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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7 [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 2016.01.16 [벨져루이] 어떤 동행 07.
- 2016.01.10 [벨져루이] 어떤 동행 06.
- 2016.01.03 [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 2016.01.03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 2015.12.30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글
[타라루이]
* ts타라x루이
** 교수님과 학부생
누가 그랬던가, 벚꽃의 꽃말은 봄학기 중간고사요, 단풍은 가을학기의 중간고사니 대학생들에겐 꽃놀이도 단풍놀이도 없다고.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며 휴강을 때린 학과장님 대신 휴강을 고지한 타라는 재킷을 한 손에 들고 교정을 걸으며 예쁘게 물든 단풍을 올려다봤다.
담배, 혹은 커피가 고파지는 완벽한 날씨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긴 교수도 학생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교수실엔 중간고사 시험지가 쌓여있고, 당장 모레까지 줘야하는 원고도 타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라는 지름길로 곧장 가는 대신 교정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길로 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단풍보다 더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하얀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뭐하는 거지?”
“아, 그게 교수님 머리에 단풍잎이 붙어서…. 떼어드리려고….”
“그럼 부탁할까.”
타라는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 영리한데다 성실하고, 예뻐서 꽤나 인기가 있는 1학년 대표. 첫학기 문학의 이해에서 냈던 레포트도 꽤 괜찮았고, 그냥 그저 그런 학부생과는 다른 원석이라 눈여겨보고 있는 학생이기도 했다. 물론 나름의 호감을 품고 있는 것과 학부생활은 별개긴 하지만.
조심스레 머리로 손을 뻗는 그녀의 희고 가는 손목을 본 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푸른 핏줄이 보이는 손목 안쪽. 이건 꽤 위험할지도. 그래서 시선을 내리면 전공책을 든 손 아래로 좀처럼 드러내는 일이 없던 흰 다리가 보였다. 팔랑거리는 연분홍 스커트에 차분한 블라우스. 내내 스니커와 운동화를 벗어나는 일이 없던 신발도, 꽤 굽이 높은 메리 제인. 머리를 스치고 떨어지는 손길에 타라는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치마 입었네.”
“아, 네.”
“어디 가?”
“앤지가 소개팅시켜준대서요.”
소개팅. 타라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려다 손을 재킷에 넣었다. 걸음을 늦추자 반 걸음 앞서 걷는 루이스의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흰 목이 한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루이스는 청초한 외모와 달리 엄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타라는 루이스가 과제로 낸 시를 떠올렸다. 그녀의 글도 그랬다. 한없이 차가운 이성에 꽃잎이 부서지는 것 같은 감성이라니, 누구나 탐을 낼 법한 녀석이었다. 물론 아직은 갈고닦아야 하는 원석에 불과하지만.
“으앗.”
“조심.”
반 걸음 앞서 걷던 루이스의 발목이 옆으로 꺾이며 몸이 휘청였다. 그대로 넘어지려는 루이스의 팔을 잡아챈 타라는 루이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놀라 커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루이스가 눈을 깜박였다.
“죄, 죄송해요.”
“힐을 신을 땐 조심해야지. 발목은.”
“괜찮아요!”
타라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치마 안쪽이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크게 꺾였던 발목을 쥐자 한 손에 잡혔다.
“아야야.”
“이래도 괜찮다고?”
살짝 힘을 주어 잡자 바로 새어나오는 약한 신음에 올려다보며 씩 웃자 루이스가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교수실 바로 앞이니까 쉬고 가지.”
“됐어요!”
“그래? 스타킹 올 나갔는데?”
루이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기껏 차려입고 나온 애를 놀려먹는 자신도 참 짓궂고 유치했지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루이스를 보는 거에 비하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갈래, 말래?”
“…또 부려먹으실 거잖아요.”
“안 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약속.”
타라는 뺨을 불리고 입술을 내밀며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쩜 얘는 토라진 것도 귀엽다니, 더 놀리고 싶어지게. 타라는 머릿속에 시 한편을 써내리며 한산한 교정을 걸었다. 따라오는 구두소리가 즐거웠다.
“앉아.”
교수실에 도착한 타라는 루이스를 소파에 앉히고 보건실에서 받은 구급상자에서 스프레이 파스와 붕대를 꺼냈다.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닌데 루이스는 처음처럼 불편해했다.
“왜 이래, 처음도 아닌데.”
“그게…., 아!”
“뿌린다.”
타라는 루이스의 구두를 잡아 발목에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부어오르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단단하게 붕대를 감는데 까만 구두의 빨간 밑창이 눈에 들어왔다. 타라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그게 뭐?”
“그게, 교수님이 이렇게 친절한 게… 처음이라….”
“내가?”
고개를 올려 묻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움 받을 짓을 했던가, 타라는 붕대를 고정하며 지난 학기를 떠올렸다. 술자리에서 꽐라가 안 되게 도와주고, 들러붙는 녀석들 걷어주고, 힘내라고 에너지 음료도 쥐어줬는데. 물론 그와 별개로 다시 써오라며 다섯 번 쯤 작품을 돌려보내고 기말 레포트도 안 받아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수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로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교수님 항상 저만 갈구시잖,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다고?”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난 다른 애들한테도 그러는데? 너 한정 아니야. 그거.”
“…….”
루이스가 억울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타라는 책상 앞에 앉아 등을 기댔다.
“근데 어쩌냐, 난 너한테 밉보이는 거 싫은데.”
이번엔 당황. 늘 생각하는 거지만 놀란 눈이 토끼같아 자꾸만 놀리고 싶어진다. 유치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하지마라.”
“…뭘요?”
“소개팅.”
“왜요?”
“내가 싫으니까.”
이번에도 놀랄 줄 알았는데, 놀라는 대신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타라는 책상 위에 올려둔 루빅스 큐브를 잡아 돌렸다. 낮술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 생각을 다 거치지 않고 나오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입가에 여유롭게 미소를 띠우는 건 잊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반. 타라는 울리는 루이스의 핸드폰 진동에 그녀를 바라봤다.
“저기, 교수님.”
“받지마. 가지도 말고.”
“저한테 왜 이러세요?”
“…글쎄. 왜 이럴까.”
“교수님 평판 좋은 것도 알고, 교수님 강의도 좋은데요…. 자꾸 이러시는 건….”
“귀여워라. 지금 그걸 다 믿었어?”
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순식간에 맹해지는 루이스의 표정이 볼만했다. 입가를 가리고 웃던 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뭐해, 전화 안 받고.”
루이스는 화도 못 내고 가방 속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타라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루이스가 황급히 볼륨을 줄였다.
“응, 응. 미안. 곧 갈게. 응. 이따 얘기해.”
타라는 제게서 고개를 돌리고 전화하는 루이스를 보며 웃음을 거뒀다. 싸하게 식은 머리로 한 손으로 큐브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다, 루이스가 전화를 끊으며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억울하단 표정으로 입을 비죽 내밀었다.
“또 이런 장난하시면 그땐 진짜 신고할 거예요!”
“얼른 가봐. 발목 조심하고.”
루이스가 대답도 없이 교수실을 나갔다. 홱 고개를 돌리며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치마자락이 눈에 선했다. 타라는 펜을 들었다. 글을 쓰려다, 흰 종이 위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20도 쯤 되는 술을 맨 속에 들이켠 기분이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큐브를 내려놓았다. 등 뒤로 의자를 밀어 쳐 놓은 블라인드를 올렸다. 교수회관을 종종 뛰어가는 루이스를 지켜보다, 창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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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호그와트au
* 다이무스 5학년 / 루이스 3학년 / 벨져 2학년 / 이글은 아직 입학을 못해써요….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도 얼굴을 붉히며 한껏 수치스러워하는 벨져의 얼굴은 그대로였고, 루이스는 이게 드문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루이스는 검지로 뺨을 긁적이다 옆 의자를 뺐다. 벨져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이글의 못된 장난은 아닐까 싶어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이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지금 강의실 비었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
루이스는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려는 벨져의 입을 막고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로놓았다. 쉿. 눈을 깜빡이며 손을 내리자 벨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몇 시간째 움직이지도 않고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다이무스를 가리켰다. O.W.L이 코앞이라 도서관은 시험을 앞둔 5학년들로 살벌했고, 아무리 홀든이라 해도 고작 2학년이니 선배들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었다. 루이스는 산술점 책을 한 팔에 안고 벨져의 손을 잡아끌었다.
“휴, 너야 어떨지 몰라도 난 선배들 무섭단 말이야.”
“흥. 그까짓 상급생들, 몇 년 후면 내가 더 뛰어날 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련하시겠어.”
턱을 치켜든 벨져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듯 당당했다. 루이스는 책을 고쳐 안으며 어깨를 으쓱여 흘러내리는 망토를 올렸다. 멋대로 움직이는 계단을 타고 마법의 약 강의실인 지하감옥에 내려간 루이스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문 앞에 잠시 서있던 루이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담당 교수인 웨슬리 슬로언은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라 학생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도 후플푸프 학생들과 어디서 도시락을 풀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빈 강의실에 들어와서 뭘 뒤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까 뭐 어떠랴 싶었다. 혹시 들켜서 점수가 깎이더라도 이건 벨져의 탓이었다.
“그래서, 뭐가 어려운 건데? 2학년 과정이면….”
“전갈 독 해독제다.”
“아, 그랬지.”
루이스는 찬찬히 재료를 떠올렸다. 다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홀든이 못 만들 것도 없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루이스는 답을 얻기 위해 벨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벨져가 잠시 눈을 맞추고 있다가 시선을 피했다.
“뭐가 문젠데?”
“…실패한다.”
“그러니까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니야. 솔잎을 잘못 으깼다던가.”
“그걸 모르겠으니까, 도와달라는 거 아니냐!”
벨져의 외침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잘 해야하는 입장이니 한 번 실수한 것 정도야 괜찮지만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실수가 아니다. 다이무스한테 부탁하기엔 쪽이 팔렸을 테고, 벨져를 따라다니는 애들은 있어도 같이 다니는 애들도 없으니 만만한 제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좋아. 재료랑 방법은 다 알지?”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일단 뭐가 문제인지 한 번 만들어볼 것을 주문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말에 따라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 역시도 어쩔 수 없었다. 못내 탐탁지않아하면서도 재료를 준비하고 소매를 겉어붙인 벨져가 작은 칼을 쥐었다.
“잠깐잠깐 잠깐!”
“뭐냐?”
“그렇게 하면 썰리는게 아니라 토막나.”
“그거랑 그게 뭐가 다르지?”
하여간 도련님이란. 루이스는 양파썰기를 예로 들려다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벨져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념도 없는데 말로 백 번 해봐야 소용이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등 뒤에 서서 벨져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너, 이게 무슨…!”
“자, 봐봐. 손에 힘 빼고.”
루이스는 힘을 주어 한 토막을 잘랐다.
“이게 네가 하려던 거고.”
토막난 조각 위에 날을 세워 얇게 저며낸 루이스는 부드러운 벨져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손에 들어간 힘을 뺐다. 요령이 생겼는지 혼자 잘 써는 게 역시 빨랐다.
