곳곳에 생채기가 난 가는다란 손가락. 벨져는 잔을 들어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마시지도 않을 맥주병만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이런 술이야 그냥 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얼음이 나올 리도 없고.”
“그냥 달라고 해.”
루이스는 손을 쥐었다 펴며 빈 잔에 얼음을 채웠다. 기묘한 장면이지만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이 정도는 놀라운 축에 끼지도 못했다. 라벨도 상표도 없는 위스키를 따 잔에 따른 벨져는 얼음과 술이 섞이도록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대로 내려놓으려 했는데, 무언가의 기대를 담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단숨에 들이켰다.
“후후. 만만히 볼 게 아니지?”
“…너….”
“그게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야. 싫으면 다시 문 열고 나가.”
색을 보고 당연히 위스키겠거니 생각한 술은 식도와 위를 태우는 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셌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썼던 벨져는 여유롭게 웃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루이스는 만지작거리던 병을 따 손에 들고는 의장에 등을 기댔다. 가시지 않은 쓴 맛과 타오는 속 때문에 입가가 씰룩거렸으나 루이스는 제가 먹인 골탕이 만족스러웠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래.”
“잘도 나를 기만하는군.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고.”
“기대할게.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게 인지상정. 말문이 막혔는지 루이스가 테이블에 팔을 올리며 벨져 쪽으로 몸을 숙였다. 후드 안에 감춰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피처럼 붉은 눈이 벨져를 향했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혼자 남겨지는 거, 기분 정말 별로였거든.”
“윽……. 그때는….”
“알아. 경황이 없었겠지. 바쁘셨거나. 그런 걸로 연연하고 매달리는 레이디가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렇지 않게 아픈 구석을 찌르고 빠지는 바람에 기세등등하게 루이스를 몰아붙이던 벨져의 기세가 꺾였다. 아침에 일어나 목도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벨져가 입을 다문 사이 루이스가 도로 몸을 뒤로 빼고 팔짱을 꼈다.
“그땐 나도 완전히 취했었고…. 그냥 서로 실수한 걸로 치고 넘어가자고. 참고로 전에는 술로 때우려다가 그 방에 있는 술을 동내고 밑천이 없어서 옷 벗기로 했던 거야.”
“누가 먼저….”
“알고 싶어?”
“아니, 됐다!”
누가 침착한 결정사 아니랄까봐, 잘도 부끄러운 얘기를 술술 늘어놓는 루이스때문에 벨져만 뺨이 달아올랐다. 어느 쪽이든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전말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고, 없던 일로 하는 건 이쪽도 원하는 바였다.
벨져가 죽고 싶을 정도로 쪽팔려하는 게 재미있어,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발로 벨져의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그가 루이스를 볼 때 고운 얼굴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고, 확률로 치면 다시 한 번 거대 일식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희박했다.
“뭐, 지난 질문에 다시 답하는 건 포함시키지 말자구.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냐고 물어본 거야. 이걸로 세 번째네.”
“으윽….”
분명 엇비슷하게 마셨던 것 같은데 먼저 정신을 놓고 기억을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벨져는 도로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분명해서, 루이스는 조금이나마 다이무스의 고충을 이해했다. 이글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픈데 벨져까지 돌보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루이스가 그런 생각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사이 벨져는 이미 몇 번이고 되짚었던 기억을 돌이켰다. 영화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유독 생각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레코드가 긁힌 것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는 기억 속에는 지금의 이 무감각한 얼굴이 아닌, 잔뜩 흐트러져 할딱이는 여자가 있었다. 충동에 휩싸여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타들어가는 속만큼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쓰린 속에 또다시 누가 불을 지른 것만 같다.
눈을 감았다 뜬 벨져는 자신을 다잡았다. 취한 것도 아닌데 멀쩡한 제정신으로 루이스에게 말려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서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만 해댔지. 네가 여제의 행방에 마지막 남은 와인을 들이키던 것까진 기억난다.”
“설마하니 그렇게 다 피해가고픈 질문만 할 줄은 몰랐거든.”
“동감이다.”
“규칙을 수정해야겠어. 물론 계속한다는 가정 하에.”
“무슨 생각이지?”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돼. 어쨌거나 조건은 전과 같아. 소속의 대표가 아닌 개인으로서 하는 거래고, 제공자의 신원 보호는 철저하게 지켜야 해.”
“차라리 종이와 펜이라도 가져오지 그러나.”
“이런 건 확실히 하는 편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서로 안전한 편이 좋잖아?”
“그래서 새 규칙은.”
“간단해. 답은 예, 아니오. 대신 대답하기 곤란하면…. 술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요구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지.”
“그렇게 하면 네가 내놓을 게 있나? 공평한 거래라고 들리지 않는데.”
“벌써부터 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왕이면 안전한 편이 좋지.”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사항을 늘어놓는 건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의 성격탓일 수도 있지만, 벨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영웅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 한들 변함없이 겁쟁이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모두를 쥔 건 벨져지 루이스가 아니다. 벨져의 말은 다소 가혹할지 몰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루이스가 가진 거라곤 그녀의 몸과 명석한 두뇌, 능력과 정보 정도가 전부다. 자랑하는 능력도,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영리함도, 그리고 그녀가 아껴 마지않는 동료들도 전부 하나같이 내놓을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나를 줄게.”
“하! 전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군. 이만 일어나도 되겠나?”
“그래? 전에는 꽤 좋아했던 것 같아서. 아쉽게 됐네.”
이 인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 하룻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러는 게 불쾌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이래서 엮이고 싶지 않았건만. 벨져는 입가를 씰룩이며 루이스를 노려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덤덤한 무표정으로 맥주병을 기울이며 벨져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금 그 말, 상당히 불쾌하게 들리는군.”
“그러게 누가 기억하지 말래? 잊은 건 너야. 홀든. 정 궁금하면 질문이라도 해보던가.”
“흥. 차라리 술을 마셔라.”
