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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Happy Birthday, My Hero
2015/01/27
Happy Birthday, My Hero
150127, 00:00:00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팟하고 눈이 뜨이고 침대에서 미적거리는 것도 없이 일어나면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하고 머리도 맑은 그런 날. 느지막한 1월의 끝, 루이스는 커텐을 젖히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의 아침공기에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묻고 다시 잠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오늘은 차가운 아침 공기도 상쾌했다.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고 서점에 출근하기 위해 갈색 구두를 신었다.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아침햇살이 반가워 조금 걸음을 늦춰 걸었다. 중간에 빵집에서 갓 나온 빵을 사고,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며 걷다 보니 서점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아홉시도 되지 않은 시간. 맞은편 클랜사무소엔 드렉슬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홉시에 출근한 루이스가 밖에 가판대를 내놓고, 책들을 진열하고 있으면 그제야 비적비적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타나는 게 그였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게, 마음속에 낀 구름과 안개도 같이 걷힌 것 같았다. 이대로 오후가 되면 거리에 쌓인 얼음이 녹을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어제 나이오비가 엘리가 빙판에서 미끄러져 무릎이 까졌다며 걱정이 잔뜩 섞인 투로 말하던 걸 떠올렸다.
“아이스.”
“우왓.”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 같군.”
혼자 하늘을 보는 중에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검은 코트 차림의 다이무스 홀든이 서있었다.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이지만, 그를 대하는 제 표정도 별 다를 바 없을 터였다. 회사의 에이스 다이무스 홀든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따로 찾아올 정도면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으리란 생각에 잠시 개점 준비를 미루고 그를 바로 마주봤다.
“무슨 일이라도…?”
“받아라.”
다이무스는 말 대신 갈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루이스는 손에 올라온 봉투의 무게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다이무스의 표정에 그의 의중을 읽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런 루이스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다이무스가 말을 덧붙였다.
“받아도 무탈한 물건이다. 그래도 이유가 필요하다면 글쎄.... 빚을 갚는 거라고 해두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홀든?”
루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이무스는 등을 돌렸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뭔지도 모를 물건을 준다고 덥석 받을 순 없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물건을 받을 수 없어 그를 잡으려했지만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에 발이 멈췄다. 아무리 드렉슬러가 괴짜 용기사라지만 회사 사람에게 다이무스와 자신이 만나는 걸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드렉슬러를 보다 다이무스를 올려보자 다이무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오지 말라는 명백한 눈빛에 루이스는 별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침부터 한숨이냐.”
“아…. 좋은 아침입니다, 드렉슬러경.”
“뭐야, 벌써 시작이냐.”
“네?”
드렉슬러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되물었지만 드렉슬러는 혀를 찰 뿐 대답하지 않았다. 워낙 별난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고 돌아선 루이스는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책을 꺼내놓고, 도착한 책 소포를 받아 정리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정리 도중에 전에 부탁받은 책이 들어온 걸 보고 따로 메모지를 꽂아 표시를 하는데,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마틴 챌피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루이스씨.”
“네, 날씨가 정말 좋네요. 아직까지 해가 보이는 게.”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며칠만 더 이렇게 해가 나오면 거리의 얼음들도 녹을 텐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마틴은 잠시 루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분명 날씨가 좋은 것보다, 해가 나와서 거리의 얼음이 녹는 게 더 기쁜 것이리라. 마틴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주머니 안의 주화를 매만졌다. 드렉슬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로 보아하니 아직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찌 한담. 잠시 고민하던 마틴은 진열된 책들 중 가장 두꺼운 책을 골라들었다.
“얼마죠?”
“음, 챌피. 그건 파는 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매일 당신이 들고 있는 거잖아요. 꽤 무겁네요. 자.”
마틴은 능청스럽게 답하며 루이스에게 트와일라잇의 역사를 건네주었다. 루이스가 이 자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흐르다니. 마틴은 광장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역시, 이 책은 당신이 제일 잘 어울리네요. 오래 있어줘요. 새 얘기가 생기면 저도 들으러 올 테니까.”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틴의 미소에 루이스도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마틴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떠난 뒤 루이스는 잠시 멈췄던 책 정리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저, 저기….”
“윽…!”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영웅씨? 이쪽도 그쪽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거든.”
쌓아둔 책을 옮기려고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아있는데, 뒤에서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조그만 아가씨 뒤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 불마녀가 보여 그만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 마디 맞받아쳐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세탁소는 어쩌고 찾아왔는지 모를 여자아이 쪽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루이스는 타라를 한번 노려보곤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쭈그려 앉은 채론 고개를 푹 수그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 한쪽 무릎을 꿇고, 타라와 자신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기 바쁜 아이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샬럿.”
“아, 저, 그게…. 그, 생일 축하드려요!”
양손을 등 뒤로 한 채 우물쭈물하던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큰 소리로 말하며 양손으로 선물을 내밀었다. 귀엽게도, 직접 포장했는지 꾸러미를 싼 포장지가 삐뚤빼뚤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루이스는 속으로 날짜를 세며 눈을 질끈 감은 아이의 손에서 작은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오늘 소포가 들어왔으니 얼추 날짜가 맞았다.
“저, 그리고…. 전엔 감사했어요….”
“전?”
어지간히 용가기 필요했는지, 얼굴이 빨개진 샬럿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수선이 엉망이라며 날뛰는 손님을 대신 설득시켜준 것이 퍽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때야 정말 우연이었지만 일부러 생일이랍시고 선물을 준비한 그 마음 씀씀이가 퍽 예쁘고 고마웠다. 루이스는 샬럿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쩍 웃었다. 그제야 안심했는지 샬럿도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자, 그럼 돌아가자. 샬럿.”
“네! 타라 언니, 고마워요!”
훈훈하게 샬럿을 배웅하려 일어나 손을 흔들던 루이스는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드렉슬러는 루이스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타라의 눈치를 살폈고, 샬럿의 손을 잡고 뒤돌아서던 타라는 입가를 실룩이며 루이스를 뒤돌아봤다. 샬럿은 뭐가 잘못된 건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루이스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나이에 그만한 딸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여자가, 언니라. 타라도 알긴 아는지 더 이상 말하면 불태워 죽일 것처럼 살기등등하게 루이스를 노려봤다. 중간에 낀 드렉슬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샬럿을 데리고 피해야하나, 아니면 누굴 불러와야 하나 고민하며 루이스와 타라의 눈치를 살폈다.
“저, 언니…?”
“흥, 생일 선물이라고 쳐둬. 묘비에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같으면 그것도 웃기긴 하겠지만.”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샬럿이 타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매달렸다.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퉁기며 공간발화를 쓸 것처럼 손을 올리던 타라는 그대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하고는 샬럿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둘이 광장의 코너를 돌자 드렉슬러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곤 루이스에게 투덜거렸다.
“너도 참 징하다. 우리 불마녀 성격 어떤지 잘 알면서.”
“질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녀에게 만큼은.”
루이스의 대답에 드렉슬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공성이 있거나 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싫으나 좋으나 하루 반나절을 얼굴을 마주하는 상대다 보니 그래도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렉슬러는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석이 살려준 목숨이라 그런가, 완고하고 터무니없이 무모해서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면이 후배 녀석 하나를 꼭 닮았다.
“몸 좀 사리고 살아라….”
“네?”
“아무 말도 안했다, 멍청아.”
연구실에서 하던 것처럼 실수로 나온 혼잣말에 드렉슬러는 다시 팔짱을 끼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사 양반과 술김에 한 내기에 져버린 게 화근이었다. 할 일도 거의 없는 게 클랜 업무인데 하루에도 수십 수백씩 생기고 사라지는 클랜을 관리할 수 있는 건 드렉슬러 경 당신뿐입니다! 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자신도 멍청이지만.
드렉슬러는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추위가 한 풀 꺾였다 해도 아직 1월. 이 겨울에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걸친 꾀죄죄한 꼬마애 둘이 같이 버려진 신문지며 쓰레기나 다름없는 나무조각을 들고 광장을 힘겹게 걸어가는 게 보였다. 드렉슬러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감했다. 천재인 자신의 촉은 꽤 뛰어난 편이지만, 이 전개는 너무 뻔하게 반복된 일이라 예측이랄 것도 없었다.
잠시 아이들의 모습을 어딘가 먼 과거를 그리는 것 같은 눈으로 보던 루이스가 아이들을 불러세우곤, 서점 안으로 들어가 갈색 종이봉투를 들고 나와 아이들에게 건넸다. 무릎을 낮추고, 시선을 맞추며 건네는 가슴 아릿한 미소. 드렉슬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원.
“야!”
자리로 돌아온 루이스는 갑자기 절 부르는 소리에 책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얼굴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가까스로 잡아채자 드렉슬러가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듯 심통스런 얼굴을 하곤 팔짱을 꼈다.
“비실비실해가지고. 맨날 나눠주기만 하니까 그 꼴인 거 아냐. 네 여친은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알긴 하냐.”
양팔로 팔짱을 끼고 입을 비죽이는 드렉슬러의 말은 분명 기분 나쁠 법한 것이었으나 루이스는 종이봉투를 열어 샌드위치를 꺼내곤 피식 웃었다.
“잘 알죠.”
“있을 때 잘해. 이 나이까지 혼자면 서럽다.”
“명심하겠습니다.”
드렉슬러의 충고는 자기가 혼자라 서럽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트리비아. 루이스는 잠시 제 연인을 떠올리곤 입가에 띠웠던 미소를 지웠다. 오늘 만날 수 있긴 할는지. 오늘은 퇴근하면 연합에서 밀린 서류와 함께 생산품 분배에 관한 계획안을 짜야했다.
이글이나 토마스, 레베카와 휴톤 도일은 떠들썩한 걸 좋아하니 생일이랍시고 또 이런저런 걸 준비했을 지도 모른다. 파티같은 걸 좋아하지 않지만, 동료들이 다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노는 걸 보는 건 좋았다. 그 따스한 분위기며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행복과 즐거움이 제게도 스며드는 것 같아 좋았다. 제 옆에서 그걸 같이 봐줄 그녀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루이스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다. 더 이어가면 결국 수렁에 빠질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1월 27일. 괜히 침울해져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쉬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 * *
아니나 다를까, 일을 마치고 연합으로 가니 올해도 저 몰래 깜짝 파티라도 해주려는지 다들 평소와 다르게 저를 대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왜 작년엔 이걸 몰랐는지. 루이스는 한사코 저를 휴게실에 들이지 않으려 애쓰는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토니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토니는 재킷의 포켓에서 새 만년필 몇 자루를 주문했는데 임원들에게 돌리고 남았다며 만년필 하나를 건네며 윙크했다.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하자 토니는 아까 루이스가 토마스에게 했던 것처럼 어깨를 두드렸다. 그 묘한 뿌듯함에 멋쩍어진 루이스는 후드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생일이라고 태도에 더하고 뺄 게 없는 그니 분명 오늘이 아니라도 챙겨주었을 테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회의실에 먼저 도착해 서류를 잔뜩 쌓아놓고 골머리를 앓던 앤지는 토니와 루이스를 보고 업무로 지친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녀에게 안쓰러움 반, 기특함이 반 섞인 미소로 인사한 루이스는 앤지의 옆, 빈자리에 앉아 담당의 간단한 브리핑을 듣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쌓여있던 서류들이 이 손에서 저 손을 거치고, 테이블에 커피잔과 찻잔이 쌓이길 두 시간.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적막을 깼다.