“그렇지. 그게 써는 거야. 얇게 썰수록 금방 우러나니까 좋고. 아, 근데 잘 건져야해.”
“그리고?”
“계속해. 보고 있으니까.”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벨져의 옆에 앉았다. 지하감옥은 추운데도 벨져의 목이며 귀가 빨갰다. 화로를 옆에 놔서 그렇겠지만, 옷도 따뜻하게 입은 주제에 혼자 화롯불을 쬐다니 치사했다. 루이스는 양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 주먹을 쥐어 턱을 받쳤다. 볼살이 주먹 위로 밀렸지만 차가운 손을 덥히기엔 딱이었다.
“윽….”
“지금! 빨리!”
집중해서 솔잎을 으깨던 벨져가 루이스를 보고 움찔했다. 때마침 솥에서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거품에 루이스는 솥을 가리켰다. 벨져가 도마를 들고 으깬 솔잎을 쏟아부었다. 잠잠해진 솥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된 것 같은데.”
루이스는 발을 까딱이며 마지막 재료인 상아 조각을 건넸다. 벨져는 여전히 이상한 표정이었지만 시간을 세느라 말할 여유가 없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삼십오초. 상아 조각을 솥에 넣고 휘휘 젓자 연기가 사라졌다. 성공이었다.
“잘 됐네.”
우유와 같은 흰색을 띠는 약을 확인한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벨져는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너.”
“응?”
솥을 들여다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져가 국자를 놓고 다가와 루이스의 볼을 꽉 잡았다.
“턱받침같은 거 하지 마. 사내자식이 귀여운 척은.”
“…뭐?”
“흥!”
벨져가 볼을 꽉 꼬집더니 솥에서 적당히 끓은 해독제를 유리병에 담았다. 볼은 얼얼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도와줘도 고맙단 말 한 마디를 못하지? 루이스는 내려놓은 책을 다시 품에 안았다.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어디가!”
“귀여운 척 하러 간다!”
“너, 이리, 야!”
루이스는 벨져가 정리를 하는 사이 문을 닫고 계단을 올랐다. 애초에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와 책을 고쳐안는데 계단을 오르다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으왓!”
꼴사납게 넘어진 루이스는 얼얼한 이마를 손등으로 비볐다. 신발끈이 풀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다른 발로 신발끈을 밟아버렸다. 무릎이 화끈거리며 따끔거리는 게 아무래도 피가 나고 멍이 들 것 같지만 벨져가 못 봐서 다행이었다. 루이스는 계단에 앉아 신발끈을 고쳐맸다. 다치고 넘어지는 것쯤이야 익숙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야! 루이…. 너, 익….”
신발끈의 매듭을 한 번 더 묶는데 잔뜩 성이 난 벨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망칠수도 없게 좁혀진 거리,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지팡이를 꺼내 복수를 하거나, 한 대 치거나 소리를 지를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풀석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슬며시 눈을 뜨자 벨져가 등을 보이고 쭈그려 앉아있었다.
“뭐해.”
“으응?”
“빨리 업혀.”
“아니, 나 걸을 수 있는….”
뜬금없는 호의에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얼버무리자 벨져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다리를 잡았다.
“아야야야.”
“이러고 잘도 걷겠다.”
“그냥 까진 거니까 바지 잘 잡고 걸으면, 아아. 알았어!”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해보려 했지만 벨져가 아픈 무릎에 손을 얹자마자 아파오는 무릎에 루이스는 양 손을 들어 항복했다.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등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 어린 애한테 업히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대론 계단에 앉아서 실랑이를 계속하게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기댔다. 벨져의 팔이 다리를 감싸고 천천히 일어났다. 떨어진 책을 주워야했지만 안 그래도 무거울텐데 책까지 부탁하기엔 염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따가 가지러오거나, 누군가 친절한 사람이 주워주길 바라는 수밖에.
일어날 때 힘들어했던 것과 달리 벨져는 루이스를 업고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아무래도 그 벨져다보니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따갑게 꽂혀서, 루이스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벨져의 등에 매달렸다. 벨져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왠지 쑥스러웠다.
“저기…. 벨져….”
“말, 시키지…마….”
“힘들면 그냥 내려줘도 되는데….”
래번클로 기숙사는 가장 큰 탑에 있고, 거기까지 가는 길은 높고 구불구불한 계단 뿐이다. 아무리 벨져가 슬리데린의 수색꾼이고, 체력이 좋다 해도 숨이 거칠어지는 건 당연했다. 중간에 누구라도 있으면 그냥 같이 갈테니까 괜찮다는 말이라도 해볼텐데, 오늘따라 래번클로 기숙사로 가는 길에 학생들이 보이질 않았다. 루이스는 점점 더해지는 미안함에 벨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진짜 괜찮아. 여기서 넘어지면 그게 더 큰일인 것 같은데.”
“넌…. 후. 항상 그 입이 문제야. 하, 빌어먹을 래번클로.”
루이스는 기어이 래번클로의 청동독수리상이 보일 때까지 자길 업고 계단을 올라온 벨져의 목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땐 벨져도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쉬느라 바빴다.
“잠깐만. 물이라도 좀 가져다줄게.”
대답이 없는 벨져 대신 루이스는 독수리상 앞에 섰다.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어김 없이 낸 문제에 벨져가 헛웃음을 흘렸다. 래번클로의 황동독수리상 얘기는 들어보긴 했지만 이정도로 어이가 없을 줄이야. 루이스는 독수리상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더없이 진지한 그 옆얼굴이, 투명한 붉은 눈동자가 벨져의 시선과 숨을 앗았다. 작고 붉은 루이스의 입술이 열렸다.
“사랑으로.”
“뭐?”
“일리가 있군. 들어가도 좋다.”
벨져는 엉뚱한 대답을 듣고도 문을 열어주는 황동독수리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문제고 답인가. 벨져는 루이스가 아직 한 번도 독수리상의 문제를 못 맞춘 적이 없다는 게 의아해졌다. 이거 얼굴로 현혹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잠깐 기다려. 물이랑 먹을 것 좀 가져올게. 나이오비! 도와줘요!”
문틈으로 사라져버린 루이스의 망토를 바라보던 벨져는 고개를 들어 독수리상을 올려다봤다.
“사아랑?”
황동독수리상은 벨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벨져는 여전히 질문도 답의 상관관계를 유추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루이스 녀석한테 물어보긴 쪽팔리고, 다이무스에겐 물어보기조차 싫었다. 혹시나 설명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독수리상을 쏘아보고 있는데 바지를 걷고 붕대를 감은 루이스가 나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나이오비가 그냥 안 보내줘서.”
루이스가 물병을 건넸다. 시원한 물을 쭉 들이켠 벨져는 포장지까지 까서 기다리고 있던 루이스의 손에서 초콜릿 바를 빼앗아들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래.”
“오늘 일은 비밀로 할 테니까 걱정 마.”
벨져는 달달한 초콜릿을 입 안에서 녹이며 생긋 웃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겨우 한 살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키는 벨져와 같은 선에 있어서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하기 편했다. 루이스의 얼굴에서 살짝 눈을 내린 벨져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는 붕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다리를 끌고 혼자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적잖이 아팠을 게 분명했다.
“멍청이.”
“뭐?”
“간다.”
“야! 벨져!”
초콜릿을 마저 입에 넣은 벨져는 루이스의 외침을 무시하고 다시 돌아온 계단을 빠르게 뛰어내려갔다. 사랑이라니,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잘도 하는 녀석의 얼굴과 등에 업혀 어쩔 줄 모르던 녀석의 온기와 무게가 떠올라서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빗자루를 타고 비행을 하던 때처럼 심장이 쿵쿵 울렸다. 장난감 가게의 초콜릿을 먹이기라도 한 건지, 뺨이며 손끝이 화끈거렸다.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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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 사약에 주의해주세요
트리비아 카리나를 놓친 건 간발의 차였다. 의뢰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생포. 그게 안 된다면 그녀의 동행인 영웅 루이스라도 생포할 것. 루드빅은 제 발을 잡고 쓰러져 피를 토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접근해 급소를 차버린 덕에 몸을 일으키는 것도 무리일 텐데, 그 와중에 제게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는 게 용했다. 루드빅은 트리비아가 사라져버린 방향을 한 번 슥 보고는 바짓단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영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를 낮춰 쪼그려 앉은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잡아올렸다. 고통에 눈을 찡그린 루이스의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놓고 일어나 잡힌 다리를 털듯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그 와중에도 다리를 놓을 줄 모르는 손이 희게 질렸다. 푸르스름한 서리가 어리는 걸 본 루드빅은 그의 손을 발로 밟았다. 여태 신음 한 번 안 내던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호오, 이제야 조금 협조할 마음이 든 겁니까?”
“협조는, 무슨.... 크흑....”
“저는 의뢰를 받은 것 뿐입니다만.... 그렇게나 그 여자가 소중한 겁니까? 그녀는 당신을 버렸는데도?”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잡아 눈을 맞출까 생각하며 발 아래 손을 짓이기듯 발을 움직이자 루이스가 다시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질렀다. 조금 즐거워졌는지도 모른다. 기회를 노리며 지켜보는 내내 고요한 호수처럼 얼어붙어 연인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남자다.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 루드빅은 루이스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올렸다.
“큿, 컥.... 흑....”
“대답하세요. 그렇게 그녀가 소중합니까?”
루이스가 손을 긁으며 떼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목이 잡힌 채론 말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잡고 있다가 놓아주자 루이스가 막힌 숨을 들이마시며 콜록거렸다. 반복된 폭력은 사람을 체념하게 만든다. 반항해도 상관 없지만, 기왕이면 고분고분한 편이 포획과 이송에 편한 법이었다. 루드빅은 다시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지로 끌려온 루이스의 눈은 여전히 붉은 적의로 가득차있었다.
“사랑 때문에 대신 죽어주려는 멍청이들이 있긴 했지만.... 안심하세요. 당신도 의뢰 대상 중 하나니까. 순순히 말만 들으면 더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큭.... 그냥, 지금 죽여서 시체를 갖지 그래?”
“저런.... 모처럼의 호의였는데, 거절하신다면야.”
루드빅은 루이스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그의 명성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서라도 과격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건만, 도저히 꺾일 줄 모르는 먹잇감을 상대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손과 발을 묶어 어깨에 들쳐맸다. 몹시 드물게도, 흥미가 생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할 방식의 고문 앞에 그는 어떤 표정일까. 기대로 걸음이 빨라졌다.
눈을 뜬 루이스는 입에 묶인 재갈과,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된 채 높이 묶인 팔의 상태를 깨닫고 낙담했다. 무슨 약을 쓴 건지, 아니면 그 사이에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건지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진 것처럼 멍했다.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멍한 머리를 굴렸다.
