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사이퍼즈/루른 연성에 해당되는 글 115건
- 2016.10.03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 2016.09.07 [벨져루이] 무희
- 2016.08.30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2016.08.30 [벨져ts루이] 취중진담
- 2016.08.28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 2016.08.28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 2016.08.23 [벨져루이] Notes
- 2016.08.18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 2016.08.06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 2016.08.04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글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데샴님과 공성중에 풀던 썰이 너무 찰져서... 앙☆ au
기인 벨져 보고싶읍니다 시름시름
입학한 이래, 벨져는 곧 "기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차갑고 오만한 왕자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벨져의 태도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벨져 홀든을 경외시하게 만들었다. 벨져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격'이자 '품위'라고 표현했다. 난다긴다하는 외모와 재능을 가진 학생들 중에서도 벨져의 상대는 없었다.
입학하기 전부터 화제를 모은 터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벨져의 첫 무대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관객들로 채워졌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아무리 노력한들 타고나는 재능과, 그 태생은 바꿀 수 없는 법. 벨져는 자신을 둘러싼 작은 세상이, 다시 지루해지고 있었다.
한 명쯤은 기업의 이미지와 홍보를 위해 연예계에 있어도 나쁘지 않은 법이라며 흔쾌히 허락한 아버지는 금방 질릴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져에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쉬웠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후계자 숭업도, 아이돌로서의 가창력, 춤, 퍼포먼스도 전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이들을 뛰어넘는 경지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육체적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균형 잡힌 몸과 타고난 지능, 두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져에겐 못할 것이 없었다.
슬슬 그만둘까.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등교를 거부하던 중에 유닛을 통해 소문이 들려왔다. 편입이 없는 아이돌 육성과에 전학생이 온다는 소문은 벨져의 흥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 까다로운 입학 심사관과 임직원들이 편입을 허가한 것일까.
학 학년 위의 전학생이 왔다는 소리에 벨져는 오랜만에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소문의 전학생은, 벨져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이란 어딜 봐도 찾아볼 수 없고, 그냥 지나치다 한 번 돌아볼 것 같다는 게 전부다. 어딜 봐도 평범한 얼굴에, 침침한 후드.
벨져는 헛웃음을 치고 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전학생에게 다가갔다. 학 학년 위의 상급생 반이지만 개의치 않고 팔짱을 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을 내려다 봤다.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그 뿐이다.
이 학원에 발을 들였다는 건 곧 그 역시 아이돌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벨져는 전학생에게 넘볼 수 없는 격을 몸소 가르쳐주기 위해 대결을 신청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넘어가려 해도 소용없다. 교실이 술렁거렸고, 프로듀서 과의 여학생이 전학생의 어깨를 잡고 무어라 속삭였다. 벌써부터 스카우트를 하려는 속셈인지 몰라도 그녀의 말에 전학생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고, 벨져는 두 시간 뒤에 광장에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벨져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와 실력, 그 모든 것에 환호하는 팬. 아무리 프로듀서가 붙은들 결과는 같을 것이다.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벨져는 여유를 만끽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하고도 십 분 뒤, 벨져는 굴욕적인 패배에 무릎을 꿇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벨져가 졌다는 사실을 바꿀 순 없었다.
관객 속에서 누군가가 전학생을 영웅이라 불렀다. 우습지도 않은 별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비웃으려는 순간 객석의 관객들이 웅성거리더니 파도처럼 그의 이름 앞에 영웅이라는 말을 붙여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이었던,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승리와 대중이 등을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그들이 환호하며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이름은.
벨져는 도망치듯 스테이지를 내려왔다. 십육 년 만에 처음, 벨져 홀든의 자존심이라는 감싼 드높고 공고한 벽이 부서진 날이었다.
처음은 특별하다. 첫 키스, 첫사랑, 처음으로 시작하는 온갖 미사여구와 로맨틱한 말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처음은 특별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루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에 푹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보지 말고 말을 해.”
“드라마를 찍었다지.”
“왜. 또 뭐.”
“그 시간에 춤 연습을 하는 게 낫지 않나?”
루이스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한 숨 죽이며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족히 이미터는 넘어 보이는 담벼락에는 또 어떻게 올라갔는지, 멋들어지게 앉아있는 게 꼭 고양이 같았다. 사납고, 성질 더럽고, 예쁘긴 또 엄청 예쁜 고양이.
“그러니까, 난 아이돌이 될 생각이 없대도.”
“흥. 이미 아이돌인데 어떻게 다시 아이돌이 된다는 거지?”
여전히 말이 안 통한다. 기인은 재능이 특출나게 뛰어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라던 말을 떠올린 루이스는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사이 벨져가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놀란 나머지 무심코 뒷걸음질 친 루이스에게 가볍게 착지한 벨져가 다가왔다. 정말 고양이라도 되는지 그 높이에서 뛰어내렸으면서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는 게 여러모로 대단했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루이스의 앞에 선 벨져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귀한 도련님 아니랄까봐 잘 생기긴 또 무지하게 잘생겼다.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역시, 화려한 미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름답다는 건 같다.
벨져의 얼굴은 취향을 가리지 않고 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니 매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어도 이렇게 웃으면, 순간 가슴이 떨리는 것도 당연하다. 하는 행동이며 말이 다 재수 없어서 그렇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고 우아한 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에게 도취된, 얄밉기 그지없는 오만한 미소도 어쩜 이렇게 근사할 수 있는지. 루이스는 신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바로 따라와 거리를 좁히는 벨져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됐지만 그래도 불편하다고 의사 표현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왜.”
“곧 세시가 된다.”
“어. 알아.”
“기대되지 않나?”
“전혀?”
“이 내가, 참여하는데도?”
“사람 많이 오겠네.”
안 그래도 랭킹을 달리는 팬은 많고, 그들을 수용할 자리는 좁아서 다들 힘들어하는데 이번에도 벨져가 참전하면 팬들의 의욕이 꺾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벨져가 나오지 않는 이벤트 기간에도 '벨져님이 좋아하니까'라는 말로 '트릭스타'의 무대를 채우던 팬들을 떠오른 탓이었다.
야광봉 불빛보다 더 빛나는 눈이 과연 그의 팬답다 싶었다. 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같이 랭킹을 달리는 팬들이 어찌나 힘겨워 하던지, '트릭스타'의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팬은 다 팬이니까 이렇게 말하면 벨져의 '나이츠'와 자신의 '트릭스타'를 같이 좋아해주는 팬들에게는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첫 패배가 충격적이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벨져의 집착은 라이벌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라이벌이라기보다는 까의 성향이 짙은 빠에 가깝다고 할까.
루이스는 두 달 전 '트릭스타'의 이벤트 랭킹에 벨져가 내내 1위를 지키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가, 눈앞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루이스에게 벨져는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어려웠다. 다른 기인들도 있지만, 그 쪽보다 벨져를 상대하는 게 수 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미련하긴. 대화의 기본은 눈을 맞추는 거다.”
“자. 됐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든 채 내려다보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얼굴만 아니었어도 더 말을 섞지 않고 그냥 무시했을 텐데.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이 목울대를 울리며 넘어갔다. 얼굴이, 가깝다.
“저, 나, 그 라이브 준비도 해야 하고...!”
“흥. 네가 내게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
“그냥 내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안 되는 거야?”
“뭐, 별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트릭스타' 팬들이, 내 팬들을 불편해한다지.”
별 거 아니라더니, 내심 신경 쓰고 있던 핵심을 쿡 찌른다.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벨져를 바라봤다. 이 고고한 귀족 도련님께서는 그 역시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팬을, 그것도 타팬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그냥 받아들여라.”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감동을 했을 지도 모르는데, 결국 이 모양이다. 기대한 자기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루이스는 지난 이벤트 내내 1위를 차지한 벨져가 상태 메시지에 '네 첫 번째는 나니까.'라고 적어놓은 걸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기대도 안 했다.”
“무슨 소리지?”
작게 내뱉은 혼잣말에도 멋진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루이스는 시시콜콜 제 일에 간섭하는 벨져에게 신경 끄라고 말하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고 벤치에 앉았다.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우두커니 서서 벤치를 내려다보기에 루이스는 교복 마이를 벗어 벨져가 앉을 수 있도록 깔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루이스의 옷을 깔고 앉은 벨져가 다리를 꼬았다. 신은 정말 불공평해서, 외모도 재능도 머리도 팬도 돈도 다 가진 놈이 다리까지 길다. 루이스는 쭉 뻗은 다리를 보다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너울져 흔들리는 모양이 은실다발을 널어놓은 것 같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벨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시선만으로 떨쳐내기에 벨져의 시선은 늘 제게 붙어 떨어질 줄 몰라서,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루이스의 손을 멈추지 못했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릿결에 감탄하는 사이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서늘하고 가느다란 그 촉감은 루이스의 삶에서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비싸고, 아름답고, 좋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 그런.
왠지 간지럽고 쑥스러워진 루이스는 다시 머리카락을 만지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렸다. 밀어내지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줄곧 저를 바라보는 벨져의 눈에는 어김없이 자신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 말라는 말보다 침묵이 더 어색해 손을 내리려는데 벨져가 길게 콧소리를 내더니 루이스의 반대편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덕분에 벨져의 등과 머리를 마주하게 된 루이스는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마음껏 해도 좋다는 듯이 몸을 돌려준 의도를 모르겠다. 만져도 된다는 건지, 아니면 토라진 것인지 몰라 망설이는데 벨져가 흘긋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하고 있나.”
“으, 응?”
“줘도 못 먹는 멍청이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만.”
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 벨져에 울컥 짜증이 올라왔지만 루이스는 차마 예쁜 뒤통수를 쥐어박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신 예쁜 머리카락에 조심조심 손을 뻗어 어느 실보다 곱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다 어릴 적 고아원의 동생들에게 해주던 것처럼 한 줌을 쥐고 세 갈래로 나누어 땋기 시작했다. 늘 관리를 하는 머리카락은 한 번 꼬이는 일도 없이 비단실을 땋는 것처럼 사르르 거렸다.
입만 열지 않으면 이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는데. 라이브를 앞두고 저도 모르게 해버린 긴장이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람에 흔들려 피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간지럽고, 얌전하게 제 손길을 받고 있는 벨져가 새삼 예뻐 보였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이러고 있으니 정말 행복해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공들여 한 가닥을 땋고 손을 놓자 고정되지 않은 끄트머리가 슬며시 풀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등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니 벨져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미안.”
양손을 어깨 위로 들고 말하자 눈살을 찌푸리던 벨져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예쁜 뒤통수를 마주하게 된 루이스는 숨죽여 웃고, 벨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드르르륵,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면 이 귀여운 소꿉장난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세 시를 알리는 알람에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났다.
“먼저 가볼게.”
“그래.”
“나중에 봐!”
알람을 끄자마자 바로 걸려오는 토마스의 전화를 받으며, 루이스는 무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살랑 불어오는 바람. 흔들리는 네 머리카락이 나를 흔들고 네 모습이 눈에 번져가.
노린 건 아닌데 꼭 누구에게 하는 말 같다. 이번 신곡의 제 파트 가사를 읊조리며 한 사람을 떠올리고,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1. (0) | 2016.10.06 |
---|---|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무희
제 사랑 소찌님께 드립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뜨면, 햇살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남자가 한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흘러내린 은발과 우아한 얼굴, 탄탄한 몸이 어우러져 내뿜는 아름다움이란 감히 인간에 비할 게 아니다. 그 완벽한 남자를 눈앞에 둔 평범한 사람, 루이스는 오늘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비볐다.
“일어났으면 깨우지.”
“잘 자길래.”
“그럼 커튼이라도 쳐주던가....”
투덜거리며 목을 벅벅 긁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벨져가 루이스의 손이 다녀간 자리에 입술을 맞췄다. 어젯밤 그렇게 물고 빨아댔으니 분명 붉게 잇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다. 굳이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뻔했다.
입을 맞추더니 은근슬쩍 손이 허리를 더듬는다. 아무리 벨져가 예쁘다지만 밤새 시달린 것도 모자라 아침부터 달라붙으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저리 가라고 손을 내젓자 손을 잡고 손바닥이며 손목 안쪽을 진득하게 핥고 깨무는데, 채 잠이 다 깨지도 않은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으..., 그만해. 해가 벌써 중천에 떴어. 일어나.”
“우리가 어제 막 돌아왔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래도 인사는 드리고, 읏. 하지 말라니깐.”