“조기…. 루이스 오빠 업쪄?”
“엘리?”
의자 대신 책상에 걸터앉아 카모라 쪽에서 보낸 서류와 생산량 보고서를 한참 들여다보던 루이스는 저를 찾는 엘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 불리곤 잔뜩 토라진 얼굴로 무작정 달려와 매달리는 통에 쌓아둔 서류탑이 무너졌지만 서류에 찌들어가던 이들의 얼굴엔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미안. 먼저 가볼게.”
엘리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싶어 루이스는 엘리를 안아올리고 앤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앤지는 얼른 가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루이스는 황급히 엘리를 데리고 나왔다.
“엘리, 무슨 일이야. 왜 너 혼자 있어. 다른 사람들은?”
“같이 루이스오빠 기다렸는데, 움…. 엘리가 오빠 데려오기루 해써!”
시무룩한 아이의 얼굴이 걸려서 걱정스레 묻자 엘리가 열심히 대답하다 말을 멈췄다. 말도 재롱도 많은 순진한 아이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고, 루이스는 이내 엘리가 한 말을 알아듣고는 피식 웃었다. 다 같이 기다렸다는 말은 아까부터 동분서주하던 생일파티를 말하는 걸 테고, 엘리가 데려오기로 했다는 건 기다리다 못해 엘리를 전령사로 보냈단 뜻이었다.
급하게 데리고 나오느라 안은 채로 복도를 걷는데, 문득 나이오비가 애 버릇 나빠진다며 혼자 걷게 하라고 잔소리했던 게 떠올랐다. 피터가 은근히 부러워한다는 것도 알기에 안아주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부쩍 무거워진 것 같았다.
“착하네, 엘리.”
“웅! 오빠도 착해!”
방긋 웃는 엘리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는 휴게실 앞에 다다라서야 엘리를 내려주었다. 엘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난 표정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잔뜩 들떠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엘리는 루이스가 문을 열길 꾹 참고 기다리는데, 그게 몹시 귀여웠다.
숨을 들이마시며 철문의 문고리를 양손으로 잡고 힘주어 열자 안에서 폭죽이 터졌다.
“““Happy Birthdady!!!”””
제각각의 목소리가 겹쳐져 나는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루이스는 움찔하고는 피식 웃었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색종이며 폭죽의 잔해에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털자 이글이 기분나쁘게 웃으며 다가와 옷 속에 색종이가루를 집어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주인공 주제에 늦게 온 벌이지!”
“오오, 이글! 말 한 번 잘했다! 자자, 벌주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고~.”
“있지, 있지! 엘리랑 피터 오빠랑 열심히 색종이 자르고 장식해써!”
“자, 벌주데이~. 시원~하게 한 잔 하그라!”
“저, 선배! 별건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자꾸만 옷 안에 색종이를 넣으려는 이글을 막으랴, 엘리와 피터 칭찬하랴, 벌주라며 맥주컵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내미는 도일과 휴톤에게 사양하랴, 토마스가 내미는 선물도 받으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작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 년이 지나면서 그만 까먹은 모양이었다. 이럴 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루이스는 이글이 받아 제 입에 들이붓는 술을 흘리고 마시며 잠시 방심한 것을 후회했다.
“자자, 잠깐잠깐! 그 전에!! 이것들아 다 조용히 좀 해!!!”
루이스의 도착으로 소란스러워진 휴게실은 사람들을 주목시키려던 나이오비가 결국 고함을 지르면서 조용해졌다. 루이스의 영구동토라도 맞은 듯 일동이 모두 꼼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제야 부끄러워졌는지 헛기침을 한 나이오비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든 좋으니까 자기 생일케이크의 촛불 정도는 끄게 해주라고. 이러다 촛농 떨어지겠다.”
양손으로 이글의 팔을 잡고 있던 루이스는 그녀의 배려가 고마워 표정을 풀었다. 이글도 나이오비의 말에 순순히 루이스를 놓아주고, 루이스는 한 걸음 나아가 ‘Happy Birthday’가 삐뚤빼뚤하게 쓰인 케이크 위에 꽂힌 초에 힘껏 바람을 불었다.
“루이스 오빠, 생일 추카해!”
“생일 축하해요.”
“고마워. 피터, 엘리. 직접 만들어줬구나.”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자 엘리는 방긋 웃으며 까르륵 웃었고, 피터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이어지는 축하인사에 루이스는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쑥스럽게 웃으며 고맙단 말을 돌려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없어선 안 될 동료이자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1년 365일 열두 달,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하루를 축하하기 위해 기꺼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벅차올라 속이 시릴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키는 것으로 감정을 눌렀다.
케이크를 나눠먹고 엘리와 피터가 돌아가자 휴게실은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러운 술자리로 변했다. 한 시간쯤 됐을까, 적당히 어울려주던 루이스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슬쩍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니 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이글이 먹인 술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토마스가 달려와 무릎에 손을 짚고는 숨을 골랐다.
“왜, 따로 할 말이라도 있어?”
“어…, 그게. 선배!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어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하던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우렁차게 말한 토마스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포옥 내뱉었다. 루이스가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슬그머니 눈을 뜬 그는 아차 싶었는지 뺨을 긁으며 시선을 피하다 겸연쩍은 듯 웃었다.
“아, 하하. 그게, 어…. 처음엔 영웅 루이스를 동경해서 연합에 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영웅 루이스, 라는 말에 가슴이 따끔했다. 루이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토마스를 마주했다. 지금 토마스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용기를 냈고, 그가 하는 말은 이렇게 따로 독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진심이었다. 루이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쥐었다.
“지금은, 믿을 수 있는 선배고, 리더고, 그리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로 신뢰 받고, 인정 받고 있다는 건 솔직히 부러울 정도에요. 그러니까, 선배가 선배여서 다행이에요!”
무서울 정도로 솔직한 말에 루이스는 천천히 멈췄던 숨을 내뱉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차가운 술도, 저만치서부터 올라오는 뿌듯함을 후드도 없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감추지도 못한 감정을 속으로 삭였다. 꾹꾹 눌러온 감정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후배 앞에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루이스는 애써 차오르는 덩어리를 누른 채 미소지었다.
“고마워.”
“아…. 죄송해요! 그, 어…. 지금의 선배가 선배라서 좋지만, 힘들 땐 혼자서 참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차…!”
당황한 토마스가 횡설수설하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은 후였고,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는데 그게 후배라는 사람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니, 이래서야 선배의 체면이라고 할 것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맞는 말이야. 조금 더 우릴 믿으라고 영웅님.”
“니 혼자 짐을 지우게 할 만큼 연합은 약하지 않다 아이가!”
“뭐, 나는 그런 형씨가 마음에 들지만.”
“이글!”
“아, 거 이렇게 감상적인 거 나하곤 안 어울린다고~. 어려울 거 뭐 있어,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지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
더해지는 동료의 목소리, 따스한 격려에 루이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슬렁슬렁 나타난 이글이 어깃장을 놓았지만, 루이스를 지나치며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그의 눈에서 루이스는 이글 홀든이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 진심을 보았다. 어떤 선택을 해도, 어떤 길을 골라도 그걸 믿고 따르겠다는 신뢰, 그 감각을 잊지 말라는 그 나름의 격려. 루이스는 사람 키보다 더 큰 검을 어깨에 지고 설렁설렁 걸어가는 이글의 등을 보다 피식 웃었다. 좁은 복도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저를 달래려 이런 말 저런 말을 덧붙이는 것부터 해결해야 할 성 싶었다.
* * *
오늘 받은 선물을 양손 가득 들고 돌아온 루이스는 선물을 방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지친 목과 어깨를 풀었다. 이대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면 하루가 갈 것이다. 오늘 하루는 이걸로 끝.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그녀는 원래 이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고,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괜한 기대는 접고 내일을 준비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서, 혼자가 된 루이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침대에 앉아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게 지내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떠들썩한 곳에서 놀다가, 평생 듣기 힘들 정도로 좋은 말들을 들었는데. 혼자가 되니 밀려드는 상념에 더욱 외로워졌다.
씻고 자자. 루이스는 자꾸만 떠오르는 이런 저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옷장에서 새 속옷과 잠옷을 꺼내들었다. 씻고 자리에 누우면 잠이 들 것이다. 잠이 들어 일어나면 아침일 것이고, 그럼 또 하루를 시작한다. 그 반복일 뿐이다. 루이스는 샤워기 앞에서 물을 틀었다.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물이 제 감정과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함께 씻어주길 바랐다.
커튼을 치지 않은 방,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엔 큰 달이 떴다. 구름이 끼지 않은 하늘엔 달이 평소보다 밝게 빛났고,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창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손에 활짝 열렸다. 손가락 끝부터 우아하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자가 형태를 갖추고,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창문을 타고 넘어온 여인은 침대에 곤히 잠든 루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어온 바람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훤한 달빛은 수려한 용모를 비췄다. 잠든 그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던 그녀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침묵했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더니 천천히 루이스가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곳을 바라본 그는 그녀를 보곤 배시시 웃었다. 그 아이같이 순수한 미소에 여제, 트리비아 카리나는 자신의 연인에게 미소로 답해주었고, 제게 손을 뻗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그정도는 봐줘도 좋을 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카리나….”
잠결에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웃으며 반기는 걸로 보아 잠이 덜 깼거나,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트리비아는 새침하게 웃었다. 이렇게 귀엽게 구는 연인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몸을 움직여 모로 누운 루이스는 제 옆자리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옆에 누우라는 그의 흔치 않은 어리광에 잠시 고민하던 트리비아는 자신이 아직 풀메이크업 상태이며, 잠들기엔 불편한 옷차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미 맨얼굴을 보여준 남자친구지만,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런 트리비아의 고민을 읽기라도 한 양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손목을 잡아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빠져나가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트리비아는 못 이긴 척, 받아주기로 했다.
내일 일어나면 분명 그동안 자길 두고 어딜 갔었던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또 싸우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늘 하루의 마지막을 오롯이 차지하는 값으로 치르기로 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리 밑지는 것도 아니란 생각에 트리비아는 다시 눈을 감고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내 영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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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외출, 삼십분.
2015/01/21
포트레너드에 위치한 홀든 은행, 오후 두 시 반. 다이무스 홀든은 서류에 사인하고 안경을 벗었다. 흰 종이에 빽빽하게 쓰인 검은 글씨를 오래 보고 있자니 눈이 피곤했다. 남은 서류와 시계를 번갈아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짬을 내도 기껏해야 삼십분 정도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면 좀 살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코트를 집어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서두르면 오며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오며가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 생각이 향하는 곳에 발이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다이무스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출근할 때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따스한 게 딱 밖에서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라 그와 함께 공원이라도 거닐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놀랍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헛기침을 하며 클랜사무소의 기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드렉슬러를 지나 서점의 문을 열었다. 난로에 주전자를 올리던 루이스는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잠시, 피식 웃으며 다이무스를 맞았다.
“나도 한 잔 주겠나.”