“그게 별로라는 걸 경험해서. 아까도 말했지만, 혼자 남겨진 기분 진짜 별로거든.”
“윽…,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내 마음이다. 그리고!”
주먹을 부들거리던 벨져는 홧김에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건 전혀 벨져 홀든스럽지 않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도발하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 번쯤 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결코, 음란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소녀같이 순수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바람에 더 오기가 생겼다.
“장소는 내가 정해.”
“아무렴.”
생긋. 루이스는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막 봉우리를 틔운 하얀 꽃처럼 웃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얄미워 벨져는 대충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술값을 던졌다.
“이런 악취나는 곳에 한 시도 더 있고 싶지 않군. 일어나.”
“응? 잠깐. 아깝잖, 으왓…!”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술이 아까운 것 뿐이었는지 루이스는 저항 한 번 없이 끌려왔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벨져는 술집을 나오자마자 루이스의 손목을 놓았다.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가늘다. 장갑을 끼고 만졌음에도 손에 남은 촉감이 왠지 간질거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찼다. 말 한 마디 없이 가스등이 드문드문 서있는 거리를 걷는데 루이스가 추운지 팔을 감싸고 목을 움츠렸다. 손으로 팔을 쓰는 궁상맞은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샜다.
“저기, 난 이쪽인데….”
“그래서?”
“응?”
“앞장서라.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로의 갈림길에서 멈춰선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말하는 의도야 뻔하지만 그렇다고 새벽에 혼자 돌려보내기엔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루이스가 얼음보다 더 차갑고, 능력자 다섯쯤은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라 한들 이런 시기에 혼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할 리 없었다.
“지금 레이디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고개를 기울여 올려다보는 루이스에게 정색하고 말하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바로 섰다.
“다행이네. 보다시피 사람이 전혀 없거든.”
루이스는 싱긋 웃더니 거리에 얼음길을 깔고는 미끄러졌다. 자랑하는 기동력이 이럴 때도 쓰이는 모양이다. 벨져는 한달음에 멀어진 루이스의 뒷모습과 바스라진 얼음이 순식간에 기화되는 걸 보고 돌아섰다.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따라갈 의무까진 없다. 어차피 쉽게 당할 리가 없기도 하고,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건 그녀에게 추근덕거릴 멍청이들의 안위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인다. 벨져는 이미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꾸 루이스가 마음에 걸리는 건 몸에 익힌 매너와 습관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손에 쥐었던 가느다란 손목이 생각나서, 벨져는 샤워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루이스를 생각했다.
하루를 늦게 마치는 것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하루에 두 번 씩이나 루이스를 마주하기란 여간 피곤한 게 아니어서, 금세 잠이 몰려왔다. 눈을 감기 전, 연락할 수단과 만날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이것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깨달은 벨져는 베개를 잡아 당겨 편한 자세를 잡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나머지는 일어나서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는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그녀가 나왔다. 귀에 끈적하게 감겨드는 목소리가 달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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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위험한 사람
* 현대물, 비오는 날 검은 머리 짐승을 주운 루이스
위험한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위험할 줄이야.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 갔다가 서점 알바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 둘이 나타나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연히 겁을 먹고 피하려 했지만 남자들이 내뿜는 위압감에 어쩔 수 없이 검은 대형 세단에 올랐다.
어렵게 살긴 하지만 목돈을 빚진 데도 없고, 기껏해야 친구들에게 가끔 얼마씩 꾼 게 전부였다. 그러니 남자들은 사채업자도, 인신매매단도 아니다.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같이 가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게 부탁일리는 없지만, 폭력이나 협박같은 과격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사실 이렇게 실려가는 이유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며칠 전까지 루이스의 원룸에서 한 침대를 쓰다가 말도 없이 사라진 그. 잘 잡힌 근육과 손에서 팔을 휘감은 문신, 그리고 그 눈빛만으로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비 오는 날 야밤에 거리에서 배에 칼을 맞고 쓰러져있다면 더더욱. 루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그의 이름도 하는 일도 말하지 않았지만 같이 살기엔 나쁘지 않았다. 사람의 온기가 반겨주는 집, 김이 오르는 음식은 루이스가 일평생 막연히 그랬으면 좋겠다고 꿈꿔온 것들이었다. 늠름하고,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는 남자. 그는 단단한 바위같았다. 비바람에도 꿈쩍 않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바윗돌. 샤워를 마치고 나와 낮게 숨을 내쉬던 그의 벗은 몸과 눈빛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유도 목적지도 모르고 모르는 사람들의 차에 실려가면서 너무 태평하지 않은가. 루이스는 다시 제 상황을 상기하며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사람들을 상대로 육탄전을 해서 이길 자신도, 달아날 자신도 없다. 침착하자.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루이스.
창밖을 흘긋거렸지만 어둠이 내린 거리엔 적막만이 가득했고, 점점 더 모르는 풍경만 들어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바다에 루이스의 머릿속에 진부한 드라마의 전개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어둠의 조직원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런 그를 노리는 세력이 인질로 쓰기 위해 잡아들이는 그런 흔하고 뻔한 클리셰.
주인공도 그렇지만, 인질들의 끝도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인질은 죽거나, 온갖 험한 꼴을 당하고 결국은 목숨만 부지하거나 평생 트라우마가 될 기억만 안고 살아간다. 그래도 사랑한다며 나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건 소설이나 영화, 만화 속에나 있는 얘기일 뿐이다. 루이스가 탈출 계획을 세우는 사이 해안도로를 달리던 차가 휘황찬란한 건물에 멈췄다.
듣도 보도 못한 건물 앞, 먼저 내린 남자가 뒤로 와 차의 문을 열었다. 건물 앞에는 저를 데려온 남자들과 비슷한 남자들이 서있었고, 루이스는 깔금하게 도주할 계획을 포기했다. 남자들은 루이스가 내리자마자 양 옆에 서서 연행하듯 걸었다. 팔을 잡지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결국 루이스는 반항 다운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발을 옮겼다. 곳곳에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가득한데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힘을 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들도 위에서 시킨 일을 하는 것 뿐이니 제 처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얘기를 해야 했다.