짜증과 함께 인상을 쓰자 벨져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팽 토라졌다. 루이스는 못 이긴 척 벨져에게 키스하고 몸을 일으켰다. 얇은 이불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위로 미끄러지며 내려가고, 대충 벗어던진 옷을 집어 들었다. 흰 몸에 걸친 옷은 하렘의 여인네들이 입을 법한 하늘하늘한 옷이 아닌 평범한 무명옷이었다.
흰 무명천으로 몸을 가리고, 허리끈을 조인 루이스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달빛이 비칠 정도로 얇은 장막을 걷었다. 동이 튼 뒤로 줄곧 주인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시종들이 세숫물이며 수건, 향유와 옷을 들고 들어오고 벨져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을 걸 그랬어.”
“그럼 네가 좋아하는 비단옷도 못 입을 걸. 하루에도 몇 벌씩 갈아입으면서. 이번 달에만 비단 값으로 얼마를 썼는지 알기나 해?”
“내가 알 반가?”
옷을 입히는 시종들이 분주히 손을 놀리는 사이 벨져가 돌아보며 오만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지독히도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깟 비단 몇 필 쯤이야 얼만든지 써도 아깝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사치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아. 그럼 하렘에 내리는 거라도 줄여. 한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면서. 기껏 잠자리 날개같은 비단옷을 입어도 네가 안 가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번엔 얼굴이라도 좀 비춰.”
아침부터 잔소리를 한다고 뭐라 할 줄 알았더니, 벨져가 피식 웃으며 다가와 루이스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하렘에 가라고 닥달을 할 때면 짜증을 내거나 토라지는 것과는 영 다른 반응이었다.
“네가 그렇게 차려입고 내원에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갈 거다.”
“웃기지 마.”
“진심이다만.”
“그럼 당장 국정이 엉망이 될걸.”
“그래서 널 거기 앉히는 대신 이렇게 안고 있지 않나.”
뒤에서 루이스를 끌어안은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가슴팍을 더듬었다. 어젯밤 그렇게 만져놓고 또, 그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옷감에 쓸려 곤두서있던 유두에 신경이 몰렸다. 튀어 나오려는 비음을 누르고 째려보자 벨져가 씩 웃으며 입술을 맞추더니 루이스의 가슴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이번에 하사받은 비단은, 전부 널 주마.”
“줘도 쓸 데 없거든? 네 옷이나 해 입어.”
“투명한 달빛같아서, 걸쳐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최상품이라더군.”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남의 얘기는 한 마디도 들어먹질 않는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고 뒤에서 저를 끌어안은 벨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이미 네 옷을 만들라고 시켰다.”
“...왠지 불길한데.”
“그걸 받자마자, 네 생각이 나더군. 꼭 입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하면 설레는 줄 아는 걸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안타깝게도 정답이다. 루이스는 터질 것 같은 심장소리가 부디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심호흡했다. 가슴을 덮었던 벨져의 손이 빠져나가고,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가라앉았다.
“쉬고 있어라. 약 바르고.”
“다녀와.”
“금방 다녀오겠다.”
제법 자상하게 입을 맞춘 벨져가 원정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침실을 나서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침실에 홀로 남은 루이스는 도로 침대 위에 풀썩 누워 이불을 끌어 당겼다.
벨져가 최근 몇 년간 원정을 다니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느라 궁에 붙어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돌아왔는데도 하렘에 가지 않는 건 문제다. 다른 것보다 후계자 문제나, 저마다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부인이며 첩들의 가문에도 눈치가 보일 때였다.
남자, 그것도 근본도 없는 고아에 노예 출신이 벨져 홀든의 제 1 책사라는 것만 해도 말이 많은데 거기에 실은 그 천것이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지면 곤란한 건 어디까지나 벨져다. 물론 지금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그래도 그동안은 원정에 전장에 나가니 그럴 수도 있다고 눈 가리고 아웅이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원정을 끝으로 벨져는 더이상 원정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밖으로 돈 시간보다 더, 그의 무공은 혁혁했고, 다이무스와 황제 자리를 두고 경합을 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영락없이 낀 루이스는 어느 쪽이 되어도 곤란했다.
노예로 팔려가던 루이스를 거둬준 건 어디까지나 그 날 제가 팔리는 도시를 정복한 다이무스다. 얼굴이 희고 곱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손님을 받는 교육을 받아 비싼 값에 팔릴 예정이었던 루이스는, 노예 상인이 마지막에 내놓기 위해 준비한 상품이었다.
하루, 한 시간, 단 십 분만 늦었어도 그대로 이름 모를 부자에게 팔려 성노예로 부려지다 질리면 사창가에 팔릴 운명을 바꾼 건 다름아닌 다이무스 홀든이다. 출신도 없는 노예를 거둔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본래 시장에 팔린 용도로 쓰는 대신 시중을 들게 했다. 한 발 먼저 물을 준비하고, 날씨나 기분에 맞춰 다른 차를 대접하는 사소한 것들을 눈여겨본 다이무스가 글을 가르쳤고, 루이스는 그제서야 제가 꽤 영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면밀히 주인을 살피고 돌보는 것도 여느 노련한 시종 못지 않지만, 루이스의 진정한 가치는 중요한 순간에 내놓는 책략과 전장과 군사를 휘어잡는 데 있었다. 그걸 알아본 다이무스는 곧 루이스를 옆에 끼고 다녔고, 그게 한창 다이무스의 것은 죄다 뺏으려던 벨져의 눈에 띠었다.
그때는 정말, 이렇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루이스는 거진 십년이 넘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처음 궁에서 만난 벨져는 사납고, 예쁘고, 성질 못된 흰 고양이 같았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건 덤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바람에 다이무스가 곤란해진 것도 한두번이 아니고, 루이스가 시달린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눈이 맞아버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풀 수 없는 난제다. 루이스는 주인 없는 베개를 끌어안고 코를 묻은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가 쓰는 향이 나서, 꼭 지금도 옆에 있는 것 같다. 앞으론 이렇게 혼자 보내는 밤이, 낮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동안 누린 게 있으니 이제는 기다림과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했다.
하렘의 여인들은 전부 그렇게 살고 있다. 조금 울적해진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엔 머리론 알아도 가슴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쓸데없는 생각일랑 나중에 하자는 생각으로 도로 눈을 감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인사만 하고 온다는 것이 얘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황후 궁에서 점심까지 먹고, 잠깐 얘기만 나눈다는 게 길어져 해가 지고 연회가 열렸다. 이럴 줄 알고 어젯밤에 욕심껏 그만 하자는 사람을 붙잡고 해댔지만 얼굴 볼 짬도 안 날 줄이야. 옷을 갈아입겠다는 핑계로 돌아가려 해도 옳다구나 하며 후궁들이 달려들었다.
꼼짝없이 사로잡힌 벨져는 결국 황후궁에서 옷을 갈아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어머니가 제 생각을 하며 만들었다는 옷은 물론 흠 잡을 곳이 없지만, 아침부터 내내 혼자 있을 루이스가 마음에 걸려 연회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 마침내 연회가 끝나고, 세력가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는 일을 대충 마무리 지은 벨져는 바로 루이스가 기다리는 침실로 향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절로 걸음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시종들을 물리고, 세차게 문을 연 벨져는 불도 켜지 않은 휑한 침실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불을 밝히지 않은 건 시종들이 일을 게을리 했다는 증거다. 당장 매질을 해도 시원치 않지만 그런 것쯤은 루이스를 찾아 밤을 보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정원 쪽 문에서 달빛이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기에 벨져는 바깥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연회가 끝났다는 걸 알렸을 테니 어딜 갔더라도 지금 이 시간엔 와있어야 한다. 오늘 아침에 다른 여자를 안으라더니, 정말 숨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싫은 가정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정원 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슬쩍, 그리로 고개를 돌리자 달빛을 등진 그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창틀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늦었네.”
“...잘 어울리는군.”
루이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숙인 덕에 머리에 쓴 베일이 따라 내려오며 바람에 흔들렸다. 잠자리 날개보다 얇아, 달빛을 실로 자아내 만든 천이라더니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흰 피부가 훤히 비쳤다. 넘실거리는 베일을 들어올려 그 안에 들어가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입술로 입술을 물고, 두 사람 사이에 숨이 오갔다.
“밖에서 입을 옷은 아니더라.”
“흥. 당연하지. 그 꼴로 어딜.”
“흣. 잠깐. 그 전에.”
옷을 선물하는 건 그 옷을 벗기겠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법. 입은 줄도 모를 정도로 얇은 천 위로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가슴에 입을 맞추려는데 루이스가 벨져를 밀어냈다.
“생각을 해봤는데,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더라고.”
무엇을. 이라 묻는 눈빛에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짚고 발끝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창틀에서 순순히 끌려오는 벨져의 품으로 안기다시피 내려간 루이스는 베일 안에서 뺨을 맞대고 속삭였다.
“기왕 이렇게 입은 김에 보여줄까 하는데....”
나긋한 목소리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보석보다 더 푸른 눈동자가 강한 열망을 품고 제게 향하는 게 기쁘지만, 지금은 입을 맞출 때가 아니었기에 루이스는 벨져를 침대에 앉히고 물러섰다.
“그래도 연습은 조금 했는데, 많이 어설플 거야. 그냥.... 그러려니 해.”
“기대되는군.”
무희나 입을 법한, 속살이 다 비치고 하늘하늘하게 넘실거리는 천에 감싸인 루이스가 맨발로 차가운 돌바닥을 딛고 섰다. 주인을 기쁘게 하는 노예의 덕목 중에는 여러가지가 있는 법이고, 높으신 분들의 노리개가 되려면 글은 몰라도 춤이나 노래는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천천히, 벨져가 없는 시간동안 연습한 동작을 되새기며 몸을 움직였다.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음악 삼아, 쏟아지는 달빛을 조명 삼아 몸이 기억하는대로 동작을 이어갔다. 유려하게, 미소를 잊지 말고, 손끝과 발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워,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추는 춤. 제게 향하는 눈빛이, 숨을 쉬는 것조차 방해가 될까 숨소리마저 죽이는 그가 집중하는 만큼 루이스도 춤을 추는데 빠져들었다.
연습할 때와 다르다. 기억을 좇는 데 급급했던 그때와 다르다. 비록 무수한 매질 끝에 겨우 몸에 새긴 춤이지만, 그때와 달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해가며, 피와 땀을 흘려서라도 배워서, 지금 이 사람에게 이 춤을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쓸모없는 일이 아니었다. 십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의미를 찾았을 뿐.
마지막 턴을 끝으로, 루이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춰섰다. 내내 힘을 준 종아리와 일자로 펴고 있었던 발목이며 팔이 저려왔다. 깊게 숨을 내쉬며 풀썩 들어올린 손을 내리자 벨져가 푹, 숨을 내쉬며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렸다.
“큼. 흠.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벌써 배운지 십년도 넘었지만, 뭐. 기왕이니까 보여주고 싶었어.”
벨져는 쑥쓰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에게 손을 뻗었다. 바로 다가와 제 무릎 위에 걸터앉는 그의 몸에서 나는 열기는 행위 중의 온도를 닮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벨져는 루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일단 좀 씻고.”
“어차피 다시 이렇게 될 거다.”
“그래도, 읏. 비싼 천이라며.”
“내 제일무희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뛰어난 책략가에, 뭐 사사건건 귀찮게 굴기는 하지만 그래도.”
루이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지만 벨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기념할만한 날에는 더더욱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벨져는 천 위로 루이스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구멍을 더듬었다. 회음부를 진득하게 쓸어 올리며 시선만 올려 씩, 웃자 숨을 고르던 루이스가 확 얼굴을 붉혔다.
루이스가 제 얼굴에 약하다는 것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벨져는 가슴을 덮은 천을 위로 끌어올리는 대신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한 쪽 가슴을 입에 담았다. 다급히 어깨를 잡으며 흘리는 비음은 익히 들어본 것이다. 어떻게 만져주고, 언제 어떻게 해야 기뻐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가 이렇게 기특하게 나와 주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벨져는 얇은 비단 위로 솟는 루이스의 중심을 잡아 흔들며 엉덩이를 주물렀다.
“흥, 앗. 으읏, 벨... 흣. 이거 벗고...!”
“하, 이러려고 입힌 거다. 원하던 것 이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지.”
“익..., 너 이....”
“짜증내는 얼굴이 야하다고 얘기 했던가?”
쪽, 찡그린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웃자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프긴 하지만 그래봤자 손톱자국을 내는 앙탈 정도다. 벨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돌려 루이스를 침대 위에 눕혔다. 달빛을 받으며 춤추는 루이스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서 한시라도 빨리 그를 꿈결이 아닌 제 품에 가두고 싶었다.