“어쩐지 오늘은 물을 많이 넣고 싶더라니.”
루이스는 물을 더 붓는 대신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권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미소에 잔뜩 굳었던 얼굴의 근육을 슬쩍 풀며 소파에 앉았고, 루이스는 책장에 기대어 서선 물끄러미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점심은 먹었나?”
“네. 요 앞 카페에서 샌드위치 사다 먹었죠. 당신은요, 일 하다 거르진 않았나요?”
“바쁘긴 하지만 그정도는 아니다. 요전에 애인한테 한소리 듣기도 했고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뜨며 애인이라고 돌려 말하는 다이무스의 말에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숨을 집어삼키듯 웃고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한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마주한 시선에 눈이 감기고, 입술이 닿는다. 다가왔던 것처럼 천천히 입술을 떼고. 눈을 뜬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짙은 회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냥 그것만으로 좋아서 미소를 머금자 다이무스가 한 번 더 입술을 마주쳤다. 짧게 여러번, 새가 모이를 쪼듯 입술을 맞추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물이 끓으며 내는 소리에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잠시만요, 단 둘 뿐임에도 작게 속삭이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다이무스는 멈칫했다. 그 목소리는 잠자리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것과 매우 닮아있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묵묵히 차를 타는 루이스의 등을 보며 다이무스는 제 애인의 몸을 훑었다. 머리부터 흰 목덜미, 곧게 뻗은 등줄기를 따라 매끈한 허리와 탄탄한 엉덩이, 그리고 자신밖에 모르는 은밀한 곳과 바지 안에 감춰진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다이무스는 그의 피부를 만지며 단정한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겨내는 상상을 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왔던 길을 되짚어가자 때마침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마른 것 같군.”
“그런가요.”
루이스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일에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했다. 다이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은 루이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그쪽이 아니다.”
다이무스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봤다. 다이무스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고, 루이스는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귀가 붉어지는 걸 본 다이무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제 손을 움직였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루이스가 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보여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보탰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할 정도로 급하진 않다.”
“윽….”
정곡을 찔렸는지, 루이스가 움찔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하니 안 놀릴래야 안 놀릴 수가 없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 루이스는 얼굴을 붉힌 채 쭈뼛거리며 다가와 다이무스의 무릎에 앉았고, 다이무스는 만족스럽게 애인의 몸을 끌어안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점 특유의 종이와 잉크냄새와 섞여 나는 비누냄새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다이무스가 그렇게 루이스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자 꼬물거리다 포기하곤 몸에 힘을 뺐다. 애초에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건만, 루이스는 늘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했다. 루이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을 쓰다듬으며 도드라진 견갑골을 매만지던 다이무스는 제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쯧, 역시 말랐군. 잘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냥 바빴을 뿐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꼭 제 때 챙겨먹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지?”
“다이무스.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군. 데리러 오겠다.”
다이무스의 막무가내에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무릎에 앉힌 덕에 본래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가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턱을 치켜들어 그에게 키스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루이스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면 나오는 버릇에 다이무스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들어줄 시간은 앞으로 오 분 정도지만.”
“그…. 어차피 안을 거라면, 음…. 보통 그렇잖아요.”
아무리 머리가 좋은 다이무스라도 루이스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정말이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다 하는 말이 겨우 이런 거라니.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그 마음이 귀여워 낮게 웃었다. 루이스는 제가 한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깨닫고는 당장 달아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다이무스에게 허리를 잡힌 채론 어딜 갈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는 진정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는 루이스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우니 견딜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지. 그리고 나는….”
다이무스는 천천히 허리를 쓰다듬다 대화를 거부하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움찔, 몸을 떨며 무슨 짓이냐는 듯 저를 쏘아보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을 때 살이 만져지는 쪽이 좋다.”
루이스의 얼어붙은 얼굴에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은 다이무스는 그의 이마에 입 맞추고, 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차는 이렇게 마시는 게 아니지만, 차를 마시러온 게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이무스는 포켓에 넣어둔 금장 회중시계를 꺼냈다. 두시 오십분. 떠나야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하아. 결국 당신도 홀든이네요.”
“무슨 뜻이지.”
루이스가 말하는 홀든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기에 다이무스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비교를 당해서가 아니라, 루이스가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는 데서 나오는 유치한 질투였다. 계속 다이무스에게 휘둘리던 루이스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빼곤 빙그레 웃었다.
“여기 서있으면 당신 목소리 들리는 거 알아요?”
“루이스.”
“전 오늘 일곱 시에 퇴근할 겁니다. 앞으로 네 시간 조금 남았네요.”
명백한 말 돌리기와 축객령에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엷은 미소에 조금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일곱시까지 퇴근해 루이스를 데리러 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자세한 건 이따 듣도록 하지.”
“조심히 가세요.”
문까지 마중을 나온 루이스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쉬이 알려줄 것 같지 않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도발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묻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이무스는 코웃음 치며 은행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서 같은 베개를 베면 못 할 말이 없다고, 오랜만에 같이 해가 뜨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그 한탄과 닮은 말이 무슨 뜻인지 자연스레 듣게 되리라. 오후 세 시. 초침이 막 5를 지나가는 걸 확인한 다이무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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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루이] Intro.
2015/01/21
*무언가의 번데기au
오후 아홉시 반. 잔뜩 쌓인 업무로부터 퇴근한 다이무스 홀든은 자택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고급주택답게 육중한 쇠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다이무스는 불이 켜진 거실에 노닥거리는 형제들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제 와인 셀러에 손을 댔는지,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리며 향을 음미하던 벨져와 눈이 마주친 다이무스는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왔구나.”
“불러놓고, 늦었네. 형아.”
“그러는 작은형도 좀 전에 왔으면서~.”
이글은 장난스레 벨져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쳤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다이무스, 당장 어느 파티에 참석해도 될 법한 차림의 벨져와 달리 이글은 청바지에 점퍼차림이었다. 각각 경감, 검사직을 하나씩 꿰찬 형들과 달리 책상머리 업무는 싫다며 멋대로 군 자유로운 영혼다웠다. 다이무스는 이글과 벨져를 한 번씩 쳐다보곤 가방에서 서류철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이건 또 뭐야.”
“귀찮은 일이면 안 해.”
벨져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고 이글은 소파에 길게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 서류철에 손도 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안타리우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핵심만 짚어서, 간단하고 짧게. 다이무스의 말에 이글과 벨져가 눈을 치켜떴다. 안타리우스라고 하는 조직은 어느 쪽으로든 손을 뻗고 있었기에 이쪽에 몸 담은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접근하려고. 꼬리는?”
“걔네가 잡혀는 준대?”
“우리만으로는 부족하지.”
다이무스는 깔끔하게 시인했다. 경찰조직을 전부 동원해도 그들의 꼬리만 쫓을 뿐 정작 그들의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각종 범죄부터 정치, 경제, 종교에까지 숨어든 그들은 일반인에 섞여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울 뿐더러, 잡아도 꼬리를 자르고 도마뱀처럼 빠져나가는 게 안타리우스였다.
“더 깊이, 들어가야한다.”
“어떻게?”
방금 전까지 심드렁하던 이글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있었고, 벨져는 와인잔을 흔들던 손을 멈췄다. 이글의 질문과 벨져의 눈빛에 다이무스는 대답 대신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빤 그는 막 불을 붙인 장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지 않은 신호에 벨져와 이글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이무스가 아무 말 없이 입가를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기대자 벨져는 이글에게 눈짓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펼친 뒤 바로 인상을 구기고 파일을 내던지긴 했지만.
“뭔데 그래?”
흔치않은 벨져의 반응에 흥미가 동했는지 이글도 파일을 집어들었다. 바로 첫 장에 나오는 신상명세에 이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바로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 하하. 작은형이 질색할 만 하네.”
“닥쳐라, 이글.”
“지금 상황에 그보다 적임자는 없다.”
“그래서 그 더러운 범죄자새끼를 끌어다 쓰겠다고? 그렇게 사람이 없나?”
벨져는 여과없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타고난 능력과 배경으로 주구장창 탄탄대로를 달리던 검사 벨져 홀든의 이력에 단 한 번 굴욕을 남긴 그를 벨져가 좋아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다이무스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엔 서류를 거들떠도 안 보던 이글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서류를 읽어내렸다.
“재밌네. 난 찬성.”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형아?”
“더 큰 목적을 위해 가치있는 일이다.”
벨져가 어깃장을 놓는 건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기에 다이무스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와인병을 들었다. 그리 달가운 선택지는 아니지만 최악보단 차악이 낫다. 이이제이, 오랑캐는 오랑캐로 막는다. 다이무스는 창가에 서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병째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위에서 허가는 내려왔지만 이번 일은 다이무스 홀든에게도 쉽지 않았기에 적어도 함께 할 두 동생에게 미리 알릴 필요는 있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벨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이 하는지 입술을 매만지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두사람을 번갈아 보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벨져, 이글. 우린 지금 설계자가 필요하다.”
사전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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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하나하키 3.
2015/01/05
다이무스는 오전 은행 업무를 마무리지어놓고 바로 코어레너드의 행정청사로 향했다. 루이스는 아침이 힘들다며 점심때나 출근해 오후까지 일을 하다 다시 서점으로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오후에 오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처음 며칠은 그를 피해보려고 오전에 일을 하고 루이스가 출근하기 전에 은행으로 가버리곤 했지만 안 본다고 꽃을 토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안 보이니 더 그리워지고, 비어있는 그의 자리를 볼 때면 애달픈 마음에 얼음이 성겼다. 안 보고 괴로워할 바에야 보면서 괴로워하는 편이 낫다. 모처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기도 내심 아깝기도 했다. 루이스는 오전에 일을 하지 않는 대신 오후 늦게까지 일을 하는 편이었고, 그러다보니 루이스는 아침과 점심을 거르는 일이 많았다. 다이무스는 은행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대신 그와 먹을 생각으로 샌드위치를 두 개 사서 코어레너드로 향했다.
한창 점심 시간이었기에 아직 오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루이스가 퀭한 얼굴로 다이무스를 맞았다.
"아, 안녕하세요. 다이무스씨."
"일찍 왔군."
"어제 연합에 일이 좀 생겨서 공성 끝나고 바로 불려갔었거든요."
"눈이라도 좀 붙이지 그러나?"
