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ts루이스에 해당되는 글 11건
- 2015.04.11 [티엔ts루이] 어느 겨울
- 2015.04.11 [티엔ts루이] 봄비
- 2015.04.11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 2015.04.11 [티엔ts루이] White Day
- 2015.04.11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 2015.04.11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 2015.04.11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 2015.04.11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0.
- 2015.04.11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 2015.04.11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글
[티엔ts루이] 어느 겨울
2015/04/01
* 17살 루이스, 그랑플람 소속 주의
하랑의 기분은 몹시 좋지 않았다. 설이라고 새 옷을 맞춘대서 들떠있었더니 웬걸, 재단사가 치수를 재서 깔쌈한 양옷 한 벌 하나 했더니 딱딱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사부는 추위에 그닥 도움도 안 되는 칙칙한 색의 모직 코트 몇 벌을 골라 내밀었다. 뭐 하나 자기 마음대로 고르지도 못하게 할 거면 왜 따라오라고 했담. 하랑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 그냥 그럼 사부가 알아서 사오던가! 존나 춥다고!"
"하랑, 몸을 편안하게 하면 수련에 뒤처지는 법이다."
"아오, 씨!"
하랑은 더 말해봤자 티엔이 같은 말만 반복할 것을 알기에 답답해 가슴을 쳤다. 그냥 다 포기하고 빨리 돌아가 따뜻한 난로 앞에서 몸이나 녹이고 싶었다. 마틴도 그렇고 브루스도 그렇고, 대체 이런 날씨에 어떻게 밖에서 그렇게 입고 하루종일 있을 수 있는 건지, 얇기만 한 옷들을 보며 하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선에 있을 땐 겨울이면 옷 안에 솜을 넣어 누비곤 했는데 천도 솜도 많은 나라에서 왜 겨울옷이 이렇게 얇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따뜻한 옷은 따로 있고 제 사부가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저를 괴롭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티엔이 검은색 코트를 건네고, 하랑은 그를 가늘게 노려보며 받아들었다.
"거, 나온 김에 걔 옷도 좀 사주지그래? 아무리 얼음 능력자라 해도 그렇지 옷이 너무 얇드만."
"...하랑. 여긴 남성복 매장이다."
"난 뭐 눈이 없는 줄 알어? 아까 오다보니 사방이 다 옷가게더만. 쪼잔하긴."
하랑은 배를 타고 영국에 도착하던 날 저와 티엔을 맞아주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때도 제법 날이 추웠는데 루이스의 옷차림은 여전히 가을 같았다. 아무리 얼음쟁이라도 그렇지, 춥지도 않은 걸까. 짧은 치마를 홀랑홀랑 까뒤집고 다니는 여자애들에 비하면 루이스의 차림은 조신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옷이 짧은 거나 얇은 거나 추워보이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한창 때 여자애들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게 고맙다. 하지만 때론 보는 쪽이 더 민망해지기도 했는데, 회사의 공주님도 그렇고 가슴을 훤히 드러낸 조선의 기집애도 그렇고 노출이 너무 과했다. 얼마 전엔 헐벗은 거나 다름 없는 차림으로 공성전을 하기까지 했는데, 하랑은 그 판 내내 기겁하느라 집중을 못했다. 그 바람에 수련의 성과가 없다며 호되게 고생한 하랑은 루이스의 그 꽁꽁 싸맨 차림새를 다른 사람들이 본받았으면 했다. 그런 부끄러운 차림을 하고도 당당하다 못해 치마를 펄럭이며 뛰어다니고 누워있는 사람 위를 훌쩍훌쩍 넘어다니니 심장에 해로웠다.
그런데 비해 루이스의 치마는 무릎 위로 넘어가지 않았다. 정강이에서 무릎 언저리를 오가는 치마에 흰 셔츠. 서점에서 일할 때 입는 게 퍽 단아하면서도 고왔다. 조막만한 패랭이꽃이나, 난초같이 소박하고 청순한 미인상이라 그런가 하랑은 루이스가 남사스런 차림을 한 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공성을 할 땐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에 티셔츠, 후드차림이 기본이기도 하고 애초에 생각해보면 루이스는 맨다리를 내놓는 법이 없었다.
누구 때문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가끔 다른 여자애들이 입는 치마를 부러운 듯 보는 걸 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또 아닌 것 같던데. 하랑은 팔랑팔랑한 원피스를 입은 루이스를 떠올리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팔짱을 끼고 추운 거리를 걸으며 흘러내린 목도리를 다시 둘둘 둘렀다. 새빨간 색의 보드라운 목도리는 루이스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떠준 것이었다.
하랑은 추위에 한껏 목을 움츠리며 루이스를 떠올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참한 건 둘째치고, 기본적으로 루이스는 좋은 애였다. 티엔을 따라 배를 타면서부터 꾸준히 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아냥과 멸시 어린 눈길에 짜증을 내다 못해 주먹질을 하고 난 뒤라 기분을 잡칠 대로 잡친 후라, 하랑은 웃으며 손을 내민 루이스를 무시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도 루이스는 하랑에게 잘 대해주었다. 수련이다 뭐다 아는 거라곤 일과 수련밖에 없는 것같은 티엔 대신 포트레너드를 구경시켜주고 영어가 짧은 하랑과 손짓발짓으로라도 대화를 해주기도 했다.
얼굴만 보면 제 또래 같은데, 하는 행동거지나 분위기가 묘하게 어른스러워서 한동안 하랑은 루이스가 저보다 연상인줄로만 알았다. 특히 공성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고 칼이나 주먹이 직격하려는 순간 제 앞에 깔리는 얼음 결정을 보면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만다.
아무래도 능력이 능력이다보니, 하랑은 저만치 앞서있는 사부의 등보다 루이스의 등을 보는 일이 많았다. 둘 다 믿음직하긴 하지만 티엔의 등과 루이스의 등에서 느껴지는 믿음직스러움은 조금 그 성질이 달랐다. 티엔의 등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라면, 루이스에게선 절박함이 느껴졌다. 모든 걸 제가 해결하고 떠맡으려는 뒷모습은 저보다도 가녀리지만, 그걸 뛰어넘는 기백이 있었다. 루이스는 뒤에 지켜야할 사람이 있는 이상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등이었다. 그러니 연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하랑은 최근 루이스가 동갑이라는 걸 알고 꽤 놀랐다. 하랑이 루이스를 누나, 누나하고 부르며 따르는 것을 본 티엔이 농땡이 피우지 말라며 한소리 하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터였다. 양놈들이 위아래 없이 말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하랑은 루이스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꽤 좋았던 터라 생일이 빠르단 걸로 우겨 누나라 불렀다.
마틴도 친절하고, 곰 할배도 듬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보단 여자가 좋은 법이었다. 하랑은 자연스레 시간이 남으면 루이스와 어울렸고, 그때마다 티엔은 못마땅해하며 놀 시간에 수련에 정진하라 했지만 그 역시 루이스에게 약하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칙칙한 사내놈들 사이에 열 일곱밖에 안 된 꽃같이 예쁜 여자애가 있으니 어찌 안 예쁘랴마는. 걸음과 함께 정처없이 흘러가던 생각은 문득 한 곳에 멈춰섰다. 루이스는 티엔의 제자도 아니고, 여전히 서점에서 일하는 데다 마틴이나 브루스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 않는다. 티엔만 보면 불편한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마틴을 생각하면 더더욱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사부."
"또 무엇이냐."
"루이스는 왜 그랑플람에 들어온 거야?"
순간 티엔의 미간이 움찔했다. 흔치 않은 반응에 하랑의 궁금증은 더 크기를 불렸고, 하랑은 티엔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보면 굳이 다른 사람 놔두고 티엔과 저를 맞이하러 루이스가 나올 이유가 없었다.
"사부가 꼬신 거야?"
"꼬시다니."
"아니 그럼 걔가 왜 들어왔는데? 어?"
"들을 가치도 없군. 그 얘기는 더 꺼내지 마라."
티엔은 고개를 저으며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자기는 두꺼운 코트 입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했으니 춥지도 않다 이거지. 하랑은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목도리 안으로 얼굴의 반을 쏙 넣었다. 이렇게 추운데 루이스는 왜 아직도 가디건 차림인 걸까. 잠깐 서점에 들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 벌어진 티엔과의 거리에 같이 가자고 소리친 하랑은 잰걸음으로 티엔의 뒤를 따랐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들 뿐이라니깐.
"어서오세, 티엔."
딸그랑 울리는 종소리에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늦게 일을 마치는 회사원이나 은행원들 뿐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손님 아닌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능력자에 관한 책은 아직 새로 들어온 게 없는데요."
"널 보러 왔다."
루이스는 돌려말하지도 않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읏샤, 작게 소리를 내며 바닥에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자 티엔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날이 춥더군."
"그러게요. 이제 곧 비 대신 눈이 오겠어요."
"하나 샀다."
티엔이 내민 쇼핑백에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받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티엔이 루이스의 손에 손잡이를 들려주려 해 루이스는 손을 빼며 한걸음 물러났다.
"괜찮아요."
"루이스."
"정말 괜찮아요."
티엔은 눈을 맞추려하지 않는 루이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색해진 공기가 무거웠고, 제가 대하고 있는 건 열일곱짜리 여자애였다.
"루이스."
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하랑이 궁금해하지 않았더라면 떠올릴 일도 없을 정도로 평범한 하루였다. 다만 그때는 루시 일로 티엔이 날카로워져있었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 잠시 방황하던 때였다는 게 중요했다.
"이미 많이 주셨어요. 티엔, 자꾸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푹 꺼진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다가와 티엔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티엔은 자기가 주는 건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주기만 하려는 소녀를 바라봤다. 자신이 상처입는 게 두려워 호의는 받으려 하지 않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도 싫다. 티엔은 루이스가 하랑에게 잘해주는 것도 마틴과 남매처럼 지내는 것도 싫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왜 자신의 사람이 되어주지 않는 것일까. 티엔은 그랑플람에 들어오라는 권유도 한사코 거절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문을 닫아버렸던 날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애먼 책만 노려봤다.
루이스는 험악한 무표정의 티엔을 보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이 사람은 어렵다.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섰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무뚝뚝하기는 다이무스와 다를 바가 없지만 루이스는 티엔이 자꾸만 제게 무언가를 해주려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걸 아는 것과 편하게 대하는 것은 다르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티엔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면 언제나 눈이 마주친다. 다른 사람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제게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억하고 챙겨주는 사람에겐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이 돌려줄 능력도 무엇도 없는데 왜 자꾸 주려는 걸까. 루이스는 티엔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계속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돌아서기라도 하면.
루이스는 가끔 공성전에서 마주치는 루시 리를 볼 때마다 긴장에 침을 삼켰다.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루이스에게도 껄끄러웠다. 그녀가 티엔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티엔은 제게 그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대해줄 리도 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빛나는 루시를 보고 있으면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자신은 너무 초라한 사람이라서 견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제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이스가 티엔의 끈질긴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회사에 먹혀버릴 지도 모르는 그랑플람이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사와 연합이 싸우는 동안 죄 없는 사람들이 다쳤고, 그들이 야욕을 채우려는 동안 거리에선 동전 한 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루이스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제 능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루이스가 그랑플람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건 고작 열두살밖에 안 된 메어리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었다. 월급 봉투를 받은 루이스는 과자와 조그만 선물을 사서 제가 자란 고아원을 향했고,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들것에 실려나가는 메어리를 봤다. 고아원을 나온 루이스는 거리를 걸었다.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티엔을 만났고 아는 얼굴에 그만 눈물이 흘러 넘쳤다. 혹시라도, 제가 티엔이 처음 권유했을 때 그랑플람에 들어갔더라면, 그래서 재단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면, 그랬으면 메어리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 속에 스스로 숨을 멈추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루이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쪼그려앉아 울었다. 티엔이 수차례 왜 그러냐 물으며 울지 말라 했지만 모든 게 제 탓 같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티엔의 손에 이끌려 간 그의 집에서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엔은 더이상 묻지 않았고, 루이스는 그랑플람에 들어가겠다는 말 한 마디만 했다. 그 후로 쭉, 티엔은 저만 보면 무언가 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고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시간이 늦었어요."
"바래다주겠다."
"...잠시만요."
티엔 정은 괜찮으니 먼저 가란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늘 당당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자신때문에 축 쳐져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루이스는 정리를 서둘렀다. 내일 아침에 해야할 일까지 미리 정리해둔 루이스는 서점 안을 밝히는 등을 끄기 위해 스위치 앞에 섰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쇼핑백에서 코트를 꺼내 루이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버리던, 환불을 하던 네 마음대로 해라."