“그럼 어디 오늘도 해가 뜰 때까지 해보자고.”
“이 미친 새끼야!”
“황자에게 미친 새끼라니, 춤을 춘 상으로 그 불경죄는 이번에만 특별히 넘어가주겠다.”
“....하아. 내가 미쳤지, 그래. 내가 미쳤다, 미쳤어.”
“그만. 집중하도록.”
벨져는 체념한 듯 축 늘어진 루이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의 손을 잡아 목을 안게 했다. 삐진 척을 하는 것도 귀엽다. 웃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와, 벨져는 연인을 꽉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0) | 2016.10.05 |
---|---|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이걸로 끝!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었다. 고민에 빠진 탓이었다. 밥 한 끼 정도가 뭐 대수랴 싶겠지마는, 같이 먹는 사람이 다이무스 홀든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냥 때우는 식사는 어림도 없고, 적당한 선이라고 하면 죄 데이트 코스뿐이다. 형편 상 예약제 레스토랑을 잡을 수도 없으니 도무지 어디에서 뭘 먹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챙겨준 건 고맙지만, 말 한 마디로 충분히 끝날 일이 아닌가.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그냥 상투적인 인사로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이스가 아는 다이무스 홀든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식사 한 끼는 좋든 싫든 대접해야 한다.
사실 그냥 모른 척 하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이글은 '뭐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냐. 그냥 쌩까.'라고 했지만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처지에 그게 될 리가 없다.
이제는 말투만 닮아가는 게 아니라 목소리가 자꾸만 겹치는 바람에 해야 하는 말도 헷갈리는 판국이다. 다이무스가 할 말을 제가 하질 않나, 말해놓고도 뭐가 잘못된 줄 모르다 뒤늦게 깨닫질 않나, 아주 엉망이다. 당황한 나머지 옆에 눈치를 살피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다이무스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쿡쿡 찔렸다.
역사를 읽으러 서점에 들르는 사람보다 물건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못 알아챌 법도 한데 다이무스는 조금 느릴지언정 루이스의 시선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양심이 찔리는 거라고, 전에 진 빚을 갚아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낮고 진중한 그의 목소리에 설렌다거나,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백날 생각만 해봤자 소용없지만.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고 다이무스를 등지고 섰다. 의식하지 말자. 새로 개장한 인도 음식점이 꽤 괜찮다던데. 맛에 까다로운 카리나와 본토 사람인 라즈도 호평을 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이 끝나면 꼭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을 고쳐 쥐었다.
오늘만 아홉 번째. 저를 보다 눈이 마주칠라 치면 바로 홱 돌아가 버리는 게 오늘만 꼭 아홉 번이다. 제 눈치를 보며 신경을 기울이는 그 모습이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이제 그만 뜸 들이고 말을 걸어주었으면 했다.
이번에도 아닌가. 인가 아닌가 흔들리는 것도 슬슬 지친다.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은 분명 전장에 나서는 이에겐 칭찬할만한 덕목이지만 지금은 그 신중한 성격이 꽤, 답답했다. 속 시원히 말 좀 하라던 막내의 말에 이런 식으로 동조하게 될 줄이야. 다이무스는 하루만 더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짜증을 내는 능력자의 말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봤자 소용없는 말 뿐이지만 그 역시 고객의 한 사람.
다이무스는 제게서 등지고 돌아선 그를 흘긋 바라보고, 소위 진상이라 하는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여 사업은 홀든만의 사업이 아니라, 헬리오스의 클랜사무소와 연계된 일이다. 언성을 높이며 시비를 거는 능력자를 차갑게 내려 보며, 다이무스는 이미 몇 번이고 설명한 정해진 규칙을 설명해주려 했다. 그가 들먹인 이름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연합의 영웅을 들먹이며 이따위로 나오면 연합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주고 있자니 짜증보다 피로가 몰려왔다. 그 영웅이 바로 옆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나가던 능력자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은행 앞에서 시비가 붙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연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가 엮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자 의기양양하게 언성을 높이던 그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잡았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 입에 담아도 될 이름이 따로 있다. 이따위에 검을 뽑을 필요도 없다. 다이무스는 그를 내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발끈한 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두꺼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놓으시죠.”
“넌 또 뭐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찾더니.”
엷은 쓴웃음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슬며시 흐르는 냉기에 지켜보던 갤러리도 숨을 집어삼켰다.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제 멱살을 쥔 그가 잠시 굳었다가, 마른침을 넘기며 손에 힘을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을 먹다니 방금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연합으로 가시죠.”
“뭐,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아뇨. 모르는데요.”
“뭐 이 새끼야?!”
작은 개가 크게 짖는 법이라 했던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쥐었던 손이 이번엔 루이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얼어붙었던 갤러리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멱살을 잡힌 루이스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냥 어리고 순하게만 보이는 얼굴이, 잠시 앞머리를 올린 것만으로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서점 직원 루이스 대신 영웅 루이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독서를 권하던 사람이 아니다. 눈빛만으로 공기를 얼리고, 좌중을 압도하는 그 기백은 평범한 사람이 따라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의 영웅. 루이스.
이 광장에, 이제 그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다이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하다. 공성에서 마주치더라도 가급적이면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를 그저 그런 능력자가 당해낼 리 없다.
“이거, 놓으시죠.”
“윽.... 서, 설마....”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몰라도, 사무실에 가면 당신이 어느 소속의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그의 팔을 잡은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막힘없이 흐르는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해서, 이 상황을 모르고 들으면 친절한 상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루이스의 얼굴에서 호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가운,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이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무표정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자 그가 뒷걸음질 쳤으나 루이스의 손은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숙여 다가가 아이를 대하듯 눈을 맞췄다.
“자, 잠깐. 아니,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그게....”
겁에 질린 능력자가 루이스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아무리 상대가 에이스 능력자라 한들 공석에 있으면 함부로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란 그 얕은 믿음 하나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던 자가,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빈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거리에서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러났다. 건넨 것은 아마 일종의 경고였겠지만, 어딘가 위험하고 선정적인 그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제의 능력자는 발이 언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서점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건 덤으로, 그를 바라보던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단하군.”
“별 거 아닙니다.”
“뭐라 했나.”
“그것도, 별 거 아닙니다.”
석연치 않은 대답에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지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층계참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내민 채 위의 상황을 염탐하던 드렉슬러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쏙, 아래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 상황을 지켜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회사에 가면 또 이걸로 귀찮게 굴 게 뻔하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가 있었던 층계를 노려보다가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책을 집어 든 그를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호기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지고, 덕분에 골칫거리를 하나 치운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그 자신을 위해, 연합을 위해 했다는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끼어든 이유가 듣고 싶었다.
“어째서지.”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냐고 묻는 거다.”
“...제가요?”
책을 읽는 척 하던 루이스가 손을 멈추고,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에, 어째서인지 다이무스는 조금 즐거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내려 잠시 고민하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모양이 좋은 손가락이, 일전에 몰래 맞춰본 그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그만 일전에 맛본 감촉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는 숨을 집어삼켰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가.”
“경께서는 왜 제가 화를 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건....”
이번에 말끝을 흐린 건 다이무스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예뻐서,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망설이는 중에 루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은 초승달처럼 얄쌍하게 눈을 휘며 짓는 미소가 예뻐, 입을 다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녁을 함께 하며 얘기하도록 하지. 본의 아니게 수고를 끼쳤군.”
“아, 아닙니다. 그리고 식사라면 지난번에....”
금세 당황하는 루이스의 반응에 이번엔 다이무스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무심코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다이무스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잡아먹지 않는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새로 생긴 인도 음식점이 괜찮다더군. 혹시 그쪽 음식은 별로인가?”
“아, 네.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당혹이 가시고, 안도가 대신 묘한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다이무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요즘 부쩍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던 아이들의 말이 떠올리고 흘긋, 그 사소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을 바라봤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덴 것처럼 피해버렸지만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신호다.
거리는 천천히 좁혀 가면 되는 것이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목소리가 섞이고 겹친다. 그 간지러운 울림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0) | 2016.10.03 |
---|---|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취중진담
밤늦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급히 달려간 디시카 근처의 한 펍은 좋게 말해도 품위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린 건 공간 자체에 짙게 밴 술 냄새와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거나하게 취해 널브러진 사람들 탓이 더 컸다. 가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벨져는 바닥에, 테이블에 뻗은 연합의 능력자들을 지나 제게 손을 흔드는 혈육에게 다가갔다.
오후에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다 헤어진 연인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엎드려 자고 있는 걸 보는 건, 펍의 공기와 분위기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대놓고 인상을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벨져는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머리카락과 바에 달라붙다시피 한 등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상황을 방관한 것도 모자라 새벽에 저를 불러낸 녀석을 쏘아봤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잘못 없어. 멀쩡한 것 보면 몰라? 난 뒤처리반이라고!”
“용건만.”
“뒤처리반이 할 일이 다 그렇지, 뭐. 데려가.”
이글은 양 손을 어깨 높이로 들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등받이가 없는 원형 의자를 빙글 돌렸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며 발뺌하는 녀석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팔짱을 끼자 곧 이글이 다시 의자를 돌려 벨져를 마주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쉰 이글은 그 옆에 뻗은 사람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계속 형 찾더라.”
저를 찾더라는 말에 벨져는 잠시 이글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내렸다. 바와 한 몸이라도 될 것처럼 엎드린 사람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김없이 망할 후드를 입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더럽게 손이 많이 간다. 벨져는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과 함께 팔짱 낀 팔을 풀어 완전히 뻗은 그녀를 일으켰다. 축 늘어져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웅얼거리며 감았던 눈을 뜨는데, 평소의 총기와 서늘한 눈빛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흐리멍텅했다. 거기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풍기는 술 냄새는 덤.
그녀, 그러니까 벨져의 연인이자 연합의 영웅님께서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졸리고 취한 와중에도 눈앞의 사람을 확인하려 눈을 깜빡이다가 배시시, 이런 지저분한 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치는데, 이것만 봐도 얼마나 마셔댔는지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으응, 벨뎌어…….”
침대에서도 가끔, 저 좋을 때나 내는 콧소리와 함께 루이스가 안겨들었다. 머리와 몸을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은 루이스의 뺨이 붉었다. 안아 올려 달라고 투정인지 술주정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는 루이스의 머리를 받치고, 벨져는 한가롭게 위스키를 마시는 이글을 바라봤다.
“아, 또 뭐어.”
“다른 말은 없었나?”
“별 얘기 안 했어. 알잖아, 우리 영웅님 취하면 자는 거. 그냥 뭐……. 형이 얼굴만 예쁜 개새끼라는 거?”
벨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집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바 위에 툭 던졌다. 이글의 손이 냉큼 지폐를 가져가고, 벨져는 계속 안아서 데려가라고 칭얼거리며 제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안 마셨어. 쌩으로 위스키 두 병? 내가 오기 전에 뻗은 모양이더라고.”
용돈을 쥐어주자 술술 잘도 나오는 증언에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뺨을 잡아 올려 눈을 맞추고, 잘도 웃음을 흘려대는 그녀를 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이게 귀여워 보이니, 정말 답이 없다.
“속이 안 좋으면 바로 말해라.”
“뭐야, 천하의 벨져 홀든 경께서 그런 허드렛일도 한단 말이야? 우리 영웅님 대단하네~. 사랑의 힘?”
“토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버릴 거다.”
“으응…….”
짓궂은 농담에 차갑게 대답하면서도,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벨져의 손은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자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진 사람의 체온과 술 냄새가 훅 끼쳤다.
“간다.”
“조심히 들어가~.”
급하게 나오느라 몰랐는데, 밤공기가 꽤 찼다. 머릿속으로 루이스의 집과 거리를 계산한 벨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디 이대로 무사히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언제 역류할지 모르는 게 바로 술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루이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벨져의 목을 끌어안은 루이스가 벨져의 가슴팍에 뺨을 부비작거렸다. 평소에 이렇게 살갑게 굴면 좋으련만, 루이스는 애정을 표현하는 데는 영 서툴렀다.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루이스는 어떨지 몰라도, 벨져에겐 루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관계가 이어질 리가 없다.