"아뇨, 한 번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럼 들겠나?"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지친 얼굴과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샌드위치 봉투를 건네자 루이스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에 핏기가 가신 게 안쓰러웠지만 더 신경을 쓰기 뭐했다. 아무리 피곤한 상태라고 해도 상대는 결정의 루이스, 과한 호의를 내비쳤다간 그가 제 마음을 알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스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는 걸 확인한 다이무스는 제 몫을 가지고 책상에 앉았다.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무실엔 단 둘 뿐이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이 갔다. 루이스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눈을 꿈벅이다 샌드위치의 끄트머리를 물었다. 오물오물거리면서도 반쯤 눈꺼풀이 내려온 게 퍽이나 졸린 모양이었다. 맛을 느끼면서 먹긴 하는 건지,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길 반복하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다이무스는 제 몫의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눈에 힘이 들어갔지만 먹는 게 시원치 않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이무스는 걱정과 함께 입 안 가득 샌드위치를 욱여넣고 열심히 씹었다. 멀쩡하게 먹다가 토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잠시 얼음꽃이 올라오는 걸 상상한 다이무스는 인상을 구기고 머릿속에서 상상을 지워냈다.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다. 다이무스는 남은 샌드위치의 반쪽을 씹어 넘기곤 일어났다. 촉촉한 흰 빵에 싱싱한 양상추와 토마토, 올리브를 넣고 갓 구운 베이컨과 계란을 곁들여 특제 소스로 완성한 카페 리버포드의 샌드위치는 주변에서도 평판이 좋은 일품이었다. 물론 그 가격을 하긴 하지만, 간단히 식사를 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식사 중엔 물이나 차를 마시지 않는 다이무스는 샌드위치 봉투를 정리해 버리곤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흘긋 루이스 쪽으로 눈을 돌리자 아직도 한 조각을 다 못 먹고 조금씩 우물거리는 게 보였다. 저렇게 먹어서 체력 유지는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전자에 한 사람 분의 물을 더했다. 급탕실에 준비되어있는 차의 종류라고 해봐야 홍차 티백, 커피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홍차 캔은 텅 비어있었다. 레몬이나 오렌지 등의 과일차에 꿀을 듬뿍 넣어 마시면 피로회복에 좋지만 일에 찌든 남자들만 가득한 사무실에 거기까지 세심함이 미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다이무스는 아쉬운대로 머그컵 두 개를 꺼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잠시 장에 기대어 루이스를 보는데, 드디어 샌드위치의 한 조각을 다 먹은 루이스는 남은 한 조각을 드는 대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다이무스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피곤해서 입맛이 없다 해도 그렇지, 식사는 자기 관리는 말 할 것도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야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다이무스는 이번주에 예전되어있는 공성전 스케줄과 참가 인원 명단을 떠올렸다. 오늘과 내일은 루이스가 출전하지 않고, 서점도 안 나가는 날이니 이쪽 일만 끝나면 들어가 쉴 수 있을 터였다.
물이 끓는 소리에 등을 돌려 커피를 내리던 다이무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돌아봤다. 여전히 반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서류를 보고 펜을 놀리고 있는 게 안쓰러워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려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손을 멈췄다. 루이스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느샌가 제 책상에 달칵 컵을 내려놓는 건 루이스였고, 다이무스는 받아 마시는 쪽이던 탓이었다. 홍차라면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걸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지만 루이스가 커피를 마시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제 취향대로 진하게 내린 커피 향이 고소하게 퍼지고 있음에도 루이스는 이쪽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다 여전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루이스를 돌아봤다. 같은 공간에 단 둘이 있음에도 마주하지 않는 시선이, 꽃을 토할 정도로 좋아하면서 차를 마시는 취향 하나 모르고 있던 자신이 착잡했다. 그는 제 사소한 취향이나 습관을 알아채고 한 박자, 혹은 반 박자 앞서 배려해주곤 했다. 비록 차를 타준다거나 서류를 읽기 쉽게 정리해서 준다거나 설명이 필요한 일은 꼭 눈을 마주쳐가며 하는 사소한 친절에 불과하지만, 그런 친절도 다이무스에겐 크게만 느껴졌다.
빈 머그잔 하나를 다시 찬장에 올려놓은 다이무스는 제 몫의 커피를 들고 자리로 향했다. 얼음꽃을 토할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가슴 한 켠이 콱 막힌 것마냥 답답했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뜨거운 물이 상처에 닿아 쓰라렸다. 이도 저도 되는 일이 없다. 다이무스는 자조했다.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는 딱 제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큼 썼다.
애초에 바라면 안 되는 걸 바라고 있으면서 달디 단 디 상황에 취해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꽃이 나오지 않는 것은 지금 제가 느끼는 것이 그에 대한 애달픈 사랑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이무스는 다시 한 모금 커피를 머금었다. 본분을 잊어선 안 된다. 제가 여기 와있는 건 루이스와 사내연애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코어레너드의 행정사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다이무스는 서류철의 위에 붙은 루이스의 메모를 떼어냈다.
서류를 보고 있으니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와 인사를 건넸다. 다이무스는 그들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 괜한 생각은 일에 빠져있으면 잠시나마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검토를 마친 서류를 내려놓고 뻐근해진 눈을 감았다 뜨니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이며 졸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도 아니고 한 손엔 펜을 들고 고개를 수그린 채 그러고 있는 게 퍽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은 각자 제 할 일 하느라 바빠서 루이스가 졸고 있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라 다이무스는 주변을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내려둔 커피는 커피포트에 담겨있던 덕에 아직 따뜻했다. 찬장에 올려두었던 머그를 꺼내 커피를 따르기 전 뜨거운 물을 부어 컵을 데운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다 설탕을 두 스푼 넣고 적당히 휘저었다. 딱히 그의 차 취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카페인으로 잠을 깨고 머리에 당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탄 커피라고 합리화한 결과였다. 머그를 들고 루이스의 책상으로 가는 몇 걸음, 다이무스는 긴장에 마른 침을 삼켰다.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자 루이스가 화들짝 놀라 퍼드득 튀었다. 그 바람에 무릎으로 책상을 쳐서 커피를 쏟을 뻔 했지만 아직 다이무스가 손잡이를 쥐고 있던 덕에 기껏 해놓은 서류 위로 커피가 얼룩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피다 다이무스를 보곤 눈을 깜박였다.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그의 손잡이를 놓았다.
"아, 하하. 감사합니다."
잠시 들었다 놓는 바람에 테이블에 작은 소리가 나고, 뜨끈한 김이 오르는 커피를 본 루이스가 민망한 듯 웃었다. 슬쩍 눈을 휘며 짓는 눈웃음에 다이무스는 숨을 멈췄다. 차오르는 감정이 목구멍과 가슴을 두드리는 불길한 예감에 주먹을 쥔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서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제 자리에 놓아둔 서류철을 집어들고,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 꾸역꾸역 나오려는 걸 삼켰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자기주장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이무스는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 날뛰는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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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호그와트 au
2015/01/05
트리위저드 시합 덕에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연회가 열렸건만, 찾는 사람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잘나신 호그와트의 챔피언님은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고, 망나니 동생녀석은 제 기숙사 녀석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벨져가 파트너로 데려왔던 여자애는 덤스트랭의 멍청이들에게 춤신청을 받아 홀에서 춤을 추는 중이었지만 벨져는 더이상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보여주기 위해 데려온 파트너였고, 두 곡이나 췄으면 충분히 가문의 영광이 될 터였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뒤로 묶고, 무도회 의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벨져 홀든은 열 넷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넘쳐흘렀다. 순수혈통 가운데서도 홀든이라 함은 귀족 중에 귀족이었고, 형제들 가운데서도 벨져는 귀족이란 어때야하는가를 몸소 보여주는 쪽이었다. 우아하고, 고상하고, 품격이 넘치는 귀족. 전쟁을 겪은 후론 머글태생이나 혼혈이라고 하는 잡종들이 많이 섞여들었지만 다른 순수혈통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벨져는 그들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벨져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격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편이었고,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잡종들과 순수혈통은 현격하게 구분되기 마련이었다. 불안을 느끼는 건 그들이 혈통만 믿고 나대는 나약하고 저급한 멍청이들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다. 물론 개중에도 조금은 봐 줄만한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벨져는 계단을 올라 연회장 안을 다시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기껏 옷까지 신경써서 챙겨줬건만 일찌감치 달아난 모양이었다. 벨져는 팔장을 끼고 계단을 내려가다 낄낄거리고 있는 동생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으악! 뭐하는 짓이야, 작은형!"
"루이스는."
"루이스? 우리 영웅님은 안 온댔어. 지금쯤 기숙사에 있거나, 아니면 도서관에 틀어박혀있겠지. 하여간 재미가 없다니까~."
예상대로의 대답에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썼지만 이글은 개의치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뺨도 붉고, 평소보다 더 들뜬 모양새가 한 잔 한 게 분명했다. 고작 열 세살짜리한테 누가 술을 준 건지, 다이무스가 바빠서 신경쓸 틈이 없으니 바로 꾀를 부리는 막내동생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자 갈기는 벌꿀색~."
"흥. 사고 치지 말아라."
"에이, 작은 형도 참. 됐으니까 가 봐."
"거기 너, 이리로."
루이스를 찾는다며 놀리는 대신 순순히 기숙사 문의 암호를 말해주는 게 아무래도 이미 살짝 맛이 간 모양이라 벨져는 주변을 둘러보다 옆 테이블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녀석을 불렀다. 턱을 치켜들고 손가락을 까딱이는 게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벨져는 상급생에게도 하대를 하는 사람이었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기자에게 둘러싸여 이글이 무슨 짓을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뻔했고, 루이스라면 또 모를까 그리핀도르의 다른 멍청이들은 같이 사고를 치면 쳤지 말릴 종자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빌어먹을 자식이 여기 있었으면 이럴 필요도 없지만, 하여간 만악의 근원같으니. 벨져는 한숨을 쉬는 대신 혀를 찼다. 그래도 녀석들과 자주 어울려다니던 후플푸프의 꼬맹이를 붙여두면 집안 망신은 피하겠지 싶었다. 벨져는 벙쪄서 달려온 녀석에게 이글을 잘 지켜보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연회장을 뒤로했다.
그리핀도르 남자기숙사의 뚱뚱보 여인은 예복을 차려입은 벨져를 호들갑으로 맞았다. 그걸 상대하느라 골을 썩이다 겨우 안으로 발을 들이자 캄캄한 어둠이 벨져를 맞았다. 밝은 조명에 익숙해진 눈이 적응을 못 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벽을 짚고 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이 어른거리고, 푸르스름한 달빛을 맞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먼 곳을 향하는 눈동자가, 갸름한 턱선과 목이 벨져의 눈을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스웨터에 면바지 차림이건만 요정 벨라의 피를 이었다는 보바통의 챔피언같은 건 순식간에 지워져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창틀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창밖의 눈을 보는 루이스는 어둠 속에 홀로 빛나고 있었고, 벨져는 그를 보며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제게 향하는 눈동자에 숨을 집어삼켰다.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야, 벌써 돌아왔..., 벨져?"
"하,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시길래 나오지도 않나 했더니. 파트너를 못 구해서 틀어박힌 거냐?"
"그러는 넌?"
별로 달갑지 않은 루이스의 반응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아무래도 그리핀도르의 녀석들이 기숙사 안에 무슨 향이라도 피워놓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녀석을 보고 두근거릴 리가 없거니와, 아름답다고 생각할 리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께서 친히 납셔주셨는데 반가워하지는 못할 망정 떨떠름한 얼굴을 한 루이스가 흘러내린 스웨터의 소매를 올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등을 덮고 있던 스웨터의 소매가 올라가며 드러난 손목에 침을 삼키다 여기까지 온 목적을 떠올리고 눈에 힘을 줬다.
"사람의 호의를 무시한 정의로운 그리핀도르의 영웅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겨우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겨우라니, 네 녀셕! 그게 얼마짜린데!"
벨져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며 빈정거리자 루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순간 열이 뻗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이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두어번 깜박였다. 벽난로의 불빛이 닿는 것도 아니고, 보름인 것도 아닌데 속눈썹이 떨리는 것까지 선명했다.