루이스가 난처해했지만 티엔은 여지조차 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겨울용 르블랑 코트는 비싼 만큼 제 값을 하는 상품이니 적어도 추위에 떨진 않을 것이다. 기성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 봄에 재단에서 단체로 옷을 맞추면서 루이스의 치수도 남아있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겨울 코트를 따로 주문했다. 그게 벌서 보름 전이었고 오늘에서야 티엔 앞으로 도착해 전해주러 온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환불도 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모르겠지만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은 대개 두둑한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잘 입을게요."
"가지."
티엔은 루이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코트에 팔을 꿰는 걸 보며 문을 열었다. 하얀색을 기조로 한 코트는 루이스에게 퍽 잘 어울렸고 티엔은 제 안목이 훌륭했다는 것에 뿌듯해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 검은 코트와도 퍽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서점의 문을 잠그는 루이스를 보며 본디 흑과 백으로 나타나는 음양은 하나라는 생각을 하던 티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이스는 문을 잠그곤 티엔을 올려다봤고, 티엔은 그 투명한 붉은 눈을 보며 제가 잠시라도 속된 마음을 품었던가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루이스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몇 해만 더 있으면 성년이라곤 해도 아직 한참 어린애였다. 게다가 저와는 띠동갑이니, 자칫 잘못했다간 연합의 테라듀 능력자에게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손목에 감기던 차가운 수갑의 감촉을 떠올린 티엔은 팔을 내밀지 않고 앞서 걸었다. 곧 빠른 걸음으로 쫓아온 루이스가 옆에 걷기 시작했지만 티엔은 루이스보다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서 걸었다. 그러다보니 걷는 게 아니라 경보 수준이 되어버리고, 그러다보니 쫓아오던 루이스가 그만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으왓!"
재빠르게 넘어지려는 루이스의 허리를 낚아챈 티엔은 급격하게 줄어든 거리에 잠시 숨을 집어삼켰다. 놀란 루이스가 눈을 깜박이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소녀를 바라봤다. 주황색 가스등불 아래 제 품에 안겨있는 루이스. 가슴이 크게 뛰고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그녀가 꼭 끌어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가, 감사합니다."
"...발밑에 집중해."
"당신이 너무 빨리 걸으니까.... 아얏."
"괜찮나? 쯧."
발목을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티엔의 가슴을 밀치고 물러난 루이스가 한 걸음 내딛다가 눈살을 찡그렸다. 티엔은 바로 무릎을 굽혀 루이스의 발을 살폈다. 루이스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티엔이 발목을 잡자마자 시큰거리는 통증에 작게 신음을 내고 말았다.
"안 되겠군. 업혀라."
"네? 아뇨, 혼자 걸을, 으아앗...!"
티엔은 루이스의 발목을 놓고 그대로 무릎 아래로 손을 넣었다.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일어나는 바람에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티엔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업히고 만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듬직하고 너른 등에 업혀있자니 어째 쑥스러웠다. 그것보단 놀란 심장이 자꾸 큰 소리를 내며 뛰는 게 신경쓰였지만 티엔이 루이스를 고쳐 업으면서 루이스도 자세를 고쳤다.
"나빴어요, 진짜...."
"제대로 발밑을 안 본 네 부주의겠지."
"하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도 없다. 루이스는 하랑이 짧은 영어로 티엔 흉을 늘어놓던 걸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랑의 말대로 티엔이 한 번 막무가내가 되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루이스는 티엔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얹었다. 티엔의 등에 업혀있으니 찬 겨울바람이 부는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제 다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의 팔과 너른 등, 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덥다는 게 루이스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릭루이] 벚꽃 샤워 (0) | 2015.04.11 |
---|---|
[티엔루이] 킹스맨au (0) | 2015.04.11 |
[티엔ts루이] 봄비 (0) | 2015.04.11 |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0) | 2015.04.11 |
[티엔ts루이] White Day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티엔ts루이] 봄비
2015/03/31
* 봄, 만남, 도서관에서 이어짐
어김없이 네시 반이 넘어가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도서실을 정리한 루이스는 마우스를 흔들어 화면을 띄웠다. 검은 머리에 단정하고 늠름하게 생긴 3학년 선배는 문 하나도 그냥 여는 법이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세를 고쳤다. 낡은 미닫이문이 소리도 많이 내지 않고 열렸다. 워낙 도서실에 학생들도 별로 없는데다 티엔이 들르는 시간은 도서실 마감 시간과 가까웠기에 루이스는 혼자 티엔을 맞았다.
"자주 오시네요."
"면학은 학생의 본분이니까."
티엔은 그 말에 슬며시 올라가는 루이스의 입꼬리를 보며 바코드 전산 처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부활동이 끝나고 들르는 도서실에서 나누는 잠깐의 대화. 티엔은 그 짧은 시간이 꽤 기꺼웠다. 요 며칠동안 지켜본 결과, 루이스는 교무회의가 있는 월요일과 수요일 방과 후엔 꼭 도서실에 있었다. 그걸 알게 된 티엔은 월요일과 수요일이면 부활동을 마치고 꼭 도서실에 들렀다.
그냥 두고 가면 되지만 티엔은 루이스가 바코드를 다 찍기를 기다렸다. 얼굴도 곱지만 티엔은 루이스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모양이 예쁜 손가락이 책을 정리하고, 바코드를 다 찍으면 모니터를 보고있던 루이스가 티엔을 바라봤다. 그럼 티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을 빌리기 위해 서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책장에 서있으면 선생님이 돌아와 잠시 루이스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곧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이 반납한 책을 꽂으러 서가로 들어왔다.
책을 전부 고른 티엔은 일부러 루이스가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 책을 가지고 나온 티엔이 대출을 하는 사이 루이스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서기까지 약 3초. 지퍼를 죽 올려 어깨에 가방을 맨 티엔도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앞에 서면, 바로 뒤에서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엔은 문을 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텅 빈 복도에 겹쳐들리는 발소리. 그 묘한 기분에 티엔은 잠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있던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는 건 순식간이었고, 제가 돌아볼 줄 몰랐는지 루이스도 그대로 멈춰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잠시 사로잡혔던 티엔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 비...."
"우산, 안 가져왔나?"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살피는 티엔은 가방 안에 고이 들어있는 접이식 우산을 떠올렸다. 어차피 제가 사는 자취방은 멀지 않고, 기껏해야 봄비니 그리 거세지도 않다. 곤란해하는 루이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우산을 써도 비를 피하기 충분하단 생각에 티엔은 그녀를 바래다줄 생각이었다. 루이스는티엔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나올 땐 맑았으니까요."
"어느쪽으로 가나? 바래다주지."
"아, 아니에요. 안 멀어요. 이 정도는 맞아도 돼요."
바래다주겠단 말에 당황한 루이스가 손을 내저었다.그 모습이 퍽 귀여워 티엔은 아무 말도 않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옆에 따라붙은 루이스가 연신 안 그래도 된다고 설명했지만 티엔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여자애가 비를 맞고 가게 둔다는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학교 현관에 다다른 티엔은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먼저 가보겠다 말하는 루이스의 옆에 서 우산 반쪽을 씌워주자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요 앞에 윈더미어까지 부탁드려요."
어렵게 꺼낸 말에 티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전에도 그 서점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티엔은 입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정사로 따지면 티엔 역시 그리 할 말이 없었다. 신경쓰는 건 아니지만 입학 상담이라거나 자기소개서엔 선생님들 사이에 꾸준히 오르는 주제가 바로 티엔의 가정사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홀어머니 아래서 문무를 겸비한 완벽한 아이. 티엔은 자신을 평가하고 수식하는 말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완벽해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사람보다 강해지는 것 정도에나 흥미가 있는 정도였다.
더러는 주위는 돌아보고, 친구도 사귀고 놀라고도 하지만 티엔은 그런 데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텐데. 티엔은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곤 그녀쪽으로 우산을 슬쩍 기울였다.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루이스를 곁눈질하다보니 샴푸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희미한 꽃향기, 우산 아래 단 둘. 티엔은 하얀 목덜미와 세라복 안쪽으로 흘긋 보이는 쇄골에 마츤 침을 삼키며 정면을 바라봤다. 루이스의 팔과 닿아있는 팔이 간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윈더미어까지는 오분이면 넉넉한 거리였고, 두 사람은 한 마디 말을 주고받는 법도 없이 걷기만 했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춰 걷다보니 평소보단 더 걸렸을 테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저, 여기까지면 돼요.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라."
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그녀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들어간 루이스는 서점 주인과 반갑게 인사하며 싱긋 웃었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저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앞치마를 둘러맨 루이스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다 눈이 마주쳤다. 그바람에 티엔은 훔쳐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움찔했지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었다.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티엔은 서점에서 발을 돌렸다. 정말 사소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루이스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수고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빗속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티엔의 어깨는 약간 젖어있었고, 입가엔 희미하게 웃음이 걸려있었다. 봄비에 언 땅이 녹는 것 같았다.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루이] 킹스맨au (0) | 2015.04.11 |
---|---|
[티엔ts루이] 어느 겨울 (0) | 2015.04.11 |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0) | 2015.04.11 |
[티엔ts루이] White Day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2015/03/22
* 현대 고등학교au
바야흐로 꽃이 피는 삼월. 이제 삼학년이라 고전무술부의 부장직은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티엔은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젖은 머리를 털며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증축 공사로 책을 빌린 뒤 처음으로 도서관을 개방한 날이라, 책때문에 가방이 무거웠다. 도서관이 닫히는 건 네 시 반. 씻고 나온 게 네시 십오분이었다. 더 늦기 전에 반납하기 위해 미닫이 문을 연 티엔은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밀려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먹구름이 낀 하늘 같은 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가에 서있던 여자애가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쳤다.
“저기, 아직 대출은 안 되는데요....”
“아, 아아. 반납이다.”
“그럼 이쪽으로.”
파란 리본을 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입생인 것 같은데, 첫날부터 도서관에 익숙한 듯한 태도에 티엔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여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당연한 듯 대출대 안쪽에 앉은 여학생은 책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데 비해 검은 색 세라복 위에 가디건도 입지 않은 채였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걸까. 티엔으로선 드문 타인에 대한 흥미였지만 여학생은 책 다섯 권의 반납 처리를 마치고 티엔을 올려다봤다.
“이제 가셔도 돼요.”
“1학년?”
“네. 그런데요.”
“...이름은?”
“루이스.”
그 이름의 울림이 그녀와 제법 잘 어울렸다. 티엔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티엔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티엔은 깜박이는 그 붉은 눈동자가 꽤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혹시 선생님께 용무가 있으신 건가요?”
“...그건 아니다만.”
“곧 문을 닫을 시간인데요.”
“알고 있다.”
의미 없는 문답. 이러고 있는 게 시간낭비라는 건 알지만 티엔은 좀처럼 걸음을 옮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박또박 말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엔 아직 중학생 티가 났고, 갸름한 얼굴선이며 가는 목덜미, 소매 사이로 흘긋 보이는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게 실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티엔은 괜히 교복의 칼라를 매만지며 돌아섰다. 어차피 도서부원이라면 앞으로 종종 마주칠 터, 그런데 왜 지금껏 관심도 두지 않았던 도서부원에게 흥미가 생긴 건지. 티엔은 대출이 안 된다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저기요.”
그리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티엔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이 도서실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녀와 자신 단 둘 뿐. 천천히 몸을 돌리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에게 다가왔다.
“책갈피. 빼먹으셨어요.”
“...흠.”
티엔은 책갈피를 쓰지 않는다. 가방 안에 넣어놓은 유인물이나 메모지가 끼워져있던 게 아닐까 하는데 예상 외로 루이스가 내민 것은 얼마 전에 참고서를 사면서 받은 영수증이었다.
“여기보단 그 건너편 골목에 윈더미어가 나아요. 포인트 적립은 안 되지만 얼굴 조금만 익히면 싸게 주시거든요.”
윈더미어라는 소리에 티엔은 후미진 간판을 떠올렸다. 낡은 서점과 눈앞의 여학생. 티엔은 무표정한 루이스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는 그것뿐이었는지 루이스는 티엔이 반납한 책을 양손에 들고 서가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티엔은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의 복도를 걷는 내내 기분좋은 꽃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ts루이] 어느 겨울 (0) | 2015.04.11 |
---|---|
[티엔ts루이] 봄비 (0) | 2015.04.11 |
[티엔ts루이] White Day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티엔ts루이] White Day
2015/03/16
※ '어느 겨울'과 이어지는 듯 안 이어지는 듯 그냥 공식 목석남 티엔과 ts루이스로 기념일이 챙기고 싶었다.......