매번 싸우고 다투고 잠시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도 다 사랑하니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만나면 하나가 되기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잃어버린 반쪽.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이 짠해 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음 같아선 어디도 못 가게 잡아두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욕심이지 루이스의 행복이 될 수는 없었다. 마음껏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 사랑이 뭔지 참 어렵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벨져는 기사단 쪽 일을 하느라 잠시 오스트리아에 다녀오느라, 루이스는 연합 때문에 이 주간 얼굴 한 번 못 보다 겨우 만났는데 만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서로 언성만 높이다 헤어져서 지금 이 모양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정말 결백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다 잠시 화장실에 간 루이스를 기다리는데 예의 그 거너가 접근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뿐이면 또 모르지만, 다짜고짜 예쁜이. 시간 있어? 라고 껄렁거리면 누구라도 시비를 건다고 생각하지 작업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대체 뭐가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부분은 건드린 것인지. 물론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벨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콤플렉스 덩어리에, 한없이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 빌어먹을 총잡이가 대뜸 옆자리에 앉아 척하니 팔을 제 어깨에 얹고 쫓기고 있으니 대충 말을 맞추라고 속삭이느라 얼굴을 가까이 했으니, 뒤에서 봤으면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그 순간에 이주 만에 하는 데이트를 생각했다.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되도 않는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사람이 신경을 쓸까봐 그냥 넘기려 한 것뿐이었다. 정말로, 오늘은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재미 좋냐는 천박한 말도 참아 넘겼건만 돌아온 건 루이스의 싸늘한 냉대였다.
루이스는 잠깐이나마 글래머의 금발 미인이랑 연인 놀이라도 해서 좋았냐고 빈정거렸지만, 벨져는 정말 그 점에 대해선 티끌 하나만큼도 죄가 없었다. 금발의 미녀가 아무리 많은들 루이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 그녀가 제 편을 들기는커녕,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는 바람에 덩달아 벨져도 빈정이 상했다. 차분히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먼저 생각하기엔 지쳐있었고, 결국 벨져와 루이스는 자기 얘기만 하다 헤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떨어져있는 내내 생각했지만, 벨져는 정말 억울했다. 제 편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며 믿어주지를 않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머리가 식으면 다시 전화를 하겠거니 싶어서 잠도 설치고 기다렸는데 걸려온 전화는 취한 사람 데려가라는 전화였다.
속상하고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풀어야지, 왜 그걸 술로 푼단 말인가. 미련한 사람 같으니. 그걸 또 받자마자 달려온 자신도 미련하긴 마찬가지다. 사랑. 그래,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벨져는 루이스를 고쳐 안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이 이렇게 찬데 아직도 반팔 티셔츠에 후드 한 벌이 전부라니 이 꼴로는 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빠른 걸음으로 루이스의 집에 도착한 벨져는 문 옆 화분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잘 열리지도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고 허름한 공간에 냉기가 감돌았다. 바람만 안 분다 뿐이지 밖이나 다를 게 없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벨져는 루이스를 침대 위에 눕혔다. 내려놓자마자 칭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루이스는 후드를 벗고,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등을 더듬거리는데 한 손으론 역부족인지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벨져는 한심해 하는 대신 루이스의 손을 잡아 내리고 그녀의 등 뒤에 앉았다.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어깨끈을 내리자 한결 편해진 얼굴의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바람에 날린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 익숙해진 것인지 전보다 술 냄새가 덜했다.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벨져는 동그란 이마에 키스하며 캐미솔 아래로 브래지어를 빼냈다. 하는 김에 꽉 죄는 타이트한 청바지도 벗기려 루이스의 다리를 무릎에 얹자 루이스가 꼼지락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바지까지 벗기고 나니 루이스는 까만 캐미솔 하나에 얇은 면 팬티 한 장 차림이라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벨져…….”
“속이 안 좋으면 당장 화장실에…….”
“미안…….”
루이스는 고개를 도리 젓다가 벨져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속을 태운 게 다 부질없어지는 사과에,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벨져는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루이스를 안고 좁은 침대에 누웠다. 피부 위, 옷 위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과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벨져가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허리를 토닥이는 것처럼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안겨 이따금 얼굴을 부볐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 심장 박동만이 정적을 채웠다.
“루이스.”
“응…….”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다.”
단호한 말투와 함께 손길이 멎었다.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어쩜 이렇게 한 점 흔들림 없이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사람인지.
다시 고개를 드는 자격지심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얼굴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루이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널 사랑한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
“벨져, 난…….”
“사랑해.”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게 전부 제 탓인 것 같아서. 언젠가 이런 제게 질려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처럼 당당할 수가 없었다.
“난……. 미안. 미안해.”
곧은 시선을 피할 곳이 없어 눈을 감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밀려드는 자괴감에 숨을 집어 삼키며, 루이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네가 언젠가 날 떠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루이스. 날 봐라.”
이 남자는 한 번을 봐주는 법이 없다. 숨고, 도망가고 싶어도 언제나 이 눈빛에, 목소리에 잡히고 만다. 이번에도 벨져는 봐 줄 생각이 없었고,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하지 않는 한 이 상황이 계속될 게 분명했다. 차가운 공기를 폐에 집어넣고,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한다.”
“난...!”
“사랑한다.”
“벨져, 그만…….”
“사랑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실어, 꾹꾹 눌러 새기듯 말하는 그의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으니 그제야 벨져가 루이스의 뺨에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하는 벨져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벨져의 팔을 잡았다.
“나도.”
“사랑한다.”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도, 벨져는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했다. 벨져 홀든은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도, 쉽게 사랑을 입에 담을 사람도 아니다. 루이스는 이러는 이유가 벨져의 얼굴에 있기라도 하다는 양 벨져를 바라봤다.
“내가 널, 사랑한다.”
“...무슨 뜻이야?”
“네가 아무리 자존감이 낮고, 못났어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이 벨져 홀든이 사랑하는 건 너니까. 알겠나?”
“...뭐야, 그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지. 물론 네 모든 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계속 눈을 맞추려 밀어내던 벨져가 이번엔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완벽한 벨져 홀든 경께서는 지금 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있을 리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고, 다른 사람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니 그 시답잖은 불안과 걱정일랑 할 필요가 없다고.
참 위로에 서툰 사람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파고들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도무지 솔직하지가 못하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에 담긴 갖가지 감정과 애정은 열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을 받고 그냥 입을 다무는 건 공평하지 않다. 루이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벨져의 얼굴은 어느새 퍽 자상해져서, 덩달아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늘, 자기가 사랑받는 걸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대.”
“그렇군.”
“그러니까 나도, 아마 계속 이럴 거야. 잠깐 괜찮았다가..., 또 불안해하고.”
“그 잠깐을 늘려나가면 된다.”
“...할 수 있겠어?”
벨져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 미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벨져. 벨져 홀든이다. 난 내가 원하는 건 전부 손에 넣어. 너도 예외는 아니지.”
“대단하네.”
도망가고 숨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단단히 잡고 놔주지 않는 그가 좋아서, 루이스는 고개를 쭉 내밀어 입술을 맞췄다. 몸이 맞닿은 온기에 술이 들어간 몸이 노곤해지고, 무거운 졸음이 다시 몰려왔다.
“벨져.”
“말 하도록.”
“사랑해…….”
루이스는 벨져의 몸 위에 엎드린 채 그의 탄탄한 가슴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허리를 감싸고 머리를 토닥이던 손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 입으로 몇 번이나 한 말이고, 안 들어본 것도 아닌데 또 느낌이 달랐다. 배시시 웃더니 기력이 다했는지 그대로 잠들어버린 루이스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벨져는 품에 안은 연인을 꽉 끌어안지 않기 위해 이를 물었다.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연인의 사랑스러움이란,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다.
오늘 쌓인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다 못해 행복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꾸만 광대가 올라가고, 웃음이 나와서 벨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그 누가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간 자기 자신에 대해선 한없이 무딘 사람이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심호흡한 벨져는 이불을 끌어당겨 루이스의 등을 꼼꼼히 덮었다. 아무리 취해도 기억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니 일어나면 분명 이불을 차겠지만,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것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아무렴, 장장 이주 만에 연인을 안고 잠드는 밤인데 그쯤이야. 좁고 불편한 침대도 상관없다.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해진 벨져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기대될 따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보이스를 내주는 바람에....22
은행의 실질적인 업무는 일반 창구 업무가 끝나는 4시부터다. 헬리오스의 에이스에서 은행원의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도 딱 4시였다. 그것뿐이라면 어떻게 병행할 수 있다. 문제는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 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씩이나 되는 사람이 창구 업무를 볼 위치에 있는 건 아니지만 트와일라잇이라고 하면 내로라하는 능력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아무리 능력자 등록제가 시행되고 있고, 연합과 회사가 관리를 한다고 한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이, 그것도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를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로부터 기간을 엄수해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어느 정도 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신뢰와 정확, 냉철함을 두루 갖춘 데다 능력자들에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이미 중역에서 그들의 임무를 다하기 바빴고, 그들을 고작 대여 업무나 시킨다고 트와일라잇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몇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는 자연스럽게 다이무스에게 돌아갔다. 이 결정이 가장 효율적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일감은 줄지 않고, 시간은 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업무에 은행 지부장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업무, 거기에 장비 대여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두말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건 그것이 다이무스 홀든의 책임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홀든의 직계, 그것도 장남의 위치란 그런 것이다. 두 동생이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으나 둘 다 제 역할을 다하긴 커녕 다이무스의 속만 썩이기 바빴다. 전에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졌다면 요즘은 그냥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의 업무를 마치려면 퇴근은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이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을 하다 사무실을 나왔다. 내내 앉아서 서류를 보느라 뻐근한 목을 돌리며 서점 앞을 지나려는데 문득, 걸음이 멈췄다.
이 시간까지 뭘 하기에 아직 불이 켜져 있나 했더니, 서점 안 의자에 널브러져 잠든 그가 눈에 들어왔다. 꼭 막내 녀석 같은 포즈로, 입까지 벌리고 자는 게 퍽 안쓰럽고 귀여워 서점 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깰 줄 알았더니 꽤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을 열어둔 채 불까지 켜고 불편하게 자느니 제대로 정리하고 돌아가 쉬는 게 나을 성 싶어 다이무스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낡은 경칩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 영웅씩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방비한 건 위험하다 못해 무모한 일이다. 이글이야 천성이 그런 녀석이지만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물론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루이스에게 실례되는 일이지만. 모름지기 평소 행실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심하다는 생각 대신 같은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이 먼저 들고 만다. 그런데 왜, 그 다음엔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다이무스는 한 손에 책을 안은 채 눕다시피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숙련된 검사인만큼 발소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정장에 맞춰 신은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고작 몇 걸음.
가장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깨우기 위해 뻗은 손이 멈췄다. 몸을 뒤척이며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몸을 모로 살짝 튼 채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입술과,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고른 치아에 그만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루이스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차마 다가가질 못했다. 아마도, 그때도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눈을 감으며 살짝, 닿았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그를 깨우려던 손으로 의자를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친애의 표시로도 하는 행위지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다이무스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고 화끈거리는 목을 매만졌다. 루이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고, 입을 맞추었다는 건 자신밖에 모른다. 다이무스는 헛기침을 했다.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데서 이렇게 잠든 걸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도무지 깨어날 줄 모르는 게 반가웠다.
잠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이무스는 본래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하기 위해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루이스.”
“으응…….”
“일어나라. 돌아가서 자도록.”
몸을 웅크리며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도리 저으며 깨어나길 거부하던 루이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다시 잠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루이스가 눈을 떠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에 조금 서운해지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피해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 큼. 크흠. 그, 다이무스 경....”
“퇴근하던 중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아, 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깨우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루이스도 급히 일어나 떨어트렸던 책을 줍다가 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발 앞서 나간 다이무스의 손이 루이스의 팔을 잡은 덕에 어디 부딪치는 일은 막았지만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괜찮나?”
“...네,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입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가 눈을 내리깐 채 작게 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무척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것으로 격려를 담아 인사하고 돌아섰다.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나가는 것 역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작 몇 걸음을 옮기는 게 아쉬워진다. 다이무스. 그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했다.
그런 기대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기다린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불러 세웠다.
“저....”
기대한 것처럼 이름을 불러준 건 아니지만 충분하다. 다이무스는 한 박자 쉬고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동안 낸 목소리만큼이나,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이 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려는 것 같아서 손에 든 서류 가방을 꽉 잡았다.
“감사합니다.”
망설임 끝에 겨우 입 밖에 낸 감사가 어찌나 기특한지. 그 자신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지.”
“네? 아, 예.”
“그럼.”
“좋은 밤 되시길.”
기분 좋게 서점을 나선 다이무스는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나긋한 목소리를 되새겼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피로가 반절은 덜어진 것 같다. 고작 몇 분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다. 상투적인 인사일 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다이무스 홀든에게 오늘밤은 그저 평범한 여느 하루와 같지 않아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시상에 다이무스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가 이토록 영감을 줄 수 있을까.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사랑스러운 간질거림이 피어올랐다.