건물은 휘황찬란할 정도로 고급스러웠지만 위험하고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야 이 공간을 채운 사람들이 이 모양이니 당연하지만,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힌다. 마침내 저를 찾은 사람을 만나는 건지, 남자가 양쪽으로 여는 커다란 문을 두드렸다. 긴장으로 마른 침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렸다.
루이스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부디, 이 문 너머에 부디 제가 아는 얼굴이 있기 만을 바랄 뿐이었다.
“...계속 거기 그렇게 서있을 건가?”
“당신....”
“앉지.”
양복 대신 중국의 전통 복식을 갖춰입은 그가 기다렸다는 듯 루이스를 맞았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그가 한 번 눈짓하자 루이스를 데려온 사람들이 문을 닫고 나가고, 딱딱한 막대기마냥 그 자리에 서있던 루이스는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신세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괜 채 저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과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루이스의 걸음을 이끌었다.
“저녁은 먹었나?”
“아, 아뇨....”
“그럼 밥부터 먹지. 편하게 있어도 좋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요. 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루이스는 말을 꾹 눌러 참았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호화로운 방 안의 카페트로 시선을 내리고 있으니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한, 즐거움을 참아내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들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말 하지 않았나. 빚은 갚겠다고.”
“안 주셔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대가 호의를 베푼 게 그대의 마음이듯, 나 역시 내 마음대로 할 뿐이다.”
“...덕분에 오늘 삶의 위협을 느꼈는데.”
“그들이 무례하게 굴던가?”
잘생긴 얼굴에 미간이 좁혀지며 확 번지는 짜증에 루이스는 고개를 도리저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손 하나 까딱 않고 사람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이다. 제 말 한 마디에 사람 하나의 목이 날아가는 건 루이스로서도 썩 달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양해주었으면 했다.
루이스는 평화와 안온한 일상을 사랑하는 소시민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을 잃고 싶지 않다. 무겁게 짓눌린 공기 속에서, 후드를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은데요.”
“시간이 늦었다만.”
“늦은 시간인 걸 알면서 이렇게 데려와요? 말 한 마디 없이?”
“....... 루이스.”
“기왕 물어본 김에 하나만 더 물을게요. 난 당신 이름도 몰라요. 그건 압니까?”
이 지경이 되어서도 루이스는 남자의 이름조차 몰랐다. 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왜 바라지도 않은 보상을 주려는지는 몰라도 이런 식은 아니다. 말을 하다보니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라 그를 노려봤다. 남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루이스와 눈을 맞추다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에 무게가 느껴져 짓눌릴 것만 같았다. 괜히 혀를 놀렸나. 그냥 가만히 있을 걸.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 이를 악물고 눈을 감은 순간 뺨과 귀에 그의 손이 스쳤다. 후드가 벗겨져 목 뒤로 떨어지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티엔. 티엔 정이다.”
말문이 막혀 고개를 들자 그가 루이스의 귀 언저리에서 맴돌던 손을 거두고 뒷짐을 지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저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잘 지내는지 궁금했고..., 그리고....”
남자, 티엔은 말끝을 흐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을 고르는 그의 그 얼굴에 루이스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불안과 공포로 세차게 뛰던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저 당연한 신체 반응일 뿐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루이스는 꾹 눌러온 숨을 천천히 토했다.
“보고 싶었다구요?”
“....”
예상치 못한 답이라는 듯, 혹은 그 의표를 정확히 찔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새나왔다. 무서운 사람이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다. 가령 생각지도 못한 식사를 차려놓는다던가, 빨래를 예쁘게 접고 바느질을 한다던가 하는 것들. 이제야 겨우 제가 아는 사람이 돌아온 것 같아 손을 뻗었다.
그는 루이스가 조심스레 뻗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고 뺨을 감싼 손바닥에 그의 얼굴을 부볐다.
“보고 싶었다.”
“네.”
“넌 아니었나?”
“...별로요?”
바로 눈꼬리가 올라가며 입이 일자로 굳어지는 게 퍽 귀여워, 루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삐지면 달래기가 여간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냉큼 웃으며 말을 고쳤다.
“농담이에요.”
“썩 유쾌한 농담은 아니군.”
“아무렴 여기까지 끌려온 저만 할까요.”
“...식사 하겠나?”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인지, 여긴 어디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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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햇살과 나그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지요 암, 그렇고 말고.
한산한 금요일 저녁, 루이스는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책을 덮었다. 이 시간쯤 되면 모두들 집에 돌아가거나 펍으로 향하기 마련이라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하긴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누가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겠냐마는. 최근 연합의 일로 바빠서 서점에 신경을 못 썼던 터라 자청한 일이었지만 인적이 드문 거리에 이따금 지나가는 커플을 보자니 속이 쓰렸다.
공성이 아니면 만날 기회도 적은 연상의 연인이 떠오르자 한숨이 먼저 새어나왔다. 딱히 연상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귀기로 한 지 한 달, 일분일초도 떨어져있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에겐같이 있을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매번 먼저 찾아와주는 게 미안한데, 거기에 이번 주말엔 보기 힘들겠다고 말할 때의 그 기분이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루이스에겐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처럼 그 역시 질려버리는 건 아닐까.
루이스는 제게 뻗은 손의 온기와 그의 미소를 기억했다. 그녀 역시 그랬지만, 그 역시 제게는 너무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루이스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신난 강아지처럼 다가온 그의 얼굴에 실망이 번지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감추던 모습에 루이스도 마음이 아팠다.