차디찬 바람이 한 풀 꺾인 3월의 봄날, 루이스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살폈다. 늘 아무렇게나 방치하던 머리카락도 곱게 빗어 올리고 편하다고 대충 입던 후드와 티셔츠, 청바지, 스니커즈 대신 흰 블라우스에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연분홍색 치마를 입으니 늘 보는 제 모습이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앞머리를 매만지다 긴장을 덜고자 숨을 길게 내뱉었지만 보면 볼수록 어딘가 부족해보였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그와 만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인들의 기념일에 데이트라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루이스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으로 찰싹 뺨을 감싸고 다시 한 번 숨을 내뱉었다. 어설프게나마 화장도 했는데 어떻게 보일지 몰라 자꾸만 두근거렸다. 약속시간까지 앞으로 삼십분. 그는 절대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으니 이제 더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떨리는 가슴 위에 차가운 손을 얹고 천천히 심호흡한 루이스는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티엔!”
“흠. 왔나.”
루이스는 만나기로 약속한 분수대 앞에 서있는 그를 보고 가볍게 뛰었다. 트리비아가 신는 것처럼 굽이 높은 것도 아닌 단화지만 평소에 신던 것보단 뛰기 힘들어 자연스레 걸음이 늦어졌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티엔은 팔을 풀고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양손이 빈 걸 본 루이스는 살짝 실망했지만 이제 막 만난 참이고 어련히 그가 알아서 다 계획을 세웠을 거라 생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화장이나 옷이 어색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티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죽 훑어보고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잘 지냈어요?”
“그래.”
제 생일을 티엔이 말도 없이 그냥 보내고 맞은 밸런타인에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이후로 제대로 시간을 내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한 달 만이었다. 티엔이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고, 루이스는 그의 팔을 잡고 한가로운 리버포드를 걸었다. 모처럼 먹구름이 끼지 않은 화창한 날씨에 데이트. 루이스는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봄바람이 한껏 들뜬 마음을 흔드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리버포드는 회사의 관할구역이지만 사람이 많은 데다 휴양지였던 덕에 세계 각국의 요릿집이 많았다. 그러니 포트레너드에서 데이트를 하기엔 리버포드만한 곳이 없었는데, 연인들의 기념일에 휴일이 겹쳐서 그런지 어디고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 사람이 많네요.”
“걱정마라. 예약해두었으니.”
그냥 한 말에 티엔은 루이스의 그의 팔을 잡은 손을 톡톡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슬그머니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흘긋 그녀의 안색을 살핀 티엔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순조로운 데이트는 완벽한 계획에서부터 시작한다. 티엔은 앞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앞에서 이래서 가기 싫었네, 어쩌네 하고 다투는 연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의 점심으론 제철인 숭어요리와 함께 언젠가 루이스가 맛있다고 했던 화이트 와인, 그 후엔 한창 흥행하는 영화를 보고 제법 괜찮은 차를 들여놓는 카페. 저녁은 중식집에서 먹고 그 다음은 봐서 제 집으로 가거나 루이스를 바래다줄 계획이었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티엔은 삼일 전에 예약을 마쳤고, 오늘따라 햇살도 좋고 루이스의 기분도 좋아 보였다.
좀처럼 꾸미는 법이 없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에 옅게 화장까지 하고 배시시 웃으니 안 그래도 청초한 사람이 막 피어나는 꽃처럼 고왔다. 덕분에 티엔의 가슴도 같이 떨렸지만 거리를 걷다보니 한 번씩 루이스를 돌아보는 다른 남자들 때문에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제 연인이 예쁜 것을 탓할 순 없지만,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불쾌할 따름이었다.
티엔은 곱게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린 덕에 드러난 루이스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늘 머리카락을 후드 안에 넣고 다니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이렇게 드러낼 바에야 차라리 다시 그 후드를 입히고 싶었다. 꽁꽁 숨겨두고 자신만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약해둔 식당에 도착한 티엔은 루이스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고개를 든 루이스의 화사한 미소에 미소로 답한 티엔은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아 계획한 대로 숭어요리와 화이트와인을 시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루이스는 종일 들떠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데이트 이후로 한 달 만이니 그렇게 자신을 만나는 게 좋았나 싶어 티엔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왜요?”
“그렇게 보고 있으니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루이스는 티엔의 솔직한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아치를 만들던 루이스는 티엔이 손을 내밀자 바로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 포개진 두 손의 온도가 같아질 쯤,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티엔은 숭어의 살을 발라 루이스의 접시에 덜어주었고, 루이스는 아무리 괜찮다 말해도 티엔이 말을 안 들을 걸 알기에 얌전히 생선살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맛나게도 먹는 게 보기 좋아 티엔은 제가 먹는 건 뒷전으로 하고 루이스를 먹였다.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옷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입으니 더 말라보여 잘 먹여야할 것 같았다. 맛있는 걸 먹이면 수줍고 간지러운 미소를 짓는데, 티엔은 루이스의 그 얼굴을 볼 때면 행복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카페로 향했다. 유난히 거리에 연인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티엔은 옆에 여자친구를 끼고도 루이스를 쳐다보는 남자들 때문에 점점 더 짜증이 났고, 내심 사탕을 기대하고 있던 루이스는 한 나절이 다 가도록 사탕은 줄 생각은 않는 티엔 때문에 점점 우울해졌다.
티엔 정이 기념일을 챙길 사람이냐, 하면 사실 루이스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다가 챙겨주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신경도 안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루이스는 내내 차가운 무표정으로 제게 말도 걸지 않는 티엔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속만 썩였다. 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이 저마다 손에 안고 있거나, 그녀들의 옆에 서있는 남자들이 들고있는 귀여운 포장의 상자를 보며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티엔, 저…. 혹시…….”
“무슨 일이냐.”
“으,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이스는 저녁을 먹고도 아무 조짐이 없는 티엔을 보며 자포자기해버렸다. 티엔은 루이스가 주저하는 것을 힘들어서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쉬었다 가자며 공원으로 들어갔다. 티엔이 벤치에 깔아준 손수건 위에 앉은 루이스는 티엔의 팔을 놓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혼자 멋대로 기대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이인데 이 정도 기념일정도는 챙겨줘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한 달 만에 만난 건데. 하지만 이런 걸로 속상해하는 게 유치하고 쪼잔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라 루이스는 티엔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실 거라도 사올 테니 잠시 쉬고 있어라.”
티엔은 제 눈을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그녀를 뒤로 했다. 티엔은 티엔 나름대로 낮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저기압이 된 루이스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분명 제 계획은 완벽했고, 루이스도 즐거워했는데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티엔은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되짚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리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생리 중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아직 루이스가 생리를 하려면 열흘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럼 대체 뭘까. 콜라 두 캔을 산 티엔은 미리 한 캔을 따서 들고 가며 제가 잘못 안 것인지 날짜를 다시 한 번 셌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도 이 쯤 만났던 것 같은데. 순간 티엔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티엔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설마. 혹시, 설마. 임신을 한 게 아닐까?
임신 초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티엔은 몸에 오르는 열기에 잠시 숨을 골랐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목이 타 미리 딴 콜라를 쭉 들이켰다. 루이스와 자신 사이의 아이를 상상하던 티엔은 그럼 연합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이는 누가 돌보고 제 집에 루이스를 들어앉힐 수 있는 것인지 현실적인 문제를 재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달려간 티엔은 벤치에 앉아있는 루이스 앞에 한 남자가 뭔가를 내미는 모습을 보고 발을 멈췄다.
“저, 그, 오늘 서점엔 안 나오셨더라구요. 저같은 게 루이스씨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아, 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날이 날이니까. 못 드리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머쓱한 듯 수줍게 웃으며 뒷머리를 만지는 남자와, 조심스레 그가 내민 상자를 받은 연인. 티엔은 차갑게 표정을 굳히고 다가갔다. 티엔을 발견한 루이스가 눈을 깜박인 순간, 티엔은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내 연인에게서 떨어져주지 않겠나?”
“아, 예, 예!”
“티엔!”
방금 전까지 꽃분홍빛으로 물들어있던 남자가 겁에 질려 달아나고, 루이스는 티엔을 말리려했으나 이미 남자는 혼비백산해 달아난 후였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내가 왜 내 여자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를 봐줘야하지?”
“나도 왜 이런 날 연인도 아닌 남자한테 선물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겠거든요?!”
티엔의 싸늘한 말과 눈빛에 여태껏 설움을 꾹꾹 참아왔던 루이스도 터져버리고 말았다. 분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른 루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면 또 다툴 것 같고, 티엔이 자신을 겨우 이런 거에 서운해 하는 속 좁은 여자라 생각할 것 같아 더 마주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문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티엔은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를 따라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루이스.”
“놔요.”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다오.”
“됐어요! 어차피 내가…!”
결국 눈물이 흘러넘치고 만 루이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기껏 예쁘게 꾸미고 나왔는데. 그래도 기념일이라고 내심 많이 기대했는데. 어쩜 완벽한 남자가 이럴 때만 무심한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이런 것 때문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성긴 얼음이 와그작 깨지는 것처럼 무너지는 자존심에 이를 악물고 티엔을 노려봤다.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했다.
“루이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냐.”
티엔은 천천히 루이스를 품에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연인을 안고 등을 토닥이자 루이스도 티엔의 등에 팔을 둘렀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글쎄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날카로운 결정검처럼 티엔을 가슴을 쿡쿡 눌렀다. 여자를, 그것도 연인을 울렸다는 양심의 가책에 티엔은 토를 다는 대신 루이스를 토닥였다. 남달리 사려 깊은 사람이니 아마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걸 제 무신경함이 건드린 모양이었다. 일이 아닌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티엔에게 연인이란 관계는 루이스가 처음이었고, 완벽하려 노력은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또 이렇게 그녀를 상처 입혔단 생각에 티엔은 죄인이 된 기분이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나를 만나러 온 날. 유난히 햇살이 좋고, 네가 햇살보다 더 예쁘게 웃어준 날.”
루이스는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티엔의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무뚝뚝하고 무신경한 남자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다 알면서, 그깟 사탕이 뭐라고. 밀려오는 후회와 자괴감에 루이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만가만 저를 달래려 등을 토닥이는 그 무거운 애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틀린가?”
티엔의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티엔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턱을 잡아올리려다 완강한 거부에 손을 놓았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지 않게 무릎 안쪽에 팔을 넣고, 허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은 그대로 루이스를 번쩍 안아올렸다.
“으앗!”
“이제야 겨우 얼굴을 보여주는구나.”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느냐.”
티엔은 제 목에 팔을 감은 루이스에게 씩 웃어보였다. 수줍게 붉어진 뺨이 붉은 노을을 받아 예쁜 다홍빛으로 물들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담았다.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티엔은 입술을 내밀었다. 살포시 눈을 감고 제게 다가오는 그녀와 가볍게 입술을 부비고, 루이스를 내려놓자 루이스가 발돋움을 해 다시 한 번 티엔에게 살짝 키스했다. 티엔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뺨을 엄지로 쓸다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연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럼 이제 가지.”
“어디로요?”
티엔은 대답대신 씩 웃으며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작고 고운 손은 티엔의 손 안에 충분히 들어오지만 언제나 이 손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잡아야할지는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거리를 걷다보니 가스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티엔의 집으로 가는 길, 문득 사탕가게가 눈에 띠었지만 루이스는 가게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을 뿐 더 이상 다른 여인들이 안고 가는 사탕상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제 손이 아플까 힘주어 잡지도 못하는 연인의 온기가 더 소중했다.
“……티엔?”
진열된 형형색색의 사탕에서 눈을 돌리는데 티엔이 사탕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런 거 없어도 되는데.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티엔은 사탕가게 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까지 루이스가 보던 사탕들의 값을 치르고 봉투를 루이스의 손에 들려주었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느냐.”
“네? 별로 사탕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닌데….”
루이스는 차마 말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사다준 게 기뻐 생긋 웃자 티엔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이트 데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한참 보고 있으니 먹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고 사다준 거라는 걸 알지만 루이스는 그게 더 기뻤다.
“고마워요.”
티엔은 다시 찾은 루이스의 미소에 겨우 시름을 덜었다. 이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루이스는 사탕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볼이 볼록 튀어나온 게 꼭 소녀같이 귀여웠다.
“다 먹을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루이스는 대답 대신 티엔을 올려다봤다. 오물오물 사탕을 굴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을 마주한 티엔은 반들거리는 루이스의 입술에 입 맞췄다. 달디 단 입술이 떨어지자 루이스는 입을 벌려 동그란 사탕을 내보였다 닫으며 사르륵 웃고, 티엔은 집 앞에서 주머니 안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길 모양이었다.