"오다 주웠다며."
"윽...!"
허를 찔린 벨져가 그대로 움찔했다. 영웅이네, 뭐네 해도 루이스는 성조차 없는 고아였고, 당연히 이런 연회에 입을 좋은 예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안 그래도 트리위저드 시합때문에 바빴고, 이글은 종일 같이 다닌다 해도 그런 데 신경쓸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레번클로의 반장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녀가 챙겨줬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녀 성격에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전남친에게 예복같은 걸 챙겨줄 리 없었다.
더구나 루이스는 무도회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다들 무도회 파트너를 구하느라 바쁠 때도, 여학생들이 각자 드레스를 준비하느라 분주할 때도 다이무스랑 도서관을 향하는 게 고작이었다. 트리위저드 시합이 시작된 이후로 다이무스 홀든이 친동생들보다 그를 더 가까이 두고 자문을 구한다는 건 호그와트 학생은 물론 보바통과 덤스트랭의 학생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후줄근한 꼴로 연회장에 나타난다면 다이무스는 물론 홀든과 호그와트의 위신에까지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제 형은 물론 교수들에 본인까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길 한 번 이겼던 녀석인데, 얼굴도 멀쩡한 녀석이 후줄근한 꼴로 다니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결국 벨져는 자신을 위해서,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 내키진 않지만 따로 주문을 넣었다. 그게 벌써 이주 전의 일이었고, 지난 주엔 벨져 앞으로 도착한 옷상자를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루이스에게 던져주었다. 죽어도 널 위해 준비했으니까 곱게 입고 나오라는 말은 할 순 없었기에 별 걸 다 생각하다 뱉은 말이 오다 주웠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믿다니. 이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멍청한 수준이 아닌가.
말문이 막힌 벨져가 초조해진 나머지 입술을 핥았다. 루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꺼내 보지도 않았나?"
"오다 주웠다며."
그걸 믿냐, 이 멍청아!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어떻게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지? 차라리 이글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다못해 이글 녀석이 이런 소리를 하면 한 대 칠 수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상급생이고, 그리핀도르고, 루이스였다. 어느 기숙사가 안 그러겠냐만은 슬리데린이 그리핀도르를 건드려봤자 오랜 앙금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벨져는 가문의 위신과 형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참았다. 참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잡종새끼같으니."
"시비를 걸러 여기까지 온 거라면 돌아가."
"하..., 사람이 기껏 준비해줬으면 고맙단 말은 못 해도 입어는 보는 게 예의 아닌가!"
벨져는 어느새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자식을 상대하고 있으면 느는 건 짜증과 두통밖에 없다. 루이스는 창틀에 앉은 그대로 미간을 찌푸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괘씸하기 짝이 없어 더 성질이 뻗쳤다.
"알았어. 입어보면 될 거 아니야."
"완전 엎드려 절받기가 따로 없군."
"절을 받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빈정 상하게 비비 꼬지 말고."
루이스는 가볍게 창틀에서 뛰어내려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아래에서 일주일 전 건네준 상자를 꺼낸 루이스는 무표정으로 뚜껑을 열었다. 벨져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재질의 예복은 얼마 전 퀴디치 선수복을 새로 맞출 때 잰 사이즈를 어렵사리 얻어내 맞춘 것이었다. 벨져의 안목은 높은 편이었고, 미적 감각도 뛰어났다. 분명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며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상자에서 조심스레 옷을 꺼내든 루이스가 벨져를 흘긋 쳐다봤다.
"문제 있나?"
"...한 둘이 아니어서 어디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흥."
벨져는 자신만만하게 코웃음쳤다. 껄끄러워하는 루이스의 표정에 조금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곤 포기한 듯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었다. 스웨터 안에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까지 벗자 벽난로의 주홍빛 불빛에 등부터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살을 보일 일도, 볼 일도 거의 없는 벨져는 마구 벗어제끼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무미건조하게 옷을 벗는 루이스의 표정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삐쩍 말랐을 줄만 알았는데, 팔뚝이나 옆구리 선이 제법 탄탄하면서도 얄쌍했다.
드레스셔츠를 집어들고 팔을 넣은 뒤 단추도 채우지 않고 소매부터 만지는 루이스의 얼굴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냥 옷을 입는 것 뿐인데, 살짝 내리깐 눈이 묘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벨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아노 건반을 치듯 팔뚝을 토도독 두드리며 누구의 것인지 건너편 침대에 걸터앉자 루이스가 단추를 여미고 바지를 벗었다.
평범한 검은색 브리프에 감싸인 엉덩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벨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셔츠 위로 도드라진 견갑골이, 바지를 입느라 등을 숙이는 바람에 드러난 허리가, 바지를 올려도 여전히 탱탱한 엉덩이가 벨져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은 물론, 아랫배 그 아래에도 피가 쏠리는 바람에 벨져는 다리를 꼬았다. 아무래도 그리핀도르 녀석들이 다른 기숙사 학생들을 골려주려 이상한 향을 피우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벨져가 입가를 매만지는 사이 루이스는 벨트를 채우고 베스트를 걸쳤다. 거기에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테일코트까지.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신은 루이스의 뒷모습은 가히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봐줄만 했다. 제 작품에 흡족해진 벨져가 크게 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넥타이를 매며 뒤돌아섰다. 평소에 짓는 얼빵한 표정 대신 서늘한 무표정이 검은 예복에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됐어."
"...뭐, 봐줄만 하군."
"그럼 이제 벗는다."
"뭐? 왜!!"
찬찬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상하던 벨져가 버럭 큰소리로 외쳤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기껏 맨 넥타이를 매만졌다.
"불편해. 연회장에 나갈 것도 아니고. 이정도면 성의 표시는 한 거잖아. 아니면 뭐가 더 필요해?"
"멍청한 새끼...."
벨져가 낮게 목소리를 끌자 루이스가 인상을 썼다. 벨져는 그를 마주 노려봤고,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루이스 주제에 자길 내려다보는 것도 영 탐탁지 않았다. 기껏 예쁘게 꾸며줬더니 바로 벗으려 하지 않나,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해도 이건 도리가 아니었다. 벨져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자 루이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싸우고 싶진 않다."
"누가 싸우자고 했나?"
"지금 네가 시비 걸고 있잖아."
"흥, 격이 떨어지는 상대와 싸울 가치도 없다."
"하아.... 그래, 다 봤으면 돌아가."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빈정이 상한 벨져는 몸을 일으켰다. 평소같았으면 이쯤에서 제 신경을 박박 긁었을 텐데, 순순히 제 말을 따르는 것도 모자라 피하려 드는 게 영 마음에 걸렸지만 계속 상대하다간 저만 우스워지는 꼴이었다.
"옷은 고마워.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뒤돌아서 나가려 걸음을 옮기는 벨져의 뒤로 루이스의 목소리가 닿았다. 벨져는 멈칫했을 뿐 뒤돌아보지 않았고, 루이스는 더 잡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벨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복도의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자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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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하나하키 2.
2015/01/05
다이무스는 내려온 지령서를 읽고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그 지령서를 가져온 타라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다이무스는 보고 있던 서류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어, 홀든. 그렇다고 내가 갈 순 없잖아?"
"지금 하고 있는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고 생각한다만."
"그거라면 걱정마. 어제 용기사 둘이 복귀했으니까."
타라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싱긋 웃었고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명왕조차 이기지 못하는 그녀를 다이무스가 이길 수 있을 리 없거니와,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다이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라는 만족한 듯 다이무스가 책상 위에 쌓아뒀던 서류철들을 들었다.
"이건 정의로운 쪽에 가져다줄테니까, 나머지는 되는 대로 괴짜한테 가져다줘."
"알겠다."
짧게 대답한 다이무스는 타라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울컥 치미는 욕지기에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런다고 막아질 리가 없었다. 책상을 짚고 등을 수그리자 바로 입에서 쏟아지는 얼음꽃이 사무실 바닥에 부딪혀 깨졌지만 다이무스는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날카로운 꽃잎들이 입 안의 살을 찢고 베어도 당장 숨을 쉬는 게 먼저였다. 다이무스는 가슴을 치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코로 마시는 걸론 부족해 입을 벌려 공기를 마시고 뱉기를 반복하며 눈을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구토때문에 따라붙는 생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다이무스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눈을 떴다.
입에 느껴지는 피맛에 물로 입을 헹구려 일어나려다 휘청이는 바람에 급히 책상을 짚었다.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이런데, 한동안 같이 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늘어난 인구때문에 전부터 코어레너드 관리 부서에서 인원 보충을 요구하긴 했지만 하필 그게 자신과 그가 될 줄이야.
코어레너드는 연합과 회사의 공동 관리 구역이기 때문에 아무리 적대세력이라 해도 일단은 협렵을 해야 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경쟁과 분란이 없겠냐만,은 같이 부대끼며 일하는 사람들인지라 지내다보면 정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코어레너드로 보냈던 이들 중 몇몇은 소속을 바꾸기도 하고, 종종 커플이 생기기도 했다. 위에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저를 고르고, 연합에선 그를 내보낸 것이겠지만 문제는 다이무스 홀든이 엽합의 영웅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애절하고 애틋하게.
다이무스는 이마를 짚고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들고 화장실로 향한 다이무스는 물로 입을 헹궜다. 물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렸지만 그보단 가슴이 더 따금거렸다. 세면대에 뱉어낸 물이 붉게 물들어 수채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전에 생긴 상처가 아물어도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입가를 매만지다 약통을 열었다. 상처를 낫게 하는 연고가 쌉쌀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아홉시 정각에 딱 맞춰 출근한 다이무스는 잔뜩 어질러진 책상들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야 필요한 서류를 제때 찾기도 힘들 게 뻔했다. 그와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라 다이무스는 혀를 내둘렀다.
"홀든?"
"아이스."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저도 그게 더 익숙하니까요."
루이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 한 반자 늦게 손을 맞잡았다. 불쾌할 법도 한데 루이스는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손을 놓았다. 차가울 거란 인상이 있던 손은 보통 사람들처럼 따스했다. 걱정과 달리 얼굴을 마주하고 손까지 잡았음에도 아직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전 손을 잡았을 때, 조금 더 붙잡고 있을 걸 하고 후회했지마 이미 늦은 후였다.
"잘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제 미리 들러서 만나봤는데 다들 일만 하면 그만이라더군요."
"코어레너드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 세력의 지역이라면 모를까, 공동 관리 구역에선 연합이고 회사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자칫 잘못했다간 잘못과 책임을 뒤집어쓰는 데다 적에게 자치권을 뺏길 수도 있는데 그 위험을 무릎쓸 필요가 없었다. 마침 들어오는 직원과 눈인사를 나눈 루이스가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은 저걸 쓰시면 됩니다. 바쁘다면서 저한테 안내를 해달라고 하던데 그래도 회사쪽 사람이 편하면 조금 더 기다리시죠."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귀찮게 할 거 없지."