그의 말 그대로, 좋은 밤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공식에서 갑자기 보이스 업데이트를 해주는 바람에 행복에 겨워 써보았습니다... ^ㅅㅠ
아마도 3부작
블록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씩 목소리가 겹치기 마련이다. 서점과 은행 사이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법한 골목 하나가 전부였고, 한가한 시간엔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목소리를 내봤자 듣는 사람은 그와 자신 단 둘뿐일 때도 빈번했다.
그러니 말투가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이스는 요즘 선배 목소리에 단호함이 느껴져서 덜컥덜컥한다는 토마스의 말을 떠올리고 왼쪽을 흘긋거렸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원인이었다. 서점보다야 은행 업무가 많으니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더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닮아가나? 루이스는 늘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와 말투다. 책과 종이를 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많지만 그래도 기본은 장사.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미소는 기본이다. 물론 재화와 물건을 대여해주는 그에겐 필요 없는 덕목이겠지만.
루이스는 사이퍼의 역사가 기록된 책을 덮고 벽에 기대어 섰다. 영웅이 되기 이전엔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게 소원이었고,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에 아무리 박봉일지언정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지금은 형편이 조금 폈다고 해도 뭐 하나 모자란 것 없이 살아온 그와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능력자에게 물건을 빌려주던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이지만 눈이 마주쳤다. 너무 빤히 본 걸까. 민망함에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넓은 광장과, 카페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 늘 보는 풍경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무게가 느껴지는 구두소리가 다가왔다.
“무슨 용무라도 있나.”
“아, 아뇨. 아닙니다.”
설마 하니 잠깐 쳐다본 걸 가지고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다이무스의 무표정은 여전했다. 워낙에도 표정에 변화가 많지도 않고, 사사로운 일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자신에 대한 모욕,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를 그냥 지나칠 사람은 아니었다. 무례한 짓을 한 건 자신이고, 그 시선에 불쾌했다면 응당 사과를 하는 게 맞다.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다.”
그럼 왜. 라는 생각이 튀어 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 얼굴은 읽기 어렵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예측할 수가 없다. 검은 그 사람을 닮는다 했던가. 검의 궤도를 읽기 힘든 것도 그 주인을 꼭 닮았다. 침묵이 이어졌으나 다이무스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답을 못 들었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마른 침을 넘기고 솔직히 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 고작 이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걸 싱겁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데 다이무스가 말해도 좋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라, 모르겠다. 루이스는 손가락 끝으로 두꺼운 책의 표지를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제 말투가 경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막상 말해놓고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얘기를 들은 거지 정말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의식한 게 민망해 뒷목에 손을 가져가는데 다이무스가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았다 뜨는 눈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실은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군요.”
“하루에 몇 시간씩 나란히 서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그렇지요.”
“그래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말에 수긍하던 루이스는 슬그머니 목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다이무스 홀든은 좋게 말해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필요한 것만 입에 담는 과묵하고 진중한 남자가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가는 게 낯설고, 그가 하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그런 인지부조화 끝에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당장이라도 입가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얼굴이 붉군.”
뺨에 다가오는 손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빼며 뒷걸음질 치다,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뒤통수를 감싼 루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쪽팔려 죽고만 싶었다. 그냥 뛰어내릴까. 얼굴을 향해 오던 다이무스의 손이 고개를 푹 수그린 루이스의 어깨 위에 내려왔다.
“괜찮나. 꽤 세게 부딪친 것 같다만.”
“네, 괜찮, 괜찮습니다.”
그냥은 가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온 다이무스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 속에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기류가 흘렀다. 다가올 것 같은 얼굴이 다가오지 않고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회색 눈동자가 어떤 열망에 흔들린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이무스가 눈을 감으며 물러났다. 어깨를 잡았던 손이 안타깝게 떨어졌다. 미련이 잔뜩 남은 것처럼, 손바닥이 떨어지고 손가락 끝이 쇄골을 스쳤다. 어안이 벙벙했다.
“조심하도록.”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뭐였을까.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있는 은행을 등지고 서 손끝으로 입술을 덧그렸다. 닿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그랬으면 왜 밀어내지 않았을까. 그는, 다이무스는, 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것인가.
뺨에 손을 댔다. 얼음을 계속 쥐고 있었던 것처럼 손이 차가운 반면 얼굴이며 목, 귀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Notes
아픈 도련님 벨져(19)와 그 병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루이스(20)
언어의 장벽... 그것은 사퍼에게 묻는 것으로....☆
그리구 왠지 이것도 연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든....ㄷㅏ....
Day 1.
늦은 여름, 오스트리아 홀든 가의 저택엔 어김없이 햇살이 쏟아져 들었다. 짜증날 정도로 좋은 날씨에 아직 소년의 인상이 다 가시지 않은 청년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 볼 일 없는 교육수준에, 돌봐줄 사람도 없는 천애고아. 청년에게서 그나마 봐줄만한 곳이라곤 성실한 태도와 준수한 얼굴 뿐이었다.
든 것도 없는 짐가방을 가지고, 루이스는 성 같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죽하면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낼 정도일까.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저택의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건물의 외관도 그랬지만 안은 더했다. 이런 집도 이주면 익숙해지겠지만.
루이스는 앞으로 자신이 묵을 방을 둘러보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때 벗었던 모자를 내려두고 커튼을 쳤다. 식사 시간이며 생필품을 어디서 받으면 되는지, 자잘한 것들을 늘어놓는 집사를 향해, 루이스는 모두가 꺼리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은 어디에 계시죠?”
집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루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닳을대로 닳아서 감흥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청년은 차분한 무표정으로 집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비열하지도, 굽신거리지도 않는 영민한 하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집사는 흔들림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문제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명문 홀든 가의 가장 큰 고민이자, 조금 교육을 받은 것뿐인 고아 따위를 고용한 이유.
문을 두드리자 무언가 문에 맞아 깨지는 소리가 났다. 슬쩍 청년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무표정으로 서있었다. 집사는 아무 말 없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고, 청년에게 들어가보라 눈짓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문을 닫고 물러섰다.
눈 하나 깜짝 않는 게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버텨줄런지. 집사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방을 치우라고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밤중에 도망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문이 닫히고, 루이스는 슬쩍 방 안을 살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지만 성인도 아닌 아이에게 이렇게 큰 방, 거기에 욕실까지 딸려있는 큰 방이라니 과연 손 꼽히는 재력가 다웠다.
“하, 이젠 들여다 보지도 않는군.”
루이스는 허리를 숙여 하얀 도자기 파편이 깨져 나뒹구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큼직한 파편들을 모아 한 데 몰아놓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기 바쁘던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도자기보다 더 하얀, 소년인지 소녀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가 흉흉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노려봤다.
명백한 적의와 경계에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환자에 불과하다. 다만 그 환자가 상상도 못할 부자에, 권력까지 거머쥔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고, 사람을 아주 짐승같이 부릴 뿐이다.
“이렇게 물건을 던지면 다칩니다.”
“뭐야, 넌.”
“도련님의 열일곱번째 하인입니다. 아시겠지만 절 고용한 건 마님이고, 내쫓을 수 있는 것도 도련님이 아니라 마님이죠.”
“하,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루이스는 손을 털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엔 핏기가 없고, 있는 거라곤 귀족 특유의 오만과 거만, 그리고 분노 뿐이다. 그 분노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다. 그 대상이 된다는 게 더럽지만 이미 과분할 정도로 넘치는 돈을 받았다.
그 돈은 파산 직전이었던 수도원으로 갔고, 루이스는 앞으로 삼개월간 꼼짝없이 이 히스테리한 도련님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이주. 사람이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이주가 걸린다. 그게 결코 좋지 않더라도,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해준다.
“내기하시겠습니까?”
침대 위에 앉아있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결코 호의를 품지 않는 푸른 눈동자에, 루이스는 담담히 말을 이으며 다가갔다.
“제가 먼저 도망갈지, 아니면 도련님이 절 쫓아내는 게 먼저인지.”
“내가 얻는 게 뭐지?”
“글쎄요, 승리? 도취감? 뭐. 십 분도 채 안 가겠지만.”
“원래 말을 그딴 식으로 하나?”
“뭐, 도련님께서 공손하게 말씀하시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하인 치고 주제 넘은 발언이지만 이 방에는 그와 루이스 단 둘 뿐이었다. 앞으로 더한 것도 볼테니 거리낄 것도 없다. 간병인이며 하녀, 내로라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붙여도 채 일주일을 못 넘기고 도망치고 만다는 도련님이다.
밖에 떠도는 소문은 그렇다 쳐도, 집안 사람들까지 그의 호전되지 않는 병세와 신경질에 진력이 났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게 더 환자를 무력하게 만들고, 무력감은 곧 독이 된다. 열다섯까지만 해도 뛰어난 재능으로 촉망받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응당 화가 날 테고, 그의 형제들을 보면 자신의 것이었던 것이 떠올라 상실감과 분노가 끓어오르겠지.
“흥. 시궁창을 구르던 쥐새끼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길길이 날뛸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싸늘한 눈빛을 한 번 주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조롱 다음은 무시인가. 루이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벨져에게 다가갔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을 잡자 벨져가 손을 쳐냈다. 발끈해서 노려보는 그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고, 손등과 손바닥을 살핀 뒤 놓았다. 검을 잡았다던 손은 생각한 것보다 딱딱하고 차가워서 시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상처는 없군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도자기나 유리는 던지는 중에도 깨질 수 있으니까.”
“너....”
“손목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당혹, 혹은 짜증,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무언가로 얼룩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강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도자기 파편을 치우던 하녀가 움찔 놀라 루이스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친 루이스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어서 나가보라 눈짓했다. 침대에서 사는 것 치고 손이 맵다.
화끈거리는 뺨 대신, 루이스는 방금 제 뺨을 친 손을 잡았다. 발갛게 부은 손바닥을 확인하려는데 그의 손이 다시 날아들었다. 맞아주는 대신 손목을 잡아챈 루이스는 그를 내려다 보며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두 사람의 힘으로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련님. 이거 내리시죠.”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지 알아?”
“때리면, 그럼 기분이 좀 풀립니까? 아닐걸요.”
손을 놓자 다시 한 번 고개가 돌아갔다. 기왕이면 다른 쪽으로 때리던가. 그래도 양 쪽 볼이 퉁퉁 부은 채 흉한 몰골로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인 일이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도련님과 지내는 일은 더 고될 듯 했다.
“얼마든지 해보시죠.”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전 뭔가를 믿는다는 것에 회의적인 편인데요.”
“세 치 혀로 농간을 부릴 셈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걸.”
“앞으로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 전 말이 많은 편이 아닙니다.”
루이스는 목에 맨 타이를 풀고 하녀가 남기고 간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깨진 파편을 정리하고 있으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일어나는 대신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내기를 하자고 했지. 좋아. 받아들이겠어. 대신 조건이 있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 마주한 얼굴이 진지했다. 오가는 시선과 이어지는 침묵 속에 그가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지면, 평생 내 밑에서 일하도록.”
“안정적인 직업 제안 같은데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지.”
“그야 두고 볼 일이죠.”
“흥. 커튼부터 쳐. 빌어먹을 햇빛.”
그, 벨져 홀든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베개에 몸을 기댔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동작에 루이스는 내심 감탄하며 커튼을 쳤다. 얇은 여름 커튼 뿐인 제 방과 달리 얇은 커튼 옆에 두꺼운 커튼이 한 겹 더 붙어있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햇빛이 비치지 않게 커튼을 치고, 방 안에 있던 물병을 집어들었다. 옆에 놓여있는 수건에 물을 적셔 그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지 않았을 뿐 편안하게 누워있는 벨져의 손을 잡아 살짝 부은 손에 적신 수건을 갖다 댔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파편을 만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손을 적시고 호호 불어가며 식히는 동안 벨져는 손을 뿌리치지도 빼내지도 않았다. 사람을 부리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잘한 일 따윈 제 손으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가늘고 흰 손을 식히고 나서야 제가 그 사이 무릎을 꿇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친다.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손을 놓았다. 내내 내려다 본 건 자신일 텐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올려다 본 것만 같다. 루이스는 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서 물수건에 남은 물을 짜고 거울 너머로 흘긋 그를 바라봤다. 그 역시 자신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어 다시 눈이 마주쳤다.