사람에게 할 비유는 아니지만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키우는 애완견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덩치는 크지만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개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다며 빈 손을 보였을 때 풀이 죽어 귀와 꼬리를 늘어뜨리는 모습이 자꾸만 그와 겹쳐졌다. 차라리 짜증을 내거나 같이 있자며 투정을 부렸으면 이렇게까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따스하고 햇살같은 사람. 루이스는 토니의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와는 어울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햇살이 가득한 풍요의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그, 릭 톰슨은 밝고 친절했다. 유복하진 않을지언정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 그의 능력조차 하나의 선물로 여기고 그의 삶을 즐긴 사람. 전쟁과는 동떨어진 그 분위기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릭은 루이스가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가진 사람이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시기하거나, 동경하거나. 루이스는 그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경에 가깝겠지만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산더미라 그에 대한 감상은 차차 잊혀졌다.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릭이 귀를 붉히고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왔을 때도 그랬다. 그 때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트리비아의 일로 지쳐있어서 미안하다는 답밖에 돌려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릭은 기다려주었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에 전장에 끌여들여서도, 마음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뀐 건 그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엔가 밤의 여제가 손을 잡아 하늘 위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처럼 나타나 모든 걸 체념한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그는, 릭은 그런 사람이었다. 두렵지 않았냐고, 죽을 수도 있었다고 소리 치자 릭은 웃으며 답했다.
“두려웠소.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그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더 무서웠소. 오늘 이 시간에 그대를 구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후회했겠지. 루이스. 나는 후회하지 않소. 내 무모함이 그대를 살렸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오.”
맞잡은 손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이 어릴 적 런던의 뒷골목에서 상상한 맑은 햇살같았다. 일 년에 몇 번, 빛이 들까말까한 그늘진 빈민가와 추운 거리에서 어렴풋이 꿈꿔온 구원이 여기 있었다. 릭이 울지 말라며 손을 뻗기까지 루이스는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그 손길마저 따스해서, 루이스는 제 뺨을 덮은 그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 날 이후로 릭은 매일같이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왔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귄다고 특별히 하는 건 별로 없지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릭은 별다른 재주 없이 루이스를 웃게 했고, 한결같이 자상했다. 침대 위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자상한 면을 이용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쁘기라도 했으면 일에 치여 잠시나마 잊었을 텐데 텅 빈 거리와 서점은 루이스의 마음을 죄책감으로 무겁게 짓눌렀다. 책임을 다하려 한 것 뿐인데, 오히려 죄를 짓는 기분이다.
정리할 것도 없는 책장을 괜히 눈으로 훑는데 서점 위층에서 갑자기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훔쳐갈 거라곤 먼지 쌓인 책들밖에 없으니 도둑은 아니고, 그렇다면 자신을 노린 기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대체 어느 암살자가 이렇게 대놓고 침입을 알린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에 얼음 결정을 만들었다 털어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창고로 쓰는 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조심히 문을 열자 어둠 속에 익숙한 뒤통수가 들어왔다.
“릭?”
“아, 그, 루이스. 그, 이건.... 그러니까.... 으악!”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 묻자 릭이 말끝을 흐리며 돌아봤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불을 밝히려는데 릭의 비명에 양철통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이어졌다. 등을 밝히자 청소 도구들 사이에 널브러진 릭이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광경에 헛웃음을 흘린 루이스는 등불을 올려놓고 문을 가로막은 빗자루와 대걸레를 한 데 모아 치우고 릭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머리에 붙은 먼지를 털고 있으니 릭이 꼭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멋쩍게 웃었다.
“집에 먼저 들렀는데 없길래 놀래켜주려 했소만....”
“그러다 엇갈리면 어쩌려고요.”
“아, 그 생각은 못 했소. 이제 슬슬 퇴근할 시간이지 않소?”
“그렇긴 한데 누구씨가 일을 벌려주셔서요.”
짓궂게 말하자 당황한 릭이 그가 어지른 창고를 둘러봤다. 양동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걸 보고 울상을 짓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데 그 변화무쌍한 반응이 꽤 귀여웠다.
“하아. 미안하오. 그러려던 건 아닌데.... 끄응. 내가 어질렀으니 여긴 내게 맡기시오.”
“하하, 농담이에요. 어차피 내일 또 쓸텐데. 당신이야말로 일은 어쩌고.”
“루이스.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소.”
“...릭”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왠지 모르게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이 입 안이 간질거린다. 잠시 토라진 척 입을 비죽이던 릭이 해맑게 웃었다. 서른이 넘어서 저렇게 소년같이 웃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루이스는 릭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성큼 다가오던 릭의 발에 양동이가 채였다. 그 사소한 해프닝마저 웃음이 나, 루이스는 오늘 여러 번 그를 괴롭히는 양동이를 한 쪽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머리를 긁으며 창고를 나온 릭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맞췄다.
실로 그답게 상냥하고 간지러운 키스는 곧 어른의 키스로 바뀌어 눈을 감은 채 키스에 집중하던 루이스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 역시 피곤할 텐데 이렇게 달려와 준 게 고마워, 루이스는 릭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뗐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까....”
“같이...!”
“얼마 안 걸려요.”
가볍게 뽀뽀하고 내려온 루이스는 밖에 내놓은 가판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갔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내려온 릭이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기다리는 바람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서점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빼먹은 게 없나 둘러본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전등을 껐다. 등 뒤에서 껴안고 얼굴을 부비는 그가 사랑스러워 몸을 돌리자 릭이 입술을 내밀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릭.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소.”
“공간을 열어줄래요?”
“물론이지.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집으로 가요.”
발밑에 게이트가 열리고, 루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릭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나 그렇지만 참 유용한 능력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루이스는 릭과 함께 그의 집에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 안에는 저녁 노을이 넘실거리고, 루이스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제게는 잘 시간이지만 릭에겐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릭. 저녁은요?”
“그대는 먹었소?”
“...아니요.”
“루이스.”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답하자 릭이 짐짓 엄하게 타이르듯 얼굴을 찡그렸다. 불규칙한 식습관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럴 때면 꼭 꾸지람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일단 빵이나 시리얼이라도....”
“릭. 그것보단 그냥 같이 눕지 않을래요?”