서면상으로라곤 해도 이미 할 일도 숙지하고 있고, 코어레너드의 행정관 구조도 알고 있지만 다이무스는 순순히 루이스의 뒤를 따랐다. 루이스는 넓은 건물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문마다 걸린 팻말을 살피며 가끔 발을 멈추고 눈을 맞추며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다이무스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귀에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제게 향하는 붉은 눈동자에 심장의 박동이 거세졌다.
기분 좋은 설렘에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걷던 다이무스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표정을 굳혔다. 잠잠한가 싶더니 순간 격통과 함께 찾아온 역한 구토감에 다이무스는 입을 틀어 막았다. 다른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당사자 앞에서 누군를 향한 마음인지 빤히 보이는 꽃을 토할 순 없었다.
"홀든?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여기까지 하지."
다이무스는 올라오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참아내며 뒤돌아섰다. 입을 막고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다이무스는 변기를 잡고 참았던 얼음꽃을 토해냈다. 얇은 칸막이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려 고개를 쳐들자 피식 웃음이 샜다. 그의 친절은 제게 독이었다. 타는 목마름에 너무 달아서 마실 수밖에 없는 바닷물. 마셔봤자 달고 시원한 것도 잠시일 뿐,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걸 알지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는 제 어리석은 마음에 실소했다.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표정을 굳힌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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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하나하키 1.
2015/01/05
* 하나하키au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역한 구토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이 감각엔 익숙해질 수 없었다. 감출 수도 없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꽃은 감정의 산물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감정이, 나오지 못하고 꽃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는 건 듣기엔 제법 로맨틱하지만 겪는 당사자에겐 고역일 뿐이었다. 토하는 게 아무리 꽃이라 해도 입 밖으로 나오기까진 이물질에 불과한 데다, 목구멍을 역류해 넘어오는 감각은 그냥 토악질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큽, 컥...! 으욱...."
더구나 뱉어내는 꽃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꽃이 되고, 그 안에 담긴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형태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설득력있는 설이라곤 하지만 그걸 안다고 나아지는 건 없었다.
"커헉, 후.... 하...."
가슴이 울렁이고 목에 뭔가가 걸린 것 같은 감각에 헛구역질을 반복하다 마침내 남은 것마저 토해낸 다이무스는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며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졌다. 현기증과 함께 입안에 비린한 철의 맛에 고인 침을 가까스로 넘겼다. 이미 입 안은 상처투성이가 된 지 오래고, 낫는 것보다 빠르게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입 안이 제일 회복이 빠르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꽃을 토하다보면 멀쩡할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흘긋 제 입에서 나온 꽃을 바라봤다. 차라리 평범한 꽃이라면 나았을까, 다이무스는 심호흡하며 제가 뱉은 얼음꽃이 서서히 녹는 것을 지켜봤다. 보드랍고 향기로운 꽃잎 대신 투명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얼음꽃잎의 끄트머리엔 붉은 피가 맺혀있었다. 견고하고 아름답게 핀 결정꽃을 제 색으로 물들이지도 못하고, 이물질이 되어 붙어있을 뿐인 한 방울.
다이무스는 미간을 좁혔다. 혀를 움직여 입 안을 헤집은 상처들을 훑었다. 약을 발라 씁슬한 맛이 퍼졌지만 새로 생긴 상처를 찾는 게 먼저였다. 입맛을 다시자 비릿한 냄새와 함께 혀에 닿는 혈액에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 치솟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 토해내는 얼음꽃이 가리키는 건 너무 명백했다. 열음, 결정. 하지만 그는 연합의 영웅이고, 다이무스 홀든은 헬리오스 소속의 능력자였다. 감히 가까워져서도 안 되거니와 같은 남자인 그에게 이런 감정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래서 제 감정의 꽃은 마냥 예쁘고 향기로운 대신 이리도 아프고 아름다운지.
약으로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는 병은 담아 누르는 감정을 밖으로 꺼내 사랑이 이루어지면 낫는다고 하지만 다이무스는 차마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돌아올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거절뿐이었다. 난색을 표하며 거절하더라도, 제가 말을 꺼낸 순간 루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와 불쾌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에야 아예 꺼내지 않는 게 낫다. 그렇게 애써 부정하고 외면했던 다이무스였지만 매일같이 토해내는 얼음꽃 앞에선 나약한 남자일 뿐이었다.
꽃을 피우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향한 애정과 감정이기에 하루하루 그를 그리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 수록 힘이 들었다. 얼음꽃을 토할 때면 어김없이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꽃을 토하는 횟수도, 한 번에 토하게 되는 꽃의 수도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꽃을 토하는 건 이미 제 마음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났기 때문이요,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는 탓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가슴이 뛰고,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지만 그 모든 순간이 단 한 사람의 존재로 물드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아서 다가올 아픔마저 기꺼이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제게 슬쩍 지어보이던 그 미소를 기억했다. 그의 눈인사를 받기 위해 일부러 광장 한 바퀴를 돌아 늦게 출근하는 척을 했고 사흘에 한 번 읽지도 않을 책을 샀다. 그 붉은 눈동자도, 얼음이 성겨 생채기가 가득한 손도,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도 전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다이무스는 주저앉은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기억은 눈을 감자 더욱 또렷해졌다. 다이무스는 고통에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토하고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입 안이며 가슴이 찢기고 베여 만신창이가 되어도 원망조차 할 수 없는 먹먹하고 애틋한 감정의 이름은 분명,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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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2014/12/23
* 아마 이것도 미공개분 포함.
연합의 오후, 나이오비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엘리를 돌보며 휴게실을 지키던 토마스는 그만 난로 앞에서 깜박 졸고 말았다. 그 사이 그림을 그리며 놀던 엘리가 토마스의 얼굴에 낙서를 해놓고 까르륵 웃으며 우다다 뛰어가고, 토마스는 엘리를 잡으러 복도로 뛰어나갔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냅다 뛰어가는 엘리 앞에 문이 열리며 문과 아이의 머리가 부딪치기 일보직전, 토마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엘리!”
“히히, 엘리 몰라!”
“앗, 선배?”
“안녕, 토마스.”
“고생이 많군요, 스티븐슨군.”
열리던 문이 멈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는 다시 까르륵 웃으며 빙글 돌았다. 겨우 따라잡은 토마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엘리를 안아 올리자 다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순간 움찔한 토마스는 루이스 옆에서 미소를 머금은 요기 라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점에서 일하는 옷차림의 루이스에겐 어설프게 웃었다.
“루이스 언니 예쁜 옷! 엘리 마니마니 보구시펐어!”
“고마워, 엘리.”
엘리가 토마스의 품에서 루이스에게 양팔을 뻗었다. 엘리를 안아든 루이스는 제게 뺨을 부벼오는 애교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사람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훈훈한 광경에 요기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엘리가 루이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요기는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눈짓을 교환하고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버렸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토마스는 셋이 되고 나서도 편하게 입을 열지 못했다. 루이스가 병실에 있는 동안 한참 바빴기에 얼마 찾아가지도 못했던지라 오랜만에 보는 선배가 반가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무거운 감정들이 앞섰다.
“선배, 좀 어떠세요?”
“그럭저럭 괜찮아.”
“아, 있지이. 엘리가 빨리 나으라구 맨날맨날 기도했어!”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엘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칭찬을 받은 엘리는 제가 생각해도 뿌듯했는지 루이스의 품에 안겨 부비거리며 웃었다. 엘리의 천진난만한 말에 혼자 가슴을 졸이던 토마스는 루이스의 씁쓸한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제 동경의 대상이자, 언젠가 뛰어넘겠다고 생각한 목표가 무너졌다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는 루이스를 보는 게 더 마음 아팠다.
“선배…….”
“오늘 이 말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토마스는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그렇게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지만 지금 한 말은 믿기 힘들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거짓으로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믿음직하게 보였던 팔과 등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서, 언제나 동경의 눈길로 바라본 후드 차림이 아니라서. 나란히 걷는 걸음이, 전과 같지 않아서. 토마스는 느릿하게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고작 한 사람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너무했다.
“루이스!”
“핫, 언니!”
“안녕, 잉게.”
복도 끝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토마스와 루이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 나이오비는 루이스의 품에서 엘리를 빼앗아 내려놓고는 토마스를 다그쳤다.
“넌 생각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그만, 잉게. 토마스가 안 된다는 걸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야.”
“너도 그래! 얘가 아직도 갓난앤 줄 알아? 퇴원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나이오비의 불같은 성격은 토마스에게서 바로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배려하지 못한 제 불찰에 토마스가 얼굴을 붉히고 엘리가 울상을 지었다. 나이오비가 이러는 것도 다 자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루이스는 얌전히 그녀의 잔소리를 들었다. 나이오비를 말린 건 함께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레베카와 도일이었다.
그마저도 잠시 들른 것뿐이지만, 복도에서 이러지 말자며 휴게실로 돌아온 그들은 이내 소란스럽게 루이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질문에 다 대답할 수 없어 곤란해 하던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이 반갑기도 하고 드디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루이스 앞에 떳떳하지 못한 토마스는 휴게실을 오가던 사람들이 루이스를 알아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인사를 건네는 걸 멀찍이 떨어져 지켜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앤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배는 전설이 되고, 저는 영웅이 될 거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깨질 것 같지 않던 얼음성같은 그녀에게서, 연합에게서 영웅을 빼앗아간 그가 미웠다. 능력이 사라진다니, 그런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제 막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허무하게 망쳐버린 자신이 미웠다. 토마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날, 제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과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도 전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무엇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미안함에 눈물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거라는 걸 아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미숙함과 함께 그에 대한 원망이 끓어올랐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루이스가 그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겠지만 루이스는 아니었다.
점점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토마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제게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영웅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토마스는 제가 책임을 지고 연합에 도움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시간이라.”
“피터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또 올게.”
나이오비의 아쉬움 섞인 말에 토마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이스는 코트도 없이 일어났고, 밖에는 버린 물이 얼 정도로 추웠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이 나서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가, 같이 가요. 선배!”
“응?”
“그…, 저도 그쪽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원래대로라면 아직 더 늑장부려도 될 시간이지만 성치 않은 발목으로 빙판이 진 길을 가려면 전보다 서둘러야 했다. 매년 겨울, 눈이 내리고 빙판이 지면 마음 놓고 결정 슬라이드를 타도 되니 편하겠다고 하던 우스갯소리도 이제는 전부 과거의 추억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에스코트를 자청하는 토마스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워낙에도 세심한 성격이긴 하지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시종일관 주눅이 들어있는 그가 가여운 동시에 미안했다. 아무리 잊으라 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것도, 그 짐은 그리 쉬이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도 루이스 역시 잘 알았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토마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오랜만에 둘이 나갈까? 잘 부탁해, 후배님.”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토마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생긋 웃었다. 토마스는 팔짱이 어색한지 쭈뼛거리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고, 루이스는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토마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걸 슬쩍 바라보곤 넘어지는 척 그의 팔을 꼭 잡았다.
“미안.”
“아, 괜찮아요!”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가 팔짱을 낄 수 있게 팔을 내주었다. 팔짱을 끼며 자연스레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조금씩 차이가 나던 걸음이 같아졌다. 어색하던 기류 대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별 거 아닌 농담에 마침내 토마스가 웃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따라 미소지으며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며 걸었다.