숨 쉬기도 힘든 무거운 공기 속에 루이스는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필요해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타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루이스는 수건을 내려놓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가만히 앉아 눈을 살짝 내리 깔고, 손을 다리 위에 얹었다. 부르면 언제든 답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는 것도 하인의 일 중 하나다. 앞으로는 시간을 죽일 책이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구부정하게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이제 겨우 만난 것뿐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Day 2.
일 없이 가만히 있는 동안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건 좋은데 성질이 사나운 것 같다. 정말 예쁘다. 씻기는 동안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게 고역이었다
Day 3.
우리 도련님은 모시기 정말 힘든 분이다. 왜 다들 못 버티고 나갔는지 알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벨져가 예쁘다는 것이다. 돈때문에 하는 일이긴 하지만 사나흘이면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은데 그 얼굴을 보면 그래도 조금 참을만 하다.
Day 4.
어제는 책을 읽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더니 오늘은 또 괴테를 읽어달라신다. 내일부터는 손에 집히는 반경에 약통 외에는 두지 말아야겠다. 어제는 책에 맞았는데 오늘은 찻잔이 날아왔다. 맞진 않았지만 뭔가를 던지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신호다. 스케치용 연필이야 맞아도 주우면 그만이지만.
Day 5.
신경질과 짜증을 받아주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정신도 쉽게 지치기 마련이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
Day 7
일주일째다. 어제는 일기를 쓸 짬이 없었다.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들었다. 지금은 수면제와 진정제를 먹고 자고 있지만, 솔직히 이 일을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Day 10
하필 오른 손을 다치는 바람에 펜을 잡기 힘들다
Day 11
마님과 얘기를 나눴다 벨져의 상태가 부쩍 좋아보인다고 한다. 어디가 좋은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벨져는 마님을 닮았다. 주인어른은 뵌 적이 없다.
Day 12
노크를 깜빡했는데 그냥 한 번 슥 쳐다보는 걸로 끝났다 지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아름답다
Day 13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에 하인들이 수채 물감이며 유화 물감이며 캔버스를 날라다 내 방에 가져다 놓았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지만 착잡하다 벨져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한다 꽃을 보고 싶대서 꺾어온 장미를 병째 내던졌다. 손질이 다 되지 않은 장미 가시에 찔려서 그랬다고 하는데 변명인지 설명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어달라기에 빗질을 했는데 바로 짜증을 내며 꺼지라고 했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머리 빗는 것도 배워야겠다
Day 14
씻으면서 봤더니 몸에 멍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얻어맞는 것보단 덜하다. 오늘은 점심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안 먹으려는 걸 겨우겨우 달래서 한 스푼씩 떠먹였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벨져는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순수한 웃음이 아니라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보단 낫다 약을 안 먹는다고 뻗대기에 꿀을 잔뜩 넣은 차에 타서 먹였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Day 15.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이 주가 지났다. 까칠하고 까다로운데다 신경질적인 도련님과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깨지고 부서진 집기가 몇, 그 바람에 생긴 상처가 또 얼마쯤. 홀든 가의 하인들은 그래도 다른 도련님들이 안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루이스를 위로했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딱 이주가 걸린다. 그 시간은 지났고, 루이스는 벨져의 화법과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그의 변덕에 익숙해졌다. 그 역시 루이스에게 익숙해졌는지 노크 없이 방을 드나들어도 눈총을 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면 벨져는 일어나 피아노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책을 읽는 건 지루해 하기에 그럼 체스라도 두겠냐고 한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통산 전적 24승 23패. 짜증과 신경질로 무장하고 별 것도 아닌 걸 트집 잡아 시비를 걸던 벨져가 조용해지는 건 그 때와 잘 때 뿐이었다.
잠들면 그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가장 반짝일 시간에 이렇게 침대에 박혀 지내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의 수발을 드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지만. 이래서 돈이 좋다. 귀찮고 성가신 일을 미루고도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니까. 돈이란, 재물과 권력이란 일단 가지고 보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자신을 도닥였다. 벨져는 오늘도 어김없이 까다롭게 이 옷 저 옷을 벗었다 입길 반복했고, 벨져가 그나마 낫다고 하며 거울에 그의 몸을 비춰 볼 땐 녹초가 되어 찬 물을 들이켰다.
오늘은 산책을 가겠다며 나가기도 전에 체력을 뺀 장본인은 아주 큰 마음을 먹어주신 걸 감사히 여기라는 듯 뻐겨댔다. 그것 참 아주 감사한 일이네요. 라고 빈정거리지 않는 건 기특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쨌거나 마님은 벨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며 기뻐하고 있었고, 집사는 새로 하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홀든 저택의 사람들은 루이스가 떠나기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벨져조차도.
첫날 이후로 루이스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필요할 때 손발이 되어주고, 자잘한 일을 처리하고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루이스는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그만두고, 왜 밤중에 도망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아냥과, 아픈 구석을 쿡쿡 찌르는 날카로운 말투, 거기에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모욕을 주는 것까지.
벨져는 특권층이었고, 그가 가진 것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와 하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와 벨져의 태도가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그의 말이 무조건 맞는 척을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거리의 고아로 자라 온갖 것들을 보고 자란 자신도 가끔 울컥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는 주방에서 챙겨준 피크닉 용 도시락과 벨져의 약, 돗자리를 챙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양산까지 챙기고 나서야 벨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제 손으로 입히며 보긴 했지만 일곱 번이나 갈아입은 흰 셔츠 위에 감색 조끼, 베이지색 면 바지가 퍽 잘 어울렸다.
다른 하인 없이 단 둘이,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세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고, 벨져는 뒷짐을 진 채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벨져의 걸음이 멈추고, 루이스도 따라서 멈춰 섰다. 탐스럽게 핀 꽃을, 와인 잔을 들듯이 잡은 벨져는 부쩍 지쳐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쉬어 가자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푹, 숨을 내쉬며 꽃을 놓았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나?”
“아니오. 꽃은 잘 모릅니다.”
“...그래. 그렇군.”
“조금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들은 적이 없군.”
“아.”
루이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주 하고도 하루가 되도록 이름도 몰랐다 말인가.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루이스는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너라고 부르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루이스가 입을 다문 동안에도 벨져는 재촉하는 일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순순히 늦은 답을 내놓았다.
“루이스. 루이스입니다.”
“...격이 떨어지는 이름이군.”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도 아니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벨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가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해하며 홱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걷는데, 여전히 그 변덕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Day 16
어제 산책을 하고 온 뒤로 벨져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는다 헐레벌떡 가보면 그냥. 이라고 한다 내 이름에 노이로제가 걸릴지도 모르겠다 빗질하는 건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
Day 17
벨져가 자고 있다 하루밖에 안 됐는데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자다가도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깜짝깜짝 놀란다.... 여전히 잘 때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다
Day 18
차에 약을 타는 걸 들켰다 앞으론 어떻게 먹여야할까 길길이 날뛰는 벨져를 진정시키느라 펜을 들 힘이 없다
Day 19
큰일났다 아무래도 잠깐 존 것 같다 아닌 척 펜을 들었는데 벨져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무슨 말이 쏟아질지 안 봐도 뻔하다 꽃이라도 꺾어와야 할까
다행이다. 오늘의 빗질은 통과인 것 같다 머리카락이 가늘고 결이 좋아서 꼭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 그리고 씻길 때마다 생각한 거지만 정말 피부가 희고 깨끗하다 전에 생긴 상처인지, 오래된 흉터 몇개가 있는 게 아까울 뿐이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Day 20
오늘은 비가 와서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려도 벨져는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기에 다가가서 손을 잡았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머리를 기대왔다 창문을 닫는 대신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금은 자고 있다 일어나면 따뜻한 거라도 먹여야겠다
Day 21
벨져가 감기에 걸렸다 의사가 다녀 갔다
Day 22
열이 도통 내려가지 않아서 밤새 돌봤다 열에 시달리는 내내 내 손과 소매를 잡는 바람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열이 내려서 잘 자고 있다
Day 23
의사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자 벨져는 그딴 건 쓸모가 없다며 짜증을 냈다
Day 24
벨져가 마님과 산책을 나갔다 아무래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돌아와서 다시 열이 오를까 걱정이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제 영원한 레이디 아씨님께 드립니다...☆
“네. 접니다.”
“잘 들어갔나.”
“네. 아무렴요.”
“그래. 잘 자라. 사랑한다.”
“네. 저도요.”
액정에 뜨는 익숙한 이름에, 정해진 수순으로 흐르는 대화.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권태기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기다림에 조금씩 지치고, 끝내는 화를 낼 것도 없이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얼굴을 본 지 일 억 년쯤 된 것 같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가끔 하는 통화가 전부라는 게 씁쓸할 뿐이다.
이러다 헤어지는 걸까. 루이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침대에 앉았다. 솔직히, 지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우리 형이랑 사귀면 금세 나가떨어질 거라던 이글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한숨과 함께 침대에 누운 루이스는 찬찬히 머릿속에 집어넣은 시나리오를 되새겼다. 벨져는 배우로도 유능했지만, 감독이 더 적성에 맞는지 아직 젊은데도 휙 진로를 틀어서 지금은 메가폰을 잡고 있었다. 쉽사리 오케이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같은 씬을 다섯 번쯤 찍는 건 예사였다.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형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작업보다 지치는 건 사실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첫 번째 영화에 이어 두 번째 영화에도 주인공을 맡았다. 다이무스는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 번 질투나 실컷 해보란 심산으로 회사로 들어온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는 질투는 커녕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원거리 연애도,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루이스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별 네 개짜리 호텔답게 떡하니 들어있는 와인을 꺼내 잔을 두 개 가지고 성큼 방을 나섰다.
문을 두드리자 벨져가 문을 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루이스는 당당하게 벨져의 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뭐냐.”
“술 한 잔 하자고.”
“꺼져.”
“이러고?”
“그걸 아는 새끼가 이래?”
벨져는 인상을 쓰며 맞은편에 앉았다.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 한 장 달랑 걸친 채 슬리퍼를 신고 야밤에 감독의 방으로 들이닥친 주연 배우. 어디 잡히기라도 하면 그 날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다.
잔에 싸구려 와인을 따르는 루이스를 쏘아보던 벨져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기분이 안 좋으면 혼자 퍼마시고 잘 것이지, 왜 저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술만 마실 거라면 그렇게 싸고도는 후배 배우도 있다. 벨져는 혀를 찼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있어야 마셔?”
“내일도 촬영이 있다는 건 아나?”
“그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루이스는 눈만 올려 뜨며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풍류 없는 놈. 하, 실소를 흘리자 루이스가 잔을 내려놓았다.
“찍을게.”
무엇을. 벨져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루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싫으면 말고.”
“안 한다고 하지나 마라.”
어깨를 으쓱인 루이스가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우수에 젖은 듯, 서늘한 무표정이 당장 카메라에 담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야릇한 분위기 대신 긴장감을 더하는 게, 딱 벨져가 원하던 비주얼 그 자체였다. 벨져는 머릿속으로 촬영 계획과 일정을 수정하며 루이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별 일이군. 절대 안 벗는다고 그렇게 학을 떼더니.”
“그럴 일이 생겼거든.”
“형아?”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에 벨져는 확신했다.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녀석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쥐고 흔드는 건 다름 아닌 제 형이었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젓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턱을 괬다.
“그러게 그냥 스폰만 받고 끝내지 그랬나.”
“다이무스 홀든한테 그게 돼?”
“못할 것도 없지.”
벨져는 신이 나 웃음을 머금고 와인 잔을 들었다. 가져온 게 겨우 호텔에 비치된 싸구려 와인이라니, 하여간 멋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뱉었을 와인을 마시며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덕분에 이를 악물고 포기한 누드씬도 생겼겠다, 배우의 감정도 딱 역할에 이입되는 게 감독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별로지만, 배우 루이스는 벨져의 심미안을 채우다 못해 탐미에 대한 욕구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은 잘 풀리지 않는 연애사업에 심란한 나머지 어떻게 이용해보려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징그러운 커플의 고난과 주연 배우의 누드씬이 반갑기만 했다.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주고 누드씬. 이 정도면 완전 땡큐다. 짜증나는 연애 상담도, 이 조건이면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내가 질렸나?”
“그럴 리가.”
“...어차피 청소년 관람 불가인 거, 야하게 찍자. 할 수 있지?”
“호오. 감당할 자신은 있고?”
“운동할게.”