* 이틀이나 늦었지만ㅠㅠㅠㅠ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ts루이] 봄비 (0) | 2015.04.11 |
---|---|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2015/03/12
“그만 하고 와서 앉아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티엔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티엔은 루이스가 부르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돌아가기 위해선 이 사람이 필요하다. 바위 위에 앉은 루이스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장작더미를 뒤적였다. 또르르 굴러 나온 새까맣고 투박한 감자 네 개. 껍질은 새까맣게 탔지만 나뭇가지로 이리 저리 굴리니 껍질이 타서 떨어진 곳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걸 보니 또 식욕이 돌아 티엔은 루이스가 앉은 것처럼 적당한 돌덩이 위에 앉았다.
“아직 뜨거우니까 손대지 말아요.”
한번 허기가 지니 나무가 타는 냄새마저 식욕을 돋웠다. 지금 만졌다간 입에 넣기도 전에 손을 델 것을 알지만 눈앞에 먹을 걸 두고도 먹지 못하는 건 꽤나 인내가 필요했다. 티엔이 감자를 빤히 보며 침을 꼴깍 넘기는 사이 일어난 루이스는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밟았다. 놀란 티엔이 쳐다보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불을 끄는데, 티엔은 기껏 피운 불을 꺼트리는 까닭을 몰라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해가 지면 더 추워질 텐데?”
“해가 지면 불빛도 더 잘 보이죠.”
티엔은 모든 주도권을 뺏긴 채 휘둘리는 게 묘하게 불쾌해 시선을 돌렸다. 듣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루이스는 마지막 불씨까지 꺼트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감자를 이리저리 옮기다 까맣게 탄 껍질을 반 벗겨내 티엔에게 건넸다. 기분이 상했던 티엔은 잠시 감자와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곤 감자를 받아들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당장은 포슬포슬한 감자를 주린 배에 넣는 게 더 중요했다.
티엔은 제 몫의 감자 두 개를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고 물을 마셨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감자는 소금도 치지 않고 구웠을 뿐인데도 맛있었다. 그리고 먹을 게 들어갔는데도 허기가 달래지기는커녕 더 배가 고파지고 말았다. 어릴 적 정관정요를 다 외우지 못해 스승님이 벌로 다 외울 때까지 식사를 금지했을 때도 이렇게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티엔이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루이스가 제 몫을 하나 양보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티엔은 염치가 없어 선뜻 받지 못했다. 아직 하나도 채 먹지 않은 루이스는 입을 오물거리며 감자를 집어 내밀었고, 티엔은 못 이긴 척 받았다. 티엔은 마지막 감자를 루이스가 하는 것처럼 천천히 먹었다. 물론 그 하나를 먹는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허기가 달래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감자를 먹는 사이 하늘엔 검은 장막이 드리웠다. 둥근 달과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장식하고, 루이스는 챙겨온 모포 한 장을 티엔에게 건넸다. 황궁을 떠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침상도 없이 냉기가 올라오는 땅에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자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티엔이 모포를 들고 가만히 있자 루이스가 다가와 모포를 삼단으로 접어 불을 피웠던 자리 옆에 펼치곤 두꺼운 쪽은 깔고 나머지 한쪽과 외투를 덮고 자야한다고 일러주었다. 티엔은 방금 먹었으니 바로 누울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내일도 길을 가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했고, 어차피 불을 피울 수 없다면 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성 싶었다.
티엔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양손으로 팔을 쓸며 온기를 더하는 사이, 루이스가 물통을 담았던 주머니에서 통을 꺼냈다. 빈 주머니에 불을 지필 때 감자와 함께 넣었던 둥근 돌은 아직도 뜨거워 장갑을 낀 손으로도 못 집고 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담아야 했다. 주머니 안에 뜨거운 돌을 넣은 루이스는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던 티엔에게 건넸다.
“안고 자는 게 없는 것 보단 나을 거예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무엇이냐 묻는 대신 저를 빤히 쳐다보는 티엔에게 루이스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엔 그저 고집 센 귀족 도련님이겠거니 했는데, 힘든 길도 힘들다 소리 한 번 않고 따라오는 게 장하기도 하고 평생 배고프고 추운 걸 몰랐을 사람이 불평 한 번 않는 게 놀랍다 못해 신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아무리 말단 관직에 서출이라 해도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으스대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 귀한 집 자제분은 명령도 강요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하다 뿐이지 정갈한 말투와 행동거지가 옛 성현들이 그리는 선비의 모습 그대로라 루이스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굳센 입술이며 침착하지만 강한 눈매, 짙은 눈썹.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루이스는 이 년 전 헤어진 친구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험한 산을 타며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몇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며 떠돌았다. 자신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익힌 것들은 루이스가 이런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산을 헤매던 그때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 그때도 둘이 감자를 캐 나눠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금도 물도 없이 참 잘도 먹었단 생각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더러 가끔씩 외로워질 때면 그냥 그녀를 따라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늙은 주인어른을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남기로 한 걸 후회하진 않지만 가끔 그 아가씨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긴 했다. 귀한 가문의 따님이니 아마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루이스는 추억이 된 기억을 회상하며 외투의 끈을 풀었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나았다. 지금은 적이 나타나도 어느 정도까진 대처할 수 있고, 식량도 있는 데다 야영 경험도 있고 추적이 붙은 것도 아니니 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루이스가 외투를 이불 대신 덮고 누우려는데, 티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안개가 걷힌 밤하늘엔 크고 둥근 달이 은은하게 빛나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뜨거운 돌이 든 주머니의 온기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뱉었다. 뿌연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밤하늘의 광경에 넋을 잃고, 경치에 취한다. 티엔은 먼 산골로 유배 간 이들이 자연을 노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을 벗 삼아 술 한 잔에 시를 읊는 것이야말로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닌가.
티엔은 그런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적어도 티엔에겐 허락되지 않은 삶이었다. 훌훌 털고 떠나버리기엔 제 어깨에 짊어져야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 모두를 떨쳐버리기란 쉽지도 않을 뿐더러 티엔은 제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가며 얻은 자유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쾌해진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스가 깔아둔 모포에 누웠다.
딱딱하고 냉기가 올라오는 잠자리가 불편해 이리저리 뒤척이던 티엔은 몸을 모로 뉘었다가 다시 바로 누웠다. 주머니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전부 막아주진 못했고, 군데군데 돌이 박힌 돌 때문에 어떻게 누워도 등이며 다리가 욱신거렸다. 티엔이 자리를 못 잡고 몇 번 쯤 자세를 바꾸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티엔이 고개를 들자 루이스는 덮고 있던 외투를 티엔에게 건넸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민 두꺼운 외투를 받자 루이스는 다시 모포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티엔이 외투를 돌려주려 했지만 루이스는 티엔에게 등을 돌리며 난 익숙하니 괜찮다고 말하곤 길게 하품했다.
“흐아암. 그냥 아래 한 겹이라도 더 깔아요. 돌이 식으면 더 추울 거예요. 해가 뜨면 또 쉴 새 없이 걸어야 하니까 뒤척이지 말고 자둬요.”
티엔은 한사코 돌려주려고 외투를 넓게 펼쳐 루이스의 모포 위에 덮으려 했다. 루이스의 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단호함에 손을 거뒀다. 티엔은 루이스에게 외투를 돌려주는 대신 덮고 있던 제 외투를 아래 깔고 발끝부터 배를 덮는 게 고작인 루이스의 외투를 몸 위에 덮었다.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루이스의 외투와 달리 티엔의 외투는 늑대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값은 물론 보온성도 비교할 수 없었지만 열을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과 하나를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루이스의 친절을 바닥에 깔 수 없었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우니 아까보단 한결 나았다. 루이스의 외투 위에 모포를 한 겹 덮긴 했지만, 그래도 어깨며 가슴이 휑해 외투를 끌어올리자 이번엔 발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키차이가 있다 보니 몸을 다 덮기엔 외투가 짧았다. 발과 가슴 사이에서 고민하던 티엔은 그대로 외투의 모자 부분으로 목을 감쌌다. 외투를 덮지 않아도 모포로 덮으면 바람은 피할 테고, 두꺼운 가죽신발에 안에는 부드러운 털을 덧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고 가만히 숨을 쉬고 있으면 작은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 바람에 나무의 잔가지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작은 숨소리. 티엔은 그 소리를 듣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하루종일 걷다보니 지치기도 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하늘 가득 펼쳐진 별이 저마다 반짝이는 그 절경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황궁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찬란하고도 순수한, 때묻지 않은 별빛. 궁에선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 없었는데. 티엔은 그 별빛에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르지 않은 흙의 축축한 냄새, 나무와 풀이 내는 성긴 겨울의 냄새. 숨을 뱉을 때마다 뿌옇게 흐려지는 하얀 입김. 티엔은 변하지 않는 하늘을 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티엔의 호흡이 겹쳐지고, 천천히 눈이 감겼다.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0) | 2015.04.11 |
---|---|
[티엔ts루이] White Day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0.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2015/03/06
티엔이 멀건 죽으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루이스는 바삐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거친 외투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짐을 꾸리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티엔은 루이스가 한쪽 벽에 걸어놓은 제 외투와 갑옷, 검을 확인하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져 계곡을 떠내려온 것치고 티엔의 몸은 멀끔했다. 어딜 크게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긁힌 상처 하나도 없는데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몸이 개운하고 상쾌했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낡았지만 깨끗한 면옷을 집어들었다. 짐을 꾸리던 루이스가 지나가며 입고 있던 비단옷은 아직 덜 말랐으니 귀한 옷이면 들고 가라고 말했지만 티엔은 고개를 저었다. 옷 한 벌에 연연할 것도 아니거니와 티엔은 애초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린 것은 평민의 옷이라서가 아니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데다 날렵한 루이스의 몸에 이런 옷이 맞을 리 없으니 분명 루이스를 거둔 이의 것일 텐데,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의 옷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일단 성의를 생각해 입었지만 그래도 소매가 짧았다. 어쩔 수 없는 지라 훤히 드러난 손목을 매만지던 티엔은 조용히 혼자 갑옷을 입었다. 출병할 때보다 더 결연한 의지로 매듭을 묶고, 외투를 걸치고 검까지 차고 방을 나오니 다 짊어질 수 있을지 의뭉스러울 정도의 짐이 나와있었다. 군장을 비롯한 모든 짐싸기는 간결하고 정말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기본이거늘. 티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길을 떠나기 전부터 괜히 동행의 심기를 어그러뜨릴 필요도 없거니와, 지금 티엔은 머리를 숙여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종이로 싼 뭉치들이 서너개, 두꺼운 모포가 둘, 그리고 낡은 천으로 둘둘만 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모자가 달린 긴 외투를 덧입은 루이스는 바닥에 꿇어앉아 능숙하게 늘어놓은 짐들을 한 데 모았다. 두꺼운 모포를 착착 접는 것부터 시작한 짐싸기는 금새 하나의 뭉치가 되어 등에 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요령좋게 어깨끈까지 만든 루이스가 짐을 지고 힘을 주며 일어났다. 그런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티엔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짓에 의미를 모르고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게 없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작은 집을 나서니 바깥은 온통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해 햇빛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내리쬈다. 아직 입춘이 되지 않은 데다 북쪽 땅인데도 싹을 틔운 것이 신기해 나무들을 둘러보며 걸었다. 비가 왔는지 땅이 축축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 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람이 다닌 티가 나는 좁은 길은 루이스가 다니며 만든 길이리라. 나무와 하늘을 둘러보던 티엔은 곧 흥미를 잃고 루이스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이 다 가리도록 진 짐의 가장 위, 천으로 감쌌지만 감출 수 없는 형태의 물건에 티엔은 한 손으로 나무를 짚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가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뱉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 같이 멈춰서니 루이스가 멀쩡한 길을 두고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고, 티엔은 그저 인적이 드문 길로 가겠거니 하며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 지나자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었다. 분명 남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일 텐데 오르막이 계속되고 길도 없는 나무 사이를 헤쳐가려니 힘은 힘대로 드는데, 점점 숲도 우거지는 게 수상해 티엔은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거지?”
“청 주둔지로 가야죠. 그나마 14군이 제일 믿음직하니 거기로 갈 거예요.”
루이스는 앞서 걸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청의 주둔지, 거기에 14군이라는 소릴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냥 막역하게 청의 영역까지가 아니라 딱 짚어 말하는 게 미심쩍었다.
“왜 하필 14군이지? 황자들, 아니 황자님들이 계신 곳도 있지 않나?”