이래서야 능력을 쓸 수도,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볼 수도 없다. 상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헌터. 입이 자유롭다 해서 세 치 혀의 농간에 놀아날 리도 없지만 그래도 거래가 된다는 점에서 협상의 여지는 있었다. 어차피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건 트리비아의 몫, 루이스에겐 이렇다할 정보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노리는 것은, 능력자 세계에 고하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2차 능력자 전쟁의 영웅, 연합의 영웅이 헌터에게 사냥당했다. 그 한 마디 명제로 안 그래도 소란스러운 밤에 혼란과 공포가 더할 게 뻔했다. 그러니 여기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차분한 방 안은 호텔이거나 그 비슷한 주거공간이고, 원래 입고 있던 옷 대신 얇은 샤워 가운이 입혀져 있었다. 고문용 전기의자나 소, 돼지처럼 매달린 것도 아니고 침대에 누워있지만 루이스의 발이 닿는 곳에는 흉기는 커녕 이불 조차 없었다.
손을 묶은 사슬을 끊어보려고도 했지만 사슬은 얼음의 냉기를 빨아들여 차가워질 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헌터가 사이퍼를 사냥하기 위해 쓰는 사슬이니 그냥 사슬과 같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슬을 끊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안 된다면 괜한 데 힘을 낭비할 수 없다. 깨어날 때부터 멍한 머리가 아파왔다. 몸에 열기가 도는 게, 아무래도 감염이 됐거나 무슨 약이라도 주사한 모양인데 이대로는 루드빅이나 다른 사람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서서히 오르는 열기에 몸을 일으켜 베개 위에 등을 기댔다. 계속 들려있던 팔이 저렸다. 팔꿈치를 내려 차라리 누구든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마침내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고 금발의 사내가 들어왔다.
“이런, 깨어계셨군요. 어떻습니까, 영웅에서 먹잇감이 된 소감은?”
입에 문 재갈때문에 어차피 대답을 할 수 없는 루이스는 소리 없이 그를 노려봤다. 루드빅은 웃으며 다가와 목을 손에 쥐었다. 그대로 힘주어 잡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루드빅의 손은 가볍게 목을 쓰다듬고는 떨어졌다. 그의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동시에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열이 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루드빅이 무릎을 잡았다.
“아, 혹시라도 반항 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루드빅은 아직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움츠러든 루이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말끔히 씻기고, 사전 작업을 해둔 그는 뭇 여성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무릎을 모아 당기는 방어자세가 내내 품고 있던 흥미를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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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
조금 특별한 생일에서 이어집니다.
루이스 어려짐 주의, 벨져 캐붕 주의
* * *
“루이스!”
다급한 목소리와 흔들리는 몸. 루이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데 소매가 끌리고, 벨져가 너무 높이 있었다. 벨져의 당황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벨져가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당연히 어깨에 닿아야 할 머리가, 가슴에 묻혔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몸과, 멍한 머리. 루이스는 상황파악을 위해 벨져를 밀어내려했으나 손에 들어가는 힘이 이상했다. 손의 크기도, 팔의 길이도 전부.
“이게, 무슨…….”
“괜찮나? 루이스. 정신이 드나?”
“잠깐, 나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네 짓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눈 떴더니 네가…!”
벨져의 반응으로 보아 벨져의 짓도 아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손과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벨져의 손에 손을 대어보니 확연히 보이는 차이에 덜컥 겁부터 났다.
“거울! 으우.”
“잠깐, 움직이지 마라.”
일단 제 모습부터 확인해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익숙하지 않은 몸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행히 벨져가 받아내 침대에서 구르는 일은 막았지만, 속옷도 바지도 흘러내려 티셔츠 한 장 차림으로 벨져의 팔에 안겨 욕실로 가는 건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내가 몇 살로 보여?”
“여섯…, 일곱?”
“……어쩌지.”
벨져의 팔에 안겨 거울 앞에 선 루이스는 낙담했다. 늘 입고 다니던 티셔츠가 허벅지까지 내려오고, 몸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짐작 가는 건.”
“어제는 내내 연합에서 일만……. 아.”
루이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벨져를 올려다봤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초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벨져가 낯설 정도로 커 보였다.
“어제, 어릴 때도 생일 파티 같은 거 해본 적 없다고 했더니 엘리가…….”
“그럼 돌아갈 방법은….”
“능력 제어하는 법도 모르는 애야.”
“큰일이군.”
벨져가 이마를 짚었다. 그 바람에 벨져의 한 팔에 안긴 루이스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벨져의 셔츠를 꼭 잡고 매달렸다.
“잠깐, 놓지 마. 읏.”
“아, 미안하다.”
엉덩이를 받쳐 안아든 벨져가 자세를 고쳤다. 눈을 맞춘 벨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루이스의 머리를 매만졌다.
“일단 뭐라도 걸쳐야겠군.”
“입을 게 없을 텐, 엣취!”
벨져는 추운 욕실에서 나와 루이스를 이불로 감쌌다. 그것도 모자라 여우털 목도리를 가져와 둘러주고, 손발을 주무르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유리조각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루이스는 작은 발을 주무르는 벨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고개를 든 벨져와 눈이 마주쳤다. 자꾸만 흠칫거리는 벨져가 낯설었다.
“저기…….”
“루이스. 머, 먼저 말해라.”
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까지. 루이스는 손을 내밀어 벨져의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풍경 속에 믿을 건 이 사람 하나뿐이었다. 루이스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그래도 정신은 아직 스물일곱, 아니 스물여덟이거든?”
“이, 미…….”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벨져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벨져 홀든은 꽤 보기 좋은 구경거리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마음껏 즐길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발을 까딱였다. 꼬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식사부터 하지. 가져다주겠다. 잠깐 기다리도록.”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벨져가 도망치듯 가버렸다. 어색하다. 갑자기 어려진 몸도, 갑자기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도 전부 낯설고 어려웠다. 높아진 천장과 발이 닿지 않는 침대의 높이. 감정을 통제하는 기관이 어려진 몸에 반응하는 건지, 참아보려 해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울긴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수그린 채 참고 있는데 한 손에 접시를 든 벨져가 다가왔다.
“루이스. 일단 이것 좀.... 루이스?”
상냥한 목소리에 울컥, 설움이 차올라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툭 떨어진 눈물이 이불을 적셨다.
“루이스, 잠깐.”
바닥에 무릎을 꿇은 벨져가 넓고 따스한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고 엄지로 눈가를 문질렀다.
“고개 들어봐라. 루이스. 울지 말고.”
당황한 목소리가,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손이 더 미웠다. 못 돌아가나 하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어려졌다고 다른 사람 대하듯 구는 벨져에 대한 서러움이 복잡하게 섞여 흘러 넘쳤다. 루이스는 제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토닥이는 벨져의 품에 안겨 울었다. 소리 내 꺼이꺼이 우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지만,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약해진 모양이었다.
“쉬이. 루이스. 괜찮을 거다. 괜찮아. 울지 마라.”
벨져는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치고 훌쩍거리는 루이스의 등을 토닥이며 뺨을 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작고 귀여운 얼굴이 눈물범벅이 돼선, 눈가며 코가 발갰다. 눈을 부비는 손도 작고, 발도 한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벨져는 꿀꺽 침을 삼켰다.
갑자기 연인이 어린애가 된 건 벨져에게도 충격이 상당했다. 그러니까, 루이스가 느끼는 당황과 별개로. 이 통통하고 보들보들한 뺨에 입 맞추고, 희고 부드러운 다리며 팔을 만지고 싶다. 변태도 아니고, 어린애를 보고 그런 쪽으로 상상을 하고 마는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그만 울고, 일단 먹어라.”
머리론 눈앞의 아이가 오늘로 딱 스물여덟이 된 남자라는 걸 알아도 막상 보이는 게 어린아이니 더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지고 다칠 것 같다. 거기에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벨져는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루이스의 작은 손에 포크를 들려주었다.
챙그랑, 쥐어주기 무섭게 포크가 바닥을 굴렀다. 코를 훌쩍이는 루이스에게 티슈를 뽑아 건네고, 벨져는 저도 모르게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새 포크를 가져왔다.
“쇼핑부터 해야겠군.”
“이대로 나가자고?”
“일단 이것부터 먹고.”
벨져는 루이스에게 다시 포크를 쥐어주는 대신 어제 먹고 남은 케이크를 잘라 내밀었다. 애인이 아니라 애 취급을 하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 이 몸으론 포크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매트리스를 발로 두드리며 입을 벌렸다. 입 안에 들어온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워서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너는?”
“그렇게 배고프지 않다.”
꼬박꼬박 아침점심저녁 세 끼를 챙기는 사람이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게 웃겨 눈을 흘겨도 벨져는 끄떡없었다. 하긴, 벨져 홀든은 원래도 식사에 대해 은근히 집착이 심했다. 그래도 성인일 때는 먹었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배가 고프지 않다고 뻗댈 수라도 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몸을 따라서 정신과 마음도 어려지는 건지, 자꾸만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벨져는 기어이 접시에 담아온 음식을 다 먹이고 나서야 굽혔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기 위해 손을 내밀자 인형처럼 작은 루이스가 눈을 감고 턱을 올리는데, 순간 확 열이 돌았다. 너무 귀여워서 위험할 정도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고 루이스의 시야에서 도망쳐 벽을 짚었다.
작은 입술이 키스를 부르는 것 같다니, 미친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어린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다. 결코, 절대로, 단연코 소아성애적인 성향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루이스기 때문에, 원래의 그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다.
벨져는 낮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루이스는 고아였다. 그것도 거리를 떠도는 고아. 그러니 지금처럼 어린 시절을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생일, 마땅히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시기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보내버린 그다. 그러니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랐다.
돌아갈 수 없다면 그건 곤란하겠지만, 연합의 상상구현 능력자 꼬맹이의 능력 지속 시간은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스물 네 시간 정도일까.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가라앉은 심박수에 벨져는 루이스에게 입힐 옷부터 생각했다. 피부가 하얗고 예쁘니 무슨 색이든 잘 받을 테고, 이 기회를 틈타 자신만 아는 그의 모습을 더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기, 벨져.....”
“헉, 무, 무슨 일이냐.”
“아니,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이불을 꼭 쥐고 바지를 잡아당긴 루이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당장 부둥켜안고 침대 위를 구르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벨져는 이글이 꼬맹이들이 노는 걸 보면 그냥 대뜸 뽀뽀해주고 싶어진다고 하던 말을 십분 이해했다. 그야,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가만 둘 수 있을 리가. 벨져는 잠시 멈췄던 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혔다. 벨져 홀든이 오늘만 벌써 몇 번을 무릎을 굽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깟 무릎 따위 작은 루이스 앞에서야 어찌 되어도 좋았다.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나.”
“아니, 그냥....”
“루이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단호한 목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앙 문 루이스의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언제 잠잠했냐는 듯 심장이 널을 뛰었다.
“이런 나는.... 싫어?”
“싫을 리가!”
“...정말?”
“하, 정말이지. 지금 네 모습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뒹굴고 싶은...!”
루이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흥분한 나머지 오해할 법한 말을 했다는 걸 두 박자 늦게 깨달은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변태....”
“아니다! 루이스! 오해다!”