맡은 역에 충실 하느라 원래 체중에서 5킬로그램이나 빼놓고, 자진해서 이렇게 나와 주니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다. 벨져는 여유롭게 등을 의자에 기대며 가운을 벗어보라 손짓했다. 날카롭게 눈을 뜨면서도 잔을 놓고 일어난 루이스가 허리끈을 풀고, 샤워 타월 재질의 가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 작품을 천천히 훑으며 벨져는 길게 콧소리를 냈다. 돌아보라 손짓하자 말없이 순순히 따른다.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 곧게 뻗은 등과 도드라지지 않는 세밀한 근육이 나름 볼 만 했다.
“유지하는 걸로 하지. 앞은 됐고, 뒤만 쓰지.”
“그것 참 희망적이네.”
바닥에 떨어트린 샤워가운을 집어든 루이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허리끈을 동여맸다.
“형아가 보면 난리가 날 테지.”
“그 전에 귀에 들어가도 좋고. 아니, 역시 그게 좋을지도.”
“흥. 내가 제 발로 기어들어온 기회를 놓칠 것 같나?”
“그래. 그래서 너한테 온 거야.”
“하,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이란.”
“싫으면 마.”
벨져는 샐쭉해진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한 시라도 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담아주는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튕기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벨져는 손에 쥔 걸 놓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멍청이는 눈앞에 있고, 그 덕을 본 건 자신이다. 일단은 영화사에서 압박을 받기 전에 기자들에게 흘리는 게 먼저다.
그새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벨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큰 형을 떠올렸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어디 동남아에 잠적이라도 해야 할 성 싶었다.
하나, 둘, 셋. 루이스는 까만 광택이 도는 진홍색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숫자를 세고 전화를 받았다. 계속되는 촬영으로 그 사이에 머리가 말라서 바람에 휘날렸다.
“네. 접니다.”
‘루이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아니라, 네가...!’
“아, 잠시만요. 응. 아, 거기? 그래 더 찍지 뭐.”
루이스는 핸드폰을 잠시 떼어내고 일부러 들리도록 말했다. 한 번 스위치가 켜진 벨져는 방금 찍은 샷을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반응을 끌기엔 충분했다.
‘루이스!’
“아, 미안해요. 무슨 일이에요?”
핸드폰 너머에 침묵이 이어졌다. 차마 누드씬을 찍는다는 말을 못 하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적어도 내겐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이에요.”
‘루이스.’
“내 몸이잖아요. 당신도 없고.”
‘......내가 그리로 가겠다.’
“걱정 마요. 상대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않나!’
“그럼요? 우리, 세 달 동안 한 시간도 못 본 거 알아요?”
‘그건....’
“이젠 당신 기다리는 것도 지쳐요. 나도 내 삶이 있다구요.”
‘만나서 얘기하자. 일단 만나서....’
다이무스의 착잡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보니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하고, 벨져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루이스. 다음 숏 들어갈 거다. 여기서 여기까지. 가운을 벗고 테라스에 서. 역광으로 비출 거다.”
“앞에 누구 있는 건 아니지?”
“흥. 볼 것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밉살맞게 말하는 벨져의 엉덩이를 쳤다. 짝 소리가 나게 후려치는 바람에 벨져가 발끈해 주먹을 쥐며 노려봤지만 그의 작품을 위해서라도 벨져는 지금 루이스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촬영 들어가야 해요. 끊습니다.”
‘루이스...!’
“오려면 오세요. 어차피 안 올 테지만.”
모질게 말하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한 루이스는 대기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믿었던 보스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남자 주인공이 될 시간이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꺼놓고, 하루치 촬영이 끝났다. 벨져는 더없이 흡족해했고, 루이스는 배역의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저질러버린 일을 수습하러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꺼둔 사이 온 문자와 메시지, 부재중 통화 기록이 쏟아졌지만 다이무스의 기록은 없었다.
큰일을 저질러버린 건 아닐까. 뒤늦게 불안이 닥쳤으나 그래봤자 엎질러진 물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맥주를 사러 나가기 위해 후드를 집어 들었다. 내일은 촬영도 없겠다, 오늘 마시고 죽자는 마음으로 여섯 개 들이 팩과 보드카를 담아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땐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회사 차원에서 만난 그는 빈틈없는 슈트 차림에,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딱히 이렇다 할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루이스는 맥주병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이무스 홀든쯤이나 되면 달라붙는 사람도 많을 거고, 저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줄을 설 텐데. 내가 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데다,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남은 병을 비웠다. 벨져의 말이, 다른 모두의 말이 맞다. 오래 갈 수 없는 관계다.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땐 그냥 이 사람이 나와 같은 감정으로 봐주는 게 기뻐서, 통화 한 번에도 설레서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술병이 비어갈수록 루이스의 속은 타들어갔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이 타는 속에 막힘없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마셨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루이스가 눈을 떴다. 몸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살인범이면 어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벽에 머리를 세 번쯤 부딪치고, 겨우 호텔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문이 열리며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단단한 팔이 고꾸라지는 몸을 받치고, 익숙한 향수 냄새와 몸이 훅 루이스를 덮쳤다.
“루이스.”
“다이무스....”
“하아. 이 지경이 되도록....”
한숨을 쉬는 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기댔다. 번쩍 들린 몸이 침대 위에 놓여지고, 루이스는 제게서 멀어지는 팔을 잡고 매달렸다.
“다이무스.... 가지 마요. 나, 계속.... 기다렸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났다. 옆자리가 훅 꺼지고, 뜨겁고 단단한 몸이 루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를 마주 안고 루이스는 이게 꿈이 아니길 바랐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그래. 안다. 그래서 온 거다. 루이스....”
“가지 마요. 그냥, 나랑....”
“자라. 옆에 있을 테니까.”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꾹꾹 눌러 참다가 터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더 심각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며 등을 쓸어줘도 루이스는 내내 다이무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죄책감이 빠듯하게 가슴을 옥죄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내일. 내일 얘기하자.”
급하게 비행기를 잡아타고 오는 내내 걱정이 돼서 한숨도 못 잔 건 다이무스도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할 일이 태산이지만 일단 지금은. 이 사람을 안고 잠들고 싶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조만간 책 홍보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익숙한 길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차림으로 걷는 기분은 오묘했다. 파티에 나갈 때나 신을 법한 구두와 좋은 옷, 거기에 모자까지 쓰고 길을 걷자니 흘긋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정도였다. 가슴과 허리를 갑갑하게 조여맨 속옷들때문에 숨을 쉬는 것도 버겁다. 날이 덥지 않아서 망정이지, 해가 내리쬈으면 이 차림도 여의치 않았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잘 닦인 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땅에서 한참 올라온 구두 때문에 뛸 수가 없었다. 옷과 구두, 심지어 속옷 하나에 이르기까지 몸에 딱 맞는 것뿐이라 헐렁하게 입고 다녔던 루이스에겐 하나같이 갑갑했다.
생전 꾸며본 적 없는 루이스가 이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게 된 데에는 어김없이 벨져가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벨져가 부르는 날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 날은 세탁소에 들르는 걸 깜빡한 나머지 옷장에 처박혀 있던 원피스를 입고 그를 만나러 갔다.
뭘 입고 나타나도 탐탁지 않아 할지언정 따로 말은 하지 않아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침내 빛이 바랜 노란 원피스가 벨져의 한계치를 넘어선 모양이었다. 벨져는 문을 열자마자 위아래로 훑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대체 그 차림으로 어떻게 여길 왔냐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옷은 편하면 그 뿐이고, 벨져의 기준에 맞추려면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꼴이라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럼 네가 한 벌 해주던가.'라는 말로 응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벨져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사주면 입을 거냐는 말에 답하지 않고 욕실로 직행한 게 문제였던 걸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연합으로 출근하니 휴게실에 잔뜩 쌓인 상자와 동료들의 시선이 루이스를 맞았다. 트리비아는 루이스가 오자마자 상자를 풀기 시작했고, 연합의 휴게실은 순식간에 부띠끄로 돌변했다. 원피스가 두 벌, 드레스가 한 벌,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여름용 스커트가 두벌씩. 거기에 속옷과 구두, 모자까지 하나하나 풀자면 끝이 없었다.
트리비아는 화려한 레이스 속옷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며 예쁘겠다고 루이스의 몸에 대보고, 나이오비 역시 자기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맞장구를 쳤다. 벨져의 취향은 확고했고, 트리비아는 그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꼭 살아있는 인형이 된 것 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레이튼을 비롯한 연합의 남성들이 민망해하며 자리를 피해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몇 번을 갈아입고 다른 조합을 맞춰보다 마침내 화장까지 마치고 트리비아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그 바람에 일이 다 밀렸지만 나이오비가 걱정 말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루이스의 손에는 일거리 대신 흰 레이스 장갑과 작은 가방이 들렸다. 넣을 것도 없는데 가방을 왜 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트리비아는 그게 싫으면 양산을 들어야 한다는 말로 루이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도 양산보다는 가방이 덜 무겁다. 아무렴 해가 다 지도록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상식도 한 몫 했다.
호텔에 들어설 때면 수근거리곤 했던 직원들이 오늘은 미심쩍은 눈초리 대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루이스를 반겼다.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숙녀분. 이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저를 향한 것인줄도 몰랐던 루이스는 혼자 갈 수 있다는데도 굳이 엘리베이터까지 동승한 벨보이에게 어설프게 웃고는 번쩍이는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런 차림은 불편하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아 낯설었다.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다. 정말 양갓집 아가씨라도 된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실수라도 할까봐 떨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건 다 몸을 옥죈 탓이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바로바로 열리던 문이 한참 열리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두드리려는데 철컥, 문이 열렸다. 그런데 벨져의 상태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루이스는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갔다. 벽을 짚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벨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초점이 흐려지는 듯 눈을 찡그리는 그의 몸이 휘청였다. 루이스는 냉큼 벨져를 받아 안았다. 쓰러지다 시피 안긴 벨져는 몸을 가누질 못했다.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받치자 어깨에 턱을 얹고 몸의 무게를 온전히 루이스에게 실어오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둘째치고 호흡이 불안했다.
이쯤 되면 뭔가 잘못됐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인은 알 수가 없으나 일단 눕혀야 할 것 같아 침대 쪽으로 끌고 가는데 벨져가 루이스의 허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벨져, 정신이 좀 들어? 어떻게 된 거야?!”
“루이, 스....?”
고통스러운지 눈을 꿈뻑인 벨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를 행여 놓칠까 싶어 귀를 귀울이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예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루이스는 계속 제 이름과 함께 예쁘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벨져를 안고 얼굴을 굳혔다. 제정신으로 벨져 홀든이 제게 예쁘다는 말을 할 리가 없다. 독일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걸 봐선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벨져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은 의사소통이 되질 않는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벨져의 몸에선 술냄새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대신 테이블 위에 피가 묻은 붕대와 잔뜩 어질러진 응급 키트가 눈에 들어왔다. 심한 상처는 아니나 독이나 환각을 일으키는 무언가에 당한 거라 추측한 루이스는 문득 안타리우스의 전 근거지인 디미스트와 디미스트의 안개를 떠올렸다. 퍼즐이 짜맞춰지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들쑤셔진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착 가라앉았다.
루이스는 벨져의 몸을 받친 채 숨을 내쉬고 턱 아래 예쁘게 맨 리본을 잡아당겼다. 모자를 바닥에 대충 내던지고, 장갑도 벗어 던졌다. 걷기 힘든 구두에서 내려와 맨발로 벨져를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전부 토하게 하고 물을 먹여 몸 안에 스며든 안개의 독을 빼내는 게 우선이다.
하루쯤 지나면 알아서 빠져나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동안 고통에 시달리게 둘 수는 없었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타는 듯한 갈증에 몸을 웅크렸다. 내리쬐는 햇살이 뜨거워 도로 몸을 돌리며 서서히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하다. 위화감의 정체는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이 멍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와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깼어?”
“.......”
잠긴 목에 쓰디 쓴 무언가가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무언가를 뱉어내려 콜록거리자 루이스가 신문을 접었다. 고작 기침 몇 번 했다고 몸이 뒤흔들리는 게 불쾌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감각이 가라앉질 않고, 목이 아파 눈물이 핑 고였다. 침대로 다가온 루이스가 내민 컵을 받아 단숨에 물을 들이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조금 정신이 들자 위화감의 정체가 떠올랐다. 벨져는 루이스를 방에 들인 적이 없었다. 디미스트에서 가면의 남자를 만났고, 돌아와 어찌어찌 상처를 치료한 게 벨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상처를 확인하려 셔츠의 소매를 걷자 깨끗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이 셔츠, 어제도 입었던가? 벨져는 이불을 걷었다. 셔츠는 물론 속옷까지 전부 어제 입었던 것과 다르다.