별 거 아니지만, 루이스는 이렇게라도 토마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완전히 잊거나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을지라도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건 자신 하나로 족했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자신이었다. 애써 밝은 척, 제 앞에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토마스를 보고 있으니 자신의 오만이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카페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으며 속으로 쓴 속내를 삼켰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은 루이스가 마지막까지 능력자로서 가졌던 마음이자 다짐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이 모두를 구할 순 없다고 말해도 루이스는 그 첫 마음만은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비극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게 싫었다.
그러니 능력을 대가로 두 사람을 살렸으면 그리 밑지는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 루이스는 제게 소리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불쑥불쑥 튀어오르는 그 날, 병실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길게 숨을 토하곤 제 팔을 지지해주는 토마스의 온기에 조금 더 몸을 기대어 걸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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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2014/12/15
* 미공개분 추가
그 후로 벨져는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가지 않았다. 병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이글에게 루이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제가 얼마나 얼간이같은 행동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후였다. 이글이 가끔 흘리듯 내놓는 소식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미 그걸로 끝난 일이라면 더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고, 거부한 것은 그 멍청한 여자다.
그걸 다 아는데도 신경이 쓰이는 건, 분명 답지않게 처연한 표정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해버린 그 공허한 눈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벨져의 양심을 자꾸만 괴롭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날 그 병실, 희고 슬프게 빛나던 그녀가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으로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하긴 했지만 분노와 굴욕에 잠 못이루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안 좋았다. 왜 제 오만의 대가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짊어져야하는가. 왜 그 빚을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결국 멤돌던 상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은 벨져는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루이스의 목소리가, 표정이, 그 날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벨져는 분에 못이겨 젖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곤 검을 검집에 넣었다. 셔츠를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향한 벨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다짜고짜 찬 물을 틀었다.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것같은 냉기에 벨져는 몸을 떨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자기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주면 그만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 *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정중했다.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얼마 없기에 루이스는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등을 세워 고쳐앉았다. 병실에 하릴없이 가만 앉아있는 것도 고역인지라, 손님의 방문이 반가웠다.
“들어오세요.”
“실례하지. 잘 지냈나.”
“어제랑 똑같아요.”
은행 업무를 보다 퇴근한 듯한 다이무스는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권했고, 다이무스 역시 사양않고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가 깨어난 지도 벌써 이주. 그동안 다이무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루이스를 찾아왔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을 매번 내치기도 미안하거니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퍽 지루해 그의 방문을 허락한 게 열흘째였다.
“흠. 식사는 했나?”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네요.”
“제대로 안 먹었단 소리로 들리는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루이스는 저를 타박하듯 보는 다이무스의 눈빛에 대답 대신 슬쩍 웃어보였다. 어제도 했던 대화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원밥은 정말 맛이 없으니까요.”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군.”
제가 했던 소릴 그대로 돌려주는 무뚝뚝한 말투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동생이 둘인 맏형답게 사람을 챙기는 데 세심했지만 또 그만큼 단호했다. 루이스는 그의 두 동생들만큼 그에게 익숙하지 못했고, 투정을 부릴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식욕도 없고, 환자식은 정말 맛이 없었지만 결국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고 항복 선언을 했다.
“저녁은 꼭 다 먹을게요.”
“나머지 식사도 거르지 말도록.”
루이스는 빙그레 웃으며 이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작은 형때문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해주는 대로 내버려둬. 안 그럼 더 귀찮아질걸? 혹시 몰라, 사과도 토끼 모양으로 깎아줄지.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속 편한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요 며칠 다이무스 홀든을 겪어본 바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다이무스 홀든이 제 명의로 메이드와 하인이 하나씩 딸린 집 한 채를 해주겠다며 서류를 들고 왔을 때도 그렇지만, 루이스는 그의 이런 행동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몸이 먼저 움직인 것 뿐이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저를 찾아왔던 그를 떠올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양말고 말해라.”
“아뇨. 괜찮아요. 거기까지 신경쓰지 말아요.”
다이무스는 틈만 생기면 뭔가를 해주려했지만 루이스는 그 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능력과 맞바꿀만한 게 있을 리 없다. 더구나 루이스는 그에게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주는 모든 것은 갚아야 할 빚이 된다. 안 그래도 안타리우스가 다시 일어나고, 회사와 연합 안에서도 분쟁이 생기는 마당에 괜한 의혹을 사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걸 모를 다이무스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다는 건 분명 그 역시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그쪽은 좀 어떤가요.”
“...글쎄.”
두루뭉술한 질문과 답. 다이무스는 답하기를 회피했고, 루이스는 더 묻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큼.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쉬어라.”
“조심히 가세요.”
불편해진 자리를 먼저 피한 건 다이무스였다. 루이스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게 당연했다. 온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 며칠간 이어진 일상이었다. 루이스는 그를 붙잡지 않았고, 다이무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합의 검과 회사의 검. 그걸로 충분하다. 루이스는 거기에 괜한 채무관계가 더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열리던 것처럼 조용하고 묵직하게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풀썩 누워버렸다. 등의 상처는 아직 욱신거렸지만 가만히 천장을 보며 숨을 마시고 내쉬는 동안 차츰 가라앉았다. 손을 들어 얼음 결정을 만들려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능력은 묵묵부답이었다. 루이스는 멀끔한 제 손을 슥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 * *
귓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루이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그랬냐며 따져묻는 그의 얼굴엔 특유의 시니컬함도 여유도 없었다. 속내를 감출 생각도 않고 또 다시 깨진 자존심에 분노하는 벨져 홀든. 이성을 잃은 채 던진, 순수해서 더 알 수 없는 의문에 루이스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거 산에서 길길이 날뛰던 때도, 영웅이라 불리는 동안에도 그 승리를 얻은 건 전부 자신과 엔지의 조언 덕이라고 생각했지 그에겐 별 감정이 없었다. 자신과 동료를 죽이려던 이에게 정당방위로, 어렵사리 살아나갈 길을 만든 것 뿐.
그런데 왜, 토마스가 아닌 벨져를 감쌌을까. 병실에 누워있는 내내 그 생각을 했지만 끝은 언제나 한숨을 내쉬는 걸로 끝났다. 그저 평소처럼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다른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그 순간의 판단때문에 너무 큰 것을 잃고 말았지만.
루이스는 처음 깨어나던 순간을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아팠고, 그 통증에 제 가슴을 관통하던 날카로운 칼날과 자욱하게 깔리던 연기가 떠올랐다. 그 다음은 다시 칠흙같은 암전. 진통제와 수면제에 의존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깨어나고 잠들길 반복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루이스를 반겼다. 붉어진 눈시울의 앤지가 내뱉던 떨리는 목소리. 몰라볼 정도로 강해진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휴톤이 참담한 표정으로 낮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이스는 그 사망선고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고, 시트를 그러쥐며 결정을 맺으려 했다. 얼어붙어야할 시트는 루이스의 손 안에서 구겨질 뿐, 손에선 한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루이스는 병실 안에 걸린 온도계를 발견하고 다시 웃었다. 급격히 밀려드는 오한에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끌어안고 숨을 삼켰다.
이제와서. 왜 지금에서야. 순간적으로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떠오르는 동료들의 얼굴,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고 했던 맹세. 루이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충격이 너무 크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더니 정말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다. 제게 향하던 기대와 시선에 뭐라 대답해야 할까. 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곧 능력자로서의 삶이, 영웅이라는 이름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영웅이라는 이름에 따르는 책임과 기대에 짓눌려 괴로웠고, 그들을 저버릴 수 없어 힘들어하며 짐이 줄기를 바랐지만 이런 식의 끝은 아니었다. 제가 거리의 고아로 자라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름의 사명감과 벅찬 뿌듯함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고, 루이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던 능력을 잃었다. 그 상실감은 다른 어떤 걸로도 채워질 수 없었지만 루이스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쓰게 웃으며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병실을 찾아오는 이들을 맞았다. 한창 행동을 조심해야할 앤지는 세 번이나 직접 찾아왔고, 보통 사람처럼 온기를 머금은 손을 꼭 잡으며 연합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으니 걱정말라며 비서직을 제안했다.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잔뜩 붉어진 눈과 코를 하고 들어온 토마스는 애써 눈물을 참다가, 결국 채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전부 자기 때문이라며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같이 온 잉게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레베카는 루이스를 복돋아주려고 더 밝은 척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때가 다 되어 찾아온 트리비아와 이글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지친 트리비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잘 얘기하라고 휙 나가버리고, 답지않게 쭈뼛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리고는 루이스의 침대 가에 앉았다.
“좀 어때.”
“별로.”
“그..., 작은형은 왔다 갔어?”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이글의 진지한 목소리가 낯설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뒤통수를 벅벅 긁적이던 이글은 온몸으로 자신이 덩달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루이스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꾹꾹 눌러삼키고 고개를 가로저은 뒤 말했다.
“별로 탓한다거나 원망하지 않아.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아이씨, 지금 누가 잘잘못 따지재?!”
“그럼 뭘 해야 하는데?”
루이스의 날카로운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글은 눈을 크게 뜨고는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벨져 홀든은 목숨을 잃거나,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할 지라도 능력을 잃었을 것이다. 벨져를 대신한 시점에서 홀든은 루이스에게 빚은 진 셈이었다. 이글은 한숨을 내쉬며 입가를 매만졌다. 적잖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루이스에게도 불편했다.
“내가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지. 연합의 영웅님은 이치를 따지는 덴 젬병이니까.”
이글이 연합에 투신한 이후로 죽 서로를 봐 온 두 사람이었다. 이글은 루이스가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었고, 루이스는 이글의 한량같은 모습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았다. 처음엔 호기심, 그 다음은 호의.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동료의 유대. 이글은 함께 지내온 세월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루이스를 잃는다는 것은 곧 등 뒤를 지켜줄 믿음직한 동료를 잃는다는 말이었다.
이글은 루이스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 언제나 미련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랐다. 언젠가 바스라지고 꺾여버릴 지라도 그 등을, 영웅의 상징과도 같아져버린 후드를 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 도사리는 불안과 초조한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그 순간의 뿌듯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글은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루이스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했다. 그 중에 으뜸이어야 하는 사람은 물론, 이 자리에 없는 제 작은 형이었다.
“소식은 전해줄게. 안 그런 척 엄청 불안해하고 있거든.”
이글은 슬쩍 미소를 머금곤 주먹을 내밀었다. 공성을 만족스럽게 치르고 나면 으레 그러하듯이.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링거 바늘이 꽂힌 손을 쥐어 이글의 주먹에 맞부딪쳤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이글은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 그가 찾아왔다.
“하아....”
루이스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쁜 짓이라기보단 애를 울린 쪽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신경이 쓰였다. 차마 동료들 앞에서 내보일 수 없던 억울함과 불안,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절망을 그에게 쏟아부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상처입는 게 빤히 보이는 벨져 홀든이라니, 전 같았으면 쓸 데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등을 돌려 문을 나가기 전, 벨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때 그는 자기가 더 억울하고 아프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보였다. 꾹꾹 울음을 집어삼키는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그녀 자신 조차 의뭉스럽지만, 그래도 만나야 제 안에 또아리 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이제 곧 퇴원이니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도 신중히 생각해야 했다. 다이무스는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그건 받을 수 없었고, 공성은 못하더라도 연합의 일을 하거나, 서점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이글은 연합의 마스코트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건 이미 예전부터 하고 있는 일에 불과했다. 이런 시기엔 일자리를 구할 수만 있어도 행운이었다.