루이스가 진저리치며 벨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그 짧은 다리로 종종종 뛰어가는 게 너무 귀여워 잡을 수가 없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동물이 심장에 해롭다는 걸 되새기며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루이스……. 들어봐라. 오해다. 오해가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문을 다시 두드리고, 벨져는 크게 심호흡했다.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을 때도 매번 루이스가 먼저 사과를 했기에 해본 적 없는 사과였다.
“미안하다. 나는.... 후.... 그래. 네게 그런 걸 느낀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가 너라서 그런 거지, 절대 내가....”
달칵, 문이 열리고 허리 아래에서 루이스가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벨져를 올려다봤다. 벨져는 더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를 안아올렸다. 순순히 제 품에 안겨 셔츠를 꼭 잡는 루이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루이스.......”
“연합으로 갈래.”
“지금 그 꼴로 어디를 나간다는 거냐.”
“왜, 너도 쇼핑부터 하자며.”
“그러니까, 일단은 옷부터 제대로 입고 나서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거였다.”
“연합엔 피터도 있으니까 괜찮아.”
루이스가 부루퉁하니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루이스의 완강한 고집 앞에 최단시간으로 무릎 꿇은 벨져는 급한 대로 외출 준비를 하고 루이스를 한 팔에 안아들었다.
“이러니까 꼭 납치당하는 것 같아.”
“꼭 범죄자가 된 기분이군.”
“이미 전과가....”
“먼저 입 맞춘 건 어디까지나 너다!”
“넌 어디까지 상상했는데?”
벨져는 불리한 싸움 앞에 입을 다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아동복 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벨져와 루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들이야 아름다운 미남자와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아이의 사랑스러운 외모에 넋을 놓고 바라본 것뿐이지만, 어디까지나 연인인 그들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매우 곤란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재단사를 불러 몇 벌이라도 옷을 해주고 싶지만 당장 입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옷을 몇 벌 산 벨져는 루이스에게 르블랑의 아동용 남색 세일러 수트와 두꺼운 케이프 코트를 입혔다. 하얀 털에 감싸인 루이스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직접 코트의 리본을 매준 벨져는 내친 김에 후드까지 덮어씌웠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데, 정작 본인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루이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거, 여아용 아니야?”
“상관없다.”
“있지!”
“괜찮다. 잘 어울린다.”
벨져는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눈을 깜빡이다 확 얼굴을 붉힌 녀석이 귀여워 후드 째로 머리를 쓰다듬자 루이스가 작은 손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도리 저었다.
“하지 말라니깐!”
“안 되겠군.”
“뭐?”
“역시, 연합으로 가는 건 보류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루이스는 기가 차 물었다. 안 그래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해 죽겠는데 벨져는 아침의 상냥함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혼자 턱을 짚고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오늘 하루는 원래 내게 주기로 했었으니까.”
“그건....”
“게다가 어제는 네가 그대로 자버렸지.”
“설마 이 몸으로 하자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벨져가 정색하며 부정했다. 얼굴을 찡그린 벨져는 혀를 차고는 루이스를 다시 안아들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무심코 두근거릴 정도로 근사한 미소가 번졌다.
“그냥,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연합에 가면 여러모로 난리겠지. 설마하니 그런 생일을 보내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다시없을 기회다. 어린애 돌보기는 영 껄끄럽지만, 뭐. 생일이니 참아주도록 하지.”
“......벨져.”
“왜, 감동했나?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좋다.”
루이스는 싱긋 웃으며 벨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벨져의 뺨을 꽉 잡아 양쪽으로 당기자 바로 아픈 신음이 샜다.
“무슨 짓이냐!”
“미운 소리를 하길래. 어린애 방식으로 응징.”
“너...!”
“어리광 받아준다며. 뭐해. 얼른 안 가고.”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쁜 짓을 할 때나 저를 엿 먹일 때 짓는 미소를 띠운 루이스가 옷깃을 잡고 채근했다. 이거, 완전히 잘못 걸렸는지도. 하지만 그래도 행복했기에 벨져는 기꺼이 루이스의 집사 역할을 자처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루이스를 보여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벨져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루이스가 가리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비록 주려고 했던 선물은 이게 아니지만, 어린 루이스의 투정과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그의 어린 시절을 보상해주는 역할을 떠안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작은 발을 까딱이던 루이스는 곧 내려달라더니 혼자 걷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녀석이 귀여워 벨져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루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자 심통이 난 얼굴로 다가와 새끼손가락을 꼭 잡고 걷는데, 얼음에 상처가 나지 않은 작은 손이 따뜻했다.
다소 파렴치한 내용의 성인용 뒷이야기는 31일 디.페스타에 돌발본으로 나옵니다.... 28페이지....
하얗게 불태웠으니 이만 안녕히 안녕히...
+) 벨져의 껴안고 싶다 = 인형 끌어안고 굴러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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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 * *
언제나 그렇듯,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는, 말 한 마디가 그 시작이었다.
“오, 루이스! 내일 꼭 나와라!”
“나도 쉬자, 좀. 내일 나 비번 아냐?”
“아이고, 우리 영웅님. 또 그런다, 또.”
“니 생일아이가! 토마스가 목 빠져라 기다렸데이!”
“아니, 제가 무슨…!”
다 식은 커피를 들고 가던 루이스는 동료들의 마음 씀씀이에 피식 웃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선약이 있었다.
“됐어. 어린 애도 아니고.”
“생일에 어른애가 어디 있어? 그러지 말고, 응?”
“그냥 취하고 놀 명분이 필요한 건 아니고?”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채근하는 레베카에게 손을 내저었다. 토마스가 시무룩해하는 게 안쓰러워 마음이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루이스에게 생일은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 어릴 때도 챙겨본 적 없는데 뭘.”
“우웅…. 루이쯔 오빠, 생일 파티 없어?”
나이오비 옆에서 자던 엘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루이스는 다급하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연합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훈훈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엘리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할 걸 아는 거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엘리가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를 외면할 수 없어, 루이스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케이크랑, 촛불이랑, 풍선이랑…. 아무것도 업쪄?”
“아니, 엘리…. 그러니까….”
“그건 너무 슬포….”
루이스는 울음을 터트리려는 엘리를 안아들었다. 작은 등을 토닥이며 이 사단을 만든 술꾼들을 쏘아보고 어떻게 달래야할까 말을 골랐다.
“엘리, 오빤 괜찮아. 어른인걸.”
“그지만, 그지만….”
“정말 괜찮아. 울지마. 목 메일라.”
울먹이던 엘리가 홱 고개를 들었다. 턱을 부딪힐 뻔 했던 루이스는 파랗고 동그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자상하게 웃었다.
“그럼 오빠두 애기 해! 어른 하지 마!”
“응?”
“캬. 역시 꼬맹이. 말 한 번 잘하네! 고럼, 고럼. 남자는 나이를 몇 먹어도 여전히 소년이라구!”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이 망나니.”
나이오비가 소파에 늘어져 킬킬거리던 이글을 후려쳤다. 경쾌한 타격음에 루이스는 나이오비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한숨을 푹 내쉰 나이오비가 다시 한 번 이글을 때렸다.
“엘리눈…. 생일엔 마싯는 것두 먹구, 엄마랑 아빠랑 친구들이랑….”
“난 정말 괜찮아.”
“엘리가! 오빠 소원 들어주께!”
주먹을 꼭 쥐고 하는 말이 귀엽고 고마워 그만 웃음이 터졌다. 루이스는 엘리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앙 다물고 양팔을 벌렸다. 가슴에 안고 있던 엘리를 고쳐안아 눈높이를 맞추자 엘리가 얼굴을 잡고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운 아이. 루이스는 웃음으로 보답했다.
“고마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되지 않은 유년기는 머릿속에서 조각을 들어내듯 비어있었다. 어리기도 했고, 떠올려봤자 좋은 기억도 아니다보니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엔 거리에서 하루하루 연명한 게 전부라 엘리가 말하는 생일 파티나 선물 같은 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였다. 그래서 더 생일같은 기념일에 무던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내일 나오기로 약속한 거다?”
“그건 내일 상황 봐서. 나도 좀 쉬자. 누구누구씨가 서류를 내팽게치고, 누구씨들이 민간 시설을 부수고 다닌 덕분에 뒷처리는 고스란히 내 차지거든?”
“잘못 했네.”
“그렇지? 그럼 회계장부 검토 부탁해.”
“윽….”
엘리를 받아 안으며 맞장구치던 나이오비에게 화살을 돌리자 휴게실에서 탱자탱자 놀던 동료들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하나같이 시무룩해하는 걸 보는 것도 석연치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구누구들 때문에 긴급 호출되는 바람에 기껏 쓴 휴가도 반납하고 일한 게 이틀이었다.
덕분에 원래 세워둔 계획은 박살이 났다. 어제는 일찍 퇴근해 푹 쉬고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데이트, 내일 오후엔 연합에 얼굴을 비출 예정이었는데 덕분에 애인은 삐졌고, 안 그래도 켜켜이 쌓인 피로는 밤샘이라는 이름의 중노동으로 이어져 자고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럼 저는 퇴근합니다. 뒤는 잘 부탁해. 토마스, 부탁한다. 생일날까지 사고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네, 넵!”
“파티 준비 너무 공들이지 말고. 노력은 해볼 텐데, 못 올 수도 있어.”
루이스는 벗어뒀던 재킷을 입고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껏 기대하고 준비한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했다. 어둠이 내린 포트레너드에 눈송이가 휘날렸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인을 향해, 걸음을 바삐했다.
* * *
“그래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미안…. 죄송합니다….”
“루이스.”
죄인이 된 것처럼 쭈그러져있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꾹 참고 이 미련한 남자를 어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래도 생일을 챙겨주길래 기념일은 챙기는구나 하고 뿌듯해한게 고작 이주 전이다. 어떻게 구했는지 제가 좋아하는 와인에, 케이크, 거기에 이 계절에 꽃다발까지 구해온 정성이 갸륵해 내심 흡족했던 벨져였다.
자기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남자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럴 거면 타인에게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지를 말던가. 화를 내고 싶지 않은데 제 눈치를 보는 루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루이스. 나는….”
“미안. 다음엔 정말로 안 늦을게. 정말이야. 약속해.”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벨져는 이마를 짚었다. 기껏 준비한 음식이 식고,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은 더 기다렸지만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조금 더 너 자신을 소중히하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말하면 걱정이 아니라 화가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미안. 휴가는 어제부터 냈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만. 더 말할 필요 없다.”
음식이야 데우면 되고, 케이크에 촛불은 다시 붙이면 그만이다. 벨져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냥 케이크를 가지러 가려던 것 뿐인데,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미안하다니깐.”
“…그래.”
“왜 그러는데, 응?”
초조와 불안이 묻어나는 눈빛에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행여나 실망했을까봐, 그래서 미움받을까봐 두려워 붙잡는 루이스를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벨져는 주먹을 꽉 쥐고 루이스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네 생일이다! 하루쯤은 네 멋대로 해도 된다고!”
“…….”