부엌을 향하던 릭이 걸음을 멈추고 루이스를 돌아봤다. 침대에 앉아 나름 잘 먹히는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릭의 갈등이 한층 깊어지는 게 보였다.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릭의 다리 옆으로 큼지막한 리트리버가 꼬리를 흔들며 루이스를 덮쳤다.
“으왓. 안녕 새라. 읏, 간지러워. 핥지마.”
“새라!”
“하하, 이러다 릭씨가 누울 침대가 없겠는데요. 아 따뜻하다.”
격하게 반기는 리트리버를 쓰다듬으며 드러눕자 릭이 억울해 죽겠단 얼굴로 다가왔다. 그를 놀려먹는 게 재미있다고 하면 화를 낼까. 루이스는 웃음을 꾹 참고 개를 끌어안았다. 꼭 그 주인처럼 사람을 좋아하는 리트리버는 유독 루이스를 좋아했다.
“루이스으. 정말 이럴 거요?”
“뭘요?”
“.....”
말문이 막힌 릭의 얼굴이 붉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 루이스는 장난을 그만 두고 상체를 일으켜 낙담한 채 울상을 짓고 있는 연인에게 키스했다.
“섹스할래요?”
“.......”
대답 대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귀여웠다. 루이스는 웃으며 일어나 릭의 손을 잡아 끌었다. 놀아달라고 조르는 개를 떼어놓고 욕실에 들어가자 밖에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람이 고프긴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를 벗고, 화장실 문에 릭을 밀치며 입술을 맞추자 그의 손이 루이스의 허리를 짚고 티셔츠를 말아올렸다.
“루이스. 사랑하오.”
“윽......”
키스 뒤에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하는 고백에 루이스의 얼굴에 열기가 번졌다. 쑥쓰러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릭이 목에 입을 맞추며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그대도 그렇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소.”
얼굴을 가리고 숨고 싶을 정도로, 릭은 애정 표현에 솔직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자 고개를 숙여 아래서 올려다보며 눈을 빛내는데, 그의 그 애처로운 얼굴에 루이스는 오늘도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사랑해요.”
“응. 고맙소. 덕분에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오.”
“릭....”
루이스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연인과 눈을 맞췄다. 넘치는 사랑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당신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또 사랑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걸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릭이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몇 번을 되새겨 생각해도, 릭 톰슨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축복인지. 루이스는 입 안에서 얽히는 진한 키스에 그를 마주안았다. 이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에 숨이 차올랐다. 이 사람의 온기가, 맞닿은 피부의 감촉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좋았다.
사랑스러운, 따스한 햇살에 꽁꽁 싸맨 외투를 벗는 나그네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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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4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 벨져루이<-다무 요소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찐득한 젤리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엿 같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만. 꼭 어릴 때 호기심에 집어먹은 터키쉬 딜라이트에 크게 체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싸구려에, 찐득거리고, 혀가 마비될 것처럼 달고 목구멍에 달라붙어 뜨거운 물을 아무리 마셔도 그 거식한 느낌이 남아있는 느낌.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까지 어쩌면 그리 닮았는지.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곤 티푸드랍시고 접시 위에 다소곳하게 올라온 마카롱과 터키쉬 딜라이트, 한 조각의 쇼콜라에서 눈을 거뒀다. 굳이 차를 마셔보지 않아도 오늘의 다과가 루이스의 손을 타지 않은 게 분명히 보였다. 혹시나 해서 한 모금 마셔본 차는 온도가 낮고, 제대로 우리지 않아 떫은맛까지 났다. 이런 걸 다과랍시고 올린 인간의 면상에 네가 한 번 먹어보라고 한 바탕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겨우 이런 걸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아깝다.
벨져는 제 기분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래.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이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오늘은 늦은 시간에 왔음에도 나와 맞지를 않았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그렇지 다과가 이따위로 나오도록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게 괘씸했다.
그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득 될 게 하나도 없다. 벨져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위를 매운 서류철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없어도 돌아간다는 걸 입증하듯이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에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뒤로 받은 돈이며 정보, 사람이 전부 종이 위에 있었다. 참으로 작은 세상이다.
늘상 하던 것처럼 사인을 하기 위해 펜을 들던 벨져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종이 속에 담긴 세상을 찬찬히 훑었다. 그냥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시간을 때우려던 것뿐이었는데. 벨져는 본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다른 서류철을 열어 종이를 넘겼다.
이 작은 세상 위에는, 루이스의 이름이 없다.
벨져가 느낀 위화감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언제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리 서류에 사인하는 게 일의 전부라지만, 정말 그것뿐일 리 없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 두 달간 벨져의 책상 위로 올라온 서류는 이 거대한 성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담고 있다기엔 너무 적고 깨끗했다.
누군가 일부러 더러운 일을 전부 치워버리지 않고서야 이렇게 깔끔할 리가 없다. 이 자리에 앉기를 거부한 것도 다 추악하고 썩은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대로라면 아직 미성년자인 이글을 앉혀놔도 될 정도였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읽고 있던 서류철을 전부 펼쳐봤다.
가장 먼저 집어 들었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시간이 이렇게 가도록 눈치를 못 챈 자신이 한심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제게 이런 얕은 수를 썼다는 데서 더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벨져는 사무실 전화기로 비서를 호출했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벨져는 들어오라고 답했다.
“찾으셨습니까.”
“루이스는?”
“아……. 그게 지금, 아래 룸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지 않는 루이스와 대답을 피하는 비서. 그것만으로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눈으로 그를 추궁하자 비서는 시선을 피하며 답하지 않았다. 그래, 다 한통속이라 이거지.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당황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지만 아무리 그런들 벨져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을 닫고 그 앞에 버티고 선 비서를 노려보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비켜.”
“저, 그게, 금방 오실 겁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것도 자네에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하, 하나같이 자기들이 뭘 위해 일하는지 모르는 자들뿐인 건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 비켜.”