루이스는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밀린 집세와 새로 들어왔을 책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서류는 잉게나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겠지만 이런 사적인 부분까지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울적해진 루이스는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스며드는 익숙한 한기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찬 바람이 루이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흔들었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얼음 결정은 맺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며 제 속에 가둔 공기를 내보낸 루이스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한 번 잃은 것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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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2014/12/09
*마지막이 될 뻔 했던 미발 원고.
벨져는 걸음을 서둘렀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벨져는 정보를 부정했다. 제 앞을 가로막던 작은 몸과 시야를 붉게 물들이던 선혈과 그 뜨끈하고 비릿한 감각이 되살아나 입술을 깨물었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지던 다리와 힘없이 가늘게 흩어지던 머리카락이 지금도 느릿하게 흘렀다.
그 전부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몸을 던져 지킨 사람이 벨져 홀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원이 도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급로를 지키던 건 벨져와 연합의 다른 결정사 마에스트로였다.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토마스 스티븐슨은 실전이 처음인지 연신 불안해하더니 결국 뒤를 노리던 강화인간의 등장에 당황해 도움이 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라고 해도 이미 공포에 하얗게 질린 얼굴에 벨져는 검을 빼들었다. 사실 벨져에겐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네 명 째를 처리 했을 때였다. 급습을 각오한 것 치고 너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께름칙했다. 본디 기습은 두 번 통하지 않는 법. 벨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마에스트로에게 다가가려 발을 뗀 순간 쓰러진 강화인간들이 폭발하며 검붉은 안개가 퍼졌다.
재빨리 스카프를 풀어 코와 입을 막았지만 이미 몸의 반응이 둔해진 후였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서는 강화인간들은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뜯어고친 건지, 몸에서 태엽과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게 노인의 나무인형을 떠오르게 했다.
트루퍼가 해체되며 내뿜는 안개가 능력자를 강화시켜준다면, 이것들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한 번 더 복구되는 게 영 성가셨다. 핵을 완전히 부수지 않으면 동력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회복을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라 검 두 자루를 바투 쥐었다. 토마스가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에 제 가정이 맞음을 확신한 벨져는 확연히 둔해진 몸을 움직였다. 신체강화능력을 잃어도 홀든은 홀든. 겨우 기계 따위에 질 리가 없었다.
문제는 소형화된 기계들이 다 제각기 다른 패턴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감각에 입술을 악물며 두 번째 기계의 팔다리를 베어냈을 때, 멀리서 절그럭거리던 기계가 포탄을 쐈다. 원상태였다면 장치를 베어내고 그것마저 피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포탄에 맞은 벨져는 그대로 주르륵 쓰러졌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나머지 내상에 울컥 피를 토했다.
루사나 수도원에서 봤던 강화인간마냥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장착한 채 다가오는 기계가 하나, 또 다시 포탄을 쏠 준비를 하는 기계가 또 하나. 벨져가 이를 악물며 검을 쥐었으나 팔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벨져의 움직임을 더뎌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은 동시에 전에도 겪었던 참혹한 패배가 떠올랐다. 빠른 도약과 함께 흩날리던 머리카락, 결연한 빛을 띤 붉은 눈동자.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기억이 하필이면 뼈저린 오점이라니. 허무하고 어이없어 코웃음쳤을 때였다.
‘샤드!’
순간, 그 때가 떠오른 건 비단 벨져의 회상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쨍그랑,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포를 쏘려던 기계가 와르르 부서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은 여전히 벨져에게 향해있었기에 무릎을 세우고 검을 들었으나 순간 어찔하게 찾아온 현기증에 눈을 찡그렸을 때,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벨져의 얼굴에 튀었다.
비틀거리던 루이스가 피를 토하고, 다시 한 번 쨍한 파열음이 귀를 두드렸다. 그녀의 몸을 관통한 칼날이 기계팔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수상쩍은 안개를 내뿜기 시작했다. 부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가고, 루이스의 등에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다리가 무릎부터 털썩 무너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찰나의 시간이, 벨져에겐 늘어진 필름마냥 느릿하게 흘렀다. 단 일 초도 놓치지 않고 새겨진 기억은 벨져 홀든의 오만의 대가였다. 이미 한 번 그녀를 통해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이면.
급한 대로 재킷을 벗어 상처부위를 눌러 지혈을 해보았지만 이미 전방에서 구르다 온 루이스는 정신을 잃은 후였다. 지원부대가 도착해 그녀를 데려가기 전까지 벨져는 저를 감싼 멍청함을 책망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감정은 벨져 홀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빚을 졌다. 이번엔 그냥 오만함의 대가를 치렀다는 말로 넘어갈 수 없었다. 벨져가 그녀에게 치러야 할 것은 제 목숨값이었다. 그걸 알기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큰형을 만났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소식을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온 동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벨져는 말을 꺼내길 주저하는 동생을 채근했다. 참담한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글의 멱살을 잡았다. 죽었다는 말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 그리 여겼건만, 벨져는 마침내 입은 연 동생의 말에 순간 아득해졌다.
숨을 밭으며 실소를 흘리자 대번에 인상을 쓰며 저를 노려보는 이글의 표정에 손을 놓았다. 그럴 순 없었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라는 말에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무시하면 그뿐이었다.
도착한 병실 앞. 문 옆에 쓰인 그녀의 이름에 벨져는 숨을 골랐다. 문고리를 돌려 열면 그만인데도 쉬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려오긴 했지만 마주하는 데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벨져는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창에서 빛이 쏟아져 눈을 찡그렸다 뜨자 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흔드는 머릿결이, 그녀의 뒤에 퍼지는 빛이 눈이 부셨다. 바람에 실려 온 약냄새에 벨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오만했음을 시인했다.
능력을 잃었음에도, 루이스는 그 삭막한 병실 안에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너…!”
그림같은 풍경에 잠시 멈춰 섰던 벨져는 태연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그게 무슨 태도냐고 따지려다 다시 입을 다문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루이스의 태도 때문이었다. 제가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벨져는 순간 제 막내동생이 또 질 나쁜 농담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벨져가 진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벨져는 말을 골랐다. 도대체 이 사람을 어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죄책감을 닮은 온갖 착잡하고 꿉꿉한 감정들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이 이어졌다.
단조롭고 삭막한 병실 안, 루이스만 홀로 색을 띠었다. 푸른빛이 도는 잿빛 머리카락도, 흰 피부도, 그리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 루이스의 그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에 벨져는 마른침을 삼켰다. 침묵 속에 감정을 내보인 게 저뿐이란 생각에 분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이제 루이스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이냐.”
“알고 온 거 아니야? 부인하고 싶은 거라면 대답해줄게. 사실이야.”
딱 잘라 선을 긋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루이스를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그 벨져 홀든의 얼굴은 잔뜩 경직되고, 오만하게 타인을 내려보던 눈동자 역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결정사 루이스는 이제 없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 씁슬하고 아픈 미소에 벨져는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돌아가.”
단호한 축객령에도 벨져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루이스가 언뜻 내비친 그 뼈저린 상실감은 저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벨져는 그녀가 잃은 것을 되찾아줄 수도 없다.
“왜 그랬지.”
그래서 벨져는 물었다. 이대로 고분고분 루이스가 하는 말에 따라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하는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벨져에게서 고개를 돌렸던 루이스는 크게 숨을 내뱉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그녀를 마주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가까이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벨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이스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가 저를 구한 이유를 구했으나 끝끝내 답을 얻지 못한 벨져였다.
“글쎄.”
“얼버무리지 마라.”
“…너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누군가를 지키는 건, 습관같은 거야. 그 날부터 쭉.”
그 날. 벨져는 루이스가 말하는 그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말도, 지킨다는 것도 다 연합의 동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벨져는 루이스가 지키는 울타리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벨져에게 루이스는 유일무이한 패배를 안긴 사람이었고 벨져는 한 때 그녀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이었다.
서로의 목을 노리는 사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스와 벨져 사이엔 유대감이라 부를 것도 무엇도 없었다. 덕분에 벨져는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지는 동시에 설욕의 기회를 잃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증오와 분노가 섞인 말을 내뱉으며 원망하는 편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루이스를 대하는 건 그녀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우리가 그런 사이였나?”
“네게 받은 이름, 돌려줬다고 생각해.”
그래서 벨져는 일부러 날을 세웠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이번에도 자신이 될 것 같아 비아냥거렸지만 루이스는 전보다 더 두터운 얼음벽을 두른 채 벨져를 밀어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무엇도 바라지 않을 뿐더러 되려 오래전 진 빚을 청산한 거라 말하는 루이스 앞에 벨져는 무력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 한단 말인가.
“하, 건방떨지 마라. 이렇게 내숭떤다고 네게 남는 게 뭐가 있지? 내가 괴로워하길 바라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홀든? 원하는 게 있어서 꾸민 일인 거 아닌가? 얼마든지 주지. 그러니까 말 해!”
“윽…!”
성큼 다가간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올리고 소리쳤다. 환자고, 여성이란 것도 잊고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벨져에겐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차가운 눈동자에 잔뜩 일그러진 벨져의 얼굴이 비쳤다.
“없어.”
벨져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환자복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우악스런 멱살잡이에 끌려왔던 루이스는 목 언저리를 만지며 콜록거렸고, 벨져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움찔 입가를 씰룩였다. 흐트러진 환자복 안으로 흘긋 보이는 붕대와 손목에 꽂힌 바늘, 피가 역류하는 튜브. 워낙에도 희긴 했지만 백지장처럼 핏기가 가신 얼굴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벨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콜록, 흐…….”
제가 한 짓이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선 벨져는 제 분에 못이겨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한 상대를 앞에 두고 길길이 날뛰었던 건 그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그 때는 상황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왜, 잘 된 거 아냐?”
침착함을 유지하던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 벨져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젠 ice도, 영웅도 죽었으니까!”
악을 쓰듯 내뱉는 말은 그녀의 결정검만큼이나 날카롭고 시렸다. 벨져를 구한 대가로 루이스가 치른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신경을 다친 채로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다시는 뛸 수 없다고도 했다. 사이퍼에게 능력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아주 잘 알았다.
힘을 바라며 모여드는 비능력자들, 그 욕망을 이용한 조직. 전쟁 이후로 꾸준히 그들을 쫓았던 벨져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전쟁 이후로 책임과 기대를 떠맡으며 영웅이 된 사람이었다. 영웅 루이스가 벨져 홀든을 구하고 능력을 잃었다. 사실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신문 1면에 실릴 헤드라인으로 이것보다 더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벨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이게 질 나쁜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깨고 말 하룻밤의 꿈이라면 그걸로 끝일 텐데. 하지만 입을 앙 다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은 이게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일깨웠다.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친 그녀 앞에서 벨져는 입이 두 개 라도 할 말이 없었다.
“비웃으려면 지금 해. 어차피 앞으로 계속 들을 테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뒤돌아섰다. 도망치듯 병실을 나와 어떻게 쉬었는지 모를 숨을 토해냈다. 최악.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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