티엔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이스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타박 대신 설명을 했다.
“아무리 청의 사람이라도 그렇게 좋은 검과 갑옷은 구하기 힘들죠. 그렇다면 꽤 명망높은 귀족이란 뜻인데, 황자들은 자신의 세력에 따라 당신을 박대할 수도 있고 몰래 제거할 수도 있죠.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도와줄 사람은 곰 장군밖에 없어요.”
간단하지만 타당한 논리에 티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제 옷차림만 가지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이런 곳에서 썩히긴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루이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등을 가릴 정도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루이스와 짐이라곤 봇짐 하나도 들지 않은 티엔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매일 무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다, 어마마마나 황제폐하, 황후마마께 문안을 여쭙느라 꽤 걷는 편인데도 쉬지도 않고 험한 산길을 가다보니 절로 숨이 찼다.
“서둘러요, 해가 지면 더 갈 수 없으니까.”
결국 티엔은 조금씩 뒤쳐졌고, 앞서 걷던 루이스가 뒤쳐진 티엔을 기다리느라 멈춰서고 다시 길을 가는 게 반복됐다. 가끔 루이스는 갔던 길을 되돌아와 같이 걸으며 아직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으니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했지만 티엔은 오히려 그 말에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힘들 일 하나 없는 황궁에서보다, 오늘 깨어났을 때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더더욱. 남자로서 저보다 어리고 왜소한 이에게 체력으로 밀린다는 건 퍽 자존심 상하는 거라 티엔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떨어지기 전에야 나온 평지에 티엔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오르막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이 붉게 물들자 바삐 걷던 루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왔고 지금 제가 어디쯤 왔는지 모르는 티엔은 루이스가 더 걸을 생각을 않자 안심하는 한편,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골랐다.
두리번거리던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루이스를 따라 들어간 티엔은 루이스가 너른 돌 아래 짐을 내려놓는 걸 보곤 팔짱을 꼈다. 온종일 산을 타다 겨우 평지를 만난데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야영을 준비하는 게 영 못마땅했다.
“얼마나 온 거지? 어제가 보름이었으니 달빛을 따라 더 가도 되지 않나?”
“달이 밝아서 안 돼요.”
루이스의 단호한 말에 티엔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한밤중에 험한 길을 가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티엔은 마음이 급했다. 안전하게 가는 게 엿새, 루이스가 말한 게 사나흘, 밤낮없이 걸으면 하루 하고 한나절. 대체 어떤 길로 어떻게 가기에 해가 지면 꼼짝도 않고 사나흘이라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한나절을 걷는 동안 말 한 마디 않고 따라왔지만 정말 믿어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가 가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길안내를 하게 할 수도 없었다. 자칫 제게 앙심을 품고 안격의 소굴로 가서 팔아넘긴다거나, 혼자 헤매게 두고 갈 수도 있다. 티엔은 지금 제 처지를 알기에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정말 그렇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티엔은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재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저울질했다.
루이스는 티엔이 가만히 서있는 데도 개의치 않고 주위에서 나뭇가지며 마른 나뭇잎을 모아다 불을 붙였다. 나무가 타는 냄새에 티엔은 복잡한 심경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붉은 눈동자에 맞서 불쾌함을 표하자 루이스는 짐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다짜고짜 티엔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날아드는 물체에 놀란 티엔은 냉큼 그것을 잡아챘다.
묵직한 주머니를 흔들자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물이나 술인 것 같은데, 이걸 주는 의미를 몰라 루이스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이미 불이 오른 장작더미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티엔은 주머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다 주머니의 매듭을 풀고 안에 든 나무통의 마개를 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게 술은 아닌 것 같은데 물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망설이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냥 물이에요.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실 테니 주세요.”
“…….”
생각을 읽혀 민망해진 티엔은 물을 들이켰다. 깨어나 먹은 죽 이후로 처음 입에 대는 물은 유독 시원하고 상쾌해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갈증을 해결한 티엔은 물통에서 입을 떼고 입가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마개를 닫아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자 티엔을 보고 있지도 않던 루이스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고, 바람소리와 마른 장작이 타며 틱틱 불티가 튀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티엔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온 길을 보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며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그 아래 드리운 겨울산의 풍경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문득 황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그리던 그녀를 떠올린 티엔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제가 행방불명된 지 꼬박 이틀. 내일이면 사흘이 되니 황도에 연락이 갈 것이다. 말은 안 해도 제가 아버지처럼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리진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명절이면 다른 황숙들이 황제께 문안을 여쭙고 복진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때도 티엔의 어머니, 1황자 적복진은 홀로 그 모진 풍파를 견뎠다.
그렇기에 티엔은 어머니를 위해서 더 완벽한 아들이 되고자 했고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해 침묵했다. 어릴 적 왜 제겐 아버지가 안 계시느냐 여쭈었을 때 어머니의 그 슬픈 미소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티엔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패륵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하나뿐인 아들로서 어머니께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돌아가야 했다.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0) | 2015.04.11 |
---|---|
[티엔ts루이] White Day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0.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2015/02/28
第 二 章. 高山流水
티엔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 말을 달렸다. 점점 더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땅이 단단해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채찍질했다. 길이 있다면 찾으면 그만. 하나라도 생포해 신출귀몰하는 경로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곳곳에 숨은 안격을 소탕할 수 있을 터였다. 따라오던 병사와 장수는 티엔의 말을 쫓지 못해 뒤쳐졌지만 티엔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추격을 포기하지 않자 앞서가던 다섯 중 둘이 고삐를 돌려 방향을 틀었다. 티엔은 그들을 쫓는 대신 세 사람을 쫓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협곡으로 들어갈 테고, 그럼 피차 길을 모르니 승산이 있었다. 달리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끝. 티엔은 거의 잡았단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쫓았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말을 멈춰 세운 이들은 물러날 곳이 없는 절벽에 다다라 티엔을 마주했다.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죽겠다.”
눈치를 보기 바쁜 셋은 그래도 쪽수로 어찌 해보려는 듯 했지만 티엔의 당당한 태도에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척 봐도 귀공자스러운 데다, 여유롭기까지 하니 셋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인지 아니면 그저 허세를 부릴 뿐인 애송이 도련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사이, 셋을 두고 다른 길로 빠졌던 두 사람이 티엔의 뒤에서 동료들에게 눈짓했다. 부싯돌과 폭약을 본 그들은 여유롭게 비죽이며 티엔에게 말을 걸었다.
“하, 귀한 도련님께선 검을 께나 배우신 모양인데. 그래도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까?”
“여긴 말이오, 굶주린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거든.”
“네놈들의 묘자리를 쓰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따라와라.”
폭약에 불이 붙은 걸 본 셋은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폭탄을 던지면, 바로 말을 달려 도망간다.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고, 물이 있다 해도 그 전에 어디라도 부딪혔다간 꼼짝없이 저승길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신호를 기다렸다.
수상쩍은 행동을 눈치 챈 티엔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불이 붙은 폭약이 날아들고, 벼랑 끝에서 눈치를 보던 안격들이 티엔을 지나쳐갔다. 그들이 갑자기 달려들자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울고, 티엔은 손 쓸 수도 없이 굉음을 내며 터지는 폭탄에게서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터진 열기와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감각에 눈을 번쩍 뜨자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말과 무너져 내지는 바위, 그리고 푸른 하늘가 들어와 티엔은 고삐를 단단히 쥐고 안장에서 발을 뺐다. 점점 추락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티엔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곡물의 겉이 얼어있지 않기만을 빌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잃지 말자고 속으로 빠르게 되뇌었으나 몸을 덮치는 강한 충격에 티엔의 정신은 아득한 어둠 저 편으로 멀어졌다.
멀어져가는 빛무리.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짙은 어둠 속에선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숨이 막히고, 이내 발버둥조차 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빠지자 할 수 있는 거라곤 저 멀리 아득하게 빛나는 빛무리에 손을 뻗는 것 뿐이었다.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이는 빛은 얼핏 푸른 용의 형상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일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빛무리가 사라지자 남은 건 칠흑같은 어둠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 홀로, 얼마인지 모를 시간동안 티엔은 모든 것을 잊은 채 평안한 고요에 잠겨 있었다. 차갑지만 부드럽게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의식을 깨우고 티엔은 그제야 제 의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온몸이 물 먹은 솜마냥 무거웠지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낯설고 투박한 흙벽이 보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티엔은 숨을 죽였다. 제게 손이 뻗어오는 게 느껴지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손목을 잡아챈 티엔은 그를 끌어당기는 반동을 이용해 일어났다. 순식간에 역전된 위치. 양손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올라탄 후에야 티엔은 제가 제압한 사람을 바로 봤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깜박. 그 모습이 어릴 때 후원에서 잡은 토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찰나, 허리를 때리는 둔탁한 통증에 티엔은 눈살을 찌푸리며 움켜쥔 손목을 더 세게 잡았다.
“악! 이거 놔요!”
발버둥 치며 몸을 비틀더니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티엔은 한 덩어리가 되어 침상에서 떨어졌다. 떨어지며 부딪힌 충격에 손을 놓친 사이 다시 위치가 역전되고, 티엔은 목덜미를 콱 잡아오는 손에 쿨럭였다. 토끼같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먹잇감을 물어뜯을 것 같은 맹수의 눈이 되어 티엔을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 움찔한 티엔은 반격하려 손을 뻗었지만 어깨에서 찌르르 퍼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티엔은 뭐가 잡히는 게 없을까 하고 바닥을 더듬거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저항을 멈췄다. 안격에게 잡혀 포로가 된 것이라면 이렇게 저를 지키는 감시인 따위와 몸싸움을 하며 힘을 뺄 필요가 없다. 티엔이 저항하지 않자 제 위에 올라탄 이 역시 손을 거뒀다.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단단히 목을 틀어쥐던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한숨을 쉬며 일어나 손을 뻗는데, 티엔은 그 의미를 몰라 멀뚱거리다 침상을 짚고 일어났다.
“하아…. 정말이지…….”
“여긴 어디지?”
“다짜고짜 사람을 공격해놓고 하는 말이 겨우 그겁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티엔은 제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는 낯선 이를 향해 물었다. 뚱한 얼굴에 팔짱을 끼고 티엔의 무표정을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차분히 티엔을 훑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에 티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에 작은 한숨소리가 더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뜬 낯선 이는 다시 티엔을 바라봤다.
“당신, 계곡에 쓰러져있었어요. 여긴 내 집이고, 청의 주둔지까진 한참이죠. 이 정도면 대답이 됐습니까?”
티엔은 그 소리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 건 둘째치고,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거니와 음흉한 숙부들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우위를 점령했단 생각에 방심하고 만 제 안일함과 경솔함이었다. 장차 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이란 자가 이리 쉽게 함정에 휘말려서야 황제 폐하는 물론 백성들을 볼 낯이 없다.
티엔은 인상을 쓰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회와 반성은 모든 일이 해결 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당장은 다소의 굴욕을 당하더라도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 티엔은 조금 전에 들은 말을 곱씹었다. 계곡에서 발견됐고 주둔지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면 계곡물을 타고 흘러온 것일 텐데, 그렇다면 이곳은 협곡의 안이라는 소리였다.
전부터 협곡을 타고 내려가 급습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던 티엔은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잘 빠져나가면 협곡의 길을 아는 게 전화위복이 될 지도 모른다. 티엔은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다 퍼뜩 머릿속을 스친 위화감에 눈을 떠 낯선 이를 쏘아봤다.
“넌 협곡 안에 혼자서 뭘 하는 거지? 분명 마을은 안격에 의해 몰살당했을 텐데.”
티엔의 싸늘한 말에 화롯가에 쭈그려 앉아 불을 지피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계곡에서 사람을 건져 데려왔다고 무조건 은인이라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런 험한 곳에 혼자 사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티엔은 정보를 곱씹는 것보다 눈앞의 사람이 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게 우선이었음을 되새기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집주인은 무기로 쓸 만한 게 뭐가 있을지 훑으며 퇴로를 살피는 티엔이 무색할 정도로 무심했다.
우드득 소리가 나도록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화로를 뒤적이다,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양손을 들어 보이는 것은 해칠 의사가 없다는 뜻이지만 티엔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 빼지 않아도 돼요. 마을이 그렇게 되기 전부터 나는 고아였고, 죽 여기에 살았으니까. 청의 귀족이시니 각 변경에 왕실의 기록보관소가 있다는 건 아시겠죠. 여긴 그 관리인 처솝니다. 전 관리인이었던 윌리암 헌트 대인이 세상을 뜬 뒤론 아무도 찾지 않지만.”