“제발, 너를 조금 더 소중히 해라.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결국 질러버린 벨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안 봐도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손목을 잡은 루이스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마음이 떨어지는 것 같다. 벨져는 등을 돌리려다 루이스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손을 잡고 올려다보자 힘없이 웃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아냐.”
“…미안하다고 하지 마.”
“응.”
제길. 벨져는 낮게 읊조리며 몸을 일으켜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몸을 숙여 다가가 입을 맞추자 순순히 입을 벌리고 눈을 감는 루이스가 안타깝고, 또 사랑스러웠다. 이 미련한 남자는 언제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우선이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자신을 소중히 하는 건 머릿속에 새겨두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어야지.”
“앞으론 그렇게 생각해. 날 위해서. 알았나?”
“노력해볼게.”
벨져는 가볍게 키스하고 일어나 다 식어버린 스튜를 데우기 위해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루이스가 뒤에서 슬그머니 허리에 팔을 올렸다.
“뭐야? 냄새 좋다.”
“지난 번에 네가 맛있다고 했던 거.”
“아, 거기?”
루이스가 등에 몸을 기대고 눈을 깜빡였다. 방금 화를 내놓고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그게 꽤 귀여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뺨에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눈꼬리를 얇게 휘는 말간 웃음에 또 마음이 녹아내린다. 이 녀석에게 놀아나는 자신도 참 답이 없다 싶지만 어쩌랴, 이것도 다 예뻐보이는 것을. 벨져는 스튜가 끓기 기다리며 루이스의 뺨에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췄다. 루이스는 피하려다 고개를 돌려 입을 맞췄다. 벨져는 아예 얼굴을 잡고 찐하게 입을 맞춰버렸다. 입술을 누르고 있어도 새는 숨이 간지러웠다.
“끓는다.”
“케이크 가져와라.”
“아직 열두시도 안 됐는데?”
“그래봤자 5분 남았다. 뭐, 나야 너랑 같은 나이로 있는 것도 좋긴 하다만.”
“언제는 뭐 형 취급을 해주긴 했어?”
“형 노릇 할 생각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벨져가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며 국자를 휘둘렀고, 벨져의 손에서 흉기가 된 국자를 피한 루이스는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렸다. 열 개의 초를 꽂은 벨져가 불을 붙였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열두시를 알리며 겹쳐지고, 루이스는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껐다.
“스물 여덟번째 생일 축하한다.”
“이젠 나이 먹는 것도 달갑지 않은데 말이야.”
“많이 먹고 커라.”
“그런 얘기는 적어도 이십년 전에 해줬어야지.”
“이십년 전에 내가 네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그야 그렇지만.”
루이스는 벨져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가 산더미였지만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벨져가 먼저 씻는 사이 베개를 끌어안고 기다리는데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루이스. 루이스. 쯧. 루이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저를 부르는 벨져의 목소리도 다 들리는데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벨져가 어깨를 잡아 흔드는데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은 말을 들을 생각을 않았다. 삐진들 어떠하리, 화난들 어떠하리, 졸음 앞에 장사 없는 것을. 루이스는 내일의 자신에게 모든 걸 맏기고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조용히 사랑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와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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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7.
여관을 나와 꼬박 한 시간을 추위 속에 헤매던 두 사람은 마침내 외진 골목에서 연구원의 집을 발견하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벨져가 발을 들었다. 루이스가 손을 뻗어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문짝을 날려버렸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속삭였다.
“미쳤어? 침입자가 있다고 광고해?”
“어차피 상대는 사이퍼도 아닌 일반 연구원이다. 안 될 건 또 뭐지? 강도라도 들었다고 생각할 거다. 비켜.”
“하아, 됐다.”
루이스는 벨져를 제치고 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위장인지, 대문에는 정말로 장치가 없는지 문을 두드려봐도 뒤가 텅 빈 나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잠금장치는 하나. 루이스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얇은 핀을 꺼냈다. 벨져가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열쇠구멍에 핀을 꽂았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조용히 해. 이것도 오랜만이라.... 열렸다.”
묵직한 잠금쇠가 핀에 닿는 감각에 힘주어 돌리자 찰칵, 잠금쇠가 풀렸다. 핀을 쥔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느라 손이 얼얼했다. 손목을 털며 일어나 문을 연 루이스는 문을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도련님 먼저. 도어맨처럼 안을 향해 손짓하자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벨져가 한심하단 눈으로 혀를 차고는 들어갔다.
그래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슬슬 이 까다롭고 예민한 남자가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평범하군.”
“그러게. 딱히 더 뒤질 것도 없어 보이고.”
벨져를 따라 들어간 집은 황량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으레 그러하듯 퀴퀴한 냄새가 나고, 정리정돈이 안 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욕실, 침실, 부엌과 거실까지 어디 하나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전투 인원도 아니고 연구원이니 당연하겠지만, 심지어 책상이며 서랍, 책장에도 별 수확이 없었다.
벨져가 책상 위의 서류를 뒤지는 사이 루이스는 침대를 뒤집어보고 거실로 나왔다. 아무리 이런 후미진 곳이라 해도 기밀을 보란듯이 책상 위에 흘릴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보관장소가 있다는 건데, 밖에서 본 집의 형태와 안을 볼 때 따로 비밀공간이 있을 수가 없었다. 벨져라고 그 간단한 걸 모를리 없으니 집을 보는 대신 서류를 붙잡은 것일 테고.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지며 거실을 서성였다.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벨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삐걱거리지 않는 마루. 햇빛이 한창인 시간에도 볕이 들지 않는 구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끝으로 나무 판자를 톡톡 두드리자 안이 꽉 찬 둔탁한 소리가 감돌았다.
여기다. 루이스는 테이블 위의 버터나이프를 집어 지렛대 삼아 판자를 들어올렸다. 기름이라도 칠한듯 가볍게 들리는 마루 바닥 아래,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루이스를 반겼다.
“벨져. 이리와봐.”
“누구 마음대로 오라가라냐.”
실컷 헛물만 켜다 나온 벨져의 표정이 굳었다. 진지한 얼굴로 옆에 다가온 벨져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손때묻은 노트며 오래된 연구파일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꺼내놓고 빠르게 훑어보니 대충 감이 왔다.
“거부당한 연구 뿐이군.”
“아예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인 건 아니니까. 성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기현상과 새로운 공간을 연결짓기엔 천 구백년이라는 시간이 문제였겠지. 일식도 안 일어난 때니까.”
“흥. 그 중 몇이나 진짜 있었겠나.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지금은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
“그 얼토당토 않은 기현상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들고?”
벨져는 부인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검 대신 총포가 등장하고, 종교와 미신 대신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 세상이지만 그도 자신도 사이퍼였다. 개기월식의 그날부터, 최근의 슈퍼문까지. 사이퍼들의 이능력과 신비로운 자연현상은 뗄래야 뗄 수 없는데다가 그 이유와 연관성 역시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공간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사막 위에 어느날 갑자기 들어선 메트로시티, 세계수가 자라나 형성된 포트레너드. 그 모두가 얘기로만 전해들으면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현상을 직접 마주한 이들이 그것을 신의 계시나 기적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충분히 성인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이 사실은 능력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그 발상에서 시작한 보고서와 연구논문은 결국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마루바닥에 잠들어있지만 가능성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새로운 공간과 사이퍼,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란 명확히 밝혀낼 수 없는 고양이 상자 안의 고양이에 불과했다.
“진행되고 있는 연구가 뭔지 모르겠군. 안타리우스가 이런 자료를 계속 끌어안고 있다면 가능성이 없을 거다.”
“그건 아닐걸. 이것도 지금 진행되는 무언가도 결국은 가능성일 뿐이야. 인식의 문이나 액자처럼 확실한 통로나 공간이 있는 게 아니면 더 특정하기 힘들고.”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새 공간을 찾는 내내 한 고생을 떠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알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막연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도 의문이 걷히질 않는지 무섭게 서류를 읽는 벨져에게 루이스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아까웠겠지. 안 된다는 걸 알아도, 놓아야한다는 걸 알아도 막상 그러는 게 쉽지 않거든.”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루이스는 파일과 자료를 한 데 모아 도로 비밀 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이렇다 할 수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곳에 기밀문서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연락책도 아닌 일개 연구원이니 당연했다. 연구소에 가기 전에 먼저 들른 건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래도 클론이나 강화인간을 연구하는 건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경비는 적을 거야.”
“위치는?”
“서쪽 외곽. 지갑에 정기권있더라.”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또 탐탁지 않은지 제 얼굴에 꽂힌 그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이스는 판자를 도로 덮고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는데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쥐가 나면서 순간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며 풀썩 발목이 꺾였다. 넘어지기 전에 벽이라도 짚으려한 손은 의미없이 허공을 휘젓고, 거기에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돌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넘어져야 하는데, 충격 대신 단단한 팔이 허리를 잡았다. 루이스는 머리를 기대고, 당장 손에 잡히는 걸 쥔 채 숨을 골랐다. 추위와 함께 쨍하니 덮친 어지럼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데 다리까지 저리니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감각을 마비시킨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야, 루이스는 얼떨결에 붙잡고 기댄 사람이 벨져라는 걸 떠올렸다.
“후, 하아.... 미안.”
“도무지 못 봐주겠군. 대체 얼마나 미련하면...!”
생명줄이라도 되듯 잡았던 벨져의 옷을 놓고 떨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앞에서 이런 꼴이라니. 차라리 그냥 넘어지고 말지,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어지는 질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이야 하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마음에 안 드는 제게 꼬투리를 잡아 분풀이를 하는 게 목적이니 괜히 책 잡힐 빌미를 주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야 하는데, 당연히 그게 맞는 건데 손목을 잡아 루이스를 돌려세운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상한 일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벨져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루이스의 목에 감았다. 화가 난 얼굴로 그의 온기가 가득한 머플러를 꼼꼼히 감아 목 뒤로 매듭을 짓고는 다시 한 소리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냥 하면 될 걸 말도 못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벨져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홱 돌아섰다. 목을 감싼 온기와, 머플러에서 느껴지는 벨져의 향수냄새. 등을 보이고 돌아선 벨져는 주먹을 꽉 쥔 채 잠시 서있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루이스는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아니라고, 그저 지친 제 착각일 뿐이라고 되뇌어도 머릿속에선 빨간 경고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뭔가 잘못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다. 제게 패해 세상으로부터 온갖 괄시와 악의 섞인 편견을 받아야했던 벨져 홀든. 로라스 옆에서 길길이 날뛰며 노려보던 그 날의 벨져가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만약 이번에도 제 감이 맞다면, 이번에 무너지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벨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루이스는 이 불안이 기우로 끝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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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6.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그 햇살에 프라이팬의 달걀처럼 익어가던 루이스는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입안은 모래알을 한 움큼 넣은 것처럼 깔깔하고, 갈증과 함께 쨍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점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몹쓸 숙취는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게 며칠, 그마저도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뜨다 눈앞에 보이는 쇄골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대로 고개를 올리자 잠든 벨져의 얼굴이 보였다.