벨져는 홀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 섣불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고백이라도 했다던가, 혹은 강제로 그녀를 범했다던가. 최악의 상황만 떠올라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는데 조금 퀭할 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무표정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시 내가, 큼. 크흠.”
“룸 서비스 시켰어.”
“...뭐?”
“뭔지 모르지만 제일 비싼 걸로 시켰어. 혼자 다 먹을 거야.”
머리를 풀어 어깨 위로 늘어뜨린 루이스가 도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진홍색 실크로 된 나이트 가운은 분명 제 것이고, 보고 있는 신문 역시 벨져의 것이다. 루이스는 그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태연했다. 어디서부터 트집을 잡아야할 지 모를 정도로 당당해서, 마치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기억 안 나?”
루이스는 알고, 저는 모르는 이 상황이 데쟈뷰처럼 겹쳐졌다. 다시 겪어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지만 그때와는 루이스를 대하는 감정이 달랐다. 벨져는 왜 너는 항상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드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루이스가 벨져를 바라보다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초탈한 듯한 태도에 울컥했지만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기억이 온전한 쪽이었다.
“그래. 잘 생각해봐.”
“루이스.”
“옷은 다 맡겼어. 이따가 갖다준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괜찮아. 갈아입을 옷 가져왔거든.”
무슨 말을 못 꺼내게 단칼에 쳐내는 게 예사롭지 않다. 벨져는 그 기백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잘못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 음식이 도착하고, 루이스는 말 한 마디 없이 포크를 들었다.
끼니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사람이 제대로 식사를 하는 건 기특한 일이지만 분위기가 경직된 나머지 말을 붙이기가 조심스러웠다. 벨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놀랄 만한 장면이었으나 방 안에는 루이스와 벨져 단 둘 뿐이고, 루이스가 답하지 않는 이상 벨져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다.
방에 루이스를 두고 씻는 내내 기억을 더듬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두통과 짜증만 늘 뿐이었다. 씻고 나오면 뭐라도 얘기해줄 줄 알았더니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끝내 침묵을 고수했다. 방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마주친 눈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으나 문이 닫혔다. 루이스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그 의뭉스러운 행동에 벨져의 기분만 찝찝해졌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0) | 2016.08.0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여느 때와별 다를 거 없는 오후, 휴게실 소파에서 빈둥거리려던 이글은 먼저 소파를 차지한 사람을 보곤 혀를 찼다.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담요를 찾았다.
“뭐 찾아?”
“담요 어디있어?”
턱으로 루이스가 자고 있는 소파를 가리키자 양팔 가득 서류를 들고 나르던 레베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통 소파에 걸쳐져있기 마련인 담요가 보이질 않는다. 레베카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항복을 선언했다. 따라 들어온 트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들이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뭐가 안 따라주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레베카가 웬일로 남을 챙기냐며 씩 웃으며 팔꿈치로 이글을 툭 쳤다. 말이 툭이지 퍽에 가까운 소리와 통증에 이글은 맞은 팔을 감싸쥐었다.
“짜식, 엄살은.”
“엄살 아니거든!”
“어유, 그래? 그럼 남자답게 시원하게 벗어서 덮어주던가.”
대낮부터 한 잔 한 것처럼 킬킬거리는 레베카를 쳐다보던 이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편한 분위기는 좋지만, 천덕꾸러기 취급은 가문에서 받는 걸로 충분하다. 입을 비죽이자 레베카가 내가 살 테니 이따 한 잔 하자며 윙크했다. 이거 한 대 맞고 공짜술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글은 냉큼 그녀에게 윙크를 돌려줬다.
“무르기 없기!”
“뭘 물러?”
“레베카가 이따 쏜대!”
“오오, 그거 좋지!”
“너희는 포함 아니거든!?”
따라 들어온 휴톤과 도일이 사람 좋게 웃으며 레베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어째 둘 다 묘하게 텐션이 높다. 이글은 근육질의 남자 둘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질색하며 물러섰다.
“뭐야, 대낮부터 퍼마신 거야?”
“퍼마시긴! 마, 더워서 한 잔 했다.”
“그럼그럼. 이런 날씨엔 시원한 맥주가 딱이지!”
“한 잔도 한 잔 나름이지.”
이글은 트리비아의 핀잔에 맞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음 때문인지 루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 하기야 이 소란에 잠이 잘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사무실에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이 찾아들고, 회의실에서 자기엔 부담된다며 루이스는 굳이 휴게실의 소파를 고집했다. 그마저도 시끄러운 사람들이 다니니 제대로 못 자는 게 당연하다. 이글은 혀를 차며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씨들, 담요 못 봤어?”
“소용 없데이. 윽수로 예민하다 아이가.”
“엑.”
이렇게 떠들면서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싶어 두 사람을 보자 휴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부터 그랬어. 저렇게 잠깐 눈을 붙이긴 하는데, 몸에 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
휴톤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길거리의 고아 소녀가 몸을 지키기 위해선 자는 시간마저 온전히 쉴 수 없다. 아마 그 생활이 몸에 배인 모양이라고 말하는 내내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얘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잘즈부르크 축제에 다녀온 벨져의 말이 떠올랐다. 축제 기간에 맞춰 집에 돌아온 벨져는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냐는 이글의 질문에 '잠자리가 불편해서' 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김이 팍 샌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왜 갑자기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둘 다 예민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둘 다 엮이면 피곤해지니 그냥 모른 척 지나가려는데 마침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다 아는 이상 루이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연합은 대체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는거냐며 저를 붙들고 또 애먼 화풀이를 할 게 분명했다. 이글은 구석에 방치된 담요를 집어들었다.
“그냥 다시 자라고 하지 뭐.”
휴톤이 말리려들었지만 이글은 후딱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 소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떠드는 소리에 뒤척이다 천장을 보고 누운 루이스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이 봐도 안쓰러운데, 좋아하면 얼마나 속이 썩을까. 이글은 무언가 닿는다는 것마저 느끼지 못하도록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담요를 내려놓았다. 덮어 씌운다는 생각으로 대충 하면 깰까봐 조심하는데 그것도 마뜩치 않았는지 루이스가 웅얼거렸다.
그 소리가 정지 신호라도 된 것 마냥 손을 멈추자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가 깜빡였다.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와,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짓는 눈웃음에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 사이 미소와 함께 뻗은 손이 이글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제가 아는 루이스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사근사근한 태도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대로 끌려가자 몸을 겹친 이글의 귀에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이글의 귀를 간지럽혔다. 포옥, 내쉬는 숨과 목을 끌어안은 부드러운 팔에 어안이 벙벙했다.
혼란에 휩싸인 이글의 목덜미를, 뒤에서 커다란 손이 잡아 당겼다. 그 우악스런 손아귀 힘에 겨우 정신을 차린 이글은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 없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 손에서 풀려났을 땐 휴게실에서 회의실로 끌려온 뒤였다. 의자에 억지로 앉혀진 이글 앞에, 주먹 깨나 쓰는 덩치 둘이 자리하고 그 사이 의자에 앉은 트리비아가 다리를 꼬았다. 안 그래도 무서운 누님과, 웃음기가 싹 가신 두 사람을 앞에 두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사이렌이 왱왱 울린다. 이글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잠깐, 잠깐.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우리 말로 해결합시다!”
“이글.... 난 그래도 네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동감이데이. 니 혹시....”
“아니라니까! 아, 답답해 미치겠네! 나도 억울하거든?! 나도 피해자라고!”
“뭐? 피해?”
“아악!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어떤 놈들이 겁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가는 상황에 이글은 머리를 쥐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겨우 돌아온 관심에 이글은 깊은 한숨을 토하고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냥 잠꼬대 한 거야. 내가 맹세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그리고 쟤도 나이 먹을만큼 먹은 성인인데 자기 맘대로 할 수도 있지!”
신랄하게 두다다 쏟아내는 말에 휴톤과 도일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야 그들이 성급하게 굴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데, 억울함을 토로하고 나니 잡혔던 뒷목이 아파왔다. 목을 돌리자 우두둑 소리가 나고, 목이 뻐근해 주무르자 휴톤이 못내 미안한듯 주춤거렸다. 한 마디 않고 차디 찬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트리비아의 눈매가 살짝 풀어졌다.
오해로 치면 아론 휴톤만큼 역시 오해받는 기분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덩치는 산만해서 금세 순한 얼굴을 하고 미안해해서 짜증이 가라앉긴 하는데, 애초에 오해를 안 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파렴치한 취급이나 하고. 울컥 튀어오르는 서운함과 억울함을 토로하자 휴톤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도.... 억수로 미안하데이.”
“됐거든! 아니 그리고, 댁들이 무슨 막내 여동생 시집 보내기 싫어하는 팔불출 오빠야? 나 그래도 귀족집 도련님이거든? 내가 무슨 해충이야?! 진짜 너무하네!”
“아니, 그게.... 정말 미안하다.”
이글이 뚱하니 팔짱을 끼자 머리를 긁적이던 도일이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데.... 그, 가는 우리도 불안타.”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정말 한창인 나인데 연합 일에만 매여있으니까.”
“그게 뭐 하루 이틀이야?”
별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를 구태여 하는 의도를 묻자 휴톤이 멀리서 엘리와 피터를 볼 때 짓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도 못 해보고, 남들처럼 꾸미는 것도 아니고 일만 하니까.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저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강한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그 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도 미안하고.... 걱정이지.”
“얼래? 그렇게 치면 앤지는!”
“갸는 그 일 전까진 평범했다 아이가.”
“그래. 상대적으로 루이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낸 건 맞지. 게다가 루이스는 뭐냐, 그.... 잔... 잔, 누구였지?”
“잔 다르크?”
“그래! 그 사람처럼 언젠가 홱 죽을 것 같다구. 루이스는.... 늘 혼자 짊어지려 하니까.”
이글은 가만히 휴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중간에 트리비아가 거들지 않았어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녀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답게 말은 어수룩해도 분명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혼자 다 짊어지려다 스러질 것 같다고, 좋은 시절을 전부 연합과 그녀의 그 어리석은 이상에 얽매여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루이스는 위태로운 사람이다. 그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런 사람이니까, 라는 말로 넘기면 그 뿐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못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이 사람들의 유대이고, 그 유대가 강한만큼 루이스를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벨져는? 이렇게 답답한 면마저 좋다는 걸까. 문득 스치는 의문에 이글은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방금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에 그렇게 된통 당해놓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그 둘은 어느 모로 보나 달콤한 연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눈이 맞았다? 이글은 못된 장난을 하기 전에 드는 두근거림을 즐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나름 잘 즐기는 것 같던데.”
트리비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휴톤은 알고 있었는지 아차 싶은 눈치였고, 도일은 못 알아들었다. 이글은 악동처럼 미소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일은 혼자만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휴톤을 툭툭 쳤고, 휴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이글과 트리비아를 번갈아봤다. 의기양양하게 회의실을 빠져나온 이글의 뒤로 트리비아의 냉기가 흘렀다.
“잠깐 나 좀 볼까?”
“흐응. 미녀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아.”
“우리 자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도련님?”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데.”
또각거리는 킬힐 소리와 함께 위험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 트리비아가 이글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대로 벽까지 밀린 이글은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취했지만 트리비아는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과연 여제, 이글은 그녀의 박쥐들을 떠올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진짜 무서운 건 언제나 여자들이다. 특히나 연합에선 더더욱.
“왜 이러실까.”
“어머,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겠는데.”
“저런. 거짓말을 하려면 티는 내지 말아야지.”
“티났어?”
“그럼.”
이글은 아쉬운 척 입을 다셨다. 연합의 누님들은 하나같이 무섭지만 그 중 가장 무서운 건 단연 트리비아 카리나다. 속을 알 수 없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냉기가 꼭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쪽은 진심이야?”
“그쪽? 어딜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둘째 도련님 말이야.”
“아아, 작은형? 우리 작은형이야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우린 모여 앉아서 연애사업 얘기할 사이가 아니거든. 칼부림이라면 또 모를까.”
“흐응. 뭐, 좋아. 두고 보면 알겠지.”
트리비아의 손이 떨어졌다. 이글은 태연한 척을 하느라 집어삼킨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작 문제의 당사자는 태평하게 잘만 자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 된 걸까. 간만에 착한 일을 하려 해서 그런가, 얻은 거 없이 손해만 왕창 본 기분이었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가만히 지켜보다 입가를 매만졌다. 나쁜 장난을 할 때면 팽팽 돌아가는 잔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만족스러운 계획이 세워지자 씩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이글은 고양이도 아닐 뿐더러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난 이글은 목 뒤에 양팔로 깍지를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0) | 2016.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