담담하지만 회한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티엔은 이게 거짓이 아닌 진실임을 눈치 챘다. 권모술수와 암투가 판을 치는 황도에선 이렇게 진심을 숨기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말하는 게 드물거니와, 제게는 차갑기만 하던 눈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부드럽게 휘며 이곳에 없는 누군가의 모습을 그렸다. 티엔은 그제야 조금 경계를 풀고 아직 은인과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름은?”
“빨리도 묻는군요.”
대답 대신 미소를 띠운 그는 여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선이 고운데다, 젖살이 빠지지도 않은 앳된 얼굴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저 머리를 자르거나 틀어 올려 상투를 틀지 않았으니 열일곱은 안 됐겠거니 지레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엔은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은인은 티엔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불이 피어오르는 걸 가만 지켜보기만 했다. 순하게 생겨선, 아무래도 처음 공격한 일을 마음에 담아뒀거나 고집이 센 성격인 모양이라 티엔은 한 수 접기로 했다.
“내 기억해두겠다. 돌아가면 확실히 보은하지. 하지만 그러려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뭐, 그도 그렇네요.”
티엔은 고귀한 황손이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부리면 부렸지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그것도 고아에 불과한 평민의 비위를 맞추려니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온 말은 티엔이 생각한 것보다 무뚝뚝하고 시큰둥했다. 티엔으로선 어렵게 한 말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시큰둥하고 쌀쌀맞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티엔이 눈치를 살피자 은인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었다. 고개를 들어 티엔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토끼의 것이 아니라 맹수의 것에 가까웠지만 티엔은 피하지 않았다.
“루이스. 성은 없습니다.”
“……티엔. 티엔 정이다.”
루이스라는 이름은 그에게 퍽 잘 어울렸다. 한겨울의 눈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어감이 혀끝에 맴도는 게, 박하사탕을 머금은 것 같기도 했다. 이름을 말하곤 제 내면을 꿰뚫어보듯 바라보는 눈빛에 티엔은 그만 신분을 숨겨야한다는 것도 잊고 본명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열다섯에 패륵의 지위를 하사받은 뒤로는 친어머니조차 불러주지 않게 된 이름이었다. 어째 자꾸 실수만 연발하는 것 같아 목이 탔다. 어차피 정씨가 하나인 것도 아니고 이런 변경의 사람이 황족에 대해 뭘 알겠냐마는, 티엔은 말해놓고 혹시라도 루이스가 제 정체를 알아챌까 긴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 당신의 갑옷과 검은 저기 걸어뒀으니 몸이 낫거든 가세요. 청의 주둔지까진 걸어서 엿새면 될 겁니다.”
“잠깐.”
방을 나서려던 루이스가 티엔의 말에 돌아봤다. 엿새라니, 티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협곡이 험난하다고 길다 해도 육일씩이나 걸릴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흘씩이나 걸린다니, 대체 얼마나 떠내려 왔단 말인가. 티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곤 말했다.
“물론 협곡을 따라 밤낮을 쉼 없이 걸으면 하루하고 한나절이면 갈 수 있죠. 하지만 그건 여기가 안전할 때의 얘기고, 지금 이곳은 안격이 둥지를 튼 후예요. 당신과 그들, 누가 더 유리할지는 손바닥을 뒤집듯 뻔하죠. 안전한 길을 일러줄 테니 동이 트거든 걷기 시작해서 해가 지면 숨어요.”
티엔은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하나로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루이스는 대번에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티엔은 그럴수록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결국 인상을 쓰며 루이스가 티엔을 바라보자 티엔은 용건을 말했다.
“네가 필요하다.”
갑작스런 말에 놀란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엔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절실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그 눈빛에 루이스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티엔을 노려봤다.
“난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줄 수 있는 돈도 명예도 다 내겐 부질없으니 길잡이로 고용하려는 생각일랑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너 역시 청의 백성이 아닌가?”
“나라는 내게 베푼 게 없는데, 내가 져야 할 의무가 있나요? 만약 있다 해도 당신은 내게 명령할 수 없어요.”
냉소적인 말에 티엔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데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할 수 없거니와 루이스의 말엔 감정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티엔은 일순 드러낸 감정을 언제 그랬냐는 듯 감추고 태연을 가장하는 루이스를 보곤 손목을 놓았다. 루이스는 차갑게 식은 무표정으로 손목을 매만졌고, 티엔은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패륵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은 전부 저희가 지게 됩니다. 그것만 기억해주세요.’ 떠나기 전, 브루스의 심복인 마틴 챌피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저 하나를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책임을 덮어쓸 걸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 티엔에겐 회복을 기다릴 시간도 숲을 헤맬 시간도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정패륵을 찾기 위해 협곡을 헤매고, 또 누군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말싸움을 하고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게 분명했다. 티엔은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하루라도, 한 시라도 더 빨리 돌아가 그들의 근심을 더는 것. 그것이 가장 급했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책임은 전부 애꿎은 사람이 지게 돼. 무고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을 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해야해. 그러니…, 부탁한다.”
티엔은 손마디가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움켜쥐며 루이스의 등에 대고 말했다. 더 상대하지 않으려는 듯 방을 나서던 루이스는 티엔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그러고 있기를 얼마. 루이스가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손목을 매만지던 루이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방 안을 느릿하게 걸어 다니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일말의 망설임을 품고 티엔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 했다. 티엔은 제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속임수도 없었기에 떳떳하게 루이스를 마주했다. 침묵이 이어지고 루이스의 공허한 걸음이 늘었지만 티엔은 인내심을 갖고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요. 완전히 계곡을 따라 최단경로로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걸으면 사나흘 정도 걸릴 거예요.”
티엔은 루이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하루를 꼬박 잤으니 배가 고플 거라며 죽을 가져오겠다고 방을 나갔다. 과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티엔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하늘이 돕기를 바라며 하루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0) | 2015.04.11 |
---|---|
[티엔ts루이] White Day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0.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0.
2015/02/25
* 청조를 기반으로 한 동양 판타지 주의.
맑게 갠 하늘 아래, 훤칠한 금발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미남 하나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관도 아닌 그가 용이 잠들어있다는 협곡, 서북의 변경에 장군 하나만 믿고 따라온 지도 어언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아….”
“마틴,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맑게 갠 하늘 아래, 우중충한 먹구름이 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금발의 미남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다가와 축 쳐진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은 14주둔지의 장군 브루스 보이틀러는 일어나려는 그를 앉히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겨우내 부쩍 자란 청년은 이제 한 달 후면 열일곱이 되지만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진 못했고, 감정을 숨기거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워낙 어릴 때부터 봐와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브루스는 다른 수행원들이나 부하들보다 마틴을 아꼈다. 한미한 집안 출신에, 믿을 구석이라곤 제 능력과 브루스밖에 없는 마틴은 이내 다른 장수들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놀림 받기 일쑤였기에 브루스는 또 그런 일을 당했겠거니 했다.
아무 말 없이 마틴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을 못 맞추고 땅만 보던 마틴은 잔뜩 풀이 죽어 투덜거렸다.
“이번엔 황손 마마님이 오신다면서요. 능력도 인품도 뭣도 없는 2황자도 저렇게 뻐기는데 거기에 하나 더라니, 이번엔….”
“마틴!”
브루스는 당장이라도 황족모욕죄로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마틴의 말을 멈췄다. 그제야 마틴은 아차 싶었던지 브루스의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마틴 혼자의 책임이 아니라, 브루스까지도 사단이 날 터였다. 브루스도 주위를 잠시 살피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마틴의 양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마틴. 그분들을 모시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다. 내 앞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절대 그런 불경한 말을 해선 안 돼. 알겠느냐?”
마틴은 대답 대신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브루스가 물러서지 않고 마틴을 바라보자,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장 어제만 해도 엘리어트가 대낮부터 술에 취한 2황자의 말도 안 되는 시비에 꼬박 반나절을 추운 날씨에 무릎 꿇고 있던 걸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는 데다, 브루스의 공을 가로채는 건 물론 다른 장군들과의 회의에 자꾸만 신분을 들먹이며 어깃장을 놓는 것까지 생각하면 또 다른 황족이 오는 게 반갑지가 않았다.
서북의 변경, 청의 14 주둔지. 숭고한 그랑플람의 의지를 받드는 브루스 보이틀러의 주둔지를 사람들은 곰의 아성이라고 불렀다. 살갗이 살짝 긁히기만 해도 호들갑을 떠는 귀하디귀한 황족님네들이 다른 곳도 아닌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곧 죽기는 싫지만 공은 세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순 가로채기로. 마틴은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않고 허허 웃고 마는 브루스가 답답했지만 마틴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무력하고 한심해 어깨를 늘어뜨리자 브루스는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처럼 마틴의 등을 두드렸다.
“마틴. 정패륵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2황자님과는 분명 같은 황족이시지만, 너도 그분께 배울 게 많을 게다.”
자상한 브루스의 말에 마틴은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브루스는 황제를 오랜 시간 가까이서 모신 신하 중 하나였고, 마틴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를 위해 일한 노장이자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황제도 선뜻 변방의 중심을 맡기고 아들과 손자를 보내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마틴은 납득할 수 없었다.
브루스는 황실의 일은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황제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니 맡은 바 임무를 다하라고만 했지만 마틴은 이제 더이상 브루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소년이 아니었다.
1황자는 황후 소생이지만 서북을 돌아본다는 말과 함께 방랑을 떠나 황도로 돌아오지 않은지 벌써 십년이 넘었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2황자가 태자가 될 법 하건만 황제는 아직까지 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일찌감치 친왕으로 봉해 다른 지역을 통치하게 한 다른 황자들이나 너무 어려 유모 치마폭에 싸여 있는 황자들과 달리 곁에 두고 있는 황자들은 황제의 의중을 살피며 어떻게 하나라도 공을 세워볼까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이었다. 서북 땅에 안격이라는 무리가 국경을 넘보며 대치하기를 수십 년, 그들이 빼앗아간 땅을 되찾으면 그것이 곧 황위를 넘볼 기회가 되니 너나할 거 없이 오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용맹하게 전방에 서기라도 하면 모를까, 고작 곰의 등 뒤에 숨어 뭐라도 떨어지는 게 없을까 전전긍긍하는 용의 후손들이라니. 마틴은 대놓고 브루스에게 공을 세워야 하니 어서 출전 준비를 하라 다그치던 2황자와 그의 동생인 6황자를 떠올리고는 인상을 썼다. 이래서야 황족에게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타고난 것이라곤 혈통밖에 없는 2황자나 간신배의 전형인 6황자도 황실의 자손이라는 것 하나로 얼마나 뻐기는데, 이제 올 정패륵은 또 어떨 런지. 정패륵은 아직 열아홉밖에 안 됐지만 1황자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태어나기 전부터 용의 기상을 타고나 성군이 되리라는 예언까지 받아 문무를 겸비한 자라던데, 과연 소문과 다를 런지 어떨 런지.
마틴은 브루스를 찾아온 병사가 패륵께서 오고 계시다는 말을 전하자 브루스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보이는 행렬과 함께 푸른 용이 그려진 깃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띠었고, 마틴은 브루스를 따라 걸음을 빨리했다
마틴은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곤 브루스의 뒤에 섰다. 말이 달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그 다음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의 청년이 눈에 띠었다. 그를 본 브루스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자 대열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찬바람에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와 말발굽소리가 병영을 감돌고, 이내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온 청년이 주위를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모두 일어나라.”
“신, 브루스 보이틀러. 정패륵을 뵈옵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일단 내 병사들에게 막사를 칠 곳부터 일러줬으면 좋겠군. 꼬박 열흘을 달려왔으니 피곤할 게요.”
간단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낮은 목소리. 정패륵은 마틴이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이게 진짜 황족이구나 싶을 정도로, 황족 특유의 검은 머리칼을 빼면 특별한 것도 없는 2황자와 달리 걸음걸이나 말투, 태도에서 정갈한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것도 모자라 도착하자마자 아랫사람을 챙기는 모습에 마틴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마틴은 미리 브루스가 비워둔 자리를 일러주곤 냉큼 브루스의 막사로 따라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상황과 세력분포를 묻고는 브루스의 말을 경청하는 정패륵의 모습에 마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성군이 될 자질을 타고났다더니, 소문은 틀린 게 없었다. 오히려 소문보다 믿음직한 실물이 앞에 있으니 못난 황자들에게 시달리던 마틴은 감회가 남달라 조용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패륵은 한 손을 턱에 대고 브루스의 말을 듣느라 마틴이 온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브루스의 얘기를 무시하는 것보단 나았다.
“큼, 큼.”