길고 풍부한 속눈썹 아래 우아하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워낙에도 미인이긴 하지만 이렇게 그림자까지 질 줄이야. 순수하게 감탄하며 벨져의 얼굴을 감사하던 루이스는 창밖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길래 벨져와 한 침대에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방이 없어서, 사정사정해 별채까지 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완전히 공백이었다. 아무래도 머리를 기대자마자 곯아떨어진 모양이라고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려 했다는 데 그친 건 제 허리와 다리에 감긴 벨져의 팔다리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오랫동안 안 쓴 별채니 난방이 제대로 될 리 없고, 유일한 난방수단인 벽난로는 불이 꺼진지 오래인 듯 했다. 추운 지방에, 밤이 되면 기온이 더 떨어지니 이불 한 겹으론 추위를 다 막지 못했을 테고 그러다보면 옆에 있는 체온에 달라붙을 수밖에.
설마하니 벨져가 먼저 제정신으로 끌어안았을 리는 없다. 그게 루이스가 내린 결론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벨져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잠결에 자기도 자연스레 온기를 찾았을 터였다. 내외하는 남녀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빠져나가려 하면 할수록 벨져는 더 꽉 끌어안고 좀처럼 놓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끌어안고 자는 베개쯤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현저하게 느껴지는 체력과 완력 차이에 더 오기가 생겼다. 가까스로 벗어나 숨을 돌린 루이스는 언제 벗었는지 모를 신발을 주워 신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왈칵 녹이 섞인 물이 흘러나와 손을 적셨다. 이럴 땐 그냥 흐르게 둬야 하는데, 벨져가 그런 서민의 생활상식을 알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일단 급한 대로 물을 틀어두었다. 여기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화장실을 나오는데 벨져가 창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루이스를 깨운 아침햇살이 이번엔 벨져를 괴롭히고 있었다.
루이스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커튼을 쳐 햇빛을 가리고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저기선 씻을 수도 없고, 있어봐야 예민한 도련님의 귀한 수면을 방해할 뿐이다. 하얗게 입김이 서리는 추위에 팔을 쓸며 사람의 발길이 닿은 길을 따라 걸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흐릿해 대충 감으로 걸어가니 마당에서 세탁물을 걷던 여자와 마주쳤다. 어젯밤 방을 내준 종업원을 기억해낸 루이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좋은, 큼. 아침입니다.”
“어머나, 벌써 일어나셨어요? 밤새 춥지는 않으셨구요?”
“덕분에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드릴까요?”
루이스는 그녀가 걷던 시트며 수건, 베개 커버같은 것들을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스위스인데 아무렇지 않게 말이 통한다. 위화감에 슬쩍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힘드시겠어요. 영어도 잘 하시는데.”
“에휴. 그러게나 말이에요. 겨우 탈출했다 싶었더니 잠깐만 와서 봐달라고 사정사정을 해서 왔더니 글쎄, 자기는 귀족 나부랭이랑 눈이 맞았다지 뭐예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놓고 여태껏 편지 한 번 없어요.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거 공부시켜놨더니, 이런데 틀어박히질 않나. 결국은 눈 맞아 도방가질 않나. 아, 같이 온 그 귀족나리는요? 그쪽도 만만치 않게 재수 없던데.”
과연. 루이스는 유독 벨져에게 야박했던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모양이나 말투로 보아하니 가정교사였던 것 같고, 사정 설명은 본인이 늘어놓은 신세한탄으로 다 들었다. 귀족에게 치를 떠는 이유도 알만 했다. 교사로 있을 때 까이고,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못하고 공부시킨 동생은 하필이면 또 귀족과 눈이 맞아 도망. 벨져야 누가 보더라도 귀족 도련님이니 어찌 보면 질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잡니다. 동생분 일은 정말 안타깝네요.”
“에휴. 기사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소설 속에나 있는 얘기예요. 그것 때문에 신세 망친 애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모름지기 남자는 성실하고 지고지순한 게 최고라니까요!”
여자는 시트를 팡팡 털며 말했다. 모름지기 신세한탄 인생역경 스토리란 아무리 말해도 말해도 질리지 않는 법이고, 거기에 왠지 친숙한 옆집 청년같이 생긴 남자가 있으면 말이 더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부터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여성들이 꽤 있었기에 익숙했다.
어떤 매커니즘인지는 모르지만 뛰어나게 잘 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호감이 가게 생긴 청년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루이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자의 푸념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받았다. 어젯밤에는 그런 얼굴로 불쌍한 척을 한 게 먹혀들어간 거고. 루이스는 그녀와 함께 다 걷은 세탁물을 옮겼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손님한테 일을 시켜버렸네요.”
“괜찮습니다. 크흠. 혹시 씻을 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혹시 편지도 좀…….”
“그럼요, 물론이죠! 저쪽이 욕실이니까 편하게 쓰세요. 아, 전화 쓰셔도 돼요. 아침은 서비스로 갖다 드릴게요!”
우다다 할 말을 쏟아내고 사라진 그녀의 등 뒤로 감사하다 소리친 루이스는 꽤 괜찮은 설비의 욕실에서 따뜻한 샤워로 언 몸을 녹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가방을 들고 나올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루이스는 전화기를 들었다. 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어디야? 트리비아는?’
“그녀는 떠났어.”
‘……그래. 그렇구나. 그럼 너는. 그리스에서 연락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앤지. 천천히.”
루이스는 흥분한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그야 물론 이글과 나이오비가 소식을 전했다면 걱정할 만 했다. 어쨌거나 안타리우스가 강화인간들을 처리한다는 건 성공작을 거의 완성했다는 뜻이고, 제키엘 헌팅턴까지 등장했으니 거기에 휘말렸으면 솔직히 뼈도 못 추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불안과 가정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루이스는 구태여 설명을 더하는 것보다 빠르게 앤지의 불안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랑 있는지 알아?”
‘뭐? 설마 작업 들어온 건 아니지?’
근래는 좀처럼 듣기 힘들어진 스노우퀸의 격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작게 웃었다.
“벨져.”
아무리 그녀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글이 벨져와 있었다는 걸 알렸다면 더더욱.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 뻔한 반응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루이스는 말을 잇지 못하는 친구에게 안심하라는 말을 보탰다. 얼마나 믿을진 모르겠지만 말 한 마디 한다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괜찮아?’
“자세한 건 편지로 보낼게. 아무래도 돌아가는 건 더 늦어질 것 같아. 미안. 부탁해.”
‘……알겠어. 루이스, 제발 몸조심해. 응?’
“알았어. 또 연락할게.”
루이스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앤지가 걱정을 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이면 보일수록 그녀를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녀마저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또다시 괴로워질 뿐이었다. 나는 네 기대에 못 미칠 지도 몰라. 기대를 저버리면 제게서 등을 돌릴 사람들이 무서웠다.
루이스는 양동이 하나를 빌려 뜨거운 물을 받아 왔던 길을 돌아갔다. 방문을 열자 나가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이 루이스를 맞았다. 자고 있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짜증을 내며 손을 내치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리는데, 그 모습이 꼭 마나님들의 성질 더럽고 예쁜 고양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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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없다. 어쩜 관광지에 방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지만, 그나마 묵을만한 호텔은 이미 방이 다 나가고, 작은 여인숙이나 모텔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섯번째, 벨져는 돈을 주겠다는데도 예약을 받은 거라 안 된다며 거절하는 숙박업소를 나왔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사이 술이 좀 깼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루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결혼이 이렇게까지 외부인을 모을 일인가. 어쩐지 아까 펍에서도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더라니. 방금 전 유명한 배우가 이곳의 지역 유지와 도피해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기자와 팬들이 몰려 어쩔 수 없었따. 밖으로 내몰린 벨져는 혀를 차고 성큼 앞서 걸었다.
“저, 벨져.”
“뭐지.”
“저쪽에, 불이 켜져 있소만.”
루이스를 부축하며 따라오던 릭이 모퉁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모텔을 가리켰다. 외관도 별로고, 자리도 별로라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 어쩐지 방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휘청거리며 걷던 루이스가 릭이 앓는 소리를 내자 자기는 괜찮다며 떨어졌다. 벨져는 병실로 돌아가야 하면서도 도움을 자청하는 환자와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주제에 남 걱정이나 하는 천치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냥 해도 될 걸 저 지경이 되도록 무식하게 퍼마신 건 어디까지나 저 머저리다. 얼마나 한심하고 미련한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벨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딸랑. 벨이 울리며 젊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방 없어요.”
“방 둘. 다섯 배를 주지.”
“방 없는데요.”
“돈이라면.”
“아, 없다니까요.”
여급이 신경질을 내며 정리하던 수건을 턱하니 내려놓았다. 그녀의 기세에 잠시 움찔했던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돌아서서 세탁물을 개키기 시작했다. 딸그랑. 기어이 릭을 보냈는지 루이스가 혼자 들어왔다. 저걸 끌고 다른 곳을 찾을 순 없다. 벨져는 꾹 누르고 한 수를 물렀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나으리. 없다니까요?”
탁. 그녀는 아예 벽에 걸린 열쇠함을 치며 짜증을 내고 돌아섰다. 벨져 홀든에게 이런 푸대접이라니. 울컥 치솟는 짜증에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코웃음 친 벨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루이스가 휘청이며 팔을 잡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돌아봤다. 아직도 술기운이 여전한지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었다. 나른한 눈웃음에 벨져의 눈도 그만 루이스에게 쏠려버리고, 짜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약한 홍조가 돌았다.
“혹시 남는 방.... 그냥 잠만 잘 수 있으면 되는데.... 벌써 다섯번이나 허탕쳤어요.”
“아, 저.... 그게... 지금은 방이 다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던 벨져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는 여자와 나긋하게 말을 거는 루이스를 보고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참 잘 하는 짓이다. 벨져는 혀끝에 멤도는 말을 꾹 참아 눌렀다. 오늘 아주 작정하고 그 반반한 얼굴을 팔아먹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 지켜보고 있으니 데스크에 엎드리다 시피 기댄 루이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아래서 올려다보며 묻더니,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눈을 깜박였다. 여자에게 애원하는 법에 도가 튼 모습은 어이가 없다 못해 사실 펍에서 취한 사람은 루이스가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게, 수리중인 별채가 있긴 한데....”
“주세요.”
얼굴을 붉히며 내숭을 떠는 여자에게 웃으며 대답한 루이스가 몸을 일으켜 벨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손을 놓은 건 좋지만,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도무지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는 그였다. 루이스는 어젯밤 제 손을 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음에 드는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벨져는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 보란듯이 내려놓았다.