비서는 곤란해 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 그가 열어준 문 밖으로 나간 벨져는 고위층을 접대하는 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더니 층버튼을 누르고 비껴섰다.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이 비서조차 다이무스가 남겨둔 사람이니 그와 함께 뒤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제 행적을 죄다 고해바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좀처럼 저를 그의 눈 밖에 내놓지 않는 형을 떠올리자 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제 혈육이라지만 그와는 좀처럼 잘 지내기가 힘들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어쨌거나 벨져에게 형제란, 특히 형의 존재란 귀찮고 성가신 것에 불과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가르치고 돌보려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리고는 결국 제 것이어야 할 것을 모조리 가져가고는, 남은 걸 선심 쓰듯 내주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혈육이라 한들 그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벨져는 패배의 기억을 떠올리곤 손등이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어디에 있나.”
“그게…….”
“자네가 누굴 위해 일하는지도 알려줘야 하는 건가?”
“…이쪽입니다.”
비서는 벨져를 더 깊고 후미진 복도로 이끌었다. 어두워진 조명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은 분위기에 화려한 오탁의 향이 더 짙어졌다. 벌써부터 그 지독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지만 벨져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보이는 공간보다 보이지 않는 밀실이 훨씬 화려하고 넓다. 홀에는 거의 헐벗다시피 한 여자들이 돌아다니고, 좋은 옷을 갖춰 입은 사내들이 짐승의 냄새를 풍기며 게걸스럽게 탐욕을 채우는 공간. 더러는 비굴해지고, 더러는 추악해지는 이 공간이 역겨웠다.
향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스무 살의 벨져에겐 낯설다 못해 더럽게 느껴졌다. 벨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려했지만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둡고,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속에 비서가 걸음을 멈췄다.
룸의 앞에 선 벨져는 문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렇게 하면 안이 투시되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애꿎은 문을 노려봤지만 방음처리가 워낙 잘 된 터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안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얼마든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지만 벨져는 움직이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이는 것밖에,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또, 같은 장면을 보고 싶지 않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뭐 하러 되풀이한단 말인가. 벨져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제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천박하게 그지없는 행위에 흥분에 젖은 숨을 눌러 삼키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벨져는 이 비이성적인 행위를 없던 것으로 하기로 하고 돌아섰다. 비서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이르고 싶으면 이르라지. 다이무스가 뭐라 하던 알 바인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상관하지 않으면 그 뿐이었다.
올 때만큼이나 단호하고 빠른 걸음으로, 벨져는 아편굴 같은 내실을 빠져나왔다. 확 밝아진 조명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벽과 바닥이 전부 끔찍했다. 이 안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어 벨져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숨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넥타이를 푸르고 싶었지만 여즉 붙어있는 비서 때문에 꾹 눌러 참았다. 다이무스에게 말이 흘러가는 건 상관없지만 루이스에게 전해지는 건 그렇지 않았다.
뭐가 그렇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벨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거세게 닫고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 당겼다. 겨우 이딴 거나 보자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눈빛을 외면하고, 여길 떠나야 했다. 벨져는 재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서류가 쌓여있는,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책상 따위 꼴도 보기 싫었다. 마음 같아선 다 뒤엎고 싶지만, 그랬다가 손해를 보는 건 자신뿐이라 그렇게 홀로 분을 삭이고 있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하게 두 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소리. 벨져는 이를 악물며 문을 노려봤다. 저를 이렇게 뒤흔든 그가 문 앞에 서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고저 없이 평소와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져는 팔걸이를 꽉 잡았다.
“……아까 저를 찾으셨다고.”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일어난 벨져는 문을 뒤로 하고 섰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벨져의 사무실 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한 침묵이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루이스였다. 몇 시간이고 불러놓고 세워둬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저를 밀어내고 거절하고 있었다. 벨져는 홱 몸을 돌렸다. 한 마디 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희게 질린 얼굴과 핏기가 가신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며, 애써 참고 있는 그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하려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잠깐.”
벨져는 끝을 고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자 루이스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피했지만 벨져의 손보다, 루이스의 목보다 벨져의 눈이 더 빨랐다. 마침 흘러내린 진득한 붉은 방울에 벨져의 손이 멈췄다.
베스트를 적신 짙은 자국과, 평소와 다른 앞머리의 방향.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흰 피부에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지독히도 붉은 선혈에 벨져는 방금 전 그랬던 것보다 더 세게 이를 물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흰 셔츠에 떨어졌다.
“...누구지?”
“도련님, 이건....”
“누구냐고 물었다.”
이를 악 문 채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벨져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벨져는 거절당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선 이 사내에게 이 분노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걸 너무나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그동안 외면해온 탓에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끝내는 이런 식으로 제 앞에서 망가지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벨져는 주먹을 쥔 손을 내렸다. 너는 내 건데. 왜 함부로 너를 망치지?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묻지 못하는 건, 그의 입으로 부정하는 걸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며 루이스에게 돌아섰다. 너무 세게 힘을 준 주먹이 부들거렸다.
이 감정은 갈 곳이 없다.
“...나가봐.”
간신히 내뱉은 한 마디에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옮겼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그 발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이다, 문이 닫히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벨져는 참아온 분노를 표출했다. 컵이 깨지고, 서류철에 곱게 끼워져있던 종이들이 공중을 날았다. 벨져는 엉망이 된 사무실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제 것에 손을 댄 무뢰한에게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벨져는 풀었던 넥타이를 고쳐 매고 벗어둔 재킷을 걸쳤다.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잔뜩 움츠러든 채 서있던 비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새끼, 아직 거기 있나?”
“예? 아, 잠, 대표님!! 대표님!!!”
벨져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버렸다. 남은 건 켜켜이 쌓인 분노를 받아 온당한 곳에 쏟아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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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 벨져루이<-다무 주의
칼로 피부를 긋는 것만이 자해는 아니다. 루이스는 언제나 괜찮은 척 했다. 그 '척'에 넘어가지 않는 건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 둘은 차라리 제가 손목이라도 그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루이스는 안 그래도 흉한 몸에 더 흉터를 늘릴 생각이 없었다. 모진 학대에 시달린 등은 홀든 가에서 지내는 동안 점차 나아갔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보기 흉했다. 그나마 반반하게 생겨 팔이며 다리, 얼굴같이 보이는 곳은 피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등을 내보일 일은 흔치 않으니까.