“아, 일어나라. 지도를 볼 수 있겠소, 장군?”
“물론입니다. 마틴.”
브루스가 적당히 말을 끊어준 덕에 마틴은 겨우 일어나 인사말을 덧붙이고 말아두었던 지도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책상을 가득 메운 지도는 청의 영토는 물론이고 끊임없는 접전지역과 안격의 땅, 그리고 남북으로 곧게 뻗은 협곡까지 자세히 그린 마틴의 역작이었다. 수십개의 지도를 참고해 오차를 줄인 것 뿐이지만 브루스는 가장 정확하진 않아도 가장 적합한 지도라며 마틴의 지도를 썼다. 마틴은 내심 기대하며 지도의 요지를 짚어가며 지형과 상황을 설명했다.
“이 협곡은?”
“협곡은 저희도 안격도 들어가지 않는 영역입니다. 이곳에 오래 살던 주민이 말하길, 용의 협곡은 너무 험하고 절벽이 많은데다 땅이 척박해서 도적도 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희도 정찰병을 몇 보냈었는데 협곡을 거슬러 오른 용의 새끼만이 용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대로였습니다.”
“최정예의 병사를 이동시킬 수 있다면, 적의 중심부까지 잠입할 수 있겠군.”
정패륵은 길게 뻗은 숲과 절벽 그림을 긴 손가락으로 짚고 죽 올렸다. 잘생긴 그의 무표정 속에서 마틴은 용의 협곡을 통과하려는 생각을 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큽니다. 협곡을 타고 올라올 것을 염려한 안격놈들이 일대의 백성들을 몰살시켜서 길잡이조차 없습니다. 그곳에 들어갔다가 다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패륵께서 다시 생각하셔야.”
“그렇습니다. 아무리 빠르다할 지라도 너무 위험합니다. 패륵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저는 물론이요, 14군 전체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브루스의 만류에 패륵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한 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매만지며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마틴은 고개를 숙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황자나 6황자였다면 명령에 불복종한다며 노발대발하고 억지를 부렸을 텐데. 아니, 그들은 위험을 직접 무릅쓰려하지도 않는다. 여러모로 보나 정패륵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사내였고, 패륵이라는 지위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흐음….”
“이제 막 오셨을 뿐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신을 비롯한 모두가 도울 것이옵니다. 그러니 우선은 피로를 푸시지요. 평소 드시던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식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정패륵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브루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가 막사를 안내해드리겠다며 함께 나가고, 마틴은 펼쳐둔 지도를 다시 말았다. 마지막까지 그의 시선이 머문 용의 협곡. 마틴도 조금 전 정패륵이 그랬던 것처럼 협곡이란 글자를 보며 그 가파른 절벽과 바위 틈을 오르는 상상을 하다가 지도를 말아버렸다. 어차피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하아….”
마틴은 한숨을 내쉬며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패륵이 와서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 생각했건만, 누가 잘나신 황족님 아니랄까봐 브루스의 만류에도 협곡을 가야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마틴과 브루스만 매번 같은 얘기를 하느라 혀에 가시가 돋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정패륵 앞에서만 그래도 황숙이라고 갖은 위엄과 잘난 척을 일삼는 2황자와 6황자였다. 브루스가 그토록 2황자와 6황자의 귀에 정패륵이 협곡으로 출병하고 싶어 한다는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애썼지만 어찌 알았는지 그들은 웃는 얼굴로 친조카를 사지로 밀어 넣으려 했다.
협곡 근처를 돌아다니던 정찰병이 폐허가 된 마을에 안격의 무리가 돌아다닌다는 정보를 가져오자 2황자는 냉큼 정패륵에게 선봉에 설 것을 권했다. 마틴은 무릎까지 꿇고 만류했지만 6황자에게 어딜 감히 끼어드냐며 쫓겨나고, 브루스의 막사 앞을 서성였다. 정패륵은 학식도 높고 무예도 뛰어나서 어디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게 재수없는 데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짜증나 죽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사람이 헛되이 개죽음당하는 건 마틴으로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가 말하는 대로 성공하면야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 아니면 도였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
더구나 그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어도 살 수 있는 게 귀하디귀한 황족님네가 아닌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위협이 되고 한량에 양아치일수록 안전한 황족. 황도에서 문무를 갈고 닦기만 해도 황제는 이미 그를 어여뻐할 텐데, 잃을 거 하나 없는 정패륵이 왜 이런 곳까지 와서 목숨을 거는 지 마틴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황량한 벌판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워 양팔로 몸을 감싸고 목을 움츠리니 말을 끌고 오던 엘리어트가 달려와 마틴에게 외투를 둘러주었다.
“어떻게 됐어?”
“나도 몰라. 쫓겨났어.”
“나, 참……. 이거 어떻게 될는지, 원….”
마틴은 앨리어트와 함께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나오는 2황자와 6황자의 얼굴이 밝았다. 저들끼리 웃으며 돌아가는 걸 본 마틴은 불길한 예감에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이마에 댄 브루스의 수심이 어린 얼굴과 지도를 보다 돌아가겠다며 걸음을 옮겨 저를 지나치는 정패륵. 마틴은 정패륵이 막사를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브루스를 바라봤다.
“장군…!”
“늦었다. 마틴. 패륵께서 선봉에 서기로 했다. 우린 더 나설 수 없을 것 같구나….”
마틴은 브루스의 낮은 목소리에 아연실색했다. 정패륵이 성공하면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2황자의 공이요, 정패륵이 죽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 책임은 전부 그를 말리지 못한 브루스가 짊어져야한다는 소리였다. 마틴은 주먹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패륵을 말릴 수도, 그렇다고 출병을 막을 힘도 없었다. 결국 마틴은 브루스와 함께 그를 보내야 했다.
정패륵 근처에 정예병 중에서도 무예가 뛰어난 자를 배치하고,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겼음에도 불안해 몇 번이나 확인하고 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전장에 직접 나가지 않기에 더 걱정이 되는 건 물론이요, 더구나 정패륵은 이번이 첫 실전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곧게 편 등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제 목이 먼저 달아날 판이라 마틴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말에 오르면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
“패륵. 부디 무리하지 마시고, 몸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패륵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은 전부 저희가 지게 됩니다. 그것만 기억해주세요.”
조심하라는 말은 몇 번이나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감히 하지 못한 말이었다. 황족에게 협박에 가까운 말투는 불손하다 못해 경을 칠 만한 것이었지만 티엔은 눈썹을 꿈틀하며 마틴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마틴은 제 역할을 다 한 셈이었기에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이내 병사들이 말에 오르고, 그들의 떠나며 흙먼지가 뿌옇게 흐려졌다.
마틴은 그저 정패륵이 부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지만, 그 바람은 해가 진 뒤 돌아온 병사가 전한 소식에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정패륵이 안격의 잔당을 쫓다가, 협곡에 들어갔는데 그만 절벽이 갈라지며 다른 병사들과 함께 떨어져버렸다는 말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사이퍼즈 > 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0) | 2015.04.11 |
---|---|
[티엔ts루이] White Day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0) | 2015.04.11 |
[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2014/12/23
* 아마 이것도 미공개분 포함.
연합의 오후, 나이오비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엘리를 돌보며 휴게실을 지키던 토마스는 그만 난로 앞에서 깜박 졸고 말았다. 그 사이 그림을 그리며 놀던 엘리가 토마스의 얼굴에 낙서를 해놓고 까르륵 웃으며 우다다 뛰어가고, 토마스는 엘리를 잡으러 복도로 뛰어나갔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냅다 뛰어가는 엘리 앞에 문이 열리며 문과 아이의 머리가 부딪치기 일보직전, 토마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엘리!”
“히히, 엘리 몰라!”
“앗, 선배?”
“안녕, 토마스.”
“고생이 많군요, 스티븐슨군.”
열리던 문이 멈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는 다시 까르륵 웃으며 빙글 돌았다. 겨우 따라잡은 토마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엘리를 안아 올리자 다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순간 움찔한 토마스는 루이스 옆에서 미소를 머금은 요기 라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점에서 일하는 옷차림의 루이스에겐 어설프게 웃었다.
“루이스 언니 예쁜 옷! 엘리 마니마니 보구시펐어!”
“고마워, 엘리.”
엘리가 토마스의 품에서 루이스에게 양팔을 뻗었다. 엘리를 안아든 루이스는 제게 뺨을 부벼오는 애교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사람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훈훈한 광경에 요기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엘리가 루이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요기는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눈짓을 교환하고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버렸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토마스는 셋이 되고 나서도 편하게 입을 열지 못했다. 루이스가 병실에 있는 동안 한참 바빴기에 얼마 찾아가지도 못했던지라 오랜만에 보는 선배가 반가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무거운 감정들이 앞섰다.
“선배, 좀 어떠세요?”
“그럭저럭 괜찮아.”
“아, 있지이. 엘리가 빨리 나으라구 맨날맨날 기도했어!”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엘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칭찬을 받은 엘리는 제가 생각해도 뿌듯했는지 루이스의 품에 안겨 부비거리며 웃었다. 엘리의 천진난만한 말에 혼자 가슴을 졸이던 토마스는 루이스의 씁쓸한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제 동경의 대상이자, 언젠가 뛰어넘겠다고 생각한 목표가 무너졌다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는 루이스를 보는 게 더 마음 아팠다.
“선배…….”
“오늘 이 말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토마스는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그렇게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지만 지금 한 말은 믿기 힘들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거짓으로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믿음직하게 보였던 팔과 등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서, 언제나 동경의 눈길로 바라본 후드 차림이 아니라서. 나란히 걷는 걸음이, 전과 같지 않아서. 토마스는 느릿하게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고작 한 사람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너무했다.
“루이스!”
“핫, 언니!”
“안녕, 잉게.”
복도 끝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토마스와 루이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 나이오비는 루이스의 품에서 엘리를 빼앗아 내려놓고는 토마스를 다그쳤다.
“넌 생각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그만, 잉게. 토마스가 안 된다는 걸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야.”
“너도 그래! 얘가 아직도 갓난앤 줄 알아? 퇴원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나이오비의 불같은 성격은 토마스에게서 바로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배려하지 못한 제 불찰에 토마스가 얼굴을 붉히고 엘리가 울상을 지었다. 나이오비가 이러는 것도 다 자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루이스는 얌전히 그녀의 잔소리를 들었다. 나이오비를 말린 건 함께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레베카와 도일이었다.
그마저도 잠시 들른 것뿐이지만, 복도에서 이러지 말자며 휴게실로 돌아온 그들은 이내 소란스럽게 루이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질문에 다 대답할 수 없어 곤란해 하던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이 반갑기도 하고 드디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루이스 앞에 떳떳하지 못한 토마스는 휴게실을 오가던 사람들이 루이스를 알아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인사를 건네는 걸 멀찍이 떨어져 지켜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앤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배는 전설이 되고, 저는 영웅이 될 거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깨질 것 같지 않던 얼음성같은 그녀에게서, 연합에게서 영웅을 빼앗아간 그가 미웠다. 능력이 사라진다니, 그런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제 막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허무하게 망쳐버린 자신이 미웠다. 토마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날, 제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과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도 전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무엇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미안함에 눈물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거라는 걸 아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미숙함과 함께 그에 대한 원망이 끓어올랐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루이스가 그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겠지만 루이스는 아니었다.
점점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토마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제게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영웅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토마스는 제가 책임을 지고 연합에 도움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시간이라.”
“피터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또 올게.”
나이오비의 아쉬움 섞인 말에 토마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이스는 코트도 없이 일어났고, 밖에는 버린 물이 얼 정도로 추웠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이 나서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가, 같이 가요. 선배!”
“응?”
“그…, 저도 그쪽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원래대로라면 아직 더 늑장부려도 될 시간이지만 성치 않은 발목으로 빙판이 진 길을 가려면 전보다 서둘러야 했다. 매년 겨울, 눈이 내리고 빙판이 지면 마음 놓고 결정 슬라이드를 타도 되니 편하겠다고 하던 우스갯소리도 이제는 전부 과거의 추억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에스코트를 자청하는 토마스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워낙에도 세심한 성격이긴 하지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시종일관 주눅이 들어있는 그가 가여운 동시에 미안했다. 아무리 잊으라 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것도, 그 짐은 그리 쉬이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도 루이스 역시 잘 알았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토마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오랜만에 둘이 나갈까? 잘 부탁해, 후배님.”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토마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생긋 웃었다. 토마스는 팔짱이 어색한지 쭈뼛거리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고, 루이스는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토마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걸 슬쩍 바라보곤 넘어지는 척 그의 팔을 꼭 잡았다.