종업원이 발그레한 볼로 개켜놓은 시트와 수건같은 걸 분주히 준비하는 사이 툭, 루이스의 머리가 벨져의 어깨에 닿았다. 슬슬 한계인지 눈을 꿈벅이며 안간힘을 쓰는데, 그 꼴이 한심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따라오라는 말에 루이스가 멍한 눈으로 수건과 시트를 끌어당겼다. 벨져는 루이스가 든 짐을 빼앗아 들었다. 그냥 뒀다간 기껏 깨끗하게 세탁해 접어놓은 것들이 엉망이 될 터였다. 종업원은 수리중이라 보일러 대신 난로를 때야 한다며 빠른 속도로 이불과 시트를 갈았다. 별채까지 얼마나 된다고, 벨져를 따라 걷는 게 고작이었던 루이스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종업원은 루이스가 잠든 걸 보고 그쪽 도련님은 절대 못할거라며 난로에 불을 피우고 말 한 마디 붙이기 싫다는 듯 나가버렸다. 워낙 쌀쌀맞게 휙 나가버리는 바람에 벨져는 더 따져 묻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못 잘 건 아니다. 왜 멀쩡히 본채를 두고 떨어진 곳에 별채를 짓는지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취해서 잠든 루이스와 여행 온 커플이 쓸 법한 더블 베드를 함께 쓰는 건 머리론 알아도 마음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이를 어찌한다. 벨져는 머리를 누이지도 못하고 잠든 루이스의 팔을 잡아 이불 위에 눕혔다. 씻지도 않은 채 사내자식과 한 침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고 바닥에 내던질 수도 없고, 소복이 쌓인 먼지는 둘째치고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소파에 재울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내일 아침엔 송장을 치우게 될 테니까.
벨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곱게 잠든 얼굴을 보니 두통이 밀려왔다. 산을 오르고, 펍을 구르고, 제게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면서 엉망이 된 루이스였다.
루이스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욕실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따뜻한 물은 고사하고 누런 녹이 섞여 나오는 걸 확인한 벨져는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씻지 못할 거라면 더럽긴 오십보백보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같은 침대에서 잠들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벨져는 그치질 않는 한숨을 내쉬고 취침등 하나만 켜둔 채 불을 껐다.
그냥 누우면 되는데, 앉자마자 뻗어버리는 바람에 벗지도 못한 신발이 눈에 밟혔다. 잠시 고민하가, 결국 신발을 벗겨주고 나서야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누웠다. 루이스가 이불을 깔고 누운 바람에 벨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이불을 빼앗았다. 혼자 꽁꽁 두르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녀석의 숨소리가 벨져를 괴롭혔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왜 별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을 주워버린 걸까. 탁한 주황색 불빛이 비추는 루이스의 얼굴은 어젯밤을 연상시켰다. 여전히 슬프고, 아프고,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루이스의 손이 얼굴 바로 앞에 모여있었다.
쥐면 한 손에 다 들어올 것 같이 마른 손목.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손을 거두기엔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술기운이 들어가있었다. 과연. 예상대로 뼈밖에 없는 듯 마른 루이스의 손목은 벨져의 한 손에 잡히고도 남았다. 벨져는 짧게 혀를 찼다. 봐줄 거라곤 그나마 멀쑥한 얼굴 뿐인데 그마저도 말이 아니었다. 제게 맞아 찢어지며 부르튼 입술도, 막상 이렇게 보고 있으니 영 거슬렸다.
벨져는 손에 쥔 루이스의 손목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벨져는 도로 누워 몸을 돌렸다. 그와 제 얼굴 사이에 놓인 손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술냄새와, 방안에서 나는 먼지냄새, 시트에서 나는 청결한 비누와 햇살 냄새가 제 향수 냄새와 어지럽게 섞여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손 안의 온기와 눈앞에 잠든 남자의 얼굴에 감각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보통은 불쾌하다고 여겼을 것들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끝에 닿은 온기는 놓으면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아 놓치기 싫었다.
* 언제나 그렇듯이 연재분량은 원고 분량의 크롭이며 쌩원고입니다.
* 어떤 동행은 가제로 1월 중 완결,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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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이어집니다
예전 글이지만 진행 순서상 제목 표기와 게시 순서를 바꿨습니다
어쩌자고 이런 녀석을 받아준 걸까. 벨져는 한순간의 변덕을 후회했다. 덕분에 수월하게 갈 길을 돌아 돌아가고 있다. 얼음심장은 무슨. 세월에 날카롭게 벼려졌나 했더니 여전히 온건하다 못해 물러 터졌다. 연합의 동료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벨져의 곁에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안타리우스와 인식의 문, 그리고 연인을 잃은 남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안타리우스를 쫓던 벨져는 연합으로 돌아가려던 루이스를 낚아챘다. 물론 잡는다고 잡힐 녀석이 아니기에 남아있는 건 그의 의지기도 하다. 벨져는 그 날 펍에서 루이스를 주운 제 변덕과 그의 협조가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헤아리지 않았다. 녀석은 여전히 속을 모를 놈이고, 서로 깊이 얽히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마주한 과거의 실수는 예상 외로 덤덤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걸 알았으면 손을 뻗지 않았을 텐데. 넓은 아량으로 따뜻한 침대를 제공한 벨져는 아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제 심중이나 캐는 루이스를 마주했고, 그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루이스가 순순히 내놓은 정보는 꽤나 유용했다.
여제가 떠난 새로운 공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 곳을 찾는 과정엔 어김없이 안타리우스가 등장했다며 자신이 본 것과 그림자로만 알 수 있는 것들, 유럽을 헤집고 다니면서 알아낸 정보는 벨져가 혼자 수소문하며 모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벨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꽤 쓸 만한 길잡이였다. 능력도 확실하고, 시간이 흐르며 다져진 경험에 나름 쓸만한 머리까지 갖췄으니 껄끄러운 과거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만 아니라면 먼저 나서서 친분을 쌓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 사사건건 부딪히는 게 문제였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과 태생, 경험이 충돌했다. 양보? 녀석과는 원래부터 상성이 안 좋다. 벨져는 혀를 찼다.
알프스 산맥에 연구소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 까지는 좋다. 그 공은 인정한다. 그래서 릭과 함께 알프스까지 왔고, 대낮에 돌아다니는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도 발견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내놓은 수단과 방법은 벨져의 성에 차질 않았다. 고작 열쇠와 신분증을 훔쳐 연구소 안을 둘러보는 거라니.
물론 힘으로 뺏는 것 보다 잠시 잃어버린 걸로 하는 게 위험부담이 적겠지만, 벨져는 열이면 아홉 그의 편을 드는 릭도, 거 보라며 으스대는 녀석도 탐탁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벨져는 해가 지자마자 사람 많은 펍의 구석탱이에 처박혀 영국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수다나 떨고 있는 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화기애애한 꼴이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목적이 뭔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펍의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소문에는 취향이 그쪽이라던데. 과연 농부들과 다른 말끔한 차림새에 여자가 추근덕거려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게 소문이 확실한 것 같았다. 남자의 눈이 닿기 전, 벨져는 머리까지 뒤집어쓴 후드를 더 당겨썼다.
한가롭게 디저트에 대해 얘기하던 루이스를 쏘아보자 슬며시 눈을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눈짓을 주고받은 루이스가 남자가 볼 수 없게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바뀐 분위기에 릭도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살폈다. 뭔가 계획이라도 있는 게 아니었나? 루이스는 흘긋 남자를 보고는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앉아서 서너 잔은 마셨던 것 같은데 얼굴 색 하나 안 변하는 녀석이 릭의 잔까지 잡아 쭉 들이켰다. 열쇠를 훔치든 남자를 납치하든 뭘 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벨져는 눈을 찡그렸다. 그 사이 남자가 두 명째 여자를 거절했다. 낭패라는 듯 펍 안을 기웃거리던 남자가 바에 앉았다. 바텐더에게 무언갈 은밀히 속삭였지만 바텐더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다간 남자가 가버릴 판이다. 벨져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루이스를 채근했다.
“저 쪽?”
“아니. 너 말고. 넌 너무 눈에 띄어.”
벨져는 불만의 표시로 살짝 눈을 찡그렸으나 애석하게도 루이스의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래서 너무 아름다워도 탈이라니까. 루이스는 곤란해 하는 릭을 한 번 올려다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를 향해 걸어가는데,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루이스는 그의 옆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처연한 얼굴하며, 살짝 내리깐 눈, 거기에 얼음도 없이 마시는 독한 술. 누가 봐도 실연을 당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태연해서 잊고 말았던 이유를 다시 깨달을 정도였다. 연거푸 잔을 비운 루이스 옆, 남자가 루이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무어라 말을 걸었다. 작은 목소리라 뭐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순간 팽팽 돌아가던 생각이 멈췄다. 그를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 팔에 턱을 기대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술을 마시던 녀석이 말을 거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사르르 웃는데,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마치 몇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는 남자의 팔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에 이를 악물었다. 헛웃음이 샜다. 사내새끼가 눈웃음을 치는 꼴 하고는.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저런 싸구려 수작질이라니, 같잖기 그지없다. 실망하기도 아까울 정도로 기가 차는 수준이었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펍의 벽에 등을 기댔다. 루이스는 아예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살거리고 있었다. 펍은 시끄러웠고,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남자는 기분이 좋았고, 루이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입을 여는 건 추임새를 넣는 것 뿐이다.
남자가 들뜨면 들뜰수록 벨져의 기분은 수직 하강했다. 저 녀석이 뭘 하던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저렇게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갑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루이스 앞에 놓인 잔에 술이 다시 채워지고 남자 앞에도 잔이 늘어섰다. 가끔 속삭이는 말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 아주 침대까지 갈 모양이다. 남자의 손이 루이스의 어깨에서 등까지 내려갔음에도 루이스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마실 뿐이었다. 저게 진짜 취했나. 남자는 거부하지 않는 게 동의의 표시라 생각했는지 등줄기를 따라 훑으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벨져의 인내심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이, 그 손 놓지.”
“뭐야, 그쪽 애인?”
“애인...?”
루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짜 취한 건지 표정이 나른했다. 무슨 짓을 하는 짓이냐며 눈으로 묻자 루이스가 씩 웃었다. 저 새끼가...!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남자는 루이스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글쎄, 저런 타입 별론데.”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으며 순순히 끌려가자 남자가 비웃음이 분명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참아줘야 하는가. 명백히 저를 놀려먹고 있는 그의 그 잘난 얼굴에 당장이라도 한 대 휘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예 머리가 없는 놈도 아니고, 완전히 술에 취한 것도 아니니 뭔가 하려는 게 있을 것이다. 벨져는 꾹 눌러 참았다.
“집착이 심한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
“뭐 이 새끼야?”
벨져는 기어코 제 속을 뒤짚어 엎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루이스는 슬쩍 웃더니 남자 뒤편으로 던지라고 눈짓했다.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일어났다. 제정신이 분명한 차가운 눈빛에 벨져는 자신이 그의 계획대로 놀아났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너 뭐야?”
남자가 쓰러진 루이스를 넘어 벨져에게 성큼 다가왔다. 취한 척,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그를 붙잡은 루이스가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미안해요. 잠깐, 윽....”
그의 가슴에 기댄 루이스가 숨을 고르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눈을 찡그리며 낮은 한숨을 내쉰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렸다.
“저쪽 것까지.”
바텐더가 빠르게 지폐를 셌다. 루이스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고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지 루이스를 바라봤다. 벨져에게 걸어온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가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벨져는 남자를 응시하며 루이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서, 뿌리칠 수 있음에도 같잖은 연인놀이를 계속했다.