루이스는 셔츠를 입으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며 기뻐하는 것도, 그를 마주하는 것도,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전부. 결코 돌아올 리 없는 희망에 매달려 애걸복걸하고, 자신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모는 이 관계를 그만 끝내고 싶었다.
변함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벨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하루 아침에 저를 모질게 버려두고 떠났던 것처럼 제 얼굴따위 보기도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다. 차라리 그 태도가 계속 이어졌으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무관심과 외면 속에 덧난 상처가 아팠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저를 보는 그의 그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머금을 때면 독인 줄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혀끝에 담기는 지독히도 달콤한 독. 넘기자마자 몸 속을 태우고, 끝내는 파멸에 이르게 할 걸 알면서도 그 실낱같은 연민에 기대하게 된다. 다시 한 번, 헌신짝처럼 버려질 희망을 꿈꾸고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이 지독한 굴레.
그래서 루이스는 절대 벨져 앞에서 셔츠를 벗지 않았다. 끔찍한 학대의 흔적을 보면, 그리하여 그가 어린 시절의 그 소년을 떠올리고 값싼 동정을 베풀기라도 할까봐. 그 자그마한 연민에 매달려 놓을 수 없게 될까봐.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루이스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잡았다. 아직까지도 '루이스'를 존재하게 하는 건 그 시절의 벨져였다. 너는 아직도 나를 죽이고 살리는구나.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무릎을 당겨 모았다. 무릎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이 감은 눈 아래 펼쳐졌다.
그 날 벨져는 주름이 들어간 흰 셔츠에, 진한 녹색 비로드 리본을 맸다. 리본과 같은 색 반바지를 입고, 풀밭에 앉아 손바닥에 새로 생긴 상처에 눈살을 찌푸리곤 손수건을 감아주던 소년의 목소리, 표정 하나까지 또렷했다.
[약점을 보여선 안 돼.]
[도련님에게도 그런 게 있나요?]
[글쎄. 뭐일 것 같아?]
당당하게, 턱을 살짝 든 채 말하는 당신은 나보다 어린 소년임에도 너무나 빛나서, 참으로 빛나는 사람이구나. 결코, 때묻지 않은 빛이라 함께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건 소년의 동경이자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감정이었다. 따스한 기억 속 벨져는 어리고, 당당했으며, 햇빛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 기억때문에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그 숨이 이윽고 정반대의 감정을 수반할지라도 작은 위로가 되어 기뻤다.
봐, 벨져. 난 아직도 이렇게 널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어. 루이스는 입만 벙긋거리며 꽁꽁 숨겨온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소리 없이 말하고는 양손을 입술 위에 포갰다. 너무 소중해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뭘까. 이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루이스가 아는 사랑이라곤 그가 가르친 게 전부였다. 그러니 그로부터 부정당하는 순간 숨기며 지켜온 감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터였다. 인어공주의 사랑은 그녀를 죽인다.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한 번 말해보지 못하고 지고 만.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든 꽃에 꽃잎이 한 장이라도 떨어질까 조심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 누구도 이 기억에, 제 애틋하고 괴로운 사랑에 손을 델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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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가 그 날에 대해 아주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루이스는 그의 오해와 그날의 진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다이무스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감사와.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 때는 어렸고, 한 사람 외에는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지만, 그 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 앞에 서면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지만 그 때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행복에 겨워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짓밟은 대가였을까.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자신과, 똑같이 아파하면서도 저에 대한 마음을 거두지 않는 그. 그리고 그런 그에게 마음을 기대는 나.
그렇게라도 옆에 두고 싶다는 마음을 알기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봐도 못 본 척하며 저도 참 못됐다는 생각을 지우질 못했다. 다이무스 앞에 서면, 그의 호의와 친절, 그리고 이따금씩 경계를 넘어오는 감정에 도망가기 바빴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이무스를 사랑했으면 달랐을까. 그럼 우리 모두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으나 손에 집히는 게 없었다. 루이스는 작게 욕을 하며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그건 불가능했다. 루이스는 그 간절한 회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힘들어하는 걸 알아도 도와줄 수가 없다. 그게 자신 때문이라 더,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지고 숨이 막혀왔다.
왜 그 땐, 그걸 몰랐을까.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줄 자그마한 선물을 가지고 그의 방 문 앞에 섰다. 저를 구원해준 그가 집을 떠나 유학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방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자 책상 앞에 서서 제가 그에게 주었던 들꽃을 들고 아련한 눈을 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루이스.”
루이스는 슬며시 웃으며 들어갔다. 한 손을 등 뒤에 숨기고, 다 말라 툭 손을 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작은 꽃다발을 든 그의 손을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내내 그랬던 것처럼, 꽃잎 하나 떨어지지 하게 않겠다는 듯이 조심스레 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가져갈 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던 중이었다.”
“다 부서질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는 다이무스는 그답지 않게 어딘가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해야 했기에 아무리 믿음직하고 의젓한 맏형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은 두려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루이스는 제게 눈길을 주는 대신 꽃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다이무스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그,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다이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봤다. 손에 들고 온 선물을 건네기 위해 그의 손을 잡자 다이무스가 흠칫 놀라 손을 빼려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내어주었다. 늘 따스했던 그 손이 차가워진 게 안타까워, 루이스는 그의 손바닥을 엄지로 매만지며 작은 선물을 그 위에 올렸다. 순간, 몸이 확 당겨졌다.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놀라 고개를 들자 다이무스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눈을 꽉 감고 입술로 입술을 누른 그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라 얼어붙은 자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당황하기를 몇 초,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입술을 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루이스. 함께 가자.”
“도련님, 저는....”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입술을 떼 떨어지자 한 박자 늦게 그를 밀어냈다.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웠다. 행위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다. 루이스는 단 한 번도 그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열정과 결의에 타오르는 다부진 눈길이 낯설었다. 다이무스가 다가오자 루이스는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벨져 때문인가?”