“미안.”
“아, 괜찮아요!”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가 팔짱을 낄 수 있게 팔을 내주었다. 팔짱을 끼며 자연스레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조금씩 차이가 나던 걸음이 같아졌다. 어색하던 기류 대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별 거 아닌 농담에 마침내 토마스가 웃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따라 미소지으며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며 걸었다.
별 거 아니지만, 루이스는 이렇게라도 토마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완전히 잊거나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을지라도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건 자신 하나로 족했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자신이었다. 애써 밝은 척, 제 앞에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토마스를 보고 있으니 자신의 오만이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카페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으며 속으로 쓴 속내를 삼켰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은 루이스가 마지막까지 능력자로서 가졌던 마음이자 다짐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이 모두를 구할 순 없다고 말해도 루이스는 그 첫 마음만은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비극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게 싫었다.
그러니 능력을 대가로 두 사람을 살렸으면 그리 밑지는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 루이스는 제게 소리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불쑥불쑥 튀어오르는 그 날, 병실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길게 숨을 토하곤 제 팔을 지지해주는 토마스의 온기에 조금 더 몸을 기대어 걸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하나하키 2. (0) | 2015.04.11 |
---|---|
[다이루이] 하나하키 1. (0) | 2015.04.11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0) | 2015.04.11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0) | 2015.04.11 |
[다이루이] 감사합니다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2014/12/15
* 미공개분 추가
그 후로 벨져는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가지 않았다. 병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이글에게 루이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제가 얼마나 얼간이같은 행동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후였다. 이글이 가끔 흘리듯 내놓는 소식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미 그걸로 끝난 일이라면 더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고, 거부한 것은 그 멍청한 여자다.
그걸 다 아는데도 신경이 쓰이는 건, 분명 답지않게 처연한 표정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해버린 그 공허한 눈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벨져의 양심을 자꾸만 괴롭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날 그 병실, 희고 슬프게 빛나던 그녀가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으로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하긴 했지만 분노와 굴욕에 잠 못이루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안 좋았다. 왜 제 오만의 대가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짊어져야하는가. 왜 그 빚을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결국 멤돌던 상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은 벨져는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루이스의 목소리가, 표정이, 그 날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벨져는 분에 못이겨 젖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곤 검을 검집에 넣었다. 셔츠를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향한 벨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다짜고짜 찬 물을 틀었다.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것같은 냉기에 벨져는 몸을 떨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자기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주면 그만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 *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정중했다.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얼마 없기에 루이스는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등을 세워 고쳐앉았다. 병실에 하릴없이 가만 앉아있는 것도 고역인지라, 손님의 방문이 반가웠다.
“들어오세요.”
“실례하지. 잘 지냈나.”
“어제랑 똑같아요.”
은행 업무를 보다 퇴근한 듯한 다이무스는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권했고, 다이무스 역시 사양않고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가 깨어난 지도 벌써 이주. 그동안 다이무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루이스를 찾아왔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을 매번 내치기도 미안하거니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퍽 지루해 그의 방문을 허락한 게 열흘째였다.
“흠. 식사는 했나?”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네요.”
“제대로 안 먹었단 소리로 들리는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루이스는 저를 타박하듯 보는 다이무스의 눈빛에 대답 대신 슬쩍 웃어보였다. 어제도 했던 대화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원밥은 정말 맛이 없으니까요.”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군.”
제가 했던 소릴 그대로 돌려주는 무뚝뚝한 말투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동생이 둘인 맏형답게 사람을 챙기는 데 세심했지만 또 그만큼 단호했다. 루이스는 그의 두 동생들만큼 그에게 익숙하지 못했고, 투정을 부릴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식욕도 없고, 환자식은 정말 맛이 없었지만 결국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고 항복 선언을 했다.
“저녁은 꼭 다 먹을게요.”
“나머지 식사도 거르지 말도록.”
루이스는 빙그레 웃으며 이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작은 형때문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해주는 대로 내버려둬. 안 그럼 더 귀찮아질걸? 혹시 몰라, 사과도 토끼 모양으로 깎아줄지.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속 편한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요 며칠 다이무스 홀든을 겪어본 바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다이무스 홀든이 제 명의로 메이드와 하인이 하나씩 딸린 집 한 채를 해주겠다며 서류를 들고 왔을 때도 그렇지만, 루이스는 그의 이런 행동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몸이 먼저 움직인 것 뿐이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저를 찾아왔던 그를 떠올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양말고 말해라.”
“아뇨. 괜찮아요. 거기까지 신경쓰지 말아요.”
다이무스는 틈만 생기면 뭔가를 해주려했지만 루이스는 그 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능력과 맞바꿀만한 게 있을 리 없다. 더구나 루이스는 그에게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주는 모든 것은 갚아야 할 빚이 된다. 안 그래도 안타리우스가 다시 일어나고, 회사와 연합 안에서도 분쟁이 생기는 마당에 괜한 의혹을 사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걸 모를 다이무스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다는 건 분명 그 역시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그쪽은 좀 어떤가요.”
“...글쎄.”
두루뭉술한 질문과 답. 다이무스는 답하기를 회피했고, 루이스는 더 묻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큼.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쉬어라.”
“조심히 가세요.”
불편해진 자리를 먼저 피한 건 다이무스였다. 루이스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게 당연했다. 온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 며칠간 이어진 일상이었다. 루이스는 그를 붙잡지 않았고, 다이무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합의 검과 회사의 검. 그걸로 충분하다. 루이스는 거기에 괜한 채무관계가 더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열리던 것처럼 조용하고 묵직하게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풀썩 누워버렸다. 등의 상처는 아직 욱신거렸지만 가만히 천장을 보며 숨을 마시고 내쉬는 동안 차츰 가라앉았다. 손을 들어 얼음 결정을 만들려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능력은 묵묵부답이었다. 루이스는 멀끔한 제 손을 슥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 * *
귓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루이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그랬냐며 따져묻는 그의 얼굴엔 특유의 시니컬함도 여유도 없었다. 속내를 감출 생각도 않고 또 다시 깨진 자존심에 분노하는 벨져 홀든. 이성을 잃은 채 던진, 순수해서 더 알 수 없는 의문에 루이스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거 산에서 길길이 날뛰던 때도, 영웅이라 불리는 동안에도 그 승리를 얻은 건 전부 자신과 엔지의 조언 덕이라고 생각했지 그에겐 별 감정이 없었다. 자신과 동료를 죽이려던 이에게 정당방위로, 어렵사리 살아나갈 길을 만든 것 뿐.
그런데 왜, 토마스가 아닌 벨져를 감쌌을까. 병실에 누워있는 내내 그 생각을 했지만 끝은 언제나 한숨을 내쉬는 걸로 끝났다. 그저 평소처럼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다른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그 순간의 판단때문에 너무 큰 것을 잃고 말았지만.
루이스는 처음 깨어나던 순간을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아팠고, 그 통증에 제 가슴을 관통하던 날카로운 칼날과 자욱하게 깔리던 연기가 떠올랐다. 그 다음은 다시 칠흙같은 암전. 진통제와 수면제에 의존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깨어나고 잠들길 반복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루이스를 반겼다. 붉어진 눈시울의 앤지가 내뱉던 떨리는 목소리. 몰라볼 정도로 강해진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휴톤이 참담한 표정으로 낮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이스는 그 사망선고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고, 시트를 그러쥐며 결정을 맺으려 했다. 얼어붙어야할 시트는 루이스의 손 안에서 구겨질 뿐, 손에선 한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루이스는 병실 안에 걸린 온도계를 발견하고 다시 웃었다. 급격히 밀려드는 오한에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끌어안고 숨을 삼켰다.
이제와서. 왜 지금에서야. 순간적으로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떠오르는 동료들의 얼굴,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고 했던 맹세. 루이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충격이 너무 크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더니 정말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다. 제게 향하던 기대와 시선에 뭐라 대답해야 할까. 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곧 능력자로서의 삶이, 영웅이라는 이름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영웅이라는 이름에 따르는 책임과 기대에 짓눌려 괴로웠고, 그들을 저버릴 수 없어 힘들어하며 짐이 줄기를 바랐지만 이런 식의 끝은 아니었다. 제가 거리의 고아로 자라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름의 사명감과 벅찬 뿌듯함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고, 루이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던 능력을 잃었다. 그 상실감은 다른 어떤 걸로도 채워질 수 없었지만 루이스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쓰게 웃으며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병실을 찾아오는 이들을 맞았다. 한창 행동을 조심해야할 앤지는 세 번이나 직접 찾아왔고, 보통 사람처럼 온기를 머금은 손을 꼭 잡으며 연합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으니 걱정말라며 비서직을 제안했다.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잔뜩 붉어진 눈과 코를 하고 들어온 토마스는 애써 눈물을 참다가, 결국 채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전부 자기 때문이라며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같이 온 잉게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레베카는 루이스를 복돋아주려고 더 밝은 척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때가 다 되어 찾아온 트리비아와 이글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지친 트리비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잘 얘기하라고 휙 나가버리고, 답지않게 쭈뼛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리고는 루이스의 침대 가에 앉았다.
“좀 어때.”
“별로.”
“그..., 작은형은 왔다 갔어?”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이글의 진지한 목소리가 낯설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뒤통수를 벅벅 긁적이던 이글은 온몸으로 자신이 덩달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루이스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꾹꾹 눌러삼키고 고개를 가로저은 뒤 말했다.
“별로 탓한다거나 원망하지 않아.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아이씨, 지금 누가 잘잘못 따지재?!”
“그럼 뭘 해야 하는데?”
루이스의 날카로운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글은 눈을 크게 뜨고는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벨져 홀든은 목숨을 잃거나,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할 지라도 능력을 잃었을 것이다. 벨져를 대신한 시점에서 홀든은 루이스에게 빚은 진 셈이었다. 이글은 한숨을 내쉬며 입가를 매만졌다. 적잖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루이스에게도 불편했다.
“내가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지. 연합의 영웅님은 이치를 따지는 덴 젬병이니까.”
이글이 연합에 투신한 이후로 죽 서로를 봐 온 두 사람이었다. 이글은 루이스가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었고, 루이스는 이글의 한량같은 모습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았다. 처음엔 호기심, 그 다음은 호의.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동료의 유대. 이글은 함께 지내온 세월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루이스를 잃는다는 것은 곧 등 뒤를 지켜줄 믿음직한 동료를 잃는다는 말이었다.
이글은 루이스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 언제나 미련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랐다. 언젠가 바스라지고 꺾여버릴 지라도 그 등을, 영웅의 상징과도 같아져버린 후드를 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 도사리는 불안과 초조한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그 순간의 뿌듯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글은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루이스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했다. 그 중에 으뜸이어야 하는 사람은 물론, 이 자리에 없는 제 작은 형이었다.
“소식은 전해줄게. 안 그런 척 엄청 불안해하고 있거든.”
이글은 슬쩍 미소를 머금곤 주먹을 내밀었다. 공성을 만족스럽게 치르고 나면 으레 그러하듯이.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링거 바늘이 꽂힌 손을 쥐어 이글의 주먹에 맞부딪쳤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이글은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 그가 찾아왔다.
“하아....”
루이스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쁜 짓이라기보단 애를 울린 쪽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신경이 쓰였다. 차마 동료들 앞에서 내보일 수 없던 억울함과 불안,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절망을 그에게 쏟아부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상처입는 게 빤히 보이는 벨져 홀든이라니, 전 같았으면 쓸 데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등을 돌려 문을 나가기 전, 벨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때 그는 자기가 더 억울하고 아프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보였다. 꾹꾹 울음을 집어삼키는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그녀 자신 조차 의뭉스럽지만, 그래도 만나야 제 안에 또아리 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이제 곧 퇴원이니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도 신중히 생각해야 했다. 다이무스는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그건 받을 수 없었고, 공성은 못하더라도 연합의 일을 하거나, 서점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이글은 연합의 마스코트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건 이미 예전부터 하고 있는 일에 불과했다. 이런 시기엔 일자리를 구할 수만 있어도 행운이었다.
루이스는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밀린 집세와 새로 들어왔을 책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서류는 잉게나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겠지만 이런 사적인 부분까지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울적해진 루이스는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스며드는 익숙한 한기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찬 바람이 루이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흔들었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얼음 결정은 맺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며 제 속에 가둔 공기를 내보낸 루이스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한 번 잃은 것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하나하키 1. (0) | 2015.04.11 |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0) | 2015.04.11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0) | 2015.04.11 |
[다이루이] 감사합니다 (0) | 2015.04.11 |
[벨져루이] 리퀘 3주제 (0) | 2015.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