“미안.”
펍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바로 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벽에 기대서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벨져는 안에서 꾹 참았던 일을 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윽...!”
각오할 새도 없이 얻어맞은 루이스는 그대로 엎어졌다. 비릿하게 퍼지는 피맛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다.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화를 참고 있는 벨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하하, 그러게.”
더 맞을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전보다는 철이 든 모양이다. 루이스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진심으로 때려서인가,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급하게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킨 것과 맞물려 속까지 울렁거렸다. 루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덕분에 챙겼어.”
벨져는 루이스가 꺼낸 지갑과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핥는 루이스를 번갈아보고 그가 내민 지갑을 받아들었다.
“배운 거 없는 거리의 고아라서.”
묻지도 않고, 보기만 했을 뿐인데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코웃음을 흘리고 지갑에 들어있는 명함과 고리에 매달린 열쇠를 떼어냈다.
“좋은 지갑이네.”
“좋기는.”
볼 일을 마친 벨져가 다시 지갑을 루이스에게 던졌다. 루이스는 지갑을 살피다 펍의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나온 릭이 서글서글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잘 됐소? 아니, 루이스 그대 입술이.”
“성질이 좀 더러워서 말이죠.”
“아직 덜 맞았나보군.”
“이것 좀 펍 안에 버려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소.”
루이스는 릭에게 지갑을 건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닌 척 사람을 다루는 게 능숙하다. 벨져는 혀를 찼다. 하여간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다. 주먹을 털며 검자루를 쥐었다 놓자 루이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물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슬퍼보여서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거니와, 그와 정다운 대화를 할 사이도 아닌데 왜 자꾸만 시선이 가는지 모를 일이다.
슬쩍 눈을 뜬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졌음에도 반쯤 뜬 눈만은 붉게 빛나고, 그 나른하고 퇴폐적인 눈빛에 순간 벨져는 침을 삼켰다.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는 녀석의 얼굴에 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까 펍에서 남자에게 짓던 눈이 아니다. 도발도, 유혹도 아닌 그저 흡연에 불과한데 야릇한 분위기가 벨져의 입과 발을 얼려 꼼짝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릭이 나오자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끈 루이스가 방금 그 얼굴과 분위기는 전부 허상이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드디어 숨통이 트여 벨져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내가 이 벨져 홀든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고작 저거 따위에? 언짢아진 이유를 찾아낸 벨져는 후드를 뒤집어쓴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여간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따지고 보면 이 일도 다 제 멋대로 자기 잘난 맛에 한 거 아닌가. 사람을 들러리로 쓰기나 하고.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한 대 더 패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다.
멀쩡히 걷던 녀석이 비틀거리지만 않았어도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 그 면상에 한 대 갈겨주었을 텐데. 릭과 걷던 녀석이 그의 팔을 잡으며 낮게 신음했다. 멀쩡해 보인다 했더니, 급하게 마신 술이 이제야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멍청하긴. 한 손으로 입을 틑어막은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루이스에게 괜찮으냐 묻는 릭의 손에 쥐어주었다.
“먼저 가겠다. 버리고 오던지, 사람 꼴로 만들어오던지.”
황망하게 저를 바라보는 릭의 눈빛에도 벨져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녀석의 추한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고, 그 뒤치다꺼리를 해줄 생각도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으니 그걸로 끝,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면 그만인데도 자꾸만 눈에 밟혀 기어이 멈춰 섰다.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린 벨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루이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를 다시 만난 날도 저렇게 취해있었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오려는지, 바람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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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벨져는 루이스의 방을 나서 바로 옆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 왔는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릭이 벨져를 맞았다.
“오, 왔소?”
“일행이 늘었다.”
“응? 동생도 떨어뜨리고 온 거 아니었소?”
“그녀석 말고, 좀 더 궁상맞은 결정사.”
“결정사? 잠깐, 그대 혹시…!”
릭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벨져는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일일이 답해줄 필요는 없다는 게 벨져의 지론이었다. 릭 앞이라고 바뀔 것도 없었다. 걱정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준 성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는 아량을 보이기로 했다.
“괜찮…소…?”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오.”
되려 묻자 릭은 머쓱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신문과 커피를 드는 대신 불안하게 손을 매만지며 눈치를 보는 게 거슬렸다. 그래도 벨져는 참았다. 건방지고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따박따박 하는 말마다 어깃장을 놓는 녀석보다야.
“그런데…. 정말 그… 그 사람이오?”
“연합의 3급 능력자 나부랭이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색한 기류 속에 눈치를 보기 바쁜 그를 향해 눈을 흘기던 벨져는 먼저 시선을 거뒀다. 릭 역시 흔히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를 책망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지겹도록 들은 소리고, 지겹다 못해 무뎌진 눈빛과 표정이다. 벨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를 신경 쓰고,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이 제게 씌운 편견의 굴레 속 벨져 홀든이었다.
“그…. 벨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그렇다면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소?”
벨져는 창문 앞에 섰다. 안타리우스의 의식은 성공해 인식의 문은 열렸고,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다. 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액자를 찾아 시바 포를 쫓는 것이고 아직 시바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한 벨져는 릭의 눈을 마주했다.
“그 녀석 하나 낀다고 달라질 건 없어. 난 내 일을 할 뿐이다.”
“…그대는 정말 대단하구려.”
“흥.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그러니 앞으로 며칠만 더 신세를 지도록 하지.”
릭이 난처한 듯 시선을 피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 좋다. 그보다는 루사노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의식이 성공해버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거리를 내려다봤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둠이 내렸던 거리엔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 속에 섞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인식의 문에 다가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문의 형태가 아니기에 더더욱 접근하기 어렵고, 그나마 아는 통로는 안타리우스에 점거됐다. 릭의 공간 이동 능력이 알려졌으니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긴 무리다. 벨져는 그림자와 액자를 넘나드는 그녀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하나는 행방을 모르고,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돌아올 가능성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멍청한 남자가 적들이 포진해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할 리가 없으니. 벨져는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자꾸만 어젯밤 어둑한 조명 아래 슬픔을 술로 삼키던 그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겠지.”
“으응?”
“어쨌거나 그림자를 열고 다녔으니 아무것도 모르진 않겠지. 액자에 대한 행방도 어쩌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지만. 릭이 눈을 깜박였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뚱하게 있느니 실제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벨져는 릭에게 옆방에 가보란 뜻으로 턱을 까딱였다.
“바로 옆이다.”
“그럼…. 다녀오겠소.”
벨져는 릭을 보내고 발신인도 수취인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런 게 없어도 누가 보낸 건지 뻔하다. 벨져는 시킨 일을 마무리했다는 짧은 메모를 보고 동봉된 정보를 외운 뒤 봉투째 태워버렸다.
릭이 마시던 커피에선 김이 올라오지 않고, 탄내 대신 벨져가 뿌린 향수 냄새가 방 안에 퍼지도록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질 않았다. 뭔가 일이 있으면 소리라도 들릴 텐데. 벨져는 루이스가 릭과 함께 연합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렸다가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이 있는데 그대로 꽁지를 내뺐으리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얕은 수를 썼던 녀석이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벨져는 다리를 꼰 채 문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온 신경을 문 너머에 집중하고 있기를 얼마, 릭의 웃음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와 냉큼 릭이 보던 신문을 집어들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신문에는 헌터에 대한 속보가 실려 있었고, 바로 얼마 전 마주쳤던 소리 능력자 자매에 대한 칼럼도 실려있었다.
“벨져, 우리 왔소.”
우리. 라는 말에 벨져는 눈썹을 꿈틀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 봤다고 벌써 우리라니. 벨져가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상기된 얼굴의 릭이 루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젖은 루이스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방울지고, 맺힌 물방울은 흰 목을 타고 흘러 티셔츠를 적셨다.
“칠칠치 못하긴.”
작게 중얼거리자 벨져를 향해 슬쩍 눈을 치뜨다가, 릭이 커피를 권하자 바로 고개를 들어 언제 눈을 흘겼냐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벨져는 다시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더 볼 일이 남아있는 겁니까?”
“아, 나는 벨져와 동행한 것 뿐이라.”
“그렇군요.”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자신을 빼고 돌아가는 대화에 벨져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둘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니 그 정도 주도권은 가져도 무방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안타리우스와 그 세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럼…. 인식의 문은?”
“내가 아는 루트는 막혔다.”
당당한 벨져의 말에 루이스가 기가 찬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를 매만지다가 벨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흰 손이 테이블 위에 있던 지도를 잡아 펼친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이었다.
벨져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마른 손목과 손등에 난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그 자신조차 갉아먹는 결정검 때문인지, 루이스의 손은 몇 년 사이에 성한 곳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온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도를 톡톡 두드리던 손끝이 한 점을 짚었다.
“스위스…?”
“일단 제일 가까운 곳은 인터라켄인데….”
“하늘이랑 눈밖에 볼 게 없는 곳이군.”
“여기서 소득이 없으면 거기로 가려했습니다.”
루이스는 지도를 짚으며 안타리우스의 연구소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고 릭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얘기의 주인공이고 연합의 영웅인데다 방금 처음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건의 주요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저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유명인을 직접 보면 신기할 테지. 릭에겐 얼마든지 이해하고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쪽. 또, 엄연히 같은 자리에 있는 자신을 빼놓고 릭에게 말을 건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루이스에게 불쾌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그를 노려보자 애먼 릭이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아, 그……. 그렇지. 커피. 커피 가져오겠소. 얘기들 나누시오.”
황급히 일어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숨을 내쉰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조하겠다더니, 저와는 말도 섞으려 들지 않는다. 벌써부터 어긋나는 말과 행동에 벨져는 젖은 머리를 터는 루이스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흰 목덜미에 물방울이 떨어져 흘렀다.
“협조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협조하겠다고 했지, 네 비위 맞춰주며 수행원 노릇 한다고 하지 않았어.”
릭에겐 그렇게 친절했으면서, 오늘 처음 본 사람보다 못한 냉랭한 취급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 여전하군.”
“지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홀든.”
“어떻게 믿지?”
“난 내가 들어가게 될 구덩이에 함정을 설치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거든.”
한 없이 0도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 타오르는 황혼의 색으로 정반대의 기운을 품은 눈을 마주하며 벨져는 수를 셌다. 말 한 마디 없지만 그 역시 자신의 수를 읽고, 읽고, 또 읽어 그 다음을 노리고 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기싸움. 먼저 백기를 든 건 루이스였다.
“그만. 이런 거 그만 하기로 했잖아.”
“먼저 시작한 건 너다.”
“…그래.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진짜야. 못 믿겠으면 말고.”
“믿는다.”
루이스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피곤하다는 듯 무심한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벨져를 바라봤다. 조금 즐거워진 벨져는 손을 모아 배 위에 얹고 노래하듯 말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의뭉스러운 모양이었으나 벨져 자신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안다 해도 말해주고 싶지 않다. 유치한 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벨져는 우위를 점한 이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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