“.......”
“널 구한 건 나다.”
한참 뒤에 나온 목소리에는 꽉 억눌린 감정이 모두 배어있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을 보지 못하고, 그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리는 걸 바라봤다. 다이무스의 목소리는 엄하고, 진중한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감정이란 폭풍이 채찍처럼 몰아쳤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다이무스를 모욕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적어도, 그의 감정을 모른 척 외면해서는 안 됐다.
“...큰 도련님은 제 은인이시죠.”
“그런데 왜!”
“그래서, 그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제게 아버지이고, 형이고, 은인이에요. 그럴 순 없습니다.”
“...그래.”
지옥같은 침묵 끝에 내뱉은 말에, 루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한 그대로 다이무스는 제게 벨져만큼이나, 혹은 어떤 의미론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이런 식으로 상처 주는 게 루이스라고 편할 리 없었다. 무거운 죄책감에 한숨짓고 방을 나온 루이스는 그대로 벨져에게 향했다.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마음을 가라앉힐 곳이 필요했다. 그냥 옆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쉬고 싶었다.
그리고 벨져는, 다이무스에게 줄 선물을 같이 고르고 얼른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었던 벨져는 한순간에 돌변했다.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저를 한 번 보고는, 그 뒤로 완전히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말을 거는 것도, 손을 뻗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심장을 꺼내 줄 수 있을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순간에 남보다 못한 사람처럼 자신을 대하는 그 기분이란.
벨져는 철저히 루이스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달라고 해도, 싸늘한 눈으로 한 번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다. 네 죄를 네가 모르냐고 묻는 그 눈빛에 루이스는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건 다이무스를,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벨져가 말하지 않는대도 그걸 아는 순간 벨져는 그의 승리에 도취될 터였고, 그게 사실이라 한들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굴어선 안 됐다.
루이스에게 다이무스는 구원자였다. 존경해 마지않는 형이었으며, 벨져는 이상과도 같았다. 꿈과 이상, 그 반짝임을 몸에 두른 그. 루이스는 그 모두를 손에 쥐려다 한 순간에 두 사람을 잃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게 어떤 것인지 루이스는 몸소 깨달았다.
그래도 처음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해일 뿐이라고, 천천히 시간이 흐른 뒤에 말하면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벨져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알아준 첫 사람이었다. 그런 그니까, 순간의 감정이 누그러지면 분명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돌아와 줄 거라고, 그의 오해였음을 깨닫고 멋쩍어 화를 낼지언정 결국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오년에 걸쳐 배신당했다. 순간의 망설임. 벨져가 준 기회에 잠시 망설인 그 몇 초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게 더, 그와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건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제와 후회한들 흐른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다.
벨져가 떠난 첫 해, 그동안 루이스는 어떤 수단으로도 벨져와 닿지 못했다. 며칠을 걸쳐 심혈을 기울인 편지는 뜯지도 않은 채 반송됐고, 전화는 제가 수화기를 받아들면 끊겼다. 다가오는 부활절에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벨져는 여전히 루이스를 유령 취급했다. 말 한마디 붙여보려 하면 자리를 피했고, 방문을 두드리면 자는 척 하거나 문을 걸어 잠갔다.
문 밖에서 아무리 기다리고 말을 건넨들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루이스의 말을 단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도 모른 척 무시했다. 이 년째엔 방학이며 명절에 여행을 간다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 때문인지 굳이 생각할 것도 없다. 벨져는 그의 인생에서 자신을 그의 치부처럼 여기고, 지워버렸다. 가장 반짝이는 시절은 그렇게 외면당했다.
다이무스와 벨져가 떠난 저택엔 적막이 흘렀다. 이글마저 없었다면 혼자 고독에 잠기어 자신을 죽이고, 인간의 삶을 끝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은 건 산 채 죽어가는 자신에게 이글이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간간히 그보다 더 자신을 걱정하는 다이무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책임감이라고 자조하면서도, 이글이 까불거리다가도 금세 표정을 바꿔 손을 꽉 잡아온다거나 지친 목소리의 다이무스가 제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 비탄에 찬 삶을 견뎌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려니 진동 소리가 울렸다. 마음 같아선 그것도 몰라라 하고 싶었지만 두 번 빠르게 울렸다 잠잠해지는 소리에 루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글이면 끊어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자 어찌 또 힘겨워하는 걸 알았는지, 다이무스의 이름이 액정에 떠있어 급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예. 접니다.”
“음. 그래. 몸은 좀 어떻고.”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걱정과 상냥함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괜찮다고 답했다. 잠겼던 목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요즘, 무리하는 것 같다더구나.”
“늘 그렇죠.”
“나는...... 네가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상냥한 진심에 루이스는 잠시 느꼈던 따스한 위로와 그 뒤에 찾아온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잠시 핸드폰을 뗐다가 다시 얼굴 옆에 가져갔다.
“전 괜찮습니다.”
“혹시 그래도 힘이 들면....”
“네, 큰 도련님은 항상 제가 필요하시죠.”
다이무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던가. 루이스는 작게 웃었다. 그가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듯, 루이스 역시 다이무스를 잘 알았다.
“정말입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루이스.”
“아시잖습니까. 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단 강해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다른 말을 붙이기 전에 냉큼 반대편의 시간을 계산하고 다이무스에게 그야말로 휴식이 필요하며, 제가 없다고 마구 야근을 하다가 기껏 올려놓은 다크서클이 다시 내려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몰아붙였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제게 약했다. 먼저 사랑에 빠진 쪽이, 혹은 더 사랑하는 쪽이 지기 마련이라고 하는 세간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다이무스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을 때, 루이스도 그를 따라 웃으며 그만 자라고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자리가 되어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오히려 더 갈 수가 없다는 걸 알까. 루이스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한숨짓는 일이 많아졌다는 걸 안다.
이제는 정말 이 지독한 사